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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미술관>을 썼던 제미란님이 새 책을 내었네요.
국내외 14명의 대표적 여성작가를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의 예술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얻은 필자와의 개인적 교감까지
한권의 책으로 고스란히 담아내었네요.
김원숙, 윤석남, 함연주, 윤희수 등을 포함해
저의 아내 류준화도 14명의 작가중 한명으로 포함되었는데,
표지 그림이 지난 2009년 11월 가나아트에서 가진 개인적에 출품했던 
아내의 작품 [물의 몸]이라서 더 자랑스럽네요.

책이 도착하는데로 열심히 읽고 한편의 초라한 서평이라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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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니 온 세상이 고요합니다.
정신없이 쳐내고 있는 봄농사도
넉넉한 봄비에 일단 멈추었습니다.
아무리 바쁜철이라지만
비속을 헤매며 쳐낼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기때문이기도하지만
봄비를 핑계로 쉬지않으면 사람 몸인들 어디 견뎌낼 수있겠습니까?

모처럼 한낮에 컴퓨터앞에앉아
그동안 밀린 자료들도 챙기고 소월했던 마을 홈피도 챙기고
블로그 글도 남겨봅니다.
그래도 욕심은 끝이 없어 벌써 머리속에는 치워내야할 일들의 목록이 계속
늘어나고 컴퓨터앞에 앉아있는 마음이 무조건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고구마도 심어야하고, 콩도 심어야하고, 야콘도 심어야하고
그리고 호두밭 작년 비닐도 벗기고 로타리도 쳐
깨심고 수수심고 팥심을 밭도 만들어야되고...


비어가는 모종하우스만치 마음도 한가로워져야하는데
아직은 머리속에 일들로 꽉차있습니다.
당장 오늘 제주도 올레길탐방결과를 정리해서 마을 홈피와 블로그에 올리고
덤으로 작년 제주여행도 정리해 개인 블로그에 담아야하고,
그리고 이웃 비나리마녀님이 만든 우리마을 홍보 티셔츠와
각종 꽃잎차도 사진에 담아 마을홈피에도 올리고
그리고 그동안 밀린 책도 좀 읽어야하고
또 무엇보다 비어가는 모종하우스를 정리도 하고
고구마 모종도 미리 뽑아나야겠습니다.

바쁜 마음에 아무렇게나 심은 고추며 감자가 따가운 봄햇살에 시들거리다가
이번 비에 완전히 살음을 할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러다가 고추 다 죽이는거 아닌가 싶을 만치 고추가 시들어 있었는데
이제 아무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부지런히 몸을 놀려 그동안의 게으름은 만회해야겟습니다.
6월 3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봉화군 축제홍보행사에 참여해야하고,
6월12일에는 여의도에서 또 봉화 홍보행사를 치뤄야합니다.
적어도 6월3일 이전에 바쁜 농사일은 다 마무리짓고
편안한 마음으로 서울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할일은 많고 마음은 바쁘지만
그러나 어쩌게습니까, 하늘이 쉬어라면 쉬어야지요~~

봄비가 흠뻑 내린 오늘 지상의 모든 농부가
편안하고 게으른 하루보내실 수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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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2C 외씨버선길 개발을 위한 제주올레 체험연수를 떠나다.

2010년 5월 13일 아침, 안동상공회의소 마당에 차를 세우고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일행은 모두 스무명 남짓, 봉화군과 영양군, 영월군과 청송군에서 공무원 14명과 민간인 4명해서 18명이 함께했고, 그리고 인솔자인 경북북부연구원 사무국장이 같이했다.
대구공항에서 경북대 권오상 교수가 합류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생산성본부 관계자 가 합류하고 저녁에 따로 합류하신 분까지 합쳐 일행은 총 25명이 되었다.

이번 제주행의 목적은 경북 북부지역의 낙후지역으로 알려진  봉화,영양,영월,청송의 4개군이 합쳐 청정 오지라는 지역조건에 맞는 걷기길을 만들어 나가는데 제주 올레길의 성공사례를 배우는 것이다. 걷기가 붐이되고,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소백산자락길, 부안 마실길 등
전국에 갖가지 걷기길이 생겨나는 시점에 BY2C라 불리는 4개군도 가칭 '외씨버선길'이라는 걷기 길을 추진하기 위해서란다. 그동안 몇번의 심포와 회의가 있었다고 했지만 참가하지 못했고 간접적으로 그런 길을 만든다는 소식만 들어오다 이번 제주 올레길 탐방길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어쩌면 2여년동안 드문드문이지만 마을걷기를 하고 
그 소식을 마을 홈페이지 등에 올려온 까닭에 봉화군청의 
업무관계자가 청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담당자는
내가 이번 연수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니라고 했다.  
1년전 제주 올레길을 맛만 보고 언제 다시 차근차근히
걷고 싶은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청을 쉬 받아들여 이날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연수일정은 1일차에 올레7코스를 걷고, 밤에 워크삽을 가지고
2일차에는 오전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선생으로 부터 
'올레기획의 의의와 지역사회의 변화'라는 내용의 강의 듣고
오후에는 10코스를 걷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올레길을 걷게된다는 기대와
우선 봄날 제주도를 다녀올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가슴부푼 여정이 되었다.


