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귀농 15년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보따리 싸들고 서울을 떠나온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 흘러 나는 삼십대 중반의 새신랑에서 오십대 초반의 중년으로 변했다.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얼치기 귀농자에서 이제 산골 마을 비나리의 어엿한 주민의 한 사람이 되었고,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농부가 되었다. 물론 세월이 저절로 나를 비나리마을의 주민으로, 농부로 만들어준 것만은 아니다. 한명의 농부, 한명의 마을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인고의 세월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고 쉽지 않은 고난의 통과의례를 헤쳐 나와야 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니 아득한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아직 갈 길이 더 먼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하면 귀농 실패 한다’라는 제목의 전문가연하는 분들의 글에 나오는 딱 그런 귀농을 했다. 세상살이에 지쳤고, 그리고 막연한 농촌살이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막무가내 보따리를 쌌다. 내가 받은 귀농관련 교육이라고는 농협주관의 2박3일 교육이 전부였고, 그리고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요구된다는 최소한의 자금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이고, 저 허리 굽은 노인네도 농사지어 자식 다 키우고 밥 안 굶고 살고 있는데 시퍼렇게 젊은 내가 설마 처자식 굶길라고. 하는 오기만 잔뜩 가슴에 품고 낯선 마을에 짐을 풀고 난생 처음으로 호미를 잡았다.
그리고 농촌의 실상을 잘 아시는 분들이면 쉽게 예상하시겠지만 나는 번번이 엎어지고 깨어졌다. 벼랑 끝에 내몰려 다시 귀도를 고려해야할 만치 절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산골마을은 각자도생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가졌던 산골살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많은 부분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내가 어려울 때 이웃은 외면하지 않았고, 또 이웃이 고난에 처했을 때 내 역시 무심할 수 없었다. 흩어진 기억을 추슬러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품삯에 연연하지 않고 해 떨어진 고구마 밭에서 수확을 거들어 주시던 이웃 할머니, 도끼 자루 만드는 일부터 장작 패는 일까지 고스란히 삶의 지혜를 전수해 주셨던 이웃 어르신, 어떻게 하면 희망이 사그라지는 농촌에서 아름답고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이 고민을 나누던 젊은 친구들이 있어 나는 좌절할 수 없었다. 해거름에 지쳐 돌아오는 날 아득한 눈빛으로 맞으시며 ‘인자 오는가’라는 한마디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해주시던 앞집 형님,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피땀으로 농사지은 수박이 한줄기 소나기에 다 갈라져도 몇 개 남지 않은 성한 놈을 골라 이왕 망한 농사 맛이라도 보라며 가져다주시던 바로 그런 이웃이 있어 나는 이제 어엿한 비나리마을의 주민의 한사람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공동체에 눈을 뜨고 더불어 사는 재미를 맛보게 했던 [청량산감자작목반]의 일원이 되고, 또 농촌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앞서가던 이웃의 손에 이끌려 [관북 팜스테이마을]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세상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 농사지어 내 가족 먹여 살리겠다던 나의 삶의 모토는 폐기되었다. 산골살이를 시작한지 오륙년이 지나면서 소위 다양한 공동체 사업, 특히 도농교류사업에 참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이 지원하고 주민이 주도하는 도농교류사업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세월이 가고 성과가 쌓이면서 이제는 농민회와 같은 농민 자치조직이나 협동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의 형식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도농교류가 먹거리의 공급처와 소비처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도시와 농촌을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고 이를 통해 도시와 더불어 농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도농교류의 일면성이 갖는 위험을 자각 하고 외부와의 관계보다 내부의 변화를 중심에 둔 사업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오직 ‘소득증대’만이 마을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주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가치기반의 공유와 귀속감 형성을 통한 정체성 확립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자각에 이르기도 했다. 나의 관심은 녹색체험마을과 정보화마을 사업에서 마을공부방이나 자활농장으로, 체험프로그램에서 동제나 초롱계같은 마을의 전래풍습으로, 도농교류에서 주민교육 중심의 “마을학교”로 관심의 중심이 바뀌었다.
이제 다양한 마을사업의 작은 성과로 ‘비나리마을학교’라는 외적 인프라와 그 ‘학교’를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혹은 가치를 빈약하게나마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주말이면 도시의 청년학생들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러 마을을 찾고, 주중이면 주민들이 같이 모여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지키고 고양시킬 다양한 배움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초라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조금의 시간과 좀 더 많은 열정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농사는 뒷전이고 이웃과 더불어 ‘비나리마을학교’를 통해 마을의 가치, 농업 농촌의 가치,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모으고 다듬어서 세상에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하루라도 빨리 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 주어진 일에 조갑증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나는 세상을 버렸지만 마을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마을살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재미를 찾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수 있었다. 그것은 땅을 일구며 누대를 살아오신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의 심원한 삶의 지혜에 내가 감화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을이 갖고 있는 유구한 역사가 전해주는 에너지에 내가 동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자신이 생애동안 내렸던 수많은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을 ‘귀농’이라고 자신한다. 그렇게 선택한 길은 온갖 위험과 유혹이 도사린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한참을 왔지만 아직 갈 길이 더 멀다. 나는 그래서 좋다. 쉽지 않고 또 멀기까지 한 길의 매력에 공감하는 분이라며 나는 스스럼없이 귀농을 권할 것이다.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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