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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고 하노?”

기사승인 2016.01.06  0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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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이 본 우리농촌

 
 
▲ 송성일(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배추농사를 끝내고 마지막 남은 콩 수확은 밀쳐 둔 채 농림어업총조사 조사원으로 나섰다. 내가 조사해야할 가구 수는 몇 달 전 있었던 인구총조사에서 농가로 분류된 2개 리의 70여 가구였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대상 가구 중 적지 않은 농가는 조사가 불가능했다. 그 몇 달 사이 돌아가신 분이 세 분이나 계셨고 한 해 농사를 억지로 끝내놓고 몸져누워 대화를 나눌 수 없거나 병이 위중해져 병원에 계신 경우도 여러 집이었다.

조사를 시작하고 한 집 한 집 농사살림을 들여다보니 더 놀라웠다. 같이 농사짓고 살아가면서 막연히 느끼고 있던 그 이상으로 우리 농촌의 살림이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50대 이하의 농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60대 이상 농민 대부분은 일 년 벌이라고 해봐야 500만원을 채우지 못했다. 그 500만원조차 비닐, 농약, 비료대 제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노인네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저 밭을 놀리면 우야노?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부쳐야제.”

물려받은 내 논밭 묵히지 않고, 도시에 있는 자식들한테 고추며 깨라도 한줌씩 보내주는 재미에 견뎌내고 계셨다. 평생 논밭을 일궈 우리 먹거리를 공급해 오신 늙은 농부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주지 않는 세상에 분통이 터졌다.

농사 뒷정리를 하고 있는 밭에서 만난 한 어르신으로부터는 정부를 대신해 타박을 들었다.

“농촌 다 죽여 놓고 조사는 뭔다꼬 하노? 조사해봤자 도움 주는 거 아무것도 없더마는….”

집으로 마을회관으로 돌며 겨우 수소문해서 만난 할머니 한분은 영감님 돌아가신 뒤 혼자 수박농사를 지으신다며 산골짜기 밭까지 찾아온 조사원을 반갑게 맞으셨다. 논은 묵힌 지 오래되었지만 밭을 올해까지 어떻게든 농사를 지었는데 내년에는 남에게 줘야겠다고 하셨다. 오랜만에 하는 사람구경에 이런저런 묵힌 이야기 나누고 싶은 눈치였는데 애써 무시하고 돌아서고 나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젊은 귀농자가 있어 마을이 보전되고 있는 경우도 전업으로 농사를 짓는 분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법적으로 300평 농사만 지어도 농민으로 분류가 되지만, 실제로 농사를 지어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는 전통적인 의미의 농민은 몇 명되지 않았다.

이번 조사를 통해 임종직전의 병들고 쇠락해진 농촌현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지만 결코 절망감만 느낀 것은 아니다. 사람의 정, 마을공동체의 온기를 보전하고 있는 늙은 농부의 거친 손은 우리가 절망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손사래 치고 있었다. 우리 농민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와 같은 온기가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키고 우리 농촌 공동체를 가꾸는 일이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

송성일(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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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3일 자정, 또 한번의 비나리마을 동제가 있었다.

마을의 주민이 된지 17년... 벌써 몇번의 동제에 참석했는지 이제 기억도 없다.

단지 동제의 변화된 풍경이 주마등 처럼 지나갈 뿐이다.

사실 한해 한해 표나지 않게 동제의 형식도 간소화되고, 

또 참가하시는 사람들도 바뀌고 줄었다.


올해 역시 유사를 맡아 잡은 돼지를 싣어오고,

하루종일 당나무를 지키며 추위에 떨다가 자정에서야 동제를 올리고

뒷정리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올해는 삶은 돼지고기를 가구수로 나누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돼지 한 마리를 비나리 마을 온 가구에 한토막씩이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나누다보면

날이 훤히 새기 일쑤다.


올해는 돼지를 직접 잡지도 안았고, 날씨도 좋고 바람도 없어 덜 고생스러웠다.

동네에 이런저런 번잡한 일도 없어 

동제의 신성함을 지키기에 아무런 흠이 없는 좋은 날이었다.

제사를 올리고, 소지를 올리고

한해 풍작과 마을의 화평, 그리고 모든 생명가지 것들의 안녕을 빌었다.

 

그래도 다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동네 형님과 넋두리를 했다.


"한것 없이 힘드네요 형님."

"힘들고 말고제. 그라이 다 안할라안카나."


이런 현실에서 그래도

같이 하신 주민, 당주 이하 제관과 유사님들

그리고 돼지를 보내준 이슬이 아빠며 여러 찬조자님이 고맙다.

가난한 산골 마을에 이 정도라도 성대한 당제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모두의 정성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다.


올해 동제를 마치고, 꼭 무엇인가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 컴앞에 앉았지만

막상 무엇을 기록할지 모르겠다.

올해 동제가 다른 해와 달리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직 내 머리가 복잡하고

나의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냥 기록할뿐!!














* 당주 : 신영록  / 축관 : 강진희 / 유사 : 권희대, 안태랑, 유창목, 정재학,송성일

* 돼지희사 :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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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비나리마을에 입주하신 정봉주님이 마을 이장님께 인사차 들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장님께서는 마을 주민 모두가 누군지 궁금해하니깐

주민을 만나는 자리한번 만들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냥 간단히 소주 몇병과 안주를 준비해서

마을 어르신께 인사를 올리는게 예의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장님의 요청에 정봉주님의 응하셨어

지난 15일 비나리마을 회관에서 작은 잔치가 열렸습니다.

