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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덤으로 얻은 휴가

3일간의 투발루 현지 출장을 마무리하고 도착한 수바공항은 벌써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공항 이미그레이션 직원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 쉽게 입국 절차를 진행해 주었다. 공항에서 나와 다시 The Grace Road Kitchen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동행했던 일부 민간업체 분들과 작별을 고했다. 그분들은 제일 먼저 난디와 시드니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올랐고 나와 다른 한명은 다음날 그리고 나머지는 2~3일 더 피지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떠날 분은 떠나고 아직 업무가 남은 6명만 노보텔 수바 라미 베이에 짐을 풀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투발루에서 진행된 협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지친 몸과 마음에 엄습했다. 편안한 마음에 호텔 풀장에서 몸을 적시고 밀린 빨래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67일 수바를 떠나기 전 반나절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 부지런히 수바 시내를 돌아다닐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로 수바박물관을 선택했다. 박물관을 이루는 정원과 열대 정원수들은 화려했지만 박물관 전시물들은 비교적 소박했다. 그렇지만 시간 내어 방문할 가치는 충분해 수바 여행객이라며 적어도 빼먹지 말고 꼭 방문해야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어딘가 익숙한 차림의 일군의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고, 물어보니 한국 대사 일행이었다.

박물관이 최근 보수 뒤 재개장해서 대사의 축하 방문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대에 절묘하게 우리가 조우하게 된 셈이었다. 대사 일행의 관람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가 별도의 공간에서 투발루 사업의 진행사항을 공유하고 향후 진행될 착공식에 초청을 드렸다. 대사게서 흔쾌히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전체 사업과정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결국 비행기 결항으로 일정이 늘어나면서 일정을 잡을 수 없었던 핵심적인 협의 상대였던 투발루 수산통상부장관과 피지한국대사를 모두 만나 협의 성과를 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가 잠 오묘했다.

대사와 작별뒤 피지 대통령궁과 대법원 등 시내 주요 명소를 주유하고 중심 쇼핑가를 돌아다녔다. 피지 고유 의상인 술루(남자치마)와 하와이안 셔츠를 사서 입고 피지 사람이 다 된양 즐거운 오후시간을 보내며 출장의 긴장을 다 날려 버렸다. 하지만 수바의 날씨는 도착날부터 떠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비가 내렸다. 어쩌면 그래서 더위가 덜해 돌아다니기엔 좋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바 시내 투어에 정신이 없다가 호텔로 돌아와 급히 짐을 싸고 Nausori공항을 향해 가는 길은 퇴근시간 체증으로 모두를 초조하게 했다. 겨우 체크인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하고 같이 했던 동료들과 작별하고 우리 일행 두명은 난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디에 도착하니 저녁늦은 시간이라 급히 난디공항에서 멀지않은 Nalagi Hotel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역시 비가 내리는 옥상에서 칵테일을 한잔 하며 피지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68일 새벽 6시에 조식을 하고 7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타니, 우리가 탄 비행기는 정확히 9시 20분에 시드니를 향해 이륙했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서 전에 묵었던 Central Studio Sydney Hotel 로 가는 길에 작은 식물원 같은 가족 레스토랑인 The Grounds of Alexandria에 들러 버거로 점심을 대신했다. 다음날 새벽에 인천행 비행기가 있으니 이날 오후가 자유시간으로 주어졌고 우리는 이 시간을 최대한 만끽하기 위해 서둘렀다. 사실 조금은 피곤에 지쳐 그냥 호텔에서 쉴까하는 선택지를 두고 한참 고민하기도 했지만 과감히 박차고 호텔 체크인을 하자 마자 바로 시드니의 거리로 나섰다.

말로만 듣고 유투브에서만 보던 시드니 트램을 타고 Circular Quay에 도착, 바로 패리를 타고 Manly Wharf까지 달리며 나는 시드니항의 바람을 맞고, 바다향기에 취해 멀리 아름다운 도시 시드니에 빠져들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아내와 딸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anly Wharf에 내려 Manly Art Gallery & Museum을 방문하고, 다시 Manly Beach까지 걸어 젊은이들이 서핑을 하는 해변에서 모레를 밟으며 멀리 남태평양의 수평선을 바라다보았다. 가까이 만리비치가 보이는 Starbucks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패리를 타러 돌아가는 길에 Coles Manly Corso라는 수퍼에 들러 이러저런 선물용 잡동사니를 쇼핑했다.

이번 시드니 방문에서 인상깊었던 한 장면으로  Manly로 가는 패리에 휘날리던  LGBT깃발과 그 너머 하버브릿지에 걸린 원주민 깃발이 호주 국기와 나란히 걸린 모습을 기록에 남기고 싶다. 사실 Aborgine이라는 호주 원주민은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보다 훨씬 가혹한 인종말살 정책의 대상이었다. 19세기까진 거의 말살 정책의 대상이 되다가 20세기 들어와 전쟁 등 필요성에 의해  통합정책이 펼쳐지고 원주민 어린이 10만명 이상이 강제로 탈취되어 백인 가정에 강제입양되어 백인 종교와 문화를 강제주입하는 야만적 역사가  진행되었다. 그 과오를 외면하던 호주정부는 21세기 들어와 겨우 잘못을 시인하고 일부 보상을 실시했다. 그러다보니 이웃 유질랜드 원주민은 인구의 약 9%가량을 차지하지만 호주원주민의 고작 3.3%에 머물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성적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보호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표방하게 된것은 상징적인 역사적 진전이 아닐 수 없다.  

Circular Quay로 돌아가는 배는 고속 패리를 선택했지만 속도에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고, 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 멋진 노을에 젖어들 수 있어 좋았다. 항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여객선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드니 항 일대 전체가 “2023 VIVID SYDNEY”라는 빛의 축제가 진행되고 있어 그야말로 축제의 중심으로 우리는 빨려즐어갔다. 라멘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오페라하우스 앞에 있는 Opera Bar에 들러 축제를 즐기는 인파에 묻혀 맥주를 한잔 하는 것으로 시드니의 밤을, 열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69일 새벽 5시에 호텔을 나와 시드니공항에 도착,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10여시간의 비행동안 두편의 영화를 보고 지난 출장길을 회상하고 정리했다. 걱정 았던 출장이 꿈같은 추억을 남기고 끝났다.

 

6. 투발루 출장이 남긴 3가지 기억

화폐단위가 510이 아니고 7달러짜리라니??? 인구 90만의 작은 나라 피지가 유독 럭비에서만은 세계 정상인데 2016년 리오에 이어 2020년 도쿄올림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기념해 발행한 화폐가 있다. 7은 행운의 7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7명이 뛰는 7인 럭비에서 금메달을 딴 걸 기념해서 7달러가 되었다고한다. 그 귀한 피지7달러 화폐를 기념품으로 선물 받았고 귀국후에도 많은 분들에게 선물로 나눠줄 수 있었다.

피지 수바에서 투발루 푸나후티 공항을 들어갈 때는 전 산출력된 항공권을 받았는데 다시 나올 때는 수기로 작성된 항공권을 받았다. 평생 처음 받아본 수기 항공권이다. 업무차 만난 투발루 공직자에게 나의 명함을 드리고 나서 기다렸지만 자기들은 명함이 없다며 주지 않았다. 들어보니 인구 만명인 투발루에는 인쇄 기계가 없어 명함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투발루 푸나푸티 라군호텔에 머물 때 하루는 오후 정부 협의를 끝내고 들어와 덥고 피곤한 탓에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데 살포시 호텔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눈을 떠니 10살이 안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보다 더 놀래 후닥닥 도망가는 아이를 따라 나갔다가 잡지는 않고 호텔 로비에 이야기만 해 주었다. 야간에 3명의 가드가 호텔을 경비한다고 하더니 대낮에도 호텔에 좀도둑이 들었다.

