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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적 진화

류준화_박자현_방인희展   2010_0730 ▶ 2010_0830 / 월요일 휴관

부대행사 오프닝 및 작가와의 대화_2010_0806_금요일_05:00pm

기획_갤러리 폼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폼_Gallery Form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1520 롯데갤러리움 E동 309호 Tel. +82.51.747.5301 www.galleryform.com

능동적 진화 ● 전, 근대적인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여성 작가들은 작가로서 지위를 획득하기에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의 존재감과 독창성의 문제는 남성들이 창조해 낸 범주 내에서 재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다는 편견과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열악한 여성작가 지위는 사회의 현대화와 발전적 다양화와 맞물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힘에 의해 사회현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자신의 입지를 진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여성 작가들의 입지에 대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진화는 역사의 주체로서 자발적인 인식과 이성의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자리매김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내적으로도 통일된 존재는 자신의 행위와 작품성을 책임지는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능동적 진화 』는 류준화, 박자현, 방인희 3명의 여성작가를 통해 여성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실존적 흔적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전시이다. 즉, 작가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담론의 주제로 제시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

류준화_물을찾아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116.7cm_2010
류준화_물에서놀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45×145cm_2010
류준화_물에서쉬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45×145cm_2010

류준화 작가의 삼등신 소녀는 바리데기의 수호신과 같은 내공 깊은 소녀 만신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바리데기와 같은 신화적 성격은 개인적인 개념에서 확대되어 집단적으로 추앙을 받는 영웅으로서 정체성과 이상적 존립의 위치를 드러내는 이중적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삼등신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차용하고 있는 소재로 해석할 수 있다.

박자현_일상인_종이에 펜_105×76cm_2009
박자현_일상인_종이에 펜_160×126cm_2009

무수한 점들의 향연은 박자현 작가의 자기방어기제로서 구멍을(점을) 메우는(찍는) 반복적인 행위방식에서 사회 심리학적인 부분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 대상(주변인물)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여 비정규직 노동자의 슬픈 모습 같은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현상을 작가 자신의 의식 속으로 전환시켜 사회적, 감정적 상호작용을 시도하고 있다.

방인희_Mom's dress_아크릴미디엄 캐스팅 종이에 연필, 투명 오일바_140×183cm_2010

자신의 경험이 주는 감수성에서 시작된 '옷'을 주제로 작업하는 방인희 작가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존재감과 옷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옷이란 인간의 가치를 상품적으로 인식할 수 대상이기도 하다. 작품에 중첩된 옷의 이미지는 작가 자신의 일상적인 삶과 주변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생활을 인식하는 도구이다. 이는 통속적이고 제도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작품성으로 작가의 실존적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의미로 치환되어 있다.

방인희_존재-모음들 self Portrait_-Ⅱ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 색연필_186×112cm_2010
방인희_The dress 08-1_-Ⅱ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 콜라그래프_186×112cm_2008

『능동적 진화』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여성성 이라는 평범한 원리로 남성성과 연결하여 차별적이고 공격성으로 이해되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여성성이라는 의미는 작가의 생물학적 입장에서 부여되어진 필연성일 뿐 작품의 의미를 구축해 내는 인과관계로 해석되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작가, 남성작가의 구분을 떠나 사회 구조 속에서 작가적인 입지를 공유하고 있다. 단지 여성 작가의 생물학적인 위치만을 부각시켜 제도의 산물로서가 아닌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장식적으로 해석되어지는 여성성의 문제를 스스로가 발견하고 의미화 시키고 있을 뿐이다. 편협한 이해가 아닌 사회현상과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작가들 모습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현상인 것이다. 능동적인 진화는 우리 시대 여성 작가들을 통해 다양한 사회현상과 맞물려 능동적으로 진화 발전하는 진정한 작가의 실존적 물음 즉 '작가적 정체성'을 담론화 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 김경선

Vol.20100730a | 능동적 진화-류준화_박자현_방인희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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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명적이다'! 
'왜?'
'여자니깐!'
여자는 '아름다워서, 위험해서, 위대해서' 치명적이다.
누구에게?
다름아닌 남성권력에게!!
 
남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가 시작되자 모든 권력은 남성성과 합체한다.
교회와 군주, 왕실과 문중은 남성권력의 화신이다.
여자는 신성한 권력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위험세력이다.
모든 여자는 남성을 유혹해 권력의 비밀을 탐지해내는 데릴라거나
경국지색의 양귀비거나 요녀 장희빈이다. 
지배자인 남성권력에게 여성과 남성이 우열이 아닌 상호 의존적 관계임을 주장하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선지적 여성은 바로 '마녀'였다.
그리고 간혹 남성권력에 균열을 주는 전위적 여성이 출몰했지만
가차없이 색출되었고 무자비하게 처단당했다.
'왜? '
'여자니깐!!'

그렇게 남성권력은 탕녀와 마녀, 요조 숙녀와 열녀를 만들었고
나혜석을 처단하고 신사임당을 옹립했다.

