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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봄언저리에 1박2일 지리산을 다녀왔다. 백무동을 거쳐 장터목에서 1박한뒤 천왕봉을 거쳐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 여정뒤 아쉬움이 남아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 그리고 삶에 쫒기다 2년을 훨씬 넘긴 끝에 이번 추석연휴를 이용해 아내와 지리산 3박4일 종주를 다녀왔다.

9월20일 승용차로 봉화를 출발하여 중산리에 차를 주차하고, 버스로 성삼재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하고 노고단에서 1박, 연하천에서 1박, 그리고 세석에서 1박 한 뒤 중산리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았다. 이번 계획을 짜면서 대도시가 아닌 경북 봉화에서 지리산에 접근해서 종주하는데 교통편이 제일 문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자신의 차를 이용해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를 짜야했는데 이것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라고 짠 코스인 셈이다.  

[코스 개략 ]

9월  20 봉화출발 중산리 도착 -> 버스이동후 노고단 1박 / 21 연하천 1(6시간트렉) / 22 세석 1(6시간 트렉) / 23 중산리하산 (7시간트렉)

산을 걷기 시작하기 까지 종착지에 차를 대고 출발점으로 버스로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무려 4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출발점인 성삼재까지 가는 일은 나름대로 많은 교통 정보가 필요했다. 버스시간 정보를 바탕으로 20일 하루 일정을 정리했고 그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혹시라도 일정이 흐트려지면 돈을 들여 택시로 잃어버린 시간을 많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서 나름 타이트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중산리-성삼재 버스 이동 정보 ]

봉화출발 5(4시간 소요) 중산리도착 910<여유40>

중산리 09:50 출발(75분 소요) 1105분 진주버스터미날도착 촉석루/점심 <여유2시간25>

진주 13:30 출발 (60분 소요) 하동도착 14:30 <50분여유>

하동 15:20 출발 (40분 소요) 구례도착 16:00 <20분여유>

구례 16:20 출발 (40분 소요) 성삼재도착 17:00 -> 노고단 (도보 40분 소요)

 

  [중산리-성삼재구간 버스 시간표]

중산리 출발 진주행 (75) : 9:50 / 11:00 / 12:20 ........

진주 출발 하동행 (60) : 12:10 / 12:40 / 13:30 / 14:10 / 15:00

하동 출발 구례 (40) : 13:30 / 14:20 / 15:20 / 16:30 / 17:30

구례 출발 성산재 (40분 소요) : 14:20 / 16:20

계획짜기도 쉽지 않았지만 출발 역시 쉽지 않았다. 배낭을 비롯해 구질구질한 장비를 작은 방 가득 늘어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사실 출발 당일 새벽에야 짐을 꾸릴 수 있었다. 출발 전날 저녁 상주에서 회의가 있어 출발 당일 새벽두시에나 귀가했다. 그 시간에 급히 답해야할 메일이 와있어 형식적인 답변을 하고 자리에 누우니 몸은 천근인데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야하는데 짐도 싸지못한채 잠을 청하니 어찌 잠이 오겠는가. 두어시간 잔듯만듯 누워있다 일어나 와이프를 깨우고 세수를 하고 짐을 챙기고 정신없이 집을 나서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쉬지 않고 차를 몰아 중산리로 접어드니 계획했던 버스는 중산리 휴게소 10분전에 우리를 스쳐 지나갔. 950분발 버스를 넣치고 11시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페북에 자랑질을 하고나니  버스가 도착했다.

중산리서 진주까지 한시간 조금 더 걸리는 길은 꼬불꼬불한 길이 문제인지 운전이 문제인지 버스는 정신없이 커브길을 꺽고 중앙선을 넘어 흔들렸다. 바깥 풍경을 즐기기에도 부족한 잠을 청하기에도 불편했다. 그 와중에 옆자리 할머니의 사연이 귀에 들어왔다. 버스 옆자리 할머니가 대전 가신단가. 막내아들이 전기공사 일을 하는데 회식을 마치고 나오다 사고를 당해 대전의 중환자실에 있다고 큰아들 연락을 받으셨단다. 큰 아들은 어머니는 괜히 올라 오지마라고 하는데 잠을 잘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어 혼자 낯선 대전으로 나서셨단다. 마음 급한 할머니는 원지에서 내려 한시바삐 대전으로 달려 가고싶은 마음에 기사에게 원지에서 대전가는 차를 탈 수 있는지 물으니 기사는 모른단다. 버스가 원지에 도착해 조금의 여유있는 대기 시간이 있어 정류소 직원에게 물으니 하루에 두어번 밖에 없는 노선이니 그냥 진주가서 대전가는 차편 타는게 빠르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산리에서 원지까지 할머니 옆자리 손님은 계속 바뀌었고 할머니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하소연을 반복했다. 차는 진주에 도착했고 할머니는 떠나갔지만 추석을 앞두고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할머니 아픈 마음이 뇌리에 남아 지리산종주 내내 다친 아들의 쾌유를 빌었다. 

진주터미널에 도착해서 남은 조금의 시간이나마 알뜰하게 보내기 위해 짐보관소를 찾았다. 안내에 따라 70년대 조폭영화의 아지트같은 터미날 2층사무실에 두개의 배낭을 삼천원에 맡기고 터미날에서 10분거리인 진주성을 향하다. 진주성에 다와서 "북경장"이라는 예정에 없던 맛집을 만나 맜있는 만두와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여행의 즐거움은 역시 맛있는 음식임을 확인하고 서둘러 진주성을 둘러보려 했지만 하동행 버스를 타야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성 외곽과 축제 준비 중이라고 각가지 조형물이 들어서고 있는 진주 남강을 내려다보는것으로 진주투어를 포기하고 다시 터미날로 북귀했다. 130분발 하동행 버스에 급히 올라 타고 다시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했지만 역시 길은 험하고 운전은 거칠었다.

도착한 하동 터미날은 작지만 깔끔했다. 다시 구례행 버스가 출발하기에는 조금의 여유가 허용되었다. 터미날을 나서서 하동읍을 구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그냥 터미날에 설치된 TV를 통해 남북 정상의 평화회담 뉴스를 뜨거운 마음으로 시청하다 버스에 올랐다. 구례행 버스 기사는 출발과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끝없는 통화를 이어갔다. 기사의 머리 위쪽에는 기사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통화할 경우 신고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사는 직전에 승객이 내린뒤 버스는 출발했고 뒤늦게 하차를 요구한 승객이 있어  브레이크를 밟았고 승객은 쓰려진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 이어갔다. 얼마나 다친지 모르지만 병원에 다친 승객을 보냈고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회사와 보험사, 동료와 가족의 전화가 이어졌다. 가족과 나누는 소소한 사연까지 억지로 듣다보니 하동 구례간 한시간이 금방지났다. 다친 사랑은 신체 및 정신지체 2등급에 나와 같은 62년생인데 70먹은 노인네 몸골을 하고있었단다. 마음이 아렸지만 그분의 삶의 역정이 얼마나 험했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이번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유달리 사연이 많았다.

구례에 도착해 보니  한산한 터미널에 등산객 차림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주로 새벽녘에 성삼재행 등산객이 몰리는 까닭인것 같았다. 버스가 출발하기전 터미날을 둘러보다보니 중산리행 직행 버스가 안내되고 있었다. 지리산 종주를 위해 중산리에서 성삼재까지 네 번의 버스 순례를 한 자신이 미워졌고 매표소로 달려가 직원에게 물었다. 자주 받는 질문이었을까 재밌다는 표정으로 이 중산리가 그 중산리가 아니란다. 동명의 지명일뿐이라고 했다. 실망이 아니라 안도감을 느끼며 승차장으로 돌아와 기사도 손님도 없는 성삼재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비가 굵어졌다. 승객이라고는 우리 부부밖에 없는 버스는 경사가 심한 꼬불꼬불한 길에 안개가 짙고 비까지 뿌렸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잘도 달렸다. 도착한 성삼재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안내소 처마밑으로 비를 피해 배낭을 고쳐 맨뒤 노고단대피소를 향해 걸었다. 비를 맞으며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한시간만에 도착한 노고단 대피소는 우리포함 5명의 등산객이 전부였다. 옷과 신발 건조기가 있어 비에 젖은옷을 말리고 취사실에서 식사를 준비하니 하루의 긴장이 일시에 날아갔다. 이제 진짜 지리산이구나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전날 점이 부족한 탓에 9시 소등 무렵 미리 잠에 빠져들었다. 바닥은 차고 딱딱했지만 공기는 훈훈했다. 적은 인원 때문이겠지만 발냄새 없고 코고는 소리 없는 대피소에서 잠을 자는 호사를 누렸다.