 

7. 마무리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번 일정을 함께 한 진용은 참 다양한 분으로 구성되었다. 해수부를 중심으로 농어촌공사가 전체 실무를 주도하고 원양산업협회, 해외수산협력센타, 연안항만() 15분이 같이 했다. 건축, 해양토목, 전기, 기계 전문가 등 20대 청년부터 60대 장년 까지, 정부와 준정부기관 구성원에서 민간인까지, 토목에서 통역까지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어떤 마찰이나 불협화음 없이 함께 돌보며 즐겁게 일정을 수행한 결과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투발루 정부와 공식협의가 있던 날이 나의 61번째 생일이었고, 협의를 마친 저녁 만찬 자리에서 생일서프라이즈를 준비해 준 직원들 덕분에 투발루 수산통상부 Kitiona Tausi 장관부부와 차관, Sam Finikaso 수산청장이 함께 불러주는 투발루 축가를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고 고조된 분위기에 힘입어 부산 엑스포 지지를 요청하고 우호적인 의사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섬나라 투발루 출장길은 신비로운 라군으로 이루어진 남태평양 섬나라를 구경하는 행복한 경험을 얻고, 피지와 시드니에서도 다시 누리기 힘든 경험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과정에서 전체 실무를 이끈 농어촌공사 직원의 헌신과 열정에 탐복 했고, 전체 일정에서 업무 균형을 잡아주고 우호적인 내부 분위기를 이끌어준 해수부의 역할에 감사했다. 출장길에 같이 오르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업무 지원한 직원들의 노고도 잊을 수가 없다. 기대이상의 성과와 더불어 참 값지고 고마운 출장길이었다. 올해 10월 성대한 착공식이자 투발루 국민축제를 시작으로 큰 성과 있는 사업 마무리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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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투발루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투발루를 향해, 중간 기착지인 피지로 들어가는 날 아침, 호텔 인근의 거리식당에서 버거로 아침을 때웠다. 여행객들이나 출근길 손님이 주요 고객인 듯 아침부터 손님이 많았는데, 반갑게도 가게는 젊은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남는 오전 시간에 "로열 보태닉 가든"을 산책하고 조금 일찍 시드니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하고 Airside에 들어서 점심을 해결했다. 시간이 남아 면세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는데 전광판에는 오직 우리 비행기만 보딩 시간이 뜨지 않았다. 피지항공 부스에 들러 보딩 지연에 따른 30달러의 보상 쿠폰까지 받아 스넥과 음료를 마시고 놀다가 오후 시간을 다 보내 뒤에야 겨우 피지의 난디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난디행 피지항공은 편안했고 서비스도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일정을 챙기다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나 난디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난디에서 바로 수바행 비행기를 타야지 다음날 아침 투발루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데 이미 수바행 비행편의 출발 시간을 넘겨버린 것이다. 항공사측과 지루한 공방 끝에 난디에서 자고 새벽 비행기로 수바로 이동, 투발루행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덕분에 우리 일행 등 2~30명의 승객은 난디공항에서 버스로 20여분을 달려 "Double Tree Resort"라는 고급 리조트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짐을 풀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리조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하는 것도 이국적이었고, 리조트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불라라고 외치며 환대해 주던 이벤트도 인상적이었다. 피곤한 몸이지만 나도 모르게 같이 활짝 웃으며 불라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고급리조트에서 자정넘어 저녁을 먹고 새벽 430분에 다시 공항을 향해야하는 짧은 일정이 불만스러웠지만 어쩔수 없었다. 혼자 자기에 그리고 고작 3시간만 눈을 붙이고 나오기에는 너무 아쉬운 리조트였다. 새벽에 난디를 출발한 72인승 프로펠라 비행기는 걱정과는 달리 우리를 편안히 수바에 내려 놓았다. 수바 공항에는 우리보다 몇일 앞서 출장와 끼리바시 ODA사업관련 업무를 미리 보고 피지에 도착한 5명의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강한 모습에 서로 반가운 마음을 나누기도 잠간 투발루행 비행기가 결항이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연료 수급에 문제가 생겨 투발루행 비행기가 결항이 되었고, 다음 비행기는 3일뒤에나 있으니 표를 바꾸고 미리 체크인을 하면 그 비행편은 꼭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선택지가 없으니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우리는 수바에서 억지로 3일을 머물게 되었다.

공항에서 숙소인 노보텔 수바 라미 베이를 향해 가는 길에 한국인이 하는 식당(The Grace Road Kitchen)에서 점심을 먹고, 유심을 갈고 아래층에 있는 마트에서 간단한 음료 등을 샀다. 일행이 늘어나다 보니 유심을 가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을 지체하고 숙소에 들러 양말 등 간단한 빨레를 하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저녁은 호텔에서 10분여 거리에 있는 한식당인 Korea House Restaurant 에서 성대히 가졌다.

62일 금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나머지 일행들은 피지 현지 업체와 미팅이 잡혀 다 나가고 우리 일행 4명만 피지 현지 명예수산관을 만나 한국선원묘지를 참배하고, 한인회 회장단을 만나 피지 한인사회의 소식과 한국정부에 바라는 기대 등에 대해 청취하고, 오후에는 한국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님이 태도국회의가 있는 부산으로 출장을 떠나 있어 참사관을 만나 교민사회의 고민을 공유하고 끼리바시와 투발루 ODA사업 관련한 협력과 지원을 요청했다. 수바에 있는 대사관은 피지를 포함한 5개의 남태평양 소국의 통합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어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바거리에 K-POP축제를 알리는 현수막도 보이고, 대사관 건물에는 한국영화제를 알리는 포스트를 볼 수 있는 듯 다양한 활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시간에 호텔 로비에서 호텔을 지키는 경비원과 안내인 등이 공식 공연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며 노래를 불렀다. 맥주 한잔에 흥이 올라 같이 박수를 치며 흥얼대면서 수바의 밤을 만끽했다. 행복했다.

63일 토요일 새벽 일찍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니 7시였다. Suba Nausori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보딩을 기다리는 동안 지난번 출장 때 투발루 정부와 협상을 이끌었던 직원이 갑자기 투발루인으로 보이는 분에게 달려갔다. 둘은 끌어 안고 반갑게 서로 이사를 나누었는데 그분은 다음아닌 이번 출장시 협의할 업무 책임자이신 Kitiona Tausi 투발루 수산통산부장관님이셨다. 부산에서 열린 태평양도서국 포럼 참석으로 이번 출장시 면담을 잡을 수 없었는데 우리가 수바에서 비행기 결항으로 일정이 늘어지면서 부산 출장으로 마치고 귀국하던 장관을 투발루로 들어가는 수바 공항에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는 참 알 수 없다. 새옹지마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비행기 결항덕분에 갑자기 협상의 격이 높아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4. 모든 것이 늘 상상이상인 투발루

투발루 수산해양부 장관 부부와 차관과 함께 72인승 프로펠라 비행기를 3시간 30분 달려 드디어 투발루 상공에 도착했다. 산호로 이루어진 환으로 이루어진 육지와 그 육지로 둘러쌓인 라군 그리고 육지 밖의 남태평양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풍광이 시야 가득 다가왔다. 사진에서만 보던 풍경을 직접 바라다 보는 감동을 가득 안고 비행기는 푸나푸티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비행기를 내려 투발루 땅을 밟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나를 감쌌다. 순간 견디기 힘든 더위를 느꼈지만 이내 편안해지며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소문대로 공항에 연접한 휴게소 같은 곳에는 막 도착한 우리 일행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어대는 주민들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세상과 단절된 무료한 작은 섬나라에서 외부의 물문과 소식을 싣고 오는 비행기는 확실한 구경거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를 찍는 사람들을 우리도 같이 사진을 찍으며 함박웃음 지어 보이고 손을 흔들었다.

