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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한지 일주일, 혹시하는 걱정끝에 
오늘 본격적으로 싹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적정 발아온도 25도를 유지해야하지만 
전열선을 깔지 않고 
모종터널을 밤에 담요로 덮어주지도 않다가
혹시하는 마음에 어제부터 담요를 덮었더니
오늘 당장 싹을 틔웠습니다.

모종 농사가 농사의 절반이라고들 합니다.
그만치 모종을 건강하게 잘 키우는 일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여린 모종이다보니 실수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야간은 영하로 떨어지고 
한낮은 하우스 비닐을 걷어주지 않으면 
쉽사리 50도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마을에서도 꼭 한해 한두명은 실수로 모종을 얼려죽이거나
삶겨 죽이는 집이 생깁니다. 
날이 쌀쌀하고 구름이 많아 비닐을 걷지 않고
밭에 일하러간사이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하면 이내
하우스내부 온도는 50~60도까지 올라가 
애써 키운 모종이 삶겨죽기도 하고,
밤사이 부는 바람에 하우스 비닐이 찟어져 
모종이 얼어죽는 사태가 나기도 합니다.

올해 봉봉 밤호박 모종은 
싹수가 벌써 좋아보입니다.
아무런 실수없이 잘키울 수 있기를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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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끝났지만 향후 정계개편 과정이 더 흥미진진할 것 같다. 짧은 환호는 지나가고 각 세력들마다 생존을 위한 긴 모색의 시간을 보내게 될것이다. 


새누리는 구심을 잃고 몰락의 길을 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여왕께서 공천권을 통해 목숨줄을 쥘수 있었던 시절도 끝이났다. 머리를 조아리던 내시들이 이젠 고개를 쳐들고 여왕한테 대들고 각자도생의 길을 도모할 것이 확실해보인다. 영남 지역당의 지배력은 줄어들고 그 본색은 더 선명해진 새누리가 살길을 어디서 찾을까 궁금한데 아마 초록은 동색이라고 호남 지역당을 천명한 안철수와 딜을 할려고 들지도 모르겠다.


국민당의 선전을 띄우기하는 분위기가 많은데 압승이나 돌풍 운운하는 평가는 인정하기 어렵다. 호남에서의 승리조차 적극적 대안세력으로서가 아니라 민주당이 그동안 죽쑨것에 대한 경고이자 공천 실패의 반사이익에 가깝다고 느낀다. 그조차도 향후 전리품 나누기가 시작되면서 천씨 정씨 안씨 등의 이전투구가 예상된다. 간판스타인 안철수의 근본없는 호남 수장 자리도 위태하기 이를데 없고 이념적 구심도 없는 국민당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아보인다.


일단 문재인은 내가 살고 있는 경상도에서 전라도 앞잡이라는소리는 안들어도 되게 되면서 전국 정당화되었으니 일단 전도가 유망하다. 호남에서 지지 얻지못하면 정계은퇴하겠다는 발언은, 40석이하면 책임지겠다던 안철수 발언이랑 별반 다를게 없지만 그분의 결벽증적인 인격때문에 조금은 걱정스럽다.


하지만 호남에서의 패배보다 서울경기 부산경남 등에서의 승리가 워낙 값져 반문재인 세력이 호남에서의 패배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관철되기 힘들 것이다. 천정배 안철수 등과 같은 모리배의 호남 이간질과 무관하게 그동안 호남이 상처받고 아쉬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치유하기위한 노력이 경주된다는 전제에서지만 오히러 호남은 대권가도의 가능성이 확인된 문재인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주관적인 기대지만 더민주를 중심으로 합리적 보수세력이 결집하여 새누리내 극우 파시스트 잔당들을 몰아내고 집권하면서 늘 시급한 시대적 과업에 떠밀려 찬밥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당, 녹색당 같은 진보정당이 양립하며 경쟁하는 그런 정치판을 꿈꿔본다. 문재인이 극우 파쇼세력과 싸

우는 합리적 보수의 마지막 대통령이길  그리고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진검승부를 볼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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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일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호박 파종을 위한 모판하우스를 설치하고

이런저런 사전준비끝에 

무려 만2천 포기의 호박을 파종하고 나니

온몸이 쑤시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쉴수 있는 계절이 아닙니다.

