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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지방선거는 지역구의원, 광역단체의원, 지역단체장, 광역단체장,
그리고 광역단체교육감을 뽑는 선거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기도 낮고, 투표 참가율도 낮다고 한다.
유권자의 낮은 정치의식과 정치과잉이 공존하는
절묘한 한국정치현실에서, 대통령보다는 자신이 살고있는 자치단체의 장을,
국회의원보다는 지역구 의회 의원을 뽑는 일이 자신의 구체적 삶과 더 밀착된 중요한 
정치행위라는 사실이 유권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유권자의 낮은 정치의식보다는 중앙정치에 매몰된
지방정치판의 종속성, 혹은 식민성이 더 큰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원천적으로는 유권자의 박탁된 후보자 선택권에 있다.

한국 정치가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은
국민은 물론 정치가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만
특히나 그 모든 정치판의 모순이 집약적으로 증폭되어 나타나는 곳이
바로 지방정치판이다. 이 사실도 모르는 국민이 없지만
자질이 되지 않고 전문성도 없는 단체장, 의원 그리고
일부 토호세력이 서로 유착해서 지방권력을 독점하고
유권자는 단지 자동거수기 노릇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이
지방 정치의 현실이다.

그와같은 현실은 특정 정치세력, 특정정당의 지방 권력 독점으로 인해 야기된다.
지방권력의 특정정당 독점현상은 유권자의 정당, 정치인 선택권조차 빼앗고,
지방정치를 끝모를 파행과 부패의 나락으로 밀어넣는다.
지난 지방선거때 선출된 기초단체장의 47%가 뇌물 등 범죄행위로 기소되었고(230명중 110명/<경향신문> 2010.05.04), 이보다는 덜하지만 광역의원이나 기초의원들도 마찬가지로 각종 비리로 낙마하고 있다. 이는 지방 유권자들도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방은 기초단체장, 주로 토건업을 운영하는 지방의원, 
그리고 지방 토호세력이라는 삼각동맹이
지방권력을 100%장악한 현실에서 군수나 시장은
황제가 부럽지 않은 무소불의의 권력을 전횡한다. 
이런 현실에서 사실 지방에 제대로된 비판적 언론이나 시민단체도 없다.
소규모의 군단위 지자체의 경우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하다못해 군청에 잘못보이면 작은 식당하나 조차 운영하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지역사회의 돈과 권력은 물론 공무원사회가 지역의 유일한 두뇌집단이자,
최고의 소비집단이기조차한 현실에서, 그 우두머리인 단체장은
소규모 지자체의 모든 사안에 개입하고 장악하고 있다.
사업하는 사람은 모두 관급공사나 납품에 목을 메고,
토호세력의 유착고리에 한 발 들이지 않고는 사업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선거판은 줄서기판이되고, 눈치보기판이 된다.

무력화된 유권자의 정당, 정치인 선택권은 바로 그 토호세력에게 넘어가 있다.
어쩌면 오히려 유권자 스스로 자신의 투표권을 토호 기득권 세력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른다.
군사정권과 그 맥을 잇는 정치세력이 아직도 지역 차별을 통한 분할통치를 획책하고 있고
그 영향이 고스란히 지방정치를 그 근본에서부터 기형화, 무력화하게 했다.  

지방의 정치지망생 모두가 특정 정당에 공천 신청을 하고,
공천은 곧 당선이다. 후보자는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오직 특정정당의 외형을 갖춘 지역사회의 토호세력에게
낙점되면 그 걸로 당선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수준도 넘어서고 있다.
특정정당 세력말고는 그 어떤 타 정치세력이 발붙일 틈이 없는 
소위 무균지대가 형성된 뒤로는 이제 
지방에서 특정 정당의 의미마저 사라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공천과 무관하게 아무나 찍어도 당선되는 순간
특정정당의 의원이나 단체장으로 당적 세탁에 들어간다.
공천발표가 있고나면 공천을 받지 못한 후보들이 모두
탈당후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뼈속까지 바로 그 정당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다.
일부지역에서 간혹 무소속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 이변이 아니라 특정정당의
지방권력 독점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현상일뿐이다. 