인류는 자신의 어머니가 여성이고, 자신의 딸이 또한 여성임을 자각하는데 수천년의 세월을 필요로했다. 여자가 여류작가가 되고 다시 여성작가가 되는데도 만만치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문명의 진보는 여성과 남성의 상호의존성과 동등성은 증명했고, 그리고 드디어 여성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여성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마녀사냥꾼은 자본의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위대한 마녀사냥꾼은  여성의 상품화라는 신 병기로 무장한채 숲을 나왔고 순식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자본화된 남성권력은 실효성을 잃은 마녀를 대신해 비쥬얼 섹시스타를 앞세우며 지구의 절반인 여성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에 여자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섹시한 상품이길 거부하는 여성은 이제 찌질이거나, 루즈다. 성형과 다이어트는 여성이 인간이 되기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섹시스타는 외친다.
'섹시 천국! 불신 지옥!' 

지배권력에 대한 반역의 음모는 권력의 바같에 웅크린 바로 그 찌질이와 루즈들 사이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혁명은 남성권력의 바같에서 앙칼진 목소리로 일어난다. 여성은 남성지배사회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주모자들이다. 그 반란녀들이 예술이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들은 지배권력의 바닥을 보았고 예술이란 무기를 벼려 지배자 남성의 등에 칼이 아니라 꽃을 꽂는다. 예술이라는 신병기는 꽃잎처럼 부드러워 적을 상처내지 않은채 굴복시키고, 거위털보다 부드러워 뭇생명이 깃든다.  차가운 금속성 칼날을 삭히는 촉촉함과 생명의 온기를 가져 인프루앤자보다도 빠른 전염성을 가진 그녀들의 무기는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그래서 여성예술가는 모두 전위이고 혁명가다.



그런 시대, 그런 세상에서 필자 제미란은 한국의 대표적 여성예술가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녀들과 포옹하고, 대화하고, 차와 밥을 나누며 그녀들의 예술세계를 헤집고, 느끼고, 참여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온전히 한권의 책안에 담아냈다.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14명의 여성 작가를 담고있는 [나는 치명적이다-경계를 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예술]은 여성적 삶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영위되고 예술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성작가론이자 동시에 여성예술론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작가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동시에 여성작가인 나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속에 온전히 녹여넣고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창조하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필자 제미란은 사실 또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14명의 여성예술가의 아뜨리에를 찾아 나선 것은 단지 그들 작가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그들의 예술세계를 향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리움이 된 그림을 찾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기 위한 순례의 길목에서 단지 14명의 여성예술가를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값싼 기획출판물과는 달리 [치명적이다]는 필자 제미란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예술적 탐색과정, 그리고 그녀들과의 맞남으로 응축된 자신의 삶의 기록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고뇌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다]는 결국 미술가 제미란의 예술론이기도 하다.

제미란이 만난 14명의 여성작가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는 끈은 여성성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성을 예술로 구현해낸 작가가 있는가하면 여성주의적 자각을 작업으로 승화시킨 작가도 있다. 그것을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로 나누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그녀들은 회화와 설치, 행위예술과 공예를 아우른다.

필자의 입담과 필력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14명의 그녀들을 아우르는 여성미술의 고갱이를 대면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으면서도 그들 14명의 여성작가가 가진 공통분모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의 여성미술의 지평이 그만치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성미술이 미술의 한 파트가 아니라 미술전체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트렌드라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자가 초두에 던지 '공명(共鳴)'이라는 화두앞에 다시하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공명은 동일한 삶의 기반, 경험의 공유를 넘어 존재기반의 본질적인 동질성에 기반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적 현실에서 여성으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14명의 작가가 일으키는 공명의 사이클 어디쯤에 필자 제미란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끄트머리 어디쯤 미미한 구석에 독자인 나의 자리역시 가지고 싶다.
김원숙, 김은주, 김주연, 함연주, 유미옥, 윤석남, 윤희수, 류준화...... 제미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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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2C(봉화, 영양, 영월, 청송)라고 불리는 경북과 강원도의 지자체가 시군간 공동사업의 하나로 '외씨버선길'을 만든다. 주관을 (사) 경북북부연구원이란 곳에서 맡았고, 그 산하에 일종의 '사업단'을 지난 7월 1일자로 발족시켰단다. 이 사업과 관련하여 봉화군민의 한사람으로 지난 5월 제주 올레길 연수에 이어 이번 지리산둘레길 벤치마킹을 다녀왔다. 하지만 두번의 연수를 통해서도  안타깝게도 '외씨버선길'의 성공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두번의 연수를 통해서도 외씨버선길의 실체에 대해 별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구절에 나오는 '외씨버선'으로 BY2C를 대표하는 걷기길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과 이 지역의 문화적 자연적 자원을 통합한 '생태관광길'을 만든다는 것과 이미 일부 예산은 내려와 있고, 3년간 총 100억이 투자될 거라는 사실이 내가 아는 '외씨버선길'에 대한 전부다.

