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은지 너무 오래되었다. 책은 늘 뒷전이었고 더군다나 문학이 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허우적거리고 쫓기다 모처럼 남는 시간조차 공허가 갉아먹게 방치하면서도 소설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다. 나의 2021년의 삶은 그랬다.
문학소년의 꿈과 세계를 향한 청년의 열정이 무너지고, 가정과 생계라는 삶의 요구에 대한 무능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은 나를 30대 후반의 나이에 농부로 만들었다. 영혼의 노동인 독서와 육체의 노동인 농사가 어우러진 삶을 살겠다는 소박한 꿈은 생계를 위한 농업 노동 속에서 잊혔고 척박한 삶의 조건을 이유로 내면의 삶은 고갈되었다. 영혼 잃은 육체는 얉고 넓은 사회적 관계와 더 혹독한 노동 속에 갇혔다..
여러 번 읽다가 말고 던져졌던 조르바가 문득 그리워졌다. 나는 자유에 목말랐고, 삶의 압박에 고갈되어 가는 나의 자존이 그리웠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연말연초에 책장을 뒤져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았다. 미리 가졌던 조르바와 연관된 기억을 지우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주하기로 마음먹고 책장을 넘겼다.
비린내 확 풍기는 항구도시 피라에우스에서 화자인 ‘두목’과 코스탄디 조르바의 조우 그리고 ‘두목’과 친구 혁명가와의 이별의 기억이 교차하면서 시작된 소설은 500쪽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화자와 조르바와의 만남과 헤어짐, 우여곡절과 내면의 교류를 이어갔다.
소설은 샐비어 술과 조르바의 춤, 부불리나 오르탕스와 조르바의 어설픈 사랑, 오렌지향 과부의 삶과 비극, 영혼 없는 수도원, 갈탄광산 개발과 운반용 삭도 건설 그리고 사업 실패, 오르탕스의 영원한 사랑 카나바로의 이야기로 이어져 나가지만 작가의 메시지는 오직 하나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소설을 읽고 교훈을 생각하다니... 그런데 조르바는 어쩔 수 없었다. 야생의 삶 속에서 자유를 터득한 조르바가 지식과 이념에 오염된 두목에게 설파하는 자유의 메시지는 생활의 강제와 편견의 족쇄에 갇힌 독자에게는 사랑을 설파하는 예수의 산상 교훈처럼 근본적이되 딱 그만치 공허했다. ‘자유하라!’는 조르바의 일갈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만치 청자의 내적인 반향이 없다면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자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답은 알 수 없지만 부정적 느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카자차키스가 갈구한 자유가 과연 민족, 종교, 사상 넘어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어떤 자유도 나의 몫이 될 수 없다는 딱 그만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조르바의 자유를 100$ 공감하기에는 너무 낡았고, 내가 걸치고 있는 세월의 외투가 너무 두터운지도 몰랐다. 기대했던 공감이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은 책을 다 읽고 덮은 뒤에도 한참을 귓전에 남아 맴돌았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당신을 메고 있는 줄이 조금 길 뿐이다.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런 상태’다.
이 세상의 유혹 가운데 가장 무서운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카잔차키스)
인간은 마땅히 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니체).(니이체)
인간의 보편적으로 경험해온 기나긴 진화의 역사는 경화된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기 위한 생의 도약의 역사다. (베르그송)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인류보편의 속성에 대한 낡은 물음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의 답을 구한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기되어 왔던 낡은 질문이다. 정답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아니면 백지상태라는 3가지 선택지 안에 있을 뿐이다. 어떤 답을 선택하든지 자유지만 왜 그와 같은 답을 선택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해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시도가 가지는 매력은 주장의 선명함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구하는 접근방식의 설실함에 있다. 필자는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분석이 아니라 실증적 사료에 입각한다. 한축으로는 현재 인간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대한 악한 이해를 논박하고, 또 다른 한축으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지를 실증한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최종적 주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실증적 논거에 대한 반박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로서 나는 그의 주장에 최종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 실증에 대한 반박은 쉽지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실증’의 어려움에 기인할 것이다.
먼저 필자는 현대 문명이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전제 위에 구축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홉스의 인간관에 기반을 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과 마키아벨리 정치학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철학적 사상적 기반이다. 구체적 현실을 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팽배하고 부정적 뉴스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다 많이 영향을 받는 부정편향에 빠져있고, 넘쳐나는 부정적 뉴스에 묻혀 가용성 편향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비관적인 견해는 기독교 초기 원죄개념 속에서도 드러난다. 원죄개념은 종교개혁 뒤에도 존속하고, 신앙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는 계몽주의 사상에 그대로 계승된다. 인간을 ‘살인자의 후손’으로 지칭한 프로이드나, 삶이란 하나의 전투라고 설파했던 헉슬리는 모두 스미드와 마키아벨리의 후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밝히는 현실을 지배하는 인간 본성은 악하다는 인식의 원인이자 결과다.
필자는 상식을 비집고 반박의 근거를 물색한다. 먼저 필자가 소환한 엠마 골드만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피력한 사상가들을 ‘정신적 사기꾼’이라 일갈한다. 엠마 골드만의 주장을 이어 인간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한 실증적 연구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친숙하게 접해왔던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루시퍼 이펙트/이 실험은 인지부조화와 권력의 힘을 설명)’,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대중심리 테스트), 키티 제노비스의 사건(방관자 효과/1964년, 키티 제노비스가 뉴욕 시의 자기 집 근처에서 다른 많은 주민들이 알아챌 수 있는 조건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허구성에 대한 필자의 주장을 만난다. 이들 사건은 인간의 악마성을 논증하기 위한 사례들이지만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해석된 오류투성이 일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동시에 필자는 인간 본성의 선함이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은 선함을 논증해 들어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정치 지도자의 필독서였던 구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학]에 입각해 대중의 동요와 공동체의 붕괴를 촉발하기 위해 민간에 대한 무차별공습이 이루어지는데 공습의 결과는 대중들을 더 결속하게 하고 협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독일에 의한 런던 대공습,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대공습, 그리고 미국에 의한 베트남 대공습은 이를 결정한 정치집단의 의도가 무참히 박살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소기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위기에 처해 동요하고 광란에 빠지고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침착함을 잃지 않고 협력하고 의지했다. 위기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거를 격파하거나 착한 본성을 드러내는 사례들로 구성되어있다. 그 각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이 표출되는 과정을 그린 “파리대왕”은 아태섬에 표류한 실제 사건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실제로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은 협력하고 의지하고 희생했다. 인간은 호모퍼피로 인간의 생존력은 지능이나 근력이 아니라 친화성에서 나온다. 전쟁에서 다른 인간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공유지의 비극’은 지식인의 상상이지 현실을 반영 하지 못한다. 방관자효과 이론과는 달리 현실은 재난에 처한 타인을 위해 서로 희생하는 역방관자 효과가 더 많다.
