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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벗고 나니 봄이 보입니다.
415총선을 준비하며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녔습니다.
죽변에서부터 부석까지,
한수원에서 노벨리스까지...

이제 다시 밭으로 향합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지역을 갈고,
관계의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웁니다.

보내주신 과분한 사랑에
저 자신을 둘러보고
사람살이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습니다.

참 고마운 봄날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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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뭘해야하고 할수있는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현수막을 주문하고 
밤 9시에 찾아 봉화 춘양에서 소천면, 
다시 봉화읍에서 명호면까지
 작업을 마치고나니 벌써 자정을 넘어 4월 16일이다. 

관과 관변만 있는 봉화에서
 농민회마저 침묵하면 누가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같이 하겠는가.
슬픈 봄날 아침... 4월16일 .... 슬픔은 나누고
 진실은 함께 찾아나서자는 결의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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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봉협동조합의 '봉봉'은 불어의 'bonbon'이다.

'bon'은 '좋다'는 뜻으로

'도시 좋고 농촌좋고' 봉봉협동조합이라 작명했다. 

처음에 봉화사과 상품명을 정하면서 '청량산 산우리에서 글자란 어쩌구' 하다가

"봉봉사과"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정봉주님을 뜻하는 '봉 도사'라는 뉘앙스도 가지는 게

이래저래 재미있어 보였고, 알고보니 유명한 까페이름이나 

유명하진 않지만 다양한 업종의 상호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선 무조건 어감이 좋고 재미있어

봉봉이라고 말하는 순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런데 'bonbon'은 과일잼이 들어있는 사탕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연히 마트에서 만난 봉봉사탕 괜히 반갑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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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3번째이면서 첫 새차였던 아반떼와 작별을 고했다.

어제 새차를 주문하면서 행사 보상가 110만원을 받기로 하고 딜러에게 키를 맡겼다.

바쁜 하루였기도 했지만 나는 키를 맡기자 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와버렸다.

16년을 우리가족과 같이한 아반떼의 떠나는 모습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처음 두 차는 짧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사연때문인지 차를 처분하는 마음이 아렸던 기억이 난다.

대학원생이던 신혼 시절 딸애가 태어나 자라기 시작하면서이를 업고

기저기 가방에 책가방까지 들고 다니기가 힘들어질 무렵

친구의 소개로 거의 폐차 직전인 르망을 샀다.

똥차지만 운전을 처음 하는 설레임을 안고 참 여러곳을 돌아디닌것 같다.

특히 차를 산지 이틀만인지 사당동에서 지리산까지 다녀온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88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 허리를 지나면서 차 속도가 떨어지는데

오르막에서 힘이 딸리면 저속기어로 바꾸어야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차는 추월차선을 달리고 있는데 차선을 바꿀려고 하니 다른차가 너무 세게달려와

겁은 나고 그냥 식은 땀을 팥죽같이 흘렸었다.

기어는 물론 상향등 하향등도 모른채로 가족을 싣은 차를 몰고 전국여행을 떠났으니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우리 가족의 첫차 중고 르망은 겨우 1년을 넘기고는 작별을 고했다.

도저히 창피해서 타고 다닐 수 없을 만치 흰연기를 뿜어대어 폐차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폐차장에 직접 몰고가 첫 인연을 맺고 1년이란 시간을

우리가족과 같이한 차의 참혹한 최후를 직접 목격했다.

달려온 지게차에 옆구리를 바로 찍혀 덜렁 들려가는 우리 차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날뻔했다.

 

 

두번째차는 아내가 광명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할 때

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샀던 봉고다.

한달을 운행하다 개인적인 일로 6개월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자마자 차를 되팔았다.

고작 두어달도 타지 못한 차였지만 이 봉고도 나름의 사연이 많은 차다.

처음으로 연대앞에서 딱지를 떼이고, 순간 당황해서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통순경에게 5,000원인가의 돈을 주었던 불쾌한 기억이 있다.

그 뒤부터는 단속에 간혹 걸리기도 했고,

돈을 달라는 눈치를 보내는 순경도 만났지만

딱지떼라고 오히려 큰소리 쳐서 순경을 당황하게 하곤 했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어 다시는 거리에서 그와같이

염치없는 순경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봉고와의 긴 인연은 차를 처분한 뒤에 일어났다.

를 처분하고 잊어버린지 2~3년뒤 갑자기 자동차세고지서가 한웅큼 날아왔다.

나는 이미 차를 처분했다고 관공서에 연락을 했지만

서류상으로 내 앞으로 되어 있다면 계속 고지서를 보내고 독촉을 했다.

