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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8년전이다. 지역을 좀더 알고 건강도 챙기자는 마음으로 마을길 걷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행없이 우리 부부만 걸었는데 두번째 부터는 이웃들과 같이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지를 했다. 예상밖으로 많은 분들이 걸음에 동참했던 첫길이 북곡리 윗뒤실 길이다.

처음 시작한 마을길 걷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었지만, 2년전 좋은 친구들 덕분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덕분에 어제 다시 8년전 그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난 8년의 세월을 지고 걸었다. 그때 손을 잡고 같이 걸었던 이웃 아이들은 다 자라 마을을 떠났고 40대 중반의 동행들은 오롯이 50대 중반의 중년으로 바뀌었다. 그땐 분명히 지역학교와 교육의 문제가 화두였었는데 어제는 건강이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투병중인 동행이 있어 더 그랬겠지만 어떻게 건강한 삶이 가능한지 그리고 현대 의료의 문제와 대체의학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산길 내내 이어졌다.

걷기는 아침 9시 명호면 북곡리 소재, 폐교된 북곡분교에서 시작했다.  목적지 재산면 남면리에 있는 역시 폐교된 남면분교장까지 10km의 거리를  청량산과 문명산이 만나는 능선을 타고 걷는 길이었다. 북교초등학교를 나와 윗뒤실까지 가파른 마을길을 걸으며 고개를 돌려 멀리 만리산자락의 마을을 건너다 보는 것도 좋았고, 청량산 북쪽 사면의 언덕길을 오르며  햇살속에 번지는 청량산의 자태를 바라다 보는 것도 너무 좋았다. 게곡에는 아직 두터운 얼음이 얼어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봄기운을 느낄수 있어 좋았고, 끝나가는 겨울과 아직 시작하지 못한 봄이 만나는 경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어 더욱 좋았다.

윗뒤실 마을 입구 당나무 아래서 간식을 나누며 쉬다가 마을을 가로질러 비포장을 길을 접어들었다.  청량산 자소봉과 장인봉 사이의 하늘다리가 보이고 봄의 기운이 번지는 탓일까, 엷은 안개가 산을 휘감고 역광 속에서 겹겹히 드러나는 청량산의 자태가 너무나 신령했다.  길의 정상부위였던 지명이 '옥새이'에 펼쳐져 있던 빈밭이 인상적이었는데 새로 난 길은 옥새이를 거치지 않고 거리를 줄이며 바로 천애수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천애수를 지나며 뒤돌아 보는 천량산의 산새가 아름다웠는데 남면리 쪽으로 난데 없는 댐이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100억원의 돈을 들여 작년 연말에 완공했다는데 댐의 용도는  '다목적 농촌용수 댐'이라고 했다. 완공된지 얼마되지 않아서겠지만 댐은 비어 있었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시야를 압도했다. 하지만 저 정도의 돈으로 산과 계곡을 밀어 만들어진 댐이  얼마나 소용에 닿을지는 알 수 없었다. 자연과 마을을 만나기 위해 걷던 중에 만난 이질적인 풍경은 뒷맛이 무지 썼다. 

이번 마을길 걷기는 아이들이 떠나고 없는 빈 교정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마을의 빈교정에서 끝났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에서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을 배우며 끝나가는 겨울의 하루를 만끽했다. 이제 곧 봄이오면 교정에는 다시 풀이 자라고 들꽃이 피어나겠지? 그렇다고 떠나간 아이들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햇살 가득한 봄 교정에서 좋은 친구들과 다시 한번 마을의 삶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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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걷기가 끝난뒤 쓴맛은  남긴 또 하나의 화두가 있었다. 소위 귀농자와 현지 주민과의 갈등에 관한 것인데 내 스스로 봉화에 농부로 정착한지 20여년을 넘기다보니 양쪽으로 부터 다른 입장의 말을 들어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나는 귀농인과 현지인을 나누는 것 자체를 반대할 뿐아니라, 각각이 상대를 이해하는 부정적인 내용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농업농촌정책에서 귀농정책으로 특화해 차별적인 지원을 하는 방식의 정책에도 동의하지 않으며, 농업농촌의 문제가 해결될 때 농민의 재생산 문제는 큰 틀에서는 저절로 해소될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사실 귀농인에 대한 차별적 지원이 현지인에게는 박탈감을 주고, 현지인의 귀농인에 대한 시각을 왜곡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지방권력은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로막기위해 귀농인을 관변화하고 또 하나의 기득권으로 육성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현주민들은 귀농자들이 원재 자신의 몫이어야할 농업 예산을 따 빼아간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귀농자들은 자신이 막닥뜨리는 지방 유지나 토호의 특권적 행태를 현주민 일반의 경우로 확대 해석하게 된다. 대부분 갈등의 경우 각자의 인격이 문제겠지만 제도적 문제는 이와 같은 갈등을 조장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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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을 떠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우수리강이 아무르강을 만나는 도시 하바롭스크를 향해 밤새 달렸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주는 낭만적인 서정에 젖어 4인실침대칸에 자리잡은 우리 일행은 들뜬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열차바퀴가 내는 규칙적인 마찰음을 능가하는 한껏 높은 톤으로 대화를 나누고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와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창밖은 암흑천지라 사방을 분간할 수도 없었고, 좁은 공간은 우리를 쉬지치게해 자정이 되기전에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누구도 쉬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거친 열차의 진동과 밤새 쉬지 않고 울리는 경적소리, 그리고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굉음을 지르며 마주 스쳐지나가는 반대차선의 열차는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하룻밤 사이 환상은 깨어지고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당하겠다던 나의 버킷리스트가 한개 줄어들었다.

쉬지않고 몸을 뒤척이는 사이 몸의 피로는 더 깊어지고 거의 몸과 의식이 동시에 축 쳐져 나갈 즈음 창밖은 밝아지기 시작했고, 아직 벌판의 어둠이 채가시지도 않았는데 승무원의 거친 손은 4인분의 아침 도시락을 객실에 던져주고 갔다. 그래도 늘 밥은 반가운 법, 모두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잼과 팬케익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하바롭스크는 블라디보스톡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우리를 맞았다.

