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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청량산비나리마을 정보센타에서
개방형 블로그 활용 교육이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중에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운영중이거나
앞으로 운영할 의향이 있는 10여분이 한자리에 모여
최일규 강사님(씨앤제이 대표/경북 경산시)의 열강을 들었습니다.
막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한 저와 나무아빠,
막 귀농하셨지만 올해 당장 대추를 팔아야할 민서네 부부,
밭두렁 공부방 블로그를 운영할 생각이신 김종미 선생님 내외분,
마을종합개발사업 사무장이신 정근영아씨 등
우리 마을의 젊음이가 거의 총출동을 했습니다.


도대체 블로그가 무엇인지,
특히나 개방형 블로그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는 물론 
개방형 블로그를 대표하는 티스토리는 어떻게 만들고 운영해야할지
저녁 늦은 시간까지 식사도 거르고 최일규님 강사님께서 열강을 해 주셨습니다.
수강생 10명인 소박한 교육이다보니 편하게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우스개 소리도 주고 받으며 밤깊어가는 줄 모르고 교육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 모레까지 계속될 이번 교육을 통해
마을에는 갑자기 트위터와 아이폰 같은 첨단 IT정보를 갖춘
티스토리 블로그 운영자가 늘어날 것 같습니다.


밤 10시가 다 되어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마을 운영위원장이신 김신현 형님께서 
안동찜닭이며, 닭튀김에다가 맥주까지 한 보따리 사들고 
찾아 주셨습니다. 
교육에 참여해주신 주민들도 고맙고,
밤 늦도록 열강해주신 강사님도 고맙고,
밤늦은 시간 참까지 공수해 주신 위원장님도 너무 고마웠습니다.

강사님과 교육생이 함께  밤참을 먹으며
강의 시간보다 더 열띤 토론과 정보공유의 시간을 자정이 다 되도록 이어갔습니다.
서로의 블로그를 평가하고, 자신의 블로그 운영과정에서 느낀 문제의식도 풀어놓고 함께 고민하면서 맥주를 한잔 나누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번 교육을 통해 어떻게 저 자신의 조건에 맞는 포스팅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농촌의 정보화를 이루기 위한 '농촌 정보화마을 사업'이
언제부턴가 투입대비 효율이란 잣대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언론이나 정치권으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는다고 하지만
정보화마을 주민의 입장에서 '정보화마을사업'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이렇게 마을 주민이 모여 밤늦도록 첨단 IT에 대한 정보도 습득하고
블로그 운영 등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다 '정보화마을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꾸는 청량산비나리정보화마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람살만한 마을로 이어져 나가것이라 생각됩니다.
청량산비나리정보화마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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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상세보기


