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서 밤새 달린 라오까이행 침대열차는 낡았고, 간식은 물론 물한병 준비 못했고 화장실은 좁고 불편했다. 위층 침대에는 낮선 사람도 함께 했고 기대했던 바깥 풍경은 암흑천지일뿐 기차는 진동으로만 달리고 있음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차는 여행이 주는 모든 설레임을 선물했고 나는 밤새 행복했다. 잠들 것 같지 않았던 설레임과 기차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밤새 우리를 낯선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같은 캐빈에 여정을 풀었던 승객이 떠나는 것도 못 느낄 만치 깊은 숙면을 취했다. 기차 운행 중에 사파행 버스 티킷이 필요하냐고 승무원이 물었지만 거절했는데 라오까이 역에서 내리자마자 역무원이 버스표를 파는 임시 카운터를 펼쳐놓고 있었다. 쉽게 버스를 찾고 승차하니 버스로 가파른 길을 한 시간이나 달려 사파에 도착했다.
라오까이도 큰도시였지만 사파도 작은 시골은 아니었다. 보통의 읍보다 규모있고 짜임새있는 시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메인 광장인 사파센타를 중심으로 애초에 여행지로 조성된 듯 광장과 호수공원 그리고 호텔과 까페 등 여행관련 업소로 가득했다. 기념품과 가이드 써비스를 제안하며 여행자를 향해 달려오는 몽족 여인과 아이들은 이곳이 낯선 여행지임을 한시도 잊지 않게 했다. 애써 호객을 물리치고 예약한 호텔을 찾아 가는 길 중간에 한 식당을 들러 아침을 주문하고 나서야 겨우 사파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당을 나와 캇캇마을 쪽으로 내리막길을 10여분 걸으니 예약한 숙소인 Catcathills Resort 가 나왔다. 체크인전이라 호텔에 짐을 맡기고 천천히 걸어서 사파 센타로 나오니 MGallery Hotel과 함께 판시팡 가는 사파역이 나왔다. 적지 않은 가격에 잠시 망설이며 현장 구매보다 혹시 인터넷 구매가격이 싸지나 않은지 확인한 뒤 표를 사고 모노레일에 올랐다. 모노레일은 먼저 Sun Home Fansipan Legend에서 멈춘 뒤 케이블카를 갈아 타고 판시판역까지 올라간 뒤 다시 모노레일을 한 번 더 타고 베트남 최고봉이라는 판시팡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까지 올라갔다. 모노레일을종착지에 내려 가파른 계단을 10분도 걷지 않아 판시판 정상에 도착했다.
판시판은 해발 3147m로 베트남 최고봉인 데다 힘들이지 않고 모노레일과 케이블카를 이용해 쉽게 등정이 가능한 관계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붐볐다. 모노레과 케이블카를 갈아타는 중간 기착지마다 선물가게와 식당을 가로 질러야 했고 작은 롯데월드를 온양 조금은 분주하고 들떠 있는 관광지의 모습이었다. 외국인보다 훨씬 많은 베트남 인들이 눈에 들어왔고 베트남인들에겐 신혼 여행지로 사파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젊은 연인이 많았다. 유명 관광지 답게 혼자 카메라를 들고 중얼거리는 유투버들을 심심잖게 만날 수 있었다. 나 역시 판시판에 오르니 장대한 풍광에 한없이 기분이 고조되고 들떠 인파를 비집고 같이 쓸려다니며 연달아 사진을 찍었다.
다소 지친 몸으로 하산해서 사파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늦은 체크인을 했다. 굳이 풀이 있는 비싼 숙소를 얻은 덕분에 아직은 추운 풀장에서 몸을 풀었다. 잠시 휴식 뒤 숙소를 나와 본격적으로 사파를 돌아다니다 사파호수에서 화려한 일몰을 맞고 캇캇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사이공맥주‘와 ’하노이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온 종일 들떠 신나게 뛰어다닌 덕에 이번 여행의 가장 값진 하루를 보냈다.
2023년4월 19일
분에 넘치는 시설과 친절 그리고 풍경까지 제공한 깟깟힐즈호텔에서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눈을 떠자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고 얼른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저 멀리 캇캇마을이 안개 속에 살아나고 있었다. 얼른 아내를 깨워 아침 안개속에 피어나는 캇캇마을 풍경을 보는 감동을 공유했다. 아내는 스케치를 하고 나는 짐을 싸고 또 다른 하루의 여정을 구상했다. 오전 일찍 깟깟마을 트레킹을 하고 오후 늦게 버스로 하노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늦게 조식을 한뒤 호텔 정원을 둘러보고 바로 깟깟마을 탕방을 나섰다.
호텔을 나와 캇캇마을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여러 번 오토바이가 호객을 했지만 내리막길이기도 하고 걷는 재미를 위해 전통의상 대여점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가지고 잇는 베트남 돈이 부족해 미국달러나 카드로 결제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마을은 겉만 보고 오토바이 택시를 흥정 끝에 타고 묵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다시 하루 일정을 논의 한 뒤 택시로 사파 시내로 나가 환전을 하고 하노이로 돌아갈 버스를 예약했다. 남은 시간이 애매해 트레킹을 포기하고 택시투어를 할까 했지만 이역시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버스사무실에 맡기고 넓지 않은 사파 시내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여유를 만끽했다. 지루하기 시작할 때쯤 재래시장에 들러 2인 한 끼 3500원 짜리 시장음식을 맛있게 먹고 사파호 주변 까페로 돌아와 커피를 시켜 노상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지나는 강아지 그리고 거리를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모처럼 일정비운 시간의 공백을 누렸고 바쁠 필요가 없었던 어렸던 그 언젠가를 회상했다. 걷고 먹고 쉬기 위한 일정치고는 이동이 잦았지만 그래도 하루 2만보 이상 걷고 싼값 덕분에 실컷 먹고 좋은 풍광 속에서 삶을 누렸다. 이번은 관광이고 휴식이고 결국은 소비지만 언젠가는 다시 순례로 구도로 세상을 주유할 것을 꿈꿨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 삶의 기쁨이 가득하고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축복이기를 빌며 하노이행 버스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는 슬리핑 버스는 편안하고 아늑했다. 두어 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러 300원을 내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버스가 출발하면 바같 풍경을 즐기다 이내 잠이 들곤 했다. 6시간을 길다고 느끼지 않은 채 하노이에 도착했고 이동 중에 예약한 마리나 호텔은 버스 종점 바로 길 건너였다. 호텔은 좁았지만 깨끗했고 있을 거 다 있고 아늑했다. 거리로 나와 길모퉁이 해산물 가게에 들러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와중에 이번 일정 중에 제일 비싼 고동 요리와 조개탕을 시켜 볶음당면과 맥주로 저녁을 해결했다. 호안끼엠 호수주변 구시가지는 그냥 그 속에 들어서는 순간 박물관 관람도 유적지 탐방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여행자가 되는 신기한 장소였다.