버스로 조금을 달려 레스토랑에서 러시아식 조식을 먹고 곧장 우리는 러시아식 전통사우나인 "반야"를 하기위해 자작나무 숲속의 작은 리조트를 찾았다. 6~8명이 들어가는 반야는 탈의실과 화장실 그리고 작은 침실과 사우나실로 이루어져있었고, 바깥에서 장작과 석탄으로 불을 지피며 사우나실 내부의 자갈이 달구어지는데 그 달구어진 자갈에 물을 뿌려 뜨거운 수증기를 피워서 몸을 댑히는 방식으로 색다른 체험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자작나무 잎으로 뭉쳐만든 빗자루 같은 걸로 몸을 때려주면 몸을 더 잘 댑힐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충실히 따랐다.

 

오전시간을 반야에서 보내고 우리는 동방정교회 구세주 성당을 들러 천정을 올려다보며 세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빌었다. 난,ㄴ 전쟁의 공포가 더이상 한반도를 지배하지 말기를, 그리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합의에 이르고 미국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국면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빌었다. 성당을 나와  향토박물관을 관람하고 우초스전망대를 찾아 아무르강의 광활하고 삭막한 풍경을 눈에 담고, 다시 꼼소몰스까야 광장을 거쳐 얼어붙은 아무르강을 만났다. 바다같은 강은 광야로 변해있었고, 매서운 강바람은 나의 귀를 때렸다. 이 강가 어디선가 김알렉사드라가 총살을 당하고 그 시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역사적 소명과 한 인간의 결기를 생각했다. 하바롭스크주민들은 김알렉산드라의 시신이 버려진 아무르강에서  2년간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한민족 볼세비키 지도자였던 그녀의 명복을 빌며 그녀가 삶을 걸었던 민족해방과 게급해방을 꿈을 상기했다.

 

아무르강을 벗어나 우리는 현지주민과 만나는 중앙재래시장을 찾았다. 한시간20여분의 자유시간을 얻고 시장골목과 연접한 백화점을 둘러 보며 짧은 여정의 아쉬움을 달랬다. 낯선 건과일들 향신료 그리고 골동품에 이르기 까지 추운날씨 탓에 인적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시장은 없는 것이 없었다. 꿀과 연어, 그리고 한국식 반찬과 각가지 쏘시지와 치즈 등 사고 싶은것은 많았지만 원앙새목각 딱하나를 400루블을 주고 샀다. 이번 여행의 징표로 오래동안 둘수있다는 사실과 색감이 마음에 들었기때문이다. 

중앙재래시장을 벗어나 얼음조각공원으로 꾸려진 레닌광장을 찼았다. 갖가지 얼음 조작이 광장을 채우고 있었고, 아이들을 동반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행을 벗어나 현지인들 무리에 몸을 숨기고 그들과 걸음을 맞춰 저녁색이 짙어지는 공원을 마냥 걸었다. 아쉬움을 가슴 가득안고 숙소인 인뚜리스트 호텔로 향하며 해지는 러시아의거리, 하바롭스크의 거리를 가슴과 폰에 담았다. 언제 다시 올수있을까... 나는 또하나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하바롭스크의 밤을 맞았다.

이번 여행은 봉화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들의 워크삽 명분으로 3박4일 일정으로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롭스크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솔자 포함 26명의 일행이 함께했다. 이질적인 사람들로 양분된 위원간 이질감을 줄이고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랏돈으로 하는 단순 유흥관광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자유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위원들중에는 개인적으로 연해주 한민족사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조선공산당의 초기활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이해를 통해 역사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듣게된 러시아의 삶은 나에게 많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미 자본주의화되고 푸틴 독재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회주의적 자취가 남아 가정용 전기가 거의 공짜에 까깝고 의료와 교육 역시 사회적 보장정도가 상당하고 성공과 돈에 대한 집착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리고 여성상위적인 사회정책으로 인해 결혼후 이혼이 여성에게는 횡제고 남성에게는 재앙이라는 사실, 그와 무관하게 러시아인들은  한주에 몇일은 꼭 저녁식사를 가족이 함께하는 가정적인 사람들이지만 이혼율은 70%에 달한다는 것도 참 의아했다. 사람들은 가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리는데 이혼율은 높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할 수없었다. 가정에 정성을 다하지만 집착하진 않는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이 '동방으로 진군하라!'는 군사적 구호이고 여전히 중요한 극동 군항이고 러시아가 혁명의 나라라서 그런걸까? 혁명전사 혹은 군인에 대한 예우가 보편화되어있고 도심의 요지에 있는 추모탑과 연중이어지는 시민들의 방문과 헌화, 그리고 자식 세대에게 전해주는 자긍심이 느껴졌다. 대중 매체나 거리에서 밀리트리룩을 쉽게 접할 수 있고 군대에 대한 높은 자긍심이 보여주는 것은 힘에 대한 숭상이나 국가주의적 잔재일까 아니면 민중혁명을 통해 만든 나라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일까? 루스키다리아래 해군기지에는 갖가지 전투함과 잠수함까지 언바다에 갇혀 침묵하고 있었다.

또 한가지 인상은 러시아인들이 참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쭉쭉 뻗은 손발이며 몸매, 뚜렷한 이목구비 등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다 배우같은 선남선녀들 뿐이었다. 너무 이뻐서 현실감이 없고 그냥 깍아놓은 인형같았던 소년 소녀들도 인상에 남는다. 조금은 시크한 분위기가 러시아 훈남훈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것 같기도하다.

그리고 남는 아쉬움 3가지를 기록하고 싶다. 먼저 김알렉사드라 추모비를 찾지 못한 점은 못내아쉬웠다. 물론 연해주 독립운동의 자취가 선재한 우수리스크 방문도 다음 과제로 남겨야했다. 둘째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만든 한인촌인 '우정마을'이 한국인의 무례에 분노해 한국인의 입장을 막아버렸다는 사실은 나의 가슴을 참 아프게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을 위한 노력이 없어보여 참 가슴아팠다. 그리고 2차대전 종전후 남북 공히 버렸던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이야기는 도대체 국가와 민족이란 무엇인지 다시한번 되묻게 했다.  버려졌던 동포에 대한 국가적 사죄와 그들의 상처를 치유과하기 위한 노력이 꼭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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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7일 양양을 출발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1박하고 다음날 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11시간 30분 달린 뒤 하바롭스크에 도착, 1일 관광후 다시 1박, 2월 10일 아침 하바롭스크 공항을 출발 양양에서 여정을 마무리함

