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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농사 14년째로 접어 들지만,
정미소는 오다가다 보고 어쩌다 남따라 구경만 갔었고
지금까지 한번도 직접 이용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미소는 그야말로 쌀을 찧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고
쌀농사를 짓지 않는 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든 것이 작년에 처음으로 수수와 기장, 그리고 조 농사를 짓게 되면서 
정미소와의 생각지도 않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 남들 다 수확 끝낸 초겨울, 어렵사리 수수와 기장, 조를 수확 해서
거의 한달 가량을 집의 비닐 하우스에 늘어 놓았습니다.
처음으로 지은 잡곡 농사라서 사실 어떻게 수확을 해서 탈곡을 하고,
그리고 정미를 하는지 안무런 감도 없이 오직 이웃어른께 여쭙고 
어림짐작으로 그 모든 과정을 해치워야 했습니다.
다행이 수확한 양이 많지 않아 3~4일을 쭈구려 앉아
일일이 알곡 송이를 손으로 비벼 탈곡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정미를 해야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용 소형 정미기가 있는 동네 형님들 신세를 질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계는 조는 되는데 수수는 안되고,
또 어떤 기계는 기장이 잘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기계에 따라 용도가 달라
3가지 곡식을 빻을려고 하면 이집 저집 들고 다녀야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형님 한분께서 소개해 주신 안동에 있는 정미소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잡곡이라도, 그리고 적은 양이라도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빻아주는 정미소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동 근처에 볼인 보려 가는 길에 소개받은 정미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종류는 3가지나 되는데 양은 얼마되지 않아 못빻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을 해서라도 빻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주인 아주머니가 하도 싸늘하게 말씀하시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나왔습니다. 
이왕 나온 김에 안동의 또 다른 정미소를 찾아 갔습니다만
이번에는 잡곡을 정미하는 기계 자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허탕을 치고, 몇일뒤 봉화읍 나가는 길에 봉화의 한 정미소를 들러 봤습니다.
역시 잡곡을 빻는 기계가 없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잡곡이 건강 식품으로 인기를 회복하고 값도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다른 농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이 쉬운만치 가격이 워낙 형편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농사 조건이 열악한 두메산골에서나 조금 지었지 
잡곡 농사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되었고,
정미소에서도 잡곡 정미를 위한 기계를 갖추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농가에서는 가정용 정미기를 갖추어 집에서 먹고 자식들 나누어 줄
쌀이나 잡곡을 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일을 트럭에 싣고 다니던 잡곡은 영 엉뚱한 곳에서 정미를 하게 되었습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바로  저가 살고 있는 명호면 소재지에서 얼마떨어지지 않은 국도변에
정미소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없는 잡곡용 정미기가 당연히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하는 마음에 찾아가 봤더니 잡곡용 정미 기계도 있을뿐아니라
소량을 알곡도 혼쾌히 정미를 해 주시겠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다시 정미소를 찾아 작업을 끝낸 수수와 조를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기장은 탈피가 잘 안되어 정미소에 딸린 따뜻한 방바닥에
늘어 놓으시고는 설지나서 정미를 해 놓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집 수수랑, 기장이랑, 조를 정미해 주신
명호면 도천리에 있는 명호정미소 박종석 사장님께 감사드리구요.
올해는 본격적으로 잡곡 농사를 지어 좀 많은 양을 들고
다시 정미부탁드리려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 이 포스트에 나오는 정미소 풍경 사진은 모두 명호 정미소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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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력으로 섣달(12월) 25일로 비나리마을 초롱계가 있는 날입니다.
초롱계는 비나리마을의 전통으로 전기가 없던 시절,
큰일을 치루는 이웃에 초롱불로 부조를 하던 전통으로부터 전래되었습니다.
이웃에 상이나, 혼례가 있으면  집집이 한손에는 두부나 떡을 해 들고, 
또 한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큰일을 치루는 집으로 향했답니다. 
그렇게 이웃을 도와 가며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나마
마음 넉넉하게 살아올 수 있게 했던 아름답고 지혜로운 전통이었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룬 주인은 그뒤 자신의 사정에 맞춰
적당한 금액의 돈을 초롱계 기금으로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전통 공동체 문화가 쑥대밭이 되기전인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오던 초롱계는 그뒤 마을의 쇠락까지 겹쳐
그 흔적만이 남아 동네 상여계와 합쳐져 유지되고 있습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나서 초롱을 부조하던 전통은 사라지고,
초롱계의 형태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네에 상이 났을 때 상주가 상여꾼에게 주는 노잣돈을 모아
여러가지 마을행사 비용이나 마을 공용 비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고,
그러고도 남는 기금은 마을 주민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일정한 이자를 물고 1년단위로 빌려주는 '계'가 '초롱계'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초롱계 날은 그렇게 빌려간 돈을 이자와 함께 모아서,
지난 일년간 동네일로 쓴 금액을 제하고
나머지를 다시 필요한 주민에게 빌려주고,
그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치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주민 모두가 하루를 즐기는 그런 날입니다. 

비나리마을 초롱계 기금은 이제 몇백만원 남지 않았습니다.
10수년 전만해도 동네에 상이나면  이웃 주민이 상여꾼으로 돕고,
상주가 내어놓은 노잣돈은 초롱계 기금으로 모았습니다.
하지만 마을에 인구가 줄고, 특히 상여를 맬 청장년이 줄어들면서 
초롱계 기금으로 모으던 노잣돈을 상여꾼의 일당으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해가 갈수록 기금이 줄어들어
앞으로 몇년이나 더 초롱계가 이어질지 걱정입니다.


초롱계의 형식은 세월따라 바뀌었지만 이웃의 대사에
초롱을 부조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비나리 초롱축제'로 새롭게 태어날 예정입니다.
몇년전 비나리산골미술관 개관식에 맞춰 초롱을 부조하는 초롱행렬을
개관식 참가객과 주민이 함께 재현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따라 알게 모르게 침체되고 생기를 잃은 마을이
수많은 초롱행렬로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초롱행렬의 재현은 연년이 이어지지 못하고
예산의 벽에 부딪혀 중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끊어진 초롱축제가 곧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한 청량산 인근마을과 더불어,
주민과의 연대와 소통에서, 마을과 마을의 연대와 소통을 이루는
축제의 장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늦어도 내년가을이면 재현될 비나리초롱축제를  
올 한해 내내 조사하고 궁리하여 멋들어진  마을 축제로 준비해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소멸되어가든 마을이 비나리초롱축제를 매개로 활력과 신명이 넘치는,
사람사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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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어디에서도 마찬가지 겠지만
산골에서 겨울나기에는 꼭 필요한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배를 불릴 양식은 밀할 것도 없고 
몸의 체온을 지켜줄 뗄감이 그것입니다.
가을 걷이가 마무리되면 산골 농부는 본격적으로 산을 오릅니다.
죽어 말라 비틀어진 나무부터, 지나치게 우거진 숲의 잡목까지
그리고 오고가는 농로나 밭을 가리는 성가신 나무까지 
닥치는데로 베어서 집으로 나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오는 나무로는 겨울나기가 쉽질 않습니다.
사실 집만해도 옛집이 아닙니다.
기어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초간 3간이 아닌다음에는
나무로 난방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뗄감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최대한 춥게 살고 아껴가며 불은 뗀다고해도
겨울 3~4달동안 1톤트럭으로 7~8대는 들어가야합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온돌아궁이가 아니고,
축열식 온수파이프방식의 난방을 하는 경우는 거의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우리집에도 작년 5월달에 나무보일러를 설치했습니다.
군청에서 석유연료 절약을 위해 보조금까지 주고 보급하는 덕분에 
보조 100만원 자부담 150만원짜리 나무보일러를 설치하게된 것입니다.