4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새벽비행기라 모두 창을 내리고 잠만 자는 바람에 내가 좋아하는 창밖 구경을 하지 못한 점이 많이 불편했다. 현지 시간 아침 8시 조금 넘어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착륙했다. 비행은 편안했고, 공항은 한산했다. 나의 첫 베트남여행은 트랩을 내려설 때 갑자기 들이닥친 습하고 뜨거운 공기로 다가왔다. 영상과 활자를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만 접했고, 나의 농사일을 돕는 베트남 노동자를 통해 간접 체험했던 베트남 풍경을 바라다 보는 마음이 복잡했다. 마음은 혼란스러웟지만 베트남에 입국심사는 쉽게 끝났고 이내 대합실로 넘어와 유심을 갈고, 환전을 했다. 하노이행 버스를 타기 전에 공항내 식당을 찾아 첫 베트남 현지 쌀국수를 비싸게 체험했다.
하노이 시내로 가는 86번 버스는 찾기 쉬웠다. 비슷한 차림의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몰리니 그냥 무리지어 따라다니기만 해도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버스는 편안했는데 차창 선팅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베트남의 첫인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어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하노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 홍콩 영화의 뒷골목 배경 같은 호안끼엠 호수 인근에 버스가 들어서고 승객의 대부분이 몰려 내렸다. 구글맵을 켜고 골목을 걸으며 영화 속에서나 보던 베트남의 거리와 현실을 비교하며 좁고 복잡한 인도로 트렁크를 끌고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 나섰다.
메이드빌프리미어 호텔을 찾았지만 체크인 시간이 많이 남아 짐을 맡기고 거리로 나섰다. 먼저 호안끼엠 호수를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외국인도 적지 않았지만 더 많은 현지인들의 무리가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여기저기 부스가 설치되고 작은 공연이나 체험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있었고 상황을 살펴보니 프랑스와 무슨 교류의 날 같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선은 낯선 베트남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아이스크림을 사 물고 사방을 두리 거리며 베트남스러움을 한껏 느끼기 위해 호안끼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숫가의 응옥썬사당엔 인파로 넘쳐났다. 비집고 들어가 오래전 나라를 구할 칼을 전해줬다는 거북이의 전설을 읽고 유물을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한낮의 더위는 들뜬 여행객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난생처음 호텔 옥상 풀장으로 달려가 수영을 했다. 오직 풀장을 위해 두 배의 비용으로 예약한 호텔이니만치 풀장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규모는 작고 수질을 그럭저럭 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는 풀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즐겼을 때쯤 덩치 큰 서양인들이 몰려오자 풀장을 나와 다시 하노이 투어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호텔을 나오자 마자 길모퉁이 식당에서 쌀국수를 포함한 몇가지 정체불명의 음식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고 그랩을 불러 호치민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호치민 묘소로 향했지만 오픈 시간이 지나 다시 걸음을 옮겨 레닌동상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길 중간에 한국인에게 더 유명하다는, “베트콩”의 “콩”에서 이름 따 왔다는 밀리터리컨셉 인테리어의 콩까페에 들러 코코넛 커피를 마시고 베트남 현대사와 호치민의 삶을 생각했다. 역사에서 한 번도 부패한 지배세력을 신진세력이, 구시대를 신시대가 완벽히 제압하고 승리하는 경험을 갖지 못한 대한민국과 그 경험을 가진 베트남의 차이는 무엇일까? 많이 부러운 게 사실이지만 또 한편 그 승리에 도취되어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듯한 베트남의 현실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승리한 혁명이 부패한 관료의 손아귀로 귀착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혁명의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자존과 자긍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코넛 커피로 몸을 식힌 뒤 다시 거리로 나서 레닌 동상에 들러 참배하고, 포토존으로 유명한 철도건널목을 지나 따히엔 맥주거리까지 걸으며 하노이의 밤을 맞았다. 하노이는 밤에 살아났다. 한낮의 더위가 가쉬자 마자 맥주거리로 알려진 호안끼엠 호수 인근의 따히엔 거리는 낮은 탁자와 앉은뱅이 의자로 길이 채워졌다. 2차로의 중간만 오토바이가 지나갈 정도만 남기고 길 양쪽의 거리는 업종에 관계없이 모두 빽빽이 좌판으로 채워졌다. 골목 여기저기서는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고, 풍선장사나 기타 기념품을 파는 상님들까지 모여들어 그야말로 거리는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한번씩 경찰이 나서 통로확보를 지시했지만 경찰이 지나가자마자 이내 거리는 다시 의자와 탁자로 메꿔졌다. 우리가 묵는 호텔이 그야말로 맥주거리의 중심이다 보니 같이 들뜬 기분에 거리로 나서 좌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닭발요리와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시켜놓고 타이거 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휩쓰는 맥주거리의 열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노이의 첫 밤은 그렇게 뜨거웠다.
