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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름이 띠띠미란다. 그 이름에 끌려 기억하게된 띠띠미는 산수유로 유명한 마을이다. 수령이 100년에서 400년에 이르는 산수유 나무들이 밭이며 길이며 할것없이 온 동네안에 사람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을이름은 산수유와는 무관하게 마을의 골짜기가 문수산으로 막혀 있다고 해서 막다른 마을, 두동(斗洞)이라고도 하고, 뒷드물이라고도 하는데 발음하기 좋게 '띠디물', '띠띠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봉화문학회에서 벌써 5회째 띠띠미마을에 산수유가 만개할 때에 맞춰 시낭송회를 가져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지만 올해 처음으로 띠띠미마을을 찾게 되었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 오후 지인과 아내와 함께 띠띠미 가는 길에 있는 우곡약수터에 들러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잠시나마 길을 헤메다가 산불조심 계도 중인 공무원인듯한 분의 안내를 받아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있는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 숲이 낯선 방문객을 반긴다.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마을의 자존심을 지켜온 '마을숲'이 남아있는 마을을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괜히 경건해진다. 마을숲이 보전되어 온 마을은 그냥 흔한 그런 마을이 아니라 왠지 더 깊은 유래와 더 넉넉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로 다가온다. 유구한 세월동안 겪어왔을 온갖 세파와 천재지변속에서도 바로 마을숲이 있어 그 마을은 그렇게 지켜지고 이어져왔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마을숲을 지나자 밭을 밀어 임시로 닦아 놓은 주차장에 수십대의 차량이 정열해있었고, 벌써 도착한 낯익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급한 인사를 나누고 마을 길을 따라 산수유 꽃그늘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늦은 한파에 아직은 만개하지 못한 산수유 꽃봉우리가 아쉬웠지만 그래도 산수유마을 띠띠미 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고, 산수유가 만개한 띠띠미의 모습 마저 마음에 그려졌다.  산수유나무 그늘을 찾아 걷는 한무리의 사람들의 스쳐지나기도 하고, 행사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공무원들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도하면서 이내 시낭송이 있을 마을의 끝자락의 고택에 당도했다. 


고택을 들어서는 길가에는 봉화문학회 회원의 시에  청초 이순섭님이 그린 시화판들이 놓여져 있었고, 고택의 정문에는 공무원들이 손을 맞는 문지기를 서고 있었다. 반가운 인사를 맞으며 들어선 고택마당에는 벌써 모듬북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진런히 놓여진 관람석은 텅비었지만 다행히 마당안밖에 모여든 사람들은 마당 가득놓인 좌석을 채우고도 남을만했다.


하지만 손님의 면면을 둘러보고 행사 프로그램의 구성등을 눈여겨보니 이 행사가 마을의 행사가 되지 못하는구나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마을 청년회회장님이 연세가 65세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냐마는 그래도 마을의 산수유꽃을  맞이하는 행사가 단지 마을의 옛영화를 추억하거나 이런저런 문화 예술 행사를 위한 사라져 가는 풍광을 제공하는 배경으로만 이용되는 것 같기만 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마을 부녀회에서 순두부와 파전을 만들어 팔고, 마을주민 한분이 조금의 농산물을 들고 나와 마을길가에서 팔고있는 모습은 볼 수 이써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전공연이 끝나고 공식적인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고택을 나섰다. 작은 문화행사에서마저 늘어놓는 인사말 잔치가 지겹기도했고, 사실 행사 프로그램보다 '띠띠미마을'이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둘러보는 마을은 한국 농촌의 여느 마을에 비해 전통적인 마을의 풍광이 휠씬 더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에 의한 침식과 시대적 풍조에 따른 이농으로 인해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띠띠미 마을은 남루하고 무기력했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사라진 마을에는 노인네들의 발길마저 드물었다. 꽹한 바람이 마을길을 휩쓸고 지나가자 여기저기에 펄럭거리는 폐비닐 조각이 마을을 더욱 스산하게 했다.

 


마을을 한바뀌 둘러보고 집으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멋이 살아있는 농촌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농촌에는 불편함과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살지않게되었다. 더 이상 인적 순환이 불가능해 사그라들고 있는 마을에 도시민이 찾아들어 농촌의 향수를 느끼고 즐긴다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년에 하루 이틀있는 이런 류의 행사가 이 마을에는, 아 마을에 사는 주민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사람의 발길이 그리운 마을에 일년에 단 하루라도 외지인의 발길이 부산하고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다면 그나마도 무조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찬바람만 가득찬 꽹한 마을길에 아이들이 몰려다니고, 쓰러져가는 돌담위로 정겨운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먹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과한 욕심을 가진 나같은 사람에게는 아쉬움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어떻게 마을에 새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어디서 마을 재생의 희망이 올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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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유후인을 떠나 후쿠오카의 엑셀도큐하카다호텔에 짐을 풀고,
텐진거리와 캐널시티 등 도심을 둘러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다음날 일찍 텐진역에서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운하의 도시 야나가와로 향했다.
나카야마 미호가 출연했던 [도코맑음]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야나가와 수로이야기]로 알려진 야나가와는  
최근 MB표 운하를 선전한는데 이용되면서 한국인에게 더욱 친숙해진 곳이다.


