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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찦차를 대절해 갈리수와르를 출발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포카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티벳 난민촌 등 포카라를 둘러보고, 2월18일 자가담바 버스를 타고 근 한달만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갈리수와르의 아침이 밝아오자 전날 갑론을박 끝에 예약한 짚차가 도착했다. 베니와 바글룽을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랙이 시작되는 나야풀을 지나 포카라까지 우리를 싣어줄 찦차는 출발했다. 대절비는 6000루피로 정했다. 짚차는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베니라는 도시에 진입했다.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는 베니는 역시 넓은 버스파크에 많은 차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찦은 무슨 이유에선지 바로 갈 길로 들어서지 않고 베니 시내로 들어가 몇 곳을 들러 짐을 싣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지만 베니로 돌아오는 손님을 싣을 수 있다고 새벽 출발을 종용하던 가이드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마도 기사는 포카라로 가는 김에 지인들의 소소한 부탁을 받아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차를 대절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클레임을 걸 수있는 상황인데도 기사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가이드의 상황설명도 없었다. 네팔이기 때문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기사가 매너가 없다거나 부당하게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네팔사람들은 참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네팔리들은 우리를 기다리게 했지만 자신들도 아무 꺼리낌 없이 늘 웃으면서 남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베니에 대한 인상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칼리간다끼를 건넌 찦은 달리기 시작했다. 베니를 출발한 뒤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30여분을 달렸을까, 차는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벗어나 우회전을 해서 다리를 건너 다시 우회전을 해서 바글룽으로 향했다. 바글룽 역시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방문하게 된 도시다.  가이드는 흰두사원을 추천했고 나는 덧붙여 바글룽 시가지를 차로 한바퀴 돌아 겉할기라도 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바글룽 사원은 오전 특정시간까지만 비흰두인에게 개방되기때문에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된다고 갈리수와르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베니를 떠나 바글룽으로 향하는 중에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베니에서 찦의 기사가 시간을 허비할 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흰두교도에게는 이른 아침에만 개방된다는 가이드의 설명과 무관하게 사원의 문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전에 닥신칼리의 사원과 전날 갈리수와르에 이어 바글룽의 Kalika Bhagwati Temple은 세번째 방문한 흰두사원이었다. 흰두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들른 흰두 사원은 붉은색 장식이 많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감이지만 무서운 신상이 많고 특히 염소 등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 흔적을 볼 때는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는 많은 종교가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물로 대체되다가 마지막에는 돈이 제물을 대신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힌두교는 아마도 동물을 번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힌두교가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이고 풍부한 종교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아직 산 동물을 재물로 바치는 의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 날도 애초로운 눈빛으로 울어대던 어린 염소가 가차없이 목이 잘리고 그 피를 뿌리는 제례가 진행되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3힌두사원중 가장 오래 머물며 꼼꼼이 둘러보고 줄을 서서 이마에 티카를 찍고 예배까지 올렸다.        

 

바글룽 시내를 한바퀴 돈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스쳐 지나가기에 아쉬워 찦을 내려 음료수를 사서 한병씩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차는 바로 바글룽을 나와 강을 건너고 조금 전 벗어났던 바글룽-포카라 하이웨이를 다시 올라탔다. 편한 길을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고 어디라도 내려서 걸어도 좋을 아름다운 풍경 속을 차는 달렸다.  풍경 하나하나가 그냥 스쳐지나가 내 기억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아쉬움을 넘어 슬프게 느껴졌다. 어떤 장소 어떤 순간에도 머물 수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는 섭리가 애닯펐다.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끝나가는 시간 아쉬움과 서글픔이 내 마음에 차올랐다.

 

이미 익숙해진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코스의 출발점인 나야풀을 지나 길가 식당에 차를 세운뒤 기사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식당안으로 사라졌다. 네팔사람들은 아침겸 점심을 오전 10시경 먹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안나푸르나 라운드가 완전히 끝내기 직전 차를 내려 네팔의 산과 들, 안나푸르나 기슭의 삶의 터전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아름답게 지켜온 네팔리들의 삶의 온기와 긍지를 안나푸르나를 통해 다시금 반추했다.  

 

근 40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그동안 카트만두 인근 도시를 주유하고 안나푸르나를 한바퀴 돌았다. 다시 돌아온 포카라는 초록이 더 짙어졌고, 날은 더 더워져 있었다. 두 가이드와 4명의 트레커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고 바수에게 약속했던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가이드하고는 카트만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숙소를 찾아 잠깐 거리를 헤멘뒤 이쁜 정원이 달린 값싼 숙소에 짐을 풀었다. 온수가 나오고 와이파이가 되면서 이쁜 정원이 딸린 [Hotel Elia]에서 하루에 1000루피, 우리 돈으로 만원정도에 방을 얻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설이였고, 여행자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에 접해있으면서도 조금은 덜 번잡한 거리여서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자마자 M과 나는 호텔을 나서서 이발소를 들렀다. 바로 호텔과 붙어있는 작은 이발관이었다.  한국 떠난뒤 거의 두달만에  산적머리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깔끔해지고 싶었다. "Only hair cut, please!"를 외치고 비몽사몽간에 이발을 마치자 "Ok!"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이발사는 컷트비, 안면 마사지비, 안마비, 두피마사지비, 세발비 등등을 붙여 무려 두사람 이발비로 6000루피 가량을 요구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고 나왔는데, 혼자서 쇼핑 갖다가 뒤늦게 이발소를 들렀던 D역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왔다. 우리는 이날 포카라판  "3얼간이"를 찍었다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그날 이후 포카라를 떠날 때까지 몇번을 더 마주친 이발사는 우리에게 반가운 인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그를 마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은데 그 이발사에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이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낮술'에서 저녁을 먹으며 포카라의 밤을 맞았다. 

 

2월 17일 아침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뒤, 와이프는 호텔에서 스케치나 하면서 쉬겠다고 남고, 남자 3명이서 Tashi Palkhel  티벳 난민촌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할란촉'에서 '제로킬로미터'라는 지명의 교차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전날 포카라로 돌아올때 달렸던 길을 바글룽 쪽으로 되돌아갔다. 버스가 포카라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에 왼쪽 언덕위에 룽다와 타르초가 휘날렸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사는 타시팔켈 티벳난민촌에 도착했다. 같은 몽골계라서 그런지 티벳탄을 만날 때 마다 꼭 어릴 때 동네에서 부댓기며 살아가던 이웃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절의 이웃 아저씨나 삼촌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타시 팔켈 티벳난민촌은 조용했다. 골목을 뒤덮은 고요와 한적함이 현실감을 줄였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어린시절로 되돌아온듯 몽롱했다. 골동품가게가 있고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있었지만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을을 돌기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물소고기를 듬뿍 넣은 뚝바를 먹으며 삶의 현실감을 되찾았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마을입구에 있는 골동품 가게를 들러 작은 기념품을 사고 D로부터 멋진 골동품 주전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소유의 덪없음을 깨우쳐주는 사찰입구에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캠프촌과 사원 그리고 멀리 포카라 변두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 뷰포인트까지 올랐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사랑곳에서 짚라인이 이어지는 "Hemja 번지점프"를 지나 또다른 불교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확장 공사중이었고 아마도 승려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선 사람이 들고 나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무경계심이 불교의 탓인지 네팔리의 심성  탓인지는 알수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가는 곳마다 네팔리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티벳 불교 사원과 고향을 떠난 이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난민촌 골목길을 걷던 3명의 일행은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길을 잃었고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나는 M과 만났지만 결국 D는 합류하지 못했다. 리버사이드로 돌아오가는 버스라고 올랐지만 몇정거장 못가서 내리게 되고 다시 한참을 걸어 '제로킬로미터'라는 거리에 가서야 겨우 리버사이드를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혹시 한국인이냐며 물어온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네팔리를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돌아온 호텔에 길잃은 D 마저 돌아오자 지난 달 친구들과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 신세졌던 가이드 라마님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만나 나는 늘 궁금한 것이 많은 네팔의 삶에 대해 물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로 오래 근무한 적이 있는 라마는 늘 한국의 삶과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았다. 지난 여정을 함께한 모두 '산마루식당'에 둘러 앉아 행복한 포카라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전날 라마를 통해 예약해둔 자가담바 버스를 타기위해 짐을 끌고 할란촉으로 나갔다. 7시에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지고다니며 이른 출근객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파는 거리의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자니 예정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버스는 도착했다. 그나마 안도하며 버스에 올라 조용히 창가를 통해 물러나는 포카라의 거리를, 리버사이드와 댐사이드의 지난 여정의 흔적을 드듬었다.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버릴 포카라에서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버스는 포카라-카트만두간 프리씨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을 쓰쳐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가슴시린 사진마냥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의 뇌리에 쌓여갔다.  