그전에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면서 베어놓은 나무들이 있어
가을에 되고 겨울이 와도 아무걱정없이 따뜻한 물을 만껏 쓰고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추위가 몰아닥치자 어지간히 나무를 해되지 않고서는
한겨울 추위를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미리해 둔 나무는 떨어져가고 할 수없이, 눈길을 헤치고
산속을 헤메며 나무를 하러 나섰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올 한해 겨울은 쉽게 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인근의 산들에서 숲가꾸기가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벌목 전문가들이 산을 돌아다니며 잡목을 베고 우거진 숲은 정리하면서
그렇게 치워진 나무를 마음대로 싣어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덕분에 어제  1톤 트럭으로 2대를 포함해 7~8대의 나무를 싣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적어도 내년 가을까지는  뗄감 걱정을 들었습니다.
그냥 배부르게 먹고 뜨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봄이 오기만을 가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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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문화예술의 존재조건

- 산업화의 중심에서 문화 예술을 통한 탈산업화의 상징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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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은 제철의 도시다. 철의 이미지는 차갑고 딱딱하다. 하지만 포항은 문화예술의 대척점에 서있을 것 같은 제철산업의 도시를 문화화, 예술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꽃과 그림이 가득한 푸른 청림동 만들기]등 각종의 공모 지원 사업 등 포항을 풍성한 문화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를 해오고 있고, 지역 미술문화의 전당인 포항시립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130억 원의 예산을 들인 포항 시립미술관은 기초자치단체가 건립한 경북 최초의 공공미술관으로 지역미술문화는 물론 한국미술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는 포부를 표명하고 있다. 포항시립미술관은 다음 달 22일부터 내년 3월 14일까지 그 설립취지에 맞춰 ‘신철기 시대의 대장장이’를 주제로 개관전을 갖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포항시립미술관 인근에 곧 ‘경북학생문화회관’도 들어설 예정이다. 이 시설은 경상북도 교육청이 420억의 예산을 들여 각종 공연장과 수련시설을 갖춰 경북의 청소년뿐 아니라 시민의 문화적 수요를 충당할 예정이다. 새로 건립되는 시설 뿐 아니라 포항 문화예술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포항문예회관은 근년에 들어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가지면서도 대중적인 각종 전시와 공연을 기획함으로써 시민친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시도하고 있고, 일정한 성과도 얻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포항은 축제의 도시라 해도 가히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수많은 축제를 열어오고 있다.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비롯해 과메기축제, 포항 바다 국제연극제, 영일만축제, 구룡포 해변축제, 포항 국제 불빛축제, 정몽주축제, 일월문화제, 아트페스티발 등 포항은 연중 축제가 끊이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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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두고 보면 포항은 문화예술측면에서 가히 “꿈과 희망의 도시 글로벌포항”을 향한 순풍을 만난 듯하다. 하지만 최근 포항시가 추진 중인 전통문화체험관 건립이 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리는 등 문화 시설에 대한 과잉 투자와 과시적 행사가 과연 포항 지역 예술문화발전에 도움이 되는가는 의문이 싹트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문화공연시설이 그 규모에 걸 맞는 알찬 운영을 뒷전으로 한 채 과시적이고 행정적인 성과에 집착해 설립 운영되면서 철학의 결핍과 부실한 내용으로 운영의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사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지은 포항시립미술관이 그 외형적 규모에 어울리는 탄탄한 내실을 갖추고 지역주민의 삶을 문화 예술적으로 고양하는 미술관으로 운영될 수 있기 위한 인적, 내용적 준비를 건축 공사의 진척에 맞춰 갖추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북 지역의 학생 야영장, 청소년 수련관, 청소년 수련원의 경우도 꼭 필요한 지역에 설립하거나 낙후 시설에 당장 필요한 유지보수나 보완, 인적자원의 지원, 내용성 강화 등에 필요한 예산은 아끼면서 편협한 지역 이기주의와 행정 성과주의에 빠져 무분별하게 신설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신설되고 있는 경북학생문화회관의 경우도 지역편중과 과잉 투자 문제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투자나 프로그램 개발에 인색한 채 오직 시설투자에만 올인 하는 문화적이지 못한 문화 행정의 산표본이 되지 않을까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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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에 조성된 해맞이 광장에 설치된 작품 '상생의 손'

포항은 제철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대표적 산업 도시로, 한국 사회가 가진 급속한 산업화의 성과와 그 한계를 오롯이 안고 있는 상징적 도시이다. 절대적 가난으로부터의 탈피가 범국가적인 절대절명의 과제이던 시절, 국가주의로 무장한 산업화 세력은 거의 전 국민적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내며 오직 경제성장에 매진했다. 산업화 세력은 경제적 합리주의와 개발주의를 앞세워 지난 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공동체주의를 위시한 전통적 가치는 물론이고, 개발주의세력이 그 역할모델로 삼고자 했던 구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조차 그 존립의 근거로 받아들였던 사회의 공정성과 투명성, 기회의 균등성,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최소한의 근본가치들마저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팽개쳐 버렸다. 산업화세력이 초가지붕을 강압적으로 제거할 때 초가지붕아래서 보전해오던 온갖 정신적 가치와 전통문화들도 함께 버려졌다. 그렇게 성장 제일주의라는 불도저가 밀고 지나간 자리에 공장과 빌딩이 들어서고 현대화된 고속도로가 놓여졌다. 개인들의 소비수준을 급격히 증대되었고, 꿈에 그리던 ‘마이카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러나 폭발하는 한국경제의 성장이 저절로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던 윤택한 개인적 삶은 표피에 그쳤고 정신적 빈곤과 문화적 갈증은 경제적 성장에 비례해서 높아만 갔고, 그와같은 상황에서 또 수많은 개인들은 물질적 성장의 혜택에서 마저 철저히 유리된채 물질적 정신적으로 이중의 피폐한 삶으로 몰아넣어졌다. 더불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경제 성장세가 주춤거리기 시작하자 한 시대를 지배한 성장제일주의는 회의의 대상이 되었고,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졌던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도 쉽게 내동댕이쳤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인간적 삶을 지탱해주는 최소한의 가치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지역문화’도 그 즈음에 탄생한다. ‘지역문화’는 지역과 문화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 그 의미를 획득했다. ‘독립’의 의미가 주권을 잃은 뒤에야 극명해지듯, 일제강점기를 통해 민속문화-전통문화로 이루어진 지역문화에 대한 가치부정과 상징파괴가 수반된 뒤, 그리고 일제의 지배정신을 잇는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의 새마을 운동을 통해 대대적인 지역문화-공동체문화의 말소작전이 자행된 뒤 비로소 ‘지역문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이 전면적으로 대두한다.

