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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항구도시입니다.
그 항구를 따라 형성된 길과 시장에 갯내음 물씬 풍기는 오후,
여러 매체를 통해 너무나 친숙하게 된 통영의 새 명소 동피랑을 찾았습니다.
동피랑이 동쪽에 있는 벼랑을 뜻한다고 하는
서피랑과 작을 이룬 산동네입니다.
산동네가 다 그렇듯 동피랑은 가난하고 낙후된 동네,
그래서 개발의 파고가 언제라도 덮칠 수 있는
지킬 것도 없고 지킬 힘도 없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거센 개발의 파고를 막아내기 위해 지역 예술인들이
힘없는 붓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붓으로 포크레인을 막아낸
아름다운 마을로 거듭났습니다.
지금은 통영의 새 명소로 많은 관광갱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개발의 파고를 예술의 힘으로 이겨낸 드문 사례의 하나로
많은 예술인과 문화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있습니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 차를 세워두고,
충무김밥집이 밀집해 있는 중앙시장을 끼고 5분 정도를 걸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통영항이고, 왼쪽으로는 통영중앙시장인 해안도로인 이 길은
굳이 동피랑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걸을만한 볼거리가 있고,
풍성한 삶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전통시장의 느낌을 주는 거리입니다.

중앙시장의 끄트머리에 어시장이 있습니다.
펄펄 살아 뛰는 생선과 싱싱한 조개류 등 해물을 팔고 있는 어시장 바로 뒤가
동피랑입니다, 먼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생의 활력을
거저 얻을 수 있는 통영 어시장을 둘러보고
동피랑 보고오는 돌아오는 길에 
통영 횟거리 사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해양도시인 고향 진해도 시싱한 횟거리를 파는 어시장이
있는데 보기에 반해서 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웃지 못할

그리 크지 않은 어시장을 10여분 둘러보고 바로 동피랑을 올랐습니다.
진입도로가 잘 구분이 안될 것 같았는데
바로 어시장 뒤편 언덕위에 벽화가 그려진 산동네가 눈에 들어오니
어렵사리 진입로를 찾을 수 이었습니다.
골골골목 누빈 흔적을 이렇게 올려봅니다.
설 연휴가 시작하는 첫날,
분비는 어시장과는 달리 동피랑 좁은 골목이
결코 좁아보이지 않을 만치 한산했습니다.
날씨마저 흐리고, 바람마저 일어
산동네 골목골목을 순례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도 벽화가 그려진 좁을 골목을 누비며 '작품' 하나하나를 보다 잘 보기위해
최적의 관람 지점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 하다보니,
골목의 훈기가 느껴지고 언 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걷기의 힘인지 예술의 힘인지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시작한 벽화순례는
이내 즐겁고 신나는 '소풍'으로 바뀌었습니다.
갈라진 벽을 따라 나뭇가지가 그려지고
멀뚱멀뚱 큰고기 눈깔은 멀리 통영항을 넘어 남해
난바다를 바라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을 드러다보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아기자기 하고 이쁜 벽화가 동네 가득 넘쳐났는데,
저 벽으로 둘러쌓인 집안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까,
아니면 벽화가 그려짐에 따라 삶의 느낌이 조금이라도 변하게 되었을까?"

사실 공공미술은 어려운 분야라고 합니다.
대중과 예술가의 접점에 공공작품이 놓여있지만
대중이 이를 거부하거나, 예술가가 대중의 정서를 외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설치한 공공미술작품이 대중의 반발로 철거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하지만 벽화마을 동피랑은 드물게(?)
성공적인 공공미술의 현장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사람도 넘치고 글도 넘치고, 조형물과 이미지마저 흔해 빠진,
 풍요를 넘어 존재의 낭비까지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돈만 있으면 되는' 엉터리 공공미술도 넘쳐납니다.
안하니만 못한 벽화를 자주 목격하게 되고,
괴기스럽다 못해 시각적 폭력을 행사하는 조형물들 역시 
도심의 거리 곳곳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벽화마을 동피랑은
동피랑의 존재 방식에 가장 적합한 양식의 공공미술로 벽화를 선택했고,
작품 하나하나 마저 심사를 통해 동피랑의 역사와 현실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들로 마을을 꾸몄다고 합니다.
다 그런 안목과 식견을 가지신 분들에 의해 오늘의 동피랑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겁니다.

사람사는 세상의 훈훈한 인정을 가슴에 가득담고 동피랑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시장을 들러 횟거리를 사고,
이어서 환상적인 대장간 순례까지...
동피랑 갔다 온 그날 하루는 참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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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늦게 까지 숙소에서 놀다가 11시가 넘어 길을 나섰습니다.
오늘의 목적지인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들러기전에
먼저 해금강을 가기위해 '바람의 언덕'이 있는 도장포로 향했습니다.
연휴가 시작되고 바람마저 불어 해금강 유람선이 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배는 연휴 뒤에나 운항을 한다고 했습니다.
몇년전 지금처럼 유명세를 타기전에 [바람의 언덕]을 들런적이 있는데
그때 역시도 명절연휴때라 유람선을 타지 못했는데
해금강 유람선은 저하고 인연이 없나봅니다.
어쩔수 없이 눌러쓴 모자마저 날릴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름 그대로의 '바람의 언덕'을 올라 보고 급히 내려와
바로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거제도는 바닷가만 보아왔지 한번도 재대로 내륙을 가로질러 본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처음으로 거제의 중심을 가로질러 구거제대교를 통해 거제를 벗어났습니다.
 