하지만 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600만 명을 학살한 가스실을 만들고 가장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적 문명을 동반하는가는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답한다. 그가 제사하는 답은 권력이 부패하는 과정인 ‘후천적 반사회화’와 ‘공감’의 역설을 제기한다. 특히 공감은 혈통, 영토 등 근친성을 공유하는 집단 간 내부 결속과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타성을 가져온다. 배타성은 타자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 하는 폭력성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사피엔스]의 필자 유발 하라리와 브레흐만이 대척한다. 하라리는 인간이 가진 상상의 공동체가 인간의 유대와 결속 공감을 통한 문명의 창조를 낳았다고 본다면, 브레흐만은 그 상상의 공동체가 동시에 인간을 가장 잔인한 동물로 만드는 함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섬뜩하고 기발하고 향후 논의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명료하고 직선적이라 따라가기가 쉽다보니 분량에 비해 드물게 잘 익히는 책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쉬 그의 결론에 동의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반복하는 플라시보 효과와 시노보 효과를 대비해 펼친 주장은 논증이 아니라 도덕적 제안으로 들린다.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인간본성이 선하다고 이해하는 순간 인간본성은 선하게 귀결된다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희망사항이고 교리에 가깝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현실속의 악을 줄이고 선을 증진하기 위한 대응’은 논리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와 같은 필자의 입장은 지구온난화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며 비관적인 주장을 펼치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 정말 지구가 종말을 맞을지도 모르니 인간의 회복탄력성을 믿고 낙관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은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희망사항의 피력으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한권의 책으로 가치를 따진다면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인류 문명이 가진 비극의 지점들을 짚고 희망을 만들기 위한 지식인의 모범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자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성찰과 모색은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지식인의 책무이고 이에 충실한 필자는 ‘기본소득제’의 선구자를 자청하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필자의 다음 책은 아마도 기본소득제에 관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내가 이해하는 “식물혁명”은 식물을 바라 보는 우리 관점의 혁명을 말한다. 지금 까지 식물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한 종류로 물과 공기처럼 꼭 필요하지만 그리 귀하지 않은 자연 자원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필자 스테파노 만쿠소는 이 책 [식물혁명]을 통해 그와 같은 식물에 대한 낡은 이해를 뒤집고 식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신비롭고, 풍부하고, 또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필자는 이 책 [식물혁명]을 수준 높은 식물학적 지식을 담고 있는 과학책이자, 동시에 식물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는 ‘실용서’로 만들었다. 나아가 이 책은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를 이끈 문명을 ‘동물적 문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대체할 ‘식물적 문명’을 제안하는 문명 비판서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인류를 이끈 기계문명은 동물조직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으며 사회조직조차 동물세계의 위계적이고 집중적인 권력 구조를 답습해서 채택해 왔는데, 이제 새롭게 이룩해야할 문명은 식물의 분산적이고 협력적인 구조를 원용하고, 저투입 고효율인 식물의 존재방식을 따라 새롭게 생태문명을 구현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문명은 식물적 생존 시스템을 원용하는 새로운 식물적 문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문명 비판적 주장까지 이르는 과정은 풍부한 식물학적 지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스테파노 만쿠소는 식물은 의식이 없다는 편견에 대해 도전한다. 필자는 뇌의 존재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생명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식물유기체는 뇌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용기관 없이 지능이 발달했다는 점을 주장한다. 실험을 통해 미모사는 뇌 없이 기억하는 식물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이어서 지금까지 동물을 모방하는 기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적용한 기술적 사례에 대해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은 “신중하게 자연을 바라보면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인간은 동물을 중심으로 보고 식물을 소홀히 다뤘다고 본다. 필자는 이제 식물적 문명을 이끌 플랜토이드를 제안한다. 우리가 아는 안드로이드(Android 人造人間)는 인간의 외형과 특성을 모방하는 시스템을 말하고(로봇은 체코어 ‘robota’에서 왔다.) 이것을 뛰어넘어 식물의 작용에서 영감을 얻은 로봇인 plantoid는 향후 화성탐사는 물론 오염물질제거 등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의 가능성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식물은 단지 인간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염감이나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유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아놀리가 발견한 ‘보퀼라’는 실물계의 젤리그로 불리며 자신이 타고 올라가고 있는 관목의 잎에 따라 스스로 잎 모습을 변형시키는 위장술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모방사실보다 이 식물이 무엇을 어떻게 모방해야할지 어떻게 스스로 인식하는가에 라는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스테파노 만쿠소는 자연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시각 등 인식시스템이 존재한다고 보고,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아직 해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식물역시 분명한 인식과 판단이라는 결정과정을 가동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아가 인간과 식물의 동반자 관계를 탐색해보면 이 관계를 통해 종족의 존속과 번성을 이룬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인 밀, 옥수수, 쌀이라고 한다. 이 세 작물은 인류가 섭취하는 칼로리의 액 60%를 공급하고 있고, 미국인 한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의 약 69%를 옥수수 단 한 종류가 공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인간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줌으로써 이들 작물은 지구 표면을 가장 넓게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사례로 렌즈 콩밭에서 자라는 살갈퀴라는 잡초를 들고 있다. 이는 “바빌로프의 모방”이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살갈퀴는 렌즈콩 밭에서 자라면서 스스로 모방하고 변형되어 자신의 열매가 렌즈콩을 닮아가도록 한다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부분은 결과론적인 것을 의식적 모방으로 오도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간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다.
그리고 필자는 근육 없이 이동하는 식물의 능력을 확인하고, 페퍼라는 학자가 타임렙스를 이용해 이를 증빙했던 사례를 제시한다. 즉 식물은 동물과 다른 방식으로 지능을 갖추고 있고, 근육 없이 나름대로 운동할 수 있는 유기체라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식물 구조를 원용한 건축물로 빅토리아 연꽃을 모방한 크리스탈 팰리스의 사례를 들고 있고 나아가 우주라는 조건에서 식물의 생존가능성을 연구한 결과를 제시하고, 극악한 건조기후에서도 2000년 이상 생명을 이어가는 ‘웰위치아 미라빌리스’라는 식물을 소개하면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식물을 여러가치 측면에서 모방하고 활용가능함을 제시한다.
이 모든 식물의 특징에 대한 분석 끝에 필자는 새로운 사회솔루션으로 ‘초록민주주의’를 제시한다. 필자는 민주주의가 자연에 대항하는 제도라는 주장이 자연을 거스르는 개인적인 권력에 대한 갈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보고, 엄격한 노동기능의 구분과 확고한 계급구조 때문에 발전했던 사회들이 앞으로는 더 이산 존속하지 못할 것이라 예견하다.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탈피해 자기 영토에 정착하여 분산화 되고, 사회자체의 여러 세포들에게 결정권과 통제 기능을 나누어 주는 권력이 수평 분산된 그물형으로 탈바꿈한 초록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등 식물의 구조와 비슷한 탈 중심적 통신기술의 발달 덕분에 비계급적이고 분산형인 조직의 예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위기피디아의 사례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식물적 시스템에 가장 부합하는 사회제도로 계층구조 없이 구성원 전체에 의존하는 협동조합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현대 기술에 의해 ‘네크워크’라는 특별한 힘으로 통합된 협동조합의 전통이 미래를 위한 가치 있는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덧붙여 필자는 현제 직면하고 있는 농업 문제를 진단하면서 수많은 선진농업 지역에서 작물의 농산물 수확량이 이미 생물학적 최대치에 도달했다고 진단하고. 나아가 선진국의 획일적인 산업형 단작재배방식이 기후위기에 특히 치명적이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다양성이 살아있는 재배방식으로 전화해야 됨을 역설한다. 이런 필자의 입장은 그 진위를 떠나 인류가 직면한 식량 문제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선임에 분명하다.
이 책 [식물혁명]은 식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기후 변화 등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전략을 식물의 생존전략에서 배워오고 원용할 수 있음을 피력하는 ‘식물적 문명’을 주창하는 문명비판서다. 큰 기대없이 집어 든 책이 일으킨 반전은 기대밖의 충격을 주었고, 필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시각의 탁월함과 지적 신선함은 책읽기의 즐거움을 배가했다. [식물혁명]은 가볍게 읽기 시작해서 무겁게 내려놓은 책으로 남을 듯하다.
필자 폴 너스는 효모 연구를 통해 세포 증식이 어떻게 제어되는 지 연구한 성과로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한 유전학자면서 자신의 연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하고 영향을 주고받는지 고민한 특별한 사람이다.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기반으로 시야를 넓혀, 당대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대중적 과학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과학이라는 전문 지식과 대중의 상식을 잇는데 성공한 모범적 사례의 하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 가능하다고는 할 수는 없다. 특히나 고등학교시절 공부한 [생물] 교과의 내용조차 기억에서 사라진 인문사회학을 전공했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 책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생명현상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통찰을 토대로 일반인의 수준에서 이해 가능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과학적 지식이지만 다행히 수식이나 화학식 같은 걸림돌도 없고, 섣부른 해석이나 비약없이 최대한 간결하고 담백하게 과학적 사실에 충실하게 서술되어 있다. 흔히 생명의 근원을 따지다 보면 궁극에는 애매모호한 생기론이나 신비주의적 해석에 봉착하기 쉬운데 이 책 어디에도 그런 비과학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지만 어떻게 보면 책을 보는 재미가 덜한 이유일 수도 있다.
