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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나무 두 그루 입양하고 커피 씨앗 스물알 파종한 것이 올봄 내 농사의 가장 뜨거운 사건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거실에서 자라고 있는 커피 나무를 바라다 보는 것도 괜잖은 것 같고, 

가능한 새로운 작목으로 커피가 선택될 수 없는 게 확실하긴 하지만, 

그냥 안해보던 작목을  키워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 

겨울에는 방안에서 키우다 여름에나 마당에내어놓고 키워야하는 조건이고

거실에서 자란 커피나무가 열매를 달것 같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 희망의 나무를 키우듯 

작은 커피나무 몇그루를 키워보고 싶다.

사람일 알수 없다는데 혹시나

나중에 네팔어디에서 내가 커피농사 지으면 살아갈 지도 알수없는 일이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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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싶어 안달하던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이왔습니다.

하루종일 봄비가 오락가락 게으른 사람은 낮잠자기 딱 좋은 날씨에

부지런한 저희는 비닐하우스로 집결했습니다.

비오는 날은 비닐하우스에서 호박파종하기로 해 놓은 계획에 따라

5,000알의 밤호박,

800알의 일반 단호박,

600알의 누렁호박(멧돌호박)을 50공 포트에 한알한알 담았습니다.

풍요한 가을 살림 넉넉한 겨울을 꿈꾸며

정성을 다해 올해 첫 파종을 마쳤습니다.

올 농사 대풍을 예고하는 듯 춘양 도래기제 형님내외,

존경하는 이웃 송선생님 등 비닐하우스는 정겨운 이웃의

발길과 손길로 북적거렸습니다. 

이제 모종관리하면서 4월 한달은 밭에서 살아야합니다.

작년 농사 뒷설거지부터, 새밭장만을 5월초 까지 끝내야하기 때문입니다.

밭주변 묶은 풀을 베어내고, 고라니를 막던 그물망도 걷어내고

비닐도 걷고 그리고 퇴비를 뿌리고 로타리를 치고 두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는 작업까지

사실 할일은 많고 부르는 데도 많고....

정신없는 한달이 예고됩니다.

 봉글봉글 맛난 봉봉밤호박을 위하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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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관련한 방송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간혹 속이 확 디집어 지는 경우가 많다나는 솔직히 농촌을 위한답시고 농촌문제를 희화화한 프르그램들이 넘쳐나는 풍토가 못마땅하다한국 농업농촌의 문제는 위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을 만치 생존의 갈림길에 내몰려있다 절박함은 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의 농부가 다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절박한 농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기획된 프로그램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근본'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이번에도 그랬다구미의 한 마을에서 녹화된 대구KBS "농촌탐구생활" '귀농"관련 문제로 도지사 등과 패널로 참가해 토론을 하게 되었다면서 농민회 한 동지로 부터 연락이 왔다온통 관과 관변인들로 구성된 패널사이에서 홀로 진보적 목소리를 내어야하는 부담감때문인지 방청객 질문으로라도 엄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정말 가기 싫었지만 농사일 하루접고 집을 나섰다

먼저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진행된 야외무대 녹화에서 무려 다섯시간동안 방청객으로 사시나무같이 떨어야해서 너무 힘들었다그리고 이번에 촬영한 것이 방송 2회분이라고 했고전반부는 쌀을 주제로 했지만 내용은 전무했고 그냥 출연한 도지사의 노골적인 홍보방송에 불과했다도지사가 떠나고 도청 농정국장이 패널로 나온 후반부는 성공한 귀농을 주제로 했다사실 할말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개인적 인연도 있는 방송국관계자와 패널의 입장도 있고 해서 최대한 자제를 했고나를 청한 패널이 요구한 귀농관련한 주제에 관해 하나의 질문만 던지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한정했다