공항에 들어서자 마자 영국기술자문 Michael Batty 씨가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인사를 나누고 공항 인근의 통신사에 들어가 유심을 교환했는데 16명의 유심교환에 족히 한시간을 넘게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렵게 유심을 갈고 걸어서 바로 인근의 푸나푸티 라군 호텔에 짐을 풀었다. 짐을 풀자마자 한국에서 공수해온 햇반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가볍게 투발루 도착 첫날의 과업을 수행했다. 각 그룹별로 흩어져 그룹별 과업수행을 위한 현지 방문을 수행하고 우리나라가 몇 년 전에 지원했지만 고장이 나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제빙기와 훈연기가 있는 수산청 건물옆 수산물 가공공장을 방문했다. 직원이 없어 설비실을 들어갈 수 없어 한참을 사람을 찾고 난리를 치룬 뒤에 해맑은 청년의 도움으로 기계에 접근이 가능했고, 동행한 기술자가 문제해결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사이 나는 해변을 걷고 태양을 보고 라군을 누렸다. 기술자가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은 뒤 우리 일행은 같이 차를 타0여분 달려고우리가 있는 투발루에서 제일 큰 섬인 퐁가페일의 북단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남태평양과 라군에 물드는 석양을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64일은 일요일이다 보니 정부 관계자와 실무 협의를 진행할 수 없어 제빙기 기술자는 어제 하던 과업을 계속 수행했고, 나머지 인원은 영국인 기술고문과 함께 사업이 시행될 각 사이트와 하역을 위한 부두, 하역장 등을 두루 살펴봤다. 향후 500명 이상의 하객을 모시고 착공식을 진행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고, 투발루의 전반적인 삶의 여건, 상품, 물류 등 행사나 이후 공사 진행과정에서 필요한 물적 인적 자원의 공급과 보관 등의 조건도 알아보고 이후 진행될 공사의 인부 숙소문제까지 전반적인 상황을 기술고문의 안내로 두루 둘러볼 수 있었다. 이날 제일 큰 성과는 확실한 행사장을 발견한 것이다. 최대 1000명은 유치 가능할 정도의 실내 공간이 정부종합 청사 인근에 지어져 있었다. 이후 협의 과정에서 확인해봐야겠지만 일단 공항 등 실외에서 행사를 하게 되면 천막 등 비 대비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야하는 걸 피할 수 있어 무척 다행스러웠다.

일요일이라고 레스토랑도 운영하지 않는 호텔이지만 리셉션에 근무자가 있고, 맥주 등 음료는 판매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우리는 로비와 접한 식당공간에서 컵라면과 햇반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리셉션 근무자와 친숙해 지면서 투발루에 대해 좀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일고 우선은 간단한 투발루어 인사말에 대해서 묻고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리셉션 근무하시는 분을 통해 배운 인사말은 쉽게 입에 익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찬자리에서 마누이아를 외치고 투발루를 떠나면서 호텔과 공항에서 토파를 외칠 수 있었다. [ 파카탈로파 아투=안녕하십니까(간단하게 TALOPA = Hello), 마누이카=행운을 빈다=건배,   FAKAFETAI = Thank you, AU KO SEE = Sorry, TOFA = Farewell ]

하루가 저물 무렵 몇몇 일행과 함께 바다로 나가 해지는 투발루 라군을 바라다 보았다. 내 생애 참 많은 석양을 보았지만 40년전 해상기지 지원을 마치고 해지는 바다를 바라다보며 진해로 돌아오며 보았던 석양과 몇 년전 지금은 돌아가신 장모님을 모시고 우리식구 다 같이 갈치낚시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해지는 목포 앞바다를 가로질러 갈치 잡이를 나갈 때 보았던 석양과 함께 평생 기억에서 지우지 못할 3번째 석양을 투발루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 10시부터 투발루 정부 측과 실무 협의가 있어 각 팀별로 아침부터 서둘기 시작했다. 사업에 대해 브리핑하기로 한 팀은 밤새 프로젝트 파일을 수정하고 브리핑 문안을 가다듬고 또 연습을 한다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호텔에서 청사까지 5분 정도 달려 도착하니 투발루 정부측 인사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이내 수산청장을 중심으로 수산통상부 차관이 참석한 협의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시간은 예상외로 길어졌다. 중간에 다과가 나오고 브레이크 타임도 가지며 점심시간을 넘기며 협의가 이어졌다. 전체적으로 우리 쪽 준비는 깔끔해서 진행에 무리가 없었고, 투발루 측도 몇몇 추가적인 요구를 제안하기는 했지만 비용 등 여러 가지 불가능한 조건들을 설명하면 이내 수긍해 주었지만 워낙 세세한 사안들이 많다보니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특이 사항은 차관과 수산청장은 이전에 협의된 것으로 알려진 대규모 착공식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협의의 중요 사안중의 하나는 10월 예정된 현지 착공식 행사의 성격과 규모 등에 대한 완전한 합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를 통해 그 사안에 대한 인식차이를 좁히고 사업 수행을 위한 부두사용, 공사를 위한 부대 부지 사용, 기자재 관세 부과 그리고 인허가 진행 등과 관련해 전적인 편의를 제공받기로 합의 하는 등 예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한 협의 결과를 얻고 회의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투발루 출장의 하이라이트는 이날 저녁에 이루어졌다. 수산통상부장관 내외와 차관 그리고 수산청장을 비롯한 수산청 주요 인사를 호텔로 초대해 만찬을 진행했는데 이날이 하필 나의 61번째 생일날이었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었는데 이미 동행한 직원들은 내 몰래 이벤트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한참 만찬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갑자기 호텔 직원들이 케이크를 날아오고 저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자 갑자기 수산통상부장광내외가 투발루측 인사를 모두 앞으로 불러내어 축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생애 가장 화려한 생일 파티를 이국 투발루에서 그것도 수산통상부 장관 내외를 비롯한 현지인들의 축가를 들으며 맞이하다니 더없이 행복하다는 말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66일 화요일 아침 10시에 어제 진행된 협의문에 대해 이상 없음을 상호 확인하고 확약서를 교환하는 작은 식을 가진 뒤 바로 출국을 위해 푸나푸티 공항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수산청장이 조개목걸이를 우리쪽 15명의 인사들 한분 한분께 선물로 걸어주었고, 공항에 도착하니 영국인 기술고문이 또 다시 같은 선물을 우리들 목에 걸어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수산통상부 장관이 직접 공항에 마중을 나와 우리 모두에게 다시 조개껍질 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며 우리의 전도를 축복해주셨다. 무려 3개의 목걸이를 목에 걸치니 발길이 무거워져 쉬 투발루를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후 1시경 비행기는 투발루 푸나푸티 공항을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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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해외출장이다!

제일 맛있는 음식이 미리 준비해간 컵라면과 햇반이고, 호텔에서 바퀴벌레와 베드버그를 걱정해야 되는, 편도 4번의 비행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나라에 출장을 다녀왔다. 비록 힘들었지만 출장이 아니면 평생 가볼 기회가 없을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 투발루 출장을 지극히 사적인 관점에서 기록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표적인 남태평양의 소국 투발루로 출장을 다녀왔다.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 공적원조사업)의 일환으로 소형 부두와 커뮤니티센타, 수산물 판매장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예산은 67억 정도지만 단순 물품지원이 아닌 첫 SOC포함 해외어촌개발 사업인 만치 성공적으로 사업을 수행해 모델을 구축해야 하는 중대한 미션을 농어촌공사가 부여받은 셈이다.