새벽두시에 잠이깨고 화장실을 다녀온뒤 자는둥 마는둥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지붕에 빗듣는 소리에 모두들 잠저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7시가 넘어서야 내가 먼저 일어나 전등을 켰다. 밤새 아이 둘을 동반한 여성 한분이 소리없이 숙소에 합류 있었고 대피소 마당에는 아침에 성삼재에 도착해 노고단을 지나는 몇몇 등산객이  보였다. 천천히 준비한 아침을 들고  8시면 퇴소해야 된다며 빗자루를 들고 문앞에 서있는 직원에 쫒겨 대피소를 출발하려고 보니 820분이었다. 두아이팀만 두고 맨마지막으로 대피소를 나서 비오는 노고단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고단고개를 지나 쉬지 않고 비속을 걸었다. 노고단고개를 지나 피아골 삼거리 까지 이르자 빗물이 등줄기를 타고내리고 등산화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커버를 잊고 와 다 젖은 배낭을 뒤늦게 지키려 비옷을 벗어 배낭에 씌웠다. 몸은 이미 다 젖어 더이상 비옷으로 가릴 이유가 없었다. 비속을 걸으니 내가 지라산을 걷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비와 안개가 가린 나의 시야엔 지라산 풍경이라곤 없었다. 한치앞울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와 빗줄기가 나의 시야를 다음 발걸음이 닿은 길바닥에 고정시켰다. 경사가 심해지면 호흡이 가파오다 다시 평지와 내리막을 만나면 호흡을 되찾았다. 비줄기가 굵어뎠다 가늘어뎠다 변화할뿐 나의 걸음은 한결같았고 마음은 걸음이 더할 수록 가벼워졌다.

삼도봉에서 호흡을 고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침일찍 노고단을 먼저 지나쳤던 등산객을 앞지르기도 하고, 낯선 분들이 우리를 앞서가기도하는데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두 아이 일행은 따라오지 않았다. 오후부터 큰 비가 예보된 상황에서 걷기 시작했지만 토기봉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비가 아무리 와봤자 연하천까지는 얼마남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근래에 나를 감싸던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 결정의 연장선에서 나는 이번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 지리산에 와서 나는 무슨 결정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결정을 지리산에 고하고 조그만 위안이라도 안고 삶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나의 결정은 순수한가,  합리적이고 온당하기나 한 것인가... 산사람들의 아우성이 빗속에 전해왔다.  나의 걸음은 더 빨라지고 1시를 조금 넘어 연하천에 도착했다. 6시간 코스를 한시간 줄여 5시간만에 도착했지만 우중산행이니 만치 쉬운 길은 아니었다.

연하천대피소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입실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식으로는 오후 6시가 입실시간이지만 4시이후에는 허용하겠다는 산장지기의 전언을 받았다. 미리 도착한  서너팀 10여명은 점심 식사후 취사실바닥에 비닐을 깔고 앉거나 누워 오후 4시까지 춥고 불편하고 무료한 시간을 견뎠다. 노고단에서 같이 지냈던 외국인 젊은 커플은 전날 저녁식사를 신라면으로 하더니 오늘 점심은 햇반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카드가 아니라 화투놀이로 즐거웠다. 한국에 유학온지 1년되었다는 외국인 청년 커플의 현지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놀라웠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4시를 넘기자 규정보다 미리 입실을 허용했다.  큰 선심이라도 쓰는쓱대는 직원덕에 숙소에 들어서니 노고단에 비해 좁고 누추했고 건조기 등 설비도 없었다. 그래도 안까지 젖은 배낭을 쏟아 붇고 젖은 옷을 온기가 있는 바닥에 펴고 추위에 지친 몸을 침상에 뉘웠다. 해가 지자 온기를 회복한 몸을 일으켜 저녁을 해결하고 침실로 돌아오니 어제와는 달리 사람으로 붐비고 젖은 옷가지로 습하고, 사람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찬 불편한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전 노고단에서 만난 두 아이와 고모되는 분이 도착했다. 하루종일 걱정했던 아이들을 만나니 반갑고 고마웠다.  

연하천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 두어시에 잠이 깨서 마당을 서성인뒤 다시 잠자리에 들어 뒤척이다 창밖이 밝아오는 것을 확인한뒤 잠자리를 틀고 일어났다. 그래도 새벽 잠이 들었는지 숙소의 많은 침상은 비어 있었다. 세석까지의 짧은 일정 때문에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다보니 느긋하게 아침을 해먹고 연하천대피소를 나섰다. 어제비로 말쑥히 씻긴 투명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고 아침 걸음을 독려했다. 비록 덜마른 옷을 입고 여전히 첨벙대는 등산화를 신고 나선 걸음이지만 바람은 시원했고 햇살을 따사로왔다. 지리산에서 두밤을 지낸 뒤 처음으로 지리산의 풍모를 느끼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멀었지만 살짝 선보이기 시작한 단풍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겹겹히 이어지는 넉넉한 지리산 자락이 그윽하게 다가왔다.

삼각봉과 형제봉을 지나 공사로 폐쇄된 벽소령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라면으로 대신했다. 다시 벽소령을 출발해 이번 일정의 마지막 숙소인 세석평전을 향해 나아갔다. 전날까지 비속에 묻힌 지리산 자태를 재대로 느낄 수 없었기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이전의 코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좋았다. 골짜기로 인해 시야가 갇히거나, 숲으로 인해 지리산의 진면모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을 방해받지 않는 환상적인 길이 이어졌다. 연하천과 세석의 중간지점인 선비샘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 한걸음 한걸음이 남은 길을 줄여나가는 기쁨이 아니라 남은 알사탕을 한알한알 까먹는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선비샘터를 지나자마자 아내의 등산화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 신발은 2년전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 신발 바닥이 분리되어 네팔 현지에서 수리한 신발이었다. 그 사실을 잊고 아무 거리낌없이 신고 왔는데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걸음을 조심해서 이번 일정을 마무리하고싶었지만 한번 분리되기 시작한 바닥은 금새 걷기가 불가능할만치 벌어져버렸다. 임시방편으로 고무줄을 매고 결국은 양말로 신발에 신기는 조처로 위기는 모면하는 듯 했지만 불편한 신발이 걷는 자세를 흐트려버렸는지 아내는 갑자기 무릅통증으로 걷기가 불편해졌다.  할 수없이 걷는 속도를 줄이고 예정보다 늦게 세석에 도착했는데 세석대피소는 시골 장터 못지 않게 인파로 넘쳐났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마당의 탁자는 빈자리가 없었고, 양방향으로부터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이 도착을하고 또 쉬었던 사람들이 떠나갔다.

세석의 밤이 다가오자 숙소는 배정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챙겨 침낭으로 기어들었다. 세석대피소의 침상은 너무좁았다. 옆사람과 분리된 조금의 공간도 없는 그야말로 옆사람과 어깨가 부딪는 잠자리였다. 나는 숙면을 위해 거실같은 공간으로 잠자리를 옮겼고, 밤새 사람들이 들고 날고 조금 춥기가지한 잠자리였지만 차라리 낯선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자는 것 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거실에 잠자리를 편 덕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밤새도록 사람들은 야간산행을 떠나고 대피소에 도착하고 있었다. 안전상행을 위해 몇시 이후에는 출발하지 못하게하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두운 뒤에 중산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새벽 두어시가 되자 짐을 꾸려 대피소를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3박4일의 지리산 종주를 마감하는날 새벽 5시에 잠자리를 걷고 일어나 과일로 요기를 하고 5시 30분경 길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줄 알았지만 취사실은 일출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우리와 비슷하게 숙소를 나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숙소를 나선지 얼마되지 않아 완만한 언덕을 한참 오르니 일출 조망이 좋은 촛대봉에 이르렀다. 벌써 많은 분들이 카메라 삼각대를 펼치고  대기하고 있었고, 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우리도 배낭을 벗어던지고 동쪽 하늘을 향해 바위에 걸터 않았다. 남은 과자로 요기를 하고 구름에 가려 지체된 일출을 기다리다가 붉은기운이 번지는 아침 하늘을 폰에 담은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포기하고 중산리로 하산을 시작했다. 고장난 신발과 아내의 무릎탓도 있었지만 2년전 올랐던 찬왕봉을 이번에는 왠지 남겨두고 싶었다.

장터목에서 중산리까지의 길은 계곡의 흐름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졌다. 길과 계곡이 교차하고, 멋진 폭포와 큰 바위로 이루어진 중산리 계곡은 기대하지않은 큰 선물로 다가왔다. 큰 산이 만든 큰 계곡은 나름의 멋을 뽐내고 있었고 중산리의 유명세가 이해되었다. 3시간거리를 거의 5시간만에 주파하고 중산리 출발점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보니 자동차키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농사 동료이자 이웃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늦었지만 무사히 추석 전날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더 늦기 전에 경험한 지리산 종주기도 했고 나름의 큰 결정 뒤에 마음을 다잡기 위한 산행이기도 했던 3박 4일의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뒤돌아보니 잊지 못할 벅찬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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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전농 경북도연맹 가족한마당에 노회찬 의원을 모시고 

농업 농촌 관련한 주제로 토크를 진행했다. 