이번 규슈여행에서 야나가와 코스를 선택한 것은
도시를 실핏줄처럼 잇는 수로를 따라 가와쿠다리라는 뱃놀이를 즐기며
가족이라는 인연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면서
결혼 생활 20년이라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기위해서 였다.
또한 아직도 개발광풍이 몰아치고
개발만능이라는 야만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다보니
개발과 환경,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구현한
아름다운 도시의 한 전형을 보고싶고 또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MB의 야만적 토건주의를 옹호하기위해 이용했다는 야나가와 운하는
환경재앙적 개발주의와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 친화적 개발의 산표본이었다.
야나가와 운하가 생기게 된 배경부터가 4대강사업과는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한때 도시를 가르는 물길이 쓸모가 없어지고 오염되어 흉물이 되어가자 
시당국은 수로를 콘크리트 관으로 다 대체하고
묻어버리는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려 했다고 한다.
이때 야나가와의 한 말단 공무원이 이 계획을 반대하고 나서서
손수 혼자서 도랑을 치우고, 물길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개발계획은 철회되고 쓸모가 없어진 운하가
야나가와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서서히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물의 도시 야나가와를 상징하는 운하는 
바로 그와같은 반개발주의 시민운동의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야나가와는 상징적인 친환경적 도시로 부각되면서
년 100만명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텐진역에서 가와쿠다리 티킷을 산뒤, 기차를 타고 한시간을 달린 뒤 야나가와 역에 내려섰다. 조그만 시골 기차역같은 한산함과 소박함이 묻어나는 역사를 벗어나오자 가와쿠다리를 안내하는 안내원이 10분뒤에 셔틀버스기 온다며 대기실로 안내했다. 조그마한 대기실은 훈기가 넘쳤지만 야나가와 안내 팜플릿 몇 종류와 야나가와를 홍보하는 영상을 내보내는 TV가 전부인 소박한 공간이었다.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과 관광객이 아니라 바같 추위를 피해 들어온듯한 일본 노인 한분이 전부인 탓에 자그마한 대기실도 조금은 허전해 보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셔틀버스가 도착했고, 셔틀 버스에 오른지 5분도만에 드디어 가와쿠다리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같은 모양의 작은 배들이 나란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쌀쌀한 날씨와 이른 시간때문인지 한산하기만 했다.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다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아이와 함께 나온 일본인 가족과 한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가족해서 8명이 한 배를 탔다. 신발을 벗고 배에 오르자 작은 배는 한사람 한사람이 탈때마다 좌우로 크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뒤집어 질듯했다. 배의 중간에는 일본식 난방탁자인 코타츠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코다츠에 발을 넣었다. 이내  할아버지 사공이 삿대를 젓자 배는 수로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야나가와를 물의 도시, 운하의 도시라고 하지만 야나가와의 운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운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친환경적인 작은 수로에 불과했다. 이들 수로들은 집과 집을 잇고, 길과 길을 이으며 야나가와 항구까지 이어지는 작은 뱃길이면서 동시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랑이기도 했다. 수로를 따라 늘어진 나무와 숲,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작은 집들의 아기자기한 정원들, 그리고 그 수로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리들 자신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라는 사실을 시위하는 오리떼 가족... 배는 물위를 흐르듯 나아가고, 나의 상념은 지난 세월을 지나 다가올 먼 미래를 오가며 흔들렸다. 수로의 폭은 점점 넒어지고 물길이 깊어지다가 어느새 샛강으로 접어 들기도하고, 다시 넒은 수로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능수능란한 늙은 사공의 숨결이 가빠져 갔지만 작은 배는 물살을 일으키며 중심을 잡아 흔들림이 없었다.    


약 1시간의 뱃놀이는 금방 끝이 났다. 발걸음은 선착장에 올려놓자  언제 다시 와 볼 수 있을까는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다 저 물처럼 흘러가는 것. 향유했던 지난 시간의 기억이나마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니겠는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시간을 배로 내려온 수로를 거슬러 이번에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로와 도로가 헤어지고 한참을 주택지 사이를 헤메기도하면서 원래의 출발지인 야나가와 역을 찾아 나갔다. 깨끗하고 소박한 야나가와의 골목골목을 헤메는 재미에 푹빠져 한시간을 넘어 걷다가 결국 길을 놓쳐버려 다시 한시간을 더 묻고 찾고 한 끝에 야나가와 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동안 가졌던 야나가와 방문의 꿈, 카와구타리를 해 보고 싶었던 꿈은 실현되었지만 야나가와를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찼다. 세상의 모든 삶의 터전이 다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어우려져 사는 삶의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경우인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의 삶의 터전은 바로 이렇게 가꾸어나가야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이어지고, 기차는 다시 후쿠오카로 향했다.


후쿠오카로 향하는 기차간에서 멀리 일본의 도시와 농촌의 풍경을 두눈 가득 담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일본이 부러워졌다. 최소한 환경과 전통에 대한 일본인의 애착만큼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배워와야할 것들이 아닌가? 아직까지 박정희식 개발만능주의가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고, 바로 그와같은 국민의 의식이 MB라는 구시대의 괴물을 현실에 불러들이는 악마의 주술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오늘의 일본인들 그와같은 개발만능의 시기가 없었겠는가. 시행착오를 피하면 좋겠지만 인간은, 인간의 세상은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는걸 어떻하겠는가. 그래서 인간세상인 것을!


하루의 여정으로 끝이 난 야나가와는 하루보다는 훨씬 더 큰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오랫동안 나의 삶을 데워줄 것이다. 반추할 수 있는 행복했던 시간을 선사한 야나가와와의 인연에 감사하면서 2011년 야나가와 여행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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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끝났다. 돌아오는 카멜리아호에서
석양이 지는 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망망대해를 보고 싶었다.
별이 쏱아지는 밤바다를 보고싶었고 바다위에서 일출과 일몰을 맞이 하고 싶었다.
그모든 것을 다 누리고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새로운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다.

세상은 떠나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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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족 일본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래도 결혼 20주년 기념여행이라는 기분을 나게 하는 이벤트를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료칸이었다. 이전에 가족이랑 떨어져  혼자서 단체연수로 규슈여행을 갔을 때 이런저런 대중(?) 료칸같은데서 몇밤을 지낸 적이 있었고, 그때 료칸의 멋에 반해 오랫동안 가족만의 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전체 5박의 일정중 1박을 선상에서 하고, 3박을 값싼 비즈니스 호텔을 이용한다고 해도 적어도 하루만은 료칸에서 하룻밤의 사치를 향휴하는 것으로 잡았다.

하지만 료칸은 비용이 만만치가 않고, 서비스가 천태만상이어서 선택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단 지역은 처와 딸을 동반한 여행이니만치 쿠로가와나 고코노에보다는 일본 여성들이 최고로 좋아한다는 유후인으로  정했다. 그렇지만 유후인만 해도 100여개의 료칸이 성업중이다보니 최종 결정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일단은 가격도 싸면서 독립된 노천탕도 있는 중급정도의 료칸 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유데이 코우노쿠라]다.

코우노쿠라는 유후인 역에서 좀 거리가 되었지만 다행히 료칸측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차량을 보내준다고해서 미리 송영예약까지 한뒤 출국을 했다. 아침에 하카다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터미날로 이동하여 '유후인고'라는 고속버스를 이용 점심무렵에 유후인에 도착했다. 역앞에 있는 가게의 코인락커에 가방을 넣어두고  유후인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오후 5시가 다가오자  약속장소인 유후인 역앞엘 나갔다.  역시 일본답게도 정확한 시간에 송영승합차가 도착했다. 밝게 웃는 젊은 여성분이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 유후인 외곽을 삥 둘러 10여분만에 코우노쿠라에 도착했다. 