 

 

돌아온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는 여전했다. 내일이면 산으로 떠난다는 사람들이 있고. 아침에 산으로 떠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슬그머니 마야거르츄의 원주민인양 스며들어 그들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야거르츄를 들러고 그리고 안나푸르나나 랑탕, 그리고 히말라야를 거친뒤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 다시 머문뒤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야거르츄에 돌아왔지만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음을 애써  자각하지 못한듯 안타까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채 편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카트만두의 첫날도 타멜거리로 나갔다.  특별히 할 일도 목적지도 없이 타멜의 거리를 걷고 이런 저런 가게를 들러  기념품을 샀지만 네팔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서점인 pilgrim bookstore에서 두권의 책과 몇가지 기념품을 샀다. 여정이 끝나고 귀국하고 나면  네팔의 마오주의 혁명사를 다룬 [The Bullet and The Ballot Box]와 네팔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The History of Nepal]을 틈틈히 읽으며 네팔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을 반추할 것이다. 저녁은 타멜거리의 블랙올리브에서 성찬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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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가사를 출발하여 먼지투성이 찻길을 따라 걸어 다나에서 점심을 먹고 따또파니에서 하루의 여정을 멈추었다. 2월 15일 드디어 걸음을 마무리하고 버스로 따또파니를 출발하여 Galeshwor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을 탐방하고 흰두사원을 참배했다.  

 

가사의 플로리다롯지를 나설 때까지 어제 저녁의 산불은 이어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불길이 치솟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느린 걸음으로 위로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강의 동쪽에 형성된 오솔길을 통해 걸어가고 싶었지만 산불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의 서쪽에 만들어진 찻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고도가 낮아지고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찻길은 넓어지고 그만치 지나는 차의 수도 늘어갔다.  어떻게든 먼지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한 찻길을 벗어나 산길을 선택해 걷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찻길로 내려와 먼지를 뒤집어 쓰야하는 구간이 늘어났다. 

 

가사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열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길가에 바나나나무가 늘어섰고, 수확이 끝나가는 오렌지과수원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유채꽃은 막 노랑 꽃순을 터트렸고, 복숭아와 자두 끛은 만발했다. 부지런한 들꽃은 이미 지기 시작했고 배낭을 짊어진 등짝에는 땀이 흘렀다. 땀에 젖고 더위에 지쳐갈 무렵 Rupse Chhahara(아름다운 폭포)가 나왔다. 길 오른쪽으로 폭포가 올려다 보였지만 물이 줄어 볼폼은 없었다. 차라리 길 왼편 강쪽으로 "세계에서 제일 깊은 계곡"이라는 간판이 있었고 따라가 보니 계곡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서 보는 깊게 패인 강줄기의 계곡이 더 멋있었다. 

 

Rupse Chhahara를 지나 Dana에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온몸으로 음식을 가려야하는 먼지 투성이 길가 식당에서 달밧을 먹었다. 기후가 온화한 지역까지 내려온데다 주변에 푸성귀도 많이 키우고 있어 잔뜩 기대했는데 달밧에는 야채로 만든 떠꺼리 반찬이 빠져 있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점심을 먹고 다시 먼지 날리는 무미건조한 길을 나섰다. 다행히 얼마가지 않아 강을 건너고 차와 먼지가 없는 마을길로 접어들었고 네팔리의 삶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들을 지났다. 아이들이 한참 공놀이 중인 학교를 지나고 돌담에 붉은 꽃기린 꽃과 가시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났다.    

 

 

하루 여정을 마무리할 따토파니에 오후 3시반 즈음 도착했다. Old Kamala라는 롯지에 짐을 풀었다. 따토파니는 우리가 두발로 이어오던 여정을 멈추고 오랫동안 잊었던 차로 남은 여정을 이어갈 곳이었다. 트레킹 종료를 축하하는 백숙을 주문해놓고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기고 "따뜻한 물"을 의미하는 마을이름 그대로 따토파니를 향했다.  따토파니의 야외온천은 역시나 기대 이하였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구간에서 만났던 지누단다보다 접근성은 좋았으나 한적함이나 밀림속에 숨어있는 은밀함이 주는 신비함이 없었다개방적이고 번잡한 시골장터같은 개방성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비쩍마른 맨몸을 다중앞에 드러내야하는 곤혹스러움에 한참을 망설이다 옷을 벗었다

기대 이하의 수온에 물이끼와 오물이 둥둥 떠다니는 따토파니에 몸을 담구었다그래도 도시를 떠나온지 처음 잠겨보는 온수를 몸은 반긴다좀더 나아보이는 옆탕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집결해있어 차라리 호젖함을 선택해 덜 따뜻하고 지저분하지만 사람이 적은 탕을 선택했다네팔리 주민들도 상당히 많아보이고 트레킹 중에는 만나지 못했던 젊은 서양트레커도 10여명이 넘어보였다트레킹도중에 만났던 다 큰 서양아가씨가 팬티차림으로 아는 채를 하고 인사를 건넸다서양인들은 자신의 몸에대한 의식이 우리와는 참 다른 것 같았다. 저렇게 세상에 대해 당당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는 태도가 참 부러웠다.

먼저 탕에 들어간 가이드 바수는 온천에 붙은 가게에서 맥주부터 찾았다. 주문해 둔 닭백숙에 반주라도 한잔할 생각이었는데 가이드 바수의 술주정이 걱정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롯지에는 수학여행 왔는지 학생들이 롯지의 1층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이 일러 따토파니의 골목을 돌다가 롯지의 별관같은 다이닝 룸에서 저녁을 멋었다. 주문해 둔 백숙이 나왔지만 그저그랬다. 조금 먹다보니 동닭울 덜 삶아 안쪽은 아직 다 익지도 않았다. 닭은 다시 물린뒤 한참 야심한 시간에야 본격적으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찬이 없는 백숙을 먹기가 곤혹스러워 네팔 김치인  아짜르를 요구했다. 무짠지같은 '물러아짜르'가 나와서 그나마 덜 느끼하게 솥을 비웠다딱 한잔이 아쉬웠지만 알콜릭인 바수가 신경쓰여 아예 술없는 백숙잔치가 되어버렸다고객이 고용한 가이드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기가찼다.

 

식사중에 다음 일정을 협의해서 나브라즈가 제안한 바글룽 쪽으로 마음을 굳히자 바수가 반발했다. 바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고라파니로 일정을 고집했다. 초기 일정으로 한달전 다녀온 고라파니를 나는 다시 갈 이유가 없었다. 바수는 자신의 의견이 통하지않자 얹짢아하는 기색으로 자신은 포카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카트만두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바수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은날 아침 술이 깨고나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논의를 접었다.

 

좁은 계곡으로 따토파니의 아침이 깨어나자 갈리스와르행 로컬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바수가 고집하던 고라파니를 가기위해서는 따토파니를 벗어나자마자 좌측으로 길을 돌려 안나푸르나 보전지역으로 진입해야 했지만 우리는 고라파니를 대신해 바글룽을 선택했고, 걷기를 대신해 버스를 선택했다. 근 20여일만에 차를 타니 절로 신이 났다. 네팔은 걸기 위해서 왔고 나는 걷기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싣컷 자랑해왔는데 막상 차를 타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버스의 진동에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험준한 계곡을 지나고 도저히 차가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험한 길을 요동치며 지날 때는 얼굴에 웃음이 가쉬고 등에 식은 땀이 났다. 늘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은 무감각해져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계곡옆으로 차가 바짝붙으면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고 두발을 있는 힘껏 버팅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가 길을 내려왔는지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버스에 흐르던 네팔 음악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갈리수와르가 가까워졌다. 

 

 

 

원래 짰던 계획에는 없던 갈리수와르에 도착했다. 비교적 큰 도시에 큰 규모의 흰두사원이 있고 하루정도 쉬어가기에 좋은 도시로 느껴졌다. 전날 저녁부터 기분이 상해있던 바수는 버스지붕에서 배낭을 내리다 배낭에 얼굴을 맞았다. 선글라스가 부서졌고 다행히 얼굴에 다친데는 없었다.  포카라까지 같이 가지않고 바로 카트만두로 돌아가겠다던 바수를 포카라에 가서 새로 선글라스를 사주겠다며 달랬다. 버스정류장에서 주택가를 지나 깔리깐다키와 다울라기리쪽에서 내려오는 한 지류와 만나는 절묘한 지점에 자리잡은 호텔리버사이드에 여장을 풀었다.  

  

Galeshwor에 이르자 불교문화권은 끝나고 흰두문화권에 접어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타르초와 룽다가 사라지고 사원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네팔의 불교는 한국의 불교와는 사원의 분위기에서 큰 차이가 났다. 아마도 흰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물어보면 힌두교와 불교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흰두교도가 불교사팔을 참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불교지역과 힌두교 지역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기후나 지형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힌두교가 지배적인 지역의 사람들이 확실히 동적이고 낙천적인것 같았다. 갈리슈와르가 그랬다.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을 신성시하는 힌두의 전통에 따라 갈리슈와르도 꽤 중요한 힌두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여장을 푼 롯지를 비롯해 갈리수와르 전체가 트래커보다는 순례자가 주로 찾는 곳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시가지를 둘러보고 힌두교 사찰인 Radha Krishna Mandir를 들렀다.  암반위에 지어진 사찰은 그 암반을 포함해 거대한 조각품같이 조형적이었다. 힌두교사찰에서는 우리도 힌두신자와 같이 시바신에게 참배를 하고, 헌금을 한뒤에 Tika라고 불리는 꽃을 이겨 만든듯한 붉은 반죽을 이마에 찍었다. Tika 는 행운을 가져 온다고 하니 남은 우리의 여정은 안전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손님이라고 우리밖에 없는 식당에서 지금까지 산중에서 먹을 수 없었던 생선튀김을 비롯해 거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내일이면 네팔 최고의 현대적 도시이자 휴양도시인 포카라에 들어갈 기대에 부풀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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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좀솜에서 출발하여 Syang이라는 마을을 지나 마르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차이로 숲길을 따라 투구체에 도착하여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투구체를 출발하여 코켄탄티에서 점심을 먹고 칼로파니 지나 가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일찍부터 좀솜공항에는 비행기가 도착하고 이어서 이륙을 준비했다.  공항과 붙어 있는 숙소다 보니 비행기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숙소 옥상에 나가 가까이서 프로펠라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포카라와 좀솜을 잇는 정기항공노선이지만 좁은 계곡을 오르내리는 항로가 위험하다보니 사고도 잦은 구간이다. 쏘롱라를 넘은 대부분의 트레커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비행기로 포카라로 빠져버린다. 우리는 가능한한 포카라 가장 가까이 까지 고집스럽게  걸음을 계속하기로 했다. 다울라기리 쪽으로 올라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가 사라져 간 깔리깐다끼 강을 따라 우리도 길을 나섰다. 