아마추어 진행자가 토크의 대가를 모시고 진행한 어설픈 자리지만 

노회찬의원은 격식에 개의치 않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담에 응했다. 

특히나 행사 주최측의 사정을 고려하고 

어설픈 진행자의 사정까지 배려하는 노회찬의원 덕분에 

참 어려울뻔한 자리를 쉽고 마음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유명정치인을 가까이서 접해본 경우가 많지 않지만 

첫 만남에 반한 경우는 노회찬 의원이 처음이었다. 

그분은 진솔하고 겸손했지만 가볍지 않았고, 

진지했지만 무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나의 마음에 모셨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지 않아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났다.


뒤늦게 나는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단돈 만원의 후원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분은 당연히 결백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큰 사람을 작은 생활에서 자유스러울 것이라는 바보같은 믿음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 선택을 달리했다면 

아마 지금쯤 그분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며 배신감 운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부끄럽다.


세상에 지고 있는 빚이 또 하나 늘었다. 

노회찬 님이 꿈꾸었던 세상, 노동자 농민이 대접받고 

사회적 약자가 더불어 행복한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지를 모으고 의지를 모아 한발한발 나아가야한다. 

그 길만이 그분에게 진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이다.


어제 봉화군농민회 동지들과 포항 정의당 도당에 문상을 다녀왔다. 

박창호 도당위원장과 박충일 사무처장님의 환대에 더 죄스러웠다. 

잠시 갈라진 길이지만 곧 다시 만날것이라 굳게 믿는다.


장소: 경북 포항시 북구 침촌로9(장성동 1588-1 대영빌딩 3층)

전화:054) 24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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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농민회 동지들이 6월 30일부터 열흘간 3인 1조로 서울 영풍문고앞에서 피킷시위를 진행합니다. 

"봉화 농민 열받았다. 영풍제련소 얼릉 물렀거라!!"
혹시 근처 지날 일 계시면 같이 해주시고 격려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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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최상류 중금속오염원 영풍제련소 폐쇄를 위해
봉화 농민이 나섰습니다.

㈜영풍제련소는 지난 48년간 봉화 석포면 낙동강 최상류 상수원을 점유하고 기업의 이득을 위해 낙동강을 중금속으로 오염시키고 아름다운 산하를 파괴해 왔습니다.하지만 정부는 지역경제를 위하고 지역 농산물 신뢰성 추락을 막는다는 핑계로지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영풍의 오염실태를 감추어왔습니다.영풍은 제련소의 폐쇄와 이전을 주장하는 주민을 역적으로 몰고 영풍제련소 폐쇄주장을 약하시키기 위해 영풍에 기대어 생계를 잇는 일부 주민을 앞세워 주민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영풍제련소의 환경파괴 행위를 엄벌하고 막아야할 정부 역시 기업의 편에서 호위무사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영풍제련소의 수질오염과 불법 행위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최근 2013년부터 밝혀진 불법만도 46건입니다. 대규모 불법 공장증설을 아무렇게나 하고 벌금 몇 푼으로 양성화하는가 하면 올해는 70여톤의 오수를 낙동강으로 무단 방출한 것이 발각되어 영풍 제련소가 문을 연 48년 만에 처음으로 [조업중지 20일]의 행정처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영풍은 반성은커녕 조업중지 가처분 신청을 해서 시간을 끌고 행정소송을 제기해 처벌을 모면하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풍은 반환경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불법도 마다않는 파렴치한 기업의 표본입니다.

봉화군 석포면은 아름다운 소백산맥 산자락과 낙동강 구비길이 만나 이루어진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지를 이룬 계곡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풍제련소가 계곡을 점령한지 48년이 지난 지금 낙동강은 중금속에 쩔은 죽음의 강이 되었고 산자락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벌겋게 타들어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나무가 죽은 산은 토사가 무너져 내리고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공기는 아황산가스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영풍은 근본적인 대책없이 눈가림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새벽이면 주민들의 눈을 피해 영풍직원들을 동원해 제련소 주변 강돌을 닦아내고, 폐기물을 땅에 묻고, 죽은 물고기를 건져 치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공장 하류의 낙동강은 거품이 일어 떠다니고 매일매일 샛강에서 들어온 묽고기가 죽어나가고 이 고기를 먹은 새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영풍제련소는 청정 봉화를 파괴하고 낙동강을 페허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직 폐쇄와 이전만이 영풍제련소의 낙동강 오염을 막는 유일한 대책입니다. 폐쇄와 이전을 전제로 지역 경제와 일자리 대책을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강구해야할 것입니다. 이제 어떤 미봉책에도 우리 주민은 속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봉화 농민들은 영풍제련소를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1300만 영남인들이 먹고 마시는 식수원이 독극물인 중금속으로 오염되도록 방치한 환경부와 정부도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합니다. 정부는 영풍제련소의 폐쇄이전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야 하고 동시에 실업과 지역경제의 붕괴를 걱정하는 주민들을 안심시킬 대책도 함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습니다!
봉화 농민은 요구합니다.


영남의 젖줄 낙동강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영풍제련소를 즉각 폐쇄하라!!

2018년 6월 30일
봉화군농민회
영풍석포제련소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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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교육감 선거때 유일하게 경북만 진보 후보를 내지 못했습니다. 4년간 절치부심하며 준비해 온 끝에 이번 교육감 선거에 민주진보 교육감 후보로 이찬교 선생님을 후보로 낼 수 있게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406명의 봉화군민의 지지를 모아 오늘(6월 4일) 오후 5시 봉화군청 브리핑룸에서 [민주진보 교육감 이찬교 봉화군민 지지선언]을 했습니다 기자 없는 기자회견이라고 군청 공보담당 직원은 난처해 했지만 우리는 새 시대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마음에 가슴부풀고 흥겨웠습니다.  보수의 본향인 봉화에서 진보 교육감 후보 지지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헌신적인 지지자 여러분의 노고 덕분입니다. 참여자를 조직하느라 애쓰신 이찬교 진보교육감 후보 지지자 여러분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특히 봉화 선본을 이끌어 오시는 봉화군농민회 최만억 회장님 고맙습니다. 

<지지 발언>

613지방선거일이 다가옵니다.

좋은 도지사 뽑고 좋은 군수 뽑아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보다 교육입니다.
좋은 교육감을 뽑는 일은 좋은 도지사 뽑는 일보다 100배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깜깜이 선거입니다.

군수 후보는 누가 더 좋은 지 관심을 가지는데
도지사 후보는 누가 더 훌륭한지 관심을 가지는데
교육감 후보만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호박밭에 물도 대고 
사과밭에 약도 쳐야하는데 
100년지대계라는 경북 교육을 결정짓는 교육감 선거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만사 다 미루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기 어르신, 할머니,
아주머니께 호소합니다.

교육감 선거에 관심 가져주십시오.
다행히 경북의 교육을 바로잡을 좋은 후보가 출마를 했습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하는 교육을 할 것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일등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학교 교육을 할 것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공부만 잘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공부는 못해도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는 인간을 키우는 교육을 할 것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부모형제, 이웃과 친구를 사랑할 줄 아는 전인적 인간을 키우는 교육을 할 것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작은 학교를 통폐합해서 마을을 죽이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마을과 학교가 하나되는 교육 정책을 시행할 것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농사짓는 부모를 자랑스러워 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을 하고 

농업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교육을 할 것입니다.


각박한 사회는 무너진 교육의 결과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는 경북 교육을 바로 세워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교육을 펼칠 것입니다.

이찬교 교육감 후보가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지방선거 군수도 도지사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교육감 선거에서 따뜻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펼칠 이찬교, 이찬교 후보를 꼭 선택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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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지방선거를 통해 경북 농업의 대전환을 이룩하자!