2023년4월 17일
아침부터 침대머리에서 오늘 하루 투어 코스를 점검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동선이나 그곳에 대한 정보는 미리 준비된 것이 없었다. ‘베트남 여성박물관’과 ‘호아 로 감옥 박물관’ 그리고 ‘국립미술관’을 대충의 목적지로 잡고 구글맵에 의지한 채 거리로 나섰다. 먼저 택시를 불러 하노이역을 들러 짐을 맡기고 밤에 떠날 사파행 기차표를 예매한 뒤 발길 닫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에 대한 인식 없이 마냥 걷다보니 다시 호안끼엠 인근의 항쫑 화원을 지나 성요셉성당에 이르렀다. 자료를 찾아보니 프랑스 식민제국 시절 하노이를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 따 성요셉성당을 지었고 이후 프랑스 식민군을 물리친 베트민에 의해 장악되고 성당의 기능을 잃었다가 1990년 이후 베트남의 개방과 더불어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민중의 종교적 열망의 상징물이 된 성요셉 성당이 지금은 이방인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는 삶과 역사의 섭리가 오묘했다.
이어서 찾은 여성박물관은 큰 기대 없이 일정에 넣었지만 의외로 다양한 콘텐츠로 많은 울림을 남겼다. 입구에서 조금의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어 설명이 나오는 헤드폰을 빌려 각 섹트마다 돌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박물관은 일상적인 베트남 여성의 삶과 혁명기 여성 혁명가의 역할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민족의 혼례와 일상 노동에 대한 컨텐츠까지 적어도 반나절은 할애해 둘러보아야 할 만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내몰려 혹독한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보조하는 여성의 삶’과 ‘14살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18살이 되자 처형당한 어린 민족해방투사의 삶’까지 베트남에서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도 존재하는 여성의 다양한 삶을 담고 있는 베트남 여성박물관은 오래도록 하노이 여행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여성박물관을 나와 다음 행선지로 ‘호아 로 감옥 박물관’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마침 점심 나절이다 보니 거리의 여기저기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 쌀국수를 먹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우리 역시 그 무리에 휩쓸려 베트남인이 되고 싶은 이방인마냥 스며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어서 찾은 ‘호아 로 감옥’은 의외로 외국인 관람객이 넘쳐났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최고의 문명국을 자처하던 서양인에 의해 자행된 야만과 학살의 현장은 찬 기운이 가득했다. 원래 호아로는 한자로 火爐로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숯을 굽고 도자기를 굽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프랑스에 대항해 베트남의 독립을 도모하던 베트남인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그리고 처형하던 장소로 베트남인에게는 독립항쟁의 상징적 성지였다. 나중에 프랑스를 물리친 뒤에는 다시 미국의 침략에 맞서 생포한 미군 조종사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미군들에겐 하노이 힐턴호텔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관람객 모두 긴 침묵을 이어가며 묵묵히 안내된 동선을 따라 감옥을 탐방했는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명에 시간가는 줄 모를 만치 몰입하 모습이었다. 문득 가해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의 국민들은 호아루 감옥을 둘러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이어폰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개별적 사연을 들을 때면 하나의 역사적 드라마인양 장엄하고 비장했다. 두어시간이나 흘렀을까? 독립투사의 사형을 집행하던 마지막 장소에서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향을 올린 뒤 거리로 나섰다.
이어서 인근의 국립미술관과 하노이 문묘를 관람했다. 미술관은 불상 등 몇몇 불교 문화재와 20세기 이후 현대화 중심으로 꾸려져 있었고 관람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근의 문묘 역시 많은 관람객이 있었지만 그냥 한번 훝어보고 지나칠 정도의 명소로 느껴졌다.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노이역 인근으로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더위를 식히다 약속된 지인을 만나 고급진 후에 전통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 화려한 저녁을 먹었다. 반세오의 맛을 기억하고 다시 하노이역으로 돌아와 사파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역내를 살피고 오고가는 인간 군상을 구경했다. 10시 출발 예정인 기차에 30분 전부터 승객을 들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탈 기차는 임시 증설된 기차인지 제일 마지막 칸으로 다른 기차에 비해 훨씬 세월의 흔적이 진했다. 10시에 정확히 출발한 기차는 손에 닿을 듯한 건물사이를 비집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흐린 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졸린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기차의 진동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딸은 신혼여행 가고 우리 부부는 舊婚旅行을 떠나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 아이 하나 낳아 기르며 산지 삼십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아이는 자라 짝을 만나고 혼례를 치루니 우리 부부도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하노이 구혼여행길에 올랐다. 지난 고난의 기억을 지우는 행복한 여정을 기록에 남겨 노후를 대비해 본다.
2023년 4월 14일 휴가를 얻어 딸아이 결혼식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은 딸 결혼식보다 식 끝나고 떠날 울 부부 베트남 여행에 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울 왔다. 용산역에서 마라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2023서울화랑미술제”를 관람했다. 일만여점의 현란한 작품에 눈이 호사를 누렸지만 그림이 너무 많아 어떤 작품도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2만원이라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방대한 아트페어 현장을 누볐지만 그래도 마음에 남는 유일한 작품은 [관훈갤러리]를 통해 출품한 아내 류준화의 작품이었다.
코엑스 나와 홍대로 달려오니 아내와 딸은 네일샵에 들어가고 나는 거리의 미아가 되었다. 아내가 홍대서 학위를 하고 내가 합정에서 친구들과 출판사를 하면서 합숙을 할 때 자주 들렀던 홍대거리를 혼자서 배회했다.