2009년 이웃과 떠난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의 마을길걷기

아직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드는 생각이지만  두번의 연수를 통해 만난 올레길과 둘레길의 사례와 '외씨버선길'은 거의 완전히 서로 대척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치를 찾아 길을 기획하고, 그 가치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가장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나가는 길이 올레길과 둘레길이라면 외씨버선길은 어쩌면 가장 개발주의적이고 토목주의적인 사업방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씨버선길'은 길의 실체보다 예산이 먼저 확보된 성과주의적이고  예산따먹기식 사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관과 관변단체가 토목주의적 사업 방식으로 추진하는  '걷기 길 만들기'는 사실 형용모순이다. '걷기길'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그와같은 토목주의,  개발만능주의의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이자 대안의 모색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몰각한 걷기길 만들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걷기길은 길의 원초적 폭력성을 극복하고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잇는 생명의 길, 순환의 길이다. 
 
올레길이나 둘레길은 단지 물리적 공간에 놓여있는 길이 아니다. 흙바닥위에 길이 놓이기 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더불어 나눌 가치가 확보되고,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정신의 길, 마음의 길이 먼저 형성되었다. 그와같은 과정없이 뜬금없이 '예산'만으로 만들어지는 길은 말이 '걷기길'이지 기존의 '도로'에 다르지 않다.  '외씨버선길' 만들기에 다리를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적 마인드로 접근할 경우 그 결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극적일 것이다.

그래서 '길의 가치, 길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주민의 승인과정이 있는가?' 는 물음은 길을 만드는 과정 끝까지 되풀이 해서 묻고 또 물어야하는 '주문'이다. 그 과정을 무시한 대표적 사업이 바로 MB의 4대강폭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4대강 사업의 비극적 종말을 예견한다.  외씨버선길은 그와 같은 오류을 피해야한다. 시작부터 잘못끼워진 단추라면 다시 풀어 처음부터 다시꿰거나 덜 궨 아랫단추부터라도 재대로 궤어야 한다. 안동의 퇴계예던길의 사례가 바로 지역주민과의 공감없는 사업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멀리보면,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나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이 천년넘어 이어지고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다리를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적 마인드로 '걷기길'을 만들어 봤자 끝내 실패하고 말 이유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걷기길은 순례길이고, 치료의 길이고, 화해와 소통의 길이다. 단순화하면 길은 문화고 가치다.

외씨버선길'의 앞날이 순탄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을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외씨버선길' 정신의 부재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정신이 무엇인지 제시하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버벅거릴 수 밖에 없겠지만 '올레주의' '지리산주의'라고 해도 좋을 그 나름의 독특한 가치가 있고 철학이 있다. 그런데 '외씨버선길'은 나름의 고유한 '정신'이나 '가치' 나아가 테마 자체가 없거나 너무나 미약하다. 조지훈이 인지도가 높은 시인이고, 승무가 그의 대표적인 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2% 부족함을 지울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외씨버선길' 만들기를 반대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걷기는 시대의 트랜드를 넘어 인간 삶의 필수행위의 하나로 자리잡을지 모른다. 따라서 '외씨버선길'이 단지 올레길이나 둘레길보다 늦게 시작해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어떻게 외씨버선길을 만들면 좋을까? 앞으로 마을길을 걸으며 수없이 곱씹고 고민해야할 것이다.
단지 현 사업단이 운영되는 3년의 사업기간이 사업의 완성이 아니라 외씨버선길의 초석을 닦는 기간이어야한다는 것과 더불어 '외씨버선길'을 만드는 과정이 단기적 프로젝트의 성공사례나 중안중부예산 따오기의 성공사례가 아니라 수백년을 이어질 명품길을 만든 사례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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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이튿날, 민박집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을 먹고,  담장넘어 석류꽃이 만발한 민박집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계획대로라면 매동마을을 먼저 방문해 마을위원장으로부터 마을 사업에 대해 듣고 매동마을에서 상황소류지까지 걸을 예정이었지만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일정을 바꾸었다. 먼저 출발지였던 인월로 돌아가 인월에서  비전마을 가는 길중 산길을 피하고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기를 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비옷으로 몸은 감쌌지만 무릎아래는 비에 젖고 무릎위는 땀에 젖어 길을 걷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퇴약볕을 모면하고 빗길을 걷는 것도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비때문에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머리까지 뒤집어 쓴 비옷을 때리는 빗소리에 사위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비를 뿌리는 구름이 지리산을 감아도는 풍경을 바라다보며 빗속의 농로를 걷은 기억은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처음에 망설였던 빗길을 걸으며 빗길을 걷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예정된 하루 일과를 무시하고 그냥 계속해서 길만 걸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걷기는 끝이 났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지리산길 벤치마킹인 연수다 보니 실제 길을 걷는 시간은 그리 넉넉할 수가 없었다. 두시간도 채 걷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인 매동마을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싣었다.

매동마을은 녹색체험마을로 운영되어 왔지만 마을 사업의 성과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최근에 들어 마을을 지나가는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 방문객과 민박손님, 그리고 각종 체험객이 부쩍 늘어난 대표적인 마을이라고 했다. 매동마을을 방문한 이유는  걷기 길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 길과 마을의 건강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진천시키기위해서였다.    