한국 농업은 벼랑 끝에 내 몰린지 오래다. 농업 소득은 도시민 평균 소득의 절반까지 추락했고, 농산물 자급률은 20%를 겨우 넘기고도 허구한 날 과잉생산이라며 가격 폭락과 갈아엎기가 반복되고 있다. 농업엔 미래가 없고 농촌에 사람이 없다. 국정에 농정이 없고 정치에는 농민이 없다. 특히 경북은 파탄 난 한국 농업의 문제를 가장 집약적으로 안고 있는 농정의 맹지나 다름없다. 마을 공동체 사업이나 농촌 마을 재생 사업, 친환경 농업과 사회적 경제, 농산물최저가격 보장조례나 농정위원회 구성 등 모든 영역에서 가장 낙후된 광역단체가 바로 경상북도다. 경북의 정치적 후진성이 바로 농정의 후진성으로 발현된 것이다. 농업은 가장 오래된 인간의 활동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보적인 영역이다. 농업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그 사회가 얼마나 선진적인지를 대변한다. 농업을 박대하는 선진국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통해 중앙정부의 농정을 수동적으로 답습하는 경북 농정의 대전환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은 농업관련 공약을 제출한다. 먼저 농민의 지위 향상과 자치 농정을 실현해야 한다. 농민 수당 지원조례를 통해 농가기본소득에 한발짝 다가감으로써 낙후된 경북 농정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밭농업 중심의 경북 여건에 부합하는 직불금체계를 개편하여 밭농업 직불금을 쌀농업 직불금 수준으로 강화해야한다. 또한 농업 기반인 농지의 보전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지역먹거리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 소비를 위한 지역푸드플랜 수립과 지역먹거리 통합지원세타 설립을 촉구한다. 나아가 농촌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과 농민복지 강화를 위한 정책개발과 도입에 앞장서는 경북 농정이 되어야한다.

다가오는 지방선거는 박근혜 적폐정권을 촛불로 몰아내고 맞이하는 첫 선거다. 적폐청산은 선거를 통한 인적 청산을 통해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듯이 농업 적폐 역시 반농업적 정치인의 축출에서부터 시작된다. 자한당으로 대표되는 경북 지역의 적폐권력을 농민이 앞장서서 몰아내고 농민의 권익을 지켜내기 위한 농민의 공약을 관철해 내는 농민중심의 경상북도 지방선거를 만들어 나가자.

 

201855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북도연맹


경북 농업의 대전환을 위한 4대 영역 20공약 세부내용


󰁶 농민지위향상 및 자치농정강화 분야

공약 1. 농민수당 지원 조례 및 다양한 공익형 직불제 도입

200여 가지로 세분화된 농가보조사업을 인해 소수 대농 중심의 중복 수령과 대다수 농가의 혜택 배제가 일어나고 있고, 관과 업자의 유착, 관변 농업인 조장, 농업 유지 발전 및 농민 육성에 실질적 효과를 내지 못하는 예산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이를 통폐합하고 전면 개편하여 확보된 예산으로 모든 농민에게 실익이 돌아가는 농민수당을 지원한다. 최근 강진군에서 도입한 농업인 경영안정자그지원조례가 그 실례가 될 것이다. 또한 농촌생태보전. 농업환경개선, 지역식량안보 제고, 지역생물다양성확보 등 다양한 공익형 기여에 대한 직불금을 도입한다. 이를 통해 농민의 삶이 안정되고 농업 투여 예산의 효용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지역화폐와의 연계 사업으로 지원금의 50%를 지역화폐로 지급할 수 있다.


강진군 농업인 경영안정자금 지원 조례

1(목적) 이 조례는 농산물 시장의 개방화에 따른 소득 감소와 농자재의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업인의 현실을 감안하여 강진군민의 경제·사회·문화발전의 기반인 농업을 지속 유지하고, 논농업과 밭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인의 소득안정을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에 강진군이 추가 지원하거나 자체 지원시책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지원범위) , 밭 경영안정자금은 농가별 균등 지원한다.

 

공약 2. 밭농업직불급을 쌀농업직불금 수준으로 강화

밭농업, 과수농업 중심의 경북은 쌀농업 중심지역에 비해 직불금 지원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다. 현재 직불금이 논농업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앙정부 직불금 정책을 보완하여 경북의 밭농업, 과수농업 직불금 수준을 논농업 수준으로 올리는 경북형 밭농업 직불금을 도입한다.

공약 3. 경북형 주요농작물 최저가격보장조례

전북이 시행중인 농산물 최저가격보장제에 준하는 경북대표 농산물에 대한 최저가격 보장제를 실시하여 경북 농민의 삶의 안정성을 강화하고 경북 대표 농산물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이 가능한 토대를 만든다. 현재 봉화군 등에서 시행중인 농산물가격안정조례와 중앙 정부의 생산안정제를 보완하여 보장성을 강화한다. 

공약 4. 농정(개혁)위원회 구성

농민이 농정의 결정 및 집행 과정에서 소외되고 농정의 대상으로서만 역할이 한정된 구조 속에서 농정의 심각한 왜곡과 현실 이반이 일어났다. 모든 답은 현장에 있고 바른 농정은 농민 속에서 나올 때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농정위원회를 통해 모든 농정관련 정책 결정 과정에 농민조직이 참여함으로써 농정의 현장성을 강화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나누고 집행력을 높여 나간다.(충남 삼농위원회, 전북 삼락농정위원회 사례)

공약 5. 농업인 참여예산제 도입

농업 관련 사업이나 농업예산의 편성 시 농민의 의견 수렴 없이 중앙정부 사업을 수동적으로 답습하거나 이동단위의 숙원사업을 반영한 지방의원의 요구에 기반해 진행해 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타개해 사업 기획 단계부터 농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역 농업 특성에 부합하며 현장 농업인의 요구에 근거한 창의적 예산 편성이 가능하도록 한다.


󰁶 농업기반 보전 강화

공약 6. 농지관리 강화(제주형 실태 조사 및 위반사례 조처)

농지는 농업의 근간이기에 모든 문제에 앞서 근본적인 [제주형 농지관리 조례]를 도입하여 농지 이용 및 관리 실태를 전수조사하여 부재지주와 비농민 소유 농지에 대해 법적 처분을 진행하며 이를 통해 농지의 농민소유가 지켜질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조성한다.

공약 7. 지역먹거리 통합지원센타 설립 및 지역 푸드플랜 수립

경북도민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지역 농산물의 생산 단계부터 유통 소비 단계까지 종합적인 기획 및 실행을 담당하는 지역 먹거리 통합지원센타를 설립한다. 이를 통해 학교급식,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타 등 공공급식에 지역 건강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이해 당사자인 생산자 소비자, 영양사 등의 의견을 취합하고 조율하여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지역 먹거리 시스템을 구축한다.

공약 8. Non GMO 학교급식 조례 제정

세계 GMO 농산물 수입 1위국인 한국은 아직 GMO식품의 무분별한 이용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가장 건강한 먹거리로 키워야한 학교 어린이들조차 GMO농산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전 사회적인 GMO 농산물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 제고와 이용제한이 필요하지만 우선 학교급식에서부터 GMO식품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서 친환경 무상급식과 더불어 GMO 식품을 학교급식에서 완전하게 퇴출시켜야한다. (대만은 2016년부터 학교급식 GMO 식품 사용 전면금지)

공약 9. 농작물 재해 보장 강화

농작물은 각종 자연재해로부터 민감하다보니 기후에 따른 공급의 차질이 잦고 이로 이한 가격 등락은 물론 농민의 안정적 삶조차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농작물재해보험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나 대농중심으로 운영되고 가입률이 저조하여 재해로부터 보호와 보상이 꼭 필요한 소농이 그 혜택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따라서 농작물 재해보장보험의 문턱을 낮추고 품목을 확대하는 한편 근본적으로 농작물 재해 보장법을 강화해 자연재해로부터 농민의 삶의 보호하고 안정적 농사를 보장한다. 

공약 10. 여성농업인 유대 정책 강화

농업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 농업인에 대한 처우는 형편이 없고 실제로 농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모든 의사결정과 제도적 지원에서 배제되어 있다. 여성농업인을 농업 주체로 세우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농업인 육성지원조례를 제정하고, 지자체 여성농업인 전담인력 확보 및 여성농업인센타를 설립한다.


󰁶 농촌마을공동체 활성화 

공약 11. 에너지 자립마을 육성

핵발전소와 고압 송전선로뿐 아니라 대체 에너지인 풍력 및 태양광 발전 조차 농촌의 경관을 파괴하고 주민의 건강과 안전한 삶을 위협하고 있다. 농촌이 도시 에너지 문제 해결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농촌의 에너지 빈곤률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마을 공동체를 해치고 농지를 잠식하는 무분별한 대체 에너지 개발을 저지하고 개발의 수혜를 마을로 귀속해야한다. 따라서 대체 에너지 개발은 마을 경관을 해치지 않는 소규모에 국한하고 농촌마을의 친환경 에너지 자립율을 높이는 사업을 지원하고 육성한다.