승객 26명을 태운 비행기는 텅빈 양양 공항을 이륙했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톡. Yakutia Aero 라는 러시아 국적 항공사 비행기를 탄 덕분에 우리는 북한상공을 지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적기에 비해 30분에서 1시간 빨리 도착한다고 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북한 상공을 지나지 않았고 북한 산하를 볼수 있다는 기대는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그래도 나의 설렘은 다른데서 왔다.  우리일행이 탄 보잉 737-800기는 오직 우리일행 26명만을 만을 위한 전세기라고 했다. 항공사가 도대체 어떻게 타산을 맞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남과북의 대치 덕분에  남쪽방향으로 이륙한 비행기는 곧바로 북쪽을 향해 유턴을 해서 울릉도 근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으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 타보는 러시아비행기는 여는 비행기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 국적기 같이 젊고 아리따운 승무원이 아니라 나이에 무관하게 승무원을 채용한 유럽 비행기라는 느낌이 든 것은 그렇다고 해도  승무원의 무표정은 분명히 한국과 다른 것 같았다. 이륙후 10분이 지나지 않아 안전고도에 도달했는지 무표정한 승무원은  음료수 서비스를 하고 기내식을 나눠줬다. 애써 웃어주니 웃음으로 답해주긴했지만 여행안내서에서 소개한 러시아인의 무표정 뒤에 숨겨진 따뜻함과 친절함을 확인하기에는 비행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륙 한시간 20분만에 우리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 시베리아가 시작하는 육지로 접어들었다.

1시간 시차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서 가이드를 조우하고 곧바로 대절해 놓은 버스에 올랐다. 3박4일중 첫날의 일정은 오직 블라디스톡에 도착하는 것이 전부였다. 공항을 나와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해 저녁식사를 하고 현대호텔에서 잠을 자는 것이 소증한 3박4일중 1박1일이라는 사실이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친절한 가이드를 통해 몇가지 주의점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소개를 듣는 것으로 그나마 허기를 달랠수는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유일한 5성급호텔이고, 현대 사옥과 같은 외관을 지닌 현대 호텔에서 짐을 풀고 곧바로 잠을 청하기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밤이 아쉬웠다. 4명의 동지가 작당을 하고 호텔을 나와 블라디보스톡의 밤길을 나섰다. 하지만 호텔에서 멀리 벗어나기에는 우리의 여행경험은 적고, 두려움은 많았다. 호텔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Saint Pub이라는 맥주 바 같은 곳을 들어가니 우리가 환영받는 손님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배척하는 기색은 없었다. 안되는 언어로 어렵게 술과 음식을 시켜 늘 같이 고생만하고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동지 들과 러시아에서의 화려한 첫밤을 같이햤다. 다가오는 선거와 지역정치 그리고 남북 대치와 통일 그리고 항구적인 반도의 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 돌아온 호텔에서는 일부 일행이 소주에 절어 훌라 삼매경이다.

화려한 조식을 마치고 둘째날의 일정은 신한촌 방문으로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의 이주의 역사와  파란속에서 자존과 삶을 지켜온 같은 민족의 흔적을 마주치는 일은 나에게 낯설고 힘든 일이었다. 여행전에 [조선공산당사]를 통해 알게된 1910년대 연해주를 일대의 볼세비키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낱낱이 살피기에는 여행 성격이나 동행한 일행들의 성향에 비추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최재형과 김 알렉산드라는 만나고 싶었다. 저녁무릅 아르바트 거리에서 최재형은 몰라도 한국 청년들은 다 아는것 같은 소위 "해적커피"를 한잔하고 나서 인근에 있는 최재형선생의 생가를 찾는 것으로 나의 기대는 접어야 했다. 김알렉산드라는 만나는 것은 예정된 일정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한촌은 개발되고 오직 비석만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초라하고 무미건조했을 비석공원은 한분의 의인으로 인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리바체슬라브선생! 그분을 만난것은 헛된 감상과 무익한 너스레로 끝날 이번 여정을 뜨거운 역사의식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값진 기회로 만들어주었다. 신한촌기념비를 한국에서 만들어 불라디보스톡으로 싣어오는 과정에서 세관의 횡포로 어려움에 처하자 저신의 재산을 털어 관세를 내어 통관을 시키고 기념비 설립후에도 주변건물에 막혀 초라하게 묻힌 기념비나마 지키기위해 비 옆에 움막을짖고 사시사철 살아오셨단다. 10여년전 그분의 공적이 국내에 알려져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에도 위촉되었지만 그 이후 어떤 지원이나 예후가 이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3년전 중풍이 온 후에도 인근으로 가족을 이사시켜 출퇴근하며 기념비를 지키고 계신다고했다. 비를 지키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감히 물을수 없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가 숙여지고 숙연해졌다. 삶은 어쩌면 작고 단순한 것에서 그 숭고함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한촌 기념비공원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우리 일행은 브라디보스톡 시내를 여러번 가로지르며 유명 관광지와 유적지를 주유했다.  인구 60만 정도의 규모 때문인지 도로로 인한 동선 때문인지 우리가 묵은 호텔앞을 이날 하루동안 서너번은 다시 지나간 것 같았다. 해짧은 하루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볼수 있어 기억의 타래가 바로 얽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금각교가 내려다 보이는 독수리전망대라 불리는 언덕위에 세워진  러시아 문자를 창제했다는 끼릴형제의 동상, 알레우트스카야 거리의 기차역과 철도 박물관, 레닌동산과 율부리너 동상을 구경하고, 전쟁공원의 꺼지지않는 불과  니콜라이 개선문을 둘러봤다.  그리고 잠수함 박물관과  루스키 다리를 건너 학생 4만명에 교수만 5천명이나 된다는 극동연방대학교를 지나 '북한섬'이라 불리는 해안가에 찬바람을 맞고 우리는 아르바트 거리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고 랍스타로 배를 불린뒤 블라디보스톡기차역으로 향했다.