4월이 가지전에 2천평 사과밭도 돌봐야하고

호박심을 5000평의 밭도 장만을 해야합니다.


작년 겨울 미처 처리하지 못한 배추밭 비닐이며

분사 호수 등을 걷어내고,

퇴비와 석회 등 토양개량제를 뿌리고

로타리를 치고

이랑을 짓고 비닐 까지 다 씌운 뒤 

5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만이천포기의 호박 모종을 본밭에 옮겨 심어야합니다.


오늘 까지 사과밭을 그럭저럭 손을 보고

호박 파종까지 마무리하고

그리고 본밭의 비닐과 호스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일손을 놓치지 않고 

따라잡은 셈입니다.

이제 조금은 한숨 돌리면  20여일동안 

호박 모종을 도보면서 밭장만만 하면 됩니다.


비닐 수거를 완전히 끝내고

경운기를 타고 흙범벅으로  집으로향하는데 난데 없는 소나기가

등짝을 때립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3일꾼이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와인도 딱 한잔씩만하고

다 돌아간뒤 혼자 책상에 앉으니

같이하신 분들이 고마워 혼자 웃습니다.

라티는 같이 살아가야하는 팔자라 그렇다치지만

멀리 서울에서 급한 일 도와주신다며 내려오신 송상호 조합원님

이 두분과의 인연은 나에게 큰 행운 입니다.

살아가면서 다갚지 못한 빚이지만

이런 빚은 좀 더 지면서 살아가도 좋을 듯합니다.

두분과의 인연에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 흐뭇하게 마무리합니다.

1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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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파종을 호박으로 시작했습니다.
작년은 황기부터 녹두, 팥, 수수에 메주콩까지 덤으로 하고
호박과 배추농사에 사과 농사가 주농사였지만
올해는 이런저런 작목을 다 포기하고
오직 호박과 사과와 배추 농사만 짓기로 했습니다.
그로다 보니 사과 2,000여평은 그대로지만
호박농사는 5,000여평으로 늘어났습니다.

우선 누렁호박 500포기, 붉은 미니밤호박 100포기등
4종류의 별종 미니밤호박을 심고
단호박 3,000포기에 밤호박 7,000포기해서
약 1만1천포기를 심을 예정이니
여유분까지 해서 약 1만2천포기정도를 포트에 파종을 해야합니다.
오늘 오후에 우선 7,000여개를 파종했습니다.
사실 오늘 그냥 조금만 시작하려고했었는데
멀리서 송상호 조합원님이 파종을 도우러 오신김에 욕심을 부려
절반넘어 파종을 진행했습니다.

모종이 발아하면 곧 예약판매에 들어갈 계획인데
예약구매조합원님께는 붉은 미니밤호박 등을
추가 증정하는 이벤트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올해 호박 농사 대풍을 빌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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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에 봄꽃이 만발합니다.
봄기운이 넘쳐나는 산천을 바라보니 
긴 겨울을 견뎌낸 온갖 생명들이 고맙습니다.

바람에 냉기가 가쉬고 온깃을 스미는 바람조차도 
따사로운 봄햇살을 닮아 포근합니다.
이렇게 봄이 완연해지는 만치 농부의 마음은 바빠만 갑니다.

사과농사와 호박 농사
그리고 가을의 김장배추 농사가 전부이지만
결코 단촐한 농사는 아닙니다.
밤호박과 단호박 그리고 누렁호박을 포함해
만포기의 호박 모종 농사를 곧 시작해야합니다.

파종적기가 4월 10일 전후다보니
육묘하우스며 상토며 트레이까지
미리미리 준비를 마쳐야합니다. 
다행히 요 몇일 서둔 덕분에 일단 파종을 위한
완벽한 준비를 끝내었습니다.
이제 사과밭 전지 마무리를 한뒤
호박종자 파종을 하고 나면 
육묘기간 내내 본밭에 퇴비를 뿌리고 로타리를 치고
골을 짓고 비닐 멀칭을 하는 작업을 4월 말까지 진행하면됩니다.