추억이 서린 홍대 거리를 걷고 고풍 찬연한 프랑스식 요리점에서 딸과 아내와 더불어 세 식구가 같이 비싼 저녁을 먹고 초저녁에 호텔에 들어와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눈을 떠니 축의금 문자가 쌓였고 꼭 그만치 사정이 생겨 혼례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쌓여 있다. 오히려 마음 쓰이게 한 내가 미안하다. 결혼식이란 게 참 걱정이 많다. 평생에 한번 치루는 대사니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객이 너무 많을까봐 걱정이었는데 나중엔 너무 안오실까봐 걱정이다. 신랑신부에게 누가되지 않을까 사돈께 실례를 범하지 않을까 다 걱정이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인데 다시 생각하니 그냥 되는대로 즐기면 되는 게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다.
4월 15일 혼례가 무사히 끝났다. ‘식’은 단순하고 단조로웠고 부모의 역할이라고는 하객맞이와 정해진 성혼선언문과 당부의 글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부모로서 별로 도와주지도 못했고, ‘식’보다 ‘실’을 중시하기에 아쉬운 것도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식이 끝나니 긴장이 풀리고 미리 세워둔 하노이 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비로소 일기 작했다. 인근 까페에서 마지막 하객과의 담소가 끝나고 작별한 뒤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점치며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인천공항 는 지하철로 달려갔다. 올림머리에 메이크업 그대로 딸사위보다 먼저 공항으로 떠나니 지인들이 놀리며 부부여행이 아니라 재혼여행으로 보인단다.
출국 때마다 자주 이용하는 인천공항 찜질방인 [스파온에어]에 누울 자리를 확보하고 몇 일간 먹지 못할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마땅히 할일도 없고 마음은 들떠 그냥 공항 청사를 할 일없이 걸었다. 공항은 나에게 알 수 해방감을 준다. 내안에 사는 내가 통제 불가능한 내가 숨을 죽이고 내가 통제 가능한 내가 기세를 얻는다. 나는 늘 길 위에서 행복하다. 자식가진 인간의 책무를 벗어던지고 나니 이제 좀 막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일 새벽6시 출발하는 비엣젯을 타기위해 4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트램을 타고 승강장 까지 이동하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침식사를 해결할 곳은 유일하게 햄버거집 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문의 선택지는 없고 오직 한 메뉴만 주문이 가능했다. 비싼 기내식 사먹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란 생각에 새벽부터 버거랑 찬 콜라로 배를 채웠다. 정시에 비엣젯에 올라 덜 잔 잠을 채우려 애쓰는 사이 착륙준비 멘트가 잠을 깨웠다.
한국에서 ‘농어촌개발’이 ‘도시개발’을 포함한 ‘지역개발’ 일반에서 분리되어 그 특수성이 모색되고, 새로운 정책적 과제로 부상한 지 벌써 60년이 넘었다. 1960년대부터 초가지붕과 부엌 개량사업이 진행되긴 했지만 1969년도에 입법된 [농촌근대화촉진법]에 기반해 70년대에 수행된 새마을운동은 한국농어촌개발 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철저하게 관 주도로 시행되어 낙후된 농촌의 취락구조를 개선하여 주민 삶의 편리를 향상하는 것은 물론, 농민의 정신개조와 지도자 양성 그리고 경제적 낙후성의 탈피까지 도모한 그야말로 입체적 농촌 개발사업이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주민을 동원한 관 주도 하향식 사업으로 산업노동력의 공급을 위해 농촌의 분해를 가속화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한편으로는 주민의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그 세대는 여전히 자신이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대접받았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로 기억하기도 한다.
이후지역개발의개념이변화하고정책의목적도바뀌어왔다. 1970년대에 진행된 새마을 운동은 쌀 증산을 통한 식량 자급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종속되어 추진되었다면, 1980년대 농촌개발정책은 처음으로 농업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을 시도한다. 70년대에 일어난 위협적인 농촌분해의 속도를 누그러뜨리고 농촌 마을의 자립적 구조를 확보하기 위해 농공단지 조성이나 농산가공업 등 농촌소득원 개발 등을 수행한다. 이는 1994년에 농어촌정비법이 제정되면서 한 층 탄력을 받게 된다. 농어촌정비법은 농어촌 공간의 기능이 전통적인 어로나 영농을 포함해 생산기반과 관광휴양자원, 산업단지나 한계농지 등으로 분화된 현실을 반영해 농어촌공간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립되었다. 90년대의 대표적 농어촌 개발사업은 정주권생활개발사업이나 문화마을 조성사업을 예로 들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농어촌개발 개념이 획기적으로 전환된다. ‘농촌’문제를 농업 ‘생산’과 완전히 분리해서 정립함으로써 농촌개발 문제가 먹거리 생산보다 훨씬 포괄적인 외연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농촌의 기능 전환에 따라 마을 내부 개발에 사로잡혔던 폐쇄적 시각에서 벗어나 도시와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한다. 농촌이 단순 먹거리의 생산 공급처에서 고유한 농촌의 문화적 역사적 자산을 통해 도시민의 정서적 안식처, 마음의 고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전환에 기반해 본격적인 도농교류사업이 시작되어 ‘팜스테이마을사업’이나 ‘녹색농촌체험마을’ 사업이 시행되고 귀농정책 역시 본격화된다.
또한, 이전까지의 국가 주도 사업 모델의 한계를 탈피하고자 상향식 개발 방식이 도입되고 무엇보다 주민 주도성이 강조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이 시행된다.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은 이미 분해단계에 들어가 자기완결성이 떨어지는 몇 개 마을을 묶어 지구 단위로 소득사업을 포함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개발을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주체가 분해되거나 미약한 상황에서 주민주도성에 기댄 농촌마을종합개발 사업은 쉬 난맥상이 드러났다. 이후 주체 형성을 위한 지역활동가 육성이나 중간지원조직 양성을 포괄하는 신활력프러스사업을 도입하고, 농촌종합개발 사업이 추구했던 포괄적 정책 목표를 세분해서 정확한 정책목표를 타킷팅한 일반농산어촌사업이나 취약지구 생활여건 개조사업, 중심지 활성화사업 등등 다양한 정책들이 수행되게 된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난 50년 동안 수행된 농촌개발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 일명 ‘농촌공간계획법’이 수립된다. 이는 지금까지의 농촌개발 개념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며 한국의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 된다.