 나의 버킷리스트중의 하나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꿈을 실현하기에는 아직 여건이 안되지만 그 맛봬기를 할 기회가 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약 1000km를 달리면 나오는 하바롭스크를 향해 우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벅찬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풀기위해 신발끈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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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의 논쟁과 소동으로 불편했던 잠을 깨고 그나마 가라앉은 마음으로 아침을 나누었다. 다라파니의  Superview lodge를 나서자마자 우선생 부부는 자신의 길로 떠났다. 간드룩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 따로 룸비니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가이드 라마는 같이했던 한명의 포터를 딸려서 포카라까지 안내하도록 조치했다. 여정을 먼저 끝내기가 아쉬운 포터를 같은 마음으로 보내고나니 오늘은 여정 일주일만에 출발시에는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예고되어 있었다. Tadapani를 출발해 추일레를 거쳐 또 한번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는 촘롱입구에 도착했다. 촘롱을 통해 시누와를 거쳐 안나푸르나 베니스캠프로 올라가는 길과 오른쪽 내리막으로 길을 잡아 모디콜라를 향해 내려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의 롯지에서 차를 나누었다. 그리고 갑자기 흩뿌리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송선생님과의 어설픈 이별식을 준비했다. 같이 했던 포터를 한분 동행하게 하고 급히 마을에서 가이드를 한분 더 구했다. 츄리닝 홑바지 차림의 가이드와 준비가 부족한 포터에게 우리가 가진 여분의 옷가지와 장갑 등을 나누었다.  한명의 트레커와 두명의 어시스트는 산으로 올라가고 6명의 트레커와 4명의 어시스트는 안나푸르나 능선에 뿌리내리고 사는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섰다.   

마음에 남은 앙금이 없진 않겠지만 우리는 뜨겁게 포옹하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촘롱에서 지누단다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우리는 이내 마을에 도착했다. 처음 들어간 숙소가 마음에 안든다며 라마는 우리를 끌고 다른 롯지를 찾아 갔다. 지누단다 초입의 Ever Green Hotel 에 짐을 풀고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뜨거운 물을 찾아 길을 나섰다. 모디콜라(모디강)가에 형성된 조그만 자연온천에서 묵은 때를 씻고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식사와 함께 맥주파티까지 곁들였다. 작은 사안이지만 생각이 갈리고 그것이 다시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 까지 나아갈때 연배차이까지 의사소통을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판단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우린 그렇게 일행이 줄어 이제 우리의 여정을 돕는 가이드와 포터까지 합쳐 10명이라는 단촐한 그룹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을 뉴브릿지를 통해 란드룩까지 걸었다. 출발하면서 일찍 걸음을 멈추고 그동안 밀린 빨래도 하고 그냥 편안히 쉬자고 마음 먹었다. 막연히 계획했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한걸음한걸음 멀어져가고 우리는 상승이 아니라 평탄한 길들을 걸어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모디콜라 계곡 넘어 간드룩과 마주한 란드룩이란 마을의New Peaceful Guest House에서 일찍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남은 하루의 시간을  알뜰하게 즐겼다. 빨래를 널고 햇살을 받으며 졸다가, 지루해지면 일어나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걸음이 아니라 마을 속을 샅샅히 걷는 훨씬 더 느린 걸음이었다. 네팔리의 일터인 논두렁을 걷고, 마을의 중심인 학교를 찾아 구경도 하고, 그리고 언덕위에 올라 멀리 지는 석양 빛에 마음까지 물들었다.

이선생은 메모 수첩을 잃어버려 마을위 언덕을 두어번 다시 올라야했지만 우리는 모두 석양빛에 물들어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꿈꾸었다. 나는 흐려진 유년의 기억들, 잊혀저가는 청춘의 꿈을 다시 움켜지기위한 헛된 노력들을 차분히 내려놓고 지나온 시간보다, 그리고 다가올 시간보다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한 삶을 다짐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우리는 걷기 위해 왔지만 이날 하루는 적게 걸어 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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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5일 아침 울레리를 출발하여 난계탄티를 거쳐 고라파니 Hilltop 호텔에서 여정을 풀고, 1월6일 새벽일찍 푼힐을 오르고 다시 고라파니로 내려와 반탄티를 거쳐 다라파니에서 묵었다.

 

이틀의 여정은 극적이지 않았지만 나름 걸음을 통해 큰 산과 만나는 잔잔한 감동이 이어졌다. 첫날은 고도 2000m의 울레리에서 3000m의 고라파니까지 무려 1000m의 고도를 높여야 했고, 다음 날은 어두운 새벽에 3200m고지의 푼힐을 올라 서광에 살아나는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 산군을 마주 했다. 서울을 출발하는 날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챙겨온 "박근혜 탄핵" 손피킷을 들고 안나푸르나 산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시민들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대신했다. 전망대를 오르내리고 뜀박질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다 처음으로 불편한 호흡을 통해 고도를 느낄 수 있었다.

 

 

우연히 같은 코스를 걷는 한국에서 온 유명 여행사의 단체 여행객과 조우했다. 한국인이 유달리 많아 특별히 서로를 주목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냥 동행으로 서로 '나마스테'를 주고 받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걷다보니 한짐을 지고 나르는 여행사 고용 포터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너무 심하다'는 말이 터지자 마자 모두 하나같이 돈과 노동, 고용과 인권, 그리고 네팔의 경제 사정에 대한 갑론을박을 이어나갔다. 우리 가이드인 라마는 특히나 과도한 짐을 맡기는 여행사의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우리 일행 모두가 동의했지만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쉬 의견을 내지못했다. 여론환기를 위한 SNS 공개이상 우리가 포터의 짐을 줄여줄 수있는 특뱔한 방법은 강구할 수가 없었다.   

 

 

푼힐을 내려와 다시 푼힐 못지않은 조망을 가진 언덕을 오르고 고도를 낮춰  밀림으로 덮힌 계곡을 지나며 고도 2600m정도의 타다파니에서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하루는 유달리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코스였다. 푼힐 까지 200m를 올렸다가 금세 다시 내려오고 다시 한참을 오르막을 걷다가 어느새 깊은 계곡을 한없이 내려갔고 또 어느새 다시 끝날 것 같지 않은 언덕길을 올라야했다. 원래 산이란게 그렇커니 나는 무심했지만 일행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참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릎관절에 문제가 있는 친구와 역시 산행에 무리가 있는 친구의 부인은 한참을 시간이 흐른뒤에야 그날 너무 힘들었다는 고백을 했다. 하지만 산을 걸을 때는 누구도 아픈 다리와 지친 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만 걷자고 말하지 못했고, 자신의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눈치없이 혼자 신나게 걷고 또 걸었다. 오직 일행의 최고 연장자 한분만이 푼힐 이후에 지친 표정이 역력해 가이드가 배낭을 대신 들어주고 따로 보조를 맞춰 걸어주기도 했다. 이날은 특별히 힘들여서 일까 드디어 한국을 떠난뒤 일주일만에 사단이 났다.