사실 우리 농민은 그나마 농촌문제를 다뤄주는 방송관계자에게 무조건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려야할 형편이다프로그램을 만들려는 PD 등 관계자는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엄청난 난관을 뚫고 노력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더 나아가고 싶지만 나름의 제약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그래서 어렵다제의에 따라 출연할 것인지 말것인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고출연했을 때 어디까지 건드려야할지도 판단이 쉽지 않다사실 하고싶은 말 다하고 난뒤 편집의 절대권력에 휘둘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어렵다방송을 만드는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클 것이다농촌문제를 다루는 진지한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없을 것이고농촌문제를 쇼화한 프로그램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그렇다고 농촌문제를 외면하다보면 지면이든 방송이든 모든 정보의 흐름에서 농촌문제가 사상될 것이 분명할 것이다나름 엄청난 고뇌의 산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이번 녹화과정에서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 한가지는 FTA 그것도 농산물시장 개방을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시장의 파고에 맞서 경쟁력있는 한국 경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농산물 시장개방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농업을 시장 바같에 남겨두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스위스가 자국 농업 보호를 위해 EU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스위스 경제가 망한 것은 아니다재벌의 시장을 확보해주기위해 농업시장 개방을 선제적으로 하는 한국정부는 이마트가 농산물을 헐값에 내어놓고 미끼상품으로 사용하는 것과 별반다르지 않다그런 천박한 재벌의 상술을 차용해 마구잡이로 농업시작을 개방하는 정부를 제어하지 않고는 미시적 농촌보호정책을 아무리 내어놓아도 아무소용이 없다.



 

사실 귀농정책 관련해서 제기하고 싶었던 질문이 두어개 있었다.

첫째두어가지 귀농성공사례를 보여주며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호도하는 것을 비판하고 싶었다농업정책이 개별적 성공사레 만들기로 흘러가서는 안된다많은 경우 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억지로 성공사례를 만들고 이를 내어밀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하는 일반 농민들에게 상처를 줄뿐 희망의 메시지가 결코될 수 없기 대문이다. 모든 성공사례가 다 그런것도 아니고 이번에 소개한 사레중에는 누가 뭐래도 훌륭한 성공사례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평생농사를 지어오신 우리 동네 어르신이나 형님 등 이웃 농민들은 유명호텔의 세프출신도 아니고박사도명문대 출신도 아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인가그런데 몇몇 성공사례를 보여주면서 귀농하라고 농촌에도 희망이 있다고 하는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녹화가 끝나고 참석했던 귀농인들의 볼멘소리도 바로 그점을 지적했다. 명문대 박사출신이나 유명호텔 세프출신은 그렇게 했다지만 그럼 평범한 우리는 어떡게하란 말인가를 되불었다

사실 귀농정책은 농정의 하위 단위일뿐이다나는 경북 농업농촌의 미래상에서 귀농정책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궁금하다우리 농촌이 잘 살고 있고희망이 넘치는 곳이고농민들이 농부로서의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고 우리 농민의 자식들이 농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는 세상이라면 별도의 귀농정책이 필요 없을 것이다.그런 면에서 경북 농촌의 미래상이 어떠한지 그 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 귀농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두번째귀농인과 원주민사이의 마찰이 일부 있는데 여기에는 귀농정책이 초래한 측면이 있지않나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삶의 가치지향이나 의사소통방식 등이 다른데서 오는 면이 클 것이긴하지만 귀농정책면에서도 이를 부추키는 면이 있어 보인다귀농인은 정책자금 수혜 등에서 소외된다고 느끼고마찬가지로 원주민은 평생농사지어 온 우리를 외면하고 귀농인만 챙긴다고 불만을 제기한다귀농인은 원주민의 일부가 관과 유착되어 독식한다고 느끼고원주민은 정보 취득에 능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귀농인이 정책수혜를 독점한다고 느낀다이는 개인의 인격이나 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금전적 인센티브에 집중된 귀농정책이 야기하는 측면도 있고지역내 정책관련한 정보의 흐름과 하부 행정의 결정과정이 왜곡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고  귀농인과 원주민이 어울려 함께살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귀농정책을 펴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참 아쉬움이 많이 남은 방송녹화였지만고생하는 스탭들을 보니 가슴 징한 면도 있었다그분들께는 감사할 따름이다바라건데 농촌관련 방송이 지위가 높은 분을 초대해 추켜세워주는 대신에 우리 농촌 많이 사랑해 주세요 애원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도시민 여러분 우리 불쌍한 농촌을 도웁시다는 불우이웃돕기 홍보식 방송이 아니어도 좋은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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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군항제는 1963년에 시작되었고 올해가 53회째라고 했다. 62년생인 나와 한살차이 동생인 셈이니 같이 늙어 갈 좋은 도반이다. 진해는 나의 고향이다. 6살에 춘천 오음리에서 외갓집이 있는 진해로 이사를 와서 스무살이 넘어 진해를 떠났고, 진해를 떠난 뒤로도 일년에 서너번부모님을 뵈러 방문해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진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던 다섯 외삼촌댁과 이모댁을 내집같이 드나들며 외사촌들이랑 같이 자라다시피했고, 진해 시가지는 물론이고 행암이며 속천 그리고 멀리 웅천 바닷가와 장복산 구석구석까지 나의 발길이 닫지 않은 곳이 없도록 돌아나녔다. 참 말할 수 없이 많은 추억이 서려있고, 나의 삶을 따듯하게 유지시켜주는 마르지 않는 온기의 원천이 바로 진해다. 