'선진'이란 개념이 한국인의 삶을 토끼몰이하는 절대 명제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정권때 부터일 것이다. 그 시대부터 '수출입국'이란 모토로 국민을 몰아세우고, '선진국'이라는 이상향을 국가의 미래상으로 삼아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공동체나 환경 등의 가치를 '경제'에 종속시켜왔다. 불행히도 당시 절대적 가난에 처해있던 나라 사정에 비추어 봐서 일정정도 개발독재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는 자들에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초기 자본축적의 폭력적 과정이 불가피한 자본주의의 발전 경로인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결국 궁정동의 총소리로 개발독재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모토는 개발독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넘어 한국인의 삶을 규정하고 모든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는 절대성과 더불어 아무데나 갖다붙이면 되는 보편성마저 획득하게 되었다. 그로말미암아 사실 '선진'이란 개념은 애매모호성을 더해가며 급기야 몰개념화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고 '선진'의 망령은 사라진 것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국민의 뇌리에 내면화된 선진병은 급기야 이명박이라는 기형정권을 낳았고 시대착오적인 정권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MB정권이 출현하자마자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선진노사관계, 선진 정치문화, 선진 농업, 선진, 선진, 선진... 이란 단어를 다시금 듣게 되었는데, 선진'이란 개념은 오랜세월 잠복해 있으면서 몰개념화를 넘어 개념변신까지 해 버렸다. MB정권에 의해 '선진'은 가장 낡은 것을 가리키지만 가장 앞선 것을 가리킨다는 환각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악마의 주문이 된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는 없고 오직 자본가의 이익에 복종하는 노사관계가 '선진'노사관계가 되었고,야당도 안중에 없고 비판언론도 없고  정권이 입맛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선진정치'란다.  농민이 다 죽어 나가도록 농촌의 초토화를 앞당기는 것이 바로 '선진 농업 정책'이라 하고, 대미종속과 대북 대결주의의 확대를 '선진외교'라 한다. 
이런 세상에서 고노무현대통령께서 생을 마감하시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는 책이 바로 이책 '유러피언 드림'이다. 유럽피언 드림은 진정한 선진이 무엇인지를, 우리사회가 미래에 구현해야될 사회의 전형, 가치지향은 무엇이어야하는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정명(正名)은 허위와 기만이 난무하는 혼탁한 시대일수록 꼭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문명비판적 입장에서 현대 사회를 이끌던 가치인 '아메리칸 드림'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유러피언 드림'이 리더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제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단순히 인류가 지향해야할 가치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시장자본주의가 이끌어왔던 구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미래지향적 프로젝트로, 지금까지의 세계는 개인의 사리추구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면 다가올 사회는 공공선, 복지의 극대화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하는 역사적 동인을 시민사회의 성장에서 찾았고, 그 최종적 실현 형태를 탈국가화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 보았다.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민족국가라는 영토기반사회는 약화되고, 탈영토 탈국가화한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출현하는데 이는 영토기반 의무(국방의 의무 등)와 재산권에서 탈피해 집단 참여, 보편적 인권에 기반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사회기구(Civil Society Organization)라는 시민권력의 출현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국가가 후퇴한 자리에서 시장 권력의 절대화가 완성되었지만 이제 시장권력은 시민사회기구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추동하는 세력을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사회기구로 대체한 제레미 리프킨의 시각은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지만 현실성있는 노동개념의 정리가 뒤따른다면 필자가 제안한 CSO개념을 꼭 거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유러피언드림]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필자의 주장이 곧바로 우리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내리는 적실성 있는 진단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이제는 우리 국민이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망령을 떨쳐버릴 때도 되었다. 박정희를 밟고 넘어서는 지점에서 진정한 선진화가 시작될 것이다. 이 정도의 경제적 발전이 있기까지 박정희가 기여한 몫을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가치 지향을 어디에 둘것인가를 두고 볼 때 이제 박정희식 개발독제 패러다임, 아메리칸 드림은 그 효용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나야했기 때문이다.

 

유러피언 드림이 품고 있는 가치와 핵심 개념을 나열해 보는 것으로 리뷰를 마무리해보자.

보편적 인권, 개방적 네트워크, 공감,다단계 통치체게, 포괄성, 자연의 내재적 가치, 자연과의 연대, 시스템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도덕성...

이들 개념을 나열하다보면 '불교적 세계관'을 일정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유러피언 드림은 아시안 드림의 서구버전인지도 모르겠다. 더 공부가 필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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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우리집 마당 앞 언덕 소나무에 메달린 스피커에 
이장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오늘은 농자금을 분배하는 날이 오니 주민 께서는 각 반별로 ..."
9시30분에 마을회관에 갔습니다.
미리 나와계신 반장님과 주민 몇몇분이 한상 둘러앉아
농자금 이야기는 뒷전이고 고추모종이며, 날씨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농자금은 농사 규모와 주민 수에 따라 각 마을별로 배당된 1년짜리 저리 융자금입니다.
가구별로 1000만원이 한도이고, 융자 절차는 다른 대출상품보다 훨씬 간편하고 이자도 연리 3%에 불과합니다. 그 이자조차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시군 예산으로 전액 보전해주거나 하는 경우도 있고 우리 봉화군은 50%를 나중에 돌려줍니다. 그러니 실 이자는 연 1.5%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자율만 놓고 보면 '와 농촌은 좋겠다'고 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농업현실에서 1.5%의 이자조차 결코 만만한게 아닙니다.
농업 생산성이 그만치 낮고, 농산물의 상대적 가치가 그만치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도 우리 동네에는 대출금이 연체되어 논밭이 전부 경매에 넘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한해한해 가면갈수록 이동네 저동네에서 한 농가, 두 농가가 그렇게 무너져 내립니다.
올해도 벌써 어느 동네 어느 분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식의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농가평균소득은 지난 9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줄어 도시가구 평균소득의 65% 전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매년 실질 소득은 줄어들고 도시와의 소득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연리 1.5%짜리 농자금도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당장 저부터 이자만 갚고 아직 갚지 못한 작년 농자금을 대환하면 
그뿐입니다. 마을회관에 모인 이웃들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두들 돈 들어갈 때는 많고 소득은 없으니 어쩌다 생긴 빚을 갚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한국 농촌의 현실입니다.