 

 

Tadapani의 Superview lodge에서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후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지난 이틀동안 힘든 여정을 묵묵히 견뎌온 일행들은 내일이면두명이 룸비니를 목적지로 간드룩 쪽으로 떠나기로 예정돼있었기도 했고, 나머지 7명은 상하행이 갈라지는 총롬을 지나게 되어 전체 일정에 대해 결정을 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떠나오기전 이번 여정의 원칙은 가장 가난한 사람에 맞춰 숙식수준을 정하고, 가능하면 대중교통으로 그보다는 도보로, 그리고 가장 약한 사람에 맞춰 걸음의 속도를 맞추기로 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걷지만 이는 목적지가 아니고 우리 여정의 목적은 안나푸르나 언덕에 기대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속으로 들어가 같이 산과 사람을 느끼는 것으로 잡았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행들은 대충 생각을 같이한다는 믿음을 갖고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펼쳐놓고보니 상행이냐 하행이냐에는 양자 택일의 문제에 막닥뜨리게 되었고, 의견은 갈라졌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국 한분만 상행을 원했고 나머지는 지누단다를 거쳐 란드룩으로해서 담푸스까지 평탄한 내리막길을 쉬엄쉬엄 걷기를 원했다.  타협은 불가능했고, 다음 날이 밝으면 먼저 2명이 룸비니를 행해 떠나고, 또 한분은 촘롱을 걸쳐 상행길로 떠나고 나머지 6명은 지누단다를 거쳐 킴롱콜라를 건너 란드룩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결정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얼굴을 붉힌 우리는 끝내 마음을 풀지못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래도 내일이면 떠날 분들은 떠나고 새로이 시작될 여정을 꿈꾸며 지난 시간을 정리했다. 

나는 어린왕자가 되어 지구별을 밟았다. 보드라운 흙과 풀의 촉감을 느끼고, 땅의 온기와 차가운 돌의 체온을 음미하며 걷고 또걸었다. 내가 만날 내일의 우주는 또 어떤 모습일까 내딛는 걸음마다 설레임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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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예정된 호텔이 문제가 생겼다며 가이드 라마는 우리를 다른 호텔로 안내했다.  마무리가 덜 된 신축건물로 HOTEL KARUNA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뜻을 알아보니 불교 용어로 부처와 보살이 지녀야하는 4가지 마음가짐인 사무량심의 하나인 悲를 뜻한다고한다. 자비의 비를 의미하는 호텔의 이름이 생경했지만 뭐 여기는 흰두교와 함께 불교가  삶과 버무려진 네팔아닌가.


아침 일찍 라마는 도착하고 우리는 한국식 미역국이 일품인 인근 한국인 식당에서 고산증 예방 의식의 하나로 소고기가 넉넉한 미역국을 배터지게 먹고 마이크로 버스에 올랐다. 5년전과 달라진 포카라 시내는 아직 포장이 안되어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지만 전에 없던 대로가 도심을 가로질러 건설중이었다. 주유소를 들러고 차는 도심을 벗어나 금새 포카라-바글링 하이웨이로 접어들었다. 하이웨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시골의 낡은 2차선도로보다 나을게 없었고,  차들은 신호위반이나 교통법규 위반과는 무관하게 질주했다. 세상의 틀이 잡히고 문명화된다는 것이 주는 많은 이점과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또다른 많은 것의 무게를 잰다면 어느것이 더 무거운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최소한 네팔에서 보내는 시간동안은 네팔의 모든 것이 더 소중했다. 무질서는 자유로 다가왔고,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먼지와 구석구석 쌓인 쓰레기조차 나의 시간여행을 돕는 친근한 친구로 다가왔다. 선진-후진이 아니라 단지 차이가 있을 뿐 나름의 삶은 고유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설산이 보이는 뷰포인트에서 한번 차를 세운뒤 곧바로 Phedi를 지나 트레킹 출발점인 나야풀에 도착했다. 산을 들어서기 전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입구의 가게에서 차를 한잔나누며 모두들 신발끈을 다시 메고 배낭끈을 조였다. 비시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트레커들과 마을을 가로질러 빗물고인 길을 따라 우리는 걸음을 시작했다. 얼마걷지않아 길은 마을을 벗어나고, 강을 건너자마자 갈림길이 있는 비렌탄티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울리바자르를 지나 촘롱까지 다다르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힐레를 거쳐 오늘의 숙박지인 울레리가 나오니 우리는 망설임없이 왼쪽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5년전 걸었던 오른쪽 길을 다시 못가보게 되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두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으니 어찌하랴...


 

울레리로 가는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게 닦아진 비포장길로 시작했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짚차가 지나갔고, 그때마다 먼지가 일고 우리는 바람 방향에 운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1월이지만 아직 길은 더웠고, 숨이 막히는 먼지 마저 시야를 가리니 트레킹 첫날의 걸음부터 가볍지 못했다. 확 트인 전망도 아니고, 우리를 반기는 설산도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아직 네팔의 산을 오르는 느낌이 들기에는 한국산과 너무나 닮은 길을 걸었다.

 

간혹 길가에는 현지인들이 도코라는 광주리지게를 메고와 밀감을 팔고 있었다. 가격에 비해 그 신선함과 향기는 지친 트레커에겐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울레리까지 하루 걸음은 지친 몸에 힘을 주던 밀감의 상큼한 향기가 가장 남는다. 

힐레에 이르자 드디어 차들은 더 이상 우리의 걸음을 쫒아올 수 없게 되어 먼지로 부터 해방되었다. 차와 먼지로부터 신경을 끊으니 풍광은 더 선명해지고 안나푸르나에 기대에 살아가는 네팔리들의 삶도 더 살갑게 다가왔다. 일행은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며 같이하는 여행의 위험을 피하고 그 멋을 더하는데 배려심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는 표정에 마음을 다 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같이하는 여행보다는 단촐한 여행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취향에 반한 이번 여행이 나의 일방적인 강권으로 성사되었다. 지상에서 맺은 인연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안나푸르나의 풍경을 나누고 싶었다. 나역시 소중한 인연으로부터 주어진 강권에 못이겨 네팔과 인연을 맺고 사랑에 빠졌듯이 나의 친구들이 다 그렇게 네팔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나푸르나의 추억을 공유한 그들과 같이 늙어가며 추억담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애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했고 혹시라도 상처가 나거나 관계에 금이가는 어떤 금도를 넘어서는 행동도 피해야만했다. 물론 그런 입장이 긴장을 주거나 부담으럽게 다가오지 않았고 즐거움을 더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힐레에서 점심을 먹고 길가의 돌담에 몸을 뉘었다. 햇살, 바람, 그리고 흙의 향기까지 나의 몸에 스며드는 순간 깜빡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의식을 옥죄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한순간의 희열을 느꼈다. 사실 해탈의 순간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순간이기에 어쩌면 죽음을 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시 울레리까지 걸으며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집을 나서면 늘 자신에 부과되던 가능한 모든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그래서 여행은 모든 것들과 작별하는 연습이기도하고 죽음과 친해지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늘 여행을 꿈꾸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동인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재의 삶이 주는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 긍정이 확고한 사람은 여행이 불필요하다면 편협한 생각일까? 지금 여기에 만족한다면 왜 굳이 길을 찾아 나서겠는가. 그런데 나는 무엇에 목마른것일까...