산업화 시대와 산업화의 극복이 과제가 되는 시대를 관통해 포항은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한발작도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 산업화의 과정, 그리고 한국식 산업화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의 문화화, 예술화가 과제로 제기되고 수행되는 시대의 중심에 바로 포항이 있다. 경북 지역사회로 한정해 보더라도 포항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 도시다. 포항은 구미와 더불어 경제적 자생력을 갖춘 경북의 두세 도시 중의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그와 같은 경제적 자생력을 기반으로 해 도시를 예술-문화화 하는 선봉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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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산업의 도시를 예술-문화화 하는 과제가 시대적 화두가 되는 시점에서 한국사회의 문화적이지 못한 문화 행정을 극복하고, 산업화의 기반위에서 포항의 지역문화예술이 활짝 꽃피기 위해서는 문화와 예술이 무엇인지, 그것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시민의 삶과 융화되어 인간적 삶의 가치를 고양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 확산에 기여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문화예술이 어떻게 탄생하고 생존하고 번성하는가는 문화생태학적 고찰과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삶을 이끄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포항이라는 도시의 특성과 지역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포항은 예술-문화의 가치기반을 되짚고, 그 지향을 뚜렷이 하는 한에서만 진정으로 ‘꿈과 희망의 도시 글로벌 포항‘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지난 산업화 시대를 주도한 도시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 가치의 생산지이자 보급의 전진기지가 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포항은 산업화 시대를 이끈 토건국가의 전위에서 산업화시대가 남긴 정신적 상흔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가치의 원천을 되짚고 가치지향을 뚜렷이 하는 문화예술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포항의 문화예술이 새로운 시대에 기반 해야 할 가치는 산업화 시대를 이끈 물질 만능주의에 맞선 공동체주의와 인류의 보편적 인권, 그리고 자연을 무분별하게 착취하는 개발주의에 맞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자하는 생태주의이다. 이들 가치에 기반 할 때만이 포항의 문화 예술은 제철산업을 중심으로 한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희생된 가치와 정서를 회복하고 기형화된 도시적 기능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나아가 지역의 건강한 정체성을 세워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정신문화, 예술을 창조하고 통합과 상생의 문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포항이 탈경제의 가치를 주도하는 지역문화를 꽃피울 수 있길 기대한다. 한국 사회의 모든 고질적 현대병을 일으키는 암세포는 한국인의 의식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는 경제 일원론에 기생한다. 이는 무분별한 산업화가 낳은 정신문화적 상흔이지만 경제에 마저 걸림돌이 될 만치 그 암 덩어리가 커져 벼렸다. 경제일원론으로 바라다본 한국 사회의 문제 해법은 오직 경제성장 이다. 그와 같은 사고가 교육에 전이되어서는 성적 지상주의, 학벌주의로 귀착되고, 사회는 복지 없는 경쟁만능주의로 내몰려 가족과 개인의 삶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내재적, 정신적 가치를 배제하고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시장주의가 황폐화시킨 세상을 치유하고, 경제의 단일 지배로부터 다양한 가치를 지키는 문화는 지역사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역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앙으로부터 소외된 공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경제라는 단일가치의 지배를 전복할 반역의 싹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다.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획일화된 경제 만능주의의 지배 구조를 밝히는 과정이고, 지역의 차별적 위상을 또렷이 마주하는 작업이다. 지역의 위상을 분명히 인식하는 순간 지역의 정체성은 반경제, 반중앙에 기반한 대안문화 대안가치를 생산하는 공간으로 전화되고 이렇게 만들어가는 지역의 정체성은 지역자치, 지역문화자치로 꽃피고, 탈경제의 가치를 지역문화라는 무기로 퍼뜨리는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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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포항은 식민화된 지역문화의 해방을 이끄는 지역문화예술의 성지로 거듭나야한다. 서울이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서울 문화가 표준 문화로 강요되는 시대에 포항은 다른 지역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자생력을 갖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서울공화국의 변방이 가지는 지역성을 피할 수 없다. 지역의 여타 시군과 마찬가지로 포항 역시 ‘돈 벌어 서울 가서 사는 것’이 많은 시민의 평범한 꿈이고, 아이들 키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서울로 올려 보내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인생계획인 지역 사회의 일부이다. 따라서 포항 지역의 문화 예술은 지역의 삶, 지역의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해 지역민의 정체성을 찾는데 기여하는 지역성을 담보해야 한다. 서울문화를 추종하고 답습하여 그 아류가 되는 방식으로는 결코 포항이 문화예술의 도시가 될 수 없다. 포항의 문화예술이 그 지역성을 확고히 할 때 지역의 문화 공간들은 서울문화, 중앙문화를 지역에 배급하는 문화 대리점이 아니라 지역과 중앙의 문화와 삶이 만나고 소통하는 ‘장터’가 될 수 있고, 포항이 독자적 가치를 가진 주체적 문화 예술 도시로 우뚝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운 가치기반위에 세워질 포항의 문화예술은 현대화된 산업 기반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동적이고 전위적인 문화예술로 꽃피어야한다. 포항은 현대적 문화예술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산업화를 선도한 현대공업도시인 포항은 산업화를 통하여 물질적 경제적 조건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경북의 다른 시군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유교적 경건성, 박제화 된 교양주의 문화, 고루한 토호문화로부터 자유스러운 도시이다. 그 물질적 조건위에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 기반을 조성하고, 생동감 넘치는 현대적 전위예술이 꽃핀다면 포항은 하이브리드, 퓨전, 크로스오버가 보편화된 시대를 이끌 새로운 정신문화의 성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제는 오롯이 포항의 문화예술인, 더 중요하게는 시민의 몫이다. 미래적 가치와 문화가 융합되고, 문화와 시민의 삶이 일치되는 도시, 도시의 거리가 예술로 넘쳐나고 풍성한 정신문화가 시민의 일상을 행복으로 이끄는 그런 ‘글로벌 도시 포항’을 보고 싶다. [2009.12.10 / 송성일:농민]

 <참고자료>

“경북 '그저 그런' 학생 수련시설 70곳 … 실효성 논란”, 이영균, 경북일보, 2009.5.6.

[지역문화 그 진단과 처방], 임재해 저, 지식산업사, 2002.

[지역창조] 화천군지역혁신협의회 저, 도서출판 다움, 2007.

<이명박시대의 문화운동-문화정책 토론자료집>, 전효관, 민예총, 2008.

[왜 지역문화인가], 이현식 저, 로크미디어, 2007.

[당신의 문화 쾌적합니까], 문화연대 저, 문화과학사, 2001.

<상식으로 엮어낸 진보적 지역문화의 로드맵>, 목수정 저, 민노당정책연구원, 2006.

<탈경제의 가치를 지역문화가 주도하자> 등, 송성일, 컬처라인,2009.

[한국의 지역문화:현황 및 정책방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저, 대왕사, 2008.

 

 포항예술문화연구소 발간 [아트포럼] 2009.12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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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경제의 가치를 지역문화가 주도하자.