과학자로서 세상에 임하는 필자 폴 너스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지만 궁극의 의문은 생명현상에 관한 것임을 고백한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방대하고, 우리의 경외심을 일으키지만, 그 드넓은 우주의 여기 한구석에서 번성하고 있는 생명이야말로 우주의 가장 매혹적이면서 수수께끼 같은 부분에 속한다.”(p.13)
그런 입장은 그의 연구 인생 전체를 관통하고 주로 효모의 생명현상 연구를 통해 그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의 생명현상을 이해하는데 까지 밀고 나간다. 그 과정을 통해 폴 너스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세포, 유전자,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화학으로서의 생명, 정보로서의 생명이라는 다섯가지 키워드를 매개로 천착해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세포이야기는 1665년 로버트 훅에게서 시작된다고 한다. 이후 많은 과학자에 의해 ‘모든 세포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 이라는 이해에 도달하고 나아가 생명의 최소단위인 세포의 연구를 통해 보다 복잡한 생명체의 생명현상을 이해해 나갈수 있다는 입장에 도달한다.
우리가 아는 세포는 활동한다. 즉 움직이고 환경에 반응할 수 있고, 세포의 내용물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세포는 이미 존재하는 세포의 분열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세포분열은 모든 생물의 성장과 발단의 토대이다. 사실 이 이상의 생명현상은 없다.
이와같은 생명현상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세포라는 존재의 핵심에는 유전자가 있다. 유전자를 이루는 DNA deoxyribonucleic acid는 세포와 전체 생물이 성장하고 유지하고 번식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DNA는 A, T, G, C라는 염기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염기배열의 순서가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유전자가 약 22,000개의 DNA를 가지고 있고 유전자의 염기 배열에 변이가 생기면 유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선택이 개입한다. 유전자 변이가 초래하는 개체의 변화는 자연선택을 통해서만 승계되기 때문이다.
‘화학으로서의 생명’의 장은 파스퇴르가 말한 ‘화학반응은 세포의 생명의 한 표현이다’는 언명에서 시작한다. 모든 생물의 세포내에서는 수천가지 화학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분자들을 분해하고, 세포 성분을 순화시키고, 에너지를 생산하는 세포의 생명활동은 온전히 화학반응이고 이것을 대사metabolism라고 한다. 즉 대사는 생명의 화학이다. 라부에지에는 200여년 전에 발효가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묻기 시작한 이래로, 생물학자들은 세포와 다세포 몸의 복잡한 행동조차도 화학과 물리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왔다. 궁극적으로 생명은 비교적 단순하면서 잘 이해된 화학적 인력과 척력의 법칙, 분자 결합의 형성과 파괴로부터 출현한다.
생명 개체는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취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관리해야한다. 이 점에서 ‘정보로서의 생명’ 개념이 성립한다. 정보에 기반한 목적 행동은 생명을 정의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살아 있는 계가 전체로서 작동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정보가 생명을 이해라는 열쇠임을 말해주는 사례는 유전자 조절이다. 우리의 콩팥, 피부, 뇌에 있는 세포들은 모두 동일하게 2만2천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유전자 조절은 콩팥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유전자가 배아의 콩팥세포에서 “켜지고”, 피부나 뇌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유전자들은 “꺼진다”고 한다. 그리고 세포는 생명의 기본단위이고, 생명을 정보라고 보는 관점에 함축된 의미는 세포 너머로까지 확장된다.
폴 너스는 다섯가지 키워드로 생명을 규명한 뒤 생물학의 지식이 세계를 바꾸는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피력하기 위해 한 장을 할애한다. 먼저 코로나 상황에서 과학의 검증을 통해 산출한 백신에 대해 증거없이 안정성이나 효과를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것을 범죄로 단죄한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도 헌팅턴 병이나 낭성섬유중 같은 유전병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줄만치 안전해지 날이 올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GM식품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를 피력하는데 GMO관련 논쟁이 오해, 로비, 잘못된 정보로 인해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고발한다. 현단계에서 동의할 수 없지만 GMO에 대해 과학적 지식은 전무하고 정서적 거부감 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토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장에서 폴 너스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포괄적인 답을 제시한다. 이전 표준적 이해였던 생물이 운동, 호흡, 감각, 성장, 번식, 배설, 영양이라는 특징을 가진다는 정의는 생물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요약해 줄뿐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진 않는다고 보고 필자 고유의 정의를 제시한다.
자연선택을 통해서 진화하는 능력은 필자가 생명을 정의하기 위해 이용할 첫 번째 원리이다. 생명은 진화하려면 번식해야하고, 유전체계를 지녀야하며, 그 유전체계는 다양성을 드러내야한다. 두 번째 원리는 생명체가 경계를 지닌 물리적 실체라는 것이다. 자신의 환경과 분리되어 있지만 그 환경과 소통을 한다. 이 원리는 세포라는 개념으로부터 유도된다. 세 번째 윈리는 실체가 화학적, 무리적, 정보적 기계라는 것이다. 그 결과 살아있는 실체는 목적을 지닌 전체로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생명은 하나의 전체론적인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기에 이 상호연결성은 생명의 핵심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과학이 도달한 생명에 대한 이해는 겨우 겉핥기 수준에 불과하고 수십억개의 누런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추상적 사고, 자의식, 우리의 자유의지처럼 보이는 것을 생성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발걸음을 겨우 땐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도 필자는 인문학과 과학이 공통의 언어를 만들고, 접점을 넓혀나간다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 화학적, 정보적 체계로서의 우리를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될 임을 천명한다. 또한 우리가 생명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수록 인류의 삶을 개선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고 단언한다.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기본소득을 처음 제기했던 토마스 페인이후 서구에서 지속적인 제기와 논쟁, 실험과 적용시도가 있어왔다. 하지만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가장 완성된 형태의 기본소득제가 실현될지 모른다. 팬데믹이 가져온 불평등 심화와 더 불안정해진 개인의 삶이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했고 급기야 정치권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기본소득이 운위되기 시작한 것은 10여년이 넘었지만 정치권을 중심으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관련된 논쟁이 분분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시민사회에서 소개수준의 논의가 진행 중이던 것이 코로나 팬대믹을 거치면서 급속이 현실 정책적 함의를 얻게 되고 특히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핵심 아젠다로 기본소득을 채택하면서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에 맞선 많은 경쟁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기본소득제는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었다. 향후 대선을 비롯한 정치 일정은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과 찬반 정치세력의 대결 결과에 따라 기본소득의 미래,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되지 않을까 전망하게 된다.
이 책은 기본소득과 관련해 진행된 거의 모든 논쟁의 쟁점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유럽에서 기본소득 지지자와 사회민주당 계열의 좌파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쟁점의 적확성이나 시의 적정성에서 대한민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기본소득관련 논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같다. 물론 유럽 좌파의 논쟁과 대한민국에서 진행중인 논쟁의 쟁점이 어긋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기본소득이 계급해방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기본소득이 노동의 집단성을 해체시키고 개별화함으로써 공동체를 와해시키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는 한국 정치 현실에선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주로 재원조달과 기회비용(같은 예산으로 더 좋은 복지가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그리고 노동의욕 상실(고용 노동으로부터의 도피)과 관련된 문제제기가 중심이고 이 역시 유럽에서 진행중인 논쟁의 쟁점과 중첩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생생한 논쟁은 핵심적 논점을 향해 육박하는 실황중계 중인 토론을 보여주는 듯 현실적이고 다이나믹하다. 100여 쪽을 겨우 넘긴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주창자와 비판자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 혹은 양측의 주장이 통합될 수는 없는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해 좀더 명쾌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요점정리>
1. 필리스 판 파레이스 : 기본소득과 좌파, 유럽에서 벌어진 논쟁
좌파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부정의한 것으로 정의하고 철폐되거나 축소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 착취가 프롤레타리아의 부자유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무조건 기본소득은 자본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강압에서 모든 사람을 해방한다. 하지만 기본소득과 관련한 쟁점에서 노동주의좌파와 자유지상주의 좌파 사이의 균열이 감지된다. 그들 논쟁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가이스탠딩 : 지구적 자본주의가 마들어 낸 불평등에 맞서는 방법
신흥대중계급, 프레카리아트, 샐러리아트의 출현. 국민소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몫이 극적으로 떨어지면서 더 불평등해졌다. 임대소득이 총소득에서 주요한 구성요소이자 계속 커지는 구성요소가 되었다. 플레카리아트가 지금 요구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분배 체계이다. 핵심적인 요구는 시민의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이다.