100%의 정치지망생이 특정정당원이고,
100%의 후보자가 특정정당을 지지하고,
간혹 무소속당선자가 나올 경우도 100% 특정정당으로 갈아타는 현실에서
유권자의 가장 현명한 투표행위는 어떤 선택이 있을까?

사실 유권자의 선택은 투표장에 가거나, 말거나 양자택일뿐이다.
투표장에서 누구를 찍을 것인가,
어떤 정당에 찍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아무 짝에도 필요가 없다.
정치적 이슈도 없다. 정책도 없다.
결국 유권자의 선택권도 없다.
천안함 조작 사건, 불교 분열 음모, 한명숙 무고사건,
검찰의 고질적이고 조직내 만연한 성상납사건,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는 실업률과 빈부격차,
대북 평화기조의 붕괴와 군사적 긴장의 고조...
그 어떤  것 하나도 이슈다 되지 못하고,
지역의 비젼이나 정책과 관련한 공약도 들어 볼 수 없다.
토호세력과 또 다른 토호세력의 싸움, 한 정당안에서의 구세력과 신세력의 싸움,
특정 집안과 집안의 싸움,그리고 중앙정치를 반영하는
소지역주의가 지배하는 지역정치 현실에서
유권자는 설 땅이 없다. 
어느 면에  유권자가 더 많은지, 동일 면내서 후보자 단일화가 이루어질지 아닐지,  
후보자가 어떤 학맥인지, 어느 집안인지 말고는 지방 선거의 이슈가 아무 것도 없다.
결국은 지방선거는 동일한 정치세력의 후보자들간의 돈과 인맥의 싸움이다.
이 역시 최종적으로는 돈의 싸움으로 귀착되고, 돈선거는 여전히 횡행한다.

그렇다고 선거보이콧이 의미가 있을까?
선거불참조차 정치적 의사표시행위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현상, 시민들의 정치의식의 표현에 지나지않으며
구체적 정치현실에 영향을 주는 적극적 정치행위일 수는 없다.

답답한 현실이지만 명쾌한 대책은 없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찍어야되고, 
도대체 최악과 구별되는 차악이 존재하기는 하나는 의문이 드는 와중에서도
차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지방선거에서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단지 그런 선거라면
투표장에 가고 싶지 않다.
답답한 현실이지만 반드시 투표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도 비례대표 선출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62지방선거, 반드시 참가해서 비례 대표만이라도
꼭 자신이 원하는 정당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
꼭! 꼭!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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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마을 한 할머니 말씀이
봄날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을 굶는답니다.
그래서 연두빛 산천에는 지천으로 꽃이 피고,
봄기운이 듬뿍 녹아든 봄햇살사이로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와도
그렇게 강력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봄날 내내 몸을 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봄햇살 속에서 부지런히 몸을 굴린 덕분에
남들 보다는 늦었지만 그래도 이제 자갈밭을 만져서 감자를 심었고,
오늘 고추밭 로타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조건 좋은 밭이면 하루에 끝낼 일을
3일 4일씩 난리를 쳐야 겨우 따라갈 수 있을 만치
열악한 밭조건이지만 그래도 도지를 얻는 밭보다는
내밭에서 돌 주워가면 짓는 농사가 훨신 더 재미있습니다.
바위와 한참 씨름을 하고서나 겨우 한 이랑을 지을 수 있는 돌밭이지만
그렇게 로타리를 치고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운 뒤 심는 감자 한톨이
너무나 소중하고 대견스럽습니다.