이날 통영의 첫 목적지는 중앙동 충무김밥 거리입니다.
고속도로 휴계소 등에서 자주 먹어봐서 잘 알고 있는 [충무김밥]이지만
이전에 충무를 들러서도 결코 본토의 원조 충무김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큰 마음먹고 아예 주요 목적지 중의 하나로 [충무김밥골목]을 정하고
사전에 [다음지도]에서 지도까지 출력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충무김밥집은 통영 여객선터미날에서
동피랑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주변 건물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초라하다못해 조금은 구질구질한 외관에 실내 역시 좁고 어수선했습니다.
그래도 원조충무김밥을 찾는 사람이 많고 가게들이 성업중인것은
갯마을 선술집같은 작고 초라하지만 갯사람의 깊은 정감이 물씬 풍겨져 오는
바로 그 정취때문일 겁니다.

길가에 하고 많은 충무김밥집 중에 우리가 들어서 식당은 [일번지 할매충무김밥].
역시 작고 초라하고 못해, 손님용 테이블 한개, 그리고 방바닥 테이블 한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  김밥을 사서 들고 나가시는 손님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잘오셨다면서 자리를 권했습니다.
이웃 단골이시라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보다 앞서
가게 선전에 열릉 올립니다.

벽 한쪽 전면을 장식하다싶이한 메모지를 가리키며
이 식당에 들런 손님들이 남긴 감사 메모라며
우리도 나갈 때 메모 한장 남기라고 권하십니다.
따로 주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김밥을 말기 시작한 주인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어대었습니다.

1인분에 4000원해서 4명 1600원 짜리 밥상이지만
해물된장국 한 냄비가 떡하니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바지락이랑, 홍합을 듬뿍 넣어 시원한 해물 된장국을
떠먹어가며, 통영 본거지에서 먹는 충무김밥은
전날 옥포에서 먹은 4만원짜리 아구찜보다 차라리 나았습니다.
성씨가 고씨인 주인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원래 충무김밥은 연안 고기잡이를 떠나는 뱃사람들이
점심 도시락으로 싸가지고 가던 음식이랍니다.
바쁜 와중에 주변에 흔한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무우김치와 삶은오징어무침, 그리고 
따로 속을 넣지 않은 김밥은 물때를 맞춰야하는
바쁜 뱃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점심 도시락이 되었는가 봅니다.
참,  삶은 오징어 무침에는 어묵이 꼭 들어가야지만
원조 충무김밥이 된답니다.

배불리 먹고 [일번지 할매 충무김밥]집을 나서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피랑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동피랑 언덕 골목골목을 돌고 내려오니
언덕아래 이어지는 골목에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싱싱한 횟거리며 갖가지 해물을 담은 다라이를
끊임없이 호스를 통해 공급되는 바닷물이 질퍽하게 흐르는 
노상 좌판에 펼쳐놓고 설대목기댕 들떠있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호객외침이
펄떡이는 생선만치나 힘차게 어시장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졌습니다.
어디가 더 좋고 싸고 할 것도 없이 아무데서나 사려고 하는데
옆좌판의 눈치가 보여 이것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회거리를 3만원어치를 사니
무직하니 양도 많고, 뼈까지 매운탕용으로 얻어담은 비닐 봉투를 드니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통영에서 진해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 걸리지만,
혹시라도 명절 귀향차량으로 길이라도 막히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싱싱한 횟거리를 싣고 길에서 몇시간씩 지체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노심초사 신나는 걸음으로 차로 달려갔습니다.


바쁜 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습니다.
중앙동 어시장을 나오자 마자 얼마지나지 않아
옛날 40여년전 저가 초등학교 다니기 시작할 무렵 학교가는 길에
보았던 그런 대장간이 이곳 통영거리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진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등교길 한 모퉁이를 지날때마다
시뻘건 불과 연신 내려치는 망치 소리가 무섭게 다가왔던
조그마한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억은 희미해 졌고,
그 뒤 고향 진해에서 대장간이라는 것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지만 
기억과 상상이 만들어낸 마음속의 대장간은 항상
망치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장간을 생각지도 않은 통영 거리에서 만나다니
여간 감격스럽지 않았습니다.