가장 중요한 전환은 농촌개발사업에 ‘과정’의 개념이 도입된 점이다. ‘마을’은 생성, 발전, 쇠퇴의 과정 속에 있고 ‘농촌개발’은 단지 그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다름 아니기에 완결된 단일 사업의 관점이 아니라 흐름과 과정의 관점에서 농촌개발사업을 바라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수행된 단기적인 사업 기간과 협소한 시각으로 일정한 예산을 한정된 시간에 소진해서 물리적 건축물이라는 성과를 산출하는 기계적 작업으로서의 농촌개발은 멈출 때가 되었다는 자기 비판적 인식이 전제된다. 이제 농촌개발은 ‘과정’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의 기반인 농촌공동체가 갖는 지리적 공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괄하는 인문사회학적, 역사적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라는 인식이 전제될 것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법령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공간’을 농촌개발의 핵심 개념으로 세운 점이다. 지금까지의 농촌개발은 ‘점’개발적 측면이 강했다. 단일한 건축물이 완결된 단일 사업의 결과물이 되는 방식의 농촌개발은 중복개발과 난개발, 저개발이 혼재하는 공간적 부조화와 난맥상을 초래했다. 한정된 자원을 투여해 인간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개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3차원적 공간개념에 기반해 삶터, 일터, 쉼터로서의농촌다움을북돋울정책적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었고 ‘농촌공간계획법’은 그와 같은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입법된 것이다. 농촌공간계획법이 시행되면 입체적 ‘공간’에 대한 인식과 ‘과정’이라는 관점에서장기적계획과 3차원적공간개념에기반한농촌공간재생프로젝트가시행될예정이다. 농촌개발 영역에서 괄목상대할만한변화발전이아닐 수없다.
그렇다고 우리 앞에 보랏빛 미래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개발’의개념은변화발전을거듭해 왔지만, 정책이바뀌어도현장에서는바뀐 게아무것도없다고느끼는경우가많았다. ‘과정’으로서의 농촌개발, 3차원적 ‘공간’개념의 도입이라는 구상이 법령에 머물고 현장에서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정책의 현장 적용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현장의 요구에 맞지 않는 법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농촌공간계획법에 따른 시행령, 시행규칙 등에 법의 취지를 살리는 현장의 요구를 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경로의존성 때문에 정책의 의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걷던길이편하고해오던방식이익숙하다. 그것은우리 인간의본성에가깝다. 그러면어떻게경로의존성에서탈피하고농촌공간 재생의취지를살릴정책수행이가능하도록할까?
손쉬운답을구할 순없지만먼저 내외부 인적 자원을 폭넓게 포괄하면서 주민주도성을 견지하는 사업 설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적 자원이 빈약한 마을 현실에서 전적으로 마을주민에게 결정권과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이유로 행정이나 외부 전문가가 전적인 사업 졀정권을 가지는 것은 농촌개발사업 취지의 절반을 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주민과 중간지원조직, 행정 등 다양한 주체가 어우러져 미래를 도모하는 환상의 꼴라보를 만드는 것이 농촌개발 사업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과정이 마을 주민역량의 향상으로 귀속되고 새로운 인적 자원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밑바탕으로 폭넓게 정책의유연성을확보할 필요가 있다. 정책의유연성은아무리강조해도지나치지않다. 사업 현장의 요구를 행정의 틀에 끼워 맞추거나 요식을 위해 사업 목적을 훼손하는 걸 막아야 한다. 늘공직자의직권남용과주민의이기심과편의주의등에 의해정책목적이훼손될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정책 유연성은 사라지고 세세한사업지침까지강제하고있는 게사실이다. 그러다 보니실제주민은할 일이많지 않다. 고민도그렇게필요하지않고 소위 성공사례를 따라 하기에 바쁘고 결과적으로 판박이 사업을 양산해왔다. 사업의목적에부합하는사업의영역을최대한열어놓아야마을사람들은고민하기시작하고고민이많아야좋은생각이나올수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촌개발의개념을 획기적으로확장하기위한시도가필요하다. 이런 조건이 충족될 때 좀 더정책의취지를살리는모험적이고진취적인사업수행이현장에서가능하지않을까생각된다. 지금까지마을개발의개념이확장되어온것은사실이다. 점 개발에서면 개발, 이제는 3차원적공간개념까지도달했다. 하지만아직은부족하다. 의료, 교육, 에너지자립, 사회적자본 형성그리고무엇보다주민의삶을담보할경제, 곧농업기반조차지역개발의큰틀 속에서함께고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주민의삶전체가농촌개발개념 속에녹아내야 한다. 농촌의 폐쇄적틀을넘어대한민국의조화로운발전과기후위기에빠진전 지구적생태환경미션까지도농촌개발 개념 속에녹아 들여야 한다.농촌개발은그냥농촌의삶전체와관련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업의목적과성과’에대한가치기준, 평가 기준을바꾸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실패 사례를 양산하는 기존의 평가 기준을 버리고 ‘실패’조차 마을의 잠재적 자산이 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소득 증대나 방문자 증가 등의 기준을 앞세우다 보니 늘 농촌개발사업을 낭비성 예산으로 공격받게 된다. 오히려 내외적 협력과 학습, 그리고 새로운 시도의 경험을 자산으로 하는 사업 수혜 주민의 삶의 질 향상, 행복도 증가, 사회에 대한 공익적 기여가 기준이 된다면 사업도 바뀌고 농촌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붕괴될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농어촌은 붕괴하고 있다. 공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지만, 농촌개발정책의 실패를 그 원인으로 말하기엔 산업화의 파고가 너무 높았다. 여전히 농촌개발정책은 유효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농촌의 대안 모델 제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점에서 ‘농촌공간계획법’에 따른 농촌공간 재구조화와 재생 노력은 우리 농촌의 삶을 개선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다. 농촌 설계는 국가 설계의 하부 단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의 지속가능성이 확보된 국가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농촌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래저래 농촌 주민은 참 짐이 무겁다.