 

 

 

좀솜을 벗어나자마자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듯 거친 지형의 계곡 합류점을 건넜다. 그리고 바로 깔리깐다기를 벗어나 오른쪽 가파른 언덕길을 통해 Syang으로 향했다. Syang은 전날 들렀던 티니가온과는 다른 또 다른 멋이 있는 마을이었다. 골목은 정갈했고 마을은 훨씬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떠나가는 마을이 아니라 머물고 살아가고 자자손손 이어갈 마을로 사람의 훈기가 느껴졌다.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해바라기를 하고 마을의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평온한 마음으로 마을을 걸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한 네팔리 아가씨가 학교앞에서 등교하던 아이들과 과자를 난주어 주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금방 그 아가씨랑 친해져 좀솜으로 올라간다는 사람을 왔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했다. 이날 걸음을 멈춘 투쿠체까지 같이 걸었던 그 아가씨는 무슨 연유로 가던 길을 되돌아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다시 떠나갔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Syang을 지나 마르파까지 가는 길은 초록이 완연했다. 해발 고도가 3000m이하로 내려 온 뒤로 늘어가던 초록빛이 네팔 사과의 최고 생산지인 마르파가 다가오자 더욱 진해졌다. 2월에도 아랑곳없이 마르파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멀리 설산을 등지고 깔리깐다끼 강을 안은 초록 밀밭과 살구꽃이 어우러진 과수원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네팔 사과 브랜디의 산지로 유명한 마르파가 다가오자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마르파가 브랜디의 산지라서가 아니라 네팔 사과의 주산지라는 사실이 사과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르파의 사과농사에 대한 기술적 경영적 정보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없겠지만 사과나무가 자라고 계절이 오면 꽃이 피고 잎이나고 열매가 달려 빨갛게 익어갈 네팔의 한 마을을 만났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마르파는 좀솜에서 거리 멀지 않았다. 점심무렵 좀솜 베니간 도로를 벗어난 우리의 걸음은 마르파를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과의 산지로만 알고 있던 마르파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트레커의 발길이 머무는 주요한 거점도시였다.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 코스로 들어가는 체크포스트가 있고 따라서 호텔과 레스토랑은 물론 트레킹관련 용품 가게까지 즐비했다. 도시가 번화한 만치 공동체 도서관과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있고 한때 일본인의 발길이 붐볐는지 '사꾸라' 라는 이름의 호텔도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마르파를 벗어나기전에 마르파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위에 자리잡은 사원을 방문했다. 계단을 통해 사원에 이르자 많은 신도들이 마당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중인 무리를 가로질러 지나가기가 불편했지만 마르파를 조망할 수있는 위치까지 올라가 전체가 한 덩어리로 붙어있는 듯 꽉짜인 마르파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르파에서 애플브랜디를 사고싶었지만 그 무게에 지레 겁이나 포기하고 다음 행선지인 차이로를 향했다. 차이로는 깔리깐다끼를 서쪽으로 넘어 티벳탄 캠프가 있는 숲속마을이었다. 이때부터 이날 오후는 투쿠체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편안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 멀리 설산을 보지않는다면 길은 한국의 야트막한 야산의 숲길과 진배없었다. 오후내내 길은 평탄했고 녹색의 숲은 짙고 싱그러웠다.

투쿠체에 들어설 무렵 오후가 깊어져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비시즌이다보니 몇몇 숙소는 아예 문을 닫았고 마땅한 숙소를 쉬 찾지 못했다. 가이드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다행히 마을이 끝나갈 무렵 손님을 받는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야간 트레킹을 두어시간 더해서 다음 숙소를 찾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뻔했다. 짐을 풀고나니 가이드 나브라즈는 이곳에서 애플 브랜디 공장을 운영중인 친구가 있다며 몇병 싸게 해줄테니 사기를 권했다. 우리는 사고싶지만 아직 걸어야할 길이 많은데 짐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브라즈는 자신들이 그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강권하는 바램에 한명당 두어병의 브랜디를 사게 되었다.

 

숙소의 옥상에는 다이닝룸으로  사용되는 유리온실같은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인데 다이닝 룸은 따듯했다. 그 시간까지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보니 우리는 다이닝 룸을 우리만의 공간인양 점령했다. 늦게 칠레 트레커 한팀이 합류하기 전까지 우리는 다이닝 룸에서 커피와 담배를 나누며 해지는 다울라기리를  바라다보는 호사를 누렸다. 강길에서 숲길로, 좀솜에서 시작해 상과 마르파와 차이로를 지나 투쿠체까지 참 많이 걷고 행복했던 하루를 나브라즈가 사온 애플브랜디를 한잔 나누며 마무리했다. 룸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서 처음으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관계, 환경, 그리고 삶에 대해 더 사랑하게 될 것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집이 그리워졌다.

2월 13일의 아침이 밝자 간단한 조식을 해결하고 짐을 싸는데 우리 가이드와 롯지 주인간에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이드는 식사도 거부하고 빨리 떠나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대충 파악한 바로는 어제 저녁 외부에서 사온 브랜디를 마신 것에 롯지 사우니가 기분나쁜 소리를 한것 같았다. 롯지도 브랜디를 파는데 왜 외부에서 사온 술을 마셨냐고 사우니가 따진것 같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양해를 구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와 가이드, 가이드와 사우니, 그리고 우리와 사우니간의 삼각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투쿠체를 출발해 얼마지나지 않아 라르중이라는 마을에서 식당에 들러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숙소의 사우니와 틀어진 가이드가 아침을 굶고 출발한 덕에  우리까지 든든한 참을 먹고 다시 길을 이어갔다. 라르중을 지나 점심을 해결한 코켄탄티까지 이어지는 길은 어제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강을 따라 평탄한 초록 숲길을 걸었고 걸음이 이어질수록 나무는 높고 초록빛깔은 더 짙어졌다.  숲길을 벗어나면 하상으로 내려와 사막같은 강바닥을 자갈을 밝고 걷고 다시 길을 만나면 초록 숲으로 걸음을 이어갔다. 깔리깐다끼의 오후 바람이 워낙 유명해 오전동안 걷고 오후에는 걸음을 멈추라는 가이드북의 안내에 잔뜩 긴장했는데 우리 일정 동안에는 그렇게 험한 바람을 만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전에도 걷고 오후에도 깔리깐다끼를 따라 마냥 걸었다.

까그베니를 지난 뒤로 깔리깐다끼강을 도대체 몇번을 건넜는지 모른다. 강의 왼편길을 걷다가 다시 강을 건너 오른편 길을 걷고, 그리고 언덕을 만나면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강둑을 올라 또 강을 건넜다. 코켄탄티을 만나기 위해서 찻길을 벗어나 다시 강의 동쪽으로 건넜다. 코켄탄티 마을은 몇 가구되지 않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나마 강쪽으로 붙어있는 집들은 수해로 무너져 내려 지난 홍수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강과 마을이 너무 붙어있고 강과 길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또 언제 수해를 당할 지 위태로워 보였다. 우리는 조그만 롯지에서 점심을 주문하고 덜마른 빨래를 배낭에서 꺼내 햇볕에 늘었다. 차를 마시며 지도를 보고 다음 일정을 검토하며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이 충만했다. 걸어서 좋고, 걷다가 쉬어서 좋고, 쉬다가 다시 걷는 것 또한 좋으니 어쩌면 걷기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고도를 낮추고 길이 산에서 멀어지는 만치 사람의 발길과 마을의 훈기는 늘었다. 코켄탄틴을 지나면서부터 마을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찻길과 트레킹코스를 교차하며 우리의 길을 찾아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활기가 달랐다. 산에서 만나 사람들은 아직 겨울에 갖혀 추위에 웅크리고 봄을 잊고 있었다면 고도가 낮아지고 벌써 봄이 느껴지는 지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고 걸음걸이도 씩씩해졌다. 초록색이 들판에서 시작해 산으로 번져감에 따라, 봄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해 몸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켄탄티를 출발해 오후의 휴식을 깔로파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 커피를 마신 깔로파니 게스트하우스는 규모도 있고 시설도 고급스러웠는데 우리 가이드는 하루 일정을 거기서 멈출 것을 제안했다. 좋은 숙소에서 지내고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일정상 너무 일찍 걸음을 멈추면 다음날 일정이 늘어나 고생할 수밖에 없어서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엇다. 아쉬워하는 가이드와 함께  예정된 숙소가 있는 가사까지 다시 걸었다. 