사실 아무리 농촌이 어렵다고 아우성쳐도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정부의 정책적 배려는 포기한지 오래고, 그냥 자연감소와 사회적 이탈을 통해 지금 농가인구의
1/4정도를 적정 농가인구로 보고 비대한 농촌인구를 자연스런 과정을 통해 적정인구수준으로 끌어내리겠다는게 그 잘난 정책당국의 속마음이니... 어쩝니까? 그냥 열심히 농사지어 개인적으로라도 살아남아야죠^^*

농자금 나누는 날은 왠지 우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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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부터 이웃 은혜네 집 비닐하우스에
마을 젊은이가 모였습니다.
마을 젊은이라고 해봤자 50대 중반인 은혜아빠와
내일모레면 50인 저가 거의 전부였는데
근년에 귀농하신 40대초반인 꺼굴재 정형과 30대 후반인 양지마 은서아빠가
함께 하시니 진짜 '젊은이'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지만 50대 과수원집 한형과 개울건너 김형이 합류하다보니
그럴듯한 마을 일꾼이 마을 꽃길가꾸기에 다 나선 셈입니다.

이날 할일은 마을을 꾸밀 접시꽃을 포트에 파종하는 일입니다.
상토를 날라 포트에 담고, 포트에 한알 한알 접시꽃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몸으로 하는 일이 대부분 다 그렇듯 처음에는 별거아니네 하고 시작하지만
시간이 가고 허리에 피로가 쌓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허리야, 와이리 일이 더디노?"라며 중얼거리게 됩니다.

다행이 아침 9시30분부터 따뜻한 비닐하우스안에서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 나누며 정겨운 이웃과 
접시꽃씨를 심는 정취는 이곳 산골마을살이를 하는 사람이아니고는
맛볼 수 없습니다.
은혜 아빠가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접시꽃 만발할 때 도종환시인 함 마을에 청하면 어떨니껴?"
옹기종기 모여낮아 꽃씨를 심던 사람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침니다.
"좋십미더. 도종환 시인 청해갔고, 마을 잔치도 하고, 축제도 하면 좋겠는데예!"

그렇게 일은 점심께가 되자 마무리되고
모두들 아쁜 허리를 펴고 뒷정리를 한뒤,
모두 같이 맛난 점심을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이날 따라 비나리마을이 더욱 아름다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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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읽고
 

뉴욕의 다섯 자치구중 하나로 <브루클린>은 '브루클린 다리'로 맨하턴과 이어져 있는 현대적 도시다. 하지만 브루클린은 다섯자치구중 인구가 가장 많을뿐 아니라 다른 자치구, 아니 미국의 하고 많은 도시와는 다른 특별한 곳이다. 사실 브루클린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다.  '브루클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만해도 여러권이고 무엇보다 내 개인에게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열연한 창녀 "트랄라"의 사랑이 중심적인 이야기로 남겨진 이 영화는 사실 브루클린의 거리보다 그 강력한 음악에 더 매혹되었던 게 사실이다. 이 영화를 통해 다가온 브루클린은 산업화의 결과만 취한 모던하고 이기적인 '강남'같은 시가지가 아니라, 산업화의 혼탁한 과정을 날것 그대로 다 싸안고 있는 혼란한 공업도시, 항국도시인 '안산'이나 '인천'같은 도시의 하나였다. 이 영화 속 브루클린에서 나는 더이상 잃은 것도 밀려날 곳도 없는 바닥인생의 악다귀같은 삶들이 뒤엉켜 있고, 마약과 범죄, 절망만이 거리에 가득한 속에서도 사랑을 피우고 인간적 삶의 아름다움을 일궈내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같은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었다. 서구인에게 인도의 시궁창같은 거리가 인간 삶의 원초적 아름다운, 그 숭고함을 찾을 수 있는 싱싱한 삶의 현장이듯, 브루클린은 인간 욕망의 배설구, 만악의 찌꺼기가 흘러드는 시궁창같은 현대도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켜가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음을 상징하는 문화코드였다.

하지만 이책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다가온 브루클린은 또 조금은 다른 이미지다. 암에 걸리고 이혼마저 당하고, 거기다가 하나 있는 딸과도 불화에 빠진 의지가지 없는 초로의 전직 보험모집인 네이선 글래스가 '조용히 죽을 만한 곳을 찾아'들어 온 곳이 바로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네이선 그래스의 고향으로 3살때 부모의 손을 잡고 이사를 떠나야 했던 이미 기억속에 남은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시가지이고 주택지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보였던 산업화의 부정적 상징성 같은 것도 없고,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고는 애당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화롭고 단조로운 도시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브루클린 풍자극]의 작가 폴 오스터가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의 시각으로 브루클린의 거리를 '줌인'하는 순간 브루클린의 작은 카페며, 거리를 스치는 택시안, 그리고 집으로 가는 작은 길모퉁이에도 이름없는 초라한 삶들이 변주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책 가득 넘쳐난다. 독자인 나는 또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눈 깜짝할새 브루클린의 거리로, 해리의 고서점 구석진 서가 옆으로 빨려들어간다.

