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운동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를 통해 문화와 예술은 경제발전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민주화를 추동함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문화사회’의 실현을 앞당기는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문화운동의 큰 줄기는 자연스레 문화자치와 문화 민주화로, 그리고 문화의 탈 경제화, 탈 물질화로 모아졌다.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진보적 문화담론이 공론의 장을 차지함은 물론, 문화운동세력이 ‘민주정권’의 일익을 담당하는 데에까지 이르러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과제가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으로 집약되듯, 문화운동의 중심과제 역시 ‘지역문화자치’로 ‘지역문화 분권’으로 압축되었다. 지역의 문화적 분권과 자치는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고양함으로써, 지방자치와 분권의 실현에 선순환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일정 정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도 했다. 정부가 2001년을 ‘지역문화의 해’로 정하고, “사람, 삶터,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 것이 그런 흐름을 대변한다.
‘지역문화’라는 말은 지역문화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 지금의 의미를 획득했다. ‘독립’의 의미가 주권을 잃고 나서 깨닫게 되었듯, 일제강점기를 통해 민속문화-전통문화로 이루어진 지역문화의 가치가 부정되고 상징이 파괴된 뒤, 그리고 일제의 지배 정신을 잇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지역문화-공동체문화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지역문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저히 파괴된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한 지역문화를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의 현대사는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민주적 가치의 보편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민중 문화와 교양 문화, 참여와 순수라는 두 줄기의 흐름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문화적 지평을 넓히고, 정신적 풍요를 축적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 모든 영역의 경제화를 지향한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합법적’으로 부정되는 신권위주의 시대에, 문화는 심각한 학습장애와 퇴행에 빠져들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한한 배려를 보편화했던 문화의 흐름이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문화가 문화산업과 등치되고, 문화정책이 경제정책에 부속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일궈온 우리의 문화적 토대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외면당하자 진보적 문화는 방향성을 잃고 공황상태에 빠져 스스로 진전시켜온 성과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는 반복하지만 진전되고, 퇴행하지만 더 큰 도약을 초래해왔듯이, 지금의 문화적 퇴행은 지역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모든 당위가 의문시되고 모든 가치가 부정되는 시점에서, 다시 그 당위성을 묻고, 가치의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문화의 ‘자율과 자치, 분권’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가, 그리고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긴 호흡, 먼 눈길로 낡은 과제와 마주해야한다. 인류의 역사가 쌓아온 보편적 가치를 가지며 그와 같은 낡은 과제를 새롭게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지역문화는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것이지, ‘지역 문화’의 구체적 내용을 예단함으로써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마주하게 된 낡은 과제는, 지역문화의 식민화와 정치적 간섭, 그리고 경제화로부터의 해방이다.
모든 가치가 하나의 시장, 단일한 화폐가치로 환원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역문화는 존립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다. 서울의 문화가 문화적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고, 지역문화가 그 하위문화로 평가 절하되는 시대에, 공상의 차원으로 추락한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동일한 시장 메커니즘과 가치체계를 수용하면서,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묻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망상이다. 지역문화의 가능성은 지배문화의 틀을 벗어던지고, 인류의 자산인 보편 가치의 지역적 특성에 기반해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권이라는 가치, 자연과 인간의 일체성 회복,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정치적이다. 문화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의 장이다. 문화계 전반을 휩쓸고 있는 매카시 선풍은, 문화의 그런 속성을 대변한다. 현 정권이 수행하는 문화정책을 ‘좌익척결’에 두고, 문화예술을 지배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쯤으로 ‘천대’하는 풍조는 참을만하다. 문제는 문화의 정치화가 아니라, 여러 입장들이 모아지는 방식이 얼마나 높은 합의수준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문화는 정치적이되 정치권력에 복속되어서는 안되고, 문화의 장에서 ‘정치’의 관철은 ‘문화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 길이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관철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사회에서, 정권교체가 문화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정책이 공안과 결합해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의 정치 과잉이 초래한 권력에 복속된 문화 관료주의가 지역문화에 어떻게 파급될지, 정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반달리즘이 막 열매 맺기 시작한 지역문화 운동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치의 문화개입이 지역문화를 정치 과잉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역민의 생활에 뿌리내리는 지역문화 담론의 형성이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 지역정치, 지역의 삶, 지역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회복함으로써 지역문화는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식민화와 정치적 과잉의 근저에는 ‘문화의 경제화’가 있다. 상품화된 대중문화가 상품화되지 못하는 모든 가치를 몰아내고, 문화산업적 시각이 문화정책을 대신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경제는 사라지고, 경제를 위한 인간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지역축제의 붐이 지역문화의 붐이 아니라 문화의 경제 종속을 드러내고, 문화가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 뉴딜정책을 포장하는 하나의 장식으로 전략했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4대강사업의 첫 삽을 뜨는 홍보이벤트가 이루어지는 현실은, 안동의 문화가 대표적 토목사업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문화의 탈 경제화는 시장으로부터 버려진 탈 경제적 가치의 복권과 확산에서 시작된다. ‘실용’이란 마법에 걸려 맥을 못 추는 인권과 복지, 민주주의와 생태환경을 복권시키는 지역차원의 미시적 실천이 어쩌면 문화의 탈 경제화를 추동하는 저변의 힘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식민화된 지역문화를 해방하고, 문화의 정치 과잉과 경제화를 역전시켜 정치와 경제의 문화화를 성취할 수 있는지는 사실 낡은 과제다. ‘민중문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70년대를 관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과제는 우여곡절 속에 수행되어 왔고, 신자유주의와 신권위주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었을 뿐이다. 과제의 심원함이 해결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길이 있다면 그것은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화는 표피적 자극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관통하는 심원한 강이다. 일희일비하는 대증적 처방으로 그 흐름을 역전시키거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없다. 문화의 성숙은 항상 기본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 기본은 민주주의와 분권, 그리고 재발견된 일상의 가치에 있고, 그와 같은 기본을 성취하는 출발점은 문화라는 큰 강의 시발점이면서 동시에 그 종착지이기도한 ‘지역’에 있다.
송성일 | 2009-08-07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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