 

 

가사에 도착해 "플로리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다 찬물로 바뀌어 버린 수도꼭지에 몸을 맡기고 나니 온기가 절실했다. 다행히 우리에 이어서 두어팀의 트레커도 들어섰고 같은 숙소에 지내게 된 손님이 늘어나니 다이닝룸에 숯불 난로가 들어오고 온기가 흘렀다. 너무 붐비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을 정도의 손님이 함께 하는 숙소가 딱 좋았다. 

 

 

 

롯지와 가까운 안나푸르나 산자락에 산불이 났다. 불길이 커졌다 작아졌다 살아 움직이고 흰 연기가 쉼없이  피어났지만 산불을 꺼기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네팔리들은 아무도 산불을 의식하지 않는듯 태연했는데, 산불이 번져봤자, 눈이 쌓여 있는 고도에서 멈출 수 밖에 없고 우거진 숲이 없어 크게 신경쓸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험준한 산악지대에 산불을 끌 소방헬기도 없고 인력으로 끈다는 것도 불가능하니 그냥 방치하기 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불 타는 산 아래 마을의 숙소에서 조금은 불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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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묵니나트를 출발해 자르곳을 지나 Upper Mustang으로 들어가는 마을 까크베니에서 머문 뒤, 11일 깔리깐다기를 따라 좀솜까지 걸었다.  



 

구원의 땅 묵디나트에서 문득 두고온 집을 생각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드끈뜨끈한 방바닥에  깨끗한 이불 그리고 맛있는 밥이 있는 집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알수 없다. 여정이 40여일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거친 네팔 생활에 조금은 지쳤는가보다. 고산증의 위험도, 고산의 추위도, 힘든 강행군도 다 지나갔고 오직 따뜻한 햇살 속을 걷는 일만 남게되자 간사한 몸이 더 편하고 싶어진게 틀림없다. 그래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면 이 곳 네팔이 엄청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나이가 들수록 잊고 버려야 하는데 그리운 것이 늘어나서 큰 일이다. 



밤새 기온이 떨어졌는지 샤워실 물이 얼어 나오지 않아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전날 한국서 일하신다는 네팔리의 가족들도 묵다나트 사원을 참배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분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밤새 떨어진 기온 탓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네팔리의 짚차를 같이 밀어 겨우 시동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작별했다. 라니포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신비한 마을  자르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르곳은 깔리깐다끼 계곡을 향해 돌출된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르곳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사원을 찾았다. 굳이 우리가 보기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가이드 바수는 항상 앞장서 곰파를 향했다. 뭐 딱히 보여줄게 없기도 하겠지만 이곳 네팔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이 종교다보니 사원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틀림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별 사원의 특성을 이해하기에는 식견이 없으나 마을의 규모나 생활 형편을 사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고 가난한 마을의 사원과 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의 사원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르곳 역시 별다르지 않았지만 사원은 깨끗했고 마을의료나 교육관련 시민조직의 사무실도 사원과 붙어있어 나름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 보였다. 사나워 보이는 개의 환대를 받으며 사원을 나와 네팔리의 체취를 쫏아 골목을 누빈뒤 다시 가던 길을 따라 까그베니로 향했다. 



까그베니 가는 길은 묵디나트까지의 길과 확연히 달랐다. 베시사하르부터 묵디나트까지는 산행이었다면 묵디나트 이후 까그베니까지는 황량한 평원을 걷는 사막횡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은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 능선이 이어지고 가파르게 깍힌 게곡과 파스텔톤이 번지는 신비한 색감의 능선들이 무스탕 특유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 조성되었거나 조성중인 찻길을 따라 드물지만 여행객을 위한 찻집이나 롯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Upper Mustang이나  Dolpo와 같은 극한 오지의 느낌은 확실히 덜했다. 

   

 

묵디나트에서 까그베니까지의 길은 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걸어 늦지 않은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그래도 중간에 가게앞에 베틀을 두고 야크나 산양 털로 만들었다는 수제 숄과 머플러를 전시한 가게에서 구경도 하고, 가게와 붙어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등 여유롭게 쉬기도 했다. 길은 편했고, 간혹 지나가는 차가 먼지를 일으켰지만 다행히 많지 않았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까는 기사들을 만나 물어보니 길을 따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고 했다. 지구상 몇안되는 오지의 대명사격인 무스탕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있다니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현지 주민의 삶을 생각한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까그베니의 멋은 마을에 들어서기전 언덕위에서 내려다볼 때 확연히 다가왔다. 깔리깐다기와 묵디나트에서 흘러오는 강이 만나 이루어진 조금은 옹색한 계곡아래 형성된 퇴적지에 자리잡은 마을은 주변 황무지 산이나 능선과는 달리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거대한 무채색의 산과 구릉과 강 사이에 한 조각의 연두빛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까그베니 덕분에 연두빛이 이렇게 도드라진 색상인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편한 걸음 끝에 도착한 까그베니의 롯지 [Hotel Nilgiri View]에 짐을 푸니 넉넉히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오후 시간이 남겨져 있었다. 가이드가 인도한 롯지는 멋진 조망을 가지고 있었고 시설은 운치있고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먼저 마을을 가로질러 Kag Chode Thupten Samphel Ling Monastery를 찾았다. 안내서를 보니 나름 역사가 깊고 규모있는 사원으로 교육사업 등을 하고 있으며 사원의 유지를 위해 후원도 받고 있었다. 흙과 나무로 거칠게 만든 탑은 본전으로 보였고 그 옆에는 신축 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 본전을 마주보는 현대식 2층 건물에는 많은 티벳탄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티벳탄으로 보이는 신도들이 양지바른 마당 가에 모여 앉아 찬송을 하고 있었다. 운좋게 예불 시간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예배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 온종일 예배 중인지도 몰랐다. 늘 기도와 찬송으로 삶을 채우는 티벳탄들이 일은 언제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네팔 여정중에 그들이 일을 하는 경우보다 기도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본것 같았다. 그들에게 현세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한 과정에 불과할테니 열심히 일하고 무엇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할 장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골목이라기 보다는 집과 집사이의 틈을 비집고 지나간다고해야 더 정확할 것같은 미로를 지나 Upper Mustang이 시작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깔리깐다키의 강폭은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지만 건기다 보니 수량은 많지않았고 강을 따라 걷기에는 적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강으로 내려가 강바람을 맞으며 모래를 만지고 강물에 손을 적시며 강이 시작되었을 알수 없는 신비한 세계의 느낌을 더듬었다. 자갈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고, 자갈을 뒤져 암모나이트 화석을 주우며 멀리 무스탕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Lo Mantang까지 걸어가고싶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깔리깐다끼를 통해 Upper Mustang의 맛만 보고 마을로 돌아왔다. 



롯지는 비수기라서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지만 시설이나 진열해 놓은 상품 등을 보니 꽤 부유한 롯지로 느껴졌다. 제일 아랫층이 식당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객실과 주인의 살림집이 있었고 우리가 지낸 3층은 객실과 다이닝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이나 룸을 이어주는 복도가 오래된 일본이난 중국의 목조 건물같이 고색찬연하고 오밀조밀한 운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루밤 잠과 세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1층 식당과 3층 다이닝 룸을 잇는 계단을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거렸지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Hotel Nilgiri View]는 교양있고 단정한 차림의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하고 식사 주문을 받았는데 그 당당함에 미루어 주인집 딸이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꽤째째한 옷차림에 힐긋힐긋 우리를 살피며 부엌을 하는 식모아이 우리 때문에 이웃에서 급히 불려 온 낮은 계급의 딸로 보였다. 좁은 공간에서 롯지 주인딸과 식모아이를 대하니 단정함과 남루함, 도도함과 비굴함을 나누는 계급성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정전으로 촛불을 켜는 바람에 더 운치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침실로 돌아오니 깔끔한 이부자리에 깔리깐다키 강바람에 날려온 한주먹의 모레가 먼저 내려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 강건너 수직 절벽 아래에는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 무슨 이유에선지 돌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엄청난 토사가 큰 소리를 내면서 강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 가이드도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고 우리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숙소 앞을 지나던 중년 여성 한분이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이들이 위험을 즐기는 것같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한 순간 아이들의 목숨을 잃을 만지 위험한 장난을 하는데도 그 여성말고 온동네 사람들이 그냥 무관심해 보이는 것은 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산적해 있는 삶의 조건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스탕의 마을 까그베니를 뒤로하고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며 나는 빌었다. 내 살아 생전에 까그베니를 넘어 무스탕과 돌포를 주유할 수 있는 한달 여정의 기회가 꼭 주어지기를! 좀솜으로 가는 길은 단순했다. 왼편으로 닐기리봉과 틸리초크를 스쳐지나며 멀리 다울라기리 산군을 향해 깔리깐다끼는 흘렀고 우리의 걸음도 따라 흘렀다. 간혹 길과 강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에서는 강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물을 만나면 강둑으로 나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했고 편안했다. 고도의 변화가 없는 수평을 길을 물처럼 흘러갔다.

 

 

까그베니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Ekle Bhattee 라는 강변마을을 만났다. 두세개의 롯지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마을인데 강과 마을의 경계가 불확실 해 꼭 우기에는 물에 잠길듯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입구의 조용한 첫 집에서 차를 마시고 쉬었다가 출발하자마자 근처 롯지앞에 모여있는 한무리의 트레커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소롱라를 넘어 묵디나트를 지나 좀솜쪽으로 하산하는데 반해 이들은 좀솜에서 출발해서 묵디나트 쪽으로 상행중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트레커를 조우한 셈이다.