숙소인 풍림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한채 올레를 나섰다.
올레길 7코스는 외돌개에서 월평항구까지 총 15km의 코스지만 
풍림리조트가 그 코스 중간에 있는 까닭에 풍림리조트에서 역으로
7코스의 출발점인 외돌개로 방향을 잡았다.
일행이 대부분 산골에 사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단지 바닷가를 걷는다는 것 만으로도 다들 상기된 표정이셨다.
처음부터 올레길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올레길이 인기를 끌면서 갑자기 영업에도 큰 도움도 얻게되었던
풍림리조트는 올레길 관련한 안내데스크나 물품기증테이블, 올레우체국등을 운영하고,
무료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화장실까지 개방하였다.
그와같은 취지로 개방한 풍림리조트의 정원을 통해
바닷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을 지고 따갑지 않은 봄햇살을 받으며
맘껏 바닷바람을 쐬며 걷는 올렛길은 편안했고 평화로웠다.
멈추면 살아나는 걱정거리도 길을 가면 다 가벼워지는가보다.
사실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은 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그만큼의 고뇌와 삶의 짐을 지고 있겠지만
길위에서만은 순례를 떠나는 도반들 모양 한가지로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좁고 험한 길도 있고,  길같지 않은 해안을 걷기도 했지만 누구도 길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다. 간혹가다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쉼없이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올레꾼들이 사실 조금은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어디 이런 길을 혼자만의 호젓한 길로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올레 7코스는풍림리조트와 월평포구사이의 강정항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는 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평화의 길에 군사기지가 들어오는 계획이 철회되고 다시 평화로운 바닷마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평화에대한 기원으로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중에 올레길 7코스는 '평화의 길'로 재명명될지도 모를 일이다.  


7코스 앞 바다에 떠있는 범섬을 바라다보며 걷다보면 법환포구가 나오고 이어서 수봉로와 수봉교를 지났다. 수붕교를 지나자 얼마 안있어 서귀포여고인근에서 이날 길걷기는 접게되었지만 누구도 외돌개까지 걷지 않게된 것을 탓하지도 않았고 그냥 넉넉한 표정들이셨다. 걷기가 더이상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만치 걸은 것만으로도 마음의 풍요를 한껏 느길 수 있었기 때문일까?  올레길을 벗어나 우리 일행을 싣기 위해 불러놓은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하는 길은 고단했지만 편안했고 아쉬웠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일정이 일부 어긋나면서 첫날의 여정을 다하지 못했지만  7코스를 걷고 돌아가는 나의 뇌리에는 걷기 길에 대한 이러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걷기가 붐인 것은 확실한데, 일시적일까 지속적일까? 제주올레길이 성공했다고 각 지자체마다 이런저런 걷기길을 만드는 게 붐이다. 이제 우리 봉화에도 걷기길을 만들려고 하는데 사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도대체 봉화는 어떤 테마의 걷기 길이 가능하고,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올레길처럼 환경친화적이고 주민참여적인 프로그램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사실 이번 연수는 그와같은 물음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어코스 걸기로 그 실마리를 얻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하지만 안을 만들기 이전에 기본적인 전제들, 기초해야될 가치들, 실행단계에서 지켜야될 원칙들에 대한 생각만이라도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이어지고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 첫날의 일정은 저녁 시간에 생산성본부의 정혜선박사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끝맺음을 했다. 


2박3일중 둘째날은 사실 여행일정상으로도 보면 가장 중요한 날이다.
오는 날, 가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영행에 받칠 수 잇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일정은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 선생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안은주 선생의 강의 내용을 다 정리할 수 없지만
먼저 제주 올레길의 현황에 대한 걸로 성공리에 지역사회에 정착해 들어가고 있다는 점과
두번째 그와같은 성공을 위해 견지했던 원칙들에 대한 태도로 집약되었다.
먼저 작년에 제주 전체 관광객은 약 540만명이었는데 그중 5%정도가 순수한 올레꾼이란다. 2007년개장 원년에 약 3000명이 걸었던 올레길이 2009년에 25만명이상이 걷게 되었고 올해는 아마 작년의 2배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올레길에 들어간 예산 대비 관광객 유치 효과로 본다면 어떤 사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작임이 분명하다. 사실 제주는 비싸고 개발된 관광지로 인식되면서 한때 관광객이 줄고 특히 생태를 중시하는 젊은 여행마니아들로부터 외면받아온 게 사실이다. 올레길은 단순히 년 20만명의 제주 관광객을 늘인 것 만으로는 그 의의를 다 평할 수 없고 오히려 부수적으로 제주의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제주올레는 2009년 한국의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었다. 제주 올레는 어느새 단순한 길이 아니고, 제주가 나아갈 길, 어쩌면 인류의 미래로 통하는 새로운 트랜드, 새로운 가치로 통하는 시대의 길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토건국가로 개발독재적 발상이 통용되는 휘귀한 나라에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생태주의를 가치기반으로하고, 그리고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올레길이 이처럼 붐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문에 우리사회가 들어섰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길을 통해 제주는 단기관광에서 장기 체류형관광으로, 단체관광에서 개별관광으로,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관광으로 급속히 자귀기 시작했고, 길을 따라 게스트하우스와 구멍가게가 증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성화되는 엄청난 변화를 격고 있다.
단적으로 서귀포만 보드라도 재래시장 매출이 17%나 증가하고, 적자를 면치 못했던 공용버스의 승객이 400%나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재래시장을 '서귀포올레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올레길을 처음 시작한 서명숙 이사장의 고향집이 있기도 했던 서귀포시장에는 설립자의 고향집이던 '서명숙상회'를 복원해서 올레 관련 기념품가계로 상인회에서 운영하기로 했단다. 길거리 마다 '올레'가 들어간 상호가 늘어나고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늘어나고, 올레짐꾼(올레꾼 짐 배달서비스)같이 올레꾼을 대상으로한 갖가지 일자리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그뿐아니라 올레관련한 다양한 기념품과 문화상품이 개발되고, 이렇게 개발된 상품은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활력을 부어넣는 사회적 기업을 탄생시켰다. 
한국관광, 나아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볼려면 바로 올레길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된다고 할 수 있을 만치 올레길은 관과상품을 넘어 한시대의 조류를 형성하는 문화아이콘이자 시대의 트랜드마크가 된 셈이다. 