공약 12. 동물과 사람이 함께하는 친환경 소규모 축산 장려

대규모 축사 관련한 주민의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규모 축사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하고 동물 역시 공장식 시스템 속에서 잔인하게 사육되고 있다. 공장식 축산이 사육되는 동물에게도, 마을 환경에서도, 주민의 삶과 소비자의 건강까지도 해치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은 사육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소규모 친환경 축산이 공장식 축산을 대체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소규모 친환경 축산을 장려하여 경축순환농업의 기반을 다져나가 장기적으로 대규모 공장식 축산을 대체해 나가도록 한다.(봉화 까망돼지 사육 작목반 사례)

공약 13. 귀농지원, 청년귀농 우대 정책 강화

농촌의 미래는 농업을 담보할 후계인력의 공급에 달려있다. 지속적인 귀농인의 유입과 특히 청년 귀농인의 육성, 농촌 출신 후계 농업인 육성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은 귀농자의 성공적인 안착을 넘어 한국 농업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청년농업창업지원 등 현제도를 보다 강화하여 경북을 가장 매력적인 귀농처로 만들어나간다. 

공약 14. 마을공동체 일자리 창출

곤궁한 농촌의 삶은 오랜 세월 이어온 공동체의 풍부한 문화적 정서적 자원마저 고갈시키고 마을 공공의 일을 집행할 인적 자원마저 끊기게 만들었다. 도시 경로당은 식사 준비를 위한 인력을 고용할 여력이 있지만 농촌의 경로당은 인력의 부족으로 전통적 역할 체계도 붕괴된 상황에서 필요한 인력을 고용할 재정적 여유도 없다. 마을회관에 노인은 있어도 식사준비조차 할 사람이 없는 게 현실이다. 마을 공동체 일자리는 마을공동체의 유지 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담당할 사람을 공공적으로 공급해 주는 일이다. 마을사무장, 마을 복지사, 마을문화해설사, 마을경관 지킴이 등 무분별한 토목개발사업을 줄이고 대신 마을에 일자리를 지원하여 마을 공동체를 살려 살맛나는 경북의 농촌마을을 만들어 나간다.

공약 15. 반농업 반환경 시설 지역 설립 저지 및 기존 시설 규제 강화 및 철거

농촌이 도시의 쓰레기 장이 된지 오래다. 환경인식이 낮고 무책임한 지자체의 묵인과 방조아래 각종 산업폐기물 처리장을 포함해 반환경적 산업을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유치해 왔다. 반농업 반환경 시설의 설립을 저지하기 위한 법령을 정비하고 기존 시설의 경우 관리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폐쇄와 철거를 추진한다. 가장 대표적인 반농업 반환경 사업체의 표본으로 낙동강의 중금속 오염원인 영풍석포제련소는 즉각 폐쇄 및 철거 후 환경 복원 사업을 시행한다.


󰁶 농민복지강화

공약 16. 농부병 전문 병원 지정 및 치료 지원

평생을 농사에 종사해온 농부는 모두 농부병을 앓고 있다. 농민은 근골격제 질환을 숙명처럼 달고 다니면서도 사회적으로 직업병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이에 합당한 처우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농부병을 산업재해에 준하는 직업병으로 인정하고 치료를 위한 전문병원을 설립하거나 지정하여 농부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해야 한다. 치료 및 요양을 넘어 발생전단계부터 농부병의 예방교육과 건강관리를 지원한다, 

공약 17. 마을 정기순회병원운영(통증치료, 치과진료 등)

고령화된 농촌마을은 주민의 절반이상이 환자나 다름없다. 농부병은 물론 고령화로 인한 각종 질환에 시달리는 농촌 주민들은 불편한 교통 때문에 또한번 고통받는다. 정기적인 교통편이 있는 마을은 몇 되지 않고 걸어가기에는 거동이 불편하다. 마을 정기 순회 병원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여 만성병을 앓고 있는 농촌 주민에게 건강권을 찾아주는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마을정기순회병원은 주민을 찾아가는 보건소로 의료소외지역에 방치된 주민을 찾아 치료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

공약 18. 농민행복바우처 사업 도입

여성농업인 행복바우처 제도는 지자체간 편차와 낮은 지원금액 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농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성공적인 정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업의 성공적 정착에 힘입어 수혜대상을 전체 농민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농민의 사회문화적 소외는 심각한 수준이다. 영화, 음악, 공연 등 문화적 삶으로부터 소외된 농민에게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농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작은 지렛대가 될 것이다.

공약 19. 면별 마을복지지원센타 설립으로 복지행정의 전문성 강화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행정의 주민 통제적 성격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일선 행정의 관료주의는 주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복지 서비스를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다. 일반 행정의 하위 차원에서 진행되는 복지행정은 농촌의 특성에 맞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복지서비스의 전문성을 높이고 주민 밀착형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마을복지지원센타(CBSS-Community Base Support Service)를 육성 지원함으로써 주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노약자, 장애인 돌봄 및 돌돔 대상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케 한다. (전북 진안 사례) 

공약 20. 농작업, 주거, 이동 안정성 강화

농촌에 산다는 것은 그만치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농작업의 위험성은 일반 산업노동자의 두배에 달하고, 마을내 취약한 안전설비, 마을간 이동 과정의 위험성 등을 볼 때 안전사고의 사각지대가 바로 농촌이다. 가드레일 없는 농로에 경운기가 떨어져 농민이 다치는 일이 부지기수고, 마을간 이동시 차량과 농기게 충돌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고도 다반사다. 뱀 등 유해 동물에 의한 사고, 전기 등 전문지식이 없지만 생활상의 이유로 다뤄야 되는 위험요인, 허술한 축대 및 하천 등 자연 재해에 노출된 삶의 조건 등 도시에 비해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오고 있다. 따라서 농촌마을 종합 안전대책을 마련하여 농촌마을 주민도 도시민에 못지않은 수준의 안전한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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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회는 613지방선거를 맞아 봉화군수 후보를 초청해 농정토론회를 가졌다. 취지는 분명했다.  "군수라는 직위는 지방농정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인데 반해 그 선출과정은 토론을 통한 정책 및 후보 검정 없이 정파적이고 연고적인 투표행위에 좌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최소한 농정공약에 관한한 깜깜이 선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에 봉화군 농민회는 다가오는 613지방선거에 참가하는 봉화군수 후보를 한자리에 초청해 각 후보의 농정철학과 공약을 농민들과 토론할 기회를 마련해 농민 유권자에게 합리적인 후보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농업중심의 지자체인 봉화군에서 민선 6기에 이르도록 단 한번도 농민조직 주관의 군수후보초청 토론회가 열린 적이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관변의 수많은 농민 단체가 있긴하지만 누구하나 총대를 매지도 못했고 순수한 자치조직인 농민회는 무력했다. 후보자 역시 토론보다는 점조직 기반의 선거전략이 더 주효하다는 판단을 가졌던게 사실이다. 

4년전 민선 6기 선거를 맞을 때도 문제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이를 실행할 조직은 농민회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도 봉화군 농민회는 조직적 준비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경쟁후보없는 한나라당 군수 단독후보로 무투표 당선이라는 기괴한 상황으로 선거국면이 진행되면서 유권자는 지방자치단체 장의 선택권을 잃었고, 농민단체들 역시 단독 후보에 대한 검정을 진행할 의욕을 상실했다. 

이번 선거는 달랐다. 미리부터 고민했고 준비했다. 비록 농민회 자체 후보를 조직적으로 배출하고 지원하는 결정을 할 수있는 조직적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지만, 최소 실천인 농민회 중심의 후보 검증이나마 제대로 하고자 했다. 그렇게 시작한 군수후보초청 농정토론회 준비가 무르익어갈 무렵, 봉화군 농업회의소 주관의 동일한 토론회를 준비한다는 연락이 있었다. 28개의 단체가 가입해 있는 봉화군농업회의소 주관의 농정토론회라지만 봉화군농민회 입장에서는 '공정하고 공평하면서 진보적 아젠다를 다룰 수 있는' 농정 토론회를  할 수 있는 조직은 오직 우리 농민회뿐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농업회의소와 별개로 봉화군농민회 단독 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봉화군농어업회의소 주최 군수후보초청토론회 무산을 알리는 신문기사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152

우려했던대로 봉화군농어업회의소 주관의 토론회는 공정성을 문제삼는 후보측의 불참 등으로 토론회 당일에 무산되었다. 토론회 3일전에 장소와 일시가 결정되고 그때부터 각 후보에게 사전 질문지가 전달되고 지역 농민에게 홍보가 시작되었는데 더 중요하게는 토론회 추진 핵심인물들이 특정후보의 지지자라는 혐의가 무산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유무를 떠나 좁은 지역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셈이다. 결국 봉화군농민회 주관의 군수후보초청 농정토론회만이 봉화군 농민 유권자의 목소리를 군수후보들께 전달하고 그분들의 농정 공약과 철학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 되어버렸다.

