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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보낸 첫 삼일은 휴식의 시간이었다면 마지막 4일은 지난 두달의 여행을 되돌아보고 기억의 창고 한켠에 차곡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타멜거리를 또박또박 걸으며 곧 떠나게될 네팔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추스리고 귀국한뒤 새로 시작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마치고 먼지투성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뒤 가벼운 몸살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하루하루 아무 망설임없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지난 몇일을 알차고 신나게 보냈다. 숙소와 타멜 거리를 오가고 스와얌부나트와 더바르광장, 그리고 아산바자르의 골목을 누볐다. 타멜 최고의 슈퍼마켓인 Shop Right Supermarket과 Pilgrims Book house도 들락날락거리며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Pilgrims Book house는 서점이지만 동시에 머플러나 직물제품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갖추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체류한지 몇일이 지나자 나는 골목 구멍가게에서 야채를 사고 내가 필요한 물품을 어디를 가야 구할 수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카트만두 시민이 다 되어감을 느꼈다. 

22일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빈둥거렸다. 일단 몸살기를 가라앉힌뒤 움직이는 것이 낮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일행들과 같이 숙소를 나서서 타멜을 거쳐 다시 스몰스타를 찾았다. 뚱바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남은 네팔에서의 시간이 아까워서 저녁시간을 숙소에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한 표정의 종업원이 날라다 주는 안주와 뚱바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술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지쳐있었다. 뚱바 한잔에 복통과 현기증에 오한까지 왔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러 숙소로 돌아왔지만 몸살은 더 심해져있었다. 이날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이번 두달의 네팔 여행중에 꼭 카트만두에서 탈이 났다. 여행 초기에 식중독으로 고생하더니 여행 막바지에 다시 심한 몸살까지 앓게 되었다. 카트만두 먼지에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산체질인 것 같았다. 몸이 무너지니 한국이 그리워졌다. 이제 돌아가도 미련이 없을 만치 걷고 먹고, 만나고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몸살에 지친 몸을 이끌고 타멜로 나섰다. 네팔 고유 브랜드라는 가게에서 티도 사고 재래식 옷가게에서 네팔리 스타일의 편안한 일상복도 한벌 샀다. 발길을 옮겨 타멜의 남쪽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데 군악대의 연주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를 찾아 도착한 곳에선 거리의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부유한 집안의 혼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으로 장식한 차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나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로 다가왔다. 여행이 끝나감에 따라 몸도 지치고 나도 모르게 조금은 우울해지기 시작했는데 악단의 연주를 보고 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갑자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다 빠져 나가 버린 기운이 다시 돌아오고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훈풍에 구름이 가쉬듯 나는 두달여정을 3일 남겨두고 내 자신에게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져옴을 느꼈다. 조금은 낡은 제복을 입은 단원들의 진지하고 신명이 넘치는 연주는 엉뚱하게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초라할지언정 진지함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신나게 살자'고 읊조리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 산책을 끝내고 5년전 추억이 깃든 꿈의 정원을 찾았다. [Garden of Dream]은 타멜쵸크에서 나라얀히티 왕궁박물관쪽으로 가는 길 왼편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오래전 개인이 꾸민 저택과 정원이 우여곡절 끝에 공공의 소유가 되고 다시 시민의 휴식처로 개방된 유료 정원이 되었다. 역시 산책중인 외국인 관광객은 몇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이트중인 네팔리 청춘들이었다. 그래도 화구를 펼쳐놓고 작업중인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멋졌다. 우리는 정원 산책 끝에 내부에서 운영중인 레스트랑의 가장 좋은 야외 테이블을 차지했고 아내는 펜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카트만두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카트만두의 소음과 먼지와 단절된 이색적인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아내와 나는 지난 여정의 추억을 음미했다. 이만치면 되었다는 안도감 혹은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으면 마르샹디와 깔리깐다키 줄기가 어른거리고 설산에서 피어나는 흰구름처럼 뭉개뭉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모든 걸 버리고 줄여야될 나이에 자꾸 그리움이 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내일이면 라오스로 떠날 팟상을 위한 삼겹살파티가 열렸다. 네팔을 같이 사랑하고 같은 숙소에 지내는 인연을 나눈 분들과 함께 자리를 했지만 나는 술한잔에 나가 떨어져 룸으로 올라와 침대로 기어들었다. 낮에 살아났던 몸이 밤이 되자 다시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게 다음 날이 시바신의 탄신일로 시바라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룸의 창문을 흔드는 축포소리와  상공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가 카트만두의 밤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2월 24일 시바라티축제가 있는날 팟상은 라오스로, 나의 일행 M과 D는 한국으로 떠났다. 갑자기 마야거르추에 정적이 감돌았다. 원래 여행은 이렇게 좀 쓸쓸해야하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닥친 공복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바라티축제가 열리는 파슈파티나트로 가기 위해 숙소를 박차고 나왔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한무리의 아이들이 줄로 길을 막고 우리가 지나가자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당황했는데 이날 하루 종일 걷다보니 이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시바 탄신일 날에만 허용되는 일종의 전래놀이로 아이들이 길을 막고 어른들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일년 365일중 이날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골목이 우리들의 것임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골목을 지키는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오토바이든 택시든 마구잡이로 단속(!)했고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져주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는 우리도 가게에 들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잔돈을 한주먹 바꾸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큰길로 나서니 공휴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쉽게 택시를 잡고 축제가 열리는 퍄슈파니나트로 갈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비싼 흥정끝에 택시는 곡예하듯 대로를 피해 골목과 골목을 이어달렸지만 끝내 파슈파티나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적지의 절반을 겨우 넘겨 군경에 의해 교통은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고 파슈파티나트로 향하는 모든 길은 차없는 거리로 축제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택시비는 출발전에 흥정한 데로 다 받아갔고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네팔리 무리에 휩쓸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하늘에는 헬기들이 축하 현수막을 늘어트리고 비행 중이고 파슈파티나트가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불어났다. 역시나 경찰들의 거친 단속이 눈쌀을 찌푸리게 했지만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도 전국에서 다 모여든 것처럼 엄청난 수로 늘어났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네팔은 물론 멀리 인도서까지 모여들었다는 사두들의 무리도 보이기 시작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순례객들의 차림을 보니 그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저절로 느껴졌다. 많은 순례객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한듯 집채만한 이불보따리를 길가에 쌓아두고 있었다. 시바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위해 노숙도 마다않고 먼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날 비힌두교도에게는 파슈파티나트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파슈파티나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까지만 네팔리 무리에 섞여 축제를 즐기고 되돌아섰다. 축제장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걸어 그나마 인파가 적은 가게를 찾아 네팔식 스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걷다보니 카트만두 최초의 대형 수퍼마켓이라는 Bhat Bhateni에 들러게 되었다. 구경도 하고 장을 보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식욕이 있고 출국일이 좀 더 남았다면 바구니 가득 장을 봐서 맛난 요리를 싣컷 해 먹고 싶었지만 조금 샀던 식재료도 결국 다 못해먹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네팔에서의 마지막 장을 보고 숙소에서 하루의 남은 시간을 조리와 식사 그리고 휴식으로 보내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 귀국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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