올레길이 그처럼 단기간에 주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는데는 설립자들의 올곳은 가치관과 이를 견지하기 위한 사업의 원칙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올레길을 만드는 원칙은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근본적인 것이었고, 소소한 것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가능한한 있는 길을 이용하고, 그리고 사라진 옛길을 찾고, 새길을 만들어도 곂코 노폭은 1m이상으로 만들지 않고, 개인소유의 당을 지나는 길도 가능하면 올레가 소유하지 않고 오직 통행만 보장받는가 하면, 화장실 등 기초 인프라도 최대한 기존 시설을 개방하게하여 지역 사회가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도록 끌여들였다. 차라리 매입을 하고 예산을 다내어 시설을 건설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제주올레는 이 어려움을 마다않고 감수하면서 오늘의 올레가 가능하도록 만든것이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오후는 화순항에서 식사와 함께 올레길 10코스 걷기를 나섰다.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해안절벽을 따라걷고, 산방산을 오르고, 하멜 전시관을 지나, 사계화석발견지, 마라도선착장, 그리고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10코스는 전날 걸은 7코스와는 달리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길이었다. 바닷가를 걷는 멋과 산길을 걷는 흥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송악산길은 비록 험했지만 힘든지 몰랐다. 말을 방목하는 목장을 가로지르고 평지로 내려선 뒤 도로를 따라 알뜨르비행장과 모슬포항으로 이어지는 길 어디쯤에서, 뒤에 쳐진 일행을 실은 버스를 만나 10코스 걷기가 마무리되었다.  


2박 3일이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일정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면서 연수의 목적인 봉화,영양, 영월, 청송을 잇는 외씨버선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건지에 대한 고민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먼저 지금 걷기붐이 일어나게된 시대적 흐름, 가치의 변화에 주목하고 올레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사업의 발상에서부터 조직, 추진 원칙과 가치지향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검토한 뒤 꼭 '외씨버선길'이 필요하거나 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시작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업들처럼 예산먼저 따고 그 돈을 어떻게 쓸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면 결코 외씨버선길을 성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 해야하고 어떻게 하면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는 열린 자세로 사업에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걷기 길은 단순한 관광아이템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실현이라는 핵심토대를 놓치지 않는 사업 과정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정에서 막 돌아 온 지금 아직까지 생각은 정리되지않고 산만한 상념만 남아있지만 오래시간 곱씹고 자료를 찾고 고민하는 과정이 뒤따른다면 비록 외씨버선길이 후발주자지만 그래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마을사업에 관여한지 10여년만에 처음 접한  완벽한 지역사업 성공사례인 올레길을 만날 수 있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행복했던 여행의 기억을 가져다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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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9일
전날 저녁에 있은 전시 오픈과 저녁 술자리에도 불구하고
또 하루의 걸음을 위해 일찍 눈을 떳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카멜리아힐을 나서 무조건 한라산쪽으로 향했다.
등산정보도 없고 정확한 길도 모르지만
마냥 북동쪽으로 걷다보면 한라산이 나온다는 무모한 믿음하나에 의지한채
이날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을 나선지  1시간 만에 1115번길을 만나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탐라대학교방향으로 계속걸었다. 길을 가며 도로표지판에 의지해 한라산을 찾는 무모한 짓을 포기할 때즘 이미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작정 길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다 지나가고 마침 택시 한대가 정차했다.  '한라산 갑시다!'는 저의 무모한 요구에 기사님 왈 이미 입산시간이 지났고, 한라산이 그렇게 뒷동산오르듯 만만한 산이 아니란다. 차라리 가까운 윗세오름이라고 한라산의 두번째 봉우리를 오르는게 나을 거란다.  그리고 본인은 사정상 그쪽 손님을 태울 수가 없고 동료를 불러주겠단다. 택시가 떠나고 또 한참을 걷다가 떠나간 택시 기사의 동료로부터 전화가 오고 곧 택시도 왔다.



택시비 2만원에 영실탐방로 입구까지 도착했다. 단체 등산객으로 보이는 무리들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그리고 가족 연인단위의 등산객으로 등산로가 미어터졌다. 입구 휴계소에서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사람들의 발길에 휩쓸려 윗세오름을 향했다.  사람들이 많아도 산은 산대로 산다웠고 이어지는 등산로는 비록 가파른 곳도 많았지만 힘겹거나 지루한 코스는  거의 없었다. 멀리 서귀포를 넘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등산로를 걷는 재미는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등산객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고 걷거 또 걸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고 초원이 펼쳐진 사이로 설치된 데크를 따라 한참을 걷기도 했는데, 정상부근에서 시작한 눈발을 맞으며  하산 코스를 어리묵탐방로로 잡았다. 한라산을 맛만본 두세시간의 등반과 하산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윗세오름이 준 인상은 깊었고 그만치 많은 기억으로 남았다.