주인이 밭에서 돌과 씨름하는 사이
고구마며 야콘이며 고추모종은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고추모종은 아직 키가 작고,
고구마 순도 이제사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올해 유독 야콘 싹이 너무 잘 자랍니다.
먼저 올라와 자란 싹을 잘라 포트에 옮겨심은 야콘모종이
36공짜리 포트로 벌써 한 50판 정도 됩니다.
이정도면 저의 작은 야콘농사를 지을 양으로는 충분한데
모판에서 솟아나는 야콘 싹은 아직 끝이 없습니다.
혹시 야콘 모종이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언제라도 와서
뽑아가시든지. 아니면 포트에 심어가셔도 좋습니다.
비나리마을 주민에 한해 상토와 포트도 서비스로 제공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이 바쁜 와중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득 채울 해바라기며,
채송화며, 이름을 잊은 다양한 꽃씨들을 같이 파종했습니다.
꽃모종이 자라면 우리집 마당가에다가 심고
남는 모종을 마을길가에도 심고, 이웃에도 나누어 드릴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웃 비나리마녀님과 비나리마왕(?)님께서
저희집에 들러 같이 야콘모종도 포트에 심고,
땅콩도 108공짜리 포트에 한 스무판정도 파종을 하고
덤으로 네일 속청을 파종할 포트에도 미리 상토를 담았습니다.
머슴 월급을 못줘 악성 임금 채불 업체가 된 비나리농장에
그래도 발길 끊지 않으시고 부지런히 들러 일손을 들어주시는
비나리 마녀님과 마왕님께 감사드립니다.

올봄 어설픈 농꾼이지만 나름대로 부지런을 떨었으니
올겨울 등따시고 배부른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짐작해봅니다^^*
겨울 농부는 봄을 기다리지만, 봄 농부는 다시 겨울을 기다립니다.
"아이고 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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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든 보수든 고노무현 대통령을 철저히 무시하고 저주했고,
그가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지금까지 그를 격하하고 능욕하는데
침을 튀기는 자들이 있다. 
사실 조중동이나 그 추종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여전히 진보세력 중 일부는 한미FTA와 이라크파병, 대연정제안 등의 사례를 들며
삼성과 노무현의 유착, 정치적 무이념, 나아가 진보를 가장한 보수의 간첩 운운 하며
그를 능욕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충분히 근거있는 입장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니깐
그르거니 하고 일단 이들은 도외시 하자.
이들에 대한 판단은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참 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대통령을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에 기대어서나마 나는 이 암담한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역사적 징조를 보고싶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세상]은 보편적 인권이 존중되고,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복지제도가 완비된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정의가 통하는 그런 세상이다.
고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인간 개개인의 삶이 보호되고 존중되며,
보다 덜 경쟁적인 사회적 풍토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진실과 정의가, 그리고 옳은 사람이 존중받는
[사람사는 세상]을 예견케하는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섰던 정치적 포지션을 문제삼으며
진보의 적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를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재임기간동아 실행한 치적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의 매력에 끌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궁극적으로 정치인으로 살았던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그의 정치적 실천과 사람됨을 통일적으로 바라다 보는게 옳다고 보지만
사실 유독 노무현대통령에 대해서만은 정서적 판단이 앞선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깊이에서 치미는 울컥함이 있다.
그것은 그가 비겁한 정치검찰의 공작의 희생양이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재임기간 내내, 아니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되던 그 순간에 조차
나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굴종의 삶을 강요했던 부정의한 역사에 대한 한국민중의 승리의 감격을 나누었고
그리고 끈질긴 지배세력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에 치를 떨고 맞서야했기 때문이다. 
권모술수와 음모가 항상 승리하는 세상,
돈과 권력이 정의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 노무현의 반역의 삶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바라는
민중의 염원을 현실에 구현했기 때문이고
그 지난한 도정에 같이 서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독선과 비열한 음모, 부정의와 거짓이 판치는
MB정권의 치하에서 3번째 5월을 맞았다.  
5월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자기 삶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의 다하지 못한 정치적 역정을 계속하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달이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진솔함,
특정 정책적 결정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면서조차
그 진정성에 끌려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 노무현이
뼈에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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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첫날, 몇일전까지 이어지던 한파와 진눈깨비는 자취를 감추고

파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아침을 맞았다.
긴 겨울을 지나 비로서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고
모든 생명이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5월의 첫날이다.
오늘은 아침의 상쾌한 기분을 오래끌기위해 잠자리를 쉬 털고 일어나지 않았다.
행복한 기분에 젖어 이번 달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이번 달에 해야할 일들이 어떤 일들이 있는지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무엇보다 5월이 가기전에 고추를 비롯한 대부분의 모종들은 밭에 내다 심어야하고,
콩이나 수수 같은 잡곡류들도 파종을 마쳐야한다.
그리고 어쩌면 5월13일부터 사흘간 제주도 올레길을
봉화군의 직원들과 벤치마킹 가야하고

22일은 서울서 군홍보 문화행사장에서 미술체험을 진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재저래 참 바쁜 한달이 될 것 같다.
당장 오늘 5월의 첫날은 노동절이고,
이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에
그리고 부처님 오신날까지 줄줄이 경사가 이어지는 달이기도하다.

