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농촌공동체 문화’란 무엇인가
- 비나리마을에서 희망 만들기 -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고들 난리다. 실제로 세계 많은 나라 중 한국의 자살률이 수위에 이르고 더 심각하게는 그 상승세가 가장 가파르기까지 하다. 잘사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고,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 믿었지만. 뒤집어보면 경제가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심이 되고, 시장이 유일한 공정률로 여겨지고, 시장에서의 승패가 개개인의 삶을 절대적으로 좌우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어떻게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과 외형적 경제 성장이 우리 사회의 식민적인 성격을 희석시키고, 서구화된 생활양식과 의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지역문화 담론에서 지역문화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지던 민중문화 더 나아가 농촌공동체 문화 담론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지역공동체 담론이 사라진 자리는 문화 상품의 논리와 탈현대적 개인주체 담론이 대신하고 어느덧 민중 문화는 낡고 초라한 구시대의 유물로 내팽겨 졌다. '지역문화'는 '지역축제' 혹은 '지역관광자원"의 종속개념으로 격하되었고 특히 농촌공동체 문화는 현대화되고 합리화되는 세계적 변화를 역행하는 반경제적 반시대적 잔존문화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다시금 시장 지상주의가 시대적 조류가 되고, 오직 무제한적인 시장 경쟁이 인간 개개인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살벌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문화가 인간적 삶을 지키고 공동체를 보전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농촌공동체문화'의 현재적 의미를 되묻게 한다.
사실 농촌공동체는 정체와 심각한 훼손을 넘어 소멸의 과정에 들어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적 삶을 치유하고, 인간의 본원적 가치를 회복하는데 농촌공동체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 의미 있는 작업인지 판단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우선은 마을의 현재적 삶에 대한 진단과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대항문화로서의 실효성, 대안문화로서의 성립가능성이 검토 될 수 있고, 그 한계를 짚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업인구가 전체국민의 70여%에 육박했지만 산업화 과정을 거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든 2007년 6.8%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나마 향후 10년 간 년 평균 2.7%의 농가인구 감소가 예상된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09년) 농촌인구 감소와 더불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농촌이 극단적인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듦으로써 마을 공동체의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마을 공동체의 재생산이 불가능한 마을에서 '농촌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은 피할 수 없는 소멸과정에 접어들었다. 미래가 없는 마을은 공동체 문화는 고사하고 풋풋한 인심마저 지켜질 수 없다.
필자가 살고 있는 비나리마을 역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1,000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던 마을이 현재 50여 호에 약 100여명의 인구로 줄 들었다. 이미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후대에 남길 수 있는 노령 세대들마저 한분 두 분 돌아가시고, 마을의 역사가 단절되는 만치 마을의 고유한 문화 역시도 사라져 가고 있다.
공동체 문화로 제도화된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마을동제'와 '풋거 먹는 날', 그리고 '상여계'가 전부이다. 그나마 '마을동제'는 진행할 인력의 부족과 기독교 문화에 의해 존폐의 논란에 접어든지 오래고, '상여계' 역시도 상여를 맬 인력이 줄어드는 만치 외부 상조회사의 영업에 밀려 언제 까지 존속이 가능할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풋거 먹는 날'만이 그래도 이런저런 논란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존속되어 오고는 있지만 이 역시 해가 거듭될수록 빈약해져오고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 이웃의 대소사에 주민들이 초롱불로 부조하던 초롱계의 전통은 70년대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주민의 삶 속에 녹아있는 '농촌공동체 문화'의 핵심이 그대로 온존되고 있는지는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외형화된 제도로서의 문화는 소멸과정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비나리마을 농민들은 먼저 자신의 삶을 보듬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농촌공동체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이어지고 있다. 공동육아에서 마을 공부방, 문화 예술적으로 풍부한 공간으로 농촌마을을 변화시키기 위한 비나리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 활동들, 더 나아가 도시의 생활협동조합 등 사회단체와의 외부적 연대와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 한 인근 7개리 800여 주민간의 공동사업 모색까지, 그냥 소멸해가던 농촌마을 비나리는 지역사회의 새로운 활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추동력은 외부에서 끌어오거나,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고유한 자연과 농부의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에 담긴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 가치가 지배하는 문화에 새로운 가치매김을 하는 것에서 마을은 변화를 시작했다. 농민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재인식하고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순간이 바로 그와 같은 변화의 출발점이다.