올해 봄은 봄 가뭄이나
모종이 뽑혀나갈만치 강력한 돌개바람도 없이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파종도 하기전에 7월의 호박 수확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1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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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저, 2012,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은국내에서 금속공학을 전공(고대 1982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하여 신학, 독일문학, 철학을 공부하여 1994년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을 획득, 이후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대학에서 강의를 해 왔고 현제 베를린 예술대학에 재직중이다.

그는 2010년 발행한 [피로사회]를 통해 독일의 베스트셀러 문화비평가로 부상했고, 한국에는 2011[권력이란 무엇인가]로 처음소개 되었다. 주요저술로는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죽음의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하이데거입문], [헤겔과 권력] 등이 있다.

이 책에서 피력한 한병철의 현실 인식을 보면 신자유주의의 병리학적 징후로 우울증을 이해하고, 우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의 과잉에서 찾고 있고, 이 문제의식이 전편에 퍼져있다.

 

2014년 차이트지의 밀스 보잉 등과의 인터뷰 기사 : 현실인식과 실천적 함의를 보여주는 언설

-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독재하에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경영자입니다. 가시적 악의 소멸을 주장. (논란의 여지)

- 자기가 강제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그 강제를 자유로 느낀다면 , 그건 자유의 종말입니다. 1980년대에는 인구조사를 시행하려고하자 모든 사람이 시위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 구조상으로는 지금 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 페이스북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합니다. 경작하라.... 결국 수확을 걷어가는 것은 봉건 영주들이죠. 이것은 소통의 착취입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물적 자원 때문에라도 어쨌던 이대로 계속가지는 않을 겁니다. 원유는 50년 정도면 고갈됩니다...”(현실의 변화가능성을 인정?)

- 그래서 레닌도 말했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라!”(낙관, 진보주의?)

- “이 세상에 대해서 기뻐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앎도 없고 정보만 있어요.”(비관, 염세?)

 

[피로사회]

피로사회는 작은 판형의 70여쪽의 책으로 총 7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7장중 전반부 4장까지 요약 발제.

신경성 폭력

[피로사회]의 첫문장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작자의 저술이 현대문명에 대한 문화병리학적 진단서 임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 병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점염성이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로 면역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였다. 냉전의 종식으로 대표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된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제시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이질성은 탈경계 과정에 걸림돌이 될뿐이다. 그것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늘 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상태로 특징지어진다. 문화이론 담론과 생활감정자체를 지배하는 혼성화 경향 역시 면역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는 부정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런 부정으로 인해 파멸되기 대문에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신경성질환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에 따른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한 병리적 상태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온다. 보들리야르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상태와 같은 발언은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체주의를 면역학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이론적 약점을 드러낸다.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반응이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신경성 폭력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폭력이론은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서술하려는논리적 혼란에 빠져 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러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고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와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 깃든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고,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푸코규율사회는 더이상 오늘날의 사회가 아니다. 21세기의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사회의 주민은 더이상 복종적 주체라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따라서 통제사회같은 개념은 더이상 적절성이 없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현대는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은 사라지고 할수있다는 긍정적이 이를 대체했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이는 생산성의 최대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일정한 수준의 생산성에 이르면 금지의 부정성보다 성과의 패러다임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능력의 긍정성이 훨씬 더 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란 축면에서 당위와 능력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한 규율적 행위 조종 모델에서 자기주도성과 자기 책임을 요규하는 규범으로 대체하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고,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고 본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에도 있다. 애랭베르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자기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과 우울증을 초래한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부담의 증가도 기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한다. 그렇게 나온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퇴화이다. 먹이를 먹으면서 주위를 살피는 동물의 수준이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좋은 삶에 대한 사색은 불가능하고 날이 갈수록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 강화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빼았겼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는데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사물의 향기를 볼수있다던 폴 세잔은 깊은 사색적 관찰을 통해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고 할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다닌다.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세계앞에서 현대인은 무력하다. 과잉활동성속에서 사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에게 관조적 요소가 제거되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활동적 삶