어리묵탐방로 안내소까지 내려와 서귀포행 버스를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길을 걸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단체버스를 이용하던지 아니면 등반을 시작한 코스로 다시 하산을 했기때문이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은 거의 롤러코스트 같았고 기사님은 무뚝뚝했다.
올레길 8코스를 맛보기위해 적당한 하차지점을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무조건 중문단지에 하차를 하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제주 컨벤션센타를 만나고 왼쪽으로 길을 바꾸자 얼마안있어 아프리카 박물관이 나오고
다시 뒤돌아 주상절리가 유명한 열리해안길을 따라 걸고
다시 컨벤션센타를 오른쪽으로 끼고 중문해수욕장 쪽으로 향했다.
성천포구에서 중문해녀의 집을 만나 회도 한접시 맛보고
다시 해거름이 내릴 때까지 1100번 도로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베릿내 오름을 따라난 계곡을 내려다보며  길을 걷다가 천제연폭포를 지나고
여미지 식물원도 지났다. 다 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미 영업시간이 끝나 그냥 스쳐지나갔다.


내일이면 제주를 떠나 다시 일상의 늪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강박때문일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을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도
또 어디로 향하는 길위인지도 확인하지 않은채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이 두터워지고 허기가 진 뒤에야 
택시를 타고 숙소인 카멜리아 힐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것은 보고 겪은 하루는 잘 정리되지 않았지만
밤은 깊고 잠은 편안했다.

그렇게 3박4일간의 제주 여행은 끝이나고 
대구행 비행기에 올라 다시 돌아올 일상을 생각했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고, 
결제일은 언제고 그리고 누굴 만나야하고...
집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일상'의 충성심에 치가 떨리지만
그렇게 또 고스란히  나의 삶은 보전되고 이어지게되니 뭐 세상살이가 그렇커니 해야되겠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일상을 시작하며 또 다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올레길을 걷는 나 자신을 만나보고 말거라는 대책없는 계획을 세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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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3월 27일 오후 제주공항에 근 15년만에  발을 내딛었다.
낡은 기억속엔 아무 것도 참조할 만한게 없었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꽉찬 주차장에는 온통 렌터카 천지였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공항앞 도로로 나가는 길은 찾기 어려웠다.

아내의 작은 전시회가 있었고, 덤으로 올레길이라 불리는
제주도의 봄길을 걷기위한 여정이기에
대중교통과 도보만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은대로 버스를 찾아나섰다.
행인에게 몇번이나 노선을 물었는데 친절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정보는 없었고,
몇번을 반복해서 묻고 매번 물을 때마다 다른 답을 얻으며 
제주시내를 헤맨뒤에샤  버스안에서 친절한 한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그분의 안내를 받아 겨우 목적지를 향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지만
기사분이 또 우리를 목적지보다 두어구간 지나서 내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일차목적지 카멜리아힐은 농사를 지으며 농장을 꾸리고
그 농장을 도시민이 찾는 농원으로 만들어나가길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려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갖춘 리조트였다.


그날 오후 내내 아름다운 동백숲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펜션과, 카페 그리고 갤러리를 구경하고 
제주에서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첫날을 보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다른 작가분들과 그 가족들이 들여닥치자
작은 술자리도 마련되었지만 피곤한 몸을 일찍 잠자리에 누였다.

3월 28일 아침일찍 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제주의 햇살에 눈을 뜨고
창릉 열고 제주의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간단한 아침식사후 저녁 5시 예정인 전시오픈 전에
제주 올레길을 찾아 카멜리아힐을 나섰다.
길을 나서 한적한 시골길을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 
1136번 도로를 만나고 1136번도로를 따라
자동차박물관을 지나 국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작은 도로를 따라 다시 화순항으로 남하했다.


올레길 9코스의 종점이자 10코스의 출발점인 화순항을 향해 가는 길은
봄볕과 봄바람이 길을 걷는 사람을 서정을 부추키고
힘든줄 모르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살아있음의 기쁨이 느껴졌다.
길을 걸으며 이렇게 벅차오르는 생명의 활홀경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이 시대에 걷기가 붐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아직도 개발광풍과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못된 지배가치와 지배계급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반란은 이렇게 작고 가벼운 발걸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갈대와 모래사장이 맞아주는 화순항을 향해가는 길은
제주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식생이 달라서겠지만 유독 제주는 육지와는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유채꽃, 가로수로 늘어선 야자수들, 
이른 봄이지만 겨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풍경,
구멍뚤린 돌로 쌓은 돌담, 밀감밭 그리고 길가의 풀들 조차
제주는 완벽하게 육지와 달랐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일시에 나를 향해 외쳤다.
'당신은 일상을 벗어나 자신의 삶의 터전과는 다른 어떤 곳에 들어섰다. 
그 전의 삶은 잊고 맘껏 즐기시라. 이곳은 당신의 일상밖이니...'
그렇게 제주는 관광을 업으로 먹고사는 지역이 되었나 보다.