폴 오스터의 제기발랄한 입담에 매혹되지 않을 독자가 없을 것같지만 사실 이책 [브루클린 풍자극]의 매력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도시적 삶이 인간개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고립된 개인이 생존을 위해 무한 경쟁하는 밀림이 바로 도시라면 이 책은 폴 오스터의 문명비판적 시각을 통해 그와 같은 도시속에서 살아가는 독자에게 다시 가족주의가 회복된 아름다운 서정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를 보여주고, 인간적 삶에 목마른 독자의 목을 축여준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이야기는 바로 사랑의 이야기 즉 '러브 스토리'다. 서로 교차하며 엉키고,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돌파하며 끝내 사랑으로 발전하는 인간 군상의 삶을 통해 폴 오스터는 바로 사랑의 전도사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추상화된 사랑, 지고지순한 이상화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철저히 속된 사랑 이야기이기에 독자인 나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랑을 인간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서 남는 희미한 의문이 있다. 도대체 '풍자극'은 또 무엇일까? 왜 이소설은 '풍자극'이라 이름붙였을까? 작가 폴오스터는 브루클린의 사랑이야기로 무엇을 풍자하고자 했을까? 사랑없는 시대? 가족없는 시대? 사랑만이 희망이다고 하면서 사실은 '희망의 허구성'을 풍자했을까? 이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끝내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먼저 행간 곳곳에 등장하는 부시와 공화당에 대한 조롱은 나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나름의 쾌감을 주었지만 이 창치는 이 소설의 전체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이 소설이 끝나는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는 '위대한 아메리카'의 상징인 뉴욕 맨하탄의 세계 무역 센타가 이슬람 해방전사의 공격으로 무참히 무너져 내리기 46분 전이다. 다시말해 브루클린 풍자극이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가 브루클린에서 회복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평범한 사람을 위한 전기 집필 대행이라는 새로운 사업 구상을 통해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하고자 결심하면서 이 소설이 끝나는 시점이다. 개인 '네이선'의 희망의 전주곡이 울러 퍼지고 그리고 46분뒤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상징성이 붕괴되는 교차점에서 분명 폴 오스터는 무엇인가를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독자의 한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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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미술관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미술관입니다.
말이 미술관이지 일종의 마을 커뮤니티센타 같은 공간입니다.
2003년에 농림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40여평의 건물로
처음에는 도시민의 농촌 문화체험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운영과정에서 지역민을 위한
문화공간의 성격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유명하신 화가분들의 개인전도 있었지만,
더 값진 지역주민의 전시와 지역아이들의 전시가 있었고
그리고 3~4년전부터 지역 아이들을 위한
토요미술교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봉화뿐아니라, 안동 영주에서까지 
참가자가 오시기도 할 만치 인기가 있었는데    
작년에 사정이 있어 1년 쉬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다시 수업을 재개하게 되었답니다.
아이들이 미술수업을 하는 동안
기다리시는 부모님은 도예 체험 등의 활동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와 같이 공지하오니
많이 알려주시고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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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미술관에서 알립니다. 

긴 겨울이 가고 벌써 봄이랍니다.

부지런한 개구리도 보이구요.

한낯의 햇살이 따끈따끈합니다.

겨울 핑게, 작업 핑게 등등으로

그동안 쉬었던 아이들 미술교실을

다음주 토요일부터 시작하려합니다.

시간은 오후2시부터 1시간 30분정도구요.

참가대상은 제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육비는 미술관 관리비로

가족당 월 1만원으로 정하겠습니다.

우리 마을은 원체 다동이네가 많아서 1인당으로 하면

안그래도 쌀값많이 들어가는데...

교육비까정 많이들어가면 안되잖아요^^*

 

혹 억울하신 분 계시면 지금이라도

아이 많이많이 놓으시구요~~

오랜만에 비나리미술관식구여러분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강일시 : 3월 13일 토요일 오후 2시

연락처 : 017-523-6234

수강료 : 지역주민 가족당 월 1만원 (미술관유지관리비로 쓰입니다)
           체험도시민 1인/회당 5,000원
   
준비물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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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일 볼일이 있어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계속된 비 덕분인지 날씨가 많이 눅었습니다.
비닐하우스안은 따뜻하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했고,
지난주에 파종한 고추가 싹을 틔웠습니다.
운좋게 비닐하우스 안에 자리잡은 풀씨들은
벌써부터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비닐하우스 바닥을 녹색으로 칠해 버렸습니다.