한나 아렌트[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한나 아렌트에게 행동의 가능성은 탄생을 지향한다. 기적은 인간 탄생 자체, 그리고 인간이 그러한 탄생의 힘을 바탕으로 행동하여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에 있다. 이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며 탄생은 인간에게 그러한 행동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리하여 행동은 종교적인 차원으로 숭화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리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제작과 행동을 아루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진다.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익명성 속에 자아를 용해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고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상태에 빠져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해답을 요구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 상실하고 극단적 허무에 직면했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났다. 노동하는 동물이 유적 노동을 하고 있다면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났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다. 이로인해 허무는 더욱 강화되었다. 서사성이 사라진 죽음에 직면한 벌거벗은 생명은 그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벌거벗은 생명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삶은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져 있다.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벗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죽지않는 자들이다. 여기스 사케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차제로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 날 진행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주인은 스스로 노에가 된다. 그는 포로이자 감돆관이며 희생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주인이면서 노예가 된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제 인간은 우울증에 빠져 탈진하여 무력해진 나치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에 대항하는 어떤 효과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사유의 힘을 손상받지 않은 소수의 행동에 호소한다. 노동하는 동물에 대항하는 활동적 삶을 피력하던 한나 아렌트는 결국 사유의 힘, 철학적 사색의 힘에 투항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되어 있으면 근대적 호라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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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면역학적 적은 과연 사라졌는가? 자본 가노동자의 대립은 내재화되어 나 스스로 경영하는 자본가이자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되었다는 언설의 현실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자본의 탐욕, 부의 편중, 환경의 파괴, 위험의 증대, 민주주의의 훼손 이 모든 현장에 투쟁의 대상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행동하지 않는가는 정치심리학적 문제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하는 것 아닐까? 몰라!

성과사회패러다임은 이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하버마스 마르쿠제 등에 의해 제기된 자발적 복종, 체제내화, 그리고 그람시의 헤게머니 이론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특히 푸코의 파놉티콘이론이 규율사회의 징표라면 후기의 통치성은 자발성에 포박된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를 분석하는 틀로 성과사회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병철 입론의 독특성은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하는것이 아닌가? 대중적이고 문학적인 언설로 철학적 주제를 다룬 점 그리고 동아시아를 통한 서양문화의 비판(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적 입지를 찾는 것으 도 다른 과제일것.

자기착취란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서가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장정일) 노동자는 자기 경영의 강박때문에 노동강도를 높이고 일거수일투족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자본증식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할 뿐이다. 노동자는 자기경영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자본의 노예이다.

그의 문화병리학적 진단의 심오함은 실천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가장 중요한 주체의 문제에서 한병철은 무력하다. 개별화되고 파편회된 자기경영의 주체인 개인은 우울증의 원인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 힐링에 몰입하는 현대적 개인을 정당화한다. 늘 그렇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물론 한병철이 사회정치적 실천을 등한시하는 입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화병리학적 사회진단은 현실 이해의 출발점이지 실천적 함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병철의 한계가 아니라 문화병리학의 한계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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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지난해는 다사다난했다고 한다.

나에게 지난해 역시 그랬다.

봄가뭄과 고라니로 고생만 한 밤호박 농사,

다시 초가을 가뭄과 초겨울 장마 그리고 늦더위로 역시 고생만 한 배추농사로

한해 참 힘겹게 보냈다.

그리고 한중 FTA 등으로 농업의 사회적 여건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위해 

동분서주한 농민회 활동과 11월 14일 전국민중대회를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던 투쟁 그리고 백남기 농민형제가 쓰러진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농성...

그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있는 봉봉협동조합의 출구없는 경영악화,

비젼과 에너지가 고갈된 10몇년을 종사해온 비나리마을 공동체 사업...

이 모든 것이 지난 3월 27일 봉봉협동조합 총회를 기점으로 일단락지어졌다. 