- '경제'를 극복한, '경제'를 압도하는 문화가 꽃피는 지역사회를 꿈꾼다 -

지역 문제의 근원은 '빈곤'일까? 절대적 빈곤의 문제가 '상대적 빈곤'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고 해도 한국 사회에서 빈곤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지역의 문제를 경제적 소외, 경제적 박탈감이 중심이고, 문화적 소외나 교육, 의료의 결핍은 경제적 소외의 결과물로만 이해해도 좋을까? 지역 문제를 지역경제 활성화의 문제로 환원하고, 지역 문화를 지역 경제 활성화의 보조수단 쯤으로 바라다보아도 좋을까? 지역의 정치인은 중앙정부의 보조금을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는가에 따라 정치적 운명을 달리해야하고, 지역주민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언제라도 떠나도 좋은 곳으로 지역사회를 바라다본다. 이런 경제 일원론의 시대에 지역이란 무엇이며, 지역문화는 어떤 가치에 토대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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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홍대 앞 서교지하보도에서 지역주민과 인디문화 아티스트들이 인디문화 활성화 및 지역문화 공간의 대안 "서교지하보도 매립"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외부인이 바라보는 ‘지역’과 지역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지역민에게 이해되는 ‘지역’은 다르다. 외부인에게 ‘지역’은 과거를 추억하는 장소이거나,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과정에서 경쟁력을 잃고 밀려난 성장의 주변부, 시대의 잔존물로 연민의 대상이거나 질주하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거추장스런 걸림돌일지도 모른다.
 
지역민에게는 삶의 터전인 ‘지역’이 외부인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지역사회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 일자리를 따라 잠깐 머물게 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지역’과, 누대에 걸쳐 살면서 조상의 묘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보전하며 살아가는 터줏대감이 느끼는 고향으로서의 ‘지역’의 의미는 하늘과 땅차이일 것이다.
 
지역을 단순히 지리적 경계로 받아들인다면 그 경계는 불확실하다. 지역은 지리적 경계를 바탕으로 하지만, 또한 지리적 경계를 넘는 문화적 정체성에 토대한다. 하지만 그 문화적 정체성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난제는 문제의 근원을 모두 경제로 돌림으로서 실종되어 버렸다. 근원적 사고가 사라진 자리에는 천박한 물질주의가 자란다.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지역문화와 문화관련 사업이 논의되고 추진되는 현실은, 삶이 없는 문화와 문화 없는 문화상품화를 초래했다. 문화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지역문화를 일구는 전부가 되고, 문화예산은 건설토목예산의 경계에서 그 특성을 잃어버린다.  
   
지역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경제 환원주의다. 경제일원론으로 바라다본 한국 사회 문제의 해법은, 오직 경제성장, 결국 성장제일주의이다. 그것이 교육의 장에서는 성적 지상주의, 학벌주의가 팽배하고, 권력과 돈의 독식구조가 안착되면서 개인의 삶은 질곡에 빠지고 소시민적 행복조차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개인의 삶을 이끄는 가치나 덕목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돈과 돈을 위한 지위를 추구하는 현상이 차지했다. 돈으로 가늠되는 ‘성공’이라는 결과는 모든 비도덕적, 반사회적 과정을 정당화한다. 이 모든 현상을 경쟁사회의 당연한 귀결로, 성장통의 부수적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위대한 서울민국’이 탄생했다. 사람과 돈, 권력의 서울 집중은 세종시 논란에서 보이듯 이미 고착화 단계에 들어갔다. 지역의 균형발전이란 화두는 서울, 경기의 지가하락과 이에 따른 경기하락으로 받아들여지고, 이 문제의 이해당사자라고 간주되는 이 지역에 사는 인구가 국민의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 합리적 토론과 합의를 통한 세종시의 존속과 지역 균형발전은 불가능하다.
 
비나리마을에서 가진 소외지역 어린이를 위한 거리 연극 공연을 마친 뒤 뒤풀이 자리에서 볼리비아의 연극인은 물었다.
"이 아이들이 소외계층인가요?"
가난한 볼리비아 연극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두메산골 아이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린다. 사실 한국은 세계 수위의 경제대국이고, 1인당 국민소득 면에서도 구미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유국가다. 몇 번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비록 많은 개인의 삶이 파탄 나고 단란한 가정이 파괴되었지만, 이를 잘 극복해서 모범적으로 성장의 도정에 북귀했다. 언론은 그런 경제지표상의 성과를 대서특필하고, 지표상의 경제 성과와 괴리된 개인의 힘겹고 불안한 삶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화려한 경제지표 뒤에서 국민 대다수는 경제적 결핍에 허덕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고 있다. 이 모든 현실은 경제가 나아진다고, 국민소득이 3만 불 시대에 도달한다고 해결된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부의 불균등을 해소하고, 복지정책을 강화함으로써 문제의 많은 부분이 해결되겠지만, 경제가 모든 가치, 모든 삶의 지향들을 몰아내어 생긴 상처의 치유는 경제로부터 삶의 자율성을 확보함으로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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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의 지배로부터 다양한 가치를 지키는 문화는 지역사회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지역은 경제적으로,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공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경제라는 단일가치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싹이 자라는 땅이다. “지역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1)이다.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만들어가는 것은 획일화된 경제만능주의의 지배구조를 밝히는 과정이고, 경제만능주의가 낳은 국토의 기형적 발전으로 추락한 지역과 마주하는 작업이다. 지역의 위상과 마주하는 순간 지역의 정체성은 반 지배, 반 경제, 반중앙의 인식위에서 세워질 대안문화, 대안가치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역의 정체성은 지역 자치, 지역문화자치로 꽃피고, 탈 경제의 가치를 지역문화로 확산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역문화란 지역에서 사는 일이며 지역민의 일상 속에서 만들어 가는 일"2)이다. 지역 문화는 정치적 구호가 대신할 수도 깃발 몇 개를 세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파생한 가치와 지역민의 삶이 뒤엉킨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꽃피는 것이 바로 문화일 뿐이다. 그래서 문화운동은 정치운동과는 등치될 수 없는 고유영역을 가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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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역문화 만들기는 지역 만들기가 기초이며, 지역 만들기는 사람 만들기가 필수조건이다.3) 결국 사람 사는 마을 만들기가 지역문화 만들기의 기본인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주민의 삶과 문화를 일치시키고 가치와 문화를 융합시키는 작업,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고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하고 공동체의 문화를 복원 혹은 새롭게 창조하는 일, 마을의 존재 가치를 확산하는 도농 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 등, 세계의 중심이 지역공동체, 나아가 마을에 있음을 확실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작업을 통해 지역이 사람 사는 공간, 삶과 문화,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면 탈 경제의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고 실험하고 실현하는 기반으로서의 마을 공동체가 새 시대를 이끌 가치의 생산기지이자 전파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은 지역을 죽였지만, 지역은 서울을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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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동규 등 저, 『사람과 자연이 만들어가는 지역창조』, 다움, p. 4.
 2) 정찬용, 천승룡, 문충선 공저,『송산마을 속으로 들어가다』, 희망제작소, p.5.
 3) 위의 책, p.5, p.141.

