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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30

일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를 싣고 갈 비스타리님은 도착했다. 네팔! 5년을 기다려 온 여정이다. 출구 막힌 일상의 도피처이자 스트레스의 배출구였던 네팔행의 꿈. 드디어 떠난다. 하지만 짐도 마음의 준비도 여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끝내지 못했다. 사과 발송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명호면 소재지에 들러 라티와 짜장면 한 그릇으로 작별을 대신하고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 도착해서 비스타리님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시내로 나와 마트에 들러 일부 준비물을 구했다. 오랜 세월 멈춰있던 손목시계의 건전지를 갈고, 3000불 환전에 대한 현금을 송금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네팔전문 레스토랑을 찾아 곧 시작할 두 달 여정의 네팔 생활을 맛보는 리허설을 했다.

 

16/12/31

수원집을 나와 아침부터 줄은 선다는 유명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영종도에 있는 처형댁에 들러 장모님을 뵙고 불편한 30분의 체류 뒤에 공항으로 향했다. 첫 일정을 같이할 5명의 일행이 하나 둘 모이자 네팔에서 기부할 약품을 여러 배낭으로 나누고 불안한 수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지났다. 내일 다시 카트만두서 재회하겠지만 상해와 쿤밍을 경유하는 낯선 길에 부디 아무 착오가 없기를 약속하며 5명의 도반은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우리에겐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여유가 주어졌다. 어제부터 가이드겸 기사를 자청한 비스타리님도 작별을 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1시간만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봉화군농민회 회원을 싣은 버스는 아직 톨게이트를 통과중이라니 딸을 만나 식사를 했다. 딸이 주는 내복 선물을 챙기고 광장을 나가 농민회 동지들을 만나 박근혜 퇴진!”을 힘껏 외치다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스파온에어의 잠은 깊지 못했다. 어수선한 와중에 억지로 잠을 청하며 여행이 내 삶의 또 하나의 장식물이 아니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2달간의 이번 네팔여정이 나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어떤 계기라도 가져다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 부풀었다.


17/1/1

아침 5, 굳이 깨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었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그냥 밤새 누워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빵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840분 비행기는 인천에서 발을 뗐다. 비행은 늘 불편했다. 고소공포일까 밀폐공포일까 아니면 단순한 조갑증일까? 둘러보니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지만 중노년들은 다 똥씹은 표정이다. 나이가 들면 겁도 늘고 걱정도 느는가보다. 걱정이나 공포는 인간의 합리성의 증거일까 비합리성의 산물일까? 객관적으로 안정성이 높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그냥 몸이 하늘에 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시간 50분을 비행 후 푸동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각 945분이다. 소통이 불가능한 공무원과 입국비자로 실랑이를 벌였다. 알고 보니 출국 바우처를 요구한 거였다. 내 인생의 첫 중국 방문이니 뭐 그 정도는 감수 할만 했다. 쿤밍행 비행기를 타기에는 10여 시간이 남았지만 공항 밖 상해는 너무 멀어보였다. 청사 바깥을 걸어서 나가 보았지만 짧은 시간 상해를 맛보기에는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했다. 공항내 까페와 레스토랑을 돌며 먹고 또 먹고 시간을 죽이다 간혹 비스타리님한테 받은 lonely planet NEPAL을 읽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후 9시에 쿤밍행 동방항공에 탑승했다.

 

두세시간 비행뒤 쿤밍에 도착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운남성에서 보름 정도를 보내는 일정을 생각했었다. 두 달을 온전히 네팔여정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쿤밍공항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상해 푸동공항은 아직 중국이 아니었다. 푸동공항은 여는 국제공항과 크게 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화려한 명품 매장들 그리고 사람들의 바쁜 발길조차 인천공항의 판박이였다.