 

모두들 지쳐갈 무렵 울레리에 도착했다. 산등성이에 아담하게 모여앉은 마을이 이뻤다. 비슷하게 도착해 잠자리를 찾는 트렉커들의 소란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멀리 노을빛이 먼 옛시간을 상기시키며 사라져갔다. 이내 초저녁의 고요가 아늑하게 마을을 감쌌다. 연꽃을 의미하는 KAMALA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슬슬 냉기를 느끼며 모여든 다이닝 룸에서 안나푸르나의 첫 밤을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흥과 취기에 들떤 다른 팀의 네팔리 가이드가 춤과 노래로 다이닝룸의 열기를 더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흥취보다는 고요를 찾는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아쉬운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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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0일 봉화마을길걷기. 명준외 28명의 도반, 삼동 황악마을에서 출발 합강을 지나 재산 갈산교까지 10여km를 아침9시에 출발 12시 15분까지 걷고, 종점인 갈산교에서 아침일찍 미리 대어놓은 차를 타고 명호로 이동, 같이 점심을 먹고, 삼동으로 다시 이동하여 헤어짐.

가까운 친구 몇은 따로 조금 일찍 나와 오늘 걸음의 목적지인 갈산교에 차를 세워두고, 출발점인  '삼동막걸리' 술도가였던 삼동 슈퍼마당으로 돌아와 모두 28명의 도반과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삼동 슈퍼를 출발해서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황학마을을 지키는 280여년이 된 당나무를 마주쳤다.  지하여장군 각시가 쓰러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꽂꽂이 당나무를 지키는 천하대장군에게 인사를 올리고 우리는 마을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농사철이 되어도 사람구경이 쉽지가 않을 것 같은 소박한 농로를 따라 합강으로 방향을 잡았다. 드문드문 길따라 형성된 밭들 조차 여기저기 묵어가는 한국농촌의 현실을 아프게 자각하며 적당한 경사에 멋진 굴곡을 가진 길을 따라 약 2km를 걸었다. 가파른 비포장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이내 강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합강! 태백에서 발원해서 소천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재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 합강이라 이름을 얻고 이 물은 다시 흘러 명호소수력댐을 이루고, 명호에서 운곡천을 만나 비로서 낙동강이라 불린다. 합강은 철저히 얼어붙어있었고, 물길을 잃고 얼음에 갇혀 해빙을 기다리는 쪽배는 겨울강의 쓸쓸함을 더했다.

얼어붙은 겨울강은 차갑게 침묵했다. 얇은 얼음을 깨며 걷는 빠른 발걸음소리가 강을 따라 번지기 전까지 겨울강은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강의 묵상을 깨는 부산한 발걸음이 휩쓸고 지나가면 차갑고 조용한 바람이 한줄기 마른 갈대를 훑고 지나가며 우리의 흔적을 지웠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두 초막이 있고 집주인은 형제라고 했다. 강을 건너지기전 삼동리쪽이 큰형이고 강건너 재산쪽에 여덟형제가 살고 있는데 그 중의 한명이 강건너 마주한 초막의 주인이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쪽배로 오고가는 형제의 삶이 궁금했다. 굳이 관에서 농로 포장을 해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차라리 생활의 불편함을 감내하겠다는 외딴집의 주인 마음이 느껴져 우리의 소란한 발검음이 움츠려들었다. 그분들의 호젖한 평화를 흩뜨리기 싫어 초막을 스쳐지나니 모처럼 사람을 맞는 진돗개가 못내 아쉬워 낯선 사람의 품에 매달렸다. 애써 매달리는 강아지를 뿌리치고 내길을 가는 마음에 애잔함이 스몄다. 외로움을 감내하며 호젓함을 누리며 사는 집주인과 그래도 사람의 훈기가 좋은 개가 함께 사는 일상의 모습이 궁금했다.

꽁꽁 언 강을 만난 일행들은 신나게 구르고, 사진을 찍고 미끄럼을 탔다. 늙은 소년 소녀들은 언강의 유혹에 혼미한 정신으로 한참을 지체한뒤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합강에서 갈산교에 이르는 길은 길은 오래전 사람 살았던 흔적이  강둑으로, 묵은 밭두렁의 흔적으로 그리고 폐가로 남아있었다. 강변은 예전에 밭이거나 길이었지만 지금은 수양버들과 물참나무 등 물을 좋아하는 나무가 빼곡히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는 강을 따라 형성된 너들바위를 밟고 나무를 비집고 재산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합강을 지나 4km를 걸으니 인가가 나왔고 사람드문 산막의 주민은 우리일행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움과 함께 마음 한켠에 스스로를 살펴야한다는 마음이 일었다. 혹여나 흔적을 남기고 지나온 길을 더럽히지나 않았을까, 다시 걸음을 가다듬었다.

민가를 만난 시점부터 일종의 강변트레킹코스가 가꾸어져있었지만 지금까지 걸은 길과 별반다르지 않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 길을 따라 4키로를 더 걸어 12시 15분즈음 목적지인 갈산교 도착했다.  겨울 강을 걷다 계획에 없던 갈산 구곡을 만나 호강을 하고 다른 계절에 다시한번 찾아오자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잠시 잊었던 차에 몸을 싣었다. 