송성일 | 2009-11-25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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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농촌공동체 문화’란 무엇인가
- 비나리마을에서 희망 만들기 -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고들 난리다. 실제로 세계 많은 나라 중 한국의 자살률이 수위에 이르고 더 심각하게는 그 상승세가 가장 가파르기까지 하다. 잘사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고,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 믿었지만. 뒤집어보면 경제가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심이 되고, 시장이 유일한 공정률로 여겨지고, 시장에서의 승패가 개개인의 삶을 절대적으로 좌우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어떻게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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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2009.03.06 영화"워낭소리" 촬영지 //경북봉화=최문영 기자 deer@
   세상살이를 가장 가까이서 규정하는 것은 정치나 경제제도겠지만, 그 근원에는 결국 '가치'가 있을 것이고, 기본적으로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일 것이다. 정치나 경제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지배적 문화나 가치가 먼저 바뀌어야 된다는 문제의식은 그와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전 산업화 시대부터 농촌공동체 문화는 제국주의 문화의 침탈과 자본지배, 그리고 그에  따른  물질만능주의 문화에 대한 대항문화, 나아가 대안문화로 제출되었고, 문화운동이 민중문화, 민족문화를 실천적 내용으로 하는 문화 예술인의 당위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과 외형적 경제 성장이 우리 사회의 식민적인 성격을 희석시키고, 서구화된 생활양식과 의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지역문화 담론에서 지역문화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지던 민중문화 더 나아가 농촌공동체 문화 담론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지역공동체 담론이 사라진 자리는 문화 상품의 논리와 탈현대적 개인주체 담론이 대신하고 어느덧 민중 문화는 낡고 초라한 구시대의 유물로 내팽겨 졌다. '지역문화'는 '지역축제' 혹은 '지역관광자원"의 종속개념으로 격하되었고 특히 농촌공동체 문화는 현대화되고 합리화되는 세계적 변화를 역행하는 반경제적 반시대적 잔존문화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다시금 시장 지상주의가 시대적 조류가 되고, 오직 무제한적인 시장 경쟁이 인간 개개인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살벌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문화가 인간적 삶을 지키고 공동체를 보전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농촌공동체문화'의 현재적 의미를 되묻게 한다.

사실 농촌공동체는 정체와 심각한 훼손을 넘어 소멸의 과정에 들어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적 삶을 치유하고, 인간의 본원적 가치를  회복하는데 농촌공동체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 의미 있는 작업인지 판단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우선은 마을의 현재적 삶에 대한 진단과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대항문화로서의 실효성, 대안문화로서의 성립가능성이 검토 될 수 있고, 그 한계를 짚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업인구가 전체국민의 70여%에 육박했지만 산업화 과정을 거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든 2007년 6.8%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나마 향후 10년 간 년 평균 2.7%의 농가인구 감소가 예상된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09년) 농촌인구 감소와 더불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농촌이 극단적인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듦으로써 마을 공동체의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마을 공동체의 재생산이 불가능한 마을에서 '농촌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은 피할 수 없는 소멸과정에 접어들었다. 미래가 없는 마을은 공동체 문화는 고사하고 풋풋한 인심마저 지켜질 수 없다.

   필자가 살고 있는 비나리마을 역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1,000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던 마을이 현재 50여 호에 약 100여명의 인구로 줄 들었다. 이미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후대에 남길 수 있는 노령 세대들마저 한분 두 분 돌아가시고, 마을의 역사가 단절되는 만치 마을의 고유한 문화 역시도 사라져 가고 있다.
공동체 문화로 제도화된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마을동제'와 '풋거 먹는 날', 그리고 '상여계'가 전부이다. 그나마 '마을동제'는 진행할 인력의 부족과 기독교 문화에 의해 존폐의 논란에 접어든지 오래고, '상여계' 역시도 상여를 맬 인력이 줄어드는 만치 외부 상조회사의 영업에 밀려 언제 까지 존속이 가능할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풋거 먹는 날'만이 그래도 이런저런 논란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존속되어 오고는 있지만 이 역시 해가 거듭될수록 빈약해져오고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 이웃의 대소사에 주민들이 초롱불로 부조하던 초롱계의 전통은 70년대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주민의 삶 속에 녹아있는 '농촌공동체 문화'의 핵심이 그대로 온존되고 있는지는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외형화된 제도로서의 문화는 소멸과정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비나리마을 농민들은 먼저 자신의 삶을 보듬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농촌공동체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이어지고 있다. 공동육아에서 마을 공부방, 문화 예술적으로 풍부한 공간으로 농촌마을을 변화시키기 위한 비나리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 활동들, 더 나아가 도시의 생활협동조합 등 사회단체와의 외부적 연대와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 한 인근 7개리 800여 주민간의 공동사업 모색까지, 그냥 소멸해가던 농촌마을 비나리는 지역사회의 새로운 활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추동력은 외부에서 끌어오거나,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고유한 자연과 농부의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에 담긴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 가치가 지배하는 문화에 새로운 가치매김을 하는 것에서 마을은 변화를 시작했다. 농민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재인식하고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순간이 바로 그와 같은 변화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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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김천옛날솜씨마을 주민들이 지난 1일 짚으로 계란꾸러미를 만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김천=김연수기자nyskim@

   사라져버린 비나리마을의 ‘초롱계’가 초롱축제로 부활한다. 단일 마을의 부조문화를 7개 리의 마을간 부조문화로 승화시킨 새로운 축제의 형태로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초롱축제는 다양한 사회적 장치를 통해 개인과 마을 간의 일체성을 확립하고, 상호부조의 그물망 속에서 개인적 삶의 안정성을 담보하던 전통적 농촌공동체 문화를 현대화된 모습으로 재현한다. 초롱축제는 전통 농촌사회의 건강한 원시성을 재현함으로써 상처입고 고립된 주민의 삶을 치유하는 굿판이 될 것이다. 

   비나리마을은 새 꿈을 꾸고 있다. 내년에 마을 중심에 ‘학교’가 들어선다. 하지만 이 학교는 그냥 단순한 시골 학교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매개하고, 우리 사회가 추구해 나가야할 미래적 가치를 생산하고 상호 교류하는 농민학교이자 시민학교이다. ‘비나리 시민학교’는 단순한 마을 소득사업의 수단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의 실험이자, 농촌공동체 문화의 생산과 확산의 전초기지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이제 막 시작한 걸음마에 불과하고, 언젠가 ‘성공사례’가 된다고 해도, 마을을 넘어 전체 농촌에, 나아가 농촌을 넘어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사례’의 산출이 아니라 ‘가치’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한 마을의 작은 시도들은 우리 사회에 희망을 퍼뜨리는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희망을 품고 아름다운 삶을 일구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마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벌써 의성의 교촌리, 홍성의 문당리, 단양의 한드미, 화천의 토고미, 이천 부래미 같은 마을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새로운 농촌공동체의 전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들이 가꾸어 나가는 마을이 세상을 향해 퍼뜨리는 향기는 언젠가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 틀림없다.
 