돼지고기 수육20근과 김치 그리고 팥시루떡 등 조촐한 상을 차렸는데

술만은 전북도지사께서 보내주신 부안특주 "뽕주"를 준비하셨습니다.

약속했던 오후2시가되자 한분두분 마을주민들이 몰려오시어 약 쉰명정도의

주민들이 종봉주님의 인사 절을 받고 따뜻한 손을 잡아보시고

즐거운 담소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친화력이 뛰어나신 정봉주님은 한 10년은 마을살이를 하신분같이

동년배는 물론 금새 마을 어르신들과 격의없이 흥겨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비나리마을 주민들께서는 귀한 분이 농촌마을에 들어와

같이 살아주시는 것 만으로도 고맙다고하시면서

이왕이면 마을은 물론 우리 농촌이

좀더 잘살고 활력이 넘칠 수 있게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잊지않으셨습니다.

봉도사님의 꿈이 비나리마을에서 싹트고 자라

대한민국을 다 품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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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비나리마을학교 강당에서

[봉화공동체 포럼]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럼에는 봉화군 농민회 등 단체와 개인을 포함해

아름답고 활력넘치는 마을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노력해오신

많은 분들이 참가하여 열띤 발표와 토론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참여 단체로는 '교육복지문화공동체 하모니'와

'봉화친환경생산자협동조합', 재산 갈산마을에 둥지를 튼 '별난농부들'

'봉화지역 자활센타', '청량산비나리마을', '봉화국악협회' '봉화귀농인협회'

그리고 '봉화군 농민회'가 같이 했습니다.

 

참가 단체들은 각 단체의 목적과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해 나갈 활동들에 대한 발표를 했고,

향후 지역사회내에서 이들 단체가 연대하여

추구하고자 하는 꿈들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포럼이 갖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봉화의 각 지역에서 흩어져 터를 잡고

나름대로 오랜 세월동안 지역공동체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지속가능하고 활력넘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 오신 분들이 같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만남의 기쁨과 같이 살아갈 날의 희망을 나눌 수 있었던

이날 회합에 참가하고 나서가지게 된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참 외로웠는데 이제 외롭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 봉화에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오랫동안 공동체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감동적이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씩 가지게 될

봉화공동체 포럼이 외연을 넓히고

그 내용적 깊이를 더해간다면

봉화를 아름다운 농촌공동체의 새로운 전형으로 거듭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세대와 신세대, 토착주민과 귀농인,

농업인과 예술인을 포괄해

다양한 세력과 개인이 연대하여

지역사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봉화공동체 포럼"의 무궁한 발전이 계속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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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K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분투하다 국회의원직을 잃고 감옥살이까지 한 정봉주님이 자신의 조상 정도전의 고향 봉화로 이주하겠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뒤 나를 포함한 봉화 지역의 친구들은 나름대로 정봉주님과의 연락을 위해 시도했고 그 결과  몇일전 정봉주님께서 비나리마을을 방문하시게 되었다. 설득도 하기전에 먼저 많은 준비를 하고 생각을 정리한 뒤에 오신 것인지 너무나 쉽게 정봉주님으로부터 비나리마을 주민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벌써 여러해 전에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통해 설립한 [비나리마을학교]의 운영과 관련해 마을 외부 역량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가지 방안을 가지고 실제 추진을 했고 어떤 경우는 성사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나중에 최종적으로 외부인사 영입에 실패를 한뒤 마을사업에 외부 역량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되었다. 그때 최종적인 결론은 마을의 자체 역량에 기반하지 않은 외부 인사의 영입은 실제적으로 마을의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마을자체의 충분한 준비 없이 마을의 자산으로 외부인사를 활용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적 인적 자원이 빈약한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외부의 자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없는 인력과 자원에도 불구하고 마을 자체 역량을 가지고 토대를 단단히 닦을 때만이 외부 자원의 동원도 활용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와같은 시도가 좌절된 뒤 비나리마을은 부족한 중에도 마을의 내적인 변화와 내재적 가치의 외부적 확산을 위해 노력해왔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진전도 없지 않았다. 대구사회적 기업지원센타 "커뮤니티와 경제"와 업무 협약도 맺고 '공동체 학교'나 '사회적 기업 창업가 과정' 등 많은 가치있는 프로그램도 유치하게 되었고, 여성영화제 상영작 마을 상영을 비롯해 남미 인형극 공연, 재능기부단 공연등 마을 주민을 위한 문화공연을 지속적으로 연 것을 비롯해 주민을 위한 문화강좌로 등공예교실, 도예교실, 풍물교실 등을 운영해 오고 있다. 쉽지않은 일이기에 잠시 멈춰서거나 후퇴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와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마을 사업을 '협동조합'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고,  봉화 지역사회내에 사회적 경제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지역생협과 사회적 협동조합 설립 움직임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을사업이 한단계 도약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 절묘하게도 정봉주님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큰 기대없이 지역 인근으로 이주하시면 '알고 지내면 좋지', '마을사업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했는데 의외로 그분은 적극적으로 마을과 결합하여 진정한 풀뿌리로서의 삶을 각오하고 있어서 놀랄 정도였다.

