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저, 2012,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은국내에서 금속공학을 전공(고대 1982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하여 신학, 독일문학, 철학을 공부하여 1994년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을 획득, 이후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대학에서 강의를 해 왔고 현제 베를린 예술대학에 재직중이다.
그는 2010년 발행한 [피로사회]를 통해 독일의 베스트셀러 문화비평가로 부상했고, 한국에는 2011년 [권력이란 무엇인가]로 처음소개 되었다. 주요저술로는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죽음의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하이데거입문], [헤겔과 권력] 등이 있다.
이 책에서 피력한 한병철의 현실 인식을 보면 신자유주의의 병리학적 징후로 우울증을 이해하고, 우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의 과잉에서 찾고 있고, 이 문제의식이 전편에 퍼져있다.
2014년 차이트지의 밀스 보잉 등과의 인터뷰 기사 : 현실인식과 실천적 함의를 보여주는 언설
-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독재하에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경영자입니다. 가시적 악의 소멸을 주장. (논란의 여지)
- 자기가 강제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그 강제를 자유로 느낀다면 , 그건 자유의 종말입니다. 1980년대에는 인구조사를 시행하려고하자 모든 사람이 시위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 구조상으로는 지금 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 페이스북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합니다. 경작하라.... 결국 수확을 걷어가는 것은 봉건 영주들이죠. 이것은 소통의 착취입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물적 자원 때문에라도 어쨌던 이대로 계속가지는 않을 겁니다. 원유는 50년 정도면 고갈됩니다...”(현실의 변화가능성을 인정?)
- 그래서 레닌도 말했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라!”(낙관, 진보주의?)
- “이 세상에 대해서 기뻐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앎도 없고 정보만 있어요.”(비관, 염세?)
[피로사회]
피로사회는 작은 판형의 70여쪽의 책으로 총 7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7장중 전반부 4장까지 요약 발제.
신경성 폭력
[피로사회]의 첫문장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작자의 저술이 현대문명에 대한 문화병리학적 진단서 임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 병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점염성이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로 면역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였다. 냉전의 종식으로 대표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된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제시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이질성은 탈경계 과정에 걸림돌이 될뿐이다. 그것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늘 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상태로 특징지어진다. 문화이론 담론과 생활감정자체를 지배하는 혼성화 경향 역시 면역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는 부정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런 부정으로 인해 파멸되기 대문에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신경성질환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에 따른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한 병리적 상태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온다. 보들리야르는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상태”와 같은 발언은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체주의를 면역학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이론적 약점을 드러낸다.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반응이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신경성 폭력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폭력이론은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서술하려는논리적 혼란에 빠져 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러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고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와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 깃든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고,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이상 오늘날의 사회가 아니다. 21세기의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사회의 주민은 더이상 복종적 주체라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따라서 “통제사회”같은 개념은 더이상 적절성이 없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현대는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은 사라지고 할수있다는 긍정적이 이를 대체했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이는 생산성의 최대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일정한 수준의 생산성에 이르면 금지의 부정성보다 성과의 패러다임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능력의 긍정성이 훨씬 더 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란 축면에서 당위와 능력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한 규율적 행위 조종 모델에서 자기주도성과 자기 책임을 요규하는 규범으로 대체하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고,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고 본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에도 있다. 애랭베르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자기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과 우울증을 초래한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부담의 증가도 기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한다. 그렇게 나온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퇴화이다. 먹이를 먹으면서 주위를 살피는 동물의 수준이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좋은 삶에 대한 사색은 불가능하고 날이 갈수록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 강화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빼았겼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는데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사물의 향기를 볼수있다던 폴 세잔은 깊은 사색적 관찰을 통해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고 할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다닌다.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세계앞에서 현대인은 무력하다. 과잉활동성속에서 사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에게 관조적 요소가 제거되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활동적 삶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한나 아렌트에게 행동의 가능성은 탄생을 지향한다. 기적은 인간 탄생 자체, 그리고 인간이 그러한 탄생의 힘을 바탕으로 행동하여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에 있다. 이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며 탄생은 인간에게 그러한 행동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리하여 행동은 종교적인 차원으로 숭화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리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제작과 행동을 아루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진다.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익명성 속에 자아를 용해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고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상태에 빠져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해답을 요구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 상실하고 극단적 허무에 직면했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났다. 노동하는 동물이 유적 노동을 하고 있다면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났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다. 이로인해 허무는 더욱 강화되었다. 서사성이 사라진 죽음에 직면한 벌거벗은 생명은 그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벌거벗은 생명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삶은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져 있다.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벗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죽지않는 자들이다. 여기스 사케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차제로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 날 진행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주인은 스스로 노에가 된다. 그는 포로이자 감돆관이며 희생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주인이면서 노예가 된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제 인간은 우울증에 빠져 탈진하여 무력해진 나치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에 대항하는 어떤 효과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사유의 힘을 손상받지 않은 소수의 행동에 호소한다. 노동하는 동물에 대항하는 활동적 삶을 피력하던 한나 아렌트는 결국 사유의 힘, 철학적 사색의 힘에 투항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되어 있으면 근대적 호라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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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면역학적 적은 과연 사라졌는가? 자본 가노동자의 대립은 내재화되어 나 스스로 경영하는 자본가이자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되었다는 언설의 현실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자본의 탐욕, 부의 편중, 환경의 파괴, 위험의 증대, 민주주의의 훼손 이 모든 현장에 투쟁의 대상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행동하지 않는가는 정치심리학적 문제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하는 것 아닐까? 몰라!
“성과사회” 패러다임은 이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하버마스 마르쿠제 등에 의해 제기된 자발적 복종, 체제내화, 그리고 그람시의 헤게머니 이론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특히 푸코의 파놉티콘이론이 ‘규율사회’의 징표라면 후기의 ‘통치성’은 자발성에 포박된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를 분석하는 틀로 ‘성과사회’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병철 입론의 독특성은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하는것이 아닌가? 대중적이고 문학적인 언설로 철학적 주제를 다룬 점 그리고 동아시아를 통한 서양문화의 비판(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적 입지를 찾는 것으 도 다른 과제일것.
자기착취란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서가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장정일) 노동자는 자기 경영의 강박때문에 노동강도를 높이고 일거수일투족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자본증식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할 뿐이다. 노동자는 자기경영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자본의 노예이다.
그의 문화병리학적 진단의 심오함은 실천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가장 중요한 주체의 문제에서 한병철은 무력하다. 개별화되고 파편회된 자기경영의 주체인 개인은 우울증의 원인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 힐링에 몰입하는 현대적 개인을 정당화한다. 늘 그렇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물론 한병철이 사회정치적 실천을 등한시하는 입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화병리학적 사회진단은 현실 이해의 출발점이지 실천적 함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병철의 한계가 아니라 문화병리학의 한계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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