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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영양군 수비면에 있는 [우리손배움터]에서 반가운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부활을 추동하는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님을 모시고 같이 배우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답니다.

이번 자리를 준비한 영양의 젊은 일꾼들이 부럽기도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피폐해가는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지역의 젊은 일꾼들이 한분이라도 더 참가하여 좋은 뜻을 나누고 같이 배우는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마을만들기'를 설파하지만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서 쉬 농촌 주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농촌 마을 밖에서는 마을만들기를 외치지만 정작 마을안에서는 반향이 없고, 생태나 환경에 대한 논의들도 마을안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유는 마을 안과 밖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한 그로인해 마을밖에서 마을에 바라는 요구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기할 것입니다. 이런 갭을 해결하는데 박원순님의 오랜 경험과  지혜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재 진행중인 비나리마을 사업을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전망을 세우고 있는 마을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시없는 좋은 교육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가치지향으로나 실무적 지침으로나 큰 힘을 얻는 귀한 기회가 될 이번 강연에 경북 북부지역 시군의 농민들이 많이 참여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봉화 명호지역의 젊은 일꾼들은 당일 강연이 있는 영양 수비까지 함께 이동하기로 하고 더불어 [박원순의 희망열차]에 우리의 작은 힘이나마 더한다는 의미에서 봉화지역에 2~3장 정도의 플랭카드를 우리 힘으로 제작해 게시할 계획입니다.

농촌! 농민들 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민을 포함한 모두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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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마을 네트워크]가 제천 대전리에 [마을 이야기 학교]를 펼쳐놓은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번째 마을 기획전을 가진다고 했다. 오래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은 살려 마을주민의 발길을 모으고, 지난 겨울내내 주민의 열의를 모아 마을기획전을 마련했단다. 지난 토요일, [생전 처음]이라는 이름의 마을기획전이 궁금하기도 했고, 예마네 식구님들도 보고싶은 마음에 문경 사불암 걷기 모임에 갔던 길에 바로 대전리로 향했다.
 
오픈시간이 오후 2시로 잡혀있었는데 우리가 대전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교정에는 예마네 대장이신 김정헌선생님께서 방송국 카메라앞에서서 인터뷰를 진행중이셨다. 눈인사만 나누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이미 전시 오픈식은 끝났고, 이날 전시의 주인공이신 주민들과 손님들은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교실 한켠에는 오픈 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다시 복도로 나와 전시 공간과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복도에서 부터 전시를 펼친 한 칸의 교실에는 주민의 열정이 담긴 자화상에서 부터 풍경화, 그리고 겨울내내 공부했던 국어공부 영어공부의 흔적들, 그리고 입주작가의 도움으로  만든 돌 전각 작품과 이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그들 강좌에 참여하고 과정을 마쳤음을 증명하는 수료증까지 온갖종류의 작품들이 작은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으로 붓을 들었고, 영어를 공부했고, 그리고 마을 행사의 주인공이 되신 주민들의 작품은 오래전 바로 그 교실을 채웠을 아이들이 일으켰을 소란과 열기를 되살려주고 있었다. 소박한 전시물들을 산만하게 배치하여 더더욱 지난 시간의 아이들이 북적거렸을 정감 넘치는 교실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나는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오신 김정헌 선생님과 박명학선생님 그리고 송이양과 송이양의 친구와 함께 손님들이 다 떠난 오픈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나누었다. 그동안 예마네의 활동에 대해 듣기도하고, 나의 비나리 마을 사업에 대한 말씀도 드리면서 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전리분교 교정에 저녁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교실을 나와 수리중인 교장사택을 같이 둘러보고, 해가 지는 교정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벌써 수리해서 숙소로 사용중인 교사사택에 다시 모여앉아 송이양 친구가 난생 처음으로 만든 돼지등뼈감자탕을 안주로해서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야기 학교"는  작년에 만화가 한분이 입주하면서 상설화되었고, 그분들의 자발적 봉사로 주민과 함께하는 한글교실, 영어교실, 그림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겨우내 진행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김정헌 선생님이 마을노인회에 가입한 이야기며, 예마네 식구들이 마을주민과 친해져가는 과정도 듣고, 또 도시이주민들의 친화력 부족과 주민과의 불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번 전시가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쓸쓸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이날 전시가 있기까지 예마네 식구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생활근거지인 서울에서 계속 오고가며 길에서 보낸 비용과 시간도 그렇고, '대중문화활동'이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 작업과의 괴리를 감수해야하는 부분도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 같았다.