그중에서도 군항제는 빼어놓을 수 없는 내 어린 시절 추억의 특별한 보고다. 진해에 봄이오면어디론가 꼭 떠나야만 할것 같은 가슴벅찬 설레임, 거부할 수 없는 미지의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 저항할 수 없는 유랑의 유혹에 몸부림쳐야했다. 어쩌면 나는 그냥 벗꽃에 미쳐버렸다고해도 좋을 정신상태에 빠져들었다. 할일없이 벗꽃장을 쏴 다니는 것만으로 뜨거운 가슴을 식혀야 했지만 그것은 유독 나만의 정서는 아니었다. 군항제가 끝나고나면 꼭 한반에 한두명씩 가출해 버린 친구의 소식을 들어야만했기 때문이다. 

53회 군항제 전야제가 있던 날, 부슬부슬내리는 봄비를 가르며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3시간 반만에 진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1박1일의 짧은 진해 투어를 시작했다. 해군통제본부를 시작으로 해군사관학교 그리고 진해루, 경화역을 거쳐 여좌천과 내수면 양어장을 두루 둘러보는 초압축일정을 소화했다. 일본에서 귀향한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가마니로 움막을 짓고 살던 동네라고 어릴적 '가마니골'이라고 불렸던 동네의 새롭게 들어선 현대적 까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한잔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저녁 늦게 고향친구를 만나 명물인 '가야밀면'을 한그릇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봉화로 돌려야했다.  

이번 군항제 투어는 사실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위한 특별한 여행이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지나간 추억을 반추하고, 나중에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따듯한 어떤 느낌만이라도 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강행한 여정이었다. 사실 마음뿐이고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힘들기만 했던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네째 아들이 같이한 군항제의 기억이 어머니의 뇌리 깊이 스며들길 비는 마음으로 2015년의 3월의 마지막날에 시작하여 4월의 첫날에 마친 진해 군항제 투어의 거친 기록을 남긴다.

20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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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두물머리] 함께 보아요~

농사일이 조금씩 시작되는 절기, 더 바빠지기 전에 할일들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모처럼 주민 여러분과 함께 우리 농업을 지키려는

다른 농부들의 이야기를 나눠 보는 시간 가지고 싶습니다.


2014년 갖종 다큐멘타리영화제에 출품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서동일 감독의 다큐 [두물머리] 

비나리마을학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일시/장소 :


2015년3월 11일(수) 저녁 7시~9시 / 비나리마을학교

영화관람후 감독과의 대화 및 막걸리 파티가 있습니다.


* 참가비는 무상이지만

[다이빙 벨]등  다음 작품  초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액의 자발적 후원은 받습니다.


문의 : 비나리마을학교 054-673-1927  

주관자 : 봉봉협동조합 010-2008-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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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증후군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고향 진해를 가는 대신 이번 설은 두형과 동생 그리고 모친이 봉화를 방문했다. 짧은 1박2일의 명절을 보내고 다들 내려가시고 나니 왠지 마음이 허하다. 할일은 많은데 명절날 밭에 나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책상머리에서 해야될 일들도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덕분에 오늘 하루종일 '네팔병'에 빠져 살았다. 공정무역과 그와 연관된 협동농장 사례를 찾다가 이전에 알았지만 건성으로 지나치던 까페하나를 완전히 통독했다. 네팔 트레킹에서 이주까지 까페 주인이 카트만두에서 십몇년을 살면서 터득한 지혜를 하루동안 섭렵했다. 나중에 따로 인사라도 남겨야할 것이다.
그냥 지금 사는 삶이 고루해지고 미래를 꿈꾸게하는 동력이 소진되었을 때 나는 또 가슴에 스미는 바람을 느낀다. 농사경력 18년... ... 내가 생각해도 참 대견하게 오래 버텄다. 잘한건지 못한건지 모르지만... 요즘은 가끔 다른 삶을 꿈꾸기도 한다. 네팔... 그냥 한낮의 짧은 낮꿈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여기에 너무 많아 삶을 무겁게 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여기에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로 가득찬 나라 네팔로 향하는 그리움... 안나푸르나를 다녀온지 이제 만 3년이 지났고 5년안에 다시 찾겠다던 스스로의 약속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2016년 12월 적어도 2달 많게는 한 일년정도 히말라야의 언덕에서 네팔리와 함께 살아보고 싶다. 꼭 그래야지! 