마을사업이 활발한 전국의 이런저런 마을들을 많이 방문해 봤지만 잘되는 마을의 공통점 중 하나는 좋은 마을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동마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영오 추진위원장은 과장없이 마을 사업의 과정과 현시상을 낱낱히 말씀해 주셨다. 주민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인한 갈등, 체험프로그램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진정한 마을활성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과감없이 털어놓으시고, 우리 일행과 격의 없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는 마을 지도자를 뵙기만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오셨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길을 가야만할까하는 생각에 그분들의 선택앞에 숙연해 지기 때문이다.

이영오 매동마을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마을 사업이 기반하고 있는 마을의 공동체성이 과연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시대에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성의 성격이나 형태가 무엇인지, 낡은 공동체성이 과거지향적인 향수로 포장되어 마을사업의 토대로 삼기 때문에 현제 마을사업들이 지지부진하고 적지않은 마을에 분란을 일으키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정답없는 토의를 계속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이날 3번째 프로그램이 진행된 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타로 향했다


신현주 인월안내센타장님과 실무자 한분이 지리산길의 구축과 운영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그리고 질의 응답을시간을 가졌다. 이분들과의 토의를 통해서도 제주 올레길에서 느꼈던 똑같은 문제의식을 인식할 수 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길'을 '상품'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로 승화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길'의 원초적인 푹력성을 순화시켜 어떻게 사물과 생명, 사람과 마을을 잇는 생명의 길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알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을 통해 낙후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공동체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일은 예상치 못한 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고, 애초에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오히러 갉아먹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지리산길'을 만들어나가는 이분들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1박2일의 짧은 지리산 연수는 끝이 났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를 지나 봉화로 돌아왔지만 아직 '외씨버선길'은 보이지 않고 마을과 길이 만나는 그 어디쯤에서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외씨버선길은 나에겐 아직 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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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 감자밭에서 풀을 메다가 전화를 받았다. BY2C(봉화, 영양, 영양, 영월, 청송)의 지자체간 협력사업으로 추진중인 '외씨버선길' 추진 사업단에서 지난 봄 제주 올레길에 이어 지리산 둘레길 벤치마킹을 떠난단다. 처진 밭일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한다는 당위와 '지리산'이 발하는 강력한 유혹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나의 자제력은 오래가지 않았고 동행을 약속하고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사업단의 일원이 아니라 봉화군의 주민으로서 봉화군청 공무원4명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간 '외씨버선길'사업의 추진 과정을 간접적으로 넘겨다 보면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정적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지리산'을  공짜(!)로 갈 수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동행의 이유가 충분했다.


7월 15일 오전 9시 30분 안동 상공회의소 마당에 스무명 남짓의 일행이 모였다. 이내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고 3시간만인 오후 1시경 88고속도로 지리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리산 자락이 지나가는  남원시 인월면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외씨버선길' 사업을 주관하는 경북북부연구원관계자와 이번 연수를 주관하는 한국생산성본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남원의 특산물인 붕어를 주재료로 만들 '어탕'으로 거뜬한 점심을 들고 식당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길 안내센타'를 들러 이번 연수의 첫프로그램인 사단법인 숲길의 이상윤 상임이사의 특강을 들었다.  


안내센타는 아직 충분한 안내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보였고, 안내 책자나 여타 지리산길 안내 건텐츠가 구비되어 있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운치를 가진 공간이었다. 산림청의 국유림관리사무소로 사용되던 공간을 사단법인 숲길에서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늘 붐비는데 비해 근무직원도 적고 편의 시설도 부족했다. 하지만 걷는 길을 찾아 오신 분들은 이미 불편함을 감수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라고 본다면  시설의 부족은 별반 문제될것이 없고 단지 안내 시스템의 개선이나 컨텐츠의 확보는 필요해 보였다.


숲질 이상윤 이사의 특강은 인상적이었다. 강사의 외모가 주는 인상부터  '지리산길'이 담고 있는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듯, 소박하고 관행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차림의 강사는 강의 스타일 역시 범상하지 않았다. 5분강의 후 질문과 답변으로 채우기로 했던 특강은 강사의 강의가 표명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충분한 질의 응답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지리산둘레길'의 가치가 어떻게 사업과정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었는지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지향하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구현하고자하는 사람이 있은 연후에 물리적 공간에서 지리산길이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실제 외씨버선길 사업을 추진할 주체에게 들려주는 것 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인월안내센타를 나선 일행은 다리를 건너 안내센타앞 하천을 따라 (사)숲길에서 나오신 두분의 '길동무'와 같이 '지리산둘레길'순례를 시작했다.  큰 산아래 큰물이 지고, 큰 하천이 생겨난다고 지리산 아래 오랜 세월 물살에 씻긴 바위가 아름답게 강바닥을 이루고 있는 인월천은 넉넉한 품모를 가지고 있었다. 큰물이 진 흔적을  담고 있고 언제라도 다시 큰물이 지나가도 좋을 넉넉한 인월천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은 '중군리'로, 황매암과 수성재로, 그리고 배너미재를 넘어 첫날의 기착지인 장항마을로 이어졌다.     