비닐하우스안에만 봄풀들이 제철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뒷마당 언덕도 옅은 연두빛을 띄기 시작했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마른 풀입과 나뭇가지 사이로
연두빛 새싹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봄은 소리없이 비나리마을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제 농부의 마음은 바빠지지만,
세상은 더 아름다운 절기를 맞이 하겠지요.
봄은 맞는 농부의 마음은 각별합니다.
다 잘 될 것 같고, 무엇이라도 새로 시작하고 싶은
그런 계절이 바로 봄이랍니다.

올 봄 저의 농장에도 작은 희망을 심을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사과농사가
3년뒤면 우리집 살림살이를 책임져 줘야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농사라지만
그래도 나무를 심는 마음은 희망으로 부풉니다.

아름다운 봄날,
새봄을 맞는 농부의 기쁨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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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논쟁은 쉽고 재미있다. 정치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봐도 그렇고, 하나의 정치적 기사에 대한 댓글 논쟁만 봐도 그렇다.누구나 쉽게 참여하고, 답을 제시한다. 나름의 '확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리고 그 '확신'에 기대어 쉽게 정책적 대안까지 제출한다. 어쩌면 인간이 바로 정치적 동물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고아니면 정치적 관심도가 유달리 높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대중적 정치 과잉이 이론가들, 학자들에게서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한번씩은 지식인의 자기 확신이 가지기만을 넘어 자기주장의 절대화로 나아가는 모습을 목도한다. 관념의 덫에 빠졌다고나 할까? 그 예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고, 이 책도 그와 같은 예를 보여주는 여러 글들을 담고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지만 그 만치 또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책이 담고 있는 몇몇 주장들은 자기 모순에 빠져있다. 그런 판단을 하는 나의 시각도 마찬가지로 관념의 덫에 빠져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말이다.

 

이책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은 인터뷰어 지승호가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인사들과 나눈 인터뷰를 정리한 책이다. 인터뷰의 내용은 책이 출간된 시기의 노무현정권에 대한 비판을 주로하면서 대한민국의 식민지성, 자본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끝끝내 베알이 꼴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말이 있다. 공감이 가는 군사적 전술이다. 시골에 살면서 알게 되었지만, 농지가 붙어있거나 집의 경계가 겹쳐있어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과 감정적으로 가장 먼이웃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사상적 스펙트럼을 놓고 본다면 "원교근공"이 아니라  "근교원공"이 보다 정직한 역사적 선택이고, 현실적으로 주장하는바 정치 이념에 충실한 선택이 아닐까? 왜냐면 정치투쟁은 단순한 정치적 패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가치전쟁이고, 영토쟁탈전이 아니라 보다 인간적인 복지 공동체를 향한 이념투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세력의 지형을 본다면 제도권밖의 극좌 조직부터 제도권안의 극좌파를 대표하는 사회당, 그리고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씩 이동해보면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이 있을 것이고 더 오른쪽에는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 민주당이 있다. 여기까지가 좌파를 비롯한 합리적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본다면 그 반대쪽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결쳐있는 잡탕보수우익을 아우르는 단일 정당인 한나라당이 있다. 물론 보수정당인 친박연대나 자유선진당이 있긴하지만 이들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단지 보스를 달리하는 세력으로 '한나라당류'로 뭉쳐봐도 좋을 것이다. 필자와 인터뷰를  한 진보적 지식인은 아마도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정도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참여당과 민주당으로 분화되기전의 '열린우리당'이 여당인 시절 왜 좌파는 '중도개혁세력'을 자임하는 열린우리당을 정치적 연대세력에서 배제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현실인식과 자기 비판없이 '노무현정권'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늘어 놓고 있다.


그래서 이책은 혼란스럽다. 극히 정치적인 비판의 끝에 무당파적인 입장을 표방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지식인의 이중성이 보인다. 자신의 정파적 입장의 선명성을 주장하면서 여타 정치세력의 입장차를 두루뭉실 뭉개어 버리는 태도에서 연대의 결핍에 시달리는 진보세력의 고질병이 보이기도 한다. 내용적으로 세세하게 비판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사실 리뷰는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 ''에 대한 나의 이해를 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나의 미천한 책읽기가 나의 뇌리에 남긴 긴 여운의 문제의식을 나열하는 것으로 리뷰를 마치고 싶다.

 

먼저 노정권에 대한 비판이 소위 중도 개혁세력에 대한 수구세력의 공격에 동조하여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역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두번째진보의 지평을 넓혀내는 비판이 아니라, 중도개혁세력을 무력화하면서 그 영향으로 진보의 몫마저 잃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닌가?