 정봉주님이 봉화 생활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확인하기도 전이지만 사실 비나리마을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이주에 거는 기대가 많다.  그의 비나리마을 이주는 도농교루 사업이나 농산물 판매와 관련된 비나리마을의 브랜드 가치 상승효과를 넘어  농업 농촌의 가치를 널리퍼뜨리고 나아가 마을의 심원한 변화를 이루는데 건강한 기여를 할 것이라 확신한다. 몇몇 마을에서 진행된 스타마켓팅과는 달리 정봉주님의 비나리마을 이주는 단지 한명의 스타로서가 아니라 그가 담보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공동체라는 가치'의 영입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수의 감성마을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겠지만 정봉주의 비나리마을 이주는 진정한 마을 속으로의 이주, 땅으로의 하강,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자기 하방이기 때문에 더더욱 값지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말로만 듣고 매체를 통해서만 뵙던 정봉주의원님 내외는 너무 소탈하시어 세련된 외모와는 달리 시골스런 정감을 가진 발랄하신 분으로 다가왔다. 그의 비나리마을 이주가 아름다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마을 주민으로서의 몫을 해야만 한다는 책임감 역시 없진 않지만 그분과 더불어 한마을 주민으로 재미나게 살아갈 시간들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비나리마을은 아직 엄동이지만 나의 마음은 벌써 봄이다.

정봉주@BBK_Sniper

오늘 경북 봉화에 이주할 집보고 올라가는 중입니다 젊은 귀농인들이 시골 마을을 잘 꾸며놨더군요 환대해주고 쌀까지 선물로 준 송성일 정도윤농부님 감사합니다 잠시뒤 7시 CBS 라디오에서 뵐게요즐청! 폭풍RT!!

봉화군 농민회가 공동경작한 쌀을 선물로 드렸더니 소년같이 좋아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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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24일 비나리마을은 첫 비나리초롱축제를 가졌다.

지역 사회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70년대 초까지  이어져 오던 초롱계는

큰일을 치루는 이웃을 위해 마을 주민 모두가 등불을 부조하던  아름다운 전래풍습이었다.

전기도 전기지만 마을 주민의 수가 줄고 농촌이 피폐해 지면서

자연스레 초롱계는 규모가 줄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부조의 전통을 다시금 되살리기 위해

변화된 여건에 맞춰 이웃 7개 리가 함께하는 마을 축제로 승화시키기로 했다.

그 결과  첫 비나리초롱축제가 열리게 된 것이다.

 

 

 

사실 전국적으로 축제가 사태가 나면서 예산낭비의 대표적 사례로 질타받고

하나둘 중단하고 있는 실정에 새로운 마을 축제를 하나더 한다는 것은 조금은 무모해 보였다.

대부분의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을 통한 마을 축제를 보면

지속가능한 마을 축제보다는 일회성 마을 잔치로 기획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은 아주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축제 아이템을는 일이 쉽지 않을 뿐아니라

2~3년간 년 1000만원 정도의 지원을 받아 마을축제를 자리잡게 한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나리마을은 초롱계라는 아름다운 전래 문화에 힘입어

주민 화합의 장이자 나아가

도농교류의 매개가 될 수 있는 비나리 초롱축제를 열게되었다.

 

 

이번 축제는 첫회인 만치 7개리의 주민 화합잔치에 초점을 맞춰 기획되었다.

우선 주민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주민 자신이 즐기는 축제가 된 뒤

그뒤 도시민의 방문은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 자신이 즐기지 못하는 축제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축제라고도 할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마을 경로 잔치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배치하고

그간에 마을 주민 스스로 참여해온 각종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성과를

총정리하는 그런 자리로 만들었다.

주민 노래자랑과 풍물공연, 먹거리 장터와  등공예 작품 전시,

청량산 풍경사진전과 주민의 생활이 담긴 사진을 모아 연 마을 옛사진전

그리고 호응은 낮았지만 마을정보센타를 영화관으로 만들어

흘러간 60년대의 고전 영화를  보여주는 '마을극장'을 운영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원주 행복 한의원의 재능기부를 받아

마을회관을 [마을한약방]으로 꾸며 주민을 위한 침술봉사 등을 진행했던 것은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기여하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낮은 경로잔치 분위기로 채웠지만 밤은 젊은 취향의 분위기로 전환했다.

위대권 강미영 가수의 도움으로 포크가 흐르는 밤의 정취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 초롱축제에 시도한 것 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마을화폐의 제작과 도입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중에 마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면서 마을 방문자에게

일정한 입장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게 장기적인 목표이기도 하고 

또 마을이 이런저런 시설의 이용이나 체험 농산물 구입을 유도하기 위해

마을화폐를 나름대로 만들어 보았다.

사실 마을 방문객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할 지도 모르고

특히 마을 주민들이 잔칫집에서 돈을 내고 음식을 먹는 상황에

불편해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많이 제기했지만  

시행결과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엽전을 사용하는 나름의 재미도 있었고,

소수의 방문자지만 엽전을 바꾸어 음식을 사 드시도록 유도하는데

일정한 효과가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사후적이긴 하지만 비나리마을 화폐가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많은 문의를 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50만원어치 정도 판매까지 하게되었다.