하지만 쿤밍은 달랐다. 쿤밍에 들어와 비로소 폐부 깊숙이 중국의 냄새가 느껴졌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다 중국인이었다. 특히나 무리지어 다니는 티벳탄 때문에 쿤밍은 더욱더 중국답게 다가왔다. 떼에 쩔은 옷차림과 배낭에 색동실로 장식한 머리카락은 기름에 떡져 뽀얀 먼지가 덮고 있었지만 표정은 당당했고 친근했다. 왜 티벳탄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 기억속의 이웃 아저씨 같이 편안하게 느껴질까 궁금했다. 그들은 차림으로 보아 노숙인과 다름없었지만 보무도 당당하게 현대식 공항청사를 휘저었다. 참 멋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들 무리의 뒤를 쫏아 청사 지하의 대합실로 향했다. 그들은 따라 가는 것만으로 왠지 든든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아예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사람들로 넓은 공간이 만원이라 우리 부부가 몸을 누일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공항밖 숙소로 향하기에는 시간적 여유도 불확실했고 사실 치안도 알 수 없어 공항내 있다는 호텔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게 찾은 잠자리 대안으로 발마사지 가게를 발견했다. 겨우 와이프만 발마사지 가게에 몸을 누이고 나는 구석진 복도에 담요를 깔았다. 결국 이번에 실현할 계획이 아니었던 찌질한 나의 버킷리스트중 하나인 공항노숙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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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0일 집을 나와 201712일 카트만두에 도착, 여정을 시작하고, 228일 집으로 돌아오는 2달동안의 네팔여행을 기록한다. 이 기록은 순전히 우리 부부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다른 여행자를 위해 정보를 제공할 만치 섬세하게 여행을 기록하지도 못했고, 여행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한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이 모든 기록의 정확성도 떨어진다. 그래도 내가 늙도록 살아 더 이상 여행을 떠날 수 없을 만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나마 위안받을 수 있을 나만의 화려했던 지난 시절의 기록으로 2달여정의 네팔여행을 남긴다.


사실 5년전 했던 한달간의 안나푸르나 여행후 내내 네팔병앓이를 해왔고, 모든 힘든 순간을 다음 네팔행을 핑계로 이겨왔다. 그래서 네팔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고 어쩌면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줄 미지의 샹그릴라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막연한 네팔 커피 농장의 꿈을 키워보기도 했고, 지금과는 다른 네팔에서의 새로운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여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었고 사실 결과도 그랬다. 더 이상 네팔은 나에게 지금의 삶을 대체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사는 한국과 공존하는 내 삶의 또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여정의 큰 얼개는 대충 3축으로 잡았다. 봉화친구들로 구성된 9명의 팀과 함께하는 보름 정도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그리고 카트만두밸리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을 탐방하다 운남여행을 통해 카트만두에 들어올 예정인 한명의 친구와 보내게 될 열흘정도의 도시여행, 그리고 나를 네팔로 안내한 비스타리님과 또 다른 친구한명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할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그것이다. 5년전 폭설로 마낭에서 돌아서야했던 쏘롱라는 다시 넘고 묵티나트와 까그베니를 지나 칼리칸다끼 강마을을 걸으며 무스탕을 맛보고 포카라에서 긴 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여행은 늘 계획에서 어긋나면서 더 멋지게 된다. 사실 마지막 까지 중간에 보름쯤 시간을 만들어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를 걸어볼 마음도 먹었지만 다 포기했다. 여기저기 커피농장도 둘러볼 계획도 무산되었고 먹기여행이자던 다짐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만난 식중독과 안나푸르나 라운드뒤에 닥친 심한 몸살이 여정의 역동성을 떨어뜨렸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사람과 풍경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부부만 하던 여정과는 달리 거의 가이드에 준하는 책임을 느껴야했던 일행이 있는 여정은 결국 본전이긴 하지만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었다.



이번 여행내내 여행을 왜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누구는 삶이 여행이라고 했다. 여행 중에 도 다른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삶이 여행임을 망각해 가는 일상을 깨고 삶 자체가 여행임을 스스로 환기하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땅에 뿌리내려야하는 농사꾼이 집만 나서면 마냥 좋고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늘 줄타기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길을 걸으면 내가 가진 모든 갈등과 긴장, 내 생각과 삶이 품은 모순들이 다 조화를 이루고 해결되니 길을 나설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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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기본소득제로 농업 선진국으로 진입하자!

 

힘든 농업노동도 부족해 농산물가격인상 투쟁을 병행하며, 밭농사에 아스팔트농사까지 해야지만 옳은 농사꾼이라는 슬픈 우스개가 있다. 농업은 무역협상의 희생자로 늘 상대국가에게 던져주는 먹잇감이 되었고, 조금만 정상 가격을 회복할라치면 적폐언론으로부터 물가인상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다. 그것도 모자라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 무너지면서 나라님도 하늘도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농민의 신세를 한탄해 왔다. 우리 농민은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는 바람 앞에 선 등불이다.