코우노쿠라는 벌써 여러번 료칸예약사이트를 통하거나, 블로그를 뒤져 친숙해져 있었다. 차가 도착하자 마당까지 쫒아나온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환영을 받으며 물과 나무가 어우려진 일본식 정원을 지나 본관에 들어섰다. 조그마한 로비에 카운터가 있고, 여주인은 간단한 인사 후에 숙박부를 내밀었다. 숙박부를 적고나자 직원은 앞장서서 시설안내를 했다. 로비의 왼쪽은 공동식사처고 오른쪽으로 좁은 복도가 나오고 바로 공용 온천이 았었다. 공용온천 출입구 앞에는 작은 쇼파와 기념품 판매대, 여행 안내 홍보불같은 것이 비치되어 있었고, 공용온천은 남여 탕 입구가 나란이 붙어있었고, 온천을 들어서면 바로 실내탕이고 실내탕에 붙어 노천탕으로 나가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하루밤을 지낼 방은 본관의 현관을 나와 본관의 왼편에 있는 별채의 첫호실이었다. 무릎높이에 있는 열쇠를 열고 들어선 방은 지붕이 높은 다다미방으로 침실과 코다츠가 있는 다실이 붙어있는 형식으로 세식구가 자기에는 공간이 아까울 만치 큰방이었다. 옷장과 이불장은 벽장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이런저런 가구와 도자기 같은 장식품들로 실내가 꾸며져 있었다. 침실방의 한쪽에 미닫이 문을 열자 화장대와 세면시설이 있는 작은 방이 나왔고, 그 방에서 또 다른 문을 열자 그 방은 일본다운 작은 화장실이었다. 앙증맞은 공간에 설치된 세면실과 화장실을 보니 진해에서 일본식건물이었던 이모집과 외삼촌 집에서 숨박꼭질하고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어린시절 놀던 일본식 집들은 모두 목조 2층 건물이었고, 또 구석구석 작은 공간들이 많아 사촌들과 숨박꼭질놀이를 하고 놀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숨겨진 공간이 많은 집들은 그만치 또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수많은 이야기거리와 가슴 아린 추억을 담고 있었다. 벌써 40여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꼬마의 뇌리속에 묻혀 있던 추억들이 이렇게 유후인의 한 료칸에서 상기되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졌다. 장례도 참석하지 못했던 이모님의 다정했던 얼굴이 떠오르고 지금은 다 연락을 끊고 사는 외사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방을 안내하고 저녁 식사시간을 예약받은 직원 아주머니가 방을 나가자 우리세 식구는 기다렸다는 듯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온 방을 뒤지듯이 구석구석 살펴보고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던지고 유카타를 입었다. 색상이 중성적이라서 딸과 아내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을 수 있도록 버버리 장갑같이 엄지발가락만 따로 있는 양말을 신었다. 사진을 찍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를 마시고도 저녁식사까지는 시간이 남아 세식구가 모두 남여공용탕과 전용 노천탕으로 헤어져 온천을 했다. 남여공용탕은 하나의 탕을 남녀탕으로 간막이를 하고, 다시 각각의 탕을 실내외로 간막이쳐서 노천탕과 실내탕으로 나눈 그런 구조였다. 실내탕 바닥에도 노천탕에서 흘러들어온 낙엽이 손에 잡혔고, 남여탕은 대나무 한겹으로 구분되어 있어 서로 대화를 나눌수도 있었다. 절묘하게 택일을 한 덕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모두 8실이라는 료칸에 손님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저녁 늦게 부부로 보이는 한쌍의 손님이 들어오긴 했지만 아뭏튼 공용탕마저 독탕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료칸매너(?)의 부담없이 싣컷 즐길수 있었다.

흩어진 세식구가 다시 모여 식사처에서 소위 '가이세끼' 요리로 저녁을 들었다. 기대가 너무 컸는지 그렇게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해산물과 육고기를 고루 갖춘 일본 요리를 한 코스씩 즐기다 보니 무려 한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식사 한끼에 90분 걸린 것은 내 오십 평생 처음일 것이다. 직원 한분이 거의 우리 테이블에 붙어있다시피하며 음식을 내어오고 접시를 치우고 그리고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각각의 요리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체질이 머슴체질이다 보니 난생 처음 받는 서비스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다가 한번씩 이렇게나마  대접받는 시간들을 갖는 것도 괜잖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방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직원이 이부자리를 깔아놓았다.  료칸에서의 시간을 잠으로 다 보내기가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사실 료칸을 먹고 씻고 자기위한 공간이 아닌가. 특히나 전날 선상에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샌데다가  또 하루종일 유후인 거리를 헤메다보니 피곤이 물밀듯 몰려왔다. 도대체 저녁을 먹고 나서 잠들기 전에 우리 세식구가 무슨 대화를 하고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 만치 깊고 편안한 잠속으로 골아 떨어졌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새벽 일찍부터 눈을 떳다. 무슨 특명이라도 받은 듯이 식전 온천을 즐기기 위해 탕을 찾아 들었다. 얼굴에 눈을 맞으며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수에 눈이 내려 녹는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다 봤다. 문득 이 호사를 누려도 좋을지 별일이 없을지 걱정이 될만치 그 순간의 시간이 너무나 충만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오래동안 누적된 마음의 때가 녹아 흐르는 듯 편안햐졌고 사르르 두눈이 감겼다. 

저녁에 먹었던 가이세끼요리에 비해 훨씬 간단한, 하지만 너무나 넉넉한 아침을 먹고 나서도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은 코우노쿠라에서 보내고 싶어 송영 시간을 10시로 부탁했다. 아침식사후 또 세식구는 각각의 탕으로 흩어져 온천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코우노쿠라 근처 마을을 산책했다. 아무것도 없는 간혹 눈발이 흩어지는 평범한 일본 농촌의 마을안길을 걸으며 코우노쿠라에서 보낸 하루밤의 사치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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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초, 마을 사업 관련해서 마을주민과 함께 일본 연수를 떠났고 그때 1시간 정도 유후인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쳐 그 짧은 1시간마저 유후인을 보는둥마는둥 보내고 말았지만, 그때 가이드로부터 유후인이 '일본여성이 일생에 꼭 한번 여행을 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최고로 인기있는 관광지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리고 귀국후 이런저런 자료를 보면서 유후인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지난 1월 23일에야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1박까지 하는 넉넉한 일정으로 유후인을 찾았다.