투발루는 인구 1만명 남짓에 불과한 세계 4대 소국이다. 국토가 9개의 산호섬이 모여 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국토의 폭이 최대 350m에 불과하고 좁은 곳은 20~30m밖에 되지 않는다. 국토의 고도는 평균 2m로 해수면이 매년 4mm씩 상승해 언제 지도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 유엔의 도움으로 라군(산호호수)의 모레를 퍼 올려 국토를 보강하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한국의 SK의 협력으로 메타버스 국가를 구축할 준비도 하고 있다. 국토가 사라져도 주권은 남아 세계 참치 어획량의 많은 몫을 차지하는 투발루 수역의 권리를 유지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과업이라고 했다.

투발루와 대한민국의 인연은 깊다. 한국의 원양어선이 40년이상 투발루 해역에서 쿼터를 받아 참치잡이를 해 오고 있다. 인연이 오래된 만치 인적 네트워크나 신뢰관계가 비교적 돈독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예정된 ODA사업은 안정적인 참치 쿼터 확보와 협조 강화를 위한 목적과 더불어 2030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투발루의 지지를 얻기 위한 측면도 포함된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지난 3월 실무팀이 사업 개요에 대한 협의를 잘 진행한 성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설계 작업에 들어가기 전 최종 사업리스트를 확정짓고 사업에 수반된 다양한 실무적 문제를 (건축물디자인, 규모, 기자제에 대한 관세, 항만 부두 사용 비용, 인부 숙소, 작업부지 등)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더불어 10월 착공식 관련한 투발루 정부 측의 의사를 최종 확인해 행사의 컨셉과 규모 등을 확정하고 관할 피지 대사관의 협조를 구하고 피지 등 기자재 등을 공수할 물류 기지가 될 인근 도시의 여건을 살피고 구체적인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eJIGGd4lco 

일정은 529일 아침에 나주를 출발하여 인천공항을 이륙하여 다음날 아침 시드니에 도착하고, 시드니에서 하루를 체류한 뒤 FijiNandi로 날아가 Fiji 국내선으로 피지의 수도인 Suba로 이동후 일박을 하고, 다음날 Tuvalu로 들어가 63일 까지 업무를 진행하고 다시 수바로, 난디로, 시드니로, 인천으로 66일 돌아오는 일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수바에서 투발루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연료부족으로 결항하면서 3일간 발이 묶이고 전체 일정이 69일까지 연장되었다. 덕분에 예정에 없는 공백을 이용해 피지 교민회장단과 면담을 진행하고, 한국선원묘지 찹배와 대사관 면담 등을 진행, 사업 수행을 위한 주변 조사, 협의 등을 추가로 수행할 수 잇었다.

 

2. 시드니야, 오랜만이다.

529일 아침 일찍 나주를 출발했지만 인천공항을 통해 시드니에 도착하니 30일 아침이다. 2006년에 경상북도로부터 지역개발분야 농정대상을 받고 부상으로 뉴질랜드와 호주의 농촌을 10일간 연수한 뒤 처음이니 거의 17년 만의 호주 방문이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해 그냥 한국 농업 현실과 비교되는 뉴질랜드와 호주의 농업 여건에 기가 죽어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우리 농민이 호주의 농민 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상으로 열흘간의 짧은 연수를 오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 다시 호주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업무 출장으로 호주를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입국 수속을 밟고 유심을 갈고 공항을 벗어나니 피지로 가기 전 호주에서 체류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반나절쯤 남았다. 알뜰하게 일정을 잡아 바닷가를 중심으로 해수욕장과 선착장, 해변 공원 등을 차를 타고 둘러보고 잠시 산책까지 한 뒤 날이 저물었다. 시드니를 둘러보는 내내 17년전 첫 시드니 여행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기억속의 Gap 해변은 실제의 Gap해변과 어긋났다. 그동안 변질된 기억은 오페라하우스와 페리 선착장의 위치도 왜곡해 버렸다.

 

호주는 지금 겨울이다 보니 해는 짧고 밤은 길어 11명의 일행이 첫 미팅을 하고 한식당에 저녁을 먹은 뒤 각자의 숙소로 일찍 흩어졌다. 하지만 시드니의 밤이 아쉬워 나는 젊은 친구 한명과 같이 숙소 근처의 빠(Incafe)에 들러 칵테일 한잔을 놓고 시드니의 밤거리를 눈에 담았다. 중앙역 근처의 Central Studio Hotel에서 여정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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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4월23일

이번 여행은 하나 있는 딸 혼례를 마치고 남은 부부의 새로운 삶을 여는 계기이자 그동안 작업으로 고생한 아내에 대한 위로 그리고 세상살이를 나름 잘 버텨낸 내 자신에 대한 위무차원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만나 일했던 베트남 분들을 통해 궁금해진 베트남을 여행하고픈 숨겨진 의도도 있었다.  덤으로 청년시절 읽었던 [베트남혁명사]와 [사이공의흰옷]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베트남의 정치경제 사회적 변화를 읽고 싶었다. 작은 여행에 너무 큰 미션을 얹다보니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모든 것이 허욕임을 직감했다. 일단 그 부여된 의미의 무게에 비해 너무 초라한 일정이었다.  여행 전후의 준비와 마무리도 너무 허술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떠나 여행은 난에게 더 많은 여행의 꿈을 선물했다.  모든 것이 감사한 여행이었고, 지나 온 모든 시간에 감사하는 여행이었다.

사소하지만 이번여행을 통해 처음 만난 베트남에 대해 알게되거나 더 궁금해진 사실이 있다. 베트남에 의외로 모기가 많지 않았다. 건물은 좁은 터에 지어진 경우가 많았고 창문이 너무 작았다. 대중교통비가 싸서 여행하기에 너무 좋았다. 시내외 버스며 택시며 기차 요금이 기대 이상으로 저렴했다. 내가 만난 베트남 사람들은 다 친절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했다. 안내문이나 표지판에 의외로 영문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군경 등 공직자들은 의외로 권위적 이어서 놀랬다.

하노이 다녀오면서 비엣젯 타면 반복해서 나오던 노래가 궁금해 찾아봤다. Hello Vietnam. 단순히 달콤한 사랑 노래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베트남계 벨기에인인 ‘팜 꾸이난’이 조국 베트남에 대한 애끓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처철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베트남을 넘어 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끓는 사랑이 가사에 담겨 있어서일까 오랫동안 하노이여행을 환기하는 노래로 나에게 기억될 것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WwOY1o16T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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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역에 도착하니 닌빈행 3시반 기차를 30분 전부터 탑승이 가능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오징어 땅콩 있어요를 외치며 지나가던 지금은 잊혀진 풍경이 재현되고 시골아줌마들의 수다와 지친 아이들의 울음소리, 숨죽인 서양인 여행가족의 낯설은 속삼임과 시끌벅적한 중국인 무리의 알 수 없는 유쾌한 대화 속에 녹아들었다. 거친 진동 속에서 나는 현실감을 잃어갔다. 문득 고개를 드니 끊없이 이어질듯 계속된던 풍경 끝에 닌빈 역에 도착했다.

급히 예약한 숙소는 손님도 주인도 없었고 익스큐즈미를 수십번 외친 끝에 주인 할머니를 만났다. 오너를 불러 주겠다며 할머니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고 달려온 오너는 전혀 준비 안 된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에어컨을 켜고 방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저녁을 해결하러 숙소를 너왔다. 주택가 골목을 잠시 걷다 들어선 선술집은 동네 청년들의 아지트로 보였지만 좋은 식당을 골라 찾아갈 만치 여력이 없어 그냥 들어섰다. 구글 번역기로 한바탕 법석을 한뒤 볶음면과 두부구이 그리고 볶음밥을 받고 베트남 와서 기본이 된 한 끼 한 맥주로 하루를 접었다.