 

권력자들은 선거철이면 늘 똑같은 공약 제시했다. “농민이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잘 살 수 있는 농촌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별반 무소식! 여전히 농민은 바람 앞에 등불모양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래서 농민의 소원은 늘 한 가지였다. “우리 농민은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안정적인 농산물 가격과 소득구조다.”

 

이번 정부도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전의 적폐권력과 달리 이번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진정성을 믿고 싶다. 그런데 비책이 나왔다. 농민에게는 절실한 기원이고 그들에겐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던 안정적인 농민의 삶을 실현할 유일하고 근본적인 정책적 대안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농민기본소득제.

 

농민기본소득제는 농업의 공익적 기여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해 주는 사회적 보상체계다. 농민만 힘들다고 주어지는 구제정책이 아니다. 농업은 건강한 식량 공급과 생태계 보전은 물론 공동체 유지 등 한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다원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시장경쟁구조에서 응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농민의 소득은 도시근로자의 절반이하수준까지 떨어졌고, 농촌은 귀농지원 등 다양한 인구보전 정책에도 불구하고 분해가 가속되고 있다. 백약이 무효하다는 이러한 농촌 현실에서 농민기본소득제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으로 농민 삶의 지속성을 보장함으로써 농민은 물론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시켜주는 최적의 정책이다.

 

그런데 반농업세력들은 또 예산타령이다. 사실 우리의 요구는 소박하다. 농민기본소득제를 최소한의 수준에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사실 농업예산은 늘 적폐 언론의 먹잇감이었다. 무능력한 농업 관료와 도덕적 해이에 빠진 농민이 작당하여 농업보조금을 착복하여 국고를 탕진한다는 투의 기사는 잊을만하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사실 그동안의 정부 보조 사업은 농촌 현장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아래 관변 농업인의 육성에 낭비되곤 했다. 농민기본소득제의 제원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종류가 많아 일반 농민은 잘 알지도 못하고, 행정적 관리 비용만해도 엄청난 비효율적인 각종 보조사업을 정리하는 데서 가져올 수 있다. 나아가 OECD평균의 2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종류만 많고 실효성도 없는 각종 직불금을 통합하고, 비현실적이고 경직된 예산 산정으로 거의 매년 집행되지 못하는 농업예산의 10%가 넘는 불용예산만 가져와도 농민 1인당 월30만원 정도의 최소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5조전후의 예산은 충분히 확보가능하다. 나아가 국가예산 증가율에 상응하는 농업예산증가율을 확보하고 전체 국가예산에서 차지하는 농업관련 예산의 비율을 5%선 까지 유지한다면 선진국의 농업직접지불금 수준에 도달하는데 그리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시작하자. 그리고 최소 수준에서 시작하는 농민기본소득제가 몰고 올 우리 농촌과 농민 삶의 변화 추이에 따라 보다 진전된 제도로 나아가면 된다. 문제는 정부의 의지다. 그리고 농민의 합의와 결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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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당당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꾼!

전국농민회총연맹 봉화군 농민회

새누리당 의원 및 단체장 탈당 촉구 기자회견문


대한민국은 위기에 빠졌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사기꾼 집단의 수괴가 되어 기업체를 갈취하고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사리사욕을 채우고, 미국과 중국의 군사대결 한가운데로 몰아넣는 사드배치 결정으로 한반도 평화를 포기하고, ‘한일군사정보호협정으로 나라의 안보주권을 일본에 팔아넘겼다. ‘국정교과서라는 이름으로 친일 군사독재를 미화하여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황폐화시키려 하고, 치욕적 위안부 협정으로 민족의 자존을 버렸다. 국민의 삶은 내동댕이쳐졌고 국정 어디에도 민생은 없었다.