3. 필리스 판 파레이스 : 기본소듞과 사회민주주의
무조건기본소득 관련 첫 논쟁은 1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데니스 밀러가 “국가보너스”제도를 제안했다. 이는 부결되었고 나중에 조지콜과 제임스 미드 등에 의해 공공소유 기업의 이윤을 배당하는 ‘사회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되었다. 두 번째 논쟁은 1970년 전후 미국에서 제임스 토빈과 케네스 갤브레이스에 의해 “데모그랜트”의 도입 요구로 야기된다. 1980년대 BIEN(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 창립하고 본격적인 논의에 착수한다. 기본소득은 자산심사가 따르지 않아 효율적이고 낙인효과가 없다. 수급자격조건이 없으므로 다른 소득와 결합이 용이하다. 소득과 일이 분리되면 일의 의미가 오히러 살아날 것이다. 좌파는 우리가 얻는 소득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자본축적, 기술혁신, 과거로부터 물러 받은 제도개선 등... 자연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다. 보편기본소득은 이렇게 정당화된다.
4. 프랑신 메스트롬 : 기본소득이 진보적 해결책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이유(판레이스에 대한 응답)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 왜 주어야하는가? 재원은 충분한가? 기본소득이 단순한 임금보조금이 되거나 미니잡을 향한 열린 문이 될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사회적 보호를 탈정치화 함으로 최선이지 않다. 노동자의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없다.
5. 필리프 판 파레이스 : 유로배당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공적 연금 체제를 창안함으로써 자신이 통일된 독일의 흔들리던 적법성을 보장하는 데 일조했다. 유럽연합이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볼봄의 유럽연합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유로배당이 필요하다. 유로배당은 평화배당이다. 국경으로 나뉘어 인접국과 군사적 대립을 하지 않는 비용을 유럽인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6. 가이 스탠딩 : 양적완화보다 나은 선택
양적완화는 근린궁핍화 평가절하를 유도함으로써 현대적 보호주의가 될 징후를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의 3가지 위기는 불충분한 수요와 투자, 커가는 불평등, 이주에 대한 위험한 포풀리즘적 반응이다. 하지만 불평등이 핵심이다. 불평등은 그 자체 성장의 걸림돌이고, 남동유럽에서 북서유럽으로 이주의 원인이 된다. 세가지 위기 대응책은 유럽연합배당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7. 빈센테 나바로 : 보편기본소득이 빈곤이나 불평등을 줄이는 최선의 공적 개입이 아닌 이유
역사적으로 기술, 생산성, 일자리사이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노동시간은 생산성이나 기술혁신같은 경제적 변수보다 노동의 힘 같은 정치적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일자리 소멸이라는 보편기본소득 도입의 정당화는 근거없다. 빈곤을 줄이는 대도 기본소득보다 보장소득정책이 보다 유효하다. 불평등해소도 기본소득으론 불가능하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세력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완전 고용, 프레카리아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8. 필리스 판 파레이스 : 기본소득을 향한 전 세계적 행진(땡뮤 스위스)
2016년 6월 5일 무조건 기본소득안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반대 76.9%로 부결되었다. 이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 0%에서 단숨에 23% 찬성으로 비약적인 전진을 한 것이다. 사회당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당의 지도부는 반대투표를 권고했고 녹색당과 해적당만 예외였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칼뱅 고국이자 빈곤과 실업이 최소인 상황의 결과일 수 있다.
9. 로빈 월슨 : 보편기본소득-의혹을 품지 못하게 할 정도로 단순한 아이디어, 그리고 한때의 유행
고용수준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것이지 기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것을 준다”는 비판에 취약하고 사중손실이 크다. 결국 기본소득은 보편복지국가로 리턴할 것이다.
10. 안케 하셀 : 무조건기본소득은 막다른 골목이다.
먼저 기본소득은 노동계급과 이주자 가족에게 달콤한 독약이 될 것이다. 노동시장에 합류할 동기를 제거해 결국 사회를 더 분할시키고 사회적 이동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기여 없는 분배에 기초한 기본소득은 사회적 적법성이 없다. 또한 무조건기본소득은 급속하게 유입이주가 증가하는 사회의 요구에 역행한다.
11. 울리히 샤흐트슈나이더 : 기본소득은 강장제다- 안케하셀에 대한 응답
노동시장에 합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유급노동만이 개인의 삶과 사회통합에 중요한가를 묻는다. 개인적 사회적 요구와 유급노동을 분리하는 것은 시장구조 넘어 다면화된 삶의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것은 부담자와 수혜자가 분리되지 않고 모두가 만들어 가는 사회국가다.
12. 루이즈 하그 : 기본소득과 제도적 전환
기본소득은 벌이의 대체가 아니라 보장의 기본원천이다. 그 누구도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기반이다. 수급 자격 설정은 벌이를 피하게 하는 빈곤의 덫 효과를 가져온다. 임박한 자동화가 기본소득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토대가 아니라는 리스터의 주장에 동의한다. 오히러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에너지를 임금노동보다 돌봄, 건강증진, 환경보호 등 다른 형태의 일로 돌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3. 헤닝 마이어 : 기본소득은 필요없다-기술적 실업의 위협에 대처하는 다섯가지 정책
기본소득이 소득을 위해 하는 일의 가치를 감소시킨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하층계급을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한다. 기본소득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급되어 사회적 희소자원을 잘못 할당하게 한다 오히러 1) 교육 2) 일자리 재할당 3) 일자리 보장 계획 4) 자본소유권의 민주화가 현실적 해결책이다. 기본소득은 자유지상주의 사회관에 토대한다. 집단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우리 일상 생활을 개별화할 것이다.
14. 말콤 토리 : 시민소득, 실현 가능하고도 유용하다.
15. 보 로트슈타인 : 무조건 기본소득, 복지국가에 해로운 아이디어
무조건기본소득은 지속 불가능할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 건강관리. 교육, 노년층 돌봄 등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할 국가의 능력을 떨어드린다. 기본소득에 의존하는 성인의 삶을 범죄 수익에 의존케한다. 러라이트운동 처럼 기술개발 때문에 노동수요가 감소에 직면한다는 논거는 해롭다, 무조건기본소득의 오류는 무조건성에 있다. 복지국가의 몸체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호혜성에 기반한다. 기본소득은 호혜적이지 않다.
16. 말콤 토리 : 무조건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로트슈타인에 대한 응답
무조건기본소득은 특정한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고, 여타 사회보장을 대체하지 않고, 유급취업에서 이탈을 유인하지도 않는다.
역자후기 : 안효상
국내 논쟁에서 제기된 비판은 기본소득이 분배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생산양식 혹은 생산관계는 무시한다(채만수)거나, 과세와 분배 제도 개선만으로는 생산의 적대적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다(박석삼)고 제기되었다, 기본소득이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무관하다는 비판은 정통좌파가 던지는 최종심급의 비판이다. 기본소득이 복지를 시장화할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상이 대표의 역동적 복지국가 건설 맥락에서의 비판과 양재진교수의 전통적 복지국가론적 관점에서의 비판도 있다.
4차산업혁명이 일자리 감소를 가져올 것인지하는 문제와 고용노동이 바람직한 삶의 형식인가하는 논의 여지가 있다. 양적 성장을 통한 일자리 확대도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기술변화와 일자리 전망은 보다 나은 삶의 맥락에서 논의 되어야하고, 이때 기본소득은 강제적인 고용노동이 아닌 다른 활동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측면에서 인간해방을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몫이라는 점에서 절대적 평등의 기초를 제공하며, 개인들에게 힘을 준다는 의미에서 다중적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개인적, 집단적 역량을 부여할 수 있다. 따라서 좌파와 기본소득은 결합된다.
이유 없이 읽어도 좋은 책이 있다. 여행서, 수필, 가벼운 소설이나 시집 그리고 수상록 등이 그 범주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꼭 읽을 이유가 있어야 하는 책들이 있다. 나에게는 대부분의 전문서적이나 묵직한 인문학 서적, 혹은 사회과학 서적들이 그런 책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선택은 실수에 가까웠다.
여행이 불가능한 시절에 막연한 동남아일주 60일여행을 계획하다가 내가 아는 동남아가 너무나 피상적이기에 여행유투브나 여행안내서를 넘어 동남아의 삶 전체를 개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책이 필요로 했다. 신간 소개 정도지만 몇몇 책들에 관한 소개글을 읽고 나름 비교해서 선택한 책이 바로 윤진표가 쓴 [현대 동남아의 이해]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라오스, 브루나이, 싱가포르, 필리핀, 캄보디아, 그리고 최근 군부 쿠테타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는 미얀마를 포함한 아세안 10개국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이다. 그렇다고 여행안내서 같은 일목요연한 나열식 주제 서술이 아니라 먼저 총체적 관점에서 동남아의 역사와 사회문화, 지리환경에 대한 정리를 전반부에 담고, 비교정치학적 관점에서 각국의 경제와 정치, 국제외교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를 후반부에 정리해 놓았다. 큰 시야에서 먼저 동남아시아에 대한 선이해를 돕고 그 바탕위에 각국에 대한 정치, 경제, 외교적 이해를 서술하다보니 일국주의적 눈에 갇히지 않고 전체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일국에 대한 이해를 유기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장점을 담고 있었다.