지난 일은 다 묵은 해의 기억들이 되었고 이제부터 만들어나갈 시간은 고스란히 내 손아귀에 있으니...

총회가 끝나자 마자 바로 배낭을 쌌다. 

지리산 장터목 1박을 시작으로 이후 일정을 정해나갔는데

막연히 가보고 싶었던 여수 밤바다에서 1박,

그리고 유년의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 마지막 1박을 진해 군항제 전야제에 맞첬다.



늘 산언저리에서 얼정거리기만 했던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산을 통해 사람과 역사를 느끼고, 

천왕봉에서 넘실넘실 펼쳐진 산의 바다를 바라다 보며

고갈된 삶의 에너지를 채웠다.

산사람의 함성을 들으며 그들이 꿈꿨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리고 그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세상은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고 

그들 산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비장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삶과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장터목 대피소의 1박은 불편했지만 설레였고

백무동의 무미건조하고 가파르기만 한 등산로는 나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오르락내리락거리면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살만한 삶을 기대하게 하는 기운을 전해주었다.


0123456


지리산을 서편으로 반바퀴 돌아 두시간에만에 도착한 여수 밤바다.

새로운 삶을 향한 모험이 시작되는 항구의 서정에 끌려 도착한 여수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설레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갯내음 맡으며 바닷가를 걷고, 한상 가득 해물이 넘치는 밥상을 받고

도시와 바다가 만나는 어시장을 스쳐지나 항구의 밤을 만끽했다.

난생 처음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낯선 젊은 친구들을 만나 

여행의 설레임과 삶의 희망들을 나누었던 기억은 참 오래갈것 같다.

나에게 난생 첫 게스트하우스가 된 여수 곰하우스가 번창하길 빌어본다.



http://gomguesthouse.modoo.at/


승용차를 버리고 케이블카와 버스 그리고 걷기로 여수의 하루를 보냈다. 

돌산도와 향일암, 그리고 오동도... 어디를 가도 바다는 시원했고, 마을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산세와 만난 바다가 멋진 해안선을 만들고

갈매기는 파도소리에 맞춰 생명의 자유를 춤췄다.

봄햇살과 바닷바람 맞으면 걷는 돌살도의 길은

언젠가 다시 한번 더 멀리 오랜시간 걷고 싶은 위시리스트로 남았다.



여수와 순천 그리고 진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지는 해를 맞으며,

유년의 기억을 찾아 진해로 향햤다. 

1963년부터 시작한 군항제는 한해 먼저 세상에 태어난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이제 54회를 맞았단다.

화려한 불꽃놀이로 시작되던 군항제는 전국의 거리예술가와 스커스단은 물론

소매치기와 야바위꾼이 다 몰려 세상의 온갖 볼거리와 먹을 거리 그리고 즐길거리로 가득찾던 

시절로 나의 유년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유년의 기억 뒤엔 한번도 군항제 전야제의 불꽃을  볼 수 없었다.

모처럼 만든 기회에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와 함께

지난 기억을 되살리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진해거리를 나섰다.

진해의 거리를 걷고 ,어깨 부딪고, 먹고, 놀았다. 



 

3박4일의 지리산-여수-진해 여행을 마쳤고,

다시 한해의 농사와 농민회 그리고 봉봉협동조합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지쳐 스러질것 같은 몸에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졌고

다시 힘겨운 일년을 견딜 자신을 얻었다.

여행은 참 좋다. 세상의 모든 행위에는 후회를 남긴다. 사랑조차도 그렀다.

하지만 오직 여행만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후회되는 여행은 없다.

자 다음 여행을 위해 올 한해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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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4905

“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고 하노?”

기사승인 2016.01.06  0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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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이 본 우리농촌

 
 
▲ 송성일(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배추농사를 끝내고 마지막 남은 콩 수확은 밀쳐 둔 채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으로 나섰다. 내가 조사해야할 가구 수는 몇 달 전 있었던 인구총조사에서 농가로 분류된 2개 리의 70여 가구였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대상 가구 중 적지 않은 농가는 조사가 불가능했다. 그 몇 달 사이 돌아가신 분이 세 분이나 계셨고 한 해 농사를 억지로 끝내놓고 몸져누워 대화를 나눌 수 없거나 병이 위중해져 병원에 계신 경우도 여러 집이었다.