내가 아는 유후인은 참 특별한 관광지다. 대단한 역사문화적 자산이 남겨진 곳도 아니고, 자연 경관이 유별나서 사람을 매혹시키는 그런 곳도 아니다. 골프장이나 대형 리조트, 호텔 인프라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현대문명의 현란함도 도시적 매력도 없고 그렇다고 전원의 목가적 풍경만으로는 관광지가 되기에 아무리 봐도 부족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만2천여 명에 동서 8km, 남북 22km의 유후인은 년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일본 최고의 관광지중 하나다. 유후인은 인구나 도시 면적으로만 본다면 봉화읍 정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매력이 유후인을 그토록 성공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게 했을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우선 유후인을 인상짓는 몇 가지 자원을 생각해 봤다. 유후인을 내려다보는 해발 1500m가 넘는 유후다게라는 산이 있다. 유후다케는 아소쿠주 국립공원의 일부로 화산작용으로 생겨난 산이다. 이 유후다케를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산록이 유후인을 둘러싸고 있다. 산세로 따진다면 물론 보기에 아름다운 산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유후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유후다케는 유후인의 명성을 통해 알려진 산으로 유후인의 작은 자원일 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후인을 찾았던 사람들은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를 잊지 못한다. 긴린코 호수는 관광객이 제일 많이 붐비는 거리의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연못이다. 석양이 비칠 때면 호수에서 뛰어오르는 붕어의 비늘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긴린코(金鱗湖)라고 이름 붙인 호수다.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 항상 김이 피어나는 신비로운 호수로 주변의 아기자기한 미술관이나 카페들과 잘 어울려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호수지만 자그마한 크기의 호수에 불과하다. 긴린코 호수가 가진 이름의 의미가 관광객의 흥미를 끄는 것도 사실이고, 주변경관과 어우려져 신비로운 매력을 드러내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탄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 역시 유후인의 매력을 다 설명해 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다.


유후인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대표작인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이치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형상화한 케릭터 상품이 즐비하고, 전문 가게들마저 성업 중이다. 이 역시 유후인의 큰 관광자원의 하나지만 유후인의 명성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유후인의 참 매력을 드러내는 규정은 다름 아닌 “친환경 관광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자원들이 유후인을 친환경관광도시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친환경 관광도시 유후인이 탄생되었는지 살펴보지 않고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유후인은 1975년 오이타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유후인의 대표적 호텔건물이 붕괴하는 등 참사를 겪었다. 당시 유후인은 인근의 유명한 관광지인 벳부 덕분에 ‘작은 벳부’라고 불리며 지명도가 높아지던 시기였는데 지진에 의해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지진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마을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마을재건위원회는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 사업 같은 개발을 통한 극복 방안과 유후인의 고유한 경관을 보존하면서 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개발 방향을 높고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투표를 통한 주민의 선택으로 ‘보존’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주민자치위원회는 음악제와 영화제 등을 만드는 등 유후인을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마을로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정감 있는 마을 만들기 조례’를 재정하고 지역의 농업, 관광, 주민의 삶까지 아우르는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지역 개발 모델을 구상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1988년에는 유후인에 3,600실 규모의 대형 리조트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주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기도 했지만 민관이 함께 이를 저지하고, 아예 1990년에는 유후인 내에 5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는 조례까지 재정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 주민들의 노력이 오늘날 유후인을 전국 최고의 ‘친환경관광도시’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후인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지역의 발전 방향을 잡아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주민자치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당연히도 주민주도적인 공유 과정이 선행되었다. 결정과정의 공유는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라 할 것이다.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과정은 좁게 보면 유후인 인근의 최대 관광지인 벳부와의 차별성을 찾고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벳부가 일본경제의 상승기에 단체관광, 기업관광이 주를 이룰 때 번성하여 남성중심, 밤거리와 유흥가, 대형 숙박시설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휴후인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유후인 관광자원은 여성 중심적이고 가족중심적인 가치에 기반 하여, 예술, 문화쇼핑, 생활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후인은 시대적 트랜드의 변화를 먼저 읽고 자신의 고유한 차별적 가치를 그 중심에 세움으로써 성공적인 지역개발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유후인 만의 고유한 관광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유노쓰보’ 거리다. 이 거리는 유후인역에서 긴린코 호수에 이르는 약 2km정도 되는 거리다. 이 길을 중심으로 작은 골목길들이 이어져 있고, 골목 마다 수십 개의 미술관과 공방, 베이커리, 까페, 그리고 각종 특산물과 기념품, 공예품, 골동품 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시설의 화려한 건물은 하나도 없고 오밀조밀한 거리에 그만그만한 규모의 소박한 미술관들이 전부다. 사실 어느 것이나 하나를 떼어놓고 본다면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런데 유노쓰보 거리의 이들 모든 것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일년에 400만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중심적인 매력으로 승화한다. 사람들은 문화예술의 빛 아래서 나름의 취향에 따라 금상 고로케와 유후인 에끼벤을 사먹고, 유후인 버거와 유후인 롤케익을 즐기며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유후인은 대중의 소박한 정서에 철저히 부합하는 관광지다. 특별히 화려한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거리에 대중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작은 자원들이 어울려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의 행복한 삶을 우선시 하는 관광개발을 펼쳤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규모 호텔이 들어설 경우, 지자체는 세입 증대라는 이익이 있겠지만 주민과 관광객의 관계는 단절되고, 고유한 지역의 경관과 정서는 파괴되고 만다. 유후인은 그런 식의 대형 호텔의 건설을 저지하면서 오늘날 100여개의 중소 료칸이 성업하게 되는 여건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렇게 지켜진 료칸 자체가 하나의 중심적인 유후인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유후인 거리를 걷다보면 관광지라기보다는 잠시 산책 나온 거리, 내 집에서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숙하고 마음 편안한 공원에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그것은 유후인의 거리가 관광이 아니라 ‘생활’, ‘체험’을 모토로 하는 유후인의 관광정신을 철저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유후인으로 선택한 것은 먼저 우리가족이 유후인의 매력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부가적으로 내가 사는 봉화, 그리고 비나리마을의 바람직한 개발 방향에 대한 착안을 얻기 위해서 였다. 1박2일의 유후인 여행으로 뭐 대단한 성과를 얻을 수있겠냐만 그래도 오랫동안 유후인은 나의 뇌리에 남아 곱씹어야 될 생각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 떠나서도 그 이틀 동안 동안 딸과 아내와 함께 유노쓰보거리를 걸으며 다코야끼를 사먹고, 벌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던 행복한 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메마른 삶을 훈훈하게 뎁혀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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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일본농촌마을 선진지 견학으로 규슈여행을 다녀왔다. 즐겁고 의미있는 연수이긴 했어도 공적인 일정이 주는 아쉬움도 많았다. 나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일본의 멋에 매료되었고 특히 일본 농촌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렸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작은 다짐 하나를 했다. 빠른 시일내에 다시한번 가족과 함께 유후인이랑 야나가와를 보러가겠다고. 그리고 작년 10월이 결혼 20주년이다보니 충분히 핑게도 되었고, 틈틈히 웹을 뒤져 규슈여행 정보를 모아나갔다. 가까운 규슈지만 엄연히 외국인데 일본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자유여행을 가려고 하니 사전 준비가 많아야 했다. 늦었지만 난생 처음하는 단독 해외여행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여행안내서적들도 사서 읽고,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일본어회화에다, 영어회화 공부까지 하기 시작하고 이러저런 블로그를 찾아 여행기를 읽어나갔다. 나중에는 유후인과 후쿠오카를 가지않고도 모스버거와 벌꿀 아이스크림 그리고 금상고로케의 맛을 논하는 유후인, 후쿠오카 전문가가 되다 시피했다. 그리고 10월이 다가오면서 드디어 교통편과 숙박편 예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딸애의 합류와 이런저런 다른 사정까지 겹쳐 일정은 12월로 연기되고,  '대기'상태의 배편을 구한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한뒤, 배편이 틀어지면서 예약된 숙소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해를 넘기고 지난 1월 22일 드디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동안 집을 지켜야되는,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우리집 똥강아지 초롱이가 서운한 눈빛으로 우릴 배웅했지만 개무시하고 악세레다를 밟았다. 