책의 핵심 내용은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필자는 동남아의 지리적 환경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벼농사 중심의 농경 문화 발달, 2) 해상 무역의 중요성 부각, 3) 북에서 남으로의 역사전개가 그것이다. 역사시대 구분을 보면 15세기 포르투칼의 말라카 점령전까지를 전통시대로, 이후 1945년 태평양전쟁 종식까지를 식민시대로, 그리고 1945년 이후 현재까지를 독립시대로 나누고 있다. 대표적인 역사적 특징으로는 고립성과 유동성이 양립하여 중앙집권적 피라미드형 지배구조 형성이 불가능했고 국가의 중앙이 문화적 유대를 통해 주변을 통제하는 느슨하고 유동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만다라적 구조를 띠고 있다고 한다. 전통시대 동남아 세계 형성에 있어 인도의 역할은 지대해 ‘동남아의 인도화’를 이루었고 중국은 1000년을 지배한 베트남에 한정해 유교와 대승불교를 전래했는데, 인도의 경우는 평화로운 접촉을 통한 교류를 , 중국의 경우 직접적인 침공을 통한 전래로 특징짓고 있다.
식민시대는 151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부터 시작되는데, 1945년 태평양전쟁 종식까지 복잡하고, 혼동스런 식민지배 과정이 진행되었고 그 흔적은 동남아 사회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와와 말레이시아의 인위적인 구분이나 라오스의 탄생같은 임의적 국경선의 획정, 의도적으로 분리 통치를 위해 종족간 분쟁을 조장한 식민에 동조한 소수민족과 피지배 다수민족의 갈등(오힝아족 학살 사건초래 등)구조의 잔존,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도입된 억압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의 등 많은 부정적인 식민지배의 영향을 제시하고 있다.
동남아 사회의 몇가지 문화적 특징 중 첫째로 촌락공동체적 생황양식의 지속을 들고 있다. 촌락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강하고 상부상조, 협의의 전통이 살아있고 통치계층과 대중간의 후원수혜적 추종주의라 불리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태국의 국명 ‘THAI-LAND’는 ‘자유의 땅’을 의미하며 위계질서가 존재하되 개인주의적 자유가 혼합된 특징을 드러낸다. 또한 사회적 서열에 매우 민감하여 귀족 관료와 평민, 부자와 빈자사이에 순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동남아 사회의 특징으로 兩邊/모계사회의 전통을 들고 있다. 상속에 양계를 다 고려하고 남녀 상호의존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번째 특징으로 이름의 성이 없던 사회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는 가문과 혈통에 집착하지 않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없다. 지금의 성은 식민지배세력이 지배편의를 위해 부여한 것에 불과 하다고 한다.
동남아의 경제는 국가간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오랜 낙후를 딛고 1990년대부터 자본의 세계화와 정치의 민주화의 새로운 도정에 들어선다고 본다. 하지만 외자의존형 성장전략은 한계를 드러내고, 정치엘리트와 피지배 계층의 후원수헤적 관계에 기반한 정치 권력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 막고 있다고 진단한다. 동남아를 휩쓴 외환위기나 빈발하는 군사쿠테타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모범을 보여주는 싱가포르 같은 경우 만해도 언론의 자유측면에서 세계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의 의도보다 비관적인 전망이지만 동남아의 많은 국가는 민주주의의 정체로 인해 수많은 긍적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불확실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를 권력자의 사적 업무로 취급하거나 정치권력을 사유재산과 같이 이해하는 베버식으로 표현하면 가산제주의(Patrimionialism)가 만연한 현실은 빠른 시간내에 바뀔 것 같지 않고, 경제는 민주주의의 진전없이 일정한 수준이상의 발전을 할수 없기에 동남아의 미래는 여전히 안개속에 있는 것같다.
외교적 측면에서 동남아시아는 1967년 방콕에서 창설된 아세안을 중심으로 놓고 이해 하고 있다. 아세안은 창설이후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9년 캄보디아가 최종적으로 가입함으로써 동남아시아 10개국 전부가 참여하게 되어 초기의 반공산주의 지역동맹적 성격을 벗고 동남아 역내 국가간 협력 단위를 완성하게 된다. 아세안이 추구하는 공동체는 유럽연합같은 초국가적 단위가 아니라 국가간 협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분명히 성격지워 지고 따라서 집단방위나 군사동맹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동남아를 한국의 블루오션으로 보고, 주변 4강에 매몰된 인식에서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상호 방문객 수나, 이주노동자와 유학생의 교류, 결혼이민과 무역액의 규모, 한류 및 한국내 동남아 문화의 확산 등의 현상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외교적 위상을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미래 전망이 4대강국의 바운드리 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펼쳐지기 위해서 동남아와의 선린외교가 핵심적임을 피력하고 있다. 특히 이 모든 과정은 세일즈 외교라는 중상주의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진정성을 가질 때 만이 실현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요약하다보니 맥락이 흩어지고 말았지만, 이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두어가지 어원이 재미있어 기록해 본다. Asia라는 명칭의 어원이 재미있다. 알렉산드의 고향인 마테도니아어로 유럽 넘어 동쪽, 즉 지금의 소아시아지역을 ‘아주 넓은 땅’ 즉, ‘Asuva’라고 불렀고 이것이 ‘아시아’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p.14) 필리핀이라는 국명은 6세기 식민종주국 스페인 국왕인 필립2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국명이 식민 종주국의 국왕이름에서 왔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책을 받아 쥐고 읽어 나가기 시작할 때, 여행을 위해 찾아 나섰고 여행서를 넘는 이해를 얻고 싶어 선택한 [현대동남아의 이해]는 그런 나의 목적에 부합하는 책이 아니라 느껴졌다. 책의 분량도 무려 500쪽이 넘었다. 그런 면에서 실패한 선택이었지만 학술연구서 같이 무겁고 전문적인 책은 물론 아니었다. 시작은 그랬지만 끝은 달랐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의 애초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책으로 다가왔지만, 힘겹게 다 읽고 나니 큰 강을 건넌 듯 성취감이 뒤따랐고 전체로서의 동남아에 대해 조망할 수 있는 눈을 얻은 듯 든든해졌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반 여행서를 뛰어넘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책으로 동남아를 전체로서 이해하자는 나의 목적은 그럭저럭 달성된 셈이다,
아세안 10개국중 몇일전 군사쿠테타가 발발하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미얀마를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로잉자족에 대한 학살에 이은 미얀마 민중에 대한 군부의 학살을 보면서 학살은 민족이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야만과 문명, 평화와 폭력의 문제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언어, 민족, 종교, 이념적으로 다면적 복합사회인 아세안의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빈다. 많은 독자에게 이 책이 동남아시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와 나의 그런 바램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축은 전환]은 미래 사회에 대한 신묘한 통찰이나 예언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다. 거칠게 보면 이미 대중 매체들이 다루고 있는 일반적인 미래 예측을 정리해 놓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은 먼 미래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단지 10년 후에 닥칠 우리 사회의 ’단기적‘ 변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축의 전환]은 예측 가능한 단기적인 미래를 통찰하고 그 변화에 수반될 우리의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 무엇일까 모색하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상상 보다는 추론이, 기대 보다는 분석에 기반한 직관이 이 책의 논지를 이끄는 힘이다. 대부분의 미래 예측이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하지‘ 라는 막막한 여운만을 남긴다면 이 책 [축의 전환]은 거시적 정책부터 개인의 미시적 행동까지 구체적인 삶의 대비책을 암시하는 측면을 강하게 견지한다.