오늘 노동절은 특별한 날이다.
메이데이는 인류가 모두 축하하고 기쁘해야할 날이지만
아직도 일부의 사람들은 이날을 불편해하고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그들 일부의 사람들의
선전에 그들의 의식을 내맞겨 동일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19세기 말 미국의 노동자는 지금의 사회적 처지가
한국의 60~70년대와 나을 것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렸고,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항상 무자비한 유혈 참극으로 마무리되었다.
1986년 5월 1일 수십만 노동자가 시카고에 집결에
이와같음 ㅣ국노동자의 현실을 항의하고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역시 총칼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1990년 5월 1일 처음으로 국제 노동자 연대 기구인 제2인터네셔날은
1986년의 시카고 노동자 시위를 기념하는 [메이데이]를 선포하고
국제적인 노동자 행사로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노동절의 역사는 1923년 일제하에서 시작되어
온갖 탄압속에 굴곡이 있었지만
꿋꿋하게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자본가들의 정부는 노동절의 의미를 가리기 위해
[근로자의 날]이라는 기형적인 라벨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노동자에게 오늘은 여전히 노동절이고,
자본에 대한 인간의 독립적 가치를 선언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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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주년 세계노동절 범국민대회가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5월은 쿠테타군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이
독재자의 꼭두각시가 된 게엄군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던 결코 잊지 못할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있은 달이고,
가장 가까이는 사랑하는 노무현대통령의 서거가 있은 달이다.



그래서 5월은 피빛광주가 남긴 민주주의와 민중승리의 가치를 일깨우고,
다시 한번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고노무현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며
그가 꿈꾸던 '사람사는 세상'의 희망을 
세상에 구현하기위해 작은 정치적 실천들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달이기도하다.

나의 개인적 삶이 씨줄날줄로 엮어진 세상사의 중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5월만치 절실한 달이 따로 없는것 같다.
가족의 소중한 의미와 부처님의 큰 가르침,  노동절의 가치와 광주항쟁의 교훈,
그리고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노무현대통령의 꿈이 함께하는 5월은
바쁜 만치 즐겁고,  희망으로 가슴 부푸는 그런 한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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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블로그를 개설한 뒤 방치하다가
100여일전부터 나름대로 열심히 포스팅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번달에 드디어 초대장 5장이 생겼습니다.