 

2023년 4월 22일

긴 여정이 끝나는 닌빈의 하루를 즐기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새벽 6시에 숙소를 나와 그랩을 불러 항무아에 도착하고 날이 더워지기 전에 봉우리를 올랐다. 입장료 10만동에 의아했지만 입구에서 정상까지 가꾸고 다듬은 정성이 충분했고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항무아는 마땅히 대접받아야할 명소였다. 항무아는 차라리 사진 몇장으로 모든 언어를 대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표현할 말을 잃고 마냥 풍경속에 녹아들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이미 인간세계가 아니라 곧 신선이 학을 타고 나올법한 선계에 다름아니었다. 새벽부터 많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다양한 국적의 커플들이 함께 등산길에 동반했고 모든 인종이 공통의 진리를 찾아 순례의 길에 만난 도반같이 반갑고 정겨웠다.

하산뒤 간단한 요기를 하고 택시를 불러 짱안으로 달려갔다. 역시 명성대로 짱안은 인파로 북적였고 인당 25만동의 입장료를 요구했다. 또 한번 비싼 입장료에 입을 삐죽거렸지만 짱안 역시 명성과 입장료에 값하는 명소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수백대의 쪽배와 몰려오는 손님을 싣고 선착장을 떠나가는 무리진 배들이 연출하는 풍경이 가히 일품이었다. 힘차게 노를 저어 선계를 향해 달려가는 수십대의 쪽배가 그려내는 풍경 속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다.

30분 맛만보고 끝난줄 알았던 뱃놀이는 두시간 넘어 이어졌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몇개의 동굴을 지나고 적절히 쉬어가는 사원이 있어 지루하지 않게 두시간이 지났다. 모두가 하나의 풍경 속에 스며들어 각자의 생각에 골몰한 채 물위를 흘러갔다. 같은 풍광속에서 누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또 누구는 지친 영육을 치유하고 있었고 또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구애 중이었고 또 누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꿈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짱안 뱃놀이가 끝나고 하노이행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3시간 반이나 남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닌빈시내의 명소 기린사를 향해 달려갔다. 갓 세운 호수위에 불교 조형물이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물가의 풍경 속에 자리한 까페가 마음에 들었다. 사원을 둘러보고 까페에 들러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커피향속에서 페북을 만지며 땀을 식히고 다시 힘을 내어 거리로 나왔다.

숙소를 들러 짐을 챙기고 역에 도착하니 우리가 거의 선발주자였다. 지인에게 톡을 보내 하노이서 만나 같이 저녁을 먹을 약속을 정하고 출국 시간과 한국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인천에서 나주까지 교통편을 알아보고 예약하다보니 하노이행기차가 도착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번잡한 하노이행 기차칸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베트남 여행의 느낌을 반추할 수 있게 해 줄 것만 같았다. 친근하고 즐거운 여정이 끝나고 하노이에서 만난 지인과 비싼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노이바이공항까지 환송을 받고 대합실에 들어섰다. 남은 시간 뼈속까지 베트남 여행의 느낌이 스며들길 기대하며 공항을 주유하며 남은 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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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0일

새벽부터 붐비는 36거리에서 쌀국수로 아침을 해결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롱비엔 거리의 기운을 느끼며 노상에서 먹는 아침 쌀국수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롱비엔버스 터미날로 달려가니 이내 47A 버스가 도착했고 인당 350원을 주고 타고 홍강을 건너 40여분을 달리니 밧짱 도자기마을에 도착했다. 밧짱은 도자기마을 답게 도자기 가게와 공장이 즐비했지만 이른 시간 탓에 거리는 한산했다. 가게들도 자세히 보니 개별 관광객 손님이 아니라 도매상인을 대상으로 하는 분위기였다. 오직 한곳 도자기박물관만은 그렇지 않았다.

단체로 관람 온 학생들로 활기가 넘쳤고 볼거리도 풍부했고 기념품을 사기도 수월했다. 한국 도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원색의 화려한 문양과 다양한 자태가 이채로웠다. 제작 과정과 역사를 담고 있는 전시실을 돌다 옥상 라운지에서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일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러 딸을 위한 작은 선물을 사는 것으로 한 시간 정도의 박물관 관람을 마무리했다. 다시 버스로 롱비엔으로 돌아와 뜨거워진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예약된 LeaH Silk Hotel로 짐을 옮겼다. 오후 2시 체크인까지 호안끼엠 호수가의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조금의 미안함과 함께 맥주를 겉들인 점심을 먹고 호수가를 덜었다.

체크인 하자마자 수영복을 챙겨 루프탑 풀장으로 달려가니 조그만 풀이지만 사람이 없어 둘만을 위한 풀에서 더위와 먼지에 시달린 몸을 위무할 수 있었다. 지치지 않을 만치 수영을 하고 다음날 떠날 닌빈행 기차를 예약할 겸 그랩 택시를 불러 하노이 역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왕복표는 여분이 있었지만 카드는 안된다고 해 달러로 결제하니 10%이상 나쁜 환율을 제안했다. 거부하고 역앞 가까운 은행을 둘러 좋은 환율로 환전을 해서 다시 역으로 돌아와 표를 예매했다.

하노이에서 마지막 여유 있는 시간을 쇼핑으로 할애했다. 그랩으로 롯데센타로 달려가 지하 롯데마트에 들어서니 손님의 절반은 한국 사람들이었고 친숙한 상품에 가격대는 착했다. 과자며 건과일이며 이것저것 싸고 간편한 선물을 잔뜩샀다. 베트남가면 많이 먹겠다던 잭풀룻과 망고, 망고스틴은 실컷 먹었지만 꼭 먹어보겠다던 두리안은 롯데마트에서 처음 만났다. 비싼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망설이다 캐리어에 담고 말았다. 베트남 청년들이 주요 고객인 듯한 한켠의 푸드코트에서 한국식 떡볶기와 순대를 사고 코코넛을 마시며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호안끼엠 거리로 돌아와 오직 두리안을 먹기 위해 길모퉁이 까페에 들렀다. 지독한 냄새 때문에 호텔 침실에서 먹는 것도 금지되어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까페 여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맥주와 함께 두리안을 먹기 시작했다. 모양은 그렇다고 해도 향은 너무 지독해 오래 묵은 정화조 냄새와 진배없었고 질감은 삶은 고구마 상한 것 같이 뭉컹거렸다. 비싼 두리안을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여사장에게 한 덩어리를 드리고, 혼자 외롭게 맥주를 마시던 옆 자리 서양인에게도 권했다. 다행히 맛이 있다며 고마워했다. 구글번역을 이용해 짧은 대화를 하고 늘어난 짐을 감당할 가방을 하나 서서 호텔로 돌아오니 아쉬운 또 하루가 가고 3일의 여정만 남겨놓고 있었다.

 

421일 닌빈으로!

LeaH Silk Hotel 에서 잘 자고 잘 먹고 닌빈행 기차가 떠나는 오후 3시까지 하노이를 마지막 즐기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먼저 역에 들러 가방을 맡겨두고 지난번 호치민박물관만 들러고 참배를 실패했던 호치민 묘소를 향해 걸었다. 기차거리며 성요셉성당이며 벌써 익숙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 그리 머지 않은 거리였지만 아침부터 온몸은 땀에 젖고 지치기 시작했다.

호치민 묘소를 향해 걷는 길에 레닌 동상을 다시 만났다. 전에 없는 화환이 놓여져 있었고 알고 보니 422일이 그가 태어난 날이라고 했다. 그가 꿈꾸던 혁명이 여전히 유효한지 이미 파탄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인간의 꿈과 열정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 들었다. 역사는 늘 미완이기 마련이고 인간은 변화를 추구하고 도모하기에 더 중요한 것은 시대적 과제와 이를 해결하려는 시대정신이 아닐까는 생각을 하며 길 건너 머지 않은 곳에 우뚝 선 하노이깃발 탑으로 향했다.