안동 강변의 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안동역을 들어섰다. 한달전 예매를 하고 프린터해 둔 티킷을 주머니를 뒤척여 찾아 놓았지만 승무원 누구도 기차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안동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이 걸리지만 기차로는 4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랑,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랑 한참을 갈등했지만 근 7~8년만에 하게 될 기차여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플랫폼을 들어서는 나의 가슴은 벌써 여행의 흥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식구가 함께 챙겨야될 가방의 수를 확인하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몫을 나누다보니 금방 기차가 도착했다. 12시 12분 안동발, 16시 27분  부산 부전역도착예정인 무궁화호는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좌석번호를 찾아  선반에 짐들을 올려놓고 
차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안동의 익숙한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낯선 풍경들이 차장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카페열차칸을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페열차칸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찾아 들어선 카페열차는 텅텅 비어있었고, 매장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창을 스치는 겨울 산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끈한 원두 커피 한잔의 향기에 취했다. 카페칸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객실 차창을 스치던 바로 그 풍경이 아니었다. 커피향 가득한 까페열차칸에서 바라다보는 차창밖 풍경은 지난 추억을 고스란히 환기시켰다. 어린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은 깬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든 새벽, 소년의 귀에 울려오던 새벽기차소리는 두려웠던 밤이 다 가고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원의 소리에 다름아니었다. 중학교3학년 시절 갑자기 공부에 신명이 붙어 책보다 더 많은 도시락을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기차를 타고 전교 1등으로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발역인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짦은 시간동안 새벽기운이 걷혀가는 세상을 차창밖으로 바라다보던 소년의 가슴은 온갖 굴레에 묶인 지금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할 미래에 대한 꿈들로 벅차올랐다. 
 


안동을 벗어난 기차는 간혹 낙동강을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의 지류들을 건너기도 하고, 의성과 군위를 지나면서는 낙동가의 본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아름다운 겨울강을 바라다불 수만은 없었다. 한달쯤 전 구미에 일이 있어 갔다가 4대강사업으로 구미보를 설치하는 공사장 주변을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듣던 4대강사업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강변 농토에 끝없이 쌓여있는 준설토 무더기와 거대한 보기둥을 보면서 경악했다. 한 인간의 야욕이 무참히 뭉개버린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만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절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평화의 강이 끊기고 무자비하게 파괴된 공사 현장이 곧 나타날 것만 같아 창밖 강풍경을 바라다보는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기차는 부산 부전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짐을 들고 부전시장쪽으로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서 였지만, 승선수속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고, 가야할 전철 구간은 몇개되지 않았다. 가방을 끌고서 부전시장을 구경하자는 아내와겨루다가 그냥 길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서 말로만 듣던 부산오뎅을 사먹기도하고, 중앙역에서 국제여객터미날까지 굳이 걸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 국제 여객터미날에 도착하고보니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좁은 대합실을 들어서니 의외로 인파가 넘쳐나고 여행객의 설레임으로 후끈겨렸다. 비행기 삯에 비해 배삯이 싸서 그런지, 아니면 승객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어설프고 조금은 지저분한 여객터미날은 여행사별, 단체별로 무리를 지어 인원을 점검하고 여권과 승선티킷을 나누어주는 등 부산했다. 개별 자유여행에 오른 우리가족만 일행이 없이 홀가분하게 보였고 넓지 않은 터미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승선시간을 기다렸다. 