선거토론회의 생명은 공정성에 있고 사실 유무를 떠나 오해의 소지 조차 사전에 차단해야한다는 입장에서 먼저 토론회 준비단위에서 지방의회 선거 출마자인 봉화군 농민회 임원들을 배제했다. 그리고 각 후보에게 준비진행상황을 알려가면서 봉화군농민회가 준비하는 농정토론회가 의심의 여지 없는 가장 공정한 장이 될 것이라는 점을 피력했고 후보가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봉화군농민회 주최 군수후보초청토론회 개최 알림 기사

http://www.anewsa.com/detail.php?number=1323391

그리고 드디어 6월 1일 봉화군 청소년 센타에서 유력한 두 봉화군수 후보를 모시고 토론회를 개최했다. 예상밖으로 많은 방청객이 청소년센타를 채웠고 일부 군민은 자리가 없어 서서 방청할수밖에 없었다. 350여석의 공간이다보니 중간에 들고 난 인원을 고려하면 약 500여명의 방청객이 참여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토론회 진행은 이전 정책의 평가나 상호비판 보다는 봉화군의 공통된 과제를 중심으로 두 후보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봉화농업의 미래를 위한 군민의 지혜를 모으는 생산적이고 협력적인 분위기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역동적인 토론을 위해서는 한정된 주제를 중심으로 입장 표명과 반박, 심층 질문과 추가 발언의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야했지만 지지자를 포함한 많은 방청객이 참여하고 선거방송같이 제어 장치도 없는 공개적인 장에서 자칫 발생할지도 모르는 격한 상황을 최대한 억제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봉화군에서는 처음있는 의미있는 토론회기 때문에 사실 내용적 완결성이나 흥미로움 보다는 안정적인 진행이 더 소중했다.

따라서 사전 질문 5개조차 첨예한 봉화군의 현안이지만 특정후보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방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공동의 지역 현안을 같이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시했고 토의 과정에서도 같은 취지의 맥락을 잡아나갔다.  기본소득을 위한 직불금제도 도입, 공장식축사 문제, 비합리적인 농업보조금 제도 개혁, 여성농민 지위향상, 농업인력부족 문제 해소책 등 5개의 사전 질문조차도 전현직에 따라 불리하거나 유리할 수 있는 방식을 최대한 배제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방청객 질문으로 친환경농업 육성방안과 영풍석포제련소 문제를 다뤘다. 자칫 축사와 영풍제련소 문제를 현직 군수에게 불리한 이슈로 느낄 수 있음을 고려했다. 영풍문제의 경우 발언 방청객이 안동시민이고 녹색당 사람이라는 점을 들어 일부 야유가 나왔지만 사실 특정후보에게 불리한 주제가 아니냐는 항의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영풍제련소 문제는 40년된 고질적인 문제고 특정후보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설득하여 주제는 살리고 발언자만 바꾸어 진행을 문제없이 이어갔다.   

이런 노력 덕분에 토론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편파성에 대한 문제제기나 진행상의 미숙, 내용적 미비에 대한 지적은 없었고 토론회를 개최한 봉화군농민회에 대한 격려와 지지만 쏱아졌다. 봉화군 농민회의 회원들은 이번 군수후보초청 농정 토론회를 개최한 것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느겼다. 지역사회내 농민회의 위상을 강화하는 성과는 신규회원 가입으로 드러났다. 

이번 613지방선거 봉화군수 후보 초청농정토론회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군수후보에게 농민이 농정을 묻는 봉화군 최초의 토론회가 되었다.

- 향후 군수후보는 자신의 농정 공약을 농민앞에서 제출하고 검증받아야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 봉화군농민회는 이해집단이 아니라 지역내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농민조직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 민선 7기에는 농업기본소득의 단초가 될 농업경영안정자금을 농가당 년 100만원씩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방만하고 낭비적이고 불공정한 농업보조금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후보들의 약속이 있었다. 

- 여성농민의 지위향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고 이를 위한 정책적 방안을 모색하기로 약속했다. 

-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후보들은 영풍석포제련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일부 인정했고, 한 후보로부터는 군민이 폐쇄를 원하면 군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발언을 받았다.

- 친환경 농업 육성, 동물복지 농장, 농촌일손부족 등의 주제(과제)에 대한 군수후보들의 인식을 높혔다.

- 무엇보다 다음 선거는 농민회 주관의 토론회가 필수가 될 것임을 군민과 정치 지망생에게 인식시켰다.

자화자찬이 심했다. 그래도 봉화군 농민회가 있어 모든게 가능했다. 동지들이 자랑스럽고 내 스스로가 봉화군농민회의 일원인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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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을 기다려온 네팔 여정 두달이 끝났다. 출국에 앞서 마지막 하루를 라트나 버스파크, 파탄, 그리고 카트만두 최고의 번화가 더바마그를 걷고 2월 26일 출국 당일 아침 일찍 다시 한번 더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다. 오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쿤밍과 상하이를 거쳐 2월 27일 저녁 늦게 인천에 도착했다.  

 

 

2월 25일 출국에 앞서 남은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며 눈을 떴다. 즉흥적으로 카트만두 북쪽의 Shivpuri Nagarjun National Park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하루는 숲길을 걷고 싶었다. 무작정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대학가를 지났고 각종 정치구호가 담벼락에 그려져있고 적기가 휘날리는 대학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네팔청년들의 역동성과 기개가 느껴졌다. 라트나 버스파티에 도착했지만 나가르준행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몇번을 묻고 헤메다 꼭 나가르준을 가야할 이유도 없어 발을 돌려 택시를 잡아 타고 파탄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파탄 드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주로 외곽을 걸었다.  발길이 닿는데로 파탄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예식이 진행중인 힌두사원을 들러 향과 연기에 취해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다시 주택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겨 네팔리의 삶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몰려가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등교하는 학생이 되었다가, 일없이 길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여인들을 보면 나도 심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한 사람의 방랑자가 되었다. 일터를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평범한 네팔리 노동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네팔리의 삶을 닮아갔다.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빠릿빠릿 바쁘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이라는 강박에 쫒겨온 인생 50년을 되돌아 보고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인지 더 가치있는 삶인지 곱씹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일도 만남도 없는 그런 공백을 내 일상에 주기적으로 배치하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다.

 

버스를 타고 라트나로 돌아와서 더바마그 거리로 향했다.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들이 즐비한 카트만두의 가장 현대적 거리의 풍경은 한국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옷가게로 들어가고 나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녹아들었다. 쇼핑백을 들고 나온 아내와 한국 도시의 어느 쇼핑가를 걷는듯 우리는 여행객스러워졌고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나라야니티 왕궁박물관을 지나고 꿈의 정원을 스쳐 타멜거리를 찾았다. 네팔을 떠나기전 사라진 식욕을 찾고 기운을 되찾아 줄 마지막 성찬을 찾아 헤멘끝에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날 저녁 식사는 네팔 여정 최악의 음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타멜거리에서 아쉬운 카트만두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남루한 여정이 저문다. 내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일탈이었을 두달의 네팔 체류가 마지막 밤을 남기고 있다. 가슴 뜨겁고 벅찬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난 벌써 봄볕아래 새로운 여정의 단꿈에 빠져든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은 모두가 여행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물고 가지고 집착하지 않고 그저 인생은 잠시 스쳐가는 여정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혹독한 히말라야의 가난 속에서도 뭍 생명에게 손을 내밀고,  지진으로 무너진 벽돌더미위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네팔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번 여정은 어떻게 정리되어야하나 잠시 발을 멈추지만 나의 여정은 내일 또다시 쿤밍으로 상하이로 인천으로 그리고 봉화로 이어질 것 임을 깨닫는다. 나는 여행 중에 히말라야를 들렀고 다시 여행이 한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주어진 시간을 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지만 여행이 끝나는 그때까지 나는 나의 몸에 집중하고 내 몸과 마음이 가는데로 나를 맡기고 싶다.