 
오늘 하루 나에게 네팔의 삶을 꿈꿔보게 해준 아래 까페의 주인님께 감사드린다.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의 베이스캠프 "우리집"
http://cafe.daum.net/kantip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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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25년이 더 되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은 했는데 직장생활은 죽어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뭐 뚜렷한 대안도 없는 막무가내 삶을 살 때

아주 잠시잠깐 극장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신촌이나 대학로의 예술영화전용관 비슷한

작은 극장들을 들락거리며 나름 영화에 매료되었고,

어쩌다 혼자서 포스터를 보고 동국대를 들러

난생 처음 영화학과 학생들의 졸업작품전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라고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다가

무려 25년만에 명지대 영화학과를 졸업하는 딸아이의 졸업작품전을 관람했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고 한국영화는 일취월장 발전을 거듭해왔다.

기술적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술접근성이 엄청나게 진전된 덕분이긴 하지만

어쨌던 25년전 작품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졸업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복한 경험이었다.

 

사실 별기대 없이 딸아이의 졸업작품전이라니

가줘야지 하는 의무감만 가지고 관람을 하게 되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지금 청년세대의 세상을 보는 시각의 넓이,

나름의 삶을 바라다보는 눈의 깊이, 

그리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나름의 방법론을 만나볼 수 있었다.

 

제출된 4편의 작품을 일일이 평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니

일단 밀쳐두고 이번 작품들을 통해

지금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세대가

부모세대로부터의 정신적인 독립을 위한

늦은 산고를 겪고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졸업전에 제출된 4편중 3편에

작중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문제가 놓여 있었다. 

최지연 감독의 []에 비친 골통 아버지 한준,

김하나 감독의 작품에서 주인공 홍매의 아버지,

그리고 송화의 [비나리의 꿈]에서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든

새로운 세대의 성장을 위해 '아버지'

한번쯤 정리되고 처분되어야할 대상일 것은 분명하다. 

사실 이번 졸업작품전의 컨셉을 한마디로 '지체된 성인식'이라고 한다면

편협된 시각일 것이다. 분명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관람한 이번 졸업전은

딸들의 (공교롭게도 작품을 제출한 졸업생이 모두 여학생이었다)

아버지 떨치기가 전체적인 컨셉으로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년세대의 정신적 발달장애에 연유하던 아니면  

강고한 기성세대의 세대지배가 원인이 되었든지 

10대 사춘기 때 치렀어야 할 통과의례를

20대 청년이 치룬다는 것은 분명 문제 있어 보였다.

 

어디선가 읽었지만 

지금의 시민운동이 청년세대 나름의 과제가 없이

80년대에 제기된 과제를 아직도 수행하는 

낡은 시민운동의 보충대 정도로 소모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역사의 진전은 분명 낡은 것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것에 대한 열광 속에 이루어진다.

 

늦었지만 홍매와 기열, 그리고 송화의 아버지로 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기원하며 

이번 졸업전을 준비한 김소연, 김하나, 송화, 최지연 네 감독의

성공적인 작품활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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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대한도 지나고 이제 입춘을 기다리는 계절
아직 절기는 겨울의 한가운데지만
밤새 눈대신 비가 내리고
창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로운 봄을 느끼게 합니다.

한해의 끝마무리도 안된 어수선한 와중에
벌써 봄을 맞이하려고 보니
아직 정리할 것도 많고 
다시 시작해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작은 친목회에서부터 농민회활동,
마을사업과 봉봉협동조합 관련 업무들은 물론
개인 농사와 생활계획들 까지
어느것 하나 만만한게 없이 혼란스럽습니다.

다른 일들이 아무리 많고 복잡하다해도
그래도 오늘을 사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가슴을 짓누르는 가장 큰 돌은
'세월호'일 것입니다.

그냥 같이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년초 미루고 미루던 팽목항을 찾았습니다.
아직도 아이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먼 바다를 보며
가슴에 작은 약속하나를 담고 돌아왔습니다.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
가난하지만 의로운 삶, 당당한 삶을 살아야지!"