 

많은 가능성을 확인하긴 했지만 첫 축제가 갖는 한계도 많이 노출되었다.

먼저 주민의 참여가 생각만치 충분하지 못했다.

적어도 마을축제에는 7개리 주민이 모두 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지만

어림짐작으로 약 50%정도의 주민이 축제장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사전 홍보 부족 등의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계절적으로 축제 시기를 잘못잡은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농사가 완전히 끝나는 철에 맞춰 주민 모두의 참여를 이끌어내겠다던 의도와는 달리

농사는 끝났지만 김장철이 바로 걸려 많은 주민이 이날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요즘 생활패턴이 농촌마저 농한기 농번기 구별없이

일년 내도록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극히 바쁜 농사철 일부를 제외하곤 축제날짜가 언제라도 상관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2회 축제는 비나리가 가장 아름다운 봄날이나 수확기 직후

늦가을쯤 추워지기 전에 잡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리고 이번축제는 애초에 계획잡았던

'청량산비나리권역 비나리마을학교 개관식'을 겸해 열기로 했다가

대통령선거로 인해 관계 기관 기관장들이 참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연기냐 축소냐를 갖고 어물쩡거리다보니

늦게 축제를 열기로 결정하면서 사전 준비가 소홀하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마을극장 장문을 가릴 차광 커튼을 달 봉이

축제 당일날 도착해서 설치도 못한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치밀하게 챙기지 못한 어설픈 모습은

첫 마을 축제라고는 하지만  지나칠 정도였다.

진행 참여자들의 역할분담도 매끄럽지 못했고,

그 연장선에서 방문자에 대한 안내도 소홀했다.

더 중요하게는 축제 준비과정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마을자원을 충분히 동원하질 못했다.

다 예산상의 문제기도 하지만

좀더 성의를 가지고 참여를 독려하는 노력을 기울렸다면

훨씬 더 풍부한 축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마을 축제는 집중적인 준비기간이 따로 필요하긴 하겠지만

연중 마을축제를 염두에 두고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 꼭 필요해 보인다.

 

축제의 지속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는 사실 예산상의 문제에 대한 검토도 필요해 보인다.

지원 예산 1,000만원에  청량산비나리마을 자체 수익금을 통한 예산

200만원 정도가 이번 축제에 투입된 예산의 전부다.

사실 지원 예산 1,000만원이라고는 하지만

소프트업체를 통해 집행되다보니 마을에서 받은

실제 적인 도움은 약 600만원 정도라고 보면 될것이다. 

수익은 물자 찬조와 조금의 찬조금을 받은 것이 거의 전부다.

문제는 지원예산 1,000만원이 끈겼을 때 조차

축제를 이끌어가기 위한 재정 대책을 어떻게 만들것인가 인데

그래서 2회 초롱축제부터는 마을주민화합잔치 성격과 더불어

도시민 유치 프로그램을 보다 강화해

수익성있는 축제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뭏튼 오래전에 착상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마냥 미루어져오던 초롱축제를

이번에 불완전한 상태에서나마 개최할 수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 첫 마을축제가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비나리초롱축제를 마을축제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잔치상만 받는 마을잔치가 아니라 더불어 같이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축제가 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사실 마을 축제의 성격상 축제의 내용보다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더 문제가 될것인데

물론 그 존속가능성이 내용에 의해 규정받긴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주민의 참여에 달렸다고 본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나리초롱축제는 이제 시작이다.

10년뒤 20년 뒤에도 비나리마을에서 초롱축제가 열릴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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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귀농 15년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보따리 싸들고 서울을 떠나온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 흘러 나는 삼십대 중반의 새신랑에서 오십대 초반의 중년으로 변했다.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얼치기 귀농자에서 이제 산골 마을 비나리의 어엿한 주민의 한 사람이 되었고,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농부가 되었다. 물론 세월이 저절로 나를 비나리마을의 주민으로, 농부로 만들어준 것만은 아니다. 한명의 농부, 한명의 마을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인고의 세월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고 쉽지 않은 고난의 통과의례를 헤쳐 나와야 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니 아득한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아직 갈 길이 더 먼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하면 귀농 실패 한다’라는 제목의 전문가연하는 분들의 글에 나오는 딱 그런 귀농을 했다. 세상살이에 지쳤고, 그리고 막연한 농촌살이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막무가내 보따리를 쌌다. 내가 받은 귀농관련 교육이라고는 농협주관의 2박3일 교육이 전부였고, 그리고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요구된다는 최소한의 자금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이고, 저 허리 굽은 노인네도 농사지어 자식 다 키우고 밥 안 굶고 살고 있는데 시퍼렇게 젊은 내가 설마 처자식 굶길라고. 하는 오기만 잔뜩 가슴에 품고 낯선 마을에 짐을 풀고 난생 처음으로 호미를 잡았다.