 

 

 

Ekle Bhattee 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무렵  좀솜까지 도착했다. 좀솜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포카라서 오는 정기 비행기를 맞는 비행장 까지 있는 곳이다보니 많은 롯지와 여행관련 업체들, 그리고 지역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는 이 근처의 중심도시로 느껴졌다. 시가지를 쭉 가로질러 거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숙소를 잡았다.

 

 

 

이른 도착으로 오후는 티니가온이라는 가까운 마을 까지 작은 트레킹을 떠났다. 그냥 호텔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행 M의 유혹에 굴복했다. 가이드에게는 자유를 선물했지만 굳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강을 동쪽으로 건너 30여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좀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티니가온에 도착했다. 농사철도 아니고 여행 성수기도 아닌 계절 탓인지 아니면 마을은 늘 이런 모습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티니가온 역시 인기척이 드물 정도로 한산었다. 영업중인 식당을 겨우 찾아 차를 마시고 마을을 관통해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골목길에서 만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이들이  줄고 학교가 사라지는 한국의 농촌에서 사는 나의 과민반응이겠지만 늘 마을을 만나면 걱정이 앞선다. 이 마을은 대대손손 사람의 삶이 이어지기를 빌며 숙소로 돌아왔다. 

 

 

 

트레커 조차 만나기 힘든 여정 끝에 모처럼 좀솜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두 한국 청년을 비롯해 국적이 다른 몇몇 트레커와 여행중이라는 네팔리 두 대학생까지 여정은 다르지만 같이 좀솜에 있고 그것도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가이드는 네팔 아가씨와 담소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탁자 밑에 넣어주는 숯불의 온기에 녹아들었다.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여정과 관련한 몇마디 말밖에 주고받지 못했지만  네팔의 거친 자연과 삶을 찾아 온 한국 청년 학생들을 보면 왜 그리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그 나이 때는 네팔이라는 나라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들 청년과 내 삶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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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간단한 식사후 쏘롱라를 향해 출발, 하이캠프를 지나 해발 5,416m인 쏘롱라에 정오무렵 도착, 이후 묵디나트를 향해 하산하여 저녁무렵 Ranipauwa에 도착 Hotel  North Pole에서 짐을 풀고 이틀을 머물렀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점심으로 빵을 챙겨 5시에 롯지를 나섰다. 사방은 암흑천지지만 머리에 해드랜턴을 단 10여명의 트레커와 더댓명의 가이드 포터가 나란히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좁고 가파른 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다행히 바람도 눈도 없고 기온도 차갑지 않았다. 다리 아프고 숨이 찬 것 말고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눈앞만 비추는 핸드랜턴에 의지해 오직 발디딜 곳만 확인하고 걸어야 했다.  설사 주변이 밝았다고 해도 발이라도 미끌어지는 순간 천길 낭떨어지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경치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긴 했다. 긴 침묵 속에 해드랜턴의 불빛이 점점이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둠에 묻힌 절경을 보지 못하고 세 걸음 걷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세 걸음을 걷고 동행의 상태를 살피고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보니 어느새 먼동이 트고 주변이 밝아 왔다. 갑자기 암흑 속에서 산들이 기적같이 살아났다. 산중에서 이런 일출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안나푸르나는 덤으로 가슴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침 여명이 히말라야를 깨우고 우리의 걸음은 좀더 자유로워졌다. 출발하고 1시간 15분 남짓 지났을까 해발 4950m의 마지막 롯지가 있는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에 고도를 무려 400m나 올린 셈이었다. 전날 하이캠프에서 잠을 잔 트레커들은 이미 다 출발하고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쏘롱패디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들만 롯지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숨을 고른뒤 다시 길을 나섰다.

 

 

중국인 커플과 뉴질랜드인 커플 그리고 우리 한국인 4명에 3명의 포터가 나란히 출발했다. 음지의 위험한 눈길이 계속 이어지고 고도를 높일수록 시야는 더 넓고 자유로워졌다.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멀리 Chulu East(6429m)자태가 공룡 등짝같이 경이로웠고, 우리가 가는 길의 왼쪽으로는 Khumjungar(6759m)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트래커들은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고 걸음은 쳐졌고 숨은 가파졌다. 그리고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아까운 체력을 소진하지 않기 위해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올라가자는 마음으로  다른 팀들을 추월해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쏘롱라에 다가 갈수로 나는 나도 모르게 호흡과 다리, 그리고 시간과 거리에만 정신이 쏠렸다. 가쁜 숨과 아픈 다리가 해가 지기전에 묵디나트로 나를 데려다 줄수 있을까하는 사실만 중요해지고 더 중요한 나머지는 사소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걸음을 통해 산의 기운을 느끼고, 안나푸르나가 선물하는 절경에 취해 생명의 환의에 들뜰줄 알았는데 나의 걸음은 고난의 구간을 벗어나기에 바쁘기만했다. 하이캠프를 나선지 꼭 4시간만에 쏘롱라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안도감도 잠시 걷기를 멈추자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쏘롱라 옆 언덕까지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봐도 일행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되돌아 가보기엔 올라온 길이 너무 아까웠다. 무려 한시간이나 지체한 뒤에 먼저 나의 일행이 거의 탈진 상태로 도착했다.  11시 30분이었다. 자신의 작은 배낭마저 포터에게 넘기고 몸만 겨우 올라왔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그랟 기운을 차렸다. 같이 간식을 나누고 사진을 찍는 사이 뉴질랜드 커플과 중국인 커플도 도착했다. 어떻게 된 것이 나이와 역순으로 쏘롱라에 도착하는 걸 보니 젊다고 튼튼한 것은 아닌게 확실했다. 우리 부부는 괜한 우쭐함에 어깨 힘이 들어갔다.



정오가 되자 우리 부부는 제일 먼저 출발했다. 상행길과 마찬가지로 서로 각자의 체력메 맞춰 걸어나갔다. 하행길의 풍광은 상행길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발을 딛고 선 주변의 풍경은 초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멀리 병풍처럼 앞을 가로 막고 선 다울라기리 산군의 숨막힐 듯한 풍광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다울라기리까지 걸어갈 요랑이었는지 쉼없이 내달려 오후 2시반에 고도 4,200m의 바즈라마을에 도착했다. 파라다이스 롯지에서 시벅쥬스와 정체를 알 수 없는 rhubarb 쥬스를 와이프랑 나눠 마시며 일행을 기다렸다. 롯지주인에게 담배를 요청하니 새갑을 구하지 못해 자신의 담배 2개비를 나누어 주었다. 무려 한시간이 지나서야 일행이 도착했다, 상행길 한시간 하행길 한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너무 좋은 체력이 문제였다. 그런데 사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3시반에 도착한 일행과 차를 마시고 4시에 바즈라를 출발하여 530분에 묵디나트를 지나 Ranipauwa에 도착했다. Ranipauwa는 네팔여정중 최고의 풍경을 가진 가장 드라마틱한 마을이었다. 꿈속에서나 그리던 풍광을 지닌 Ranipauwa는 높은 설산이 멀리 둘러쳐진 활무지로 형성된 너른 구릉지의 양지바른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석양을 받으며 꿈속같이 안온한 느낌을 주던 마을은 밤이 되니 설산과 구름 그리고 달빛과 타르초가 어울려 내 눈과 마음을 맑게해 주었다. 어린 시절 골목길을 나설 때 서늘한 밤공기 주던 알 수 없던 울렁거림이 다시 되살아남을 느낄수 있었다. 



마을을 관통해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외관이 조금 낡은 Hotel North Pole에서 방을 구했다.  외관은 낡고 복도 끝에 설치된 세면장과 화장실은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친절한 주인이 피워주는 숯불 난로 하나로 모든 불편함을 잊을만했다. 특히나 생각보다 싼 가격에 맛난 야크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에 고도를 1,000m나 높이고 다시 1,600m를 내린 쏘롱라 패스를 축하하면서 락시를 한잔 나누면  서로의 노고를 격려했다. 고산증으로 인해 배탈과 두통 호흡곤란을 겪은 두 친구와 특히 우리 짐까지 지고 힘든 하루를 용케 견뎌낸 두 가이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만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쏘롱라를 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새벽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이번 여정 중 가장 많이 걸은 하루였고 가장 극적인 최고 고도를 넘어온 하루였지만 의외로 기억에 남는 풍경은 많지 않았다. 나름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은 네팔 여정중 가장 많이 걷고 가장 조금밖에 못본 하루가 된 셈이다. 


 

마낭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이틀을 머문뒤 다시 묵디나트 Ranipauwa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이번에는 고소적응이 아니라 그냥 쉬기 위해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지만 Ranipauwa도 그냥 쉬기에는 가볼 곳이 너무 많았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틀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기보단 차라리 더 많은 휴식을 위해 단촐한 일정을 잡았다.

 

 

먼저 전날 지나쳤던 묵디나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의 마을 이름보다는 그냥 묵디나트로 불리는 라니포와와 붙어있는 듯 가깝게 느꼈는데 그래도 막상 걸어보니 30여분이 걸렸다. 겨울 사원은 한산했고 엄숙했다. 몇몇 관광객이 말을 타고 사원앞 공터에서 소란을 떨긴 했지만 계절상 많지 않은 순레객이 단정한 몸가짐으로 사찰을 돌고 108갈래의 성수로 몸을 씻어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는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늘 죄업을 쌓고 있고 자신의 삶이 부정한 것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삶이고, 거기다가 어리석기까지 하다보니 늘 후회로 점철된 것이 인생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묵니나트를 흐르는 108줄기의 물로  몸을 씻고 사원 뒷마당 언덕에 입던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 나면 저분들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자신의 현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복잡한 삶의 방정식에 비해 너무나 단순한 답에 불과하지만 그 소박한 믿음을 통해서마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묵니나트를 나와 Ranipauwa주변의 작은 사원과 언덕위에 새로 조성된 비슈누상까지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오랜만에 샤워와 빨래를 하고 성대한 저녁상을 받은 자리에서 옆테이블의 한국에서 일하신다는 네팔 노동자 가족을 만났다. 오랜만에 귀국해서 가족들과함께 묵니나트에 참배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괜히 반가웠다.  