5월광주가 60년대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우리 세대 삶의 지표였다면,
이제 팽목항은 남은 우리 삶을 이끄는 등대가 될 것입니다.
세월호는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가져온 학살에 다름아니고
우리 사회에 넘치는 물질적 욕망들이 모여 초래한
집단살육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권력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아픔을 외면하다못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지만
세월호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유족과 시민사회의 모습에서 
우리가 나아갈 따뜻한 공동체의 꿈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팽목항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없는 먼 바다를 보고 차를 세웠습니다.
 
마른 가지에 벗꽃이 달리고,
연두빛 새싹이 눈을 틔울때 즈음
모든 기다림이 끝나고 
모두의 가슴에 따뜻한 봄햇살이 비추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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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되기 전에 나는 농협이 다른 많은 은행들 중 하나인 줄 알았다. ‘농협이 협동조합을 말하는 것인지, ‘협동조합이 뭐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농민이 되자마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나는 농협과 부대기며 살아야했다. 한해 두해 농사를 지어가면서 농협은 협동조합이고 적어도 이런저런 은행 중의 하나는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먹고 산 17년 세월동안 농협은 더 은행스러워졌고, 덜 협동조합다워졌다. 이제는 간판 자체도 바꿔 달았다. “농협은행이라고!

도시생활을 접고 봉화 산골짝 비나리마을에 짐을 푸니 이웃어르신께서 알려주셨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협 조합원으로 무조건 가입하라고! “왜요?”라는 철없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농협조합원이 되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긴 설명이 이어졌다. 먼저 농자금을 받을 수 있고, 농자재를 외상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 명절이면 선물도 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한 농산물도 출하할 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아이고 고마워라, 농협은 참 좋은 곳이구나며 달려가 조합원 가입원서를 내 밀었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되지만 조합원가입을 위해 서너 번을 더 농협을 찾아야했다. ‘다음 이사회 때 가입신청을 일관 처리할 예정입니다.’ ‘깜빡 잊고 가입원서를 본점에 넘기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처리해도 별 문제될 것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 이사회에서 안건이 많아 조합원 가입신청 안건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 무성의한 답변을 듣고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조합원 출자 증서를 두 손에 받아 쥐었다.

하지만 조합원 가입 출자증서를 받고 뿌듯해 하던 순간은 짧았고, 나의 농협과의 악연은 아직까지 길게 이어져오고 있다. 사실 농자재 외상이야 읍내 농자재가게 어디서라도 얻을 수 있고, 명절에 주는 조합원 선물이라야 소금 20kg 한포, 3kg 한포가 전부였다. 그나마 지역농협에서 농산물 집하와 출하를 수행하는 농협의 역할은 충분히 의미 있고, 조합원 농민의 입장에서 요긴하긴 하지만, 농산물 유통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알고 보니 농자금이나 정부정책자금은 농협조합원이 아니라도 받을 수가 있었고, 바로 여기에 농협과 농민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농업정책자금 대출로 생기는 이익이 농산물 유통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크고 손쉽다 보니 농협은 농산물 유통조직이 아니라 농민상대로 정부의 정책자금을 대출해주고 이익을 취하는 대출 업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가진 것 없이 산골에 짐을 풀고 농사를 시작하다보니 농협과의 첫 거래를 농가주택 신축자금대출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농사실패는 우선 빼어먹기 좋은 곶감처럼 달콤한 농자금대출로 눈을 돌리게 했고 농사 시작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아 상당한 부채로 불어났다. 흔히 이웃들이 농협직원 월급주려고 농사짓는다고 쓴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내 자신이 바로 그 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농협대의원이란 걸 자의반 타의반으로 맡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처음 대의원 총회를 참석해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합장이 총회장 입구에 서서 입장하는 대의원에게 일일이 허리 숙여 악수를 청했다. 다른 임직원들도 황송할 정도의 응대로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꾸벅꾸벅 졸고나면 농사일 하루 일당보다 훨씬 많은 돈을 수당이랍시고 주고, 선물과 푸짐한 점심식사까지 대접했다.