손에든 횟거리때문에 빨리 진해로 가야된다는 생각을 잊고
바쁜 대장간 아저씨의 손놀림을 따라 나의 두눈은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설프나마 카메라로 그 풍경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있다가
필요도 없는 호미를 한개 사게 되었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들고 보나마나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을 것 같은
대장간 아저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층무공작소라는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는 농사용이 아닙니다. 
간판에는 분명 '농기구'라고 쓰여있지만
밭이 아니라 갯벌에 조개를 캐는 용으로 보였습니다.
뭐 어민들에게 농사는 바다농사 갯벌농사니깐 
'농기구'라는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즐거운 하루는 저물고 귀행길은 귀성차량으로 막혔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고향집에 도착했습니다.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여행모드에서 설날모드로
분위기가 바뀌고 저의 처신도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또 한해의 설날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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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해가 고향인 사람이 어쩌다 경북 최북단 봉화에 살게 되다보니
사실 바다가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1시간 30분 거리에 동해바다가 기다리고 있지만
동해의 밋밋한 수평선은 남해의 멋에 중독된 사람에게
그다지 충분한 만족을 주질 못합니다.
원래 자기 고향 것이 최고라고 믿는 합리적이지 못한 욕구겠지만 말입니다.

일년에 최소한 2번, 추석과 설날이면 고향 진해를 다녀옵니다.
그리고 고향길에 꼭 바다를 들르게 됩니다.
올해는 거제시에서 운영하는 '거제자연휴양림'에 미리 방을 예약했습니다.

2월 11일.
설날을 3일 앞두고 귀성길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미리 집을 나섰습니다.
아침 7시 출발 예정이었지만 6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한시간만에 3~4cm나 쌓이는 바람에 출발을 망설이다가
1시간이나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눈이 잦아들것 같지않아 더 지체하다간 완전히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체인을 감고 출발했습니다.
계속되는 눈발속을 거북이 걸음으로 달리는 차장 밖은
완전히 설국으로 변해버렸고,
국도는 거의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산했습니다.
평소 1시간도 안걸리는 안동까지 2시간이나 걸려 도착했지만
안동이 가까워 오면서 길가 여기저기 접촉사고 차량이 늘부러져 있고,
언덕길을 오르지 못해 미끄러지는 차량을 여러대 목격해야했습니다.
안동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체인을 풀고,
녹기 시작해 질척거리는 고속도로를 접어 들었습니다.
거의 군위휴계소 근처까지 오자 고속도로의 눈이 녹아
주행에 어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진해 고향집에 도착한 것이 거의 12시, 바로 동생을 싣고 진해 속청항으로 달려가
거제 실전항 사이를 오가는 1시 30분 발 삼보11호를 탈 수 있었습니다.
명절 직전이라서 그런지 의외로 한산한  배에 올라
눈길 운전으로 쌓인 피곤을 풀고 한껏 바다 향취에 취할 수 있었습니다.




진해 속천항을 떠난 배는 오랜 기억속의 흔적을 따라 흔들리며 1시간만에 거제 실전항에 도착했습니다. 지나온 바다는 내해임에도 불구하고 너울이 일어 배가 흔들리고, 찌푸린 날씨에 간간히 가는 눈발마저 날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화속 모험을 떠나는 소년처럼 마냥  가슴두근거리며 내내 갑판과 선실을 오가며 바다와 하늘, 그리고 스쳐가는 섬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실전항은 거제의 북단에 가깝고 숙박지인 자연휴양림은 거제의 남단이다보니 점심은 가는 길 중간쯤인 옥포에서 해결했습니다. 배는 고프고 마땅한 식당은 없고 거리를 잠시 헤메다 들어선 식당에서 아구찜으로 즐겁지 않은 식사를 하고, 다시 차를 달려  구조라를 거쳐 학동몽돌 해수욕장에서 내륙으로 우회전한뒤 얼마지나지 않아 산속의 자연휴양림에 도착했습니다.
 

자연휴양림은 당연히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해안가에서 차로 5분이상 떨어진 첩첩산중의 참나무 숲속에 자리한 숙소였습니다.
10인실, 15평짜리 목조주택으로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지낼만한  공간이었는데
7만원이라는 비교적 싼가격이었습니다.

애초에는 낚시를 할 계획이었지만 여전히 날리는 싸락눈에 바람까지 불어 취소하고 다뜻한 방안에서 모처럼 TV도 보고, 주변 등산로도 걸으면서 쉴 수 있었습니다.
해가지고, 저녁을 먹고나니 완전히 암흑천지에 고립무원, 이웃의 숙소에는 불빛 하나없고 휴양림전체는 우리 밖에 없는듯 고요했습니다. 마땅히 나갈 곳도 없고 해서 미리 이부자리를 깔고 거제 지도를 펼쳐  다음날의 쾌적한 날씨를  기원하며 이런 저런 계획들로 일정을 짜는 것으로 저녁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다음날은 동피랑을 둘러보고 그리고 충무김밥을 꼭 먹어본다는 두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길고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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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비나리마을 몇몇 주민과 함께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은 비나리마을에 [자활농장]을 만들기 위한 예비 모임이었습니다.
봉화군 자활후견기관의 김휘연 관장님과,
비나리마을에서 자활농장사업에 참여를 희망하는 3가구,
그리고 저가 한자리에 모여
'자활농장'이란 어떤 사업이고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듣고 의견도 나누었습니다.