저가 처음 티스토리를 알고 참여하고싶어 안달하면서
초대장을 얻을려고 노력할 때가 생각납니다.
구구절절 사연을 적고 어떻게 하다보니
토대장을 받긴 받았는데, 블로그 개설만 해 놓은채
먹고 사는 일에 바빠 깜빡 잊어 버렸습니다.
다시 겨울이 되어 상대적으로 한가롭게 되어
티스토리가 하고 싶어 다시 초대장을 받겠다고
여기저기 신청하다가 초대장을 영 못받게되자
혹시하고 다시 살펴보니 블로그를 개설해 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저가 이제 드디어 초대장을
배포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꼭 필요하신분, 이왕이면 연세가 많으시거나,
농업, 농촌관련 블로그를 계획하시는 분 우선으로 배포할 생각입니다.
고작 5장밖에 되지 않으니 필요하신분만
댓글과 이메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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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은 이래저래 바쁜 일들이 많았습니다.
연초부터 일본 연수도 다녀오고,
딸아이가 진학을 해서 객지로 내보내고,
밭에는 사과나무도 심었습니다.
거기다가 집마당을 넓히고 석축도 쌓고,
밭은 농로와 도수로 공사로 적지않은 시간을 들여 고생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평년에 하지 않던 짓을 저질렀습니다.
매년 마을에서 꼴찌로 고추를 심다가
올해 처음으로 본밭은 아니지만 마당의 텃밭에나마
마을에서 1등으로 고추를 250여포기 심게 되었습니다.
3일전 밭에서 경운기 작업을 하다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작업이 중단되었는데
왠 마음이 갑자기 동해서 비를 맞아가며
텃밭에 고추를 심게 되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하는 일은 나름의 희열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날씨바람에 조금춥긴했지만
여름같으면 땀도 나지않고, 햇살에 지치지도 않다보니
저는 개인적으로 비를 맞으면 일을 하기를 조금 즐기기도 합니다.
단지 그마음에 이왕 옷도 버렸으니 고추나 심자고
덤벼든 일이지만 일을 마치고 나니
아직 어린 고추모가 애초롭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잘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축원을 하고, 남은 골에 옥수수며 양대콩이며, 땅콩까지 호기롭게 다 심었습니다.
물론 본밭이 아니고 집앞 200여평의 텃밭에 불과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동네에서 1등으로 고추도 심고, 
여러가지로 뿌듯한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고추를 심은지 이틀만에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싸락눈까지 내리는 날씨가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께의 예상 최저기온은 영상1도, 다행히 고추모가 얼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예상 최저기온 역시 영상1도였지만,
기상청 정보를 보니 영하1.5도를 기록했답니다.
그래도 다행히 고추모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예상최저기온이 영하1도랍니다.
어제밤늦게 있는 비닐을 펼쳐 반정도는 덮어두었지만
나머지는 오늘아침 추위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아침에 비가내리고 바람이 불면,
서리가 오지 않아 고추모가 살수 있지만,
바람도 없이 고요한 중에 서리가 내리면 고추모는 끝장입니다.
무론 250여포기에 불과해 날이 풀린뒤 다시 심으면 그 뿐이지만
제발 애처로운 고추모가 이번 추위에 살아남을 수 있기를 
천지신명께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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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농사는 밭에서 돌을 캐는 일로 시작했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농로와 도수로를 확포장하는 일명 [밭기반 공사]를 한다고
농로 여기 저기 길을 파더니 올 해동이 되자마자 
온 동네에 본격적인 공사판을 벌였습니다.
마을 앞산의 북쪽 사면에 위치한 밭을 대상으로하는 이번 공사는 
나의 사과밭도 대상지에 포함되어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쪽으로 바라다볼 때 밭 왼쪽 끝에는
밭으로 올라가는 길이 포장되고 도수로가 들어섰습니다.
밭 오른쪽 끝에는 이웃들의 밭으로 가는 길과
도수로가 역시 만들어졌습니다.
아직 길포장은 끝나지 않았지만 여하튼 이번 공사로 인해
밭 양끝 100여 미터가 5미터폭으로 완전히 돌밭이 되었습니다.
작은 돌을 호미로 캐서 주워내고,
큰 돌은 쇠박대를 지렛대로 이용해 억지로 캐내어
도수로 위에 작은 석축도 쌓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나달 밭에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포크레인으로 구덩이를 파다보니 밭이 온통 돌밭이 되었습니다.
원래 돌이 많은 밭인데다가, 심겨져 있던 두충나무를 캐내고 보니
흙보다 돌이 더 많은 자갈밭이었는데 지난 2년동안 열심히 돌을 주워내어
그럭저럭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다시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밭을 파헤치다보니
또다시 원래의 돌밭이 되어버렸습니다.
돌이 나뒹굴고, 포크레인에 다져진 밭을
돌을 주워내고 경운기로 억지로 로타리를 친다고 
지난 한주를 다 보내다시피 했습니다. 



이왕지사 돌로  흥한 봄, 돌로 망해 볼까나~~
밭에 돌일만해도 보통이 아닌데 올 봄 괜한 욕심에
집마당에 석축까지 쌓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하고, 이 높이까지만 하고.. 뭐 그런식으로 일을 하다보니
결국 중간에 그만두지 못하고 끝장을 내어버렸습니다.
일을 마무리한 것은 좋은데
다 쌓은 석축을 바라다보는 흐뭇한 시간도 잠시
일을 마치고 나니 손끝은 물러지고, 허리도 절리고, 어깨는 천근입니다.
마누라도 끙끙 몇일째 아침마다 앓는 소리를 하면서 일어납니다.