화순항을 벗어나 역으로 올레길 9코스를 시작하자마자
화순삼거리 조금 못미쳐 송도식당인가 하는데서 점심을 먹었다.
올레길관련 정보를 구하다 알게된 조그만 식당인데
주인의 친절과 가격 대비 맛도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갈 즈음 점심시간도 되어 들어가
소문대로  친절한 아주머니께 비빔보리밥을 시켜 먹었다.
역시 소문대로 만족스런 식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마자
[성박물관]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언제 또 이곳을 지날까 싶어 박물관에 들러 잠시 구경도 했다.
입장료가 아깝기는 했지만 의외로 관람객도 많았다.




박물관을 벗어나 1132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가보니
금세 안덕계곡이 나왔다. 계곡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잠시잠깐 안덕계곡을 걷고 이내 다시 창천삼거리까지 걸었다.
참천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1136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숙소인 카멜리아힐이지만
국도를 따라 걷기만 하는 여정을 피하기위해
창천삼거리에서 다시 유턴해서 내려오다가 북쪽방향으로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국도를 벗어나는 순간 진짜 올레길을 걷게된 셈인데,
대충 짐작으로 방향을 잡아 숙소와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를 하긴 했지만
의외로 엉뚱한 곳으로 길이 빠져 예상보다 훨씬 많은 걸음이 필요했고
그만치 제주의 삶과 자연을 좀더 깊숙히 느켜볼 수 있는 귀한 기회도 가졌다.

하루 20여 km를 걷고 다시 돌아온 카멜리아 힐의 저녁은 
또 얼마나 풍요롭고 아늑했는지,
이날 하루의 여정은 오랜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가난한 마음에 작은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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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에서 가진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

2009 3월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리조트 카멜리아힐(http://www.camelliahill.co.kr/)의 부대시설인 [갤러리 카멜리아]에서 동백꽃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있었다

8천년 동안의 봄, 다시 8천년 동안의 가을 – 동백언덕을 노닐다

2009. 3. 28 () ~ 6. 14()

리조트 카멜리아 힐 內 갤러리 카멜리아

강석문, 김경신, 노석미, 류준화, 박형진, 최혜인, 황희진


카멜리아 힐은 5만여평의 정원을 20여년을 가꾸어 온 양언보 사장의 일생의 역작이다. 전시회에 맞춰 참여 작가의 가족까지 초청해주신 양언보사장과의 식사자리에서 간략하게 나마 카멜리아힐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지만 한 명의 농부가 지금의 카멜리아힐을 일궈내는 과정은 짧은 식사자리에서 나눈 담소 정도로 다 전해 듣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 다 감귤 농사에 올인 할 때, 그리고 감귤 농사가 한창 큰 돈이 될 때 양사장은 감귤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동백을 심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와 어리석은 짓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동백나무를 심은 것은 단지 동백나무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따른 것일 뿐이란다. 물론 농장 외의 다른 사업을 벌여가며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돈도 고스란히 감귤농장을 지금의 [카멜리아힐]로 바꿔나가는데 밀어 넣었단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받쳐 지금은 서귀포의 한 명소로 자리잡을 카멜리아 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사업적 성과도 낳은 경우를 언론 등을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 데 바로 카멜리아힐이 그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인 것이다.

 


34일동안 머문 카멜리아 힐은 그야말로 동백정원이었다. 겨울의 여왕이라 불리는 동백을 전세계를 누비며 5백여종의 희귀종까지 모아 동백정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같았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을 만치 지금의 그 결과물은 희양찬란 했다. 국내 유일의 동백을 테마로 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는 물론 동백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석구석 돌 하나, 풀꽃 하나까지 정성을 다해 가꾸어 놓은 정원은 그렇다고 드러나게 인공적이지도 않았다. 화려한 동백꽃과 어우러진 정원의 아름다움은 그 공간에 들어 오는 모든 사람이 단지 그 사실 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고양됨을 느끼고 그리고 삶과 세상의 존귀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힘인지 모르겠다.


카멜리아힐이 오랜 준비기간을 걸치면서 일부 시설이 완비되는대로 이용이 되어 왔지만 2008년 11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 화려한 준공식을 가진뒤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동백을 주제로한 리조트인 카멜리아힐에서 동백을 주제로한 전시회를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동백언덕을 노닐다]전에 작가의 한명으로 참가한 와이프 덕에 농부의 한명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신 카멜리아 힐 양언보 사장민도 만나고, 아름다운 카멜리아 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수확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카멜리아힐을 노닐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올레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올레길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전시여행을 우리 부부의 올레길 걷기 여행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막연하고 확정적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동백길을 걷는 재미가 쉬 올레길을 걷을 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그리고 마침내 카멜리아 힐을 나와 올레길 10코스를 항해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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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오락가락하는 어제 오후 늦게

고추 정식을 마무리했습니다.

큰 면적은 아니지만 혼자서 500여평이 고추밭에 구멍뚫어 물주고,

경운기를 끄고 모종은 놓고, 북을 주는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은 쉽게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민서아빠, 동네 형님 그리고 앞집 아주머니도 와서 도와주시고

잠시잠깐씩 이지만 그 모든 분들의 도움으로 일정에 늦지 않게

기분좋게 고추정식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민서네 텃밭에  800여포기의 고추를 심고,

남은 고추모 40여판을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라는 표지판과 함께

집앞 길가에 내어놓고 나니 이제 드디어 고추 모종농사 단계가 '

완전히 마무리된 기분입니다.

 

동네를 둘러봐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한집 빼고는

모든 분들이 다 고추정식을 끝낸 것 같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내일 비나리마을 노인회에서는

울진에나들이를 가신답니다.