조사를 시작하고 한 집 한 집 농사살림을 들여다보니 더 놀라웠다. 같이 농사짓고 살아가면서 막연히 느끼고 있던 그 이상으로 우리 농촌의 살림이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50대 이하의 농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60대 이상 농민 대부분은 일 년 벌이라고 해봐야 500만원을 채우지 못했다. 그 500만원조차 비닐, 농약, 비료대 제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노인네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저 밭을 놀리면 우야노?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부쳐야제.”

물려받은 내 논밭 묵히지 않고, 도시에 있는 자식들한테 고추며 깨라도 한줌씩 보내주는 재미에 견뎌내고 계셨다. 평생 논밭을 일궈 우리 먹거리를 공급해 오신 늙은 농부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주지 않는 세상에 분통이 터졌다.

농사 뒷정리를 하고 있는 밭에서 만난 한 어르신으로부터는 정부를 대신해 타박을 들었다.

“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꼬 하노? 조사해봤자 도움 주는 거 아무것도 없더마는….”

집으로 마을회관으로 돌며 겨우 수소문해서 만난 할머니 한분은 영감님 돌아가신 뒤 혼자 수박농사를 지으신다며 산골짜기 밭까지 찾아온 조사원을 반갑게 맞으셨다. 논은 묵힌 지 오래되었지만 밭을 올해까지 어떻게든 농사를 지었는데 내년에는 남에게 줘야겠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하는 사람구경에 이런저런 묵힌 이야기 나누고 싶은 눈치였는데 애써 무시하고 돌아서고 나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젊은 귀농자가 있어 마을이 보전되고 있는 경우도 전업으로 농사를 짓는 분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법적으로 300평 농사만 지어도 농민으로 분류가 되지만, 실제로 농사를 지어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는 전통적인 의미의 농민은 몇 명되지 않았다.

이번 조사를 통해 임종직전의 병들고 쇠락해진 농촌현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지만 결코 절망감만 느낀 것은 아니다. 사람의 정, 마을공동체의 온기를 보전하고 있는 늙은 농부의 거친 손은 우리가 절망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손사래 치고 있었다. 우리 농민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와 같은 온기가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키고 우리 농촌 공동체를 가꾸는 일이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

송성일(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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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습니다만

10월 17일 이재명시장 봉화 초청한마당 소식 올립니다.
이번 행사는 걱정과는 달리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많은 분들의 참여로 정말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누가 말씀 하셨듯이 인구 3만4천의 봉화에서 300명의 청중이 모였는데
서울 인구로 따지면 10만 군중이 모인거랑 진배없었습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 
'우리'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인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지리적 오지이지 정치적 불모지 봉화에서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군민의 폭발적인 관심으로 강당이 미어터지고,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농민회회원들의 찬조와 자원봉사로
너무나 풍족하고 넉넉한 잔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워지고 갈수록 민주주의마저 후퇴하는 암담한 현실이지만
그럴수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더 절실해지는가 봅니다.

가슴벅찬 경험을 선물로 남겨주신 
이재명시장님과 일행 그리고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농민회 경북도의장님과 농민회 동지들, 
임미애 새정연 혁신위원님과  의성의 김현권활동가님, 
경북의 참기자 안동 MBC 이정희님, 그리고
대경 미권스 회원님들의 정성 또한 꼭 기억하겠습니다.


뒷담화를 덧붙이자면

1. 시간조절을 못할 만치 열기가 끓어올라 중간에 어쩌지도 못하고 
초청 가수이신 위대권강미영님을 무려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것은 진행자의 뼈저린 아픔이었습니다.
이런 행사는 정해진 시간스케줄에 따라 진행하기 힘든다는 걸 새삼 배웠습니다.