그리고 농촌의 실상을 잘 아시는 분들이면 쉽게 예상하시겠지만 나는 번번이 엎어지고 깨어졌다. 벼랑 끝에 내몰려 다시 귀도를 고려해야할 만치 절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산골마을은 각자도생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가졌던 산골살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많은 부분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내가 어려울 때 이웃은 외면하지 않았고, 또 이웃이 고난에 처했을 때 내 역시 무심할 수 없었다. 흩어진 기억을 추슬러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품삯에 연연하지 않고 해 떨어진 고구마 밭에서 수확을 거들어 주시던 이웃 할머니, 도끼 자루 만드는 일부터 장작 패는 일까지 고스란히 삶의 지혜를 전수해 주셨던 이웃 어르신, 어떻게 하면 희망이 사그라지는 농촌에서 아름답고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이 고민을 나누던 젊은 친구들이 있어 나는 좌절할 수 없었다. 해거름에 지쳐 돌아오는 날 아득한 눈빛으로 맞으시며 ‘인자 오는가’라는 한마디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해주시던 앞집 형님,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피땀으로 농사지은 수박이 한줄기 소나기에 다 갈라져도 몇 개 남지 않은 성한 놈을 골라 이왕 망한 농사 맛이라도 보라며 가져다주시던 바로 그런 이웃이 있어 나는 이제 어엿한 비나리마을의 주민의 한사람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공동체에 눈을 뜨고 더불어 사는 재미를 맛보게 했던 [청량산감자작목반]의 일원이 되고, 또 농촌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앞서가던 이웃의 손에 이끌려 [관북 팜스테이마을]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세상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 농사지어 내 가족 먹여 살리겠다던 나의 삶의 모토는 폐기되었다. 산골살이를 시작한지 오륙년이 지나면서 소위 다양한 공동체 사업, 특히 도농교류사업에 참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이 지원하고 주민이 주도하는 도농교류사업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세월이 가고 성과가 쌓이면서 이제는 농민회와 같은 농민 자치조직이나 협동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의 형식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도농교류가 먹거리의 공급처와 소비처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도시와 농촌을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고 이를 통해 도시와 더불어 농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도농교류의 일면성이 갖는 위험을 자각 하고 외부와의 관계보다 내부의 변화를 중심에 둔 사업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오직 ‘소득증대’만이 마을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주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가치기반의 공유와 귀속감 형성을 통한 정체성 확립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자각에 이르기도 했다. 나의 관심은 녹색체험마을과 정보화마을 사업에서 마을공부방이나 자활농장으로, 체험프로그램에서 동제나 초롱계같은 마을의 전래풍습으로, 도농교류에서 주민교육 중심의 “마을학교”로 관심의 중심이 바뀌었다.

이제 다양한 마을사업의 작은 성과로 ‘비나리마을학교’라는 외적 인프라와 그 ‘학교’를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혹은 가치를 빈약하게나마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주말이면 도시의 청년학생들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러 마을을 찾고, 주중이면 주민들이 같이 모여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지키고 고양시킬 다양한 배움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초라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조금의 시간과 좀 더 많은 열정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농사는 뒷전이고 이웃과 더불어 ‘비나리마을학교’를 통해 마을의 가치, 농업 농촌의 가치,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모으고 다듬어서 세상에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하루라도 빨리 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 주어진 일에 조갑증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나는 세상을 버렸지만 마을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마을살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재미를 찾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수 있었다. 그것은 땅을 일구며 누대를 살아오신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의 심원한 삶의 지혜에 내가 감화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을이 갖고 있는 유구한 역사가 전해주는 에너지에 내가 동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자신이 생애동안 내렸던 수많은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을 ‘귀농’이라고 자신한다. 그렇게 선택한 길은 온갖 위험과 유혹이 도사린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한참을 왔지만 아직 갈 길이 더 멀다. 나는 그래서 좋다. 쉽지 않고 또 멀기까지 한 길의 매력에 공감하는 분이라며 나는 스스럼없이 귀농을 권할 것이다.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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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8 유교문화재단 봉화군 포럼

마을문화자원의 발견 - 비나리 초롱계

초롱계의 재생이 마을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비나리마을학교

초롱과 주민의 삶

초롱은 어둠을 밝히는 수단이다. 초롱이 있어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올 때, 온기를 지키며 생명을 보존하던 ‘방’이라는 작은 공간에 스며드는 어둠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어쩌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고샅길을 걸어 이웃나들이라도 해야 할 급박한 처지가 되면 초롱은 어둠을 가르고 길을 여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 기구였다. 하지만 전기가 없던 시절 초롱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정도의 가치를 지닌 하나의 등불이라는 연장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초롱이 담고 있던 것은 단순한 조명기구의 의미를 넘어 삶의 온기, 인정, 안녕, 평화 이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따스함을 이웃과 나눌 때는 공동체 전체를 밝히는 어떤 삶의 지표, 공동의 가치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승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비나리초롱계란 무엇인가?

[초롱계]는 그와같은 초롱의 의미가 마을공동체의 삶속에서 구체화된 하나의 제도였을 것이다. 전쟁이나 난리, 돌림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재난이 닥치지 않았을 때조차 먹을거리마저 넉넉하지 못했을 산골 마을의 삶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선 아슬아슬한 하루살이의 삶과 진배없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삶의 조건 속에서 누대를 지나며 축적된 삶의 지혜는 더불어 사는 삶의 틀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마을을 지키고 삶을 보전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제도를 만들었을 것인데 초롱계는 그와 같은 공동체적 삶의 존속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롱계는 비나리마을은 물론 인근 고계리 등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전통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 큰일을 치루는 이웃에 초롱불로 부조를 하던 아름다운 풍습이다. 이웃에 상이나, 혼례가 있으면 온 마을이 집집이 한손에는 두부나 떡을 해 들고, 또 한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큰일을 치루는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웃을 도와 가며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나마 마음 넉넉하게 살아올 수 있게 했던 아름답고 지혜로운 전통이었다. 이웃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룬 주인은 그뒤 자신의 사정에 맞춰 적당한 금액의 돈을 초롱계 기금으로 내어 놓기도 하고 그렇게 모인 돈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운영되어왔다.

