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농사를 끝내고 마지막 남은 콩 수확은 밀쳐 둔 채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으로 나섰다. 내가 조사해야할 가구 수는 몇 달 전 있었던 인구총조사에서 농가로 분류된 2개 리의 70여 가구였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대상 가구 중 적지 않은 농가는 조사가 불가능했다. 그 몇 달 사이 돌아가신 분이 세 분이나 계셨고 한 해 농사를 억지로 끝내놓고 몸져누워 대화를 나눌 수 없거나 병이 위중해져 병원에 계신 경우도 여러 집이었다.
조사를 시작하고 한 집 한 집 농사살림을 들여다보니 더 놀라웠다. 같이 농사짓고 살아가면서 막연히 느끼고 있던 그 이상으로 우리 농촌의 살림이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50대 이하의 농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60대 이상 농민 대부분은 일 년 벌이라고 해봐야 500만원을 채우지 못했다. 그 500만원조차 비닐, 농약, 비료대 제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노인네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저 밭을 놀리면 우야노?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부쳐야제.”
물려받은 내 논밭 묵히지 않고, 도시에 있는 자식들한테 고추며 깨라도 한줌씩 보내주는 재미에 견뎌내고 계셨다. 평생 논밭을 일궈 우리 먹거리를 공급해 오신 늙은 농부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주지 않는 세상에 분통이 터졌다.
농사 뒷정리를 하고 있는 밭에서 만난 한 어르신으로부터는 정부를 대신해 타박을 들었다.
“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꼬 하노? 조사해봤자 도움 주는 거 아무것도 없더마는….”
집으로 마을회관으로 돌며 겨우 수소문해서 만난 할머니 한분은 영감님 돌아가신 뒤 혼자 수박농사를 지으신다며 산골짜기 밭까지 찾아온 조사원을 반갑게 맞으셨다. 논은 묵힌 지 오래되었지만 밭을 올해까지 어떻게든 농사를 지었는데 내년에는 남에게 줘야겠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하는 사람구경에 이런저런 묵힌 이야기 나누고 싶은 눈치였는데 애써 무시하고 돌아서고 나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젊은 귀농자가 있어 마을이 보전되고 있는 경우도 전업으로 농사를 짓는 분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법적으로 300평 농사만 지어도 농민으로 분류가 되지만, 실제로 농사를 지어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는 전통적인 의미의 농민은 몇 명되지 않았다.
이번 조사를 통해 임종직전의 병들고 쇠락해진 농촌현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지만 결코 절망감만 느낀 것은 아니다. 사람의 정, 마을공동체의 온기를 보전하고 있는 늙은 농부의 거친 손은 우리가 절망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손사래 치고 있었다. 우리 농민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와 같은 온기가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키고 우리 농촌 공동체를 가꾸는 일이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