국민은 묻는다. 이게 나라인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책임져야하는 대통령은 세월호에 갇혀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수많은 어린학생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와대 관저에서 미용시술에 빠져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정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자신에게 맹종하는 몇몇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헌신했고, 그 과정에는 최소한의 상식과 법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쌀값 등 농산물가격 폭락으로 농업생산기반이 붕괴되어 생존의 벼랑에 내물린 농민이 쌀값 한가마 21만원이라는 대통령 자신의 공약에 따른 농업보전 대책을 요구하자 물대포를 쏘아 죽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경찰에 맞아 죽은 농민은 있어도 책임자 처벌은 물론 국정 최고 책임자의 사과 한마디조차 없었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괴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국정의 최고 책임을 맡겼는지 슬기로운 국민은 안다. 바로 반역의 역사를 면면이 이어온 친일수구 반민주 집단의 온상 새누리당이다. 현 국정농단사태의 일차적 책임은 박근혜와 그 일당에 있지만 새누리당 역시 그 책임에서 조금도 가볍거나 자유롭지 못하다. 박근혜의 즉각적인 구속과 사법적 처리가 요구됨은 물론 새누리당 역시 즉각 해체해야 한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그 길만이 죄값의 일부라도 치루고 대한민국을 바로세우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한다.


그럼 지방권력은 안녕한가? 권력을 사유화한 박근혜가 국정을 농단하는 사이, 지방권력은 안녕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앙권력이 박근혜-최순실 일당에게 장악되고 중앙행정이 그들의 손발이 되어 움직일 때 지방권력은 중앙에 줄을 대고 그들에게 지지기반을 제공하면서 떡고물을 주워먹기에 급급했다. 박근혜가 비적과 다름없이 국정원 등 정부기관을 동원해 국민과 기업을 협박하여 갈취하고, 정부예산으로 떡고물을 나누어주며 기업과 정치인, 나아가 교수와 연예인까지 줄을 세울 때, 지방권력은 새누리당의 울타리에 안주하며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지역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세력만의 이익에 매진해 왔다. 농업포기를 전제한 각종 FTA 등 반농민, 반농업 정책을 추진하는 새누리당에 맹종하는 지방정부, 지방자치를 훼손하고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지배를 공공연히 확책하는 새누리당에 부화뇌동하는 지역 정치인 자신이 바로 새누리당의 일부이기에 이 모든 불합리와 부정의가 가능했다.


지역권력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묻지마 투표를 조장하고 그렇게 형성된 편향된 정치 기반에 안주해온 지방권력은 민주주의와 그 기반인 지방자치를 배반하고 봉건영주와 다름없이 지역을 통치해 왔다. 지역 정치인은 해바라기가 되어 유권자인 군민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공천자인 국회의원만 쳐다보고 그 국회위원은 다시 대통령만 바라다 보는 지역의 정치현실이었다. 괴물 박근혜를 낳고 기른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역의 새누리당 권력이다. 따라서 박근혜 퇴진투쟁은 지역사회에서 새누리당 타도 투쟁으로 확산되어야한다.


군민은 지역정치인에게 요구한다.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새누리당 해체에 앞장서라! 봉화군농민회는 박근혜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지역 새누리당 정치인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는다. 지금이라도 친일수구의 맥을 이어 반민중 권력본성을 못버리고 있는 새누리당 탈당을 지역정치인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농민적 자존심과 진정한 애국심이 일말이라도 남아있다면 지금이라도 나라 팔아먹은 괴물 박근혜를 낳고 기른 책임이 있는 새누리당 탈당은 물론 해체를 요구하는 투쟁에 동참해서 그 빗을 갚아야한다.


봉화군농민회는 박근혜 최순실일당의 국정 농단에 책임을 지고 강석호 새누리당 국회의원, 박노욱 봉화군수, 박현국 경상북도의원, 김제일, 김장한, 황재현, 김희무, 김상희 군의원의 새누리당 탈당을 촉구하며 동시에 새누리당 해체에 적극 나설 것을 요구한다.

박근혜 국정농단 강석호는 책임져라!

박노욱 봉화군수는 새누리당 탈당하라!

 

20161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봉화군 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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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거실 안으로 들어와 더위를 피하던 우리 초롱이 모습입니다. 

애기도 아닌것이 궁둥이를 밀어도 버팅기며 더위가 가쉰 해거름이나 되어야 거실을 나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 초롱이가 겨울에 접어들 무렵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배아래 혹이 생겨 점점 커지면서 피도 나곤했었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걷지도 못하고 잘못 움직이다가 한번씩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물을 계속해서 마시고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눈동자의 촛점이 풀어지기도 합니다. 눈빛이 하도 초롱초롱해서 초롱이라 이름지어 불렸던 우리 초롱이가 죽음의 고통에 눈동자가 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기만 너무 가슴아픕니다.