비나리초롱계의 현재

새마을운동으로 전통 공동체 문화가 쑥대밭이 되기전인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오던 초롱계는 그뒤 마을의 쇠락까지 겹쳐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현재는 동네 상여계와 합쳐져 그 본질적 내용은 유실되고 외형적 흔적만 겨우 유지되고 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는 변화는 마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초롱의 의미, 초롱계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뒤부터 초롱을 부조하던 전통은 사라지고, 초롱계의 형태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상여계’는 동네에 상이 났을 때 상주가 상여꾼에게 주는 노잣돈을 밑천으로 마을주민의 편리향상을 위한 다양한 일을 하는 기금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계다. 상여계의 기금은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마을행사 비용이나 마을 공용 비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고, 그러고도 남는 기금은 마을 주민중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이자를 물게 하고 1년단위로 빌려주어 기금을 유지하거나 불려나간다. 언제부턴가 비나리마을 초롱계는 마을 대소사 중 장례만 해당하는 상여계와 통합되어 구별되지 않게 되었지만 '초롱계'라는 이름만 남아 내용적으로는 상여계로 변형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올해도 음력 섣달 25일이 되면 어김없이 비나리마을 초롱계가 열린다. 그날은 마을주민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작년에 빌려간 기금을 이자와 함께 모으고, 지난 일년간 동네일로 쓴 금액을 제하고 나머지를 다시 필요한 주민에게 빌려주고, 그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친다, 그리고 나서 준비한 술과 음식을 나누며 주민 모두가 하루를 더불어 즐길 것이다. 하지만 비나리초롱계는 그 본질적 의미는 물론이고 그 외형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먼저 기금의 원천이 되었던 상여를 메지 못한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마을에 상이 나도 상조회사 같은 업체가 마을주민이 주도하는 상여계를 대신하게 되었다. 더 이상 기금은 들어오지 않고 지출은 계속하다보니 비나리마을 초롱계 기금은 고갈직전이다. 기금의 고갈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 제도의 존속을 위한 순환체계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 나도 상여 맬 젊은이가 귀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마을주민의 의식도 ‘합리화’되었다. 굳이 마을 상여계에 상을 맡겨 비용을 지불하는 것보다 상조회사에 더 적은 비용을 주고 깔끔하게 맡겨버리는 걸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상여계가 붕괴되는 과정이 지난 10여년 동안 진행되었다. 10여년 전만해도 동네에 상이나면 주민이 모두 상여꾼으로 나서고 상주가 내어놓은 노잣돈은 초롱계 기금으로 모였다. 하지만 마을에 인구가 줄고, 특히 상여를 맬 청장년이 줄어들면서 상여멜 최소 인원이 충당되지 못하자 초롱계 기금으로 모으던 노잣돈을 상여꾼의 일당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더나아가 얼마남지 않은 기금이 고갈되어가자 기금이 형성되는 데 오랜 기여를 해 오신 어르신을 중심으로 기금을 나누어 쓰고 없애버리자는 의견이 나오고 이 때문에 몇년간 논란이 이어지기 했다. 이제는 상여계의 중단, 초롱계의 소멸이 마을의 소멸로 나아가지 않을까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초롱계의 부활-비나리초롱축제

‘초롱계’는 ‘마을 동제’와 함께 마을을 유지 존속케하고 주민을 통합시키는 데 있어 양대축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마을동제가 동신을 중심으로 주민의 의지를 모아 신의 영역에 마을의 삶을 의지케했다면 ‘초롱계’는 마을 주민 스스로 자신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삶속에 체현해 나가던 제도이다. 마을 초롱계의 형식은 세월따라 바뀌었지만 이웃의 대사에 초롱을 부조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담고 있던 가치와 정신은 여전히 부식될 수 없는 핵심으로 남아있다. 그 가치와 정신을 마을살이의 여건 변화에 맞춰 새롭게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비나리 초롱축제'로 새롭게 태어났다.

몇년전 비나리산골미술관 개관식에 맞춰 초롱을 부조하는 초롱행렬을 개관식 참가객과 주민이 함께 재현한 적이 있다. 하나의 문화 이벤트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재현해본 초롱핼렬이었지만 세월따라 알게 모르게 침체되고 생기를 잃은 마을이 수많은 초롱행렬로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초롱행렬의 재현은 연년이 이어지지 못하고 예산의 벽에 부딪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끊어진 초롱행렬을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한 청량산 인근마을과 더불어, 주민과의 연대와 소통에서, 마을과 마을의 연대와 소통을 이루는 축제의 장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소멸되어가던 마을이 비나리초롱축제를 매개로 활력과 신명이 넘치는, 사람사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을이 가지된 하나의 작은 꿈이다.