힘든 고추 농사의 첫단계를 잘마무리하고

그동안 지친 몸을 풀고 기분도 전환하시고 싶으신가 봅니다.

 

 

고추농사를 처음 경험하고 나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저는 절때 고추농사를 안지을거라

생각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추 농사 지은 지가 10년이 다 넘었습니다.

그동안 일반 농법에서 저농약, 무농약 농법까지 이어오면서

친환경인증까지 받았지만 사실 고추농사는 여전히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고추만치 돈되는 농사가 없는 까닭에 우리마을 주작목은 여전히 고추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고추농사에서 벗어나고자 올해 사과나무를 심었지만

당분가 고추농사는 계속할 계획입니다.

단지 내년부터는 사과농사를 무농약으로 하기 힘들어,

사과나무 사이에 심은 고추는 친환경 인증을 갱신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농사는 훨씬 쉬워질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심은 고추지만 나중에 다 심고 나서 고추밭을 보면

사람 손이 얼마나 징글징글한지 느끼게 됩니다.

고추농사를 모르는 도시 사람들도 같은 느낌인가 봅니다.

 

도시에서 온 친구왈

"저거 고추가?"

본인 왈 "그런데 와?"

친구 왈 "저거 기계로 심었제?"

본인 왈 "와그래 생각하는데?"

친구 왈 "저걸 우째 손으로 다 심노... 그라고 심은 폼을 보니깐

         간격하며 줄하며 도전히 사람 손으로 한거 같지 않은데?"

본인 왈 " 보시게. 그라이 고추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인자 좀 알겄나?"

 

몇년전에 마을에 놀러 온 친구와 나눈 대화랍니다.

 

그 징글징글한 고추 정식을 끝내고 나니

올해 농사의 또 한 고개를 넘어선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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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의 무농정 시대에 참여정부의 농정을 되돌아 본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다. 올해 봄철 이상 저온과 MB정부의 ‘4대강 죽이기정책에 의한 4대강 주변 농업 생산 기반 시설 파괴 등의 요인으로 인해 야채류가격이 급등하기도 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머물고 한국 농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쌀과 건고추 값이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쌀값은 80kg 한 가마에 12~3만원으로 20년 전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9만원대까지 떨어졌다. 농촌 들녘에는  농사짓는 게 죄라며 한탄하는 농민들의 한숨이 넘쳐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농촌의 현실은 정책적 소외가 거듭되어 농가의 도산과 농촌공동체의 해체가 가속화 될 것이라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MB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을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이전 노무현 정부의 농업정책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게 된다.

 

사실 참여정부는 한미FTA라는 반농업정책을 주도한 정부로 각인되어 있다.

한미 FTA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해 농업시장 등을 미국에 내어주고,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의 일부 시장을 한국자본이 차지하기 위한 '빅딜'임에 분명하다.

농업 시장의 개방을 통해 전체 무역량을 늘려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입장은 한미 FTA에 대한 농민의 반발을 야기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농업에 대한 이해와 농민에 대한 애정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농업시장과 공업-서비스 시장의 맞교환이라는 발상 자체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세계경제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한국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미 FTA가 불가피한 조처였는지, 아니면 한국경제의 총량적 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선제적 조처였는지 판단하는 일은 사실 어려운 문제다. '자본의 진보성'이라는 이해에 입각해 자본의 세계화라는 추세를 역사적 진보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하지만, 자본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적인 시장확대와 교역확대가 공동선인양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수용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내적 경제의 유지발전을 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계급적 이해관계가 조정된 시장 확대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조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이해 관계가 걸린 정책의 도입은 그로 인해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가를 명확히 하고 그 이해관계를 사회적 합의라는 큰 틀에서 조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그 점에서 참여정부의 노력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 않다.

노무현대통령 개인의 농업, 농촌에 대한 애착, 그리고 퇴임후 귀향과 마을운동 과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미국의 한미FTA발효 연기와 이명박 정권의 소고기 시장 개방 과정 등을 보면 참여정부의 한미FTA협상 과정의 치밀함과 성실함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시장우위라는 입장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농업이지만 농업 시장을 포기함으로써 획득되는 한국 경제의 이익 분의 많은 비중을 다시 농업분야로 돌리겠다는 입장은 참여정부의 농업 농촌에 대한 애착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실 많이 뻥튀기 되었을 “농업 119조 투융자와 FTA 지원기금”은 그렇게 탄생했고, 그 예산을 기반으로 해서 많은 농촌 농업 정책이 시도되었다.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 역시 그와 같은 참여정부의 농촌, 농업정책에 힘입어 내가 속해 살고 있는 농촌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마을에 유치했고, 실행했다. 국민의 정부시절부터 시행되거나 참여정부 때 시작한 농업농촌 활성화 정책들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다먼저 농민의 피부에 와 닿는 참여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은 농가부태 상환연기 및 이자 감면 정책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농촌마을 개발정책과 농업기반 투자가 진행되었다. 그들 정책의 소산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데 대표적인 것들이 ‘녹색농촌체험마을’ ‘정보화마을’ '마을종합개발사업'등의 주민주도형 상향식 농촌개발정책과 전원마을 사업등의 농촌재구성 사업, 그리고 친환경 직불제, 논농업집불제 등 각종 농업소득 보전을 위한 농업 직불금 제도의 도입이다. 물론 이들 정책을 통해 한국 농업이 발전하고 농촌마을이 풍요로워 졌다고 판단하기는 쉽지않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국민의 정부를 이은 참여정부의 농촌정책은 농업 영역의 변화 확대와 농촌의 재구성, 농촌과 도시의 관계 재설정을 통한 농촌유지정책으로 전환을 다양한 정책으로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어설픈 준비로 과도기적 낭비와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한국 농촌의 생존 로드맵을 제시하고자 애썼고 그 단초를 연 것으로 인정하고 싶다. 