참 오랜만에 봉화왔다. 마당은 심술궂은 여신이 지켜보는 와중에 산마늘과 부추와 상사화가 낙엽을 밀치고 잎을 틔웠다. 앞마당 산수유는 꽃망울을 가득 달았고 곧 자지르지게 꽃을 피울 준비가 끝났다. 방안은 온갖 신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겨울 한파로 부터 화분들을 지켜내지 못했고 아끼던 커피나무와 올리브 나무까지 유명을 달리했다.
오랜만에 동네돌며 인사드렸지만 못뵌 분들이 더 많다. 지난해 유달리 세상을 떠난 이웃이 많았고 그렇게 그리움은 늘고 나는 나이를 더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님들도 그동안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런 이웃 형님들이 내 걱정을 해 주신다.
몸 편하제? 나주 생할은 어떻노? 식구들은 건강하제 ? 우예 자네 흰머리가 더 늘었다. 인자 얼마나 지났노? 한 이년 됐제? 끝나면 농사지로 오나? 밥벌어묵을만 하면 농사지로 오지마라.
행님 월급쟁이도 힘드니더. 저는 농사가 났니더. 벌써 절반지났고 일년 남았니더. 우야든동 행님 형수님 건강하이소. 돌아와서 오래오래 같이 농사짓고 사시더.
동네한바퀴 도니 날이 저물고 22년5월에 멈춘 달력을 갈고 먼지 앉은 집안 청소를 하니 밤이 깊었다. 내일은 누구를 만나고 몇시에 나주로 츌발할까. 길이 멀고 여정은 짧으니 보고싶은 사람들은 다 남겨두고 비나리 바람만 한 가슴 가득 품고 집을 떠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돌아 올 마을이 있고 집이 있고 일할 밭이 있고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이웃이 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나주로 이사오면서 데려온 유일한 식물은 자카란다뿐이다. 자카란다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네팔 여행의 순간을 환기시켜주는 고마운 놈이다. 얼덜결에 따라와 외롭게 버티던 자카란다에게 친구가 생겼다. 바로 요놈 아보카토나무다. 지난 가을 마트에서 사서 먹고 남은 씨앗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카란다 화분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오랜만에 커튼을 올리고 무사히 겨울을 이긴 자카란다에게 봄볕을 선물하던 날 가냘픈 줄기 하나가 발견되었다. 혹시 자카란다가 새로운 줄기를 키운걸까 흙을 만져 보니 지난 겨울 심어둔 아보가토가 싹을 틔우고 자라난 것이 아닌가. 화분을 하나 더 사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줘야겠지만 우선은 자카란다와 아보가토가 사이좋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참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은 강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여행지가 꽃이나 나무로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15여년전 경상북도로 부터 지역개발분야 상을 받고 부상으로 뉴질랜드 연수를 갖을 때 봤던 일명 뉴질랜드 크리스마스 나무(포후투카와)가 오랬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여정의 추억을 상기했다. 그리고 6년전 카트만두 거리에서 만난 '자카란다'와 안나푸르나 트레킹중 만난 '랄리구라스'가 그때의 추억을 대표했다면 이번 네팔 출장은 룸비니의 '인도비단나무'로 기억될 것 같다. 꽃이나 나무로 남은 여행의 잔상은 음식이나 유적보다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더 좋다.
집을 떠나 낯선 세상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이 여행이든 출장이든 상관없이 마음 설레는 일이다. 이번 네팔 출장이 그랬다. 내 인생에서 대한민국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네팔은 2011년 말에 들어가 한 달, 2016년 말에 들어가 두 달 해서 꼭 90일을 보낸 나라다. 늘 다시 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는데 정말 기대하지 않은 일을 맡게 되고 그로 인한 출장이 잡힌 것이다. 꽉 짜인 일정의 7박 9일 출장이지만 중간에 네팔 공휴일인 토요일이 한번 끼어 있어 그나마 갈증을 덜 수 있지 않을까는 기대를 품고 길을 나섰다.
2월 20일 새벽 5시 잔듯만 듯 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분주히 움직였다. 씻고 챙기고 집을 나선 것이 6시 30분, 집앞에 도착한 일행과 한 차로 내달려 여유있는 시간에 인천공항 제2터미날에 도착했다.인천공항을 6년 전 마지막 방문했고 제2터미날은 그 뒤 개장했으니 나의 첫 방문이었다.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을 안고 청사안을 두리번 거리다 먼저 도착한 이번 프로젝트를 수행할 사업단의 일행과 조우했다. 대면 첫 수인사를 나누고 체크인과 보딩을 완료하고 좌석에 앉으니 이제 진짜 네팔로 가는구나 실감이 느껴졌다. 비행은 순조로웠고 안락했다. 멀리 안면도가 보이고 목포와 제주도인근 상공을 지날 때까지 창가에 붙어 바같 풍경에 눈을 떼지 않았다. 하나의 미물로 태어나 이렇게 구름위 하늘을 날면서 지구의 표면에 붙어사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이룩한 문명을 내려다보는 호사에 가슴벅찼다.