'자활농장'은 경제적 곤경에 처해 스스로의 힘만으로 헤어나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
정부의 최소 지원을 기반으로 한정된 기간동안 공동으로 농장을 운영함으로써
의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활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사업입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한 것은 없지만 우선 3가구가 참여키로 하고
면사무소에 각각 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확인 신청을 해 놓았습니다.
자활농장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있는 수급자가 1가구이상 참여해야하고,
기본적으로 차상위계층만 공동으로 참여가 가능하답니다.
비록 월 70만원 정도로 3년을 한정해서 지원하는 것이지만
어려운 농촌 형편에 우선 공경을 벗어나는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급한 위기를 넘기는 데에 도움이 될뿐아니라
 자활농장을 기반으로 해서 자활공동체로 나아가
참가자중 일부라도 자활의 기반을 가꿀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쁘고 의미있는 일일것입니다.
빠르면 3월 중으로 시작하게 될 비나리자활농장은 
곧 착공하게 될 마을방문자센타와 귀농레지던스와 결합해
비나리권역 주민이 공동노동의 경험을 축척하고  
풍요롭고 인심좋은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작년에 봉화자활후견기관에 의해
명호에 밭두렁 공부방사업이 착수되어 이제 안착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자활후견기관은 소규모 노인요양시설을
명호 지역에 설치하려고 토지를 알아보는 등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이 모든 사업을 통해 우리 지역사회가
모범적인 복지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우리 주민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3월이되면 자활농장 소식을 수시로 올릴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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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또 한해를 시작했다.

도대체 2010 한 해는 또 어떤 해일까?

지난한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자본권력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용산참사로 시작한 2009년에는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큰 별-김대중 대통령이 영면하고, 등락을 거듭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오직 그 힘으로 대통령에 오른 '국민의 영원한 대통령' 노무현대통령께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다. 그리고 인기 연예인이의 자살 같은 대중적 관심을 일으킨 일들도 많았지만,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난 음지에서 고통 속에 죽어가거나 죽음보다 못한 삶은 이어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실업률은 높아만 가고, 취업자의 근무조건이나 임금수준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언론은 연일 2008년에 시작한 세계경제위기를 MB정권의 노력덕분에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며 떠들어대고 있지만 일반 국민의 삶의 질은 끝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먹고 사는 데 연연해야 되는 대부분 국민들에게 전통 박통시대를 방불케 하는 정치사찰과 반대자에 대한 탄압, 국정원 같은 공공기관의 정치공작과 언론탄압, 노조를 위시한 자본의 잠재적 걸림돌에 대한 대대적인 공작과 탄압은 먼 나라의 일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골목 가계를 중심으로 중소상인이 몰락해 가고, 비정규직이 보편화되어 알바인생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이전 정부에서 기초를 닦았던 복지서비스는 대폭적으로 축소되거나 정치적 생색내기용으로 전략했다.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 닿고 하루가 다르게 열악해져 가는 삶의 조건은 대부분 국민들이 외면하거나 피해갈 수 없었다. 구체적인 개인의 삶의 안정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었는가는 바로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대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조중동이 '한국은 모범적인 위기 극복 사례'다면 떠벌리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그것이 바로 GDP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지표다. 한국경제는 분명히 지표상으로는 최악의 위기상황을 돌파했다. MB가 호언하는 보랏빛 미래는 불가능할지 모르나 많은 불안요소를 내포하고 있을지언정 우선의 경제지표는 나름대로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10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은 출발한다. 일반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은 날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최소한의 안정성마저 소멸해 가는데 어째서 경제지표는 항상 보랏빛인가? GDP는 회복세라는데 국민 개개인의 소득은 줄어들고, 실업도 갈수록 늘어나는 이 역설의 근저를 헤집고, 경제 지표가 아니라 국민의 구체적 삶의 조건이 기본이 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제출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이 책을 저술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방향에 대해 연구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꾸준히 진보적 아젠다를 우리 사회에 제출하여 공론화해 오고 있다. [한국사회의 진실]은 바로 그와 같은 작업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먼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의 최고 원리는 자본의 유연성이다. 이윤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곳도, 어떤 방식으로든 쓸고 다닐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전 세계적으로 고용의 안정성, 삶의 안정성을 무력화시켜 왔다. 그렇게 초래된 것이 지난 경제위기이고, 이에 대한 자본 측 처방이 일정한 금융자유 규제 등 ‘금융안정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하지만 자본의 유연성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이를 고용의 안정성, 삶의 안정성으로 대체하지 않고는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를 위시한 기득권은 현 위기를 신자유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로 보지 않고, 작금의 위기를 모면하고 나면 바로 위기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양 착각하고 있다. 시장을 만능으로 보았던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시장의 균열이 이번 위기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MB정권의 경제 정책은 규제완화, 노동유연성 강화 등 세계적 조류와 역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MB정권이 근본적인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폐기와 새로운 경제질서의 수립으로 나갈 것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기본적인 자본 규제조차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더 큰 새로운 위기를 불러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물론 이 모든 것이 MB정권의 탓이라기보다는 사실 한국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박통의 유산인 성장제일주의, 경제중심주의이다. 그와 같은 국민의 사고, 가치지향이 747이라는 황당한 공약을 내건 도덕적 파산자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국가의 총량적 경제성장이 곧 자신의 개인적 삶을 직접적으로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분배원리와 사회정의를 외면한 덕분에 그와 같은 정권이 탄생하고, 반 서민적 정책이 버젓이 펼쳐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의 개인적 삶의 안정성이 확립되지 않은 속에서, 아니 그 안정성을 파괴한 대가로 가져온 성장은 결국 현격한 빈부격차를 초래하고, 빈부격차가 야기하는 사회균열은 결국 경제조차 발목을 잡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해온 때문이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교육에서부터 가계부채 문제까지, 남북 문제에서 올 6월로 다가온 지방 선거까지 국민이 현실감 있게 느끼는 문제의식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심한 사회 양극화 문제, 고용 없는 성장, 서민 삶의 불안정성, 무한경쟁의 늪에 빠진 교육, 꼬이고 있는 남북관계, 토목위주의 사회간접투자의 비효율성 등등.