 세번째. 진보 의제는 대통령의 몫이 아니라 진보적 아젠다를 국민적 의제로 키워내야 하는 진보세력의 몫이다. 그것을 제출하고 국민적 인정을 끌어냄으로서 대통령이 정책적으로 체택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줘야하는것 아닌가?

네번째, 기본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복지예산을 가지고 '분배'중심의 좌파정권이라는 비난을 퍼붓고, 북한과의 최소 수준의 평화공존 정책조차도 북한에 휘둘리는 일방적 퍼주기 정책으로 매도하는 수구냉전세력과의 역관계에서 소위 진보세력이 힘을 보태준 것이 있기나 하나? 오히려 어긋장을 놓아 중도개혁세력인 노정권을 무력화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진보세력이 수구냉전세력의 지배권을 넗히는데 기여한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 아닌가

다섯번째, 진보세력이 하는 많은 주장들중 많은 부분이 도덕적 선언에 불과하고, 실천력을 담보하기 힘든 것은 왜일까? 지적 유희, 자기논리의 탐닉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이상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구체적 현실에서 수행해야 할 당면한 과제를 설정하고, 실행하기위한 전술,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명쾌한 답을 듣고 싶다

여섯째, 진보적 지식인들은 '노정권의 무지'(홍세화), '철학의 빈곤'  ',, '(박노자) 들의 개념으로 노무현정권을 비판하는데 이는 노무현대통령을 '무식하다'고 비판하는 조선일보의 논조를 그대로 답습하는 학력 우월의식을 가진 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노무현대통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노무현을 죽인 세력은 현 MB정권과 검찰마피아만이 아니다. 어쩌면 더 큰 상처는 바로 '약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정치가 그립다'면서 노무현대통령의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리던 이들 몇몇 진보인사들이다.  그의 사후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이 때늦은 사랑고백을 늘어놓았지만, 사자의 길은 간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 책이 참여정부 후반기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갖는 한계가 있다면 이해해 주고 싶다. 노무현대통령을 욕만해도 되는 상황에서 이런 류의 책은 분명 시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이 무책임한 변설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 다시한번 이전의 자기주장을 되돌아 보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회주의자"가 성립할 수 있는 진보세력의 유연성을 보고 싶다. 바로 그때가 진보세력의 수권능력이 갖춰진 때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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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의 전설展

조선 왕족들의 미술관 행차

  • 기간 : 2010년3월18일(목) ~ 2010년 6월 13일(일)
     
        장소 :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 시간: 화, 수, 목, 일요일 오전10시-오후6시/금, 토요일 오전10시-오후8시

  • 입장료: 일반 3,000원 / 초중고 2,000원 / 20인 이상 단체 1천원

  • 주최: (재)고양문화재단

  • 문의전화: 아람미술관 031-960-0180

  • 입장연령: 제한없음

    2010년 봄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은 '조선의 왕릉'이라는 고양시 지역의 주요한 역사적 이슈를 전시의 테마로 채택하여, 예리한 시각을 지닌 뛰어난 미술작가들의 시선으로 이를 새롭게 표현한 왕릉의 전설을 선보인다. 현대의 젊은 미술인들이 조선 왕조를 예술적 시각으로 재인식하고 표현하는 이번 작업은 신선하고 고무적이다. _김언정(고양문화재단 전시사업팀)

  • 컨템퍼러리 미술, 조선 왕조를 화두로 삼다 

      최근의 작가들은 예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역사의 굴레에 얽매이기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든, 혹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은 채 말하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이것이 바로 컨템퍼러리 미술의 징표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작가들로 하여금, 시기적으로는 멀지 않으나 동시대와는 문화적 간극을 지닌 조선 왕조를 화두로 삼도록 한 것은 당장 세 가지의 이유에서다.

      먼저 최근 유네스코가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의미 있는 일이 있었기에 미술인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였다. 두 번째로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근대로의 숨 가쁜 전환점을 마련하느라, 민족적 본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통을 자연스럽게 내려받지못한 채 우리 것에 대해 스스로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크게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조선 시대의 중심을 살다간 권좌 위의 존재들이 현재의 후손들에게 남긴 전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마음을 모아 들여다보고자 함이었다. 이는 서로 간의 시대를 뛰어넘어 하나로 흐르는 진실한 모습을 발견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8명 왕족들, 젊은 미술인들에게 말을 건네다

      왕릉의 전설은 조선 왕조 500년을 이끌어왔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삶의 중심에 섰으면서도 권력과 명분의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주전장(主戰場)에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전시는 이들 왕족 가운데 고양시에 소재한 서오릉과 서삼릉에 누워 있는 아름답고도 처절한 전설의 주인공 8을 고심 끝에 선정하고, 작가들이 각 인물들과 시각적 대화를 시도하여 작품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구성한다.