네팔 상공에 접어들고 멀리 히말라야 설산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6년만의 네팔은 또 얼마나 변해있을까? 짧은 활주로 탓인듯 거친 착륙 뒤에 지루한 출국수속이 이어지고 핸드폰 유심칩을 사고 장착하는데 또 많은 시간이 흐른뒤 공항 밖으로 벗어났다. 기다리던 차에 탑승하고 혼잡한 공항을 벗어나 어둠이 내린 카트만두 거리를 질주했다. 거리는 어둡고 혼잡했지만 창밖 모든 것이 낯익은 듯 정겹게 다가왔다. 길을 지나는 사람마다 창을 내리고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숙소 에베레스트 호텔에 짐을 풀고 길 건너 로컬 식당인 Thakali Sekuwa Bhansa 에서 저녁과 맥주로 늦은 첫 저녁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네팔 고르카맥주가 싱그러웠다.호텔로 돌아와 다음날 있을 일정을 체크하고 업무를 숙지했다.
21일 아침부터 분주했다. 27일 출국날을 빼고 6일간의 일정이 있지만 중간에 공휴일인 토요일이 있어 총 5일이 업무 가능일인데 사실 21일도 무슨 기념일이라 네팔 관공서가 모두 쉬었다. 다행히 한국 대사관은 업무를 해서 21일 한국 대사관 방문으로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22일은 네팔 수자원관개국 방문과 업무협의를 하고, 23~4일은 사업단이 세부 실무협의를 하는 사이 나는 카트만두서 소형비행기로 35분 거리의 Bairahawa시의 Sunwal 지역과 Susta 지역을 방문했다. 지역개발 원조사업이 수행된 지역을 방문해 주민 등 관계자를 만나 향후 우리 공사의 네팔 지역개발 ODA 사업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고 방향성을 모색했다. 24일 늦게 카트만두로 돌아와 네팔 휴무일인 25일 토요일은 카트만두 인근으로 가볍게 당일 하이킹을 떠났다. 시바푸리 국립공원 하이킹은 해발 2732m인 정점(그냥 언덕의 정점이다. apex of Sivapuri Hill 이라고 부른다)을 향해 해발 1350m에서 시작해서 쉼없이 계단을 오르는 길이었다. 무려 3시간 넘어 1400여 미터를 계단으로 오르고 다시 두어시간 이상 걸려 내려오는 그야말로 지옥의 코스였다. 올라가면서 이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26일 마지막 업무일정에 다행히 수자원에너지국 차관과의 면담일정이 잡혀 정부청사를 들러 환대를 받고 업무 협의를 마칠 수 있었다. 이어서 차로 두어시간 거리인 둘리켈을 지나 Kavre에 있는 농수로 시설을 수자원국 국장과 아시아개발은행 네팔 책임자 등을 대동해 답사를 다녀왔다. 늦은 시간 카트만두로 복귀해 같이 했던 일행들과 마지막 만찬을 Nepali Chulo 라는 Newari족 전통 식당에서 성대히 치루는 것으로 업무 일정을 마무리했다. 27일은 출국에 앞서 마지막으로 스와얌부사원을 들른뒤 간단한 쇼핑으로 마무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어서 아쉬웠지만 또 출장이어서 여행에선 경험하지 못했을 다양한 세상을 맛보고 네팔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안고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 네팔 여정은 상당히 긴 여행이 되지않을까는 강한 예감을 안고 귀국했다.
개인적 기록을 위해 업무를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정리했다.
1. 네팔 대사관 및 코이카 네팔과의 면담
먼저 코이카 측은 KRC가 네팔 ODA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지역개발사업 관련한 농어촌공사의 전문성을 기대하며 코이카 주도의 지역개발 사업 현장 방문을 권장했다. 대사는 지역개발 ODA 사업은 앞으로도 계획되어 있지만 타 국가에서의 경험만 가지고 지역개발사업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보고 KRC의 네팔 지역개발 사업 참여시 현지 인맥 등이 없는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건지 관심을 보였다. 지금까지 많은 ODA사업의 경우 상주 사무실 없이 한두번 방문으로 현지 에이젼시에 전적으로 사업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거나 관계 형성에 성과가 없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했다. 새겨 들은 조언이었다. 그리고 농천진흥청이 KOPIA( KOrea Partnership for Innovation of Agriculture/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 네팔 지사를 준비 중이고 곧 개설할 것을 알려졌는데 이와 KRC가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협력할지 큰 청사진이 필요해 보였다.(kopia는 현제 아시아 8개국 등 22나라에 진출) 사업 수행과정에서 협력과 조언을 당부하고 예정시간을 넘긴 감담회를 마무리했다.
2. 네팔 수자원국 국장 및 차관 면담
수자원관개국(Department of Water Resource and Irrigation)에 들러 수자원국장(Susheel Chandra Acharya)과 부국장단과 일차 환담을 하고, 예정에 없던 차관(Gopal Prasad Sigdel)과의 면담을(장관 유고로 실제로 장관급) 추가로 진행하면서 전체적인 사업 윤곽에 합의하고 이 사업을 넘어 더 발전적인 사업 확대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번 사업에 기초에서 네팔 전역의 농업용수 개발과 관리 시스템을 갖춰나갈 전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환담 시 모두 우호적이었고, 이 사업이 가지는 향후 전망 관련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시그델 차관의 경우 이전 한국 기술연수를 한달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한국의 기술과 경험을 높이사며 네팔에 적용해 줄것에 대해 기대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적은 예산(35만불)은 초기 사업에 불과하고 장기 청사진(통합물관리시스템)을 제시하는 수준의 사업만 가능한데 사업에 대한 기대에 조금의 불일치가 확인되었다. 이번 사업은 (1)네팔 수자원 관리 시스템 분석,점검 및 보완, (2) 시범지구 선정후 시스템 장착, 가동 (3) 인력육성 연수 실시 정도이나 (3)에 대한 요구가 과도해 (2)를 축소하거나 (3)을 중심으로 실행하는 것을 두고 논의를 더 해야하는 상황에 빠졌다. ADB 도 현 논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있어, 협의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하나 예산 증액을 통한 네팔 수자원국 요청의 전면적 실행은 그 예산을 우리나라가 ADB에 공여하는 예산의 증액을 뜻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3월중 실무 논의를 마무리 할 것을 합의 하고, 사업 추진에 따라 국장님 등 관계자가 한국으로 기술연수를 오게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3. 지역개발ODA현장방문
이틀에 거쳐 네팔 남부 Lumbini주 Nawalparasi현의 Sunwal9지구(스와티농업협동조합 농기계고용센타)와 5지구(여성일자리 수공예공장인 Namuna여성기업과 우유집유 및 유통 조합인 자나세와협동조합),그리고 Susta2지구(종자생산협동조합) 등 방문하여 협동조합 관계자와 주민대표 그리고 지자체장(면장?)과 환담하고 현장을 견학했다. 사업을 수행하고 우리 견학을 안내해준 코이카와 굿네이버스 그리고 현지 에이젼시인 SAHAMATI와 GNI 덕분에 소중한 지역개발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가는 곳마다 스무명 이상의 주민이 나와 환대하고 환담에 참석해 주시어 사업을 이해하고 다음 사업을 구상하는데 큰 영감과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각가의 현장마다 성과가 있고 고유한 문제가 있고 향후 추가되어야할 과제가 보였다.