하지만 결국은 고용을 통한 성장전략이 이 책이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대안적 정책이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 성장을 통한 고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세우고 성장을 위해서 우선의 고용까지도 희생하면 언젠가는 고용이 회복될 것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 고용없는 성장을 초래한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근간이었다면 이 책은 먼저 고용을 통해 소비를 진작시키고, 그와 같은 고용과 소비가 경제 성장을 가져오는 선순환을 제시한다. 그를 통해 서민적 삶의 안정성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진보를 향한 출발임을 역설하고있다.

 

많은 공감과 깨달음은 준 이 책을 읽으며 ‘2010지방선거에 임하는 한국 진보세력의 연대 전략에 대해선 일말의 아쉬움을 느꼈다. 필자는 최소강령 최대연합인 민주대연합론과 최대강령 최소연합인 진보대연합론을 대비하면서 양대진보세력간의 연대를 통해 중도개혁세력(민주, 국민참여당 등)과의 연대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 진보세력이 독자적 세력으로 선거에 임하지 못하고 중도개혁세력과 연대할 경우 진보적 이슈가 희석되고 진보세력이 형해화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난 시절의 한국 정치 역정을 보거나 최소한 참여정부시절 보아왔듯, '보수의 나라'에서 중도 개혁 세력의 몰락은 곧 진보세력의 동반 몰락을 자초했다는 사실, 반대로 중도개혁 세력의 득세는 곧 한국정치에서 진보 지평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바로 현단계 MB정권의 성격과 개혁진보세력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통찰 위에서 보다 대승적 연대의 틀을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튼 현시점의 우리 사회를 되짚고 미래를 전망해보게 한 [한국사회의 진실]은 깨달음의 기쁨을 주는 보기 드문 한국사회에 대한 처방이다.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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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나면 '이놈에 농사 다시는 안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긴 겨울 휴식을 보내고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다가오면 너도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시작하는게 농사입니다. 농사가 업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지만 농사가 가지는 묘한 중독성도 무시 못할 이유인 것 같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는 것의 의미는 경제 활동으로만 이해한 투자라는 개념과 조금은 다릅니다.
농부가 뿌리는 고추씨는 수확후 판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투자와는 다른, 안될 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성 같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항상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숙명처럼 돈 안되는 농사를 지어야되는 이웃 어르신의 삶이 솔직히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저 자신이 농사가 업이고 그래서 똑같이 가을이면 '이놈에 농사 때려치운다'고 떠들고 다니다가 이렇게 입춘이 지나고 집앞 개울에 얼음이 녹아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추 종자를 뭘로 할지, 농사 일정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스스로 선택한 삶에 대한 괜한 집착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농사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농사를 통한 비젼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질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농촌공동체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폐해를 줄이거나 치유해줄 새로운 대안공동체로 받아들이고 귀농켐페인을 사회운동차원에서 수행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생명을 다루는 농업이 가진 특성에  몰입해 자연파괴적이고 반생명적인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획으로 농업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연 농업을 넘어 도시농업으로 까지 농업의 영역을 확대하기도 하고, 농업의 산업 경쟁력보다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자연적 사회적 순기능에 촛점을 맞춰 농업을 이해합니다. 

생태주의자를 넘어 농업근분주의자에 가까운 분들의 많은 주장이 충분이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지만 평균적인 욕망을 가진 저같은 보통사람이 실천을 하기에는 어려운, 그래서 그런 분들을 존경을 하되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냥 농사 짓는 일이 다른 직업에 비해 속박이 적고 자유스러울 뿐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라서 선택한 것뿐입니다. 
사실 농업에 대한 수많은 가치부여는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하기도 하고 현대에 들어서는 '농업의 발전 정도는 선진국이 되는 척도'라는 등의 농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참 좋은 말들이 많습니다. 누구는 정치적 수사로 그런 좋은 말들을 들먹였지만, 또 어떤 분들은 진정으로 건실한 농업이 번성하고 농민이 대접받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아 그럴 말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말들이 농업을 경시하는 세력이나 최소한 도시민을 향해 주장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경제적 문화적 소외로 고통받는 농민에 대한 위무용 립서비스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농민 스스로 그런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지 비소할 따름입니다. 