그러다가 봉화로 이사를 온뒤 독촉등쌀에 못이겨

직접 차의 행적을 추적해 나갔다.

광고지에 알려 차를 처분했기 때문에

내 차를 사간 사람의 연락처가 남아 있어 그분에게 연락도 하고

광명시의 자동차관리사무소인가 하는 곳도 찾아 가고

시청도 가고 몇날 몇일 애를 먹을 끝에 우리 차는

여러명의 손을 거쳐 최종적으로 강원도의 한 도시에

팔려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있었다.

아뭏튼 그렇게 애를 먹고 관공서로부터

자신들의 행정착오라는 시인을 받아내고

봉고와의 인연을 종결짓게되었지만

그 시절이 인신매매 뉴스가 도배를 하던 시절이라 그랬겠지만

우리차의 '인생유전' 아니 '차생유전'이 너무 기구한 것 같아

가슴아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생애 첫 새차이자 3번째 차 아빤떼는

1996년 10월, 을지로 인쇄골목을 떠나고 싶어

주말이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시절, 나를, 우리가족을

자유의 땅으로 싣어다줄 것이라고 주문을 외워대며 구입했다.

그때 형편에 다소 무리였지만

그래도 ABS에 듀얼에어백, 그리고 오토를 갖춘 아반떼를 구입했다.

자칭 그랜저급 아반떼라고 당시에는 첨단 기능을 다 갖춘 멋진 차였다.

그 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봉화에 정착을 했고,

우리 어린딸이 대학3학년생이 될만치 자라도록

우리가족과 희노애락을 같이했다.

이 차를 타고 우리 가족은 보길도의 아름다운 길을 달렸고,

화순의 와불을 만나러 갔고, 울진에서 새해를 맞았다.

우리 딸이 진학하게된 도시를 뻔질나게 돌아다녔고,

아내의 그림을 싣고 부산에서 서울,

대구에서 대전까지 안가본곳이 없을 만치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16의 인생을 살아왔고.

우리 아반떼는 16년의 세월동안 우리가족과 함께하면서

늙어왔나보다.

근년에 접어들어 잔고장이 잦고 소음도 심한데다가

엔진소리마저 이상해지면서 주로 승용차를 모는 아내의 

'안전'이 늘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저질렀지만... 새차를 맞이하는 기쁨 못지않게

지금까지 같이했던 차를 보내는 마음이 참 아린것도 사실이다.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순간, 불행했던 기억들...

16년 동안의 우리 가족의 이 모든 삶을 우리 아반떼는 온전히 같이한 셈이다.

1996년 10월 24일에 만나, 2012년 8월 24일에 헤어진

우리 아반떼를 나의 기억 창고에 남기고 싶어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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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창밖이 환해져 커튼을 걷으니

밤새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우리집 테크에 가득 모였다.

어제 초저녁부터 한송이 두송이 날리기 시작한 눈이

밤새 마을풍광을 바꾸고,

우리집 풍경을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아침 밥이라도 기다리는듯

우리집 데크에 웅성이며 모여든 것이다.

화야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외친다.

'이놈들아 저리가거라.'

손님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가벼운 빗질에도

이리저리 다 날아가 버린다.

테크에 모인 불청객을 쫒아버리고 아침밥을 먹으려니

오랜만에 이장님 목소리가 창을 두드린다.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많은 눈이 왔습니다.

차량통행과 보향 안전을 위해, 9시 30분부터 각 반별로 눈을 치웁니다.

한가정에 한명씩... "

우리 이장님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우리마을이 사람사는 마을임을 새삼 느끼게 되고,

또 우리 이장님 선한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눈 덕분에 기분좋게 시작해

이웃과 얼굴을 맞대고,

겨울내 움쳐려든 몸과 마을을 풀었다.

산골에 살면서 이렇게 눈이라도 한번씩 오지않는다면

무슨재미로 겨울을 날까?
어릴적 생각이 난다.
눈이 왔다고 쫄랑거리며 좋아하는 친구를 보면
'눈이오면 니하고 개가 제일 좋아하는구나.'며 면박을 주었다.
그래도 오늘은 나도 개처럼 좋아라고 눈밭을 뛰어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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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웠고,

또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계획들은 까마득히 잊어 버리기도했고

또 어떤 다짐들은 뻔히 알면서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해가 다 가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내었던 한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바로 봉화문화원 기타강좌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피치못한 사정으로 3번의 결석을 하기는 했지만

어떤 업무, 어떤 잡사보다 앞서

기타교실 참가를 최우선적으로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끝내 자켜내고야 말았습니다.