아직도 교사는 자비를 들여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젊은 만화가 한분이 아예 입주를 해서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학교가 상시 오픈되고 온기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겨우내 시설 여기저기는 동파라는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부 공모에 참여해 기금을 받기도 했지만 산출없는 마을사업에 지속적으로 자비를 투여해야 하는 점도 마을과 문화예술인의 관계맺기를 가로막는 큰 장애로 작용할 것 같았다.  

사실 마을과 예술가의 관계맺기를 도덕적 차원,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요청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범적 사례를 도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알려진 몇몇 예술가의 경우를 보아도,  20여년을 넘어 마을에 정착해 작업하면서 마을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진행해 왔지만 성과는 더디고 삶은 너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예술가가 살아가기에는 마을에 예술가가 숨쉬고 살아갈 삶의 공간이 쉬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또 예술가 자신의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삶 전체를 싣는 '마을로의 이주'를 결행하지 않고도 물론 다양한 결합방식이 있고, 이것이 보다 현실적이기도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또 마을이 대상화되고,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투영되거나, 외부에서 마을에 일시적으로 투입된 문화 예술적 자원이 마을과 어떤 트러블을 일으키기가 쉬울 것같다. 마을이 '작업'에 이용되기만 하고 마을주민이 향유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 '예술'이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속에 들어와 삶속에 녹아들지 않는 이벤트성 문화예술 '행사'는 마을에 활력을 증진하는 긍정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어쨌던 예술가가 마을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을 공동체에 문화예술의 향유기회를 넓혀나가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거듭나게하는데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생존방식과 관계형식을 창출해야하는 과제를 더불어 짊어지고 나가야하는데 이는 사실 작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사실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마을은 또 뭔지 잘 모르겠다. 예술이 마을주민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기도하고, 예술마을이 예술인의 동호인 마을이 아닌다음에는 입주한 작가에게 너무 큰 부담으로 과제가 부과되기도 하기에 쉽게 예술마을을 주장하기에는 두렵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주민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을을 넘어 주민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꿈꾸지만 맑스가 말한 "노동자 농민이 동시에 예술가이지 철학자인 세상"의 꿈만치나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직은 공동체 문화활동가는 외로운 혁명가일 수밖에없고 그러다보니 예술마을은 [예술마을네트워크]로  조직화되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또한 힘든 길이기도한 [마을예술네트워크]의 활동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발고 미력하나마 그들이 가는 길에 한발 걸치고 뒤따라라도 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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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어제 오전 비나리마을 청년들이 모여

마을길에 접시꽃을 심었습니다.

올봄 일찍 포트에 파종을 하고 접시꽃 모종을 길러 왔습니다.

고추 정식도 끝나고 모종 하우스가 비어가는데, 마지막 남은 접씨꽃 모종 포트를

트럭에 싣고 마을 안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빈터마다 심었습니다.

온 동네가 모내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자신의 일을 잠시 뒤로 미룬채

은혜아빠, 와우네, 산이네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서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을 안길은 마을 주민 모두의 정원입니다.

그렇지만 다들 농사일에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항상 풀만 우거지고 가꿀 틈이 없었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마을총회에서 마을안길 꽃길가꾸기에

사용해라고 30만원의 식대를 배정해 주셨습니다.

은혜아빠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함께 마을 길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올해는 우선 접시꽃으로 마을 길을 장식하지만

내년에는 길 둔덕마다 개나리를 심고

노란 국화를 심을 계획도 세웠습니다.

마을 청년들이 같이 마을길을 가꾸면서

서로 마을 일을 걱정하고,

마을의 미래상을 논의해 보는 것은

어쩌면 꽃 몇포기보다 더 가치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을을 어떤 마을로 만들어나갈 것인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그 공통 분모를 찾아

최소한의 실천을 해 나가는 마을의 미래는 밝기만 합니다.