 

수의사 친구에게 물으니 13살 나이면 수술을 해도 치료를 장담할 수 없고, 마취에서 회복도 어렵고 하니 그냥 살아있는 동안 좋아하는 음식이나 싣컷 주라고 합니다. 생명가진 모든 것은 결국 그 생명을 누린 값을 치루기 위해 죽음의 고통을 감내해야한다지만 신음하는 초롱이를 곁에서 지키는 일은 너무 힘듭니다.

초롱이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일 때는 집에 있던 진통제를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진통제를 먹은 초롱이는 하루정도 눈빛도 맑아지고 동작도 활발해지다가 다시 고통스런 모습으로 되돌아옮니다. 더이상 어떻게 해줄수 있는 것이 없다는 판단입니다. 단지 우리 초롱이가 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할수있기를 빌 따름입니다. 

초롱이가 우리집 식구로 같이 산 13년 세월이 그리움으로 남기전 초롱이와의 인연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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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휘어 감는 낙동강 따라 걷는 길-명호에서 청량산입구까지 

일시 : 2016년 8월 13일 오전 9시~ 12시 30분

코스 : 명호면 낙동강 시발점 공원 - 고계다리-비나리거리-선유교-관창리 입구-북곡리입구-청량산도립공원상업지구

참가자 : 28명


명호면 소재지에서 낙동강은 시작된다. 

정확히 말해 춘양쪽에서 흘러오는 운곡천과 석포 소천을 지나오는 

명호천이 만나 비로서 하천법상 낙동강이라 불리는 지점이 

명호면 소재의 낙동강 시발점 공원이다. 

이날은 바로 낙동강 시발점공원에서 시작하여 청량산도립공원까지

약 10km를 3시간여에 걸쳐 걸었다.



올해는 유난히도 덥다고들 하지만

하필 이날은 올 여름 치고도 더위의 절정을 기록했다.

걷기 시작하면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서쪽으로 산을 끼고 돌아 오전내 그늘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무너지고

코스 곳곳이 때약볕에 노출되어 있었고 

늦게 걸음을 시작한 덕에 시간이 지날 수록 그늘은 줄고

햇살을 더 뜨거워졌다.



팥죽같이 땀을 흘리는 일행들에게

괜히 눈치가 보일 만치 힘겨운 걸음이었다.

하지만 서울서 오셨다는 봉봉조합원 가족인

건이라는 아이의 씩씩한 발걸음은 

지친 어른의 발걺음을 재촉했고 힘든 내색을 감추게 했다.

사실 이날 걸음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추억이 되었다.


이 힘든 계절을 걸었으니 앞으로

맞은 가을의 걷기가 벌써 기다려지고

어떤 난이도의 길도 거뜬히 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덤으로 얻었다. 


이날 코스를 굳이 평가하자면 

전반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았고 

군데군데 코스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거나 불확실해 불편함이 있었다.

또 사람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까닥에 

인적이 드물어 풀이 너무 자라 길을 개척해야만하는 곳도 한두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잘 관리만되면 걷기에 좋은 길이 될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강을 따라 걸으며 청량산이 주는 풍광을 두눈에 가득 담을 수 있어 좋았고

조금만 일찍 출발하면 오전에 청량산 산그늘이 코스 전반에 드리우는 점도 

여름 트래킹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봉화주민은 물론 아무런 사적 인연이 없는 영주나 인근 도시, 

멀리는 서울에서 오신 분들과도 단지 같은 길을 걷는 다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동질감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던 이날 트래킹을 마치고 나니 

벌써 9월의 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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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설 때는 의무감이 나를 움직였지만
현동역에서 도반들을 보자마자
나는 짧지만 깊은걷기 여행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밭에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맞았을 태양을
강변길을 걸으며 얼굴도 가슴도 활짝 펴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봉화에 산지 20년이 지났고 앞으로 그만치 더살지 모를 일이지만
차를 타고도 와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을 길을 두발로 걷다보니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희미한 삶의 잔상들이
뚜렷한 현실로 되살아나는 환각처럼
작은 풀잎하나 들꽃 하나 조약돌 하나조차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나를 맞이합니다.
차로 달리는 100km보다 두발로 걷는 10km가
몇백곱절 더 생생하고 풍부했습니다.