몇일째 비는 주적거리고, 날씨는 겨울로 돌아가버려
바쁜 농사일이 돌연 무한 연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면, 사과밭 고랑에 마저 돌을 주워내고 
로타리를 치고, 곧 골을 짓고 비닐을 씌워 우선 감자를 심어야합니다.
늦어져버린 감자파종만 끝내놓으면 지금 날씨로 보아
5월10일이나 되어야  고추를 심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한가롭게 야콘이며 고구마모종을 돌보고,
땅콩이나 속청 등을 포트에 파종하면서
5월을 맞을 생각입니다.

돌로 시작한 올해 농사,
이제 고생은 다 끝나고 가볍고 소소한 일들만
남은것 같습니다.
초봄에 고생한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올 한해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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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박을 예감케하는 비나리패션을 소개합니다.
비나리하고도 웃마, 고개하나 넘으면 역계땅이 지척인
대추나무골 새주인 비나리마녀가
올 한국 패션계를 강타할 신작 비나리패션을 선보였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알지만
모르는 분은 또 다 모르는 이제 고작 귀농한지 서너달 된
민서엄마 비나리마녀께서
올 봄 선보인 비나리농부패션은
농사를 지어도 한 50년은 지었을 것 같은 농부의 포스가 느껴지는
최고의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작품입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오신 동네 할머니들이 보면
뒤로 자빠지질 만한 농부패션을 자랑하시는 비나리마녀님은
올해 무려 300여평의 밭에 감사, 고구마, 고추 거기다가 야콘과 옥수수까지
온갖 농사를 다 지을 예정이랍니다.
벌써 아랫골 100여평에는 부지런히 심은 감자가 뿌리를 내리고
오늘내일 봄 햇살 속으로 싹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비나리마녀네는 패션만 농부스러운게 아니라
마을주민들과 어울려 벌써 비나리마을 주민의 한 가족으로
알콩달콩 이쁘게 생활하시는 모습도 참 이쁩니다.
오랜세월 한마을에 살면서 터득할 수 있는
농촌공동체의 생활방식을 선천적으로 타고 나신 분 같습니다.

다음 달이면 소위 흙부대공법으로 멋진 집을 짓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의 터전을 가꾸어나가실 것입니다.
우선은 1500여평의 대추나무밭을 가꾸며,
소박한가족의 생계를 잇고, 마을공동체에 뿌리내리기 위한
다양한 모색을 해 나가실 계획이랍니다.

 다음달부터는 명호밭두렁공부방에서
명호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태권도도 가르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귀농직전까지 부산에서 부부가 같이 태권도도장을 운영하신 노하우도 살려
지역 사회에 봉사도 하고 주민들과도 어울려 나가시기위한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비나리마녀님과 서방님, 아들 민서, 딸 지형이 그리고 새식구 강아지 와우까지
다섯식구가 마을에 들어오신지 몇달되지 않지만
여러가지로 새로운 생활을 잘 적응해 나가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만 비나리에 귀농을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인심좋고 아름다운 마을 비나리에 살게되면
누구나 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작은 마을 비나리엔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비나리마녀네 블로그 : http://blog.naver.com/bada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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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뭐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질문에는 꼭 아무 쓸모없는 철학 공부는 왜 했냐는 공격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질문 끝에는 꼭 능청스런 표정으로 철학을 [철학관]과 관련 지으며 혹시 사주 팔자 볼 줄 아냐고 물어오곤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들어가 1990년대 초반까지 다녔지만, 나는 그뒤 어떤 '철학적 사유'도 없이 막 사는 삶을 살아왔고, 그나마 학교다니면서 얻었던 빈약한 철학적 지식마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 세월동안 '철학'과 관련해서는 그런 성가신 질문을 모면하는 나만의 메뉴얼을 갖추었을 뿐이다. 일단은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웃고 넘기지만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올 때는 일단 상대를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

아이고 무식하기는,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뭐했는데요?” 