 

접시꽃이 활짝핀 마을길을 미리 상상해보고

마을의 인심도, 마을의 미래도 접시꽃처럼

넉넉하고 아름다운 세월을 꿈꿔봅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있고,

또 그 가치에 반해 그 삶을 닮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비나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세상 모든 마을이 다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득 차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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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박을 예감케하는 비나리패션을 소개합니다.
비나리하고도 웃마, 고개하나 넘으면 역계땅이 지척인
대추나무골 새주인 비나리마녀가
올 한국 패션계를 강타할 신작 비나리패션을 선보였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알지만
모르는 분은 또 다 모르는 이제 고작 귀농한지 서너달 된
민서엄마 비나리마녀께서
올 봄 선보인 비나리농부패션은
농사를 지어도 한 50년은 지었을 것 같은 농부의 포스가 느껴지는
최고의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작품입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오신 동네 할머니들이 보면
뒤로 자빠지질 만한 농부패션을 자랑하시는 비나리마녀님은
올해 무려 300여평의 밭에 감사, 고구마, 고추 거기다가 야콘과 옥수수까지
온갖 농사를 다 지을 예정이랍니다.
벌써 아랫골 100여평에는 부지런히 심은 감자가 뿌리를 내리고
오늘내일 봄 햇살 속으로 싹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비나리마녀네는 패션만 농부스러운게 아니라
마을주민들과 어울려 벌써 비나리마을 주민의 한 가족으로
알콩달콩 이쁘게 생활하시는 모습도 참 이쁩니다.
오랜세월 한마을에 살면서 터득할 수 있는
농촌공동체의 생활방식을 선천적으로 타고 나신 분 같습니다.

다음 달이면 소위 흙부대공법으로 멋진 집을 짓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의 터전을 가꾸어나가실 것입니다.
우선은 1500여평의 대추나무밭을 가꾸며,
소박한가족의 생계를 잇고, 마을공동체에 뿌리내리기 위한
다양한 모색을 해 나가실 계획이랍니다.

 다음달부터는 명호밭두렁공부방에서
명호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태권도도 가르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귀농직전까지 부산에서 부부가 같이 태권도도장을 운영하신 노하우도 살려
지역 사회에 봉사도 하고 주민들과도 어울려 나가시기위한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비나리마녀님과 서방님, 아들 민서, 딸 지형이 그리고 새식구 강아지 와우까지
다섯식구가 마을에 들어오신지 몇달되지 않지만
여러가지로 새로운 생활을 잘 적응해 나가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만 비나리에 귀농을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인심좋고 아름다운 마을 비나리에 살게되면
누구나 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작은 마을 비나리엔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비나리마녀네 블로그 : http://blog.naver.com/bada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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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면소재지 명호농협 경제 사무실에
엔진 톱 윤활유를 사러 간길에
이웃 고계리 형님을 한분 만났습니다.
이 형님은 새마을 지도자로
청량산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저랑 같이 활동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형님께서는 평소에도 친절하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이날따라 특별히 반가워하시며
잠시 부탁을 좀 할게 있다며 저를 잡아 끌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부탁을 듣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마을 기록 공원] 사업 추진 기획서를
한장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의 입을 통해 들은 내용에
저 자신의 생각을 곁들인 이 사업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계리는 고인돌이 많은 마을인데
그 고인돌이 개발의 여파로 하나둘 사라져 왔고 이제 몇 기 남아 있지도 않다.
마을의 유구한 역사의 상징과 같은 고인돌이 사라지듯,
마을 주민들도 계속 줄어왔다.
지금 같아선 언제 마을마저 사라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2. 마을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기존 마을 구성원은 늙어가고
귀농자들이 새로 들어온다고해도 마을의 정체성, 연속성을 사라질 수 있다.

3. 따라서 지금까지의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겨
마을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고
후대까지 마을에 대한 사랑을 보전하도록 한다.

4. 그를 위해  생존해 계신 어른들을 중심으로 
앞 뒤 2~3대의 가문 조사를 해서 책으로 묶고, 
지금까지 마을에 보관하고 있는 초롱계, 두레 관련 문서를 정리하여
보존 처리를 하자.
 
5. 내년에 마을종합개발사업으로 마을 전체를 돌담장을 쌓는 등 마을이
획기적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마을의 요지에 평소에 마을주민의 쉼터이자,
마을 잔치 등을 열수 있는 마을광장으로 기능하는
'마을기록공원'을 만들어, 고인돌을 마을 상징물로 세우고,
그 아래 마을역사기록물 등을 담은 타임캡슐을 묻어 영구 보관토록하자. 