하노이 깃발탑은 베트남군사박물관과 함께 있었다. 관광 혹은 학습을 위한 명소인 듯 유치원 아이들이 단체로 몰려왔고 주차장은 멀리서 온 듯한 관광버스가 몰려있었다. 박물관 마당에는 제국주의 침략자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한 해방전쟁의 승리를 웅변하는 기록물과 전리품으로 가득 찾고 특히 격추한 프랑스와 미군기로 만들어 놓은 상징물이 인상적이었다. 탑을 오르내리며 베트남 독립항쟁의 역사를 반추했다.

 

이어서 탕롱황성을 들러 프랑스침략군을 전멸시키고 해벙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가져온 디엔비엔푸 전투의 기록물과 민족해방전사들이 패태하는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하노이로 진주하면서 군사퍼레이드를 펼치며 승리를 축하하던 기록물들을 관람했다. 이곳 역시 유치원아이들이 단체로 몰려왔고, 성을 배경으롣 ᅟᅡᆫ체사지을 찍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김치를 외쳤다. 한때 침략군에 부역하던 나라의 대중문화가 지금 세대의 삶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향유되는 세상의 섭리가 씁쓸하고 오묘했다.

탕롱황성을 나와 바딘광장을 가는 길에 콩까페에 들러 코코넛커피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커피향에 취해 하노이 거리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는 해방전쟁 승리의 기억과 도이모이를 통해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경제적 성장을 추구하는 베트남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베트)콩 까페는 해방군 코스프레를 한 종업원들과 실내 디자인으로 특화되어 각인된 탓에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공항같은 검색을 거친뒤 바딘광장을 들어서고 호치민묘소에 들렀지만 금요일 역시 참배를 쉬는 날이었다. 호치민 관저도 점심시간 때문인지 입장이 거부되고 뭇꼭만 들른 뒤 바딘을 벗어났다. 서호로 향해 꽌탄도교사원을 들른 뒤 이어 쩐꾸억사원에 들렀지만 점심 휴관이라 남는 시간에 가까운 파리파게트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계속 먹으려고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던 반미를 파리바게트에서 비로소 처음 영접했다. 다시 사원으로 돌아가니 같은 이유로 관람객들이 줄서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투어를 하던 한국인 부부와 잠시 이야기도 나눌 수있었다.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은 쩐꾸언 사원을 관람하고 하노이 역 근처로 다시 이동해 에어컨 켠 까페를 찾아 쥬스를 마시고 마지막 환전을 한 뒤 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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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8일 ~

하노이서 밤새 달린 라오까이행 침대열차는 낡았고, 간식은 물론 물한병 준비 못했고 화장실은 좁고 불편했다. 위층 침대에는 낮선 사람도 함께 했고 기대했던 바깥 풍경은 암흑천지일뿐 기차는 진동으로만 달리고 있음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차는 여행이 주는 모든 설레임을 선물했고 나는 밤새 행복했다. 잠들 것 같지 않았던 설레임과 기차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밤새 우리를 낯선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같은 캐빈에 여정을 풀었던 승객이 떠나는 것도 못 느낄 만치 깊은 숙면을 취했다. 기차 운행 중에 사파행 버스 티킷이 필요하냐고 승무원이 물었지만 거절했는데 라오까이 역에서 내리자마자 역무원이 버스표를 파는 임시 카운터를 펼쳐놓고 있었다. 쉽게 버스를 찾고 승차하니 버스로 가파른 길을 한 시간이나 달려 사파에 도착했다.

라오까이도 큰도시였지만 사파도 작은 시골은 아니었다. 보통의 읍보다 규모있고 짜임새있는 시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메인 광장인 사파센타를 중심으로 애초에 여행지로 조성된 듯 광장과 호수공원 그리고 호텔과 까페 등 여행관련 업소로 가득했다. 기념품과 가이드 써비스를 제안하며 여행자를 향해 달려오는 몽족 여인과 아이들은 이곳이 낯선 여행지임을 한시도 잊지 않게 했다. 애써 호객을 물리치고 예약한 호텔을 찾아 가는 길 중간에 한 식당을 들러 아침을 주문하고 나서야 겨우 사파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당을 나와 캇캇마을 쪽으로 내리막길을 10여분 걸으니 예약한 숙소인 Catcathills Resort 가 나왔다. 체크인전이라 호텔에 짐을 맡기고 천천히 걸어서 사파 센타로 나오니 MGallery Hotel과 함께 판시팡 가는 사파역이 나왔다. 적지 않은 가격에 잠시 망설이며 현장 구매보다 혹시 인터넷 구매가격이 싸지나 않은지 확인한 뒤 표를 사고 모노레일에 올랐다. 모노레일은 먼저 Sun Home Fansipan Legend에서 멈춘 뒤 케이블카를 갈아 타고 판시판역까지 올라간 뒤 다시 모노레일을 한 번 더 타고 베트남 최고봉이라는 판시팡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까지 올라갔다. 모노레일을종착지에 내려 가파른 계단을 10분도 걷지 않아 판시판 정상에 도착했다.

판시판은 해발 3147m로 베트남 최고봉인 데다 힘들이지 않고 모노레일과 케이블카를 이용해 쉽게 등정이 가능한 관계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붐볐다. 모노레과 케이블카를 갈아타는 중간 기착지마다 선물가게와 식당을 가로 질러야 했고 작은 롯데월드를 온양 조금은 분주하고 들떠 있는 관광지의 모습이었다. 외국인보다 훨씬 많은 베트남 인들이 눈에 들어왔고 베트남인들에겐 신혼 여행지로 사파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젊은 연인이 많았다. 유명 관광지 답게 혼자 카메라를 들고 중얼거리는 유투버들을 심심잖게 만날 수 있었다. 나 역시 판시판에 오르니 장대한 풍광에 한없이 기분이 고조되고 들떠 인파를 비집고 같이 쓸려다니며 연달아 사진을 찍었다.

다소 지친 몸으로 하산해서 사파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늦은 체크인을 했다. 굳이 풀이 있는 비싼 숙소를 얻은 덕분에 아직은 추운 풀장에서 몸을 풀었다. 잠시 휴식 뒤 숙소를 나와 본격적으로 사파를 돌아다니다 사파호수에서 화려한 일몰을 맞고 캇캇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사이공맥주하노이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온 종일 들떠 신나게 뛰어다닌 덕에 이번 여행의 가장 값진 하루를 보냈다.

 

2023년4월 19일

분에 넘치는 시설과 친절 그리고 풍경까지 제공한 깟깟힐즈호텔에서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눈을 떠자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고 얼른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저 멀리 캇캇마을이 안개 속에 살아나고 있었다. 얼른 아내를 깨워 아침 안개속에 피어나는 캇캇마을 풍경을 보는 감동을 공유했다. 아내는 스케치를 하고 나는 짐을 싸고 또 다른 하루의 여정을 구상했다. 오전 일찍 깟깟마을 트레킹을 하고 오후 늦게 버스로 하노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늦게 조식을 한뒤 호텔 정원을 둘러보고 바로 깟깟마을 탕방을 나섰다.