 

충분한 연습도 못하고 어떤 때는 다음 수업까지

일주일내내 기타를 가방안에서 꺼내보지도 않은 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타 수업에는 꼭 참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또 수업시간에나마 기타연습에 몰입하기도 했습니다.

몇일전 봉화문화원에서 이렇게 한해동안 배운

각종 강좌의 수강생들이 모여

문화학교 수료식겸 학예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참 뜻깊고 행복한 자리였습니다.

이자리에서 누군가 인사말 중에

'악기를 배우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년부터 저와 같이 기타교실에 나가기로 한 한 친구말씀이

고단한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 대견스런 자신에게

기타를 연주해 주고 싶어서 기타를 배우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참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올 한해 기타와 더불어 많은 좋은 분들은 만나고

기타 선율 속에 참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어설픈 실력으로나마

3번이나 무대에 올라 연주를 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 3번의 연주를 올 한해 거뜬히 잘 보낸

저 자신에게 헌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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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행히 아내의 생일을 잊지 않았다.
오후 늦게 봉화읍까지 나가
아내가 좋아하는 치즈케익 하나를 달랑 사들고 와
저녁밥상머리에 올려 놓았다.

다행히 와인한병이 집에 있어
매일 먹는 평범한 밥상머리에
와인과 케익을 올려 놓으니 재법 그럴싸한 생일상이 되었다.

49살 먹은 아내는 케익에
춧불을 꽂는 나에게 불만스런 한마디를 던진다.
'뭔 케익에 초를 그렇게 많이 쫒노?"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원하든 않든 세월은 가고 
나도 늙고 아내도 늙어가는 것을!
"누가 나이 많이 먹으라그랬나?"
싸늘하게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초에 불을 당기고 
생일축하한다는 말한마디로 모든 걸 대신하고
촛불을 끄게하고
박수를 치고
와인을 한잔 나누었다.

그렇게 아내의 성대한 49번째 생일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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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번은 정말 고마운 번호고, 꼭 필요한 번호지만 가능하면 걸 일이 없는 것이 제일 좋은 그런 번호다. 어쩌다 기사를 보면 술취한 시민이 자기 집을 못찾겠다고 전화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장난으로 허위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119번은 평생 걸일이 없이 사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걸 일이 없었던 119번을 
최근 몇년 사이에 3번이나 걸게 되었다.  그것도 나 자신이 사고를 당하거나 한 경우가 아니라 3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119번을 걸게 된 것은 의정부에 사는 친구집을 찾아가던 밤늦은 시간에  바로 내차 앞에서 일어난 오토바이 사고 때문이었다. 나의 왼쪽 차선을 달리던 봉고차와 그뒤를 달리던 오토바이가 거의 동시에 내차 앞으로 차선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봉고차와 오토바이가 측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잠시 잠깐이지만 오토바이와 사람이 붕 날라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3바퀴정도 굴러서 도로가로 튕겨나갔다.  나는 급정거를 했고 사고를 낸 봉고차의 운전자도 급히 차를 세우고 뛰어나왔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경황이 없었다. 부상을 심하게 당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얼굴에 피를 흘렸지만 의식이 있었고, 봉고운전자가 부상자를 돌보는 사이 나는 급히 119로 전화를 했다.
 
평생 처음 당한 일이라 응급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가슴졸이고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때 더 황당했던 것은 현장에 제일먼저 도착한 차가 119 구급차가 아니라 렉카차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음 사설 응급차가 도착하고 마지막으로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날 자정이나 되어 도착한 친구집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에 대해 성토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번째 역시 차를 운전하는 중에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추락사고 때문이었다. 강변 국도를 따라 달리는데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내앞에서 달리던 승용차가 다리를 건러려고 죄회전하다가 다리 난간을 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급히 차를 세우고 10여m 다리밑을 내려다보니 차가 뒤집어져 강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일단 119에 전화를 하고, 강둑이 낮은 곳까지 달려가 겨우 강으로 내려섰다. 이때 강 반대편에서 사고를 목격한 한 분이 달려오고 있었다. 두사람이서 물에 반쯤 잠긴 승용차를 세워보려고 발악을 했지만 불가능했다. 같이 구조에 나선 그분은 혼탁해진 강물 때문에 차량 내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깨어진 창문으로 손을 넣어 차량 탑승자가 운전자 한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미 의식이 없는 부상자의 머리를 물 밖으로 들어올려 혹시라도 슴이 붙어 있다면 호흡을 할 수 있게 하는 사이에도 구조대원들은 쉬 오지 않았다. 파출소가 사고지점에서 2km도 되지 않았지만 10분이 휠씬 지난 후에야 경찰과 119대원들이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안타깝게도 사고자는 끝내 목숨을 건질 수 없었다.