한번 두 번 총회 참석이 늘어나면서 마음 한구석에 일말의 미안함이 싹텄다. 우리 마을 조합원을 대표해서 조합원의 이익과 편익을 늘이기 위해 총회에 참석해서 농협 경영을 감시하고 시책 제안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 대의원의 역할 일진데 내 자신은 물론 대의원 거의 모두가 묵묵부답 말이 없었고 총회는 일사천리로 지나갔다. 배포된 사업계획서나 예결산 자료를 이해할 수도 이해할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로 돌아와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농협을 지칭할 때 그 도둑놈의 새끼들이라는 수식어를 빼먹지 않았다. 간혹 오다가다 농협창구에서 큰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 만만한 창구직원에게 어거지성 호통만 치는 조합원뿐이었다. 발언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면서 농협에 적의만 가지고 있는 조합원은 바로 자신이 비난하는 그 조합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합이 바로 자신들 것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눈치도 없이 대의원 총회에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요주의 대의원으로 찍힐 게 분명하지만 나름대로 할 말을 하는 대의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적은 내부에 있다고 하듯, 농협임직원들보다 대의원들 중에서 직접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대충 하이소. 밥 묵으러 가입시더.”

농민의 농협을 진정한 농민 자신의 것으로 돌려놓기 위해 농민회 회원들은 농협을 방기해 놓을 것이 아니라 대의원으로 참여해서 발언하고, 대의원 총회의 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는 작당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엉뚱한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바로 협동조합 기본법발효에 따라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면서 우리 지역에서도 나름대로 농민회중심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모아졌다. 농민회회원들은 끊임없이 농협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드는 시도도 같이 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봉봉협동조합을 만들고 나서 보니 농민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회원들 대부분이 임원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타 조합의 임원은 농협 대의원을 겸임할 수 없다는 법적인 자격문제가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봉봉협동조합을 만들고 운영을 해 나가면서 농협은 남의 일로 방치할 순 없었다. ‘협동조합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는 과정과 병행할 때만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조직이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협동조합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협동조합에 대해 알게 되는 만치 농협에 대한 요구도 더 늘어났다. 누가 뭐래도 농협은 한국 협동조합의 맏형이다. 설립 배경과 그동안의 역사를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규모나 농촌에서의 영향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 붐이 우리사회를 움직이고, 우리의 생활을 규정짓는 원리들을 그 저변에서부터 바꾸는 역할을 재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끄는데 농협이 할 역할이 분명이 있고, 그것도 지대할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 설립 붐은 농협의 토대를 위협하는 불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농촌에서 생겨나는 신생 군소 협동조합의 설립 붐은 농협이 우리 사회에서 가질 바른 위상을 찾고 협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하고, 그럴 때 농협은 한국 협동조합의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농협이 협동조합의 맏형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 모두 다 언감생심이라고 면박을 줄 것이다. 농협이 나서서 지역사회 내 소규모 신생 협동조합들을 지원하고 이끌어야하지만 현실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대를 하는 자신조차 농협에 무슨 요구를 할 것인지, 지역사회 내 사회적 경제를 구축하는데 어떤 역할을 기대할 것인지 참 막연하다. 하지만 농협이 농민의 것이기에 결코 포기할 순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주 기본에서 시작하면 될 것 아닌가.



사실 나는 농협 조합원 17, 대의원 6년 동안 단 한 번도 협동조합이 무엇 하는 조직인지, 협동조합의 정신이 무엇이고 농협은 또 어떤 조직이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어쩌다가 신규 대의원 교육이라는 이름의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지만 농협 자신의 경영성과에 대한 자화자찬과 대의원을 위무하는 유흥으로 채우진 일정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었다.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조합원 교육이 조합의 사활을 건 중심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농협은 조합원 교육을 스스로 방기해 왔고, 의도적으로 회피해 왔다. 복식부기를 이해하고, 대차대조표를 읽을 줄 알고, 농협경영에 토 달 수 있는 조합원을 스스로 키워낼 정도로 농협은 성실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았다. 이제 비록 미미한 존재지만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볼 거울이 생겼다. 이번 기회에 협동조합 교육의 장을 농협 주도로 지역사회 내 신생 협동조합들과 연대하여 만들어보자.