2. 그리고 나중에 보니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싶어했습니다.
물론 시장님 말씀을 듣고 싶어 참석했지만 질문을 빗댄
자기이야기를 하고싶어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 행사에 적합한지 아닌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떠나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싶은 열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게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시장님께서 답변을 짧게하시고,
정해진 시간안에 가능한 많은 질문자들이 발언하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이번 봉화 초청 한마당은 가능하면 가볍게 농업 농촌 관련한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싶어 일반적인 질문도 몇개 준비하고 했는데
예정에 없었던 이이제이 이동형님의 출연과 시간 부족으로 
버벅거리고 말았던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덕분에 지척에서 이재명시장님뿐 아니라 이동형님도 한꺼번에 뵙게 되어
참 영광스러웠습니다.
나중에 다시한번 기회를 만들어 
꼭 봉화가 아니라도 안동이나 의성 등에서
농업농촌관련해서만 강연과 대담을 하신다면 청중으로 꼭 참석하겠습니다. 

4. 봉화지역사회에서는 전체적으로 호평이었고 
특히 봉화군농민회의 활동력을 높이는데 기여를 한 행사였다는 자평입니다.
덕분에 행사전후 농민회가입자도 여럿 있었고,
정치에 대한 그리고, 민주주의와 '다른 정치'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판단됩니다.
문제는 앞으로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이 성과를 지역사회의 정치적 활기를 높이는데 어떻게 활용하고
후속활동으로 이어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같이 만들었던 신나는 한판 잔치는
지역과 농업 부활, 민주주의의 재건, 복지공동체의 건설이라는
꽃으로 피어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이재명 시장님, 300여분의 참석자, 
후원자, 자원봉사자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재명 시장님은 
민주주의라는 무기를 들고 
결기있게 싸워나갈 정치인,
새로운 세상에 대한 따뜻한 비젼을 가진 정치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뜨거웠던 기억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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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정부 수매를 19일 부터 한다고한다. 지지난주부터 고추 보유량 조사를 하라고 해서 수매에 응할 의사가 있는 동네 주민들로부터 신청량은 받아 농협에 제출했다. 그런데 지난주 다시 연락이 와서 배정물량이 많으니 보유량을 부풀리지 말고 실보유량을 신청하면 거의 전량 수매가 될것이라고 재조사를 하라고했다. 사실 고추 정부 수매가 농민이 원하는 양만치 된 적이 없기 때문에 농민들은 수매를 원하는 양에서 몇배로 부풀려 신청을 하는게 관례화되어 있다.

올해는 배정량이 많아 신청량 거의 전량을 수매한다고 하니 실보유량을 알려달라고 해서 조사결과를 농협에 제출했다. 그리고 오늘 농협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수매 물량이 농가별로 배정되었고 수매고추를 담을 푸대가 나왔으니 해당 주민들께 나눠주라고 했다. 그래서 내일 농협에 나갈 계획이었는데 방금 이웃 친구로 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은 7000근을 신청했는데1500여근밖에 배정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배정 기준도 모르겠고 정부가 생색내기나 하는 것에 불과한데 몇푼 더 받자고 정부수매에 응해야하냐는 것이었다. 내일 농협에 항의 방문을 할 건데 농민회도 같이 가자고 한다. 그리고 우선 친구들 뜻을 모아 수매 거부를 하겠단다. 농민회는 농민의 일에 당연히 앞장서야하기에 내일 농협에 같이 나갈 생각인데 "고추 정부 수매 거부"는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사실 정부는 고추가 거의 다 상인손으로 넘어간 뒤에 꼭 정부수매안을 내 놓는다. 농민살리자는 건지, 농민 놀리자는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꼭 물량도 생색내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고추값 하락으로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게 된 농민들이 겨울날일이 걱정인데 차라리 없는게 더 나은 정부는 하는짓 마다 뻘짓이다. 마음같으면 광화문에 고추를 산처럼 쌓아놓고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다.

농협말 믿고 실보유량을 조사한 이장도 농민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되었다. 이장도 못해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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