이 책의 원제는 [The Future of Everything]이다. ”모든 것의 미래“는 우리가 직면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크게 8갈래로 나누고 그 각각의 주제에 걸 맞는 통찰을 이어간다. 서문에서 필자가 밝혔듯이 코로나라는 변수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고, 블록체인을 비롯한 신기술의 신속한 도입, 인구 고령화의 급격한 심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지속적인 상승, 신흥 산업국의 폭발적 성장 등 급속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한국은 가속화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필자가 치하하듯 우리는 이미 변화의 물결을 올라타고 그 물결을 이끄는 가장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선도 국가의 면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무쌍하고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낙관적 태도와 임기응변의 순발력을 견지하는 것은 늘 우리의 몫이다. 이를 위해 필자 ’마우로 기옌‘의 인도에 따라 변화의 물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마우로 기옌은 우리가 직면한 변화의 갈래를 1) 출산율의 변화, 2) 노년세대의 재발견, 3) 새로운 중산층의 출현, 4) 여성주도 세상의 도래, 5) 도시의 재발견, 6) 신기술의 확산, 7) 탈소유 경제의 확산, 8) 새로운 화폐의 도입 등 8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각각의 주제에 대한 통찰을 위해 필자는 ’수평적 사고‘라는 도구를 먼저 요구한다. ’수평적 사고‘는 ’에드워드 드 보노‘가 제안한 개념으로 ’기존의 주어진 상황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자체를 바꾸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질문을 다시 구성하여 문제를 측면에서 공략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 의미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데 있다”는 문장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필자는 사태에 대응하는 인간의 능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수평적 사고의 중요성을 얼마나 높이 부여하는지 책의 말미에 ’’ 수평적 사고‘의 세부적 원칙까지 정리하고 있다.
필자가 제시하는 ’’ 수평적 사고‘의 핵심 원칙은 멀리 보기,, 다양한 길 모색하기,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막다른 상황 피하기,, 불확실한 상황에서 낙관적으로 접근하기, 역경을 두려워않기, 흐름을 놓치지 않기 등 7가지이다. 언듯 보기에도 지나칠 만치 평범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요구받던 태도다. 수평적 사고라 이름 붙이기 전에도 늘 요구되는 덕목에 다름 아닌 것에 놀랄 정도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를 바로 읽고 적절하게 응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추상적 원칙, 지고한 원리가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덕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진위는 필자가 각각의 주제를 ’수평적사고‘라는 도구로 다루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판명날 것이다.
첫 번째 주제는 출생률이다. 향후 10년의 미래를 점치는 데 있어 가장 핵심 키워드는 ’낮은 출생률‘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유든 현실은 벌써 연애, 섹스, 결혼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가 넘쳐난다. 주택 가격 상승 등 불확실한 미래든 부양의무에 대한 거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경제적 요인이 핵심적이긴 하나 어쨌든 연애와 결혼은 본질적인 행복의 구성 요건이 아니라고 여기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60년대 가임여성은 7명의 자녀를 두었다. 1979년에는 3명, 한가구 한 자녀 정책 이후 출생률이 도시는 1명 농촌은 1.5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출생률 저하가 중국 정부의 한 자녀 정책의 산물이 아니라고 본다. 영향이 없진 않았지만 새로운 세대는 벌써 자녀를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2015년에 중국 한자녀 정책은 폐기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중국 한자녀 정책의 수혜자가 다름 아닌 미국의 중산층이라는 사실이다. 중국 한자녀 가족은 노후의 삶을 위해 저축을 늘였고, 저축으로 축적된 자본은 미국 채권에 투자되고, 결국 가족 구성의 변화에 따라 늘어난 중국의 저축률은 미국인의 소비 확충으로 귀결되었다. 돈과 정보의 교류가 자유로운 세상은 이렇게 얽히고설켜 복잡계를 이루고 있어 그 진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아프리카의 베이비 붐은 세계적 인구 이동과 산업 재편에 있어 핵심 인자로 부상했다. 출생률 변동에 따른 대륙간, 국가간, 세대 간 인구 이동은 사회변화를 추동한다. 이민자에 대한 인지적 편향을 극복하고 사회의 필요와 욕구에 맞춰 인구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가 한 사회의 유빌 발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 사회의 개방성이 그 사회의 역동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 것이다.
두 번째 주제는 노년세대의 재발견이다. 역시 인구구성의 문제로 세대구성의 변화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통찰한다. 10년 안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는 60세 이상의 노령인구다, 따라서 2030년이 다가오면서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사라지고 세대 간의 역할 관계도 바뀔 것이다. 현재 미국의 부 80%이상을 차지한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소비자 집단인 이른바 실버세대다. 노년세대에 대한 재평가와 역할 부여 없이 세상을 이해하기에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각 세대의 모습은 고정관념일 뿐”이고 2030년이 되면 더 이상 세대간 고정 역할이 무력화되고 ’나이‘의 예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인생설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실버세대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은 시대의 변화를 읽는 핵심 키워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세 번째의 키워드는 ’중산층‘이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적 번영은 수억 명의 중산층을 배출할 것이다. 아프리카 등 신흥 공업국 역시 엄청난 수의 중산층을 배출할 것이다. 하나의 문제는 지구가 더많은 중산층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미국에서 재사용이 가능한 폐기물의 3분의 1은 해외로 수출된다. 중국이 절반정도 가져갔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중국역시 두터운 중산층이 소비를 통해 배출하는 폐기물로 골치를 앓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낙관적이다. 새로운 기술과 소비패턴의 변화를 통해 극복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기존 선진국의 불평등 심화와 중산층의 위기를 들고 있다. 루이스 D 브랜다이스가 말했듯 불평등의 심화는 민주주의의 위기마저 초래한다.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아니면 소수가 이 땅의 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에 이를 수 도 있다. 그렇지만 그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필자는 중산층을 구축하기 위한 두 가지 시도를 소개한다. 포드는 1914년 1월 4일 전체 직원의 일급을 한꺼번에 2배 인상하여 하루 5달러 임금 지급을 결정했다. 이를 통해 미국사회에 거대한 중산층 형성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미국의 위대함은 자동차 산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획득했다. 2018년 10월 2일 아마존은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를 발표했다. 이는 연방정부 최저임금의 2배에 해당한다. 이런 시도는 자본 측에 의해 시도된 미국 중산층 육성을 위한 사례다. 불평등 해소는 사회의 존속과 직결된 문제로 이념적 좌표를 떠나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마이너스 소득세‘를 제안한다. 2016년 일론 머스크는 ’기본소득제‘의 출현을 예측한다. ”자동화 때문에 기본소득제나 그와 비슷한 정책을 실행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했다. 2018년 2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미국인의 찬반 비율은 엇비슷하다.(p.147) 1982년부터 알래스카 주민들은 원유 사업 수익으로 조성된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통해 매년 배당금을 받는다. 2018년의 배당금 규모는 1600달러 정도였다.
포드, 아마존, 프리드먼, 일론 머스크의 고민은 일맥상통한다. 즉 중산층의 육성이다.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한 필수적 기반이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현재 불붙고 있는 기본소득제 관련된 논쟁이 어떤 결론을 맺든지 2030년을 맞이하는 준비물에는 중산층 육성을 위한 근본적 대책이 빠질 수 없다.
네 번째 문제는 점증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 필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2030년에는 여성이 세계를 지배할까?‘ 현재 미국에서는 정식으로 결혼한 남녀보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들이 더 많이 가정을 이루며 살며 자녀들을 양육한다.(p.156) 2030년이 되면 미국 남녀의 약 3분의 1이상이 아이 없이 은퇴한다.(p.165) 이런 변화의 저변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 있다. 어쩌면 그런 변화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상승으로 귀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2030년이 되면 부의 소유, 정치권력, 사회적 결정권의 소유 등과 관련해 여성의 지위의 극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물론 필자가 2030년에 완벽한 양성평등이 도래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이 얻은 사회적 지위는 권력 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고, 낮은 출생률과 노령화, 산업의 변화 등을 미루어 볼 때 여성의 역할이 충분히 발현되는 사회로 변화될 것은 보고 있다. 2030년에도 여성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동을 읽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다섯 번째 주제는 도시의 성장과 변화다. 2030년의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성장과 변화의 최전선엔 도시가 있다. 도시지역은 전세계 토지의 1퍼센트를 점유하지만 전체 인구의 55퍼센트가 산다. 도시는 전 세계 에너지 생산량의 75%를 소비하며, 탄소가스 배출량은 전체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2017년에는 인구 100만명이 넘는 도시가 29곳이었다. 2030년이 되면 그 수가 43곳으로 늘고, 그중 14갠 도시는 인구가 2,0002,000만 명이 넘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성장은 2030년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인 불평등을 악화시킨다.(p.196) 환경적 재앙도 빠질 수 없다. 물은 지표면의 3분의 2를 덮고 있지만 그중 97.5퍼센트는 마실 수 없다. 인간에게 남은 물은 2.5퍼센트뿐이데 그중에서도 70퍼센트 이상은 빙하 만년설, 영구동토층 등이어서 사용할 수 없다. 남은 30퍼센트 정도가 지하수고 1퍼센트 미만이 강과 호수 습지 그리고 저수지 등에 있다. 전세계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물의 70%가 농업용수이고 20퍼센트가 산업용수다. 그리고 10퍼센트가 가정용수다. 필자는 공급의 한계를 수직농업 등 물의 합리적 이용으로 극복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능성은 평범함의 위력, 부드러운 개입을 지칭하는 신조어인 넛지가 도시와 지구를 살릴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마우로 기옌은 도시가 역동적인 전문가 계층을 한자리에 모으거나 길러내는 데 필요한 것들을 3T3T 개념으로 요약한다. 바로 인재 talent, 관용tolerance, 기술 technolory 이다.