 

앞이 보이지 않는 농촌현실에서 이전 참여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을 되돌아보고 재평가하는 일은 꼭 필요한다. 그것은 현재의 암흑을 통해 지난 시절의 빛과 어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여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의 모태가 되는 노무현대통령의 농업농촌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잇는 자료로  <농업,농촌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저자 노무현, 학술지 月刊 議政評論 35('91.7) pp.29-32,발행일 1991.)가 있다. (국회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열람과 복사 신청이 가능) UR로 가위눌림 당한 한국 농업의 생존 전략을 피력한 짧은 글이지만 농촌, 농업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이 글을 통해 당시 국회의원이던 노무현대통령은 농촌의 부흥이 국가발전의 초석임을 주장하면서 그를 위해 투자의 소외 영역이었던 농업에 기반 투자를 확대하고 유통 합리화와 농업보조금 정책, 농산물 가격보장 정책 등을 펼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정책을 부분적으로 현실화하는데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고 그 결실을 보기 전에 한국 농촌은 다시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참여정부는 한미FTA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다. 참여정부는 일부 진보세력으로부터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한 정부, 당시의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극우 보수세력과 정책적 이념적 차별이 없는 세력으로 비난받고 매도당했다. 좌우의 협공 속에서 참여정부는 나름의 길을 찾기 위해 분투했지만 사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부로 낙인 찍혔고, 그리고 당의 해체와 함께 노무현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시 극우 보수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은 이전 참여정부가 진보좌파적 입장에 입각한 정부는 아니지만 최소한 좌우를 아우르는 합리적 노선을 모색했고 장기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정책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정부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을 극우 보수세력은 이해했고 그래서 끝없이 노무현 정부를 우파적 정책을 펼 때 조차 친북 좌파로 매도했고 공격했다. 하지만 일부 진보세력은 그 점을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진보세력의 동반몰락을 초래하는데 일조했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농정의 방향성이나 이념적 기반, 그리고 그 기반위에 그렸던 한국 농업농촌의 미래상에 대해 섣부른 평가나 결론을 내고 싶지 않다. 단지 열린 자세로 평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만을 명확히 하고 싶다 
나는 한 명의 농민으로서 "노무현대통령이 꿈꾸던 한국 농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긍금하다.

 

준비중인 다음 글

<참여정부의 농정: ‘농업은 포기하고 농촌을 살리자?”>

 

 더 읽어 볼 자료 :

 

<노무현 정부의 '농업·농촌 종합대책안'의 문제점>

저자 박창규, 녹색평론 통권 제74 (2004. 1·2) pp.102-112 , 2004.

 

<119조 투융자계획의 허와 실 :노무현정부의농업농촌발전계획에 대한 검토>

저자 전농 정책실 , 농민의 길 통권 3 (2003. 12) pp.71-78. 

 

<참여정부 농촌개발정책의 회고>

저자 이병기, 농촌지도와 개발. 15권 제1 (2008 3), pp.145-175 출처한국농촌지도학회

 

<21세기형 농업 농촌을 위한 농정패러다임의 전화>

이일영외 지음, 한국노동연구원 2007, 2, [농업농촌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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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벽지인 비나리마을은 아직도 소로 쟁기질을 하고
이랑을 타는 집이 한두집이 아닙니다.
집집마다 경운기와 관리기가 다 갖춰져있고, 
경사가 적고 객토를 해서 돌이 없는 밭에는
이들 기계를 사용해 농사를 짓지만
동네 밭의 3분지 1정도는 아직도 소로 쟁기질을 하고
이랑을 만들어야하는 돌이 많고 경사가 심한 밭입니다.

효율이나 경쟁력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대형트렉터로 농사를 짓는 평야지대에 비해
비탈진 산전에서 소로 농사를 짓거나
경운기나 관리기같은 소형 농기계로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밥벌어 먹고 살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농사를 짓고 말고 하는 판단은 
경제적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오직 몸에 익은 농민적 근면성에 따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무가치한 일이거나 
어리석은 짓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든 일을 하고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살아가야 하는게
사람사는 섭리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미루던 경운기를 작년 초에 중고 하나를 100만원을 주고 장만했습니다.
그 전해에는 콩밭까지 차가 들어가지 못해 지게로 콩단을 지어나르는 고역을 치뤘기 때문에
만사를 밀쳐두고 우선 경운기부터 구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쉰가구가 넘게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마을이지만
이웃 마을들과는 달리 트렉터가 단 한대도 없습니다.
우리 마을  최고의 농기계는 아직도 경운기입니다. 
개인적으로 경운기의 경제성이나 효율성에 대해 판단할 제간을 없고
어찌되었던 우선 경운기가 생겨 편해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낮은 짐칸높이 때문에 돌을 싣는다던지 할때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경사가 심하고 길이 좁아 일반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도
경운기가 못가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경운기의 등판능력은  거의 탱크 수준입니다.
또한 경운기는 벨트 등의 동력 전달장치를 통해 분무기나 양수기,
탈수기나 파쇄기같은 기계를 가동시키는
파워 엔진 역할을 거뜬히 해냅니다.  
그리고 경운기에는 로타리같은 부속작업기를 달아
밭을 일구고, 감자 수확기나 쟁기를 달아
감자 고구마 등 뿌리 식물을 수확하는데 이용하기도 합니다.