사라져버린 비나리마을의 ‘초롱계’가 초롱축제로 부활한다. 단일 마을의 부조문화를 7개 리의 마을간 부조문화로 승화시킨 새로운 축제의 형태로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초롱축제는 다양한 사회적 장치를 통해 개인과 마을 간의 일체성을 확립하고, 상호부조의 그물망 속에서 개인적 삶의 안정성을 담보하던 전통적 농촌공동체 문화를 현대화된 모습으로 재현한다. 초롱축제는 전통 농촌사회의 건강한 원시성을 재현함으로써 상처입고 고립된 주민의 삶을 치유하는 굿판이 될 것이다.
비나리마을은 새 꿈을 꾸고 있다. 내년에 마을 중심에 ‘학교’가 들어선다. 하지만 이 학교는 그냥 단순한 시골 학교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매개하고, 우리 사회가 추구해 나가야할 미래적 가치를 생산하고 상호 교류하는 농민학교이자 시민학교이다. ‘비나리 시민학교’는 단순한 마을 소득사업의 수단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의 실험이자, 농촌공동체 문화의 생산과 확산의 전초기지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이제 막 시작한 걸음마에 불과하고, 언젠가 ‘성공사례’가 된다고 해도, 마을을 넘어 전체 농촌에, 나아가 농촌을 넘어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사례’의 산출이 아니라 ‘가치’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한 마을의 작은 시도들은 우리 사회에 희망을 퍼뜨리는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희망을 품고 아름다운 삶을 일구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마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벌써 의성의 교촌리, 홍성의 문당리, 단양의 한드미, 화천의 토고미, 이천 부래미 같은 마을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새로운 농촌공동체의 전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들이 가꾸어 나가는 마을이 세상을 향해 퍼뜨리는 향기는 언젠가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 틀림없다.
배용준은 배우다. 그의 한 마디, 그의 동작 하나에 수천수만의 팬들이 울고 웃는다. 돈으로 환산된 상품 배용준은 거의 천문학적 금액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미래는 농부가 되고 싶단다. 마케팅전략에 따른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귀농'이 현대인의 로망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결국 경제가 모든 것을 짓누르고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 뒤, 개인의 삶은 그만치 더 처절해지고, 공허해진 탓 일거다. '귀농'이 현대인의 로망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의 고유한 성격, 자연과 나의 삶이 노동으로 맞닿아 있고, 합리화된 사회적 관계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온전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세상, 제도화된 사회적 안전망이 미비한 우리 사회의 천박성이 끊임없이 개인의 삶을 벼랑으로 내 몲으로서 체제에 대한 복종과 순응을 강요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전통적 인간 관계망 속에서 개인의 안전한 삶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공동운명체인 농촌공동체, 그것이 바로 현대인에게 '농부'의 꿈을 꾸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라져가는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그 문화를 가꾸는 일은 복고적 취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을 지켜내기 위한 새로운 가치의 탐색 과정이다.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찾는데 ‘가치’의 방향타 없이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농촌은 ‘농산물 산지’이자 새로운 생태적 가치, 대안적 공동체, 그리고 미래적 가치의 생산 기지이다. 공동선의 극대화를 통한 개인적 삶의 안전성 확보와 개인 복지 수준의 향상을 기해왔던 상호부조와 두레의 전통에 기반한 농촌공동체 문화가 시장지상주의의 반공동체성을 치유하는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은 먼저 지역문화에서 ‘농촌공동체 문화’가 갖는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그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풍성한 농촌공동체 문화가 지역문화를 이끌고, 지역문화가 내재적 가치를 배제하고 경제적 가치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신자유주의가 황폐화시킨 세상을 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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