길을 걸으며 '길'이 무엇인지, 길을 왜 걷는지 끊임없이 곱씹어 생각했다. 길을 걷는 것은 욕망을 가라앉혀 마음을 쉬게하고 다리를 놀려 몸을 다스리는 수양이자 구도의 과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의 걸음은 '새길을 만들기 위한 벤치마킹'이라는 목적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탓인지 끝없이 길에 대해 고민으로 채워졌다. '길은 삶의 흔적'이고, 삶의 흔적은 원초적으로 폭력적이기에 어쩌면 길은 인간의 폭력성의 흔적인지도 모른다는 강사의 문제제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걷기길'을 만들고, 또 걷는가? '현대 과학기술에 의한 극대화된 폭력(도로)을 인간의 원시적 건강성에 기댄 작은  폭력(걷기길)으로 치유한다'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걷기길의 가치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의 복원을 통해 무너져가는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데에 있다. 마을과 마을의 소통, 농촌과 도시와의 교류, 주민과 주민간의, 주민과 도시민간의 소통이 가져올 활력이 기대되는 그런 길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등산로나 도시주변의 산책길, 관광지의 일반적인 관광코스와 다른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리 단순한거 같지 않다. 과연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이 둘레길을 찾는 발길이 늘어남으로써 활력을 찾고 공동체성이 강화되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계속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하는 물음에 긍정적 답변을  바로 내어놓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마을방문객이 늘고 민박수요가 늘어나면서 마을내 긴장과 갈등이 늘고 마을의 풍광마저 변해버릴 위험에 노출되는 예들을 무수히 보아왔기에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길을 통한 이익없이 마을을 길가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를 전면에 내세워 '걷기 길'을 만들고 관광상품화에 성공한다고 그 길이 지역주민의 삶에, 마을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 확신할 수 없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길은 길대로 이어져 우리의 걸음은 계속되었다.  잠마철에 걷는 산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숲속가득한 습기속을 걷자마자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일행중 두어명이 더위에 지쳐 빈혈을 일으켜 잠시 긴장하가도 하고 걸음이 지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한 지리산의 품속을 거닐며 한껏 산기운을 들이마시며 두눈 가득 산하로 채우고 있는 시간은 행복했다.  


이날의 걸음은 짐을 풀고 휴식과 잠을 청할 '장항마을'에서 끝이 났다. 마을 이장님의 배정에 따라 일행은 각자의 민박집으로 흩어지고 마을은 이내 산그늘속으로 둘어갔다. 어둠이 마을을 덮고 멀리 개짖는 소리를 느끼며 빠져드는 잠은 행복했다. 걷기가 주는 육체적 피로감조차 길이주는 축복 임을 절감하며 나의 지리산길과의 첫 날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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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농협(봉화농협 명호지소)이 얼나전부터 농산물 출하를 시작했습니다. 출하되는 품목이 아직 감자와 강남콩이 전부지만 여름이 깊어갈수록 옥수수며 호박 등 다양한 품목들이 출하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이웃 어르신의 부탁으로 강남콩 16푸대를 싣고 명호농협 농산물집하장으로 나갔습니다. 본격적인 농산물 출하철은 아직 멀었고, 또 한낮의 더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농협 집하장이 있는 경제사무소는 물론 명호면소재지 전체가 한산 했습니다.

집하장엔 오전 일찍 집하된 감자와 강남콩을 멀리 부산의 도매시장으로 실어나르시는 기사분이 작업을 하고 있는 출하장 한켠에  강남콩 자루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러
근무중인 직원과 인사도 나누고 요즘 농산물의 경락가가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도 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농산물 생산량이 많지 않아 도매시장에 출하하지 않고 대부분 직거래로 처분하고는 있지만 간혹 직거래가 어려울 경우 농협을 통해 출하를 하기도 합니다. 재작년에는 고구마 생산량이 많아 보일러실에 보관할 수 있는 양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도매시장에 출하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공판장을 통한 거래에 대한  좋지않은 기억이 있어 직거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후 농사도 가능하면 직거래가 가능한 품목으로 짓고, 홈페이지도 개설하고, 옥션 등 여기저기 직거래 시장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직거래 역시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간의 경험상 그래도 직거래가 가능하다면 도매시장 출하보다는 훨씬 농민에게 이익이다는 생각입니다.물론 생산자가 판매에 직접 뛰어드는 일이 엄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밭에서 일하기에도 바쁜데 작업중에 고객의 문의나 주문전화도 받아야하고, 메모도하고, 또 포장하고 발송 처리까지 해야되는 직거래는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농산물 유통구조가 합리화되는 과정은 유통의 경로는 다양화되고, 유통의 단계는 줄어드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전같으면 농산물 판매는 현지 수집상에 거의 의존했습니다. 현지 수집상은 또 전주에 의해 예속된 경우가 많았고, 중도매, 도매, 공판장을 거쳐 다시 최종 소매처까지 순환하면서 엄청난 유통비용이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한 부담이 고스란히 농산물 가격에 반영되어 생산자에게서 최소한의 값만 주어지고, 소비자에게는 비싼 가격으로 팔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농민의 요구와 정책적 변화 요인 등으로 현지 수집상을 통한 출하의 비중이 줄어들고 생산농민이 직접 도시의 대형마트같은 판매처와 거래를 하거나 전자상거래 등의 방식을 통한 직거래가 상당히 늘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도시 소비자 수십가구를 회원제로 모아 그 회원들만을 위해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고 가공농산물을 포함해 일정한 가격으로 연중 공급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도농교류, 도농공생의 방식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일년내낸 엄청난 신경을 쓰야만 가능한 일이라서 저 역시 엄두가 그런 방식의 유통을 시도할 엄두가 나질않습니다.