      8명의 왕족으로는 왕실의 내명부를 대표하는 존재이자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내훈(內訓)을 통해 왕실과 모든 조선의 여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수대비, 왕의 사랑을 후궁들과 나누기를 거부하며 시대의 여성관을 본능적으로 무너뜨리고 결국 사사되어 연산군이라는 폐주를 낳았던 폐비 윤씨,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으나 역대 조선 왕 중 최단 기간 재위했던 불운한 왕 인종, 서양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고 일찍이 조선의 개혁을 꿈꾸었으나 의문을 죽음을 맞아 이슬처럼 사라진 소현세자, 당파싸움으로 인해 약화된 왕권을 남인과 서인에 대한 적절한 견제로 극복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뛰어난 책략가였으나 자신의 여인들에게는 냉정한 지아비였던 숙종,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조선에서 한미한 출신을 극복하고 자식을 왕으로 만들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정열의 여인 희빈 장씨, 정략적으로 맺어진 정조의 다른 여인들과 달리 사랑으로 이루어져 후궁이 되었으며 애절한 연가를 남긴 의빈 성씨, 멸문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하여 무지렁이의 삶을 살다가 한 순간 허수아비 왕이 되나 진실한 사랑도 잃어버린 채 구중궁궐의 허무함 속에서 일찍 시들어버린 철종 등이다.


    [류준화, '怫', 2008]


    조선의 왕릉, 마저 이루지 못한 꿈의 전설을 전하다

     왕릉이라는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이 마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온전하게 충족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은 후손인 우리의 심정을 흔들어 생각을 일으킨다. 사실 조선 왕조의 역사적 의의가 갖는 무게에 비해 현대인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가벼웠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 표현의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치열한 꿈의 허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왕과 왕비, 공주와 왕자라는 드라마틱한 존재성은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좌는 권력과 존귀함을 갖고자 하는 우리들의 환상이 탄생시킨 꿈이며, 영원할 수도 온전할 수도 없는 추상적인 허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는 오랜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모습을 달리하여 끊임없이 권좌를 꿈꾸며 살아간다. 왕릉의 전설은 삶과 죽음이 끝나지 않는 하나의 순환임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응축된 욕망의 꼭대기에서 신비한 전설처럼 우리 참모습을 일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 본 기사에 소개된 작품 이미지는 참고용이며 출품작은 신작으로 구성됩니다. ^ . ^

    ※ 또한 '누리지'란 고양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로 전시뿐만 아니라 공연, 교육 소식에 전반적인 문화 컨텐츠로 가득합니다.

         고양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PDF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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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마을을 살릴 수 있을까?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에서 희망을 본다.

     



    인간 삶의 시공간적 근본인 마을을 살리는데 인간 삶의 또 다른 근원인 예술이 기여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하고, 그렇게 해서 살아난 마을은 또 어떤 모습일까?

     

    다 알고 있다시피 이미 전통 농촌 마을은 재생산구조가 파괴되어 아이들 울음소리가 끊긴지 오래다. 경제적 자립구조가 붕괴되어 헤어날 수 없는 부채더미에 신음하고 있고, 삶의 터전인 논밭마저 절반이상이 도시자본에 넘어갔다. 마을 내 의사결정구조인 전통적 자치 기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전통적 자치기구를 대체해 중앙권력의 지배편리를 위해 만들어져 하부행정단위의 역할을 하는 이반장체제는 주민자치의 꿈을 실현하는 기구로 역할 하기에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마을 주민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던 많은 제도적 문화적 장치들이 형해화 되었다. 두레나 울력 같은 공동노동. 협력노동의 전통은 사라졌고, 동제나 당제 같은 마을신앙도 사라지거나 드문 경우에 그 흔적만 간신히 보존되고 있다. 상여계, 토지계 같이 마을 공동체를 유지시켜주고, 주민의 정체성을 이뤄주는 근간이 되었던 마을 모듬은 약화되고 기금은 고갈되었다. 사실 마을의 근본인 사람이 사라지는 판에 다른 것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젠 농가부채대책은 없고, ‘희망근로사업도 줄어들고, 농업보조정책도 패지 해 나간단다. 경제적 파탄을 넘어 정책적 방기 속에 농촌 마을은 어떻게 될까? 농촌마을의 미래는 암담하고, 쇠락의 대세는 반전될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적으로 마을 공동체를 회복한 성공적인 사례도 없고, 따라서 마을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주민들이 의지할 마을 회복 프로그램도 그 로드맵도 없다.