그날 같이 구조에 나섰던 그분은 지역사회에서 자주 마주칠 기회가 있는데 나는 그분을 만날 때마다 지금도 존경과 감사의 정을 느낀다. 온몸이 후덜거리는 그런 끔찍한 사고 현장에서 무서움을 억누르고 사력을 다해 낯선 사고자를 구조하려 애썼던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분의 아내를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그날 이후 한 3일 정도 팔다리가 쑤시는 정도의 고생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몸살이 나서 몇일을 들어누워 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주 청송을 가는 길에 영양의 한 삼거리에서 내 앞을 달리던 오토바이가 좌회전을 하다 좌쪽에서 직진하던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목격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우측을 주시하다가 좌측에서 온 차량 한대가 지나가자마자 뒤따라오던 트럭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삼거리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사고 같았다. 순식간에 오토바이와 운전자가 트럭에 부딪히면서 엉퀴어 도로를 몇바퀴 구른 뒤에 멈춰섰다. 운전자는 나이가 드신 할아버지신데 헬멧밑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다리도 뒤틀린것 같았지만 다행히 의식이 있어 보였다. 무조건 119로 전화부터 걸고 차에서 내렸다. 사고를 낸 트럭 운전자와 뒤따라오던 차량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곧바로 경찰이 도착했다. 사고로 인해 차량도 밀리고, 더 이상 할 수있는 일이 없어 구급차가 오는 것도 못보고 사고를 수습하는 경찰관에게 명함만 건네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이날 119에 전화를 걸었을 때 사고 위치를 물어 인근 주유소 사람들에게 위치를 물어 답을 드렸는데, 곧이어  핸드폰 위치추척을 한다는 문자가 들어왔고, 몇분 지나지 않아 현장에 출동한 대원으로부터 온 전화인지 사고 위치를 묻는 전화를 또 받았다. 그리고 이후 영양경찰서에서 최초 목격자인 나에게 사고의 경위에 대해 묻는 전화를 2번 받게 되었다. 다행히 사고자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준 경찰관이  고마웠다.

사실 우리사회의 응급체계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고경험만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몇번의 사고 경험을 통해 119구조대원같이 세상에 곡 필요하지만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시는 분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지금보다 현격히 개선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런 분들이  대접받고 존경받는 사회가 선진국이 아니겠는가. 물론 인원도 늘려 근무조건도 개선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한적한 농촌같이 소방서나 경찰서로 부터 먼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응급체계의 헛점을 보완해서 매번 사고때마다 경험했듯, 발만 동동 구르며 응급차가 오기를 기다려야하는 상황이 지금보다는 좀더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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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비바람에 장미 꽃잎이 휘날리더니

비그친 길바닥이 피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봄의 영화는 이렇듯 허망하게 지고

또 일상의 햇살은 무심히 내리비치겠지요.

 

한참은 져버린 꽃잎을 내려다보다가 5월광주가 그리고

문득 장선우감독의 '꽃잎'이 떠올랐습니다.

전체 스토리조차 까마득한 중에 그래도 문성근과 이정현의 연기보다는

오직 노래 '꽃잎'의 가사를 저도 모르게 더듬고 있었습니다.

끝내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고 인터넷을 뒤져서나마

이정현이 부르던 '꽃잎'을 읊조려봅니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질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질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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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농사꾼을 자칭한지 십수년이 넘었지만
저는 아직 멀어도 한참을 멀었습니다.
본농사라는 것도 묵어 수풀에 덮혀버리기 예사고
사시사철 먹어야할 야채도 키워서 먹는 것보다
시장에서 사먹는 게 훨씬 많습니다.

이웃 형님들을 보면 본 농사일에도 늘 허덕이며 살아가시지만
꼭 가까이에 조그만 텃밭을 만들어  
1년먹은 마늘이며 양파며, 계절마다 각종 채소며 어느것 하나
돈주고 사 드시는 것 없이 알뜰하고 체계적으로 농사를 지어 드십니다.

몇일전 게으른 이웃 아우에게 앞집 형수님이
양파를 한소쿠리 들고 오셨습니다.
계절마다 절기마다 새 야채가 나오면
이렇게 얻어먹은 게
한두번이 아니고,
다른 이웃분들로부터도 매번 얻어먹기만 하고 살아온 지가
벌써 15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도 얌채라고 내치지 않고 여전히 챙겨주시는 이웃 어르신,
형님들의 사랑에 우리 가족은 산골사는 어려움을 잊고 삽니다.

양파 한 소쿠리에 태산같은 이웃의 정을 실감하고
나도 모르게 그분들의 삶앞에 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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