움추린 몸을 풀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걷기의 묘미는 참 깊었다. 걸음은 마을은 짖누르는 일상의 걱정들을 내려놓게 하고, 굳은 의식을 깨워 숨었던 상상의 힘을 회복하게 하고, 기억의 귀퉁이에 쳐박혀 잊혀져 가던 소중한 추억에 생명을 준다. 발걸음의 리듬에 따라 백박이 조응하고, 빨라진 맥박에 몸이 반응하니 몸은 뜨겁게 되살아나고 다시 걸음은 더 생기를 얻는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들은 대화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을 잇고 연대한다. 걷기를 좋아할만한 사람은 사귈만한 사람임을 걷는 사람들은 안다. 이름조차 다 기억하지 못한 28명 도반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오늘 하루 모처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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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할 것 없이 새벽 일찍부터 눈이 떴는지 호텔이 분주했다.  호텔서 제공하는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을 때우고 나니 이내 부탁한 택시가 도착했다. 2박을 한 팀들은 벌써 매니저와 룸보이랑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오래 작별인사를 나누고 팁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왜 그리 많을까 늘 의심하고 삶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9명의 팀이지만 짐은 만만하지 않았다. 룸보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9개의 중대형 배낭과 또 그에 못지않은 소형 배낭 그리고 손가방까지 다 모아놓으니 한 트럭분은 되어 보였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빈병 물 채우듯 빈틈없이 짐과 사람을 구겨 넣으니 그래도 숨 쉴 공간은 남았다

네팔 최고의 버스라는 포카라행 자가담바의 출발점인 타멜에서 차로 5분거리가 되지 않는 안나푸르나호텔로 향했다. 타멜 거리를 지나는 가깝지만 혼잡스럽고, 몸은 불편한 시간동안 나는 막 시작한 여정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보단 타멜의 거리와 얽힌 기억의 흔적을 쫒는데 여념이 없었다. 5년 전 들렀던 레스토랑이며 호텔의 위치, 그리고 마트와 서점을 더듬었다. 그를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2천만 네팔인구중에 내가 아는 2~3 명중의 한명이 우연이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까 나의 눈은 열심히 거리를 훑었다.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인지, 나는 이 거리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욕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갈수록 흐릿해 지는 기억의 확실성을 움켜지려는 집착인 것도 같았다.

이내 도착한 안나푸르나호텔은 별천지였다혼잡하고 지저분한 카트만두의 거리와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채 네팔의 가난과도 무관한 공간으로 다가왔다싱그러운 나무와 꽃들한적하고 편안한 정원 그리고 그 속을 거니는 여유로운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도 있을까 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하고 싱그러운 카트만두의 정취에 마양 취했다정원을 거닐고 향기로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안나푸르나 여정을 같이할 길동무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그래도 제일 젊은 L이 제안한 연출 사진이 가장 멋졌다서로 맞댄 흐린 얼굴 넘어 무언가 뜨거운 꿈을 공모하는 짜릿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혼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지나 버스는 이내 네팔의 산하를 달렸다네팔리의 삶이 스민 산자락 다락밭들과 차장으로 스치는 멀리 눈덮인 봉우리가 우릴 반겼다들뜬 눈으로 차창을 스치는 먼 산과 네팔리의 삶이 깃든 마을을 바라봤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지나가는 소마저 나를 반겨주는 듯 정겨웠다카드만두 분지를 벗어나기 위한 산자락 길은 여전했지만 포장을 새로 하고 난간을 세워 훨씬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아무데나 버스를 멈추고 볼일을 보게 하던 5년전과 달리 그래도 휴게소다운 휴게소가 있고 길가의 쓰레기도 훨씬 줄어들었다버스에서길가에서휴게소에서 마주치는 네팔리마다 특유의 여유 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여행객을 맞았다. 2015년 대지진 이후 인심이 팍팍해지고 거칠어졌다는 소문과는 달리 네팔의 표정은 5년전보다 더 밝게 다가왔다.

내 인생의 화려한 한때를 즐길 마음의 준비도 없이 포카라에 도착했다카트만두를 떠나자마자 포카라를 향해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내내 이번 여행의 의미를 물었다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곱씹었다굳이 바란다면 이번 여행이 내 마음의 지병인 화를 다스리는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버스를 내리며 다짐했다. ‘잊자쉬자놀자걷자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자.’ ‘여행의 의미를 찾고나의 삶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피하자.’ 그냥 먹고 걷고 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고자 다짐하며 나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버스정류장엔 우리의 가이드 라마가 차량과 직원을 대동하고 마중 나와 있었다전화와 카톡으로 연락만 주고받다가 처음 마주하고 보니 상상했던 인상보다 훨씬 강직해보였고 보스 기질의 사업가 기풍이었다서둘러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리 짐은 라마가 준비한 차로 옮겨졌고 예약했던 호텔이 문제가 있다며 막 새로 들어선 다른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정식 개업도 안한 것 같은 새 호텔에 짐을 풀고 나자 우리는 새장에서 해방된 새들처럼 포카라 리버사이드거리로 쏟아져 나갔다안나푸르나를 걷는 모든 여행자들의 발길이 머물고 오래전 전세계 히피들이 모여들었다는 리버사이드 거리를 내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울릉거렸다. 9명의 일행은 뒷골목의 골목대장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리버사이드 거리를 휩쓸며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다가 해직녁이 다되어서야 페와호수가로 몰려갔다.

페와호수는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고 물가를 거닐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그 속에 나도 한 부분이고 싶어 선뜻 흥정을 하고 두 대의 배에 나누어 올랐다배는 호수가운데 떠 있는 작은 사원이자 섬인 바라히 힌두사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배에 오르자 모두 물 만난 고기마냥 자유를 얻었다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을 잊고 노래를 시작했다잊혀진 80년대의 색 바랜 민중가요가 페와호수에 번져나갔다물살 때문인지 우리 노래의 울림 때문인지 물에 비친 안나푸르나 연봉이 흔들렸다. 