지금은 거의 껍데기만 남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농협 업무에는 분명히 지도사업이라 것이 있다. ‘작목반같은 생산자 조직 지원이나 팜스태이같은 도농교류 사업 지원 등을 일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역 내 농업관련 협동조합의 조합원 대부분은 동시에 농협 조합원이다. 결국 농협과 신생 협동조합의 관계는 농협과 작목반의 관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작목반의 활성화가 농협의 이익에 도움이 되듯, 지역사회 내 다양한 농업관련 협동조합이 활력을 가진다면 곧바로 지역 농협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농협이 나서서 지역내 신생 협동조합이 자리 잡고 재대로 운영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둘러보고, 무엇을 지원하고 어떻게 이끌 것인지 지도사업의 범주 내에서나마 고민하길 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생산자협동조합이 농협의 준조합원으로 가입을 하던지 필요하다면 다른 관계 방식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동 교육이나 지도사업을 통해 만나게 될 신생협동조합은 거대 농협으로 하여금 지금은 잃어버린 초심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물적 기반과 경영 능력과 성과 면에서 거대 농협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신생 협동조합은 대신에 헌신적인 조합원, 조합원과 조합의 밀착된 동반관계, 신뢰와 협동에 기반한 운영, 경영 자료의 공개와 공유를 위한 노력, 교육에 대한 갈망, 너 나아가 세상을 따뜻한 공동체로 바꾸겠다는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룡 같은 농협과 개미만한 신생 협동조합이지만 충분히 서로 주고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다. ‘교육에서 시작하는 공동사업을 통해 농협은 재벌적 경영주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가치와 덕목을 회복하고, 신생 조합은 농협으로부터 경영 노하우와 최소한의 물적 기반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농협은 우리 농촌, 나아가 우리 사회를 생존경쟁만 있는 정글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따뜻한 인류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냥 헛된 꿈인지도 모른다. 모든 농민이 자신이 농협의 조합원인 사실을 자랑스레 여기고, 농협 임직원이 농민을 위해 일한다는 자긍심과 성취감을 느끼는 세상. 이는 먼저 농협이 농민과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들로 시작해야 한다. 사실 농협점포에 들어서면 다 아는 얼굴이다. 한해 두해 농사지은 것도 아니고 좁은 지역사회 에서 모르는 얼굴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농협 직원 들은 조합원이 점포에 들르면 늘 반갑게 인사하고 커피부터 권한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전하고는 퍽 달라진 풍경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안면관계를 넘어 농민과 농협이 마주한 지점에는 늘 긴장감이 흐른다. 농민은 농협에 대해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왜일까? 농민과 농협의 이익이 서로 맞서있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최소한 이익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합원 농민의 소득과 농협 직원의 임금은 연동시키거나 상징적으로 조합장 연봉만이라도 연동하는 방법도 강구해 볼만하다. 그것이 어렵다면 농협은 농협이 버려둔 공터에서 자라나, 농협이 방기한 가치를 기반으로 자라나고 있는 신생협동조합과 손을 잡고 농민 곁으로 다가가면 된다. 그것도 교육같은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힘들게 농사 뭐하려 짓냐는 짓궂은 물음에 농협직원 월급주려고 짓는다는 쓰라린 자조를 사라지게하고, 사회적 경제의 큰 주체로서 농업협동조합이 우뚝 설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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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0일(금요일) 봉봉 사무실에서 조합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인근의 조합원님을 중심으로 서른 분 정도가 참가하여 

귀한 배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교육은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초대 강사 선생님은 한국 농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오신 

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권영근 선생님이었습니다.

 

강사님은 경제학의 개념부터 정의하시면서

2차세계 대전 전후 부터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이 태동하고 발전해왔고

그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 2시간을 열강하셨습니다.


특히 한국 협동조합(생협)의 태동에서 부터 늘 함께해오신

경험을 토대로 협동조합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특히 주식회사형 경영을 도입하게되면서 어떻게 대형 협동조합들이 파산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한국의 현재 대형 협동조합들이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이탈하는 측면에 대한 비판 

그리고 유럽형 사회적 기업과 미국형 사회적 기업의 차이에 대한

내용은 우리의 향후 행보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이번 교육을 계기로 가능한 매달 1회 협동조합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여

조합원간의 친교의 시간도 가지고 봉봉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지적 정신적 밑천도 두둑히 마련하겠습니다.

조합원 여러분의 지속적인 참가 당부드립니다.


7월 교육계획은 별도 공지하겠습니다.



<6월 강의 모습... 처음 15명의 수강생으로 시작해서 많이 서운했는데 

곧 30명의 수강생이 강당을 채웠습니다. 

밤늦도록 아무도 졸지 않고 열공하시는 조합원님의 진진한 표정을 보니 봉봉의 미래가 밝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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