 

술기운에 일찍 잠이 들었다가 불편한 꿈에 쫒겨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30대 초반부터 따라다니던  꿈은 늘 나를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 속으로 몰아 넣는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스스로 누구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나는 늘 이십대와 삼십대의 경계에 서 있었다. 꿈을 깨고 나서 나는 스스로 물었다. 결국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세월의 힘에 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지금 나의 사회활동이 있고, 농사가 있고, 내 인생을 스스로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생각으로도 내 자신을 위무할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뜨거워본 적이 없었고, 그 어디에도 제대로 한번 미쳐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구원의 땅 묵다나트에서도 나는 평화를 얻지 못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타르초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내 귀에 울리는 타르초 소리는 바람이 불경을 읽는 소리일까 아니면 내 마음에 이는 번뇌와 갈등의 아우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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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마낭을 출발하여 야크카르카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레다르에서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고, 2월 7일 9시경 출발하여 정오가 되기 전에 해발 4,450m인 소롱패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에 있을 쏘롱라 패스를 준비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거친 바람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았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다행이 눈은 오지 않았고 하늘은 조금 개여있었다. 아침을 먹고 옷깃을 여미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쏘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마낭을 벗어나면서 길을 두갈래로 갈라졌다. 왼편의 길을 선택하면 강사르 마을을 지나 틸리초로 가게 되지만 우리는 쏘롱라를 향해 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강사르와 틸리초는 5년전에도 폭설로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인연이 닿지 않으니 영영 못가볼 곳으로 남을 것 같아 아쉬웠다. 마낭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뒤돌아 마르샹디강과 마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지나온 길을 살폈다. 불탑을 지나며 쏘롱라를 무사히 넘어 다시 마낭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를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Chulu East 산허리를 타고 군상까지 가황무지 길은 경사가 심했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만에 해발 400m이상을 올려야하는 힘든 코스였다. 그래도 외편의 계곡을 넘어 멀리 틸리초 피그와 닐기리 봉이 이루는 절경을 보는 낙에 그나마 우리의 지친 걸음은 힘을 얻었다. 군상에서 쉬어가며 차라도 한잔 할려고 했지만 롯지는 비어있고 마당에 찬바람만 가득했다. 아쉬움을 털고 일어나 다음 마을인 야크카르카까지 강행군을 이어갔다. 다행히 군상을 지나서는 경사가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점심이 다가오자 가는 눈발이 날리고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오후 1시즈음 야크카르카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카르카가 집을 뜻한다니 야크의 집, 다시말해 방목 중인 야크가 머무는 동네나 야크치기 목동이 지내는 움막이 있던 동네 정도일 것이다. 역시나 야크카르카에 접근하자 방목중인 야크떼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목동의 움막을 확인할 길이 없고 트레킹 덕분인지 야크카르카는 번듯한 숙소가 여러채 들어서 롯지촌을 이루고 있었다. 야크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으니 우리는 야크가 된 기분으로 불순한 날씨를 뚫고 우리의 길을 나아갔다.



오후3시무렵 해발 4200미터인 Ledar에 도착했다. 하루 650m의 고도를 올려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이후 고도 적응을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Ledar로 들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자마자 첫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의 손님은 단촐했다. 두 스페인 남자와, 중국인 커플 그리고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서너명의 가이드와 롯지 운영자 두어명이 같이 있어 그나마 든든했다.  고도가 높아진 만치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모두다 다이님 룸에 몰려 들었다. 책과 지도를 펼쳐놓고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가에서 몸을 녹이니 마음까지 녹아들었다. 


  


이번 여정 처음으로 4,000m 고도에 진입하고 나니 조금은 불안했다.  아직은 호흡이 간혹 불편한것 빼고는 비교적 잘 먹고 잘 걷고 있는 셈이지만 산아래서 지낼 때의 몸과 비교해서는 분명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벌써 식욕도 잃고 배탈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시달리는 나의 두 일행에 비해서는 우리 부부는 거의 철인 수준인 듯 멀쩡했다. 다이닝 룸에 불살이 줄어들자 차가운 룸의 침낭을 기어들었다.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눈바람 소리를 들으며 춥고 불안한 잠을 청하며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한걸음한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지나온 삶을 곱씹고 살아갈 삶을 그려본다. 많은 아쉬움은 남지만 결코 내 삶이 후회스런 삶은 아니었다. 지금의 희열 그리고 다가올 삶의 가슴뛰는 모험이 더 중요하다.



레다르의 밤은 험악했다. 밤새 거친 바람이 집을 흔들고 눈발이 천장틈으로 들어와 얼굴에 뿌려졌다.  9시에 침낭에 들었지만 자정에 눈이 떴다. 다행히 잠자리에 들무렵보다 호흡은 좋아졌다. 다시 감빡 잠이들다가도 금새 집이 흔들리고 바람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불안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마당을 나서니 바람은 사람마저 저 계곡 밑으로 날려버릴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레다르의 밤은 너무 길었다. 수백번을 뒤척여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새벽잠이 설핏 들었다가 억지로 일어나 다이닝룸에 들러니 8시였다. 스페인 트래커는 벌써 숟가락을 댄듯 만듯한 접시를 물리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호흡곤란으로 고생한 D와 두통으로 고생한 M은 아침을 맞아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모두 얼굴은 부풀고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평단한 능선을 따라 3시간 동안 스무명가량의 트레커와 네팔리가 행렬을 지어 나아간다. 안나푸르나를 스쳐 멀리 소롱피크를 지나 출루 이스트 출루 웨스트를 비켜 꾸역꾸역 길을 줄였다. 큰 산을 걷는 사람의 움직임이 워낙 작아서 사람은 산과 같이 부동의 상태로 있고 오직 바람만이 산과 계곡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레다르를 출발한지 1시간 넘겨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니 길은 가파르고 위험했다. 드디어 험준한 안나푸르나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정오가 되기전 소롱패디에 도착한다. 쏘롱라를 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숙소가 될 소롱패디는 고도 4,450m였다.  방을 얻고 짐을 풀고 들어선 다이님룸에는 10여명의 서양팀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개별 트래커들이 들러 점심을 먹고는 모두들 하나같이 길을 나섰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중국인 커플마저 하이켐프를 향해 떠난뒤 소롱패디에는 우리만남게 되었다거친바람이 불지만 양지자른 다이닝 룸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4명모두 책을 한권씩쥐고 해드는 창가에 띄엄띄엄 앉았다. 나는 이내 긴의자에 몸을 눞이고 잠이 들었다고즈늑한 봄날의 평온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소롤패디에서의 오후는 행복했다.

 


오후3시경 하이캠프로 떠났던 중국인 커플이 다이닝룸에 들어 섰다. 하이캠프 직전에 심한 두통으로 일단 퇴각했단다. 그리고 뉴질랜드 커플이 한쌍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석양녁에 히피처림의 런던보이가 들어섰다. 다국적 트레커들이 둘러앉아 야크똥난로에 불을붙이고 화려한 소롱패디의 저녁을 맞았다. 이제 메뉴를 외울 때도 지났지만 늘 끼니가 다가오면 모두가 메뉴를 뒤척였다. 그래봤자 선택지는 뻔했다. 삶은 계란에 퍽퍽한 빵, 야채튀김을 뒤적이다가 다 먹지못하고 내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남겼다.



다음 날 있을 대망의 소롱라 패스를 위해 일찍들 잠자리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난로의 온기를 아껴 자리를 지켰지만 어둡고 차가운 방에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고작 720분이었다. 한컵의 물로 양치만하고 누운 잠자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누울 곳이 아닌 곳에 누워있는 듯한 어색한 잠자리를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하니 고작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몸을 뒤집다가 결국 2시를 겨우 넘겨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고 말았다. 4시에 기상해서 4시반까지 식사를 하고 5시에 쏘롱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2시에 기상을 하고 나니 밤은 춥고 길고 시간은 느렸다.



이번 여정의 최고 고도이자 고비인 5400미터의 소롱라는 5년전 폭설로 마낭 에서 돌아서면서 넘지 못했다. 이제 곧 소롱라를 넘고나면 이번 여정의 성격이 바뀌게 될 것이다. 먼저 고산증의 위험에서 해방되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 마르상디강을 따라 열흘을 넘겨 고도를 높혀왔던 여정은 칼리칸다키강을 따라 12일 여정의 하산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마낭주의 산록과 마르상디강변의 초지를 거쳐왔던 여정은 무스탕의 황량한 황무지와 그 황무지를 갈라 무스탕에 삶의 터전을 키워주었던 검은강 칼히칸다끼를 따라 흘러갈 것이다. 하루하루 고도가 낮아지고 기온이 오르고 그리고 네팔 최고의 현대적 휴양도시인 포카라로 들어가면 이번 여정은 끝이 난다.  