생명을 다루는 농업, 자연과 환경에 순응하는 농업, 인간의 보다 고양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제공하는 농업, 인간을 지속가능한 삶으로 인도하는  농업... 사실 농업은 이 모든 위대한 가치를 포괄하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농업에 종사하는 저 자신의 삶에 대해 뿌듯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런 이데올로기만으로 농민을 농업에 묶어두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나는 농민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회적 보상체계가 만들어 지고,가업으로 자식에게 농업을 물려줄 수 있는 사회적 풍토가 마련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농민의 삶이 그런 가치있는 삶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2010년 봄, 14해째 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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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저, 사계절출판사)을 읽고

동화는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들려주는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동화는 어른들의 꿈, 어른들의 가치, 어른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다. 그렇다고 동화가 어른들의 세계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화의 스토리는 항상 아이들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아이들이거나 아니면 아이들의 분신인 동물들이다.  그러면 동화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빌어 아이에게 들려주는 싶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답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부정적 대답 뒤의 수습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무척 머뭇거리게 된다. 최소한 동화를 만드는 사람은 어른이지만, 동화를 만드는 과정은 어른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상에 어른이 참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쉽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동화는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어른들의 세상을 단순화해서 꾸겨 담은 당의정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으로 재생상된 아이들의 꿈, 아이들의 가치, 아이들의 세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동화는 기본적으로 환타지여야 할 것 같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스스로 '잎싹'이라 이름 붙인 암탉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잎싹은 양계장에서 산란계로 살고 있는 '평범한' 암탉이다. 하지만 평범한 산란계가 꿈을 가지자 비상한 '잎싹'이 된다. 양계장의 좁아터진 공간을 벗어나 햇볕을 받는 넓은 마당을 마음껏 뛰어 노는 꿈, 알을 낳자마자 주인이 거두어 가버리는 산란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알을 스스로 품어 보고 싶은 '불순한' 꿈을 가지자마자 잎싹의 가짜 '행복'은 끝나고 고난의 여정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 생명이 주는 희열을 만끽한다.

이 책을 읽자마자 어른들의 세계, 내가 속해 있고 살아가는 세상, 생존에 발버둥치며 보다 많은 부와 권력을 갈구하는 개인들로 가득 찬 세상이 떠올랐다. 잎싹이 사는 닭의 세상은 정확히 3가지 삶의 부류로 구분된다. 노예로 살아가는 산란계와 마당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닭들, 그리고 노예의 삶과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마당의 삶도 거부하고 자유의 꿈을 쫓아 위험 천만한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잎싹의 삶이 그것이다.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반역을 꿈꾸는 혁명가가 있다면 잎싹은 금기된 것을 쫓아 고난의 길을 떠난 혁명가에 정확히 일치한다. 반성하지 않는, 반성하지 못하는 불임의 세상에 중독된 혹은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삶은 양계장의 산란계가 아니면 출세한 마당닭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잎싹의 불순한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을 이루는 도정에는 잎싹의 목숨을 쉬지 않고 노리는 족제비의 번들거리는 두 눈이 따라다닌다. 잎싹과 같이하거나 최소한 도와주어야 할 동료집단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혹독한 야생의 조건에서 생명을 부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잎싹은 또 다른 외토리 나그네 천둥오리를 만나 삶을 얻고, 알을 품는 꿈을 이룬다. 비록 스스로 낳은 알은 아니지만 입양자식을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듯, 잎싹은 천둥오리가 남겨준 알을 품고 생명 창조의 희열을 만끽한다. 하지만 꿈을 이룬 잎싹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족제비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외톨이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가슴으로 낳은 자식-'초록머리'조차 자신의 무리를 쫓고, 잎싹의 품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게 잎싹의 삶은 이어지지만 잎싹은 한번도 꿈의 허망함이나, 삶의 무의미에 빠지지 않는다. 비록 수만년전 잃어버린 비상의 꿈은 엄두도 낼 수 없고, 가슴으로 낳은 초록머리의 비상을 통해 대리 실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도 가고 싶다! 저들을 따라서 날아가고 싶다.'

마침내 초록머리가 천둥오리의 무리를 따라 이국만리 먼 길을 떠나게 되고, 자신의 육신은 족제비의 먹이가 되기 직전 잎싹은 잃어버린 닭 종족의 영원한 꿈, 비상의 꿈이 자신의 가슴 깊이 자라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비상의 꿈은 족제비의 날카로운 이빨로 목이 꺽인 뒤에 빈사상태의 잎싹의 눈에 환영으로만 이루어진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독자의 기대에 쉽게 타협해 해피앤딩으로 맺지 않았지만 결코 비극도 아니다. 차라리 다양한 꿈과 현실의 운동이 부딪히면서 빗어내는 복잡하고 현란한 교향곡 같은 세상살이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생뚱 맞은 의문은 남는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작품일까, 아이들의 부모가 좋아하는 작품일까?    이 의문에 답하는 과정은 긴 공부와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곧 MK픽처스 오성윤 감독의 손에 의해 애니메이션으로 출시된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에 거는 기대를 안고 다시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은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다. 세상과의 대비가 초래한 환타지의 부족이라고 하긴 나의 안목이 부족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 아쉬움이 애니메이션 작품을 통해 깨끗이 날아가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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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했다해도, 설날의 정취가 옛날 같지가 않다고해도
비나리마을  떡방앗간은 옛날 못지않은 분주함과 넉넉함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설날이 이삼일 앞으로 다가오면 명호면 골짜기 골짜기마다 
대여섯가구씩 모여사는 산산오지마을 할머님께서 
바리바리 떡쌀을 지고 들고 [명호 떡 방앗간]으로 모여듭니다.
이골짜기 저골짜기 할머니께서 모여드는 그만치
명호 방앗간에는 이 마을 저 마을 기쁜 소식, 슬픈 소식,
이런 사연 저런 사연들이 쌓여갑니다.