   배용준은 배우다. 그의 한 마디, 그의 동작 하나에 수천수만의 팬들이 울고 웃는다. 돈으로 환산된 상품 배용준은 거의 천문학적 금액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미래는 농부가 되고 싶단다. 마케팅전략에 따른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귀농'이 현대인의 로망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결국 경제가 모든 것을 짓누르고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 뒤, 개인의 삶은 그만치 더 처절해지고, 공허해진 탓 일거다.  '귀농'이 현대인의 로망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의 고유한 성격, 자연과 나의 삶이 노동으로 맞닿아 있고, 합리화된 사회적 관계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온전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세상, 제도화된 사회적 안전망이 미비한 우리 사회의 천박성이 끊임없이 개인의 삶을 벼랑으로 내 몲으로서 체제에 대한 복종과 순응을 강요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전통적 인간 관계망 속에서 개인의 안전한 삶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공동운명체인 농촌공동체, 그것이 바로 현대인에게 '농부'의 꿈을 꾸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라져가는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그 문화를 가꾸는 일은 복고적 취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을 지켜내기 위한 새로운 가치의 탐색 과정이다.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찾는데 ‘가치’의 방향타 없이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농촌은 ‘농산물 산지’이자 새로운 생태적 가치, 대안적 공동체, 그리고 미래적 가치의 생산 기지이다. 공동선의 극대화를 통한 개인적 삶의 안전성 확보와 개인 복지 수준의 향상을 기해왔던 상호부조와 두레의 전통에 기반한 농촌공동체 문화가 시장지상주의의 반공동체성을 치유하는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은 먼저 지역문화에서 ‘농촌공동체 문화’가 갖는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그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풍성한 농촌공동체 문화가 지역문화를 이끌고, 지역문화가 내재적 가치를 배제하고 경제적 가치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신자유주의가 황폐화시킨 세상을 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송성일 | 2009-10-01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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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운동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를 통해 문화와 예술은 경제발전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민주화를 추동함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문화사회’의 실현을 앞당기는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문화운동의 큰 줄기는 자연스레 문화자치와 문화 민주화로, 그리고 문화의 탈 경제화, 탈 물질화로 모아졌다.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진보적 문화담론이 공론의 장을 차지함은 물론, 문화운동세력이 ‘민주정권’의 일익을 담당하는 데에까지 이르러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과제가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으로 집약되듯, 문화운동의 중심과제 역시 ‘지역문화자치’로 ‘지역문화 분권’으로 압축되었다. 지역의 문화적 분권과 자치는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고양함으로써, 지방자치와 분권의 실현에 선순환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일정 정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도 했다. 정부가 2001년을 ‘지역문화의 해’로 정하고, “사람, 삶터,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 것이 그런 흐름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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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뉴시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아 관객상을 수상한 ‘워낭소리’가 오는 13일부터 22일까지 강릉시 포남동 자비복지원 소극장에서 앵콜 상영된다.(사잔=강릉씨네마떼끄 제공)/ 박진완기자 jwpark@newsis.com <관련기사 있음>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역문화’라는 말은 지역문화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 지금의 의미를 획득했다. ‘독립’의 의미가 주권을 잃고 나서 깨닫게 되었듯, 일제강점기를 통해 민속문화-전통문화로 이루어진 지역문화의 가치가 부정되고 상징이 파괴된 뒤, 그리고 일제의 지배 정신을 잇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지역문화-공동체문화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지역문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저히 파괴된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한 지역문화를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의 현대사는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민주적 가치의 보편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민중 문화와 교양 문화, 참여와 순수라는 두 줄기의 흐름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문화적 지평을 넓히고, 정신적 풍요를 축적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 모든 영역의 경제화를 지향한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합법적’으로 부정되는 신권위주의 시대에, 문화는 심각한 학습장애와 퇴행에 빠져들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한한 배려를 보편화했던 문화의 흐름이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문화가 문화산업과 등치되고, 문화정책이 경제정책에 부속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일궈온 우리의 문화적 토대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외면당하자 진보적 문화는 방향성을 잃고 공황상태에 빠져 스스로 진전시켜온 성과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는 반복하지만 진전되고, 퇴행하지만 더 큰 도약을 초래해왔듯이, 지금의 문화적 퇴행은 지역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모든 당위가 의문시되고 모든 가치가 부정되는 시점에서, 다시 그 당위성을 묻고, 가치의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문화의 ‘자율과 자치, 분권’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가, 그리고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긴 호흡, 먼 눈길로 낡은 과제와 마주해야한다. 인류의 역사가 쌓아온 보편적 가치를 가지며 그와 같은 낡은 과제를 새롭게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지역문화는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것이지, ‘지역 문화’의 구체적 내용을 예단함으로써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마주하게 된 낡은 과제는, 지역문화의 식민화와 정치적 간섭, 그리고 경제화로부터의 해방이다.

 

모든 가치가 하나의 시장, 단일한 화폐가치로 환원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역문화는 존립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다. 서울의 문화가 문화적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고, 지역문화가 그 하위문화로 평가 절하되는 시대에, 공상의 차원으로 추락한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동일한 시장 메커니즘과 가치체계를 수용하면서,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묻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망상이다. 지역문화의 가능성은 지배문화의 틀을 벗어던지고, 인류의 자산인 보편 가치의 지역적 특성에 기반해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권이라는 가치, 자연과 인간의 일체성 회복,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정치적이다. 문화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의 장이다. 문화계 전반을 휩쓸고 있는 매카시 선풍은, 문화의 그런 속성을 대변한다. 현 정권이 수행하는 문화정책을 ‘좌익척결’에 두고, 문화예술을 지배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쯤으로 ‘천대’하는 풍조는 참을만하다. 문제는 문화의 정치화가 아니라, 여러 입장들이 모아지는 방식이 얼마나 높은 합의수준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문화는 정치적이되 정치권력에 복속되어서는 안되고, 문화의 장에서 ‘정치’의 관철은 ‘문화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 길이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관철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사회에서, 정권교체가 문화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정책이 공안과 결합해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의 정치 과잉이 초래한 권력에 복속된 문화 관료주의가 지역문화에 어떻게 파급될지, 정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반달리즘이 막 열매 맺기 시작한 지역문화 운동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치의 문화개입이 지역문화를 정치 과잉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역민의 생활에 뿌리내리는 지역문화 담론의 형성이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 지역정치, 지역의 삶, 지역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회복함으로써 지역문화는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식민화와 정치적 과잉의 근저에는 ‘문화의 경제화’가 있다. 상품화된 대중문화가 상품화되지 못하는 모든 가치를 몰아내고, 문화산업적 시각이 문화정책을 대신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경제는 사라지고, 경제를 위한 인간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지역축제의 붐이 지역문화의 붐이 아니라 문화의 경제 종속을 드러내고, 문화가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 뉴딜정책을 포장하는 하나의 장식으로 전략했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4대강사업의 첫 삽을 뜨는 홍보이벤트가 이루어지는 현실은, 안동의 문화가 대표적 토목사업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문화의 탈 경제화는 시장으로부터 버려진 탈 경제적 가치의 복권과 확산에서 시작된다. ‘실용’이란 마법에 걸려 맥을 못 추는 인권과 복지, 민주주의와 생태환경을 복권시키는 지역차원의 미시적 실천이 어쩌면 문화의 탈 경제화를 추동하는 저변의 힘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식민화된 지역문화를 해방하고, 문화의 정치 과잉과 경제화를 역전시켜 정치와 경제의 문화화를 성취할 수 있는지는 사실 낡은 과제다. ‘민중문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70년대를 관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과제는 우여곡절 속에 수행되어 왔고, 신자유주의와 신권위주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었을 뿐이다. 과제의 심원함이 해결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길이 있다면 그것은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화는 표피적 자극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관통하는 심원한 강이다. 일희일비하는 대증적 처방으로 그 흐름을 역전시키거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없다. 문화의 성숙은 항상 기본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 기본은 민주주의와 분권, 그리고 재발견된 일상의 가치에 있고, 그와 같은 기본을 성취하는 출발점은 문화라는 큰 강의 시발점이면서 동시에 그 종착지이기도한 ‘지역’에 있다.
송성일 | 2009-08-07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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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를 밝고 활기차게 이끄는 힘은 생동하는 ‘지역문화’에서 나온다. 미래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지역문화가 지역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문화가 사회 구성원의 행동을 결정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의 문화는 우리 사회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로 이끄는 힘의 원천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지역만의 문화가 가진 특수성을 진단해야한다.
 