이 지점에서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과학기술이라는 여섯 번째 주제로 넘어간다. 사용한 뒤 물로 씻어낼 수 있도록 흙으로 구워 만든 최초의 변기는 기원전 1700년경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전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변기의 발명은 어떻게 인류 문명의 변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하는 일은 흥미롭다. 하지만 불균등 발전의 결과 특정 기술의 혁신은 낙후된 다른 문화와 중첩된다.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과 남아시아 전역에서 기본적인 위생 시설에 대한 투자가 점점 줄어든데 반해 이동통신 시설에 대한 투자는 크게 증가했다. 인도의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가정에서 화장실보다 휴태전화가 3배나 더 많다.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에 따라 곧 인류는 ’특이점‘의 도래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난무한다. 빅데이터와 관련된 윤리적, 도덕적 갈등도 제기된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기계장치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을 순식간에, 그것도 인간이 실시간으로 통제하기 않고 자동으로 결정하게 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올 긍정적 변화 못지않게 혼탁한 전망도 난무한다. 이것들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일까? 기술변화의 결과를 추적하는 것보다, 기술의 변화가 가져올 인구통계학적, 사회적 흐름과 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어떤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결제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프리카다. 후진국과 낙후한 지역들이 종종 미래를 향한 최고의 전망을 제공하는 반면, 우리가 선진국 혹은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지역들은 기존 사고방식이나 행동에 사로잡혀 과거와 결별하지 못한다. 사실 기술적 혁신은 거대한 인구통계학적 혹은 경제적 흐름과 궤를 같이해야 한다.
7번째 주제는 소유가 없는 세상에 대한 통찰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소비, 공유경제와 임시직 경제가 주도할 것이라 예측한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했다. 2007년 10월 에어비앤비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공유경제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협력적 소비와 자산 공유는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인류 역사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인간은 사유재산 없이 생존했고 오히려 더 번성했다.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는 자동차를 갖는 일뿐만 아니라 운전면허 취득까지 꺼려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83년만 해도 20~24세 미국인중 92퍼센트가 운전면허를 취득했지만 2015년에는 77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소유를 넘어 공유로 나가는 길에 우버는 상징적이다. ’우버하다‘는 타동사 uberize가 탄생했다. 이동통신 기술을 통해 산업의 공급자와 수요자를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상품과 용역을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 우버하다의 정의다. 공유경제를 상징하는 한축으로 에어비엔비가 있다. 은행에 집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리는 대신 집을 이용해 생활비를 버는 노년이 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구세대 중산층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최상위 1퍼센트가 나어지 99퍼센트보다 더 부자인 불평등의 증가는 세금 문제와 관련해서 사유재산의 권리를 어는 정도까지 보호해 주어야 하느냐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공유경제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상황에 대응하려한다. 공유경제는 결국 필요한 걸 모두 소유하기에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현실과 집과 자동차 같은 자산을 새롭고 협력적이면 집단적으로 사용하는 일에 대한 선호도가 합쳐지면서 촉발되었다.
공유경제는 임시직 경제의 토대가 되었다. 임시적 경제는 정치에 또 다른 방향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일자리 공유, 클라우드 펀딩, 크라우드 소싱 등 새로운 경제의 가능성을 확산한다. 일부 공유지의 비극을 예를 들며 디지털 공유경제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1) 공유경제는 천연자원의 부족을 해소하고 2)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삶에 가치를 더해주며 소위 말하는 3) 공유지의 비극은 사실이 아니라고 논박하고 있다.
마지막, 여덜번째 주제로 새로운 화폐의 시대를 예견한다. 새로운 화폐는 다양한 암호화폐다. 2030년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폐 중 일부를 정부 당국이 아닌 기업이나 심지어 개인용 컴퓨터가 발행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한다. 새로 도입되는 암호화폐의 특징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에 기반해 발행과 유통에 중앙 정부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화폐가 관료주의와 결별하는 셈이다. 2030년이 되면 국가가 독점 발행하는 화폐들은 과거에 국가가 독점했던 항공사와 전력회사 혹은 통신 회사들이 그러했듯 영향력이 약해질 것으로 예측한다. 나카모토 사토시에 의해 2008년 10월 31일 탄생한 비트코인은 개인과 개인이 거래하는 개념의 전자화폐를 통해 중간에 어떤 금융기관도 거치지 않고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직접 온라인 결제를 하도록 해주는 혁명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그 기술적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의 가장 혁신적인 잠재력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기술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통제력 일부를 중앙의 지배층이 아니라 이용자들이 나눠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기존의 현금을 대체할 뿐인 전자화폐를 평가절하한다. 그는 암호화폐가 돈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고 우리의 삶 자체를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지평을 열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변화로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블록체인이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정보의 분산을 통한 권력의 탈집중화를 가져오고, 사회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제고하는데 기여토록 할 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요약과 정리에 비약이 많아 단절적으로 보이지만 위의 8가지 주제는 단독의 이슈가 아니라 지정학적, 인구통계학적, 기술적 요인이 상호 결합되고 중첩되어 나타나는 사회의 변화를 분류한 것이다. 사실은 혁명적 변화를 추동하는 한 덩어리의 역동적인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다. 이를 통해 총체적으로 사태를 이해하고 수평적 사고를 통해 응전하는 필자의 식견이 놀라울 따름이다.
옥에도 티가 있듯 [축의 미래]에서 독자의 한사람으로 느끼는 뒷맛이 있다. 마우로 기옌은 세계의 변화를 너무 기술적 변화에 편중해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심화된 불평등으로 구매력이 떨어진 시민의 생존전략으로 공유 경제를 이해하는 듯 한 면은 불평등 구조에 정면으로 맞서 해결책을 찾지 않고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나약한 존재로 인간군상을 전제한 것으로 느껴졌다. 특히 수평적 사고나, 럿지의 경유 ’생활의 지혜‘ 혹은 방편적 도구이지 과학적 방법론이나 사회적 실천을 이끄는 철학으로 받아들이기엔 뭔가 뒷맛이 남는다. 하여튼 마우로 기옌은 현실주의자이고 그만치 보수적 세계관의 소유자로 보이고, 그런 입장에서 단기 10년의 미래를 예측한 [축의 전환]은 책값과 읽은 시간이 아깝지 않은 책임은 분명하다. 미래를 설계하고 지금을 현명하게 살고 싶어 하는 젊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1. 지난 가을 손에 들어왔지만 흙 묻은 손으로 두어번 뒤적이다 밀쳐두었던 ‘시를 쓰지 않아도 좋은 날’을 그리는 시인 안상학의 6번째(?)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을 읽는다. 농부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 안식의 시간 겨울이 다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 없는, 봄이 오는 낌새가 은밀히 번지는 입춘 언저리에 절박한 마음으로 시인의 말귀에 귀를 기울이고 시인의 글귀에 눈을 연다.