[명호떡방앗간]은 몇년전 비나리마을의 새 주민이 된 
나무네가 꾸리는 방앗간입니다. 
명호면 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방앗간을 운영하시던 전 주인내외께서
오랜전통을 이어오던 방앗간을 나무네한테 물려주게 된 것입니다.
나무네는 방앗간의 이름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추가했지만,
명호떡방앗간의 떡맛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옛주인 내외께서 고객부터 기지떡 만드는 비법까지
어느 전통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전수해 주셨기 때무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명호떡방앗간]은
젊은 새주인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명호사람은 그냥 [아름다운방앗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방앗간]은 그렇게 아름다운 인연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방앗간이 '아름다운'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아름다운 방앗간]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모여듭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름다운 마을공동체를 풍성하게 이루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방앗간]에 설대목이 시작되면
명호면 젊은 친구들이 하나둘 [아름다운 방앗간]으로 모여듭니다.
역계골 멋쟁이 총각이 할머니들의 주문사항을 체크하고, 
꾸구리 이장인  어진이 아빠가 떡가루를 반죽합니다.
나무엄마 아빠가 이리뛰고 저리뛰고 다된 떡을 포장하고 떡값을 받는 사이
이웃 고계리 청량산장 주인이신 예연이 아빠가 가래떡을 뽑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방앗간]은 아름다운 이웃이 모여
설날 대목을 함께 치룹니다.
어느 한 사람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나무네 대목 큰일을 함께 치루기위해
나무네 [아름다운방앗간]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세상인심이 변하고 두레의 전통이 사라져가는 농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방앗간]은 이웃간의 풍성한 정으로
산골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인심을 이어나갑니다.

떡을 기다리며 방앗간 사랑방에 옹기종기 모여않은 할머니들은
손자손녀들 보고싶은 마음을  한 보따리 풀어놓으시고
아들자랑 딸자랑에 하루해가 저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방앗간은
이렇게 아름다운 이웃이 함께 만들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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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에도 일년에 두 세 번은 사람이 붐빌 때가 있습니다.

청량산과 낙동강을 끼고 있고, 낙동강과 나란히 마을 앞을 지나는 35번 국도를 따라 안동 유교문화권이 이어지는 위치한 비나리마을은 여름 휴가철 한 달만은 외지인의 발길이 넘쳐 납니다.


그리고 두 번의 명절, 추석과 설날이 되면 어린 시절을 마을에서 보내고 철들자 고향을 떠나 서울로 대구로 부산으로 일자리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출향민들의 귀향발길이 넘쳐납니다. 일년 내내 아이들 울음소리도, 어른들 웃음소리도 드문 마을에 명절 한 때 나마 왁작지걸, 사람 사는 소리와 온기로 넘쳐납니다. 마을 길 여기저기에 승용차들이 서있고, 이웃 할머니의 좁은 마당가에도 반짝이는 승용차가 그 집의 자식들 수 만치 들어서 있습니다. 아이들은 한 세대전 자신의 부모가 그랬듯 온 마을을 구석구석 쓸고 다니며 고함을 치고, 싸우고, 웃고 그리고 여기저기 저지레를 해 놓습니다.

설날을 기다리는 산골마을 주민들은 풍요로웠던 지난 시절이 되살아나는 그런 신명 넘치는 꿈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산골 마을 비나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바람이 지나가듯 이삼일 그냥 스쳐 지나갈 명절이지만 그날이나마 옛날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으십니다.  집집마다 아홉이나 열씩 자식을 두고 앞마당에 강아지 두어마리와 외양간에 소한마리 그리고 뒷마당에 풀어놓은 닭까지 대여섯마리가 모두 한식구로 살았던 옛날이 그리우신 것입니다. 


<이웃 갈골의 민순기 어르신 부부>같이 늙어가는 산골 할머니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옛날을 추억하고 새날을 꿈꾸시는 명절을 코앞에 둔 비나리마을 할머님들은 세상 누구보다 바빠집니다. 설을 쇠고 돌아가는 자식들 차 드렁크에 누렁호박 두어 덩이와 깨끗이 골라 곱게 빻은 고추가루 한 보따리, 그리고 참깨와 콩은 물론 지난 가을 손수 산과 들을 헤매며 캐서 말린 산나물 한 꾸러미까지 차곡차곡 채워주기 위해 지난 한해 가꾸고 다듬은 농산물을 미리 챙깁니다. 기름방에 들러 참기름이며 들기름을 짜고, 고추방앗간에 들러 고추가루를 빻습니다. 마음은 바뿐데 그렇게 준비가 되어가는 만치 설날은 내일 모레로  다가오고, 혹시라도 빠뜨린 것이 없나 헛간을 둘러보고 부엌을 둘러보고 미리 싸둔 보따리를 다시 풀어봅니다.