이번 여정에서 소롱라가 기점이 되듯 이번 두달의 네팔여행이 내삶의 새로운 시작이길 빌었다. 유예된 꿈들, 이루지못한 계획들, 무산된 다짐들, 미완의 시도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내일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꿈을 꾸며 새벽 4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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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Nawal을 출발하여 뭉지와 Braga를 거쳐 Manang에 도착해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2월 5일 쏘롱라 패스에 앞서 고산에 적응하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더 쉬었다. 


갸루에서 나왈까지의 느낌 그대로 나왈에서 뭉지까지 길은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메마른 돌투성이 흙이 드러나고 드문드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크의 먹이가 되는 키작은 초목이 자라는 목초지는 될지언정 밭을 갈고 곡식을 심기에는 땅은 너무 경사지고 거칠었다.  멀리 마르샹디 계곡으로 홈대 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 마르샹디 계곡을 다라 서북쪽을 향하면 멀리 강가푸르나와 안나푸르나 3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길의 기억을 기록에 남기기에는 나의 글은 너무나 짧고 사진으로 다 담기에는 또 놓치는 것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나왈을 출발해 2시간여를 걸어설까? 우리는 Low Pisang에서 Hongde를 거쳐 오는 길과 만나는 나왈에 도착했다. 나왈은 험준한 아난푸르나 산등성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초지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역시 야크의 교잡종으로 보이는 소가 한가롭게 마른 풀을 뒤지고 있었고, 말은 초지 사이를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이 물을 마시는 사이 마부도 쉬기 위해 말을 내렸고, 우리도 배낭을 벗고 쉬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뭉지는 말도 마부도 트레커도 짐을 벗고 쉬어가기 좋은 동네였다. 너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시벅쥬스를 한잔 가득 마시며 한가로이 해바라기를 했다.


   


나왈에서 마르샹디 강을 만나 30여분을 더 걸으니 마낭 직전 마을인 Braga에 도착했다. 강쪽 길가에는 롯지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오른쪽 산자락아래는 사찰과 함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앞에 너른 초지 중간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몇개의 벤치도 놓여져 있었다. 동네의 광장같은 역할을 하는 공유지 같았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설 무렵 수업을 마친 한무리의 꼬마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을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2개의 축구공 중에 한개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하자며 불러 세워 잠시 잠깐이나마 같이 공을 찼다.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브라가도 3,500m 고도의 고산 마을이다보니 금방 숨이 찼다.  




브라가를 지나 마르샹디강을 따라 30분도 걷지 않아 마낭이 올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마낭 도착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차우타라(chautara)에서 배낭을 벗고 숨을 돌렸다.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을 시작하는 마을 마낭에서 보낼 이틀의 휴식에 가슴설레이며 마을을 들어선뒤 Tilicho Hotel을 찾아 짐을 풀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고, 생필품을 사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가이드 바수의 부추킴에 넘어가 뚱바를 파는 가게를 찾아 자리를 잡고 일행을 불렀다. 맛있는 애플파이로 기억될 Tilicho Hotel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고도적응일로 꼭 하루 더 쉬어갈 것을 강권하는 안내서들에 따라 우리도 마낭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마낭에서의 하루는 단지 쉬기 만을 위한 날은 아니다. 2박 3일을 지내도 다 둘러보지 못한 숱한 명소와 볼거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강가푸르나 호수와 빙하,  Milerepa's Cave와  Ice Lake 만해도 하루에 다 가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나는 틸리초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사르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명소들은 다 건너 뛰고 가까이 마을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로했다.




게으른 아침을 보낸뒤 우리는 늦게 롯지를 나와 전날 스쳐 지나왔던 Braga로 향했다. 목적지 없이 보내는 하루를 브라가 곰파를 찾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곰파는 500년 이상된 사원이라고 했고 나름 세월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낡아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절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비워져 있는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에 의해 관리되는 곰파치고는 너무나 방치된 느김이었다. 지금까지 들렀던 티벳불교 사원 거의 대부분이 중건중이거나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브라가 곰파는 그렇지 못했다.




브라가 곰파에서 내려와 마르샹디를 건너 강가푸르나와 마르샹디가 만나 형성된 널다란 초원을 걸었다. 늘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자유롭고 싶다던 소망이 그 순간만은 이루어진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풀잎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단 하루라도 가야할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느낄 필요도 없는 진공같은 평화를 내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마낭에서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르샹디는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맨발로 건널만치 적은 수량도 아니었다. 한참을 강을 거슬러 마낭 시가지가 끝나는 위치까지 가서야 다리를 만났다. 가파른 강둑을 올라 마을을 들어서니 마땅히 할일이 없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던 바수와 나브라즈와 마주쳤다. 마지막 남은 축구공과 학용품을 전해줄만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바수와 나브라즈는 우리를 마낭 곰파로 안내하며 마낭곰파에 딸린 마을 공동체 조직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을 것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제안 했다. 



마낭 곰파에 들어서니 7~8명의 사람들이 마주앉아 차를 돌리고 예불을 준비중이었다. 학용품이나 전달하고 부처님 앞에 공양이나 하고 나올 참이었다가 갑자기 곰파의 안내를 받아 경내에 착석하고 차까지 대접받았는데 곧바로 예정에 없던 예불에 참여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방문객을 위한 공연 개념의 예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불경을 외는 네팔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는 푹 빠져 들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형식의 예불이 억지로 짜내는 화려한 성전의 경건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도화가 덜된 날것 그대로의 종교를 만난듯한 감동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예불마저 참여하고 나니 쏘롱라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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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 차메를 출발, 브라탕, 두쿠르포카리를 거쳐 어퍼피상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2월2일 가파른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갸루에서 점심을 먹고 나왈까지 걸어 하루를 마무리했다.



차메의 아침은 분주했다. 고산증으로 하산중인 캐나다 청년은 사우니를 통해 짚차를 알아보고 이른 아침 도망가듯 떠나갔다. 도로는 좁고 가파랐고 포장이나 가드레일은 물론 없었다. 사륜차가 아니면 다닐 수도 없는 열악한 조건인데 눈까지 얼어붙어 나같으면 도저히 그 길을 차를 타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짚이 떠난뒤 사우니 이야기로도 작년에도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수백미터 아래 마르샹디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역시나 사고가 빈발한다고 했다.  캐나다 청년은 떠나갔지만 탄촉부터 그 청년을 따라왔다는 검정개는 우리곁에 남아 있었다. 어제 저녁 롯지 복도에 잠을 자던 검정개는 롯지의 개가 아니고 그 청년을 따라 들어온 낯선 개라고했다. 낯선 개가 롯지 실내에 들어와 복도에서 잠을 자도록 버려두는 네팔리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가 참 남달랐다.



길을 나서기전 롯지에서 일을 보던 13살 소녀 수니타에게 축구공과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엄마는 다른 롯지에서 일을 하고 자신도 역시 포탈라 롯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입을 들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맑은 눈에 꿈많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꽃길은 아닐 지언정 제발 험하고 곡절많은 가시발길이 아니길 빌면서 롯지를 나섰다. 깔리(검정개)도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차메를 벗어나기위해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했다. 우리를 따라 나선 깔리를 지나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던 다른 개들이 그냥 두질 않았다. 집단으로 덤벼드는 개를 쫒고 우리 뒤로 숨어드는 깔리를 지키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마자 탈레큐를 지났다. 우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조금 가파른 듯한 언덕길을 오르다가도 어느새 편안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지치지 않고 편안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이어졌다. 날씨 마저 최상의 날이었다. 공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투명하도록 새파란 빛에 흰구름마저 어울렸다. 계곡을 갈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설산이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차메를 떠난지 두세시간이나 지났을까 목이 마르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을 때쯤 커다란 사과 과수원이 길따라 가꾸어져 있고 농장 시설이 있는 브다땅을 지났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향이 그리워 과수원에 딸려 있는 듯한  bhratang Tea House에서 배낭을 벗었다. 말라 비틀어진 조그마한 사과를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사고, 예상보다 시원하고 향그러운 데다 가격까지 싼 사과쥬스를 한잔씩 나누었다.  사과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볼때 과수 상태는 볼 것도 없었지만 그 규모만은 놀랄만했다.  대규모의 농장이 소농의 삶의 터전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가꾸어지기를 빌었다. 땀이 마르고 겉옷을 찾을 만치 몸이 식은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입안에 가득 사과향을 머금고 브라탕을 출발하자마자 좁고 긴 계곡을 이루는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길이 나왔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이런 절벽을 깨서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반터널같은 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통과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고  오른쪽으로 깍아세운듯한 암벽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쿠르포카리에 접근하자 이 암벽 능선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데  '스와르가 드와르'(혹은 paungda Dand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의 침식이 만든 무려 1500m 높이의 바위 한개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여기 사는 티벳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그 바위산을 넘어 고향 티벳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고 했다.

 

 

Dhukure Pokhari를 지나면 이날 하루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Pisang이지만 피상은 마르샹디 계곡을 따라 형성된 Low Pisang과 마르상디 계곡을 벗어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Upper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번에는 Upper Pisang을 택해 길을 잡았다. Dhukure Pokhari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멋진 나무다리를 밟고 마르샹디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잡아 3km쯤 걸었다. 