 

2월 26일 드디어 네팔을 떠나야되는 날이 밝았다. 다행히 몸 상태는 조금 나아졌다. 아직 식욕도 없고 먹고난뒤 소화를 확신할 수 없어 배는 고프지만 아침을 건너뛰었다. 쿤밍가면 맛난 음식을 만날지 모르다는 기대로 대신했다. 익숙한 수어러꾸떼 골목을 나와 스와얌부나트로 향했다.  숙소 마야거르츄와 닿아있는 일종의 예능고등학교인 Star High School의 담벼락에도 인사를 전하고 그동안 거의 매일 지나치던 고깃간에 묶여있던 죽어간 염소들에게도 명복을 빌었다. 골목끝에 방치되어 있는 지난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부지를 지키며 남아있는 한그루의 정원수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한발한발 기억을 되새기고 얼굴을 스치는 카트만두의 바람에게도 안부를 남겼다. 도착한 스와얌부나트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기 시작했고 사원앞 공터에는 각지각색의 야채를 진열한 노점상이 삶의 온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나는 탐욕스레 모든 것을 눈에 담았지만 곧 흐려지고 잊혀질 풍경임을 알기에 마음이 아렸다. 스와얌부나트의 진짜 주인인 원숭이들에게도 작별인사를 남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리들이 즐겨찾는 스넥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공복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전한 기분을 네팔의 음식으로 달래고 숙소로 돌아가 두달을 지고 이고 다닌 짐을 챙겼다. 먹고 소비하고 준 그만치 새로운 것들로 채워진 배낭은 여전히 배가 불렀다. 택시로 도착한 트리뷰반공항은 나름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친절해졌고 대합실도 5년전에 비해 좋아져 있었다. 비행기는 예정시간 한시간을 넘겨 출발했다. 지난 두달 동안 나의 삶이 있었던 네팔의 산하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네팔의 산하가 그리고 맺었던 모든 인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쿤밍에서 환승에 문제가 생겼다. 공항청사에서 어슬렁 거리다 체크인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이미 마감한 게이트를 열고 우리를 입장 시켜줬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올라 탄 비행기는 끝내 이륙하지 못했다. 거의 한시간을 비행기에 같혀 지체한 뒤에 기체고장이라며 대체기로 갈아탈 것을 요구했다. 결국 상해에서 인천가는 연결편의 출발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런데 웬걸! 상해에 도착해보니 우리를 싣고갈 인천행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역시 연착이나 결항이 잣다는 동방항공이지만 그만치 스케줄 조정이 유연한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승객들은 상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팻말을 든 항공사 직원을 따라 숨차게 뛰어가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고 예상시간보다 많이 늦긴했지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쿤밍으로, 쿤밍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30시간의 귀향길 끝에 두달동안 그리워하던 딸을 안았다.

  

 

이번 네팔 여정에서 나는 많은 네팔의 변화를 읽었다. 계곡에는 댐이 들어서고, 카트만두에는 수도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에는 정전이 사라졌고 도시의 쓰레기는 눈에 띄이게 줄었다. 거리에는 손을 벌리던 거지 아이들도 만날 수 없었고 네팔리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늘었다. 그리고 카트만두 낙후성의 상징이다시피한  바그마티강은 정화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의 변화를 더 읽고 싶었다.  나이를 먹었고, 체력은 그만치 줄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평생을 키워온 '화'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세상에 보다 관대해지고, 이미 늦었기에 조바심도 버린 나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은 쏘롱라에도 깔리간다키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의 계획을 가슴에 품는다. 그때는 지금의  딱 절반의 속도로, 꼭 네팔 어딘가에 있을 보고싶은 나를 찾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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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보낸 첫 삼일은 휴식의 시간이었다면 마지막 4일은 지난 두달의 여행을 되돌아보고 기억의 창고 한켠에 차곡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타멜거리를 또박또박 걸으며 곧 떠나게될 네팔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추스리고 귀국한뒤 새로 시작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마치고 먼지투성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뒤 가벼운 몸살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하루하루 아무 망설임없이 카트만두로 돌아온 지난 몇일을 알차고 신나게 보냈다. 숙소와 타멜 거리를 오가고 스와얌부나트와 더바르광장, 그리고 아산바자르의 골목을 누볐다. 타멜 최고의 슈퍼마켓인 Shop Right Supermarket과 Pilgrims Book house도 들락날락거리며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Pilgrims Book house는 서점이지만 동시에 머플러나 직물제품을 비롯한 각종 기념품을 갖추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체류한지 몇일이 지나자 나는 골목 구멍가게에서 야채를 사고 내가 필요한 물품을 어디를 가야 구할 수 있는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이 카트만두 시민이 다 되어감을 느꼈다. 

22일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빈둥거렸다. 일단 몸살기를 가라앉힌뒤 움직이는 것이 낮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일행들과 같이 숙소를 나서서 타멜을 거쳐 다시 스몰스타를 찾았다. 뚱바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남은 네팔에서의 시간이 아까워서 저녁시간을 숙소에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한 표정의 종업원이 날라다 주는 안주와 뚱바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지만 몸은 이미 술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지쳐있었다. 뚱바 한잔에 복통과 현기증에 오한까지 왔다. 겨우겨우 몸을 추스러 숙소로 돌아왔지만 몸살은 더 심해져있었다. 이날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이번 두달의 네팔 여행중에 꼭 카트만두에서 탈이 났다. 여행 초기에 식중독으로 고생하더니 여행 막바지에 다시 심한 몸살까지 앓게 되었다. 카트만두 먼지에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산체질인 것 같았다. 몸이 무너지니 한국이 그리워졌다. 이제 돌아가도 미련이 없을 만치 걷고 먹고, 만나고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3일 몸살에 지친 몸을 이끌고 타멜로 나섰다. 네팔 고유 브랜드라는 가게에서 티도 사고 재래식 옷가게에서 네팔리 스타일의 편안한 일상복도 한벌 샀다. 발길을 옮겨 타멜의 남쪽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데 군악대의 연주소리가 들렸다. 음악 소리를 찾아 도착한 곳에선 거리의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부유한 집안의 혼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으로 장식한 차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나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로 다가왔다. 여행이 끝나감에 따라 몸도 지치고 나도 모르게 조금은 우울해지기 시작했는데 악단의 연주를 보고 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갑자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다 빠져 나가 버린 기운이 다시 돌아오고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훈풍에 구름이 가쉬듯 나는 두달여정을 3일 남겨두고 내 자신에게 삶의 에너지가 충만해져옴을 느꼈다. 조금은 낡은 제복을 입은 단원들의 진지하고 신명이 넘치는 연주는 엉뚱하게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초라할지언정 진지함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신나게 살자'고 읊조리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 산책을 끝내고 5년전 추억이 깃든 꿈의 정원을 찾았다. [Garden of Dream]은 타멜쵸크에서 나라얀히티 왕궁박물관쪽으로 가는 길 왼편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오래전 개인이 꾸민 저택과 정원이 우여곡절 끝에 공공의 소유가 되고 다시 시민의 휴식처로 개방된 유료 정원이 되었다. 역시 산책중인 외국인 관광객은 몇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이트중인 네팔리 청춘들이었다. 그래도 화구를 펼쳐놓고 작업중인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멋졌다. 우리는 정원 산책 끝에 내부에서 운영중인 레스트랑의 가장 좋은 야외 테이블을 차지했고 아내는 펜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카트만두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카트만두의 소음과 먼지와 단절된 이색적인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아내와 나는 지난 여정의 추억을 음미했다. 이만치면 되었다는 안도감 혹은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으면 마르샹디와 깔리깐다키 줄기가 어른거리고 설산에서 피어나는 흰구름처럼 뭉개뭉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모든 걸 버리고 줄여야될 나이에 자꾸 그리움이 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내일이면 라오스로 떠날 팟상을 위한 삼겹살파티가 열렸다. 네팔을 같이 사랑하고 같은 숙소에 지내는 인연을 나눈 분들과 함께 자리를 했지만 나는 술한잔에 나가 떨어져 룸으로 올라와 침대로 기어들었다. 낮에 살아났던 몸이 밤이 되자 다시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게 다음 날이 시바신의 탄신일로 시바라티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룸의 창문을 흔드는 축포소리와  상공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가 카트만두의 밤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2월 24일 시바라티축제가 있는날 팟상은 라오스로, 나의 일행 M과 D는 한국으로 떠났다. 갑자기 마야거르추에 정적이 감돌았다. 원래 여행은 이렇게 좀 쓸쓸해야하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닥친 공복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바라티축제가 열리는 파슈파티나트로 가기 위해 숙소를 박차고 나왔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한무리의 아이들이 줄로 길을 막고 우리가 지나가자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당황했는데 이날 하루 종일 걷다보니 이런 아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시바 탄신일 날에만 허용되는 일종의 전래놀이로 아이들이 길을 막고 어른들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일년 365일중 이날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골목이 우리들의 것임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골목을 지키는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오토바이든 택시든 마구잡이로 단속(!)했고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져주는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는 우리도 가게에 들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잔돈을 한주먹 바꾸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큰길로 나서니 공휴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쉽게 택시를 잡고 축제가 열리는 퍄슈파니나트로 갈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비싼 흥정끝에 택시는 곡예하듯 대로를 피해 골목과 골목을 이어달렸지만 끝내 파슈파티나트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적지의 절반을 겨우 넘겨 군경에 의해 교통은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고 파슈파티나트로 향하는 모든 길은 차없는 거리로 축제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택시비는 출발전에 흥정한 데로 다 받아갔고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네팔리 무리에 휩쓸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하늘에는 헬기들이 축하 현수막을 늘어트리고 비행 중이고 파슈파티나트가 가까워질수록 인파는 불어났다. 역시나 경찰들의 거친 단속이 눈쌀을 찌푸리게 했지만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도 전국에서 다 모여든 것처럼 엄청난 수로 늘어났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네팔은 물론 멀리 인도서까지 모여들었다는 사두들의 무리도 보이기 시작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순례객들의 차림을 보니 그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저절로 느껴졌다. 많은 순례객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한듯 집채만한 이불보따리를 길가에 쌓아두고 있었다. 시바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위해 노숙도 마다않고 먼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날 비힌두교도에게는 파슈파티나트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파슈파티나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까지만 네팔리 무리에 섞여 축제를 즐기고 되돌아섰다. 축제장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걸어 그나마 인파가 적은 가게를 찾아 네팔식 스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걷다보니 카트만두 최초의 대형 수퍼마켓이라는 Bhat Bhateni에 들러게 되었다. 구경도 하고 장을 보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식욕이 있고 출국일이 좀 더 남았다면 바구니 가득 장을 봐서 맛난 요리를 싣컷 해 먹고 싶었지만 조금 샀던 식재료도 결국 다 못해먹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네팔에서의 마지막 장을 보고 숙소에서 하루의 남은 시간을 조리와 식사 그리고 휴식으로 보내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 귀국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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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이라는 긴 휴식을 취하고 2월 26일 동방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나고 보니 카트만두에서 보낸 정확히 8일동안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비록 짧지만 '머물고 생활하기'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카트만두 도착후 마야거르츄는 우리의 숙소를 넘어 하나의 생활 거점이 되었다. 인근 가게에서 야채와 기타 식재료를 사서 조리를 해서 나누어 먹고, 심심해지면 수어러꾸떼 골목길을 통해 여행자의 거리인 타멜로 나와 하루종일 어슬렁 거렸다. 타멜은 여전했다. 비시즌이라서 덜 분빈다고는 했지만 전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트레커들이 골목을 휩쓸고 다녔고 더 많은 네팔리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몰려들어 늘 활기가 넘쳤다. 타멜의 끝에 붙어있는 대형 시장인 아산바자르는 온갖 물품과 이를 찾는 네팔리의 발길로 분주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이 마냥 시장을 지나는 네팔리들에 묻혀 아산바자르를 지날 때는 나 역시 무슨 절실한 것을 찾아 시장을 헤메는듯 삶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숙소룸의 전등이 어두워 책을 보기가 힘들어 19일은 보조랜턴을 사러 타멜의 몇몇 등산용품점을 들락거린뒤 마음에는 들지만 비싸서 망설여지는 앙징맞은 블랙 다이아몬드 LED등을 2800루피에 구입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에 몇몇 골동품가게에 들러 작은 기념품 몇개를 구입했다. 일행 D는 싱잉벨이라는 울림소리가 신비로운 청동그릇을 여러 가게에서 여러개를 구입했다. 값도 값이지만 무게가 부담스러워 나는 싱잉벨대신에 주로 나무 목각을 구입했다. 토템인듯 귀신같은 토속적인 인형들은 인상적이지만 집에 가져가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여 주로 동물형상의 목각을 구입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작은 말모양의 청동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딸에게 선물해 줄까 망설였는데 결국 크기나 형태에 비해 비싼 5-6만원하는 청동상을 구입하지 못했다. 한참 국내에서 최순실이 자신의 딸에게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을 동원해 말을 뇌물로 받아 챙겨주는 알뜰한 모정이 뉴스로  흘러나오는 때에 나는 5-6만원하는 말 조각 청동상 하나 딸에게 사주기가 부담스러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낸지 모르게 카트만두에도 밤이 왔다. 벌써 여러번 들렀고 이날도 같은 거리를 몇번을 왔다갔다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종일 타멜거리를 헤멘셈인데 그래도 복잡한 타멜의 골목을 다 파악할 수 없었다. 아산바자르와 왕궁 그리고 더바르광장 같은 대표적인 장소로 이동하는 동선 정도를 겨우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타멜의 대표적인 한식당인 '한국사랑'에서 부대찌게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국사랑에는 짐작과는 달리 한국여행객보다 훨씬 많은 네팔리 손님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추억의 한국음식을 찾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을 동경하는  젊은 친구들이 몰려온건지도 몰랐다.