2016년 7월 9일 임기분교에서 시작해 두음, 돌띠마을을, 배나들마을을 지나

현동역을 향해12명의 도반과 길을 걷고 기록에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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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봉화마을길 걷기


코스: 소천초등학교임기분교~현동역 


출발: 2016.7.2(토) 09시 임기분교 


준비물: 도시락, 물.간식 등


봉화마을길걷기 2번째 걷기 모임이 있습니다.

봉화주민은 물론 이웃 도시민도 함께

심산유곡 봉화 오지마을길을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긱하고 

그 속에 깃들어사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는 작은 걷기 모임입니다.


이번에는 낙동강 줄기 따라 분천역에서 인기분교까지 

길을 걷습니다.

낙동강 줄기따라 길과 강이 만나기도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마을길 계곡길을 걷습니다.

총길이는 10km정도의 평탄한 길로 

느린 걸음으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도시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원시의 자연과 촌락의 삶을 느끼고 싶으신 

도시민께서도 참여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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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6년 6월 4일 09시_13시

코스 : 외씨버선길 8코스중 춘양역-씨라리골 구간

참가인원 : 28명

이른 봄 강풍 덕택에 봄농번기가 길어진 탓일까,

예년 같으면 한시름 놓았을 계절이지만

아직 봉화 농민들은 바쁘기만 하다.

하지만 약속이기도 하고, 굳이 약속이 아니라고해도

농사일은 끝이없기에

평생 일만하다 죽을 마음이라면 몰라도

먼저 쉬고 보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옛 어르신들이 들으면 '이놈' 정신차리라고 난리가 날 일이지만

적어도 나는 일만하다 죽을 생각이 없다.

그래서 전지가위도 내려놓고

약대도 놓고 토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

9시 집결 시간이 다가오자 춘양역전은

한사람 두사람 아는 얼굴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출발시간이 되고 보니

막 도착하겠다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29분!

한분이 가족만 내려놓고

도착지에서 다시 만나기로하고 볼일을 보러 떠나시는 바람에

28명의 농부가, 봉화사람이 그리고  낯선 도시민이 함께 길을 걸었다.

 

적어도 봉화농부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고개길 넘으면 마을을 열어주는 아름들이 느티나무가 있고,

늙고 뒤틀린 감나무가 대문을 지키는 몇채의 농가가 있다.

언덕길 돌면 산이 있고

비탈진 밭에 고추며 고구마며 호박이 자라는

내가 매일 일구며 살아가는 삶의 터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작업복에 경운기를 타고 만나는 산하와

등산화에 배낭을 매고 만나는 산하는

같지만 결코 같을 수가 없었다.

 

일로만 환산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신비함으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소소한 뭍 자연의 조각들 생명들이

친근한 눈길로 나를 맞이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역시 사람이다.

봉화에 사는 좋은 사람은 다 모였다고 하면

서운할 분들 많겠지만

오늘 하루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이 웃고 떠들고

물과 김밥을 나누던 28명의 동반자들은

모두 같은 깨달음을 구하는 도반이었고

같은 세상을 꿈꾸는 동지들이었다.

그래서 그냥 좋았다.

보다 풍성한 다음 길을 위한 간단한 평가조차도 사족이 되어버릴 만치

그냥 행복한 느낌 그대로 푹 젖어있을 수 있어 좋았다.

 

다음달 첫째 토요일

임기소수력발전소에서 명호까지

낙동강변길을 다시 걷는다.

꿈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무엇보다 느낌을 나눌 많은 분들이 같이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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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를 아름답고 따뜻한 삶의 공동체로 이어가기를 꿈꾸는 몇몇 군민이 모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마을을 배우고 

좋은 사람들이 함께 길을 걸으며 꿈을 나누는

 [봉화마을길걷기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모임은 가입 등 어떤 형식도 없으며 

오직 좋은 분들 손잡고 같이 우리 마을을 걷고 싶으신 분이면

누구나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한달에 한번 꼭 반나절만 도시락 싸들고 같이 만납시다.

봉화군민이 아니신 분이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더 격하게 환영합니다^^


이번주 토요일(6월4일) 첫 걷기를 합니다. 


집결지 : 춘양역앞(8시 50분 집결)
코스 : 춘양역~관석~현동 씨라리골 
준비물 : 물과 점심도시락, 간식(노룻재에서 점심식사 예정)

3시간 정도 걸을 예정입니다. 
점심은 나눠먹게 넉넉하게 준비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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