발권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린뒤에 먼저 출항할 시모노세끼행 성희호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과정을 구경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타고갈 하카다행 뉴카멜리아호 승객들의 승선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제사 후쿠오카행 배를 타게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설레임을 안고 들어선 승선장에는 면세점이 있었지만 잠깐 구경만하고는 곧장 배에 첫발을 디뎠다. 뉴카멜리아호 갑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렇게 큰 배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울릉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울릉거림이 파도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객실은 카멜리아호의 3층,4층,5층에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가족은 4층의 12명이 들어가는 한 다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남녀실이 다르거나 혹은 비슷한 가족여행객들로만 같은 호실 손님을 몰아준다든지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우리 선실은 전부 개인 남자 승객뿐이었다.  우리가족은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갇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행이 우리 호실의 승객은 7~8명에 불과해 넉넉한 자리에 트렁크를 벽삼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여행이란게 이런 불편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며 스스로를 위무하며 저녁 7시 승선후 11시 30분 출발까지 선상의 여행을 시작했다.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각종 자판기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갑판으로 나가  어둠에 싸인 부산항과 부산시의 야경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카멜리아호는 일본 선적인지 선내에서는 엔화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고 자판기로 판매하는 상품들 역시 일본 상품들 이었다. 배를 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이미 일본에서의 시간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만히 서 있는 배에서 보내는 시간의 지루함을 줄일 순 있었지만 4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한 공간에서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도 고파왔지만 선내 레스토랑은 예약된 단체 손님을 우선 받고 8시40여분이 지나서야 일반 개인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일부 메뉴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였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자며 3명이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값은 각 850엔 정도 였고 그런데로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날 압권인 음식은 단연 연어알밥이었다. 국내에서 먹던 일반적인 알밥만을 생각하고 연어알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아가씨가 몇번을 반복해서 연어알밥을 드실 수 있으시겠냐고 되물어왔다. 먼저 국적을 묻고 연어알밥은 비린내가 많이 나서 한국사람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고는 고집스레 주문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차려진 그릇의 뚜껑을 열자마자 와이프는 스필버거의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눈알이 둥둥 떠 있는 스프를 연상시킨다면 질겁을 했다. 나는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연어알이 입안에서 터질때마다 비릿한 생선 썩은 냄새 같은게 입안에 퍼지면서 거의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남은 2인분의 다른 음식을  3명이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부산앞바다의 밤은 깊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부산항 밤바다를 바라다보고 기념사진도 찍다가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설핏 든 사이 배의 출렁거림이 느껴져 눈을 떴다. 배가 출항을 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나선 갑판에서 바라다 보는 부상항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바라다 보며 멀어져 가는 나의 지난 시간들도 더불어 작별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일본여행을 꿈꿔온지 오래다. 선상에서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맞는 일출, 그리고 일몰, 바다 한가운데서 보는 밤 하늘의 별들... 그리고 파도소리.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에 별도, 일출도 볼수가 없었다. 빛마져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멀미까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갖는 여행의 꿈은, 막상 길 떠나게 되면서 막닥뜨리는 구질구질한 현실과 의외의 변수들에 의해 뭉개져 버리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 꿈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삶은 항상 의외의 사건들로 가득차고, 늘 미지의 것을 남겨 놓고 있지. 그래서 세상은 신비롭고,  삶은 살만하지 않은가? 낯선 여행만큼이나 설레임 가득찬 나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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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0주년 첫 가족 일본여행을 떠나며...

나는 호젓이 떠나는 여행을 꿈꾸고, 혼자만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여행은 모든 익숙한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다.
멀리서 바라다 보는 '나',  '나'를 둘러싼 삶터,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길을 나서면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 된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수평선 넘어 번지는 석양을
그 자신의 눈으로 바라다 본다.


낯선 눈으로 익숙한 것을 바라다보는 생소함이 내가 꿈꾸는 여행의 묘미다.
하지만 그 생소함은 너무 친숙해서 느끼지 못하게 된 사물들을 발견하게하고,
익숙함의 궁극을 나타내는 나자신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의 상처받은 신비를 치유하는데 묘약이 될 것이다.

객관화된 자신을 '그'의 눈으로 바라다보면서 '그'가 산 삶을 되짚어보고,
'그'가 살아갈 앞날의 삶을 꿈꾸는 여행은 결국 떠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다.
나는 더 멋진 유랑을 꿈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여행일뿐이다.
여행은 길고 지루한 인생이라는 길위에서 잠시 느티나무 그늘로 스며들어
낡은 운동화나마 벗어 먼지를 털고 다시 신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운동화를 고쳐신고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번져오는 햇살과
파란 하늘을 바라다 보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여행이 단순한 '소비행위'일뿐인 시대에
그래도 굳이쇼핑센타를 가지 않고 배낭을 매고 길을 나서는 것은 
단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나
몸에 베어있어 버리지 못하는 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그 신비를 잃지 않길 바라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이 설레임으로 가득차길 빈다.
세상의 모든 작은 여행들이 우주여행의 황홀함을 나눠갖는다면
사람들은 좀더 따뜻하고 충만한 의미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난생 처음으로 가족일본 여행을 떠난다.
우리 가족은 규슈에서 5박6일의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할 것이다.
유후인의 거리를 지나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마을 속으로 스며들고
후쿠오카 빌딩 숲의 한 모둥이에 쳐박혀 잊혀져가는 가게에서 우동을 먹으며,
익숙한 가족의 의미와 인연의 깊이를 되짚고 
우리가 살아있는 이 세계의 신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싶다.
그리고 다시 진부한 일상으로 돌아와 진부하지 않은 삶을 도모하고 싶다.
익숙한 모든 것을 그리워하기 위한 떠남에서 돌아야
모든 존재와 모든 관계에 스민 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1월22일 봉화출발 / 부산발 카멜리아호
1월23일 하카다항 도착 유후인으로 이동 / 코우노쿠라 료칸에서 1박
1월24일 후쿠오카로 이동 /하카다도큐 엑셀 호텔 1박
1월25일 야나가와로 이동/ 다자이후 관광 / 1박
1월26일 후쿠오카 관광 / 1박
1월27일 하카다항 출발 부산 귀환
1월28일 봉화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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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둘째날 - 구마모토성과 아소산 그리고 구로가와마을

평생 처음으로 다다미방에서 숙면을 취하고, 
일본에서의 둘째날을 힘차게 시작했다.
아침일찍 온천욕을 하고, 유카타 차림으로 식당을 들어섰다.
일행들은 일본 여행 하루만에 현지 적응이 다 되었는지 하나같이 유카타를 입고
'오하이요 고자이마스'를 외치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전날부터 두세번씩 온천욕도 하고, 맛있는 일본 음식을 잘 드신 덕분에
얼굴은 화기가 넘쳤고, 또 본격적인 일본 여행에 거는 기대때문인지 조금씩 들떠 있었다.

둘째날의 여정은 구마모토현의 중심부에 소재한 구마모토성을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601년에 시작해 1607년에 완공한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장중에 가등청정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성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인 지식을 가이드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구마모토 성을 세운 가등청정(가토 기요사마)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역사적 인물과 연관된 성의 역사는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특히나 일본 역사에 대한 박식한 가이드를 만난 덕분에
지루한 역사강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참으로 즐겁고 유익한
배움의 기회가 될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같은 필부에게 권력의 중심에 도달했던 인간들의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탐욕, 
획득한 권력을 지키기위한 무자비한 보복과 음모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끔찍하기만 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몸서리쳐졌다.
오직 인간만이 그토록 징글징글한 탐욕과 집착을 가질 것이다.
 