 

 

Pisang 마을을 들어서자 가파른  골목길을 타고올라 마을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롯지에 짐을 풀었다. 빨래를 들고 데크에 나가서니 시야가 너무나 시원했다.  마르샹디 계곡아래 Low Pisang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안나푸르나 2봉을 비롯한 산군들을 바라다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스와르가 드와르'넘어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눈을 돌리니 우리가 넘어야할 쏘롱라로 이어지는 가는 길들이 헌준한 산들 사이에 실가락 처럼 사라졌다. 

 

 

숙소를 나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불교 사원에서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Gompa의 역사는 알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부해서 만든 절이라고 했다. 사찰내 건물의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듯 했고 오래된 절이 갖는 멋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본전에 들어가 모두 부처앞에 절을 올렸다. 우리의 가이드 바수와 나브라즈는 흰두교 신자지만 부처와 시바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그 순간에는 여기 터잡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몇년을 같이 살다 네팔로 떠나오기 직전 생을 마친 우리집 강아지 초롱이의 명복을 빌었다. 롯지로 돌아와 전망 좋은 다이닝 룸에서 해지는 안나푸르나의 멋에 취해 밤을 맞았다.

 

 

하루에 600m를 높여 고도 3300m인 Upper Pisang에서 아주 가벼운 고산증이 왔다. 조금의 불면과 가슴두근거림 정도라서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내 몸 상태의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였다.  피상을 벗어나 수평에 가까운 길은 마르샹디의 흐름과 같이 하면서 한시간 쯤 걸은 뒤 출렁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은 갑자기 가파른 상승길로 바뀌었다. 단 한번의 내리막이나 평지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거의 심리적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할 즈음 작은 Tea House가 나왔고 우리는 갸루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잠시 차를 나누며 숨을 고른뒤 애매한 점심시간때문에 고민하다가 좀 더 걷기로 하고 출발 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다음 마을까지 거리도 멀고 혹시 문을 연 식당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엿다. 사람의 온기가 식어 한산하고 쓸쓸한 마을로 돌아왔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는 이곳 주민들이 주로 야크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오래 전에 획득한 무역영업권을가지고 여전히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붙잡던 식당으로 돌아가니 놓친 손님을 다시 받게된 사우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뚝바를 시키고 사우니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동안 나브라즈는 사우니를 통해들은 마을 사정을 전했다. 갸루에는 7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중 3명이 카트만두 유학중이고 이 마을도 점점 사람이 줄어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네팔 역시 저개발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산간에 형성된 갸루같은 외진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도 피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나고 죽듯 마을 역시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도 이 마을에 사람이 줄고 있고 머지않아 마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갸루에서 나왈까지도 메마른 산자락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숲은 빈약했고, 자갈 투성이 흙은 푸석거렸고, 키작은 식물들은 거친땅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연명하는듯 애초로웠다. 그래도 어퍼피상 트렉을 선택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갸루를 지나고 다시 수평의 길을 따라 나왈까지 가는 길은 탁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갸루를 향해 한번도 쉬지 않고 600m의 고도를 올리 때는 후회가 컸지만, 막상 갸루 이후 수평의 길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2봉, 피상 피크, 그리고 안나푸르나 4봉을 손에 닿은듯 가까이서 마주하면서는 우리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다.  갸루를 출발한지 2시간이 안되어 멀리 나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왈 역시도 주변의 산과 언덕, 밭과 초지를 닮아 눈에 드러나지 않는 흙빛 마을이었다. 마을이 갸루 보다는 크고, 마을을 이루는 터전 역시 넓어 보였지만 사람의 발길이 드문 것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을은 비어있는듯 조용하고 오고가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하루종일 주민을 만난 것은 손에 꼽을 만치 적었고 트레커는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계절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를 따르던 깔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회가 되면 고기를 듬뿍 넣은 볶은밥이라도 한그릇 시켜줄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우리의 행동이 너무 굼떴다. 더이상 기다리지 못한 깔리는 다른 인심좋은 트레커를 따라 자신의 길을 간것이 틀림없었다. 나왈의 밤은 깊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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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아침 Tal을 출발 카르테지나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고 바가르찹지나 다나큐에서 길을 멈추고, 2월1일 다나큐를 출발 티망지나 탄촉에서 점심을 먹고 고토지나 차메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 했다. 



딸을 출발해 마르상디의 동쪽 강변길을 걷다가 출렁다리를 넘어 서쪽 찻길로 접어들었다. 얼마를 걷다가 다시 동쪽으로 강을 건너고 마을이 보이는 데서 서쪽으로 강을 넘어오니 카르테다. 역시  걷는 길은  옛길이 좋다. 그 길을 걸은 사람과 동물의 발자욱이 보이고, 흘린 땀내가 맡아지고, 사연 깊은 이야기가 들려 오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만나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강과 산과 하늘빛이 조화로운 카르테를 지나 이른 점심 무렵 다라파니에 도착했다. 다라파니는 마나슬루산군과 안나푸르나 라운드코스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서 마나슬루 산군으로 갈까, 가던 길을 이어 서쪽으로 계속가서 쏘롱라까지 올라갈까 마음이 흔들리는 마을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었다. 



딸 지나 다라파니까지도 그랬지만 다라파니 지나  다나큐까지 이어지는 길도 평탄했다. 중간의 바가르찹은 오래전 산사태로 롯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강을 따라 편안한 길만 걸다보니 동네 뒷산 산책 나온 듯 마음이 가벼웠다. 고산증을 느끼거나 추위를 걱정할 만치 높은 고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더워 걷기에 불편하게 낮은 고도도 아닌데다가 가파르고 험한 길도 없었다. 앞으로 하루하루 고도가 높아지고 길은 험해지고 추위와 고산증의 위험이 커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아다. 



하루 밤을 쉬어갈 다나큐가 다가오자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끝내  진눈깨비를 뿌렸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Hotel Peacefull & Restaurant를 들어섰다. 룸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한기를 느끼고 다이닝 룸을 찾아 난로를 부탁했다. 네팔에서 아직까지 훨훨 타는 난로를 본적이 없었고 이 롯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족한 연료로 지핀 알뜰한 작은 불씨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뜻했다. 난로가로 모여든 중국인 커플과 우리 일행은 덜마른 빨래를 말리고, 지도를 살펴 내일의 일정을 체크하고, 난로가 전해주는 온기에 기대어 여행이 주는 행복에 취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계곡에 어둠이 깔리고 빗소리가 굵어졌다. 그때 갑자기 한무리의 네팔리가 조용하던 다이닝룸을 들이 닥치고  씨끌벅쩍해지면서 우리의 안식은 끝이 났다. 



룸으로 돌아와 침낭에 들어가니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지루한 저녁 시간을 줄이려 모처럼 책을 들었다. 혹시하면서 굳이 배낭에 넣어 온 덕분에 참 오랜만에 니이체를 읽었다. 하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가슴만 울릉거렸다.  내 젊은 날의 꿈들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인식에 내 삶을 온전히 받치겠다는 호기는 간데없고 생활의 노예가 되어 힘겹게 견뎌온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과잉 자의식과 무기력 말고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나의 지난 세월이 이제는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었건지도 몰랐다. 남은 나의 인생을 잘 살자는 다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남은 한가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가 나이가 주는 지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덕분에 단잠이 들었다.



2월 1일 아침 다나큐의 Hotel Peacefull & Restaurant 을 나오니 밤새 내리던 비는 거치고 말쑥한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마을을 벗어난뒤 얼마지나지 않아 가파른 숲길을 만났다. 다나큐에서 티망까지 무려 700m의 고도를 1시간 남짓만에 올려야 하니 모처럼 숨이 차고 땀이 났다. 몇구비의 비탈진 산길을 올라 시야가 시원하게 터이는 마을에 도착하니 티망이었다. 티망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마나슬루봉이 손에 닿일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제 내린 진눈깨비가 고도 덕분에 티망에서는 눈이되어 쌓여있고 동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사진에 담다가 사진만으로 당이 차지 않아 어른들도 나섰다.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썰매를 빌려 바수와 라마나쉬 그리고 우리도 잠시잠깐이나마 동심으로 돌아갔다.



티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다음 목적지인 탄촉을 향했다. 고도 3, 000m인 티망에서 탄촉까지는 300m의 고도를 내려야 하는 완만한 내리막 숲길이 이어졌다.  탄촉 직전  Evergreen Hotel & Restaurant의 눈쌓인 야외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고 지난 한달간 나의 머리와 얼굴을 지켜주던 모자를 남겨두고 길을 나섰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오르막을 타고 산사태로 무너져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마을은 지나고 나서야 더 머물렀어야 했다는 미련이 남곤했는데  탄촉 마을이 꼭 그랬다. 딸이나 차메는 트레커가 붐비고 트레커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면 탄촉은 그와 반대였다.  탄촉은 주민에게는 트레커가 낯설고, 트레커에게는 주민을 마주치기가 어색한 전통적인 산간 마을로 다가왔다.  



야외에서 눈을  밟으며 점심을 먹고 출발한뒤 한시간여만에  Naar -Fu 계곡과 마르샹디강이 만나는 koto 를 지나고 오후 3시 30분에 마낭주의 수도 차메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가이드에게 숙소 선택을 거의 맡기다 싶이 해 왔는데 이날만은 우리가 롯지를 정했다. 한국에서 오랜동안 일을 해서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인의 식성과 문화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사우니(여주인)가 운영하는 Potala Guest House에 짐을 풀었다. 



모처럼 한국어에 능통한 사우니를 만나니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롯지의 여주인은 서울 근처 도시에서 오