호텔을 나와 캇캇마을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여러 번 오토바이가 호객을 했지만 내리막길이기도 하고 걷는 재미를 위해 전통의상 대여점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가지고 잇는 베트남 돈이 부족해 미국달러나 카드로 결제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마을은 겉만 보고 오토바이 택시를 흥정 끝에 타고 묵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다시 하루 일정을 논의 한 뒤 택시로 사파 시내로 나가 환전을 하고 하노이로 돌아갈 버스를 예약했다. 남은 시간이 애매해 트레킹을 포기하고 택시투어를 할까 했지만 이역시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버스사무실에 맡기고 넓지 않은 사파 시내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여유를 만끽했다. 지루하기 시작할 때쯤 재래시장에 들러 2인 한 끼 3500원 짜리 시장음식을 맛있게 먹고 사파호 주변 까페로 돌아와 커피를 시켜 노상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지나는 강아지 그리고 거리를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모처럼 일정비운 시간의 공백을 누렸고 바쁠 필요가 없었던 어렸던 그 언젠가를 회상했다. 걷고 먹고 쉬기 위한 일정치고는 이동이 잦았지만 그래도 하루 2만보 이상 걷고 싼값 덕분에 실컷 먹고 좋은 풍광 속에서 삶을 누렸다. 이번은 관광이고 휴식이고 결국은 소비지만 언젠가는 다시 순례로 구도로 세상을 주유할 것을 꿈꿨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 삶의 기쁨이 가득하고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축복이기를 빌며 하노이행 버스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는 슬리핑 버스는 편안하고 아늑했다. 두어 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러 300원을 내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버스가 출발하면 바같 풍경을 즐기다 이내 잠이 들곤 했다. 6시간을 길다고 느끼지 않은 채 하노이에 도착했고 이동 중에 예약한 마리나 호텔은 버스 종점 바로 길 건너였다. 호텔은 좁았지만 깨끗했고 있을 거 다 있고 아늑했다. 거리로 나와 길모퉁이 해산물 가게에 들러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와중에 이번 일정 중에 제일 비싼 고동 요리와 조개탕을 시켜 볶음당면과 맥주로 저녁을 해결했다. 호안끼엠 호수주변 구시가지는 그냥 그 속에 들어서는 순간 박물관 관람도 유적지 탐방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여행자가 되는 신기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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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16일~

4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새벽비행기라 모두 창을 내리고 잠만 자는 바람에 내가 좋아하는 창밖 구경을 하지 못한 점이 많이 불편했다. 현지 시간 아침 8시 조금 넘어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착륙했다. 비행은 편안했고, 공항은 한산했다. 나의 첫 베트남여행은 트랩을 내려설 때 갑자기 들이닥친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다가왔다. 영상과 활자를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만 접했고, 나의 농사일을 돕는 베트남 노동자를 통해 간접 체험했던 베트남 풍경을 바라다 보는 마음이 복잡했다. 마음은 혼란스러웟지만 베트남에 입국심사는 쉽게 끝났고 이내 대합실로 넘어와 유심을 갈고, 환전을 했다. 하노이행 버스를 타기 전에 공항내 식당을 찾아 첫 베트남 현지 쌀국수를 비싸게 체험했다.

하노이 시내로 가는 86번 버스는 찾기 쉬웠다. 비슷한 차림의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몰리니 그냥 무리지어 따라다니기만 해도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버스는 편안했는데 차창 선팅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베트남의 첫인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어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하노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 홍콩 영화의 뒷골목 배경 같은 호안끼엠 호수 인근에 버스가 들어서고 승객의 대부분이 몰려 내렸다. 구글맵을 켜고 골목을 걸으며 영화 속에서나 보던 베트남의 거리와 현실을 비교하며 좁고 복잡한 인도로 트렁크를 끌고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 나섰다.

메이드빌프리미어 호텔을 찾았지만 체크인 시간이 많이 남아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섰다. 먼저 호안끼엠 호수를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외국인도 적지 않았지만 더 많은 현지인들의 무리가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여기저기 부스가 설치되고 작은 공연이나 체험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있었고 상황을 살펴보니 프랑스와 무슨 교류의 날 같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선은 낯선 베트남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아이스크림을 사 물고 사방을 두리 거리며 베트남스러움을 한껏 느끼기 위해 호안끼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숫가의 응옥썬사당엔 인파로 넘쳐났다. 비집고 들어가 오래전 나라를 구할 칼을 전해줬다는 거북이의 전설을 읽고 유물을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한낮의 더위는 들뜬 여행객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난생처음 호텔 옥상 풀장으로 달려가 수영을 했다. 오직 풀장을 위해 두 배의 비용으로 예약한 호텔이니만치 풀장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규모는 작고 수질을 그럭저럭 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는 풀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즐겼을 때쯤 덩치 큰 서양인들이 몰려오자 풀장을 나와 다시 하노이 투어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호텔을 나오자 마자 길모퉁이 식당에서 쌀국수를 포함한 몇가지 정체불명의 음식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고 그랩을 불러 호치민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호치민 묘소로 향했지만 오픈 시간이 지나 다시 걸음을 옮겨 레닌동상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길 중간에 한국인에게 더 유명하다는, “베트콩에서 이름 따 왔다는 밀리터리컨셉 인테리어의 콩까페에 들러 코코넛 커피를 마시고 베트남 현대사와 호치민의 삶을 생각했다. 역사에서 한 번도 부패한 지배세력을 신진세력이, 구시대를 신시대가 완벽히 제압하고 승리하는 경험을 갖지 못한 대한민국과 그 경험을 가진 베트남의 차이는 무엇일까? 많이 부러운 게 사실이지만 또 한편 그 승리에 도취되어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듯한 베트남의 현실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승리한 혁명이 부패한 관료의 손아귀로 귀착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혁명의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자존과 자긍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코넛 커피로 몸을 식힌 뒤 다시 거리로 나서 레닌 동상에 들러 참배하고, 포토존으로 유명한 철도건널목을 지나 따히엔 맥주거리까지 걸으며 하노이의 밤을 맞았다. 하노이는 밤에 살아났다. 한낮의 더위가 가쉬자 마자 맥주거리로 알려진 호안끼엠 호수 인근의 따히엔 거리는 낮은 탁자와 앉은뱅이 의자로 길이 채워졌다. 2차로의 중간만 오토바이가 지나갈 정도만 남기고 길 양쪽의 거리는 업종에 관계없이 모두 빽빽이 좌판으로 채워졌다. 골목 여기저기서는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고, 풍선장사나 기타 기념품을 파는 상님들까지 모여들어 그야말로 거리는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한번씩 경찰이 나서 통로확보를 지시했지만 경찰이 지나가자마자 이내 거리는 다시 의자와 탁자로 메꿔졌다. 우리가 묵는 호텔이 그야말로 맥주거리의 중심이다 보니 같이 들뜬 기분에 거리로 나서 좌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닭발요리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시켜놓고 타이거 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휩쓰는 맥주거리의 열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노이의 첫 밤은 그렇게 뜨거웠다.

2023년4월 17

아침부터 침대머리에서 오늘 하루 투어 코스를 점검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동선이나 그곳에 대한 정보는 미리 준비된 것이 없었다. ‘베트남 여성박물관호아 로 감옥 박물관그리고 국립미술관을 대충의 목적지로 잡고 구글맵에 의지한 채 거리로 나섰다. 먼저 택시를 불러 하노이역을 들러 짐을 맡기고 밤에 떠날 사파행 기차표를 예매한 뒤 발길 닫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에 대한 인식 없이 마냥 걷다보니 다시 호안끼엠 인근의 항쫑 화원을 지나 성요셉성당에 이르렀다. 자료를 찾아보니 프랑스 식민제국 시절 하노이를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 따 성요셉성당을 지었고 이후 프랑스 식민군을 물리친 베트민에 의해 장악되고 성당의 기능을 잃었다가 1990년 이후 베트남의 개방과 더불어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민중의 종교적 열망의 상징물이 된 성요셉 성당이 지금은 이방인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는 삶과 역사의 섭리가 오묘했다.