좀 더 편한 관계일 땐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니 상판데기 관상을 보니 올해 넘기기 힘들겠다. 우야면 좋노!”

그리곤 이런저런 개론서에서 배웠던 어원적인 분석을 보여주며 [philosophy = philos()+ Sophia()]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니, 세계관이니 그러다가도 안되면 철학자체의 개념 변천사까지 들먹여본다.



인간의 모든 지적인 행위 전체를 아우르며 학문'이 곧 '철학이었던 시대를 지나,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되고, 다시 심리학마저 철학에서 분리 되면서 철학에 정체성의 위기가 초래되고 철학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은 곧 철학의 영역을 축소하는 과정이었다고. 이렇게 말해 보지만 이것은 질문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 것이 분명하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은 '철학'의 현실적인 쓰임새가 무엇인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도대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나 자신도 그같은 질문자의 물음을 해소해 줄만한 답을 제시하기가 궁색하다는 데 있다.
   
그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철학에 대한 이해, 혹은 나 자신의 태도가 이제와서 다시 철학을 공부하고싶은 나의 욕망을 근거짓는 주춧돌일 수 있다. 왜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철학공부가 다시하고싶은가! 지금 다시 하는 철학공부가 나에게 대단한 깨달음을 주거나, 세상을 바라다보는 통찰력을 가져다 줄 것같지도 않고, 내가 하는 농사, 마을일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의 생계를 해결하거나 나의 사회적 활동을 북돋아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더군다나 이미 학자의 길을 가기에는 멀어져도 한참은 벗어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대단한 저술가가 되거나, 하다못해 나름의 '인생철학'을 구축하고 어떤 수준에서든 한명의 사상가나 철학자로 입신할 가능성은 사실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철학공부를 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들과 더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철학의 매력때문이다.

먼저 나는 학생시절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너무 하지 않은 학부시절이 끝나면서 그 사실이 너무 아쉬워 무작정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없이 오직 나태한 학부시절 못한 공부를 다시 한번 재대로 해 보겠다는 얄팍한 욕구에 이끌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사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던 7~8개월동안 공부한 것 말고는 대학원 시절 역시 학부시절을 지배했던 게으름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결혼과 여타 사회적 활동까지 부가된 대학원시절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끝내 학위조차 얻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못다한 지적 탐구에 대한 미련이 그 솔직한 이유의 하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참 곤혹스럽긴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를 잊고 살다가도 동년배의 나온 배와 벗겨진 이마를 마주하거나, 나와 친구들의 다 자라버린 자식을 대하게되면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진학은 물론 군대를 간 아이들도 하나둘이 아니고, 반갑지않은 청접장이 날아들 날도 얼마남지 않은게 사실이다. 마흔 아홉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참 막연하지만 내삶의 의미를 묻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켠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허무의 바다인 세상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그 무의미가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느낌들을, 세상의 본질이 허무만을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천착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 같다. 

사실 서양 철학은 재정립을 거듭하다가 비트겐슈타인에 와서는
가치판단마저 배제되고 철학이 순전히 언어의 의미를 명학히하는 작업으로 국한되기도했지만 사실 철학이 삶의 의미를 묻는 지적 사유가 아니라면
철학은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내가 스스로 이해하는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근거를 묻는 인식적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사는지, 생물학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는 이유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이 이해하는 철학이,
대중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사용하는 철학과 같은 의미일 순 없다.
'철학'을 검색어로 웹검색을 해보면 당장 드러나지만
우리는 일상속에서 수없이 많은 경우에 '철학'이라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정치가들의 '통치철학', 자본가들의 '경영철학', 교사들의 '교육철학' 등등
대중적 의미에서 '철학'은 어떤 판단이나 사고의 저변에 그것을 가능케하는 근본 원리같은 걸 말하는것 같다. 다시말해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학문, 모든 사고, 모든 행위의 저변을 형성하는 인식의 틀이나, 가치의 근거같을것을 '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철학'을 비학문적 도닦기를 포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대중들의 뇌리속에서 철학은 '학문'과 '득도'를 다 포괄하는 인간의 인식적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철저히 학문적 견지에서 이해한다. '득도'는 도인들의 몫이고 나는 득도에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명징한 세계인식과 나의 삶을 근거짓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의 작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어떻게 철학공부를 할 것인가에 있다.
사실 대학시절, 학자의 길을 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때에는 학자만치 시시껄렁한 삶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틀,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옭아매는 걸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길로 인도하는 방식의 철학공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농사로 밥벌어먹고살아야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좀 달라야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선은 어쩔수 없이 주제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지적 성과도 시간적 여유도 없는 처지에 맞춰 철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이어갈 생각이다.