지난 70년대 [새마을운동]이라는 관주도 마을 재생사업이 나름의 성과와 많은 부작용 속에서 마무리 된 뒤 마을 공동체 사업은 실제적으로 중단되어 왔다. 그뒤 지난 10여년간 비나리마을을 위시한 청량산권역 마을들은 마을자치역량을 중심으로 민간이 주도하고 관의 보조를 받아 마을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다양한 마을 사업을 진행하여 왔다. 이제는 마을 사업의 한축인 경제적 부흥과 더불어 또 다른 마을 사업의 한축으로 마을 공동체의 정신, 마을공동체의 가치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비나리마을 초롱축제의 재생은 그와같은 마을공동제의 가치와 정신을 새롭게 구축하고 실현해 나가기 위한 의미있는 마을운동의 일환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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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있은 [협동조합 운동가 양성 집중교육]을 다녀왔다.

28일 아침 태풍 볼라벤이 서해로 올라오는 시간에 봉화를 출발해,

태풍이 서해안에 상륙할 때쯤 교육이 진행대전에 도착했다.

 

이번 교육은 지금까지 '전국농민회총연맹'과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의 주관으로

주로 '농협 개혁'을 위한 운영실무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것을

최근 협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놓아짐에 따라

'협동조합' 정신과 의의 등에 대한 농민의 이해를 높이기위한 강좌를 중심으로 만든 과정이다.

 

봉화군 농민회 명호지회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본주의의 고통을 줄여주는 사회적 장치 정도가 아닌가하는 이해만 가지고

마을 사업을 현재의 영농조합법인 형태에서 '사회적 기업'을 거쳐

'협동조합'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리고 협동조합이 정확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사례들이 있는지

배우기 위한 확인 차원에서 이번 교육을 참가하게 되었다.

 

원래 제주도가 교육장소 였지만 태풍으로 항공기가 결항되면서

급히 대전의 카토릭 청소년 수련관인 대철회관으로 교육 장소가 변경되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와중에 도착해 보니

50여명의 수강 신청자 중에 열두어명만이 참가를 했고,

예정시간을 넘긴 오후 2시쯤 강의가 시작되었다.

 

 

 

 

첫날 강의는 장원봉 사회투자지원재단 상임이사님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이란 주제의 강의와

녀름연구소의 이호중 팀장의 [괴산불정농협의 성과와 과제]라는 사례 발표로 진행되었다.

막연히 알고 있던 협동조합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진행되어왔고

무한 경쟁이 전일화된 신자유주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존립하고 작동하고 있는지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예천 참우작목반 최병용 대표의 발표는

나같은 농민에게도 희망을 주는 값진 사례였다.

 

다음날은 스페인의 몬드라곤 사례를 통해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파고로 부터 어떻게 인간적 삶을 지키고 고양시킬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이어서 한겨레 두레공제조합 연합회 대표이신 박승옥님으로부터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리,

혐동조합운동사 등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예정되었던 남무현 불정농협협동조합장님의 강의는

조합장님이 태풍으로 인해 농작물 피해가 극심한 현장을 떠날 수 없어 무산되었다.

 

이번 교육을 통해 앞으로 비나리마을 사업을

어떤 전망을 가지고 해 나가야할 지 길을 찾는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막연한 마을 활성화는 물론 아니지만,

마을공동체의 심원한 내적 변화는 어떻게 도모해 나갈지 고민이 많았고,

특히 변화과정에 마을 주민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낼지

작목반의 형태서 부터 여타 다양한 마을 사업의 실험들을 진행해 왔지만

사실 뚜렷한 답을 차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협동조합'은

좀 더 구체적인 마을사업의 바람직한 상을 만들어나가는데

충분한 범례가 되는 것 같았다.

특히 몬드라곤의 사례는 가슴뜨겁게 다가왔고

예천참우의 사례는 우리가 가진 희망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이번 교육을 통해 이해한 협동조합은 이해에 기반하지만 경쟁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내의 신뢰와 협동에 기초해서

사회적 경제를 이뤄내는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협동조합은 공동체 구성원의 생활경제의 틀을 보다

협력적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삶' 자체의 변화를 도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영농조합법인 형태로 시작한 비나리마을 사업을

앞으로 협동조합의 형태로 나아갈 수 있기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맨 바닥으로부터의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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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 서른 분을 모시고 이틀간(8/13~14)의 선진지 견학을 잘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선진지 견학을 다녀왔지만 이번에는 쫌 특별한 견학 길이었습니다. 비슷한 조건의 농산어촌의 선진 마을이 아니라 첨단 문화를 대표하는 서울과 그 인근의 색다른 코스를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마을사업, 특히 도농교류사업을 위해서는 우리를 객관화해 보고 현대적 도시 문화도 경험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이번 견학 프로그램을 짜게 되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아래 다음과 같은 3곳의 견학지를 선정했습니다. 시민운동을 토대로 해서 도시 속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서울 마포구의 [성미산 마을]과 한국의 건축, 미술,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예술을 집약해 놓은 파주 헤이리 마을의 [쌈지농부], 그리고 대안적 청소년 문화를 대표하는 서울 영등포의 [하자센타]가 그곳입니다.