안동사람을 ‘안동사람’이라 하며, 예천사람을 ‘예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사람의 몸에 베여있는 소속 사회의 지역성, 달리 말해 그 지역 문화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역문화를 진단하고 그 특수성을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경북북부지역의 문화가 가진 특수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서 보는 지역 문화에 대한 평가나 우리지역주민 자신이 느끼는 지역 문화에 대한 평가도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한 행정단위를 넘어서는 지역의 범주를 설정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어려움은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지역 문화의 특성과 내밀한 속성의 괴리를 밝혀내는 일은 더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지역문화는 몇 가지 시정 슬로건들 속에서 피상적이긴 하지만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비의 고장 영주’,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충효의 고장 예천’ 등의 슬로건이 함축하는 지역 문화의 특수성은, 먼저 ‘유교적 전통’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부여이다. 지역사회에서 발행되는 다양한 홍보물은 물론 문예지나 전문연구서들에서도 ‘유교적 전통’을 다루거나, 그 덕목을 표명하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반도 전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유불선의 가르침이 내면화되어 있고, 특히 ‘경세(經世)의 사상인 유학이 현실세계에 가지는 영향력은 단연 우세한 것이 사실이지만, ‘경북 북부지역’은 특히 우리나라 어느 지역사회보다 유별나게 유교적 덕목의 가치가 절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우리 지역사회가 퇴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대 유학자를 배출하고, 오랜 역사와 시대를 이끈 정신적 자산의 생산지로서 그 위상을 유지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선이 붕괴한 이후 서구적 문물이 주도한 현대화와 산업화의 격동에서 상대적으로 비켜서 전통사회의 틀과 가치를 오랫동안 보존해온 덕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북북부지역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유불선 특히 유학을 중심에 놓지 않고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 우리의 지역문화는 오랜 정신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향유하는 데서 기초하고, 지역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트렌드의 문화를 창달하기 위해서도 이 전통적 기반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전통이 갖는 긍정적 힘은 전통적 기반위에 사는 사람들의 지혜로운 혁신의 자세에 의해 현실화된다.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지역사회가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현대화된 삶을 영위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지역문화는 지역성에 대한 건강한 인식에 토대해야 한다. 지역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가치부여는 사회의 근원적 병폐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혈연주의, 지연주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지방주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의 정치를 지배하는 ‘지역주의’는 민주주의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많은 정치가들이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지만, 더 많은 정치가들이 지역주의를 입신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잘못된 무리의식이 초래한 혈연, 학연, 지연중심의 연고주의는, 사회의 합리성을 떨어뜨리고 정의를 실현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학벌, 문벌, 족벌을 넘어 언론 패밀리와 검찰 패밀리를 뜻하는 ‘언벌’, ‘검벌’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기는 현실은, 지역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새롭고 건강한 인식이 주도하는 탈 연고주의적인 문화트렌드만이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지역주의와 집단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해야 한다. 내 것만이 옳고 오래된 것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완고한 태도는, 유교의 폐습과 가치 있는 유교 전통과 혼돈하게 한다. 그 결과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유교적 엄숙주의, 가부장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가 판치는 박제화된 문화를 지역사회에 온존시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로부터 지역을 소외된 정체의 늪에 빠뜨린다.
 
전통은 미래지향적 가치와 만나 새롭게 태어난다. 사장된 전통을 살리는 힘은 혁신에 있으며, 혁신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교조화된 경직성을 벗어던지는 순간,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버려야할 봉건시대의 잔재를 전통적 가치로 지키는 어리석은 짓은 과감히 버려야하고, 정태적인 전통문화의 답습은 하지 말아야한다. 최근에 축제가 전통에 토대하면서도 새로운 창작극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전통을 미래지향적으로 재해석하는 산물이다. 하회별신굿놀이에 나타나는 지배계급, 즉 양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식이, 우리 시대의 지배계급인 재벌과 기성 정치권, 물질주의와 성적 지상주의를 조장하는 종교집단과 사학재단,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보수언론과 권력에 기생하는 검찰 등, 권력을 가진 기관으로 향할 때 그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지난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던 창작 마당극인 ‘굿모닝 허도령’에 대한 인기는 그것을 잘 말해준다.
 