조합원, 주민 등과의 환담은 지원사업의 효과, 사업 집행 과정에서 개선점, 현 운영상황, 향후 추가 사업 방향 등에 대한 질의와 응답으로 진행되었는데, 전반적으로 코이카와 굿네이버스에 대한 높은 신뢰감과 감사 의지를 보였고 한국의 추가적인 지원에 대한 강한 갈망을 표명했다.
대략적으로 살펴본 바로는 현제까지는 (조합설립 2년)큰 탈없이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 먼저 적은 자본금, 짧은 협동조합 운영 경험, 50%에 미치는 낮은 주민참여도는 큰 위험요소로 인식되었다. 역시 대화에서 지금 처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현재는 농기계 작업대행이나 임대, 집유와 판매, 학교등 가방 납품, 종자 생산 및 판매, 감자공동생산 및 판매(인도) 등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수명이 다한 농기계의 대체 능력은 확인되지 못했고, 젖소의 낮은 생산성, 가방 등 수공예품의 판로 개척 및 디자인 개발의 어려움, 공동생산한 감자 등의 저장 시설의 미비로 수확기 저가 판매 문제, 종자의 선별포장기를 설비하지 못해 지역내 판매만 하고 있어 판로한계 등 하나도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다. 간략히 정리하면 현제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그 틀내에서 공동체 사업을 진행하는 초기 단계로 사업 성공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시기로 판단되었다.아직은 자립 기반이 약하고 성공가능성에 대한 확신도 부족한 상황으로 향후 지속적인 지원이 없으면 존속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들었다. 새로운 사업 지구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사업 성과를 이어 결실을 최대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지원도 중요해 보였다.
이번 출장은 네팔 수자원정보화사업이라는 ODA사업 수행을 위한 걸음이었지만 추가적으로 KRC의 네팔 지역개발 ODA 진출을위한 사전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사관과 코이카 그리고 굿네이버스의 친절한 조언과 진심을 다한 안내로 KRC의 향후 지역개발 사업 네팔 진출을 위해 필요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당장 진행중인 수자원 정보화 관련 사업은 마지막 단계의 합의 과정남 남겨준체 순항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처음 시도할 네팔 농촌개발 공적원조사업은 그 첫 단추가 쉽지 않게 느껴졌다. 일단은 다른 기관에 의해 진행된 기존 사업에 대한 분석 평가를 통해 그 성과를 딛고 새로운 사업을 개척해 나가야할 형편이다. 단기적으로 단일사업을 단속적으로 시행하는 방식으로는 인적 관계망을 구축하거나 사업 노하우를 쌓기 어려운 만치 지금 추진중인 수자원정보화 사업에 추가해 농업 기반구축관련 사업으로 범주를 확대하고 거기다가 동시에 지역개발 사업을 추가해 현지 상설 사무소 설치가 필요한 수준으로 사업 규모를 키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미얀마 등 여러나라의 농촌개발 사업의 경험과 성과가 없진 않지만 네팔의 특수성에 대한 사전 이해가 좀더 필요하고 이에 기반해 사업아이템과 사업추진 방식을 구축해 나갈 필요가 더 절실해 보였다. 단일 사업이 네팔의 국가 발전 전략과 잘 맞아떨어져 타 사업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네팔 농업의 현대화와 농민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잔존하고 지역사회 토호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이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게 적정한 사업 모델을 찾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네팔은 ‘가장 먼저 웃고’ 좀처럼 화내지 않는 선한 눈빛을 가진 착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동시에 네팔은 세계 양대 시장인 중국과 인도사이에 위치해 수천년 이어온 무역의 통로면서 풍부한 수자원과 자연적 자원을 보유하고 100개가 넘는 민족의 풍부한 역사 문화적 자산을 보유한 발전 잠재력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나라중의 하나다. 우리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지 얼마되지 않았듯이 네팔의 미래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우리의 원조가 인류 공동번영에 이바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잠재적 경제 동반자의 육성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정부의 공적원조 확대 방침도 확고한 만치 앞으로 ODA사업이 획기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여기에 힘입어 네팔 농촌개발 ODA 사업을 KRC가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는데 나름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번 출장 전 과정에서 같이 한 모든 분들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먼저 동행한 KRC직원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동행 한 두분은 새벽까지 전날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날 회합을 위해 준비하다보니 제대로 카트만두 구경도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번 사업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업단의 두분과 자문 교수님의 열정과 노고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네팔 대사관과 코이카 그리고 굿네이버스 관계자분들 등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높은 위상이 이렇게 자기영역에서 열정을 받쳐 최선을 다하신 분들 덕분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