설날이 눈앞에 다가오면 할머니 마음은 더욱더 바빠져가고 기다림에 지쳐 초조하기 조차 합니다. 아직은 두세 밤은 더 자야 자식이며 손주들이 들이닥칠 것인데 세월은 일년 열두달이 그리도 잘 흘러가다가 왜 명절을 코앞에 두면 이리도 느려터졌는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을은 할머니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명절분위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동네거리는 여전히 고적하고 찬 바람만 가득한 채 사람 발길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이동슈퍼라도 들어와야 하는데 명절 대목이라도 보러 어디 장터 한 모퉁이에 전을 펼쳤는지 일주일에 두어 번씩 마을을 들르던 이동슈퍼마저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래도 간혹 어디 택배사 트럭이나마 들어오기는 하는데, 명절을 코앞에 둔 택배는 대부분 아쉬운 사연이 묻어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귀향을 하지 못할 사정인 자식이 그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보내는 선물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없으면 자식도 아니겠지만, 그냥 선물 하나 받고 자식얼굴도 못보고 명절을 나기에는 할머니 가슴에 묻힌 그리움이 너무나 큽니다.

마을에는 없어졌지만 산골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이웃이 넘치고 정과 사랑이 넘치던 옛 마을의 모습에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명절만이 아니라 언제가 비나리마을은 할머니의 뇌리에 남아있는, 이웃의 번잡한 삶이 내삶과 엉켜 두루 즐겁게 살아가던 옛 마을의 영화가 재현되길 마음속 깊이 빌어봅니다.    

올해 비나리마을 설날은 그 어느해보다 풍요롭고 정감넘치는 그런 명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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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은 가장 귀한 생명을 나누는 일이기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흔한 보시나 자선은 아닙니다.

나의 피는 나에게 속해있어, 누구도 나의 허락을 맏지 않고 빼앗거나
침해할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자산입니다.
하지만 나의 육체에 속해 있는 피는,
생명현상의 일부이다보니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하는 과정에 있어
일정한 양을 나눠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결코 절대량이 줄어들지 않는 무한자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삼년전에 이웃에 사는 예연이 아빠의 권유로 헌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헌열의 기쁨에 중독이 되어 정기적인 헌혈자가 되었습니다.
헌혈을 하고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존재이유도, 
내 삶의 가치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내 삶이 내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타인과의 유대와 일체감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좋은 헌혈이지만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예연이 아빠랑 봉화읍에 같이 나갈일이 있었습니다.
봉화읍에서 볼일을 마치고 예연이 아빠가 이왕 나온 김에 안동에 들러
헌혈이나 하고오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봉화읍에는 헌혈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산골사는 사람이 헌혈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 주말에나 이웃의 혼례 등으로 안동이나 영주같은 도시에 나갈 일이 생기는데
헌혈은 평일에나 할 수가있습니다.
그래서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꼭 평일에 따로 시간을 내어
차로 한시간 거리인 안동시까지 나가야만 합니다.

이날도 예연이 아빠께선 이왕 봉화읍 나온 김에 안동까지 가자고 하셨지만
봉화읍에서 안동까지는 차로 한시간 거리나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명호면 비나리에서 안동까지 거리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날은 안동에 소소한 몇가지 볼일도 있고해서
혼쾌히 안동 헌혈의집까지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동으로 달리는 동안 예연이 아빠는 지난 헌혈날짜를 계산해 보고
헌혈한지 채 두달이 안된것같다고 하시면서 헌혈의 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헌혈의 집에서는 두달이 되기에는 일주일이 모자란다고 확인을 해주었습니다.
원칙적으로 헌혈한지 두달이 안되면 헌혈이 불가능하지만
이왕나선길이니깐 가서 사정하면 헌혈을 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오후의 헌혈의 집은 젊은 청년들로 붐볐습니다.
 안동시내의 대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10여명의 남녀학생들이
모둠으로 헌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예연이 아빠가 간호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헌혈을 하려했지만,
모든 것이 전산처리되어 있어 원천적으로 헌혈을 할 수가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저라도 헌혈을 하겠다고 30여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간호사앞에 앉아
몇가지 질문에대한 답을 하면서 혈압을 재었습니다.
혈압은 정상이고 드디어 손가락 끝에서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려는 순간
간호사께서 최근 해외여행 사실 확인란에 체크한 것을 보시고
해외여행뒤 한달이 경과하지 않은면 헌혈을 할 수가 없다고 판정하셨습니다.
뭐 일본인데 어떨려구요 하면서 둘러됐지만
결국 저 역시도 헌혈을 하지 못하고 되었고 
예연이 아빠와 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헌혈의 집을 나와야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미안해하는 간호사의 배웅을 받고 돌아서며
예연이 아빠와 저는 동시에 마주보고 한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헌혈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사실  헌혈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머저 자신의 생명을 타인과 나눌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피를 나눌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선
바로 자신의 건강이 확보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둘만 갖추었다고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외여행 여부, 약물투여 여부, 거주지역문제, 병력 등등 
조건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혈은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내 피를 타인과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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