도착한 바라히사원은 임신을 원하는 사람이 참배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하지만 우리는일행은 더 이상 자식을 얻을 연배가 하나도 없으니 다들 무슨 소원들을 빌었는지 모르겠다안나푸르나 연봉이 비친 페와호수가 석양이 물들 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나는 빌었다안전한 산행과 즐거운 동행을그리고 우리 딸의 행운과 건강을, 우리부부의 사랑과 건강을, 어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그리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소원을 빌다보니 나는 여전히 바라는 게 너무 많고 버리지 못하고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많은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페와호수와 리버사이드 거리가 어둠에 물들자 우리는 민속공연과 모닥불이 있는 부메랑식당으로 몰려갔다.  여정을 같이할 가이드 라마님도 동석해서 일정과 비용을 조율하고, 맛있는 스테이크와 맥주를 정겨운 친구들과 나누니 가는 밤이 아쉬웠다.  포카라의 밤이 깊으니 곧 만나게 될 산들이 그리워졌다. 내일 여정이 우리를 부메랑에 모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미치게하던 봄밤의 기운을 느끼며  리버사이드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산행을 위한 짐을 다시 한번 챙기고 침대에 몸을 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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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0&oid=022&aid=0003154460




문재인정권은 '노동'측인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농어업회의소'와 '노동회의소'로 결집하여 '자본' 측인 '상공회의소'와 정부를 상태로 협상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대 타협을 구상하는 것 같다. 곧 법제화도 추진한다고 한다. 문정권은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사민주의적 복지국가를 이룩한 스웨덴이나 필란드를 롤모델로 삼는 유러피언드림이라는 단꿈에 빠져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지난 수십년간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물론 낡은 파시즘의 찌꺼기와 봉건적 폐습 그리고 민족 분단과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워왔다. 하지만 임금인상과 농산물가격보장이라는 당면한 현실적 과제와 노동해방이나 농민해방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비현실적 꿈 사이에서 탈자본주의 전망과 대중장악력을 소진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1%도 안되는 농민조직률과 10%를 넘지 않는 노동자 조직율을 가지고 계급적 이해를 대변한다고 목청을 다해 외치고는 있지만 사회적 반향은 충분하지 않다. 자칭 전위는 있지만 그 전위의 지도를 받을 대중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촛불혁명은 분명 전농과 민주노총의 전리품이 아니다.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촛불혁명의 주역은 ‘비운동권 시민세력’이다. 문재인대통령에 대한 여전한 7~80%대의 지지율 역시 이 사실을 반증한다. 사회과학적으로 어떻게 규정될지 모르지만 ‘비운동권 시민세력’의 꿈을 문재인 정권은 싸 안았다. 그것이 바로 유러피언 드림이다.


이 지점에서 고민이 많다. 극히 자본주의 내적 요구에 빠져있던 진보적 대중조직은 민주당정권과의 접점을 잃었다. 현실적 과제를 전략적 전망과 유기적으로 엮어내지 못하다보니 탈자본주의전망 없는 현실적 요구는 민주당이 흡수해버리고 방법론이나 로드맵이 없는 슬로건에 대중은 떠나버리는 이중의 고통에 빠져있다. 미국식 양당체제 속으로 흡수되어 버릴지 아니면 비대중적 극소세력으로 오지 않을 먼 미래를 준비하는 신비교도가 되어야할지 결정을 강요받는 시기가 곧 닥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돈데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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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2

아침 햇볕이 공항라운지를 비추기 시작하고 닫혔던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는 때가 되어 서야 밤새 찾지 못했던 청사내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밤새 경찰인지 경비인지 공항근무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대답은 No! 한마디였다. 난 공안이지 안내원이 아니라는 간고한 입장표명으로만 느껴졌다. 사실 공항은 엄중한 공간이기도하지만 많지 않은 여행경험 중에 이렇게 피부로 와 닿는 삼엄한 경비는 처음이었다. 몽둥이와 방패까지 든 군인들이 청사 내를 끝없이 순찰하고 청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고 일정한 숫자가 되면 한꺼번에 입장을 시켰다. 이런 시스템은 공항 보안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민으로 하여금 국가 권력의 살아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굴종케 하는 장치로 느껴졌다. 아마도 티벳 독립운동과 관련한 긴장 때문으로 이해되지만 티벳 사람은 좋아하지만 티벳 독립은 또 다른 문제로 느끼는 내같은 사람에게도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투만두 트리뷰반공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동방항공에 대한 수많은 악플들과는 달리 비행기는 쾌적했고 승무원은 친절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4시간여 비행 끝에 멀리 눈덮인 히말라야가 보이는 카트만두 하늘에 다달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석양에 물든 서쪽 하늘의 적란운이 멋있었다. 그런데 곧 착률 할 것 같은 비행기는 공항사정으로 착륙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오전내내 안개로 밀렸던 비행기들의 이착륙으로 내가 탄 비행기는 한 시간을 넘도록 땅을 딛지 못했다. 긴장과 울렁거림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자 석양이 지는 초저녁 하늘을 이고서 비행기는 활주로에 닿았다. 세계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루클라공항에 착륙한 것도 아닌데 승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가슴 벅찼다. 5년을 기다린 네팔행인데 너무 쉽게 도착하면 안될 일이긴 했다.

 


청사로 들어서며 5년전 기억을 되살리며 공항과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지난 기억은 흐리고 지금 있는 모든 풍경은 늘 항상 그렇게 있어온 것들처럼 친숙했다. 입국 비자비를 심사원이 아니라 은행창구에서 내는 것으로 달라진 공항을 나왔다. 5년 전과 똑같이 달려드는 삐끼들을 비집고 예약된 픽업택시를 찾았다. 배낭을 억지로 빼앗아 택시에 싣어 주던 삐끼가 팁을 요구했지만 잔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그냥 무시했다. 없는 살림에 100달러지폐를 팁으로 줄 수는 없었다. 무시하라는 택시기사의 싸인을 받고, 또다른 하국 여성 여행자 한사람과 같이 픽업택시에 몸을 싣었다. 꽉 막힌 카트만두 시내를 가로지르며 5년전 기억을 더듬었다. 카투만두 거리의 소란과 무질서는 여전했지만 5년전에 비해 차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은 더 붐볐다. 곽막힌 도로를 따라 정체는 이어졌고 예상시간을 함참 넘겨 예약해둔 카투만두 뷰티크 호텔에 도착했다.

 


하루 먼저 여정에 오른 일행과 반가운 조우를 하고나니 나의 네팔 오는 길은 집나온 지 무려 34일이 걸린 셈이었다. 같이 늙어가고 싶은 친구들과 네팔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비싼 한식이나 고급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인근의 누추한 네팔리 식당에서 하는 식사라 더 즐거웠다. 익숙한 친우들이지만 바로 이 순간 한층 각별한 인연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7명의 동행은 인생의 아주 중요한 순간을 나눈 친구가 된 것이다. 나에게 네팔 여행은 그저 소비하는 여행상품이나 그저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대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슴 울렁이는 타멜 거리의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곧 시작할 트레킹을 위한 짐을 꾸렸다.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웠지만 내일부터 시작한 꿈같은 여정에 가슴 부풀어 네팔에서의 첫밤을 쉬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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