 

이번 견학코스를 정하면서 혹시라도 어르신들이 재미없어하지나 않을지, 시민문화, 청년문화에 거부감이라도 느끼시지 않을지 많을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희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희의 걱정과는 반대로 어르신들이 더 도시 청년들의 역동적 문화에 접해보시기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의 요구로 서울의 문화 중심지 인사동 견학을 추가 코스로 잡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미산마을 견학은 먼저 주민의 자발적인 출자로 운영중인 유기농식당인 성미산밥상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시민공간 나루]로 이동해서 마을 실무자로부터 성미산 마을의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공동체 사업들과 그 의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미산마을은 기본적으로 주민 자체 역량을 중심으로 해서 주민의 필요에 따라 주민의 손으로 직접 해 나가는 도시 속 마을공동체 운동의 사례를 보여주는 드문 경우였습니다.

 

성미산마을은 농촌마을과는 달리 시민역량의 면에서 탁월한 조건이지만 마을의 지리적 경계가 막연하고 주민의 공동체 의식이 미약한 측면은 공동체사업을 하는데 있어 어떤 한계로 느껴졌습니다. 이점은 농촌 마을의 공동체 사업과 정확히 반대조건인데 농촌마을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부족, 주체 역량의 부족으로 고통 받지만 마을의 경계가 정확하고 주민의 공동체의식이 아직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미산마을은 그런 조건에 맞게 공동육아사업을 시작으로 해서 성미산 개발 반대운동, 그리고 그렇게 모인 시민의 주체역량을 기반으로 해서 유기농식당, 대안학교, 마을축제, 마을공방, 공동체주택 사업까지 지역 커뮤니티 전체를 비체계적이지만 다중적으로 묶어 내는 나름의 방식을 통해 도시 속 마을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내고 있었습니다. 조직이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바람직한 삶의 추구라는 가치기반에 토대해서 인간미를 상실해 가는 도시의 삶에 공동체정신을 불어 넣는 성미산 마을 사업의 사례는 농촌 마을 공동체 사업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두 번째 견학 장소인 파주 헤이리에 도착해 먼저 현대적 건축과 예술이 만들어낸 [헤이리 예술마을]을 산보했습니다. 이어서 [쌈지농부]에 들러 천호균사장님으로부터 강의를 들었습니다. 큰 기대하지 않았던 천호균님의 강의는 그야말로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노숙인 같은 차림으로 등장해 자신은 농업의 가치를 어떻게 예술과 결합해 실현하고 있는지 토로하시고, 농업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농민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설파하셨습니다.

 

 

우리 예술가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어떤 권력 앞에서도, 대통령 앞에 가도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농부 앞에만 가면 기를 펴지 못합니다. 왜냐? 농사는 가장 숭고한 창조 작업으로 예술은 농사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낯선 차림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 설득력을 잃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어르신들의 반응은 무덤덤했고 차라리 그분의 그런 자유스런 차림에 신기해하고 친근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강의와 그에 이은 자유토론을 통해 청량산비나리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예술가들이 농업과 농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고 주민들이 농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껴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첫날 견학을 마치고 다음 날은 영등포구에 있는 [하자센타]를 들렀습니다. 농촌마을 사업과 [청소년 대안적 직업 교육 기관][하자센타]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하자센타 실무자 분부터 당황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시 청소년 문화의 흐름을 느껴보고, 요즘 청소년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 점에서 좋은 견학지가 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주민의 신뢰와 협동에 바탕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추구하는 측면과 요즘의 청소년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아 공동의 직업을 직접 만들어내고 같이 운영하며 살아감으로써 청년실업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 내는 모습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성공적인 사례를 접해 본 점 만으로도 [하자센타] 견학은 충분히 우리 목적에 부합하는 견학지가 되었습니다.

 

 

하자센타 견학을 마치고 봉화로 돌아오는 일만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몇몇 어르신을 중심으로 이왕 서울에 왔으니 좀 늦게 집에 도착하더라도 서울의 중심부 인사동에 들러 서울 사람 살아가는 모습 좀 보고 가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관광 요구로 받아들이고 이 제안을 거두어들이도록 설득할 수도 있었지만, 그분들의 요청은 도농교류 사업을 하는 농촌사람들이 도시 문화의 진수를 경험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요청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더위와 따가운 햇살 속을 걷는 고행에 가까운 인사동 탐방이었지만 역동적인 도시민의 삶속에서 느끼는 생동감 덕분인지 아무도 힘들어하거나 불평하는 일 없이 열심히들 보시고 배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르신 중의 한분은 쌈지길 탐방중에 도시 사람들은 농촌스러운 것을 갖다놓고 장사를 하는데, 우리 농촌사람들은 농촌 한가운데다가 도시스러운 것을 가져다 놓고 장사를 하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견학을 통해 도시적 삶과 농촌의 삶을 비교해보시고, 도시 속에 수용된 농촌스러움을 세밀하게 관찰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청량산비나리마을 어르신들은 12일동안 무리할 만치 빡빡하게 잡은 일정을 너무나 잘 소화하셨습니다. 이번 견학을 통해 농업의 의미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에게는 고역에 불과한 농업의 가치가 어떻게 되살어 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견학은 주민 한분 한분이 농부의 한 사람으로 농업과 마을공동체가 새로운 시대를 풍미할 새로운 화두로 회자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경험은 가슴 벅찬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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