구마모토 성을 떠나 우리 일행을 싣은 버스는 아소산으로 향했다.
아소산은  활화산으로 지금도 가스와 수증기를 뿜고 있고
몇십년에 한번씩 용암을 분출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화산들의 활동으로 형성된 분지를 중심으로 산맥이 이어지듯
산등성이가 이어지는데 그렇게 형성된 산등성이는 정상부위가
모두 갈대밭으로 형성되어 목초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아소산 가는 길은 이렇게 형성된 갈대밭을 따라 이어지는데
이 길을 '쿠사센리'(갈대천리)라고 했다.

아소산 정상은 짙은 안개와 강한 바람으로 오르지 못하고 내려와야만 했지만
화산 분지를 따라 형성된 산등성이를 따라 아소산을 오르는 길은
광활한 자연의 숭고함과 깊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아소산을 내려와 구로가와 마을을 가는 길목에서
'홈와이드'라는 대형  농자제, 철물 공구상을 들렀다.
일본에 대중화된 전원가꾸기와 텃밭 농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성업중인 가게에는
각종 꽃모종과 연장들, 농기구들,
특히나 탐나는 갖가지 연장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혹시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연장을 서너개는 사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이어서 이날 오후부터 첫 방문 마을인 구로가와 마을로 길을 잡았다.
구로가와 마을은 지금은 유명해진 온천 마을로,
좁은 계곡을 따라 수십개의 소규모 온천이 옹기종기모여있는 마을이었다.
대규모의 숙박시설보다는 5~10호실 정도의 전통료칸이 대부분인 구로가와마을은
침체된 마을을 주민의 힘으로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성공사례라고 했다.
일반적인 농업중심의 농촌마을과는 분명 다르지만
마을 단위 공동체가 어떻게 지역사회를 살려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일종의 주민회관 같은 공간에서 구로가와 마을의 온천조합이사장인 엔도우상으로부터
구로가와 마을 활성화 사업 과정을 비롯해 마을의 현황과
미래 비젼에 대한 간략한 강의가 듣고, 이어지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구로가와 마을은 전체 200여호로 이중 29개의 료칸이 운영되고 있고,
객실은 총 477개로 하루 1500여명의 숙박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초기 대중온천으로 마을을 변모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업체간 매출의 차이를 줄이고 협력을 높이기 위해
숙박과 별개로 온천을 공동 사용할 수 있게하는 
온천사용권(삼나무 토막으로 만든 마패같은 모양)을 판매하고
공동관리하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그 마패를 구로가와 온천마을의 단합과 성공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기고 있는 엔도우 이사장의 자부는 대단했다. 
  




구로가와 마을을 떠나 숙소가 예정되어있는 고코노에로 가는 길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먼저 내린 눈이 길 여기 저기 쌓이기 시작했고, 혹시나 폭설이라도 내려
고코노에의 산마을에 갇혀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규슈는 그래도 제주도보다도 훨씬 남쪽에 위치해 
그런 폭설을 걱정할 만치 추운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되새기며 위안을 삼았다.

1시간을 넘어 산길을 달린 끝에 도착한 고코노에마을은 저녁 어스름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거리는 온천관광지를 무색케할 만치 한산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우리의 숙소인 하나소우겐 호텔 역시 좁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 버스가 임구까지 들어갈 수 없는
버스 도착에 맞춰 호텔 직원들이 짐을 싣어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친절한 호텔 직원보다고 더 우리를 반겼던 
'네오'라는 커다란 강아지가 기억에 남는 하나소우겐 호텔에서
 선대한 저녁식사를 받으며 규슈에서의 이틀째 여행을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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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이튿날, 민박집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을 먹고,  담장넘어 석류꽃이 만발한 민박집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계획대로라면 매동마을을 먼저 방문해 마을위원장으로부터 마을 사업에 대해 듣고 매동마을에서 상황소류지까지 걸을 예정이었지만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일정을 바꾸었다. 먼저 출발지였던 인월로 돌아가 인월에서  비전마을 가는 길중 산길을 피하고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기를 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비옷으로 몸은 감쌌지만 무릎아래는 비에 젖고 무릎위는 땀에 젖어 길을 걷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퇴약볕을 모면하고 빗길을 걷는 것도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비때문에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머리까지 뒤집어 쓴 비옷을 때리는 빗소리에 사위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비를 뿌리는 구름이 지리산을 감아도는 풍경을 바라다보며 빗속의 농로를 걷은 기억은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처음에 망설였던 빗길을 걸으며 빗길을 걷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예정된 하루 일과를 무시하고 그냥 계속해서 길만 걸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걷기는 끝이 났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지리산길 벤치마킹인 연수다 보니 실제 길을 걷는 시간은 그리 넉넉할 수가 없었다. 두시간도 채 걷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인 매동마을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싣었다.

매동마을은 녹색체험마을로 운영되어 왔지만 마을 사업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최근에 들어 마을을 지나가는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 방문객과 민박손님, 그리고 각종 체험객이 부쩍 늘어난 대표적인 마을이라고 했다. 매동마을을 방문한 이유는  걷기 길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 길과 마을의 건강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진천시키기위해서였다.    


마을사업이 활발한 전국의 이런저런 마을들을 많이 방문해 봤지만 잘되는 마을의 공통점 중 하나는 좋은 마을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동마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영오 추진위원장은 과장없이 마을 사업의 과정과 현시상을 낱낱히 말씀해 주셨다. 주민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인한 갈등, 체험프로그램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진정한 마을활성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과감없이 털어놓으시고, 우리 일행과 격의 없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는 마을 지도자를 뵙기만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오셨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길을 가야만할까하는 생각에 그분들의 선택앞에 숙연해 지기 때문이다.