     

    그럼 도시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도시의 거주형태나 시가지 형태는 전통적인 마을 단위의 공간구분을 무의미하게 한다. 그렇다고 도시는 마을이 성립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어쩌면 도시의 마을은 도시민의 생활반경, 활동반경이 물리적 공간의 협소한 규정을 넘어 그 필요와 구성원의 가치나 기호에 따라 넓혀짐에 따라 새로운 형태, 새로운 의미의 마을로 재구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주민자치, 마을만들기는 농촌에 국한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사람 사는 곳 모두가 마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도 사람이 넘쳐나긴 하지만 마을다운 마을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마을다운 마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 안에서 정신적, 문화적 일체감이라는 주민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한 경쟁하는 개인들로 꽉 찬 도시는 마을이 성립될 수 있는 토대가 너무 허약하다.

     

    농촌마을과 도시마을의 구분을 넘어 인간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으로서의 마을은 똑같다. 사실 원시공동체에 대한 향수가 전통적 농촌 마을에 대해 우선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게 하지만, 전통마을에 대한 향수보다는 새로운 마을의 현재성에 주목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마을은 이념이기 이전에 삶이고 현실이다. 그 삶과 결합되지 못하는 예술, 문화, 자치, 환경, 민주주의는 헛구호에 불과하다. 마을의 존립이 시급한 현안이 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언제부턴가 마을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일어나고 농촌에는 귀농과 마을 만들기가, 도시에는 녹색도시’, 도시공공디자인 운동 등이 일어나고 있다. 중앙권력의 민주화, 지배가치의 진보화에 일정한 성과와 좌절을 동시에 경험한 세력들이 주민자치(스와라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 하방을 시작했다. 도시는 아파트의 동, 행정단위인 통반을 넘어 동호인모임,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모임, 정치적 지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정당활동, 구체적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환경에 대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시민모임 등 다양한 형태의 자치단위, 새로운 형태의 마을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농촌은 생태환경과 근원적 생명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사라져가는 마을을 복원하고 마을자치와 마을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나눔과 공생, 순환이 마을의 가치기반이 되고, 자본이라는 단일 권력의 지배에 저항을 시작했다. 마을을 살리기 위한 활동은 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생활협동조합운동, 마을자치운동, 자활농장만들기, 마을 역사연구, 마을박물관만들기, 마을자원조사 등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시도되고 있다.

     

    그 연장선일까?  예술로 마을을 살리겠다는 일군의 활동가, 예술가들이 단체를 만들었단다. 일명 예술마을네트워크(예마네)”란다.  예마네는 [마을만이 희망이다]는 기치를 당당히 내걸고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 조그마한 연구실을 열었다. 웹상에 그를듯한 까페도 하나 번듯이 차려놓았고 (http://cafe.naver.com/yemane)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탐방하는 것으로 벌써 활동을 시작했다.

     

    예마네는 예술이 마을을 진정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마을 또한 예술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원시적 마을이 예술과 함께 했듯 이 둘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아수라장이 된 우리의 현재적 삶을 혁파하는 첩경임을 주창한다. 이를 위해 예마네는 문화와 예술로 마을을 사유하고 연대하고 소통하고,   마을을 생각하는 모든 활동을 매개하는 연구기지를 자임하고 있다.

    예마네가 스스로 상정한 과제는 다양하다. 마을의 생태 환경과, 경관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실태 조사 및 연구, 공동체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개발과 보급, 문화예술 공동체 네크워크 구축을 위한 인적 물적 교류사업 등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면, 마을조사 및 마을지표개발, 마을축제 연구기획, 마을 박물관 보급, 마을 디자인, 그리고 마을학 연구라는 과제로 집약된다.

     

    사실 예술이 어떻게 마을을 살리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예술이 살린 마을의 모습은 어떤 형태일지 궁금하다. 마을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는 예술은 예술일반과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을 살리는 예술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무척 힘겹고 고단한 과정임에 분명하다. 또한 단위 마을 내 예술가와 마을주민간의 유대와 교류마저 힘든 현실에서, 예술가가 사는 마을간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구상은 대담하나 비현실적이고, 가치 있지만 지난한 작업으로 보인다.
    누군들 그 사실을 모르겠냐만 예마네 구성원들이 어디 만만하고 손해보지 않는 작업만 해오는 그런 분들인가? 그래서 차라리 희망적이다. 안되면 당연하고 되면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꼭 기적이 일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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