이어서 찾은 여성박물관은 큰 기대 없이 일정에 넣었지만 의외로 다양한 콘텐츠로 많은 울림을 남겼다. 입구에서 조금의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어 설명이 나오는 헤드폰을 빌려 각 섹트마다 돌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은 일상적인 베트남 여성의 삶과 혁명기 여성 혁명가의 역할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민족의 혼례와 일상 노동에 대한 컨텐츠까지 적어도 반나절은 할애해 둘러보아야 할 만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내몰려 혹독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보조하는 여성의 삶‘14살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18살이 되자 처형당한 어린 민족해방투사의 삶까지 베트남에서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도 존재하는 여성의 다양한 삶을 담고 있는 베트남 여성박물관은 오래도록 하노이 여행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여성박물관을 나와 다음 행선지로 호아 로 감옥 박물관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마침 점심 나절이다 보니 거리의 여기저기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 쌀국수를 먹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우리 역시 그 무리에 휩쓸려 베트남인이 되고 싶은 이방인마냥 스며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어서 찾은 호아 로 감옥은 의외로 외국인 관람객이 넘쳐났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최고의 문명국을 자처하던 서양인에 의해 자행된 야만과 학살의 현장은 찬 기운이 가득했다. 원래 호아로는 한자로 火爐로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숯을 굽고 도자기를 굽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프랑스에 대항해 베트남의 독립을 도모하던 베트남인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그리고 처형하던 장소로 베트남인에게는 독립항쟁의 상징적 성지였다. 나중에 프랑스를 물리친 뒤에는 다시 미국의 침략에 맞서 생포한 미군 조종사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미군들에겐 하노이 힐턴호텔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관람객 모두 긴 침묵을 이어가며 묵묵히 안내된 동선을 따라 감옥을 탐방했는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명에 시간가는 줄 모를 만치 몰입하 모습이었다. 문득 가해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의 국민들은 호아루 감옥을 둘러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이어폰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개별적 사연을 들을 때면 하나의 역사적 드라마인양 장엄하고 비장했다. 두어시간이나 흘렀을까? 독립투사의 사형을 집행하던 마지막 장소에서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향을 올린 뒤 거리로 나섰다.

이어서 인근의 국립미술관과 하노이 문묘를 관람했다. 미술관은 불상 등 몇몇 불교 문화재와 20세기 이후 현대화 중심으로 꾸려져 있었고 관람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근의 문묘 역시 많은 관람객이 있었지만 그냥 한번 훝어보고 지나칠 정도의 명소로 느껴졌다.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노이역 인근으로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더위를 식히다 약속된 지인을 만나 고급진 후에 전통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 화려한 저녁을 먹었다. 반세오의 맛을 기억하고 다시 하노이역으로 돌아와 사파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역내를 살피고 오고가는 인간 군상을 구경했다. 10시 출발 예정인 기차에 30분 전부터 승객을 들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탈 기차는 임시 증설된 기차인지 제일 마지막 칸으로 다른 기차에 비해 훨씬 세월의 흔적이 진했다. 10시에 정확히 출발한 기차는 손에 닿을 듯한 건물사이를 비집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흐린 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졸린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기차의 진동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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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신혼여행 가고 우리 부부는 舊婚旅行을 떠나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 아이 하나 낳아 기르며 산지 삼십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아이는 자라 짝을 만나고 혼례를 치루니 우리 부부도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하노이 구혼여행길에 올랐다. 지난 고난의 기억을 지우는 행복한 여정을 기록에 남겨 노후를 대비해 본다.
 
2023년 4월 14일
휴가를 얻어 딸아이 결혼식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은 딸 결혼식보다 식 끝나고 떠날 울 부부 베트남 여행에 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울 왔다. 용산역에서 마라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2023서울화랑미술제”를 관람했다. 일만여점의 현란한 작품에 눈이 호사를 누렸지만 그림이 너무 많아 어떤 작품도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2만원이라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방대한 아트페어 현장을 누볐지만 그래도 마음에 남는 유일한 작품은 [관훈갤러리]를 통해 출품한 아내 류준화의 작품이었다.

코엑스 나와 홍대로 달려오니 아내와 딸은 네일샵에 들어가고 나는 거리의 미아가 되었다. 아내가 홍대서 학위를 하고 내가 합정에서 친구들과 출판사를 하면서 합숙을 할 때 자주 들렀던 홍대거리를 혼자서 배회했다.

추억이 서린 홍대 거리를 걷고 고풍 찬연한 프랑스식 요리점에서 딸과 아내와 더불어 세 식구가 같이 비싼 저녁을 먹고 초저녁에 호텔에 들어와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눈을 떠니 축의금 문자가 쌓였고 꼭 그만치 사정이 생겨 혼례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쌓여 있다. 오히려 마음 쓰이게 한 내가 미안하다. 결혼식이란 게 참 걱정이 많다. 평생에 한번 치루는 대사니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객이 너무 많을까봐 걱정이었는데 나중엔 너무 안오실까봐 걱정이다. 신랑신부에게 누가되지 않을까 사돈께 실례를 범하지 않을까 다 걱정이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인데 다시 생각하니 그냥 되는대로 즐기면 되는 게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다.

4월 15일 혼례가 무사히 끝났다. ‘식’은 단순하고 단조로웠고 부모의 역할이라고는 하객맞이와 정해진 성혼선언문과 당부의 글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부모로서 별로 도와주지도 못했고, ‘식’보다 ‘실’을 중시하기에 아쉬운 것도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식이 끝나니 긴장이 풀리고 미리 세워둔 하노이 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비로소 일기 작했다. 인근 까페에서 마지막 하객과의 담소가 끝나고 작별한 뒤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점치며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인천공항 는 지하철로 달려갔다. 올림머리에 메이크업 그대로 딸사위보다 먼저 공항으로 떠나니 지인들이 놀리며 부부여행이 아니라 재혼여행으로 보인단다.

출국 때마다 자주 이용하는 인천공항 찜질방인 [스파온에어]에 누울 자리를 확보하고 몇 일간 먹지 못할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마땅히 할일도 없고 마음은 들떠 그냥 공항 청사를 할 일없이 걸었다. 공항은 나에게 알 수 해방감을 준다. 내안에 사는 내가 통제 불가능한 내가 숨을 죽이고 내가 통제 가능한 내가 기세를 얻는다. 나는 늘 길 위에서 행복하다. 자식가진 인간의 책무를 벗어던지고 나니 이제 좀 막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일 새벽6시 출발하는 비엣젯을 타기위해 4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트램을 타고 승강장 까지 이동하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침식사를 해결할 곳은 유일하게 햄버거집 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문의 선택지는 없고 오직 한 메뉴만 주문이 가능했다. 비싼 기내식 사먹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란 생각에 새벽부터 버거랑 찬 콜라로 배를 채웠다. 정시에 비엣젯에 올라 덜 잔 잠을 채우려 애쓰는 사이 착륙준비 멘트가 잠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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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포에서 시내 버스로 태안읍 터미널로 가고, 태안에서 대전, 대전에서 안동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 안동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봉화 집까지 무사히 도착, 67일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여행은 늘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67. 국내 여행치고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고, 특히 태안해변길에 집중된 여행인 만치 여한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고, 우리의 여정은 쉽게 줄었다. 전주를 거쳐 영목에서 시작해 꽃지로, 몽산포로  다시 학암포에서 신두리로 만리포로 이어지던 여정은 끝났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몇일 더 이어가고 싶었던 길이지만 아쉽게 접고 집으로, 일상으로, 일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정을 끝내며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맺어진 인연들에 더욱더 감사하자 다짐했다.

지난 일주일 사이 겨울은 더 깊어졌고, 나에게 가장 파란만장했던 한해인 2020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겨울추위와 코로나에 기대어 남은 한해, 최대한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가지고, 지난 행적을 정리하고, 앞날을 꿈을 그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면서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바다를 보고,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일주일간 땅과 하늘, 바다와 육지사이를 걸었던 아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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