이영오 매동마을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마을 사업이 기반하고 있는 마을의 공동체성이 과연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시대에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성의 성격이나 형태가 무엇인지, 낡은 공동체성이 과거지향적인 향수로 포장되어 마을사업의 토대로 삼기 때문에 현제 마을사업들이 지지부진하고 적지않은 마을에 분란을 일으키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정답없는 토의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이날 3번째 프로그램이 진행된 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타로 향했다


신현주 인월안내센타장님과 실무자 한분이 지리산길의 구축과 운영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그리고 질의 응답을시간을 가졌다. 이분들과의 토의를 통해서도 제주 올레길에서 느꼈던 똑같은 문제의식을 인식할 수 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길'을 '상품'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로 승화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길'의 원초적인 푹력성을 순화시켜 어떻게 사물과 생명, 사람과 마을을 잇는 생명의 길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알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을 통해 낙후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공동체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일은 예상치 못한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고, 애초에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오히러 갉아먹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지리산길'을 만들어나가는 이분들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1박2일의 짧은 지리산 연수는 끝이 났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를 지나 봉화로 돌아왔지만 아직 '외씨버선길'은 보이지 않고 마을과 길이 만나는 그 어디쯤에서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외씨버선길은 나에겐 아직 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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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 감자밭에서 풀을 메다가 전화를 받았다. BY2C(봉화, 영양, 영양, 영월, 청송)의 지자체간 협력사업으로 추진중인 '외씨버선길' 추진 사업단에서 지난 봄 제주 올레길에 이어 지리산 둘레길 벤치마킹을 떠난단다. 처진 밭일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한다는 당위와 '지리산'이 발하는 강력한 유혹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나의 자제력은 오래가지 않았고 동행을 약속하고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사업단의 일원이 아니라 봉화군의 주민으로서 봉화군청 공무원4명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간 '외씨버선길'사업의 추진 과정을 간접적으로 넘겨다 보면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정적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지리산'을  공짜(!)로 갈 수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동행의 이유가 충분했다.


7월 15일 오전 9시 30분 안동 상공회의소 마당에 스무명 남짓의 일행이 모였다. 이내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고 3시간만인 오후 1시경 88고속도로 지리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리산 자락이 지나가는  남원시 인월면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외씨버선길' 사업을 주관하는 경북북부연구원관계자와 이번 연수를 주관하는 한국생산성본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남원의 특산물인 붕어를 주재료로 만들 '어탕'으로 거뜬한 점심을 들고 식당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길 안내센타'를 들러 이번 연수의 첫프로그램인 사단법인 숲길의 이상윤 상임이사의 특강을 들었다.  


안내센타는 아직 충분한 안내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보였고, 안내 책자나 여타 지리산길 안내 건텐츠가 구비되어 있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운치를 가진 공간이었다. 산림청의 국유림관리사무소로 사용되던 공간을 사단법인 숲길에서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늘 붐비는데 비해 근무직원도 적고 편의 시설도 부족했다. 하지만 걷는 길을 찾아 오신 분들은 이미 불편함을 감수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라고 본다면  시설의 부족은 별반 문제될것이 없고 단지 안내 시스템의 개선이나 컨텐츠의 확보는 필요해 보였다.


숲질 이상윤 이사의 특강은 인상적이었다. 강사의 외모가 주는 인상부터  '지리산길'이 담고 있는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듯, 소박하고 관행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차림의 강사는 강의 스타일 역시 범상하지 않았다. 5분강의 후 질문과 답변으로 채우기로 했던 특강은 강사의 강의가 표명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충분한 질의 응답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지리산둘레길'의 가치가 어떻게 사업과정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었는지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지향하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구현하고자하는 사람이 있은 연후에 물리적 공간에서 지리산길이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실제 외씨버선길 사업을 추진할 주체에게 들려주는 것 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인월안내센타를 나선 일행은 다리를 건너 안내센타앞 하천을 따라 (사)숲길에서 나오신 두분의 '길동무'와 같이 '지리산둘레길'순례를 시작했다.  큰 산아래 큰물이 지고, 큰 하천이 생겨난다고 지리산 아래 오랜 세월 물살에 씻긴 바위가 아름답게 강바닥을 이루고 있는 인월천은 넉넉한 품모를 가지고 있었다. 큰물이 진 흔적을  담고 있고 언제라도 다시 큰물이 지나가도 좋을 넉넉한 인월천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은 '중군리'로, 황매암과 수성재로, 그리고 배너미재를 넘어 첫날의 기착지인 장항마을로 이어졌다.     






길을 걸으며 '길'이 무엇인지, 길을 왜 걷는지 끊임없이 곱씹어 생각했다. 길을 걷는 것은 욕망을 가라앉혀 마음을 쉬게하고 다리를 놀려 몸을 다스리는 수양이자 구도의 과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의 걸음은 '새길을 만들기 위한 벤치마킹'이라는 목적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탓인지 끝없이 길에 대해 고민으로 채워졌다. '길은 삶의 흔적'이고, 삶의 흔적은 원초적으로 폭력적이기에 어쩌면 길은 인간의 폭력성의 흔적인지도 모른다는 강사의 문제제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걷기길'을 만들고, 또 걷는가? '현대 과학기술에 의한 극대화된 폭력(도로)을 인간의 원시적 건강성에 기댄 작은  폭력(걷기길)으로 치유한다'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걷기길의 가치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의 복원을 통해 무너져가는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데에 있다. 마을과 마을의 소통, 농촌과 도시와의 교류, 주민과 주민간의, 주민과 도시민간의 소통이 가져올 활력이 기대되는 그런 길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등산로나 도시주변의 산책길, 관광지의 일반적인 관광코스와 다른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리 단순한거 같지 않다. 과연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이 둘레길을 찾는 발길이 늘어남으로써 활력을 찾고 공동체성이 강화되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계속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하는 물음에 긍정적 답변을  바로 내어놓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마을방문객이 늘고 민박수요가 늘어나면서 마을내 긴장과 갈등이 늘고 마을의 풍광마저 변해버릴 위험에 노출되는 예들을 무수히 보아왔기에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길을 통한 이익없이 마을을 길가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를 전면에 내세워 '걷기 길'을 만들고 관광상품화에 성공한다고 그 길이 지역주민의 삶에, 마을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 확신할 수 없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길은 길대로 이어져 우리의 걸음은 계속되었다.  잠마철에 걷는 산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숲속가득한 습기속을 걷자마자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일행중 두어명이 더위에 지쳐 빈혈을 일으켜 잠시 긴장하가도 하고 걸음이 지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한 지리산의 품속을 거닐며 한껏 산기운을 들이마시며 두눈 가득 산하로 채우고 있는 시간은 행복했다.  


이날의 걸음은 짐을 풀고 휴식과 잠을 청할 '장항마을'에서 끝이 났다. 마을 이장님의 배정에 따라 일행은 각자의 민박집으로 흩어지고 마을은 이내 산그늘속으로 둘어갔다. 어둠이 마을을 덮고 멀리 개짖는 소리를 느끼며 빠져드는 잠은 행복했다. 걷기가 주는 육체적 피로감조차 길이주는 축복 임을 절감하며 나의 지리산길과의 첫 날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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