하여튼 아직은 가장 일반적인 농산물 유통은 현지농협의 수집을 통해 농산물공판장에 출하하는 방식일것입니다. 현지 농협의 업무가 금융중심에서 지속적인 농민조합원의 요구에 의해 농삼물 유통의 비중이 높아져오고 있는게 사실이지만 그 변화의 폭은 상당히 미미한게 현실입니다. 당장 차도 없는 우리동네 어르신은 현비 농협 마당까지 농산물을 운반하는 비용을 추가 부담하셔야하는 형편입니다. 특화된 농산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일부지역에서는 밭둑까지, 그리고 농가까지 직접 농산물순회수집차량이 들어간다고하는데 우리 지역같이 농지도 좁고, 농사규모도 가족 소농위주인데가 재배풍목도 일정하지않은 산골마을은 비용대비 효율이라는 이유로 농산물현지수집차량의 운행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산에 전념하세요. 판매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농협"
언제 길을 가다가 본 플랭타드 문구입니다. 저 문구같이 우리 지역도 늙고 병든 몸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을 시작으로 모든 농민의 농산물 유통이 보다 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웃 어르신의 부탁으로 도매시장에 출하하기 위해 지역 농협 물류집하장에 강남콩 16자루를 실어드리고 나서 농산물 유통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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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만나기 전까지 '접시꽃'은 그냥 펑범한 시골 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백합처럼 우아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농촌마을 어디에나 돌담이 있으면 바로 그 옆에 다소곳이 기대어  수더분하고 소박한 미소로 다가오던 접시꽃이었습니다.

이제 접시꽃은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우리곁에 다가왔습니다. 늘 옆에있어 소중한지 모르고, 꾸미지 않아 아름다운줄 몰랐던 '오래된 아내'같은 접시꽃이지만 그 꽃의 원래 꽃말이 '열렬한 사랑'이랍니다. 생의 모든 열정을 숨기고 긴 세월 살아왔던 우리네 여인들모양 지금은 그 흔적을 감추고 있지만 그 내면에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듯, 접시꽃은 그렇게 속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우리 농촌의 꽃입니다.


비나리마을에 접시꽃이 넘쳐납니다.
정보센타를 돌아 집으로 올라가는 모둥이 돌담을 돌 때
접시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풍경이 나의 가슴을 적십니다.
살벌하고 삭막한 세상이라 한탄하는 마음도
접시꽃 만발한 돌담길을 지나면서 다 녹아내립니다.
접시꽃이 있어 비나리는 더욱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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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들어가자마자 딸은 호기롭게 외쳤다. 온종일 도서관에서 살면서 엄청나게 독서를 할거고, 친구도 다양하게 많이 사귈거고, 그동안 미룬 기타도 서클에 가입해 열심히 배우고 그리고  아르바이트도 할거라고!! 아빠 입장에서 딸의 다짐들에  대해 처음부터 초칠 수는 없고 '그래야지' '그래 열심히 해봐라'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춘은 허비하는 와중에 그 소중함이 드러나는 것임을 스스로 체득했던 아빠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딸의 다짐들이 젊은 객기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학기가 흘렀다. 한학기동안 두어번 집에 내려왔고, 그리고 일주일에 두어번씩 전화통화를 했는데 딸은 많은 다짐 중에 두개 정도는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첫째는 기타 써클에 가입해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친구를 많이 사귀는 건지는 몰라도 친구들이랑 열심히 논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혜화동에서 친구들이랑 연극보기로 되어 있다는 둥, 강남에서 식사약속이 있다는 둥 엄마아빠는 영 뒷전이었다. 그렇게 한학기가 흘러가고 드디어 첫 여름방학을 맞아 딸아이는 많은 다짐들 중의 하나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우리나라 아르바이트 처우수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차라리 부모가 좀더 고생을 하더라도 그 시간에 딸아이가 공부나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램을 이야기했다. 대학 등록금은 다른 선진국 수준을 추월하고, 임금은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다니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차라리 공부 좀 더 하는게 낮다는 것이 아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고집하는 딸아이는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더니. 결국 수원시내의 한 문구점에서 주말 이틀을 일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일자리를 찾은 딸아이에게 축하를 할 겨를 도 없이 두주가 지난뒤 딸아이는 별안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고작 4일 일하고 그만두었냐고 놀렸지만 딸아이는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또 짧은 아르바이트 경험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했는가 보다. 먼저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처우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토로했다. 하루 12시간을 가게안에서 손님을 안내하고, 물건을 찾아주고, 돈을 받아 계산을을 하고, 틈틈히 흐트러진 상품진열장을 정리도 하고 하지만 딸아이가 받는 임금은 너무 초라했다. 시급 3500원!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일당 42,000원을 받기에는 억울해서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법정 최저임금이 4,110원인 것을 확인한 딸아이가 문구점 주인에게 따지니깐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에 밥값을 치면 법정 최저임금 이상이 된다며 알바비 인상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딸아이의 첫 아르바이트는 끝이 났다.  