얼마 전 안동의 한 종가에서 이루어진 관례(冠禮)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행사’로만 복원된 관례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정말 소중하다. 관례의 복원은 땅에 떨어진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려는 값진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관례를 참관하면서 ‘낡은 형식에 가치 있는 내용이 얽매여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낡은 형식을 바꾸지 않아 그 내용마저 받아들여지지 않는 꼴인 것이다. 아직도 전통예절교육, 충효교육이니 하는 고정관념을 강요받으며 자라는 청소년이, 전통은 소중한 것이 아니라 고루하고 답답한 것으로 인식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역이 발랄한 현대 문화예술의 부흥을 주도할 때, 우리 지역이 전통문화의 소비지에서 현대문화의 생산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지역사회가 갖는 유구한 역사성이 고리타분한 것으로 간주되고 지역주민들로부터 배타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벗어나, 지역문화가 지역의 역사를 배경으로 발랄한 현대문화로 승화될 수 있도록, 개방되고 참신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고택 복원도 중요하고 전통문화의 수호도 중요하지만, 생동감 있는 현대전위예술 등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 생산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지역사회에 넘쳐날 때, 지난 조선 500년을 문화적으로 주도했듯이 현대에도 지역사회가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정신문화를 선도하며, 세대, 지역을 통합하고 상생하는 문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송성일 | 2009-06-23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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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몰린 '지방'을 살리는 힘의 원천을 '지역문화'에서 찾는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이미 서울 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지방은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고 더 이상 생존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은 불모의 땅이 된지 오래이다. 돈과 사람을 무제한적으로 흡수하는 블랙홀에 다름없는 서울은 그 대척점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지방을 식민통치한다. 그러다 보니 인적 물적 자원은 물론 교육, 행정, 의료, 나아가 문화, 예술 같은 정신적 자원마저 모두 서울로 흡수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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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뉴시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아 관객상을 수상한 ‘워낭소리’가 오는 13일부터 22일까지 강릉시 포남동 자비복지원 소극장에서 앵콜 상영된다.(사잔=강릉씨네마떼끄 제공)/ 박진완기자 jwpark@newsis.com <관련기사 있음>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그것도 부족해 국토의 불균형 발전에서 오는 이익을 독점하는 세력은, 모든 자원의 수도권 집중이 가져오는 폐해를 막고, 전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만든 '수도권규제' 법률마저 무력화하려는 욕심을 드러낸다. 그들의 논리를 따르면, 이미 산업, 교육, 문화의 경쟁력을 상실한 지방은, 그들이 생산한 산업과 문화의 상품을 구매하고, 아직도 흡수되지 않고 남아있는 인적, 물적, 문화적 자원을 공급하며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의 입장에서 지역은 여전히 삶의 터전이다.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강구해서, 계속적으로 유지 발전되어야 할 생활공간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가능성을 찾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산업이 번성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더 많은 산업이 유치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더 모이는 만큼 생활기반 인프라를 비롯한 교육, 행정, 의료 등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야 한다는 그들의 순환논리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지역의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문화'가 아닐까. 어떻게 문화가 고사 직전의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전략적 영역이 될 수 있는가? 먼저 문화는 우열의 차이가 없는 고유한 삶의 양식으로, 기술경쟁에서 비켜선 비경쟁적 가치를 가진 정신적 자산이다. 따라서 '지역문화'는 중앙의 지배-종속관계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삶의 전망'을 제시해주는 역동성의 근저가 될 수 있다. 중앙의 경제적 지배를 넘어설 힘의 원천을 가진 지역 문화는, 경제적 소외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풍요로움과 비례해 지역을 활기 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지표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주관적' 생활 만족도, 행복지수가 높은 지역은 의외로 많다. 미국에 비해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그렇고, 서울에 비해 봉화나 영양 주민의 삶의 만족도가 낮다고만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자기만족이 정체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체성'의 확보는 변화와 발전을 추동할 전제이자,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단지 그 가능성을 열어줄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사실 지역문화는 좁은 의미로 지방의 '문화예술'을 말하기도 하고, 지역의 정신적, 역사적 자산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문화라는 폭넓은 저변은 몇 가지의 행정조치나, 몇몇 문화 동호인이나 예술가의 노력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어떻게 지역 문화를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지역문화를 어떻게 지역을 성장시키기 위한 동력이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그 가능성을 구체화하여 성과를 얻은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역문화를 지방을 일으키는 역동성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먼저 '워낭소리'라는 한편의 독립영화가 보여준 힘을 생각해보자. 사실 '워낭소리'는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가장 흔한 삶의 풍경을 카메라를 통해 현대인의 요구에 맞게 가공한 것일 뿐이다. 워낭소리 신드롬은 현대인이 농촌이 중심인 우리 지역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하나의 사건이다. 물론 농촌이 문화적 원료를 제공하고 도시적 기호에 맞춘 가공을 통해 대박을 터트린 문화상품인 ‘워낭소리’는, 그 수혜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추가 장치가 필요하다.

물질만능주의, 효율만능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우리의 삶을 절망과 불안으로 내모는 현대인의 삶에서, 그 대안적 가치인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정서적 가치, 공동체주의는 현대인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 지역사회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적 삶을 향유케 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지역문화'로서 구현하고 있고, 바로 여기에 지역사회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치가 고갈된 도시문화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지역문화는, 어느 순간 현대를 지배하는 역관계를 전도할 지렛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귀농'이 유행이 되었다. 도시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귀농하게 된 사람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귀농'의 근저에는 살림의 가치. 상생의 가치를 함유한 농촌문화, 공동체 문화 즉, 지역문화에 대한 도시민의 갈구가 있다. 이렇게 '이농'에서 '귀농'으로 시대적 흐름을 바꾼 힘은 바로 지역문화에서 나온다. 자연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갈구하는 현대인에게, 우리가 가진 지역문화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얼마든지 있다. '안동간고등어'나 '안동버버리찰떡' '닭실한과' 등은 누가 뭐래도 문화상품이다. '안동간고등어'는 안동이 아니면 전국 어디에서도 생산할 수 없는 안동만의 고유한 문화상품이다. 흔해 빠진 고등어가 안동의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세례를 받는 순간 값진 '안동간고등어'가 되는 것은 고등어의 힘이 아니라 안동이 가진 문화의 힘이다. 봉화 닭실마을에서 만들어지는 '닭실한과'는, 봉화 닭실마을 아주머니들의 손맛이 만든 명품한과지만, 그 맛 역시 닭실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에서 유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현재 봉화군에서는 '전국스토리텔링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지역의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토대로, 콘텐츠 제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지역의 고유한 역사, 문화, 자연자원을 발굴하며, 지역의 새로운 성장력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번 시도는, 서울을 떠난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을 유치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 지자체의 이런 노력이 바로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문화를 문화의 산업경쟁력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근시안은 피해야하지만, 이는 '문화적이지 못한' 문화산업적인 사고에만 한정된 문제이다. 지역을 살리는 힘은 지역사회에 없는 것을 유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유치하고, 공장을 유치하고, 관공서나 공기업을 유치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애써 찾을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주목해 보자. 지역주민의 삶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경제의 활력을 가져다줄 보고가 바로 우리가 가진 '지역문화'라고 생각한다.

 2009-05-12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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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현암사)


<1993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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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씨
40여년간 우직하게 농사짓고 나무를 키워 온 전우익 할아버지는 "진짜 잘 사는 것은 어떤 거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 직접 만든 작은 책상이나 박 전등갓에서 고집쟁이 농사꾼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느껴진다.

 

 전우익

 1925년 ~ 200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봉화 출생

[책읽는 경향]경북에서-혼자만 잘 살믄…

경향신문 | 2008-04-07 22:55:06

10년 전, 청년기 내내 살았다고 자부하던 가치지향적 삶이 공허해진 순간, 나는 서울을 떠나 봉화의 비나리 마을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가혹한 농업노동 속에 내 삶을 던졌다. 끝없는 호미질과 단순 반복되는 고추 수확 작업…. 그때 어떤 지인은 내 바뀐 삶을 보고 자학이라 했다. 스스로도 그런 삶의 변화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년을 견디던 중 어느날 허리 굽은 낯선 노인 한 분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혹시 송선생 아니시껴? 지가 전우익일시더.” 그렇게 전우익 선생님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라는 내 삶의 새로운 지침을 들고 나의 무너진 삶 속에 걸어 들어오셨다. 사실, 필자를 뵙기 훨씬 전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잊었다. 그렇게 던져 버린 책이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순간,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충동적 결정에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주었음은 물론 내 삶의 새로운 지향점을 일깨워 주었다.

경쟁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소수의 승리자를 위해 절대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해내는 세상, 물질적 부가 끊임없이 증대하지만 가난은 제도화되고 보편화되어 모두가 불안에 허덕이는 세상, ‘나 혼자만’ 잘 살면 되는 세상에서 이 책은 나에게 작고, 단순하고, 낮은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자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은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고, 가난하려야 가난할 수 없는 삶이라고 깨우쳐 주고 있으니, 누가 한 권의 책이 한 인간의 삶을 이끌어 주기에 부족하다 하는가?

〈송성일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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