2. 시집 ‘남아있는 날들’은 ‘바닥’에 내 몰린 혹은 생과 사의 갈림길 ‘생명선’을 딛고 선 시인의 목소리다. 전적으로 개인적 느낌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유서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다시 슬픔을 사랑으로 이기려 사력을 다하는 의지를 느끼기도 했다. 시집의 제목은 위중한 병중에 주어진 오늘 하루의 절박함으로 어제를 뒤돌아 보고 다시 남아있는 남들을 세며 내일을 점치는 처연함을 담아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3. 안상학 시인은 늘 사랑보다 슬픔이 많은 곳, 그래서 넘치는 슬픔을 시로 달랠 수 밖에 없는 곳, 천상 시인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세상에 거처한다. 그래서 그의 싯귀를 따라가는 길은 어쩌면 구도의 길이고, 조금은 고행의 길이고, 그래서 정화의 길인지 모른다. 그의 손길에 이끌려 그가 사는 세계를 한바퀴 주유하고 나서면 코맹맹이가 되도록 싣컷 울고 난 다음 큰 슬픔 조차 눈물에 다 씻겨 가고 다시 맑은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순간을 맞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다뜻해진다. 그래서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내게 슬픔을 통한 정화의식으로 나가왔다.
4. 나에게 지금까지 안상학의 시는 냉정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세상을 담담하게 노래한 것으로 느겨졌다. 어떤 때는 무미건조할 정도로... 이번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지금까지의 시와는 달리 조금은 더 절박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술한잔에 들뜬 가벼운 목소리는 아니다. 죽음에 직면하고 극복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절실함을, 온기에 대한 절절함을 담고 있다.
5. 이제 제주에 가면 涯月을 지나며 어느 돌담밑 제주수선이 꽃을 피우는지 다시 한번 살피게 되었고, 화산도 중산간을 걸으며 ‘죽다 남은 사람들’을 기리고, 윗세오름을 넘어 날아가는 새가 입산했다 돌아오지 못한 산사람들임을 느끼게 되었다. 임하를 지날 때면 물아래 마령리 이식골 문상길 중위의 고향마을을 기억하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그 꿈이 살아있음을 몰래 들려주고 올 것 같다. 시인 안상학의 눈길은 참 넓고도 깊다.
6. 시집을 덮으며 나는 시인 안상학이 더 가난하고 더 외롭게 살아 더 ‘높은’ 시를 남겨도 좋겠지만, 사과꽃 피는 봄밤 친구들과 왁작직껄 술판을 벌이고 외로움도 가난도 잊고 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래도 저래도 다 좋으니 시인이 다시는 ‘몸도 마음도 잃어 버린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린뉴딜이 화두가 된지 오래지만 ‘탈석유 재생에너지’ 육성 정책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지금까지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린뉴딜의 개념을 재대로 이해하고자 이 책을 선택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린뉴딜을 ‘기술 혹은 산업전환’에 국한해서 이해하거나, 경기진작을 위한 토목사업에 편중된 시각으로 바라다 보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천착하고자하는 목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그린뉴딜’이 가진 문명전환적 성격이 무엇이고, 그 귀결이 가져올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그 구현 과정은 어떡해야하는지 아니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제레미 리프킨의 [글로벌 그린뉴딜]을 통해 답을 구하고 싶었다.
필자가 이 책은 통해 보여주고자 한 핵심은 간단했다. 우리 인류는 화석연료를 통한 2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번영을 구가한 끝에 지구온난화로 대재앙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인류는 6번째 대멸종의 위기에 봉착했지만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 대전환과 이에 부응하는 사회대개혁을 통해 새로운 그린뉴딜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고, 그 시기는 촉박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우리의, 정부의, 세계적 차원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 책은 크게 1,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인류가 화석연료가 초래한 기후위기로 인해 전세계적인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재생에너지 경제에 기반한 그린뉴딜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필자는 신재생에너지 기반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적 변혁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세가지 요소가 갖춰져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커뮤니케이션 매개체와 동력원 그리고 운송 메커니즘 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자연 속에 무한한 햇빛이나 바람에 기반한 신재생 에너지는 한계비용을 극도로 떨어뜨려 결국 기존 시장의 비즈니스 메커니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기존 시장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서는 소유권이 접근권에 자리를 내주고 시장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부분적으로 네트워크에 공급자와 사용자로 대체된다고 본다. 즉 일부 상품 및 서비스외 이윤은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줄어들어 생산 및 유통되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거의 무료가 되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라는 현상이 나타(p.29)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필자는 공유경제를 그린 뉴딜 시대의 핵심적 특성으로 보고 “공유경제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을 변확시키고 있는,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 이동성의 디지털 인프라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경제 현상이다. 이 점에서 공유경제는 18세기와 19세기에 태동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후 세계 무대에 처음 등장한 새로운 경제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p.32)”고 주장한다.
또한 신재생에너지의 한계비용이 떨어짐에 따라 기존 화석연료 기반 사업은 “좌초자산”으로 처분될 것이기에 투자전환시점을 앞당기는 것이 보다 경제적 합리성에 합치하는 처분임을 주장한다. 즉 ‘탄소거품’을 하루빨리 제거함으로써 “인류가 화석연료 문명의 붕괴에 수반되는 전례 없는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대혼란에 대비할 수 있다. (P.127)”고 한다. 필자는 2028년을 티핑 포인트로 보고 화석연료 문명의 붕괴를 예측한다.
2부에서 필자는 그린뉴딜의 현실적인 실현 방안을 강구한다. 그러면서 그린뉴딜을 추진할 주력부대로서 연기금의 실제적인 주인인 “작은자본가들”의 군대로 연합한 노동자를 제시하고 이들이 주도하는 그린뉴딜의 세계를 “새로운 사회적 자본주의”라 칭한다.
“연금기금이 2017년 기준 41조 3000억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 자본이라는 사실...(P.157)”
“...세계의 노동자들이 “작은 자본가들”의 군대로 연합한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2017년 미국에서는 1억3500만 명의 노동자가 공공 및 민간 부문에서 일하고 있고, 그중 54%가 퇴직연금 기금 계획에 가입해 있다. 이는 거의 7300만 명에 달하는 파트타임 및 풀타임 노동자 코호트이며, ‘작은 자본가들의 군대’가 되는 셈이다.(P.158)“
”우리의 연금기금을 활용하고 자본 전략을 개발하는 것보다 노동운동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돈이 우리의 목을 자르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P.169)“
나아가 사회적 책임투자가 기초가 된 ”새로운 사회적 자본주의“를 제기하며 이의 도래는 가치 당위가 아니라 수익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벤저민 프랠클린의 격언 “선행을 통해 성장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P.185)
“...기존의 전통적인 발전소를 유지하는 것보다 새로운 대체에너지 프로젝트를 구축해 운영하는 쪽이 더 비용 효율적이 되는 변곡점에 도달했다.”(p. 147)
그린뉴딜의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비용은 과도한 국방예산의 합리화, 슈퍼리치에 대한 과세 강화, 화석연료 산업에 제공되는 보조금 삭감 등으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린뉴딜이 가져올 “사회적 자본주의”를 위해 몇가지 요소의 사회적 변혁을 요구한다.
먼저 피어 어셈블리(peer assembly)거버넌스를 통한 사회적 의사결정권의 수평적 확산을 요구한다. 중앙집중형 에너지 사회에서 분산형 사회로 전환하는데 있어 사회적 의사결정권의 확산과 수평적 거버넌스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권 의식’을 요구한다. 이는 지구 환경 재앙을 통해 타 동식물과 더불어 멸종위기에 처한 인간의 타 생물종과의 동류의식을 말하고 중국 공산당이 당헌에 도입한 “생태학적 문명”개념과 합치한다고 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이 책에 피력한 그린뉴딜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현재 한국에서 진행중인 그린뉴딜 논의는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이 최저임금 도입을 포함한 노동권강화 등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도외시 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기진작에 치우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물며 지금의 그린뉴딜은 1930년대 뉴딜의 재현이 아니라 수평적 권력분산과 생태학적 인식에 기반한 새로운 인류문명의 비젼을 담고 있는 것에 비해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서의 ‘그린뉴딜’은 한참을 본류에서 벗어난 초라한 변형으로 느껴진다.
제레미리프킨의 [글로벌 그린뉴딜]은 읽기에 친절한 책은 아니었다. 필자의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회오리 바람같이 몰아가는 논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고, 따라서 전체의 서술구조는 중복되고 관련 데이터는 복잡했다. 그러다보니 320쪽 짜리 책에서 후주만 60여쪽에 달해 추가 연구를 위한 학술지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고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완독에 상당한 시간이 들었고, 읽기도 고역이었다. 그에 비해 일단 완독하고 나서 책을 다시 뒤척이면서 뒤늦게 재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이상한 책이었다. 변화가 절실한 시대에 맞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