하여튼 딸아이는 처음으로 이 징긍징글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 것이고, 그것도 하루 12시간이라는 장시간 근무를 견뎌야했고, 그 긴 시간을 거의 서서 걸어다니며 손님을 대하는 노동을 한 것이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겪은 딸아이는 나름대로 할말이 많았는지 알바를 그만둔 날 30분을 넘게 엄마랑 통화를 했다. 그리고 와이프가 딸아이랑 통화한 많은 말중에 전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아빠의 사랑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는 어쨌다나~~

'먹고사니즘'이 뭔지. 나날이 경쟁을 격화되고, 복지는 개선되지않거나 후퇴하고, 기득권의 탐욕을 갈수록 크지니 이 암담한 현실에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밤낯으로 공부타령이나 하고 있고, 뼈빠지게 벌어 오직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불구적 삶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전언이나 이론이 아니라 몸소 느껴야했던 딸아이의 다음 선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참혹한 생존경쟁의 장에 자식을 내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렇더라도 아빠의 입장에서는 딸아이가 이번 아르바이트 경험을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높이고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또 자신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절감하는 그런 기회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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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풀을 벤다...  왱왱거리는 예초기를 짊어지고 팥죽같은 땀을 흘리면서 하루종일 대추나무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날카로운 예초기의 칼날이 수도없이 개망초의 목을 날린다. 자연속에서 한포기 들풀로 꽃을 피웠던 개망초는 인간의 탐욕스런 손길이 닫자마자 그냥 잡초가 되고 가차없이  죽임을 당한다.
 
하루종일 예초기를 짊어지고 죄없는 풀의 목을 벤 나는 그 업을 갚을 길이 없어 슬며시 두려워진다.  못다 피운 꽃을 안고 스러진 개망초의 몸은 다시 흙을 만나 뭇생명의 밥이되지만, 알량한 욕심에 숱한 풀의 목을 벤 내가 흙을 만나면 아마도, 사람이 발길이 붐비는 골프장 한 귀퉁이에 돈과 권력만 알고 사랑은 모르는 가장 잡스런 인간들이 밷어대는 탁한 가래침을 하루종일 뒤집어쓰고, 그리고 때가되면 독한 제초제를 마시고 또 한 생을 마감하는 불쌍한 잔디 한포기로 태어날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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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재발견>의 저자 이우광은 삼성경제 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본연구팀장이다. 저자는 인본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일본에 대해 더 알고싶은 것들 대부분에 대해 충분히 알려줄 수 있는 분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한 블로거의 리뷰를 보고 책의 구입을 결정했다.

내가 가진 일본과의 인연은 4일간의 짧은 여행 한번과 와이프의 일본인 친구 두분의 이틀간의 우리집 체류, 그리고 몇편의 소설과 만화영화로 만난 것이 전부다. 사실 일본은 올해초 큐슈의 농촌마을사업에 대한 연수를 다녀오게 되면서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된 나라다. 그전에는 일본에 대해 거의 무관심했다. 일본은 나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양 착각속에 방치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한번의 여행을 계기로 갑자기 나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짧은 여행으로 받은  일본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본은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이 있는 깨끗한 나라' 였다. 이후 일본은 지속적인 나의 관심국가가 되었고, 올 가을이면 두번째 일본여행도 떠나볼 계획이다. 
   