 

 

2월 20일의 아침은 일찍 맞았다. 식전에 숙소를 나와 스와얌부를 향해 걸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주택가골목을 이른 출근을 하는 네팔리와 나란히 걸었다. M은 전날도 이른 아침에 스와얌부나트를 다녀왔는데 이날도 같이 동행했다. 숙소가 있는 수어러꾸데에서 스와얌부너트까지는  30~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와얌부나트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 Monkeys Temple이라고도 불리는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사원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전설이 이어져오고 있는 여행자들의 필수적인 방문처다. 불교사원이라고는 하지만 힌두신앙을 나타내는 다양한 장식과 시설이 공존하며 사원을 뒤덮은 향과 촛불, 끝없이 이어지는 신도들의 참례행렬, 그리고 카트만두 시내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이 카트만두 방문객이면 꼭 찾아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우리 역시 다른 곳은 한번 방문으로 끝냈지만 스와얌부나트는 이날을 포함해 여러번 찾았다.

 

 

사원은 다행히 지난 2015년 지진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무너진 부속건물을 비롯해 피해의 흔적은 아직 여기저기 늘려있었지만 스와얌부나트의 상징적 건물인 스튜파는 의젓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참배객들과 함께 똑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의 평화와 모든 고통받는 존재의 평온을 빌며 덤으로 우리 자신의 삶이 좀더 알차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사원의 입구 오른편에는 신도들이 모여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예불소리가 너무나 절실하게 마음에 녹아들어 우리는 걸음을 멈첬다.  한참을 예불을 들은뒤 발길을 돌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올라갈 때와는 달라있었다. 

사원아래 식당가에서 네팔 전통 빵들로 아침을 해결했다. 참배온 네팔리 할머니들과 같은 빵들을 주문했는데 모양도 재미있고 값도 쌌지만 맛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싱잉벨을 직접 만드는 가게에 들러 일행 D는 싱잉벨을 구입하고, 우리는 숙소 거의 다와서 이전에 박타푸르 왕만 먹었다는 요플레인 주주더히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주더히는 토기그릇에 담겨져 아침 일찍 몇몇 대리점같은 가게에만 배달이 되어오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 외에는 살 수가 없었다.  다 먹고 남은 토기만 남다보니 주주더히를 담았던 토기가 마야거르츄 마당 한컷에 켜켜히 쌓여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같이 했던 가이드 바수가 숙소를 찾아왔다. 한번 이야기가 있었던 자신의 고향집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카드만두 북쪽에 있는 나가르준 어딘가가 자신의 고향집이고 그곳에서 부모님이 물고기를 기르고 있는데 같이 농장도 체험하고 물고기도 잡아 먹고 놀자고 제안했다. 딱히 다른 일정이 없어 같이할까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반기질 않았고 특히 바수의 술버릇때문에 마음 편히 따라갈 수 없는 눈치라서 포기했다. 바수는 상당히 서운해 하는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대신에 수어러꾸떼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조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뒤 밤이 되자 네팔 전통주인 뚱빠로 유명한 스몰스타를 찾아 한잔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2월 21일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일정이나 목적지가 없는 하루였다. 이날 오후에 출국한다며 네팔의 특산물인 야크치즈를 사러가는 분들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10여분 걸어서 정부가 운영한다는 유제품 공장인  DDC Dairy Ltd.  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은 했지만 의사소통의 부족으로 공장 사무실로 들어가 치즈를 요구하자 담당이 외출중이라며 한참을 기다리게 했는데 마침내 담당은 돌아왔지만 치즈 판매는 공장내의 다른 매장에서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제법 많은 양의 야크치즈를 사서 숙소로 돌아온 뒤 다시 일행과 함께 숙소를 나서 두바르 광장을 향했다. 타멜을 지나면서 헝겊으로 만든 작은 브로치같은 값싸고 실용적인 선물을 사고 딸을 위한 인형도 같이 구입했다. 그리고 타멜의 길고 복잡한 골목을 통해 두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두바르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멀리서 보아도 지진의 피해가 심각해 보였다. 지진으로 심각하게 무너지고 파손된 두바르광장이지만 입장료는 1000루피 그대로였다. 4명의 일행이 4만원 가량의 돈을 내고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구석도 있고, 굳이 두바르 광장을 봐야할 이유도 없어 걸음을 돌렸다.

두바르광장을 비켜선 우리의 걸음은 정처없이 이어졌다. 타멜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의 거리를 벗어나 네팔리들의 삶의 터전인 카트만두의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있고,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종교적 상징물이 늘려있고 한 블록을 벗어나기 전에 꼭 규모를 갖춘 힌두사원을 만났다.  보여주기위한 박제화된 공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네팔리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발길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스와얌부나트를 가기 위해 건너야했던 바그마티강의 지류인 비슈누마티강에 이르렀다. 강을 따라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우리의 출발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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