올해 우리집 경운기는 대단한 일을 해냈습니다. 
2000여평의 밭에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포크레인이 콘크리트 바닥처럼 다져논 밭을
무려 3번씩이나 로타리를 쳐 부드러운 흙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워낙 돌밭인데다가 밭이 촉촉할 때 포크레인이 다져놓은 밭은
경운기로 로타리를 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혹가다가 바위같은 돌은 만나면 경운기를 멈추고
호미로 돌을 캐내기도 해야하고
돌에 로타리 날이 부딪쳐 튀어 오르는 경운기를 계속 눌러주고 잡아줘야합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온몸의 근육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힘든데 기계는 또 얼마나 골병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일을 끝내기 전에 경운기가 고장나 버릴까봐 걱정을 했습니다.
다행이 로타리를 다치고 골을 지어 감자를 심었고 또 고추를 심고 있지만
올해 봄농사 동안에는 우리집 경운기가 제일로 고생을 했습니다.
넘 대견스러워 맛있는 경유, 비싼 경유가 있다면
한댓박 사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경운기야 고생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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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톨톨이가 옛날에 정짓담살이 혔지

희망제작소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총서 21
정병귀 외 글 / 2009.06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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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만 보고 마음대로 상상했다. 황톨톨이는 황씨 성을 가진 툴툴거리길 잘 했던 사람이고, 정짓담살이는 '정짓간'이 '부엌'을 의미하니깐 동냥질을 했다는 말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되었는데 '황톨톨이'는 황씨 성까지만 맞고, '톨톨이'는 톨톨 털어서 마지막 낳은 딸이다. 다음 자식은 아들을 낳을 것이다'는 의미란다. '정짓담살이'는 남의집 식모살이를  뜻한단다.

이렇게 이책은 우리의 삶의 토대이면서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져버린 토속적 삶을 담고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옛 선인들인 것은 절대 아니다.  이책의 주인공은 20세기 초중반에 나서 21세기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부모 세대로 모두 현존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들의 삶은 그대로 한국 근대사가 되고 그분들의 세간살이는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이 된다. 그것은 지난 한세기 동안 굴곡 많은 한국 근대사 때문이기도하지만, 또한 지난 개발독재시대를 지나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낡았다는 이유로 무가치한 것으로 배척되고, 먹거리에서 입을거리까지, 주택부터 교통수단, 다양한 생필품 결국 가치체계, 신앙, 덕목같은 정신세계마저 급격한 변화를 넘어 완벽한 단절과 '아메리칸 스탠다드'로 재구축된 우리의 뿌리없는 삶때문이다.


이책은 그와같은 현실에서 사라져 가는 우리 삶의 원형질을 담고 있는 농촌공동체의 토속적 삶을 발굴하고 그 삶속에 오랜 세월동안 숙성시켜 온 인류가 지켜가야할 미래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기획된 책이다. 지역사회 혹은 농촌공동체는
자본의 변방이지만 세상의 변방이 아니다. 바로 그 전통적 공동체성이 살아있는 지역사회의 가치를 발굴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총서’는 희망제작소 뿌리 센터에 의해 기획되고 출판사 이메진을 통해 발간된 21번째 책이다.
 

겁나게 재미진 백운 사람들 이야기라는 부재가 달려 있는 [황톨톨이..]는 백운 이라는 농촌 마을을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 사는 이야기 치고 재미진이야기가 아닌 경우는 어디있겠는가? 삽짝밖을 지나가는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라도 붙들고 막걸리라도 한잔 건네며 할매요. 할매 옛날이야기나 함 해보소라고 해 보시라. 봇물 터지듯 구구절절 이어지는 고달픈 인생살이, 왠 사연도 그렇게 많은지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고,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적으면 소설책 10권도 더 될거”라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씀은 조금의 거짓이라곤 없다.

백운 마을 사람들의 살아 온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비나리마을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와 오버랩되고, 뒤섞인다. 시집살이오기전에 꿈 같은 소녀시절, 부모형제와 오손도손 모여살며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며 살던 아름다운 그리운 시절의 추억담을 시작으로 할머니의 말씀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얼굴도 모르는 양반한테 시집이라곤 와서 사랑은 고사하고 허구한날 시어머니 구박에 서방은 노름질에 술타령이고 그래도 더러운게 목숨이라고 견디다보니 애는 왜그리 덜컹덜컹 잘 들어앉는지 10남매를 줄줄이 낳아 키우다 보니…  그리고 그 서방님은 일찌기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보고싶지 않으시냐는 나의 당돌한 물음에 '그놈에 영감 살아 돌아올까 겁난다'던 이웃 할머니도 이제 이 세상사람이 아니시다. 

이렇게 [황톨톨이
… ]는 아린 우리 부모세대의 삶을 통해, 바로 지금 한국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옛날 이야기책이 아니라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한 책이다. 단지 과거를 보여주는데서 끝나지 않고 한국 농촌의 미래, 세상의 미래를 같이 생각해 보게하는 가치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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