여기다가 사업 추진위 구성부터, 재원조달, 사업의 절차 등을 추가하는
세부 기획을 이번 주말에 초안 수준에서 완성할 계획입니다.

사실 이번 사업 제안을 받고 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를 비롯해 지역 사회에 나름대로 대학고 나오고 
도시생활의 경험도 있는 젊은 주민들이 드물지 않게 있지만
이렇게 마을 공동체의 유구한 삶에 대한 사랑과
그 미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희생적으로 이를 복원하고 보전하는데 나서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50대 중반의 마을 주민이 그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몸소 실천하는 모습은 저에게 큰 같동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형님의 부탁을 받고 저는 흔쾌히 이 작업에 동참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워낙 취지가 좋은 일이다보니
저는 바로 그 마을의 주민이 아니라
이웃마을 주민일 뿐이지만
저가 랄 수 있는 문서작성이나 자료정리,
사업설명 등이 필요할 경우 등을 통해  무한 봉사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더 큰 배움을 얻고 또 다른 형태로 발전시킨
마을을 보전하고 사람의 온기가 넘치는 마을을 만드는 일에
활용해 나갈 것입니다.

사라져 가는 마을,
마을 역사를 살려서 마을을 보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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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력으로 섣달(12월) 25일로 비나리마을 초롱계가 있는 날입니다.
초롱계는 비나리마을의 전통으로 전기가 없던 시절,
큰일을 치루는 이웃에 초롱불로 부조를 하던 전통으로부터 전래되었습니다.
이웃에 상이나, 혼례가 있으면  집집이 한손에는 두부나 떡을 해 들고, 
또 한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큰일을 치루는 집으로 향했답니다. 
그렇게 이웃을 도와 가며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나마
마음 넉넉하게 살아올 수 있게 했던 아름답고 지혜로운 전통이었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룬 주인은 그뒤 자신의 사정에 맞춰
적당한 금액의 돈을 초롱계 기금으로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전통 공동체 문화가 쑥대밭이 되기전인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오던 초롱계는 그뒤 마을의 쇠락까지 겹쳐
그 흔적만이 남아 동네 상여계와 합쳐져 유지되고 있습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나서 초롱을 부조하던 전통은 사라지고,
초롱계의 형태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네에 상이 났을 때 상주가 상여꾼에게 주는 노잣돈을 모아
여러가지 마을행사 비용이나 마을 공용 비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고,
그러고도 남는 기금은 마을 주민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일정한 이자를 물고 1년단위로 빌려주는 '계'가 '초롱계'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초롱계 날은 그렇게 빌려간 돈을 이자와 함께 모아서,
지난 일년간 동네일로 쓴 금액을 제하고
나머지를 다시 필요한 주민에게 빌려주고,
그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치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주민 모두가 하루를 즐기는 그런 날입니다. 

비나리마을 초롱계 기금은 이제 몇백만원 남지 않았습니다.
10수년 전만해도 동네에 상이나면  이웃 주민이 상여꾼으로 돕고,
상주가 내어놓은 노잣돈은 초롱계 기금으로 모았습니다.
하지만 마을에 인구가 줄고, 특히 상여를 맬 청장년이 줄어들면서 
초롱계 기금으로 모으던 노잣돈을 상여꾼의 일당으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해가 갈수록 기금이 줄어들어
앞으로 몇년이나 더 초롱계가 이어질지 걱정입니다.


초롱계의 형식은 세월따라 바뀌었지만 이웃의 대사에
초롱을 부조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비나리 초롱축제'로 새롭게 태어날 예정입니다.
몇년전 비나리산골미술관 개관식에 맞춰 초롱을 부조하는 초롱행렬을
개관식 참가객과 주민이 함께 재현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따라 알게 모르게 침체되고 생기를 잃은 마을이
수많은 초롱행렬로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초롱행렬의 재현은 연년이 이어지지 못하고
예산의 벽에 부딪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끊어진 초롱축제가 곧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한 청량산 인근마을과 더불어,
주민과의 연대와 소통에서, 마을과 마을의 연대와 소통을 이루는
축제의 장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늦어도 내년가을이면 재현될 비나리초롱축제를  
올 한해 내내 조사하고 궁리하여 멋들어진  마을 축제로 준비해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소멸되어가든 마을이 비나리초롱축제를 매개로 활력과 신명이 넘치는,
사람사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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