'철학하기'와 '철학자로 살기'가 괴리된 현실에서  '재미'와 지적 허영으로 하는 철학공부를 벗어날 방도를 미리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하는 철학공부가 그 과정에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막연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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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칼은 최고의 거짓말장이다. 그녀에게 타인을 속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고, 나중에는 자신마저 속일 수 있는 정말 탁월한 거짓말장이다. 그녀의 글은 읽는 사람은 모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는 그녀 자신도 스스로 한 말이, 스스로 쓴 글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것인지 모르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는 예술적 성취를 만끽한다. 그녀는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악이 선을 이기는 세상의 못된 섭리를 비판하거나, 아니면 꽉짜인 진실이 지배하는 갑갑한 세상을 허물어뜨리고 가상의 영역까지 확대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그녀의 예술적 의도가 문명비판인지 세계창조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사진예술가이자, 개념예술가, 설치미술가이기도하고 또한 문학과 미술, 문학과 사진의 영역을 넘나드는 예술장르의 장벽을 허무는 파괴의 여왕이기도 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딱 한가지였다. 그녀는 익명으로 소위 심부름센타에 의뢰해서 자신의 신상정보를 제공하고 바로 자신 '소피 칼'을 추적하게 한다. 심부름센타의 사설 탐정이 그녀를 미행해 찍은 사진과 그녀를 추적해 작성한 자료를 넘겨 받은 그녀는 [미행]이라는 책의 자료로 고스란히 활용한다. 한낮 심주름센타의 사설탐정이 건넨 사진과 자료가 그녀의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선세이셔널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피 칼의 예술적 성취에 감응한 와이프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진실된 이야기]는 그녀의 그와같은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그녀는 객관적 태도로 바같세상의 아름다움을 논하거나 탐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작품 속에 개입한다. 객관적 태도로 위장하고 '신'의 손으로 그린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관습적 방법을 내팽겨치고, 그녀는 자신의 예술작품 구석구석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을 예술적 소재이자 창조적 주제로 격상시킨다. 최소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 그녀는 창조신이자 스스로 만든 세계의 지배자이다. 소피 칼은 재래의 '초상화'의 기법을 차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은, 초상화 속에서 대상화된 작가와 대상화된 자신을 그리는 초상화 밖의 화가로 구분되는 방식을 거부한다. 그녀는 재래의 자전적 소설 속에서 대상화된 작가와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 밖의 작가가 구별되는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히 개입하고 동화되고  작품안과 작품밖의 자신이 한시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진실된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 특수성을 갇는다.

[진실된 이야기]는 엄마의 남자 친구가 친부가 아닐까 짐작하고 의심하는 아홉살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좀도둑질 재미에 빠진 열한살 때의 이야기가 가벼운 웃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면, 책을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웃음기는 사라지고 처절한 한 여자의 삶이 이어진다. 이혼과 결혼, 또 결별 그리고 결혼,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사물과 사연들, 그리고 임의적이고 심각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지만 책의 결론은 없다. 어쩌면 소피칼은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가져온 지난 삶을 실제로 살았던 삶과, 살았으면 하는 삶, 그렇게 살 수도 있었던, 가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던 가상의 삶을 섞고 비벼 완전한 하나의 '거짓된 그러나 진실된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피 칼은 자전적 소설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다. [진실된 이야기]는 그녀의 도저한 예술적 도발을 이어가는 과정상 섹션과 섹션 사이의 잠깐동안의 휴지기에 불과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또한 온전히 그녀의 예술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이기도하다. 짧고 난삽한 [진실된이야기]속에서 만난 소피칼의 진면목이 그녀의 다음 작품으로 눈을 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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