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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1. 지난 가을 손에 들어왔지만 흙 묻은 손으로 두어번 뒤적이다 밀쳐두었던 시를 쓰지 않아도 좋은 날을 그리는 시인 안상학의 6번째(?)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을 읽는다. 농부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 안식의 시간 겨울이 다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 없는, 봄이 오는 낌새가 은밀히 번지는 입춘 언저리에 절박한 마음으로 시인의 말귀에 귀를 기울이고 시인의 글귀에 눈을 연다.

 

2. 시집 남아있는 날들바닥에 내 몰린 혹은 생과 사의 갈림길 생명선을 딛고 선 시인의 목소리다. 전적으로 개인적 느낌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유서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다시 슬픔을 사랑으로 이기려 사력을 다하는 의지를 느끼기도 했다. 시집의 제목은 위중한 병중에 주어진 오늘 하루의 절박함으로 어제를 뒤돌아 보고 다시 남아있는 남들을 세며 내일을 점치는 처연함을 담아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3. 안상학 시인은 늘 사랑보다 슬픔이 많은 곳, 그래서 넘치는 슬픔을 시로 달랠 수 밖에 없는 곳, 천상 시인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세상에 거처한다. 그래서 그의 싯귀를 따라가는 길은 어쩌면 구도의 길이고, 조금은 고행의 길이고, 그래서 정화의 길인지 모른다. 그의 손길에 이끌려 그가 사는 세계를 한바퀴 주유하고 나서면 코맹맹이가 되도록 싣컷 울고 난 다음 큰 슬픔 조차 눈물에 다 씻겨 가고 다시 맑은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순간을 맞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다뜻해진다. 그래서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내게 슬픔을 통한 정화의식으로 나가왔다.

 

4. 나에게 지금까지 안상학의 시는 냉정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세상을 담담하게 노래한 것으로 느겨졌다. 어떤 때는 무미건조할 정도로... 이번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지금까지의 시와는 달리 조금은 더 절박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술한잔에 들뜬 가벼운 목소리는 아니다. 죽음에 직면하고 극복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절실함을, 온기에 대한 절절함을 담고 있다.

 

5. 이제 제주에 가면 涯月을 지나며 어느 돌담밑 제주수선이 꽃을 피우는지 다시 한번 살피게 되었고, 화산도 중산간을 걸으며 죽다 남은 사람들을 기리고, 윗세오름을 넘어 날아가는 새가 입산했다 돌아오지 못한 산사람들임을 느끼게 되었다. 임하를 지날 때면 물아래 마령리 이식골 문상길 중위의 고향마을을 기억하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그 꿈이 살아있음을 몰래 들려주고 올 것 같다. 시인 안상학의 눈길은 참 넓고도 깊다.

 

6. 시집을 덮으며 나는 시인 안상학이 더 가난하고 더 외롭게 살아 더 높은시를 남겨도 좋겠지만, 사과꽃 피는 봄밤 친구들과 왁작직껄 술판을 벌이고 외로움도 가난도 잊고 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래도 저래도 다 좋으니 시인이 다시는 몸도 마음도 잃어 버린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지 않기만을 빌었다.

 

7. 참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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