이 책 <일본재발견>은 일본의 문화, 일본인의 삶 전반을 다루고 있는 일본 안내서는 아니다. 전문 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인 필자가 보다 대중적인 필치로 일본경제, 나아가 경제적 측면의 일본문화와 일본 사회에대한 나름의 이해를 피력한 책일  뿐이다. 한국인에게 일본은 항상 '경제'적 라이블로서  먼저 다가오고, 다음으로 우리 자신의 문화적 거울이랄까, 우리를 들여다보고 비교해보고 분석해 보는데 준거가 되는 나라로 받아들여지는 성격이 강하다. 다시말해 일본은 한국인의 의식속에서 경제뿐 아니라 문화적 비교대상, 경쟁대상인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과 한국은  이십세기초 수십년에 걸쳐 병탄이라는 특수한 악연이 있는 관계로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고, 공평무사하게 판단하기가 어려운 역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대한 판단은 항상 과소와 과대의 양극단에서 표출된다. 따라서 필자는 과소평가와 과대평가사이에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일본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고자 한다. 물론 경제, 경영적 관점에서 바라다본 일본이라는 한계와 특징을 동시에 드러내지만 필자는 한국인의 의식속에 굴절된 일본의 상을 바로잡고자 시도한다. 물론 그 시도는 일정정도 성공하고 또 일정정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장으로 구성된 이책의 첫장은 일본의 사회 문화적 트랜드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다. 이미 유행어가 되어버린 '오타쿠'나 '더블싱글', '하류', '초식남', '미니멀 라이프' 등에 대한 소개와 분석을 통해 현재 일본이 처해있는 객관적인 문화적, 정신적 상황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들 유행어를 통해 일본의 현상황에 대한 이해의 문을 열고 곧장 일본의 경제를 파고 든다. 이책의 나머지 4개 장은 모두 경제를 주제로 한다. 이들 4개의 장은 '일본의 CEO', '일본의 경쟁력', '경제전략', '국가 시스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그와같은 주제를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막연한 경쟁의식을 기반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일본으로 부터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회피하여 일본을 이길 것인가?'가 이 책을 집필한 필자의 유일한 관심사로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일본은 일본전문가에게조차 객관적 대상일수가 없었나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로 일본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일본과 한국은 좋은 이웃이자 협력상대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책의 내용은 일본의 경제를 근간으로 하지만  경제 지표를 통계수치로 제시하고,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는 난해한 작업을 담고 있지 않다. 이책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다. 다시말해 이 책은 경제를 통해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화화된 경제를 소제로 삼고있어 경제 문외한이자 일본 초보자인 나같은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그런데 쉽고 가벼운 책의 한계인지 '삼성경제연구소적 편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필자의 일본 이해에 나타나는 몇가지 편향이 눈에 거슬린다. 먼저 '경쟁'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은 경제나 기업을 모르는 나같은 독자가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모험을 시도하지 않고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현상유지적인 조화를 도모하는 입장'을 나타내는 '요코나라비의식'에 대한 비판이  현 자본주의 사회의 보상체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미국식 CEO제도에 대한 선망으로 귀결되는 것이 바로 그와같은 필자의 인식의 한계를 나타낸다. 다시말해  "일본 CEO는 미국같은 충분한 보상이 없어 현상유지적이고 모혐을 회피한다'는 필자의 견해는 공감할 수 없다. 필자의  경쟁력 절대주의는 위험하다.  삼성이 재산과 경영권의 세습에 골몰하고, 노조에 대한 원시적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나름의 경쟁력'은 가질 수 있다면, 높은 경쟁력 하나로 모든 악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일본 경제의 비효율성이 삼성이 임원에 대한 성공보수를 수십억씩 주는 그런 제도와 문화가 없어서라면 차라리 비효율이 더 낮지않을까? 기업의 경쟁력을 올리기 위한 임원의 성공보수 수십억은 노조를 탄압하고 탈법을 자행하는 비 윤리적 기업관행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경쟁력절대주의' 사고의 한계는 쉽게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경제의 사회성, 경제의 정치성에 대한 고려없이 너무 경쟁에만 매몰되어 있다. 노예제도가 '경쟁력'이 있다고 정당화되고 다시 도입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JAL의 부도, 토요타자동차의 위기, 소니의 정체 등을 바로 이해하고 이를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화두인  '잃어버린 10년'으로 나타나는  일본사회전반의 위기를 이해하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적, 논리적 연관성에 대한 일목요연한 이해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 각각의 사실이 나열되어 있을 뿐 경제에 투영된 일본의 전체상을 제시하는데 이 책은 성공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도 나 스스로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와같은 이책의 나열식 서술이 가지는 한계때문이다. 이책은 입체적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통해 현제 일본의 전체상을 제시하는데 일정정도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일본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뢰'의 문화,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 소비의 증가와, 사회적 기부, 사회적 참여의 증가 등 침체에 빠진 일본이라는 상과 어울리지 않는 많은 현상과 최소 벌이와 소비를 지향하면서도 사회적 기부에 아낌이 없는 신세대의  미니멀라이프 스타일은 가히 오늘의 일본이 과연 위기인가를 의심케 할만치 일본 사회의 긍정성과 건강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어쩌면 일본은 침체에 빠진 것이 아니고 '정상화'된 것이 아닐까? 경제만능주의, 개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그 어수선함이 '역동성'으로 미화되는 시대가 가고 나면 우리도 어쩌면 '맥'이 빠진것 같은 사회, 외향적 성취보다 내면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책을 덮으며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내가 일본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몇가지를 정리해 본다. 먼저 예의바르고 도덕적인 개인과 군국주의적 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두번째 서양의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면서도 기독교의 침탈로부터 신도와 불교를 지켜낸 일본만의 정신구조가 무엇인지 알고싶다. 세번째 철저한 안전의식, 장인정신에 대한 신봉, 사회의 도덕적 투명성 등에도 불구하고 지금 초래되고 있는 일본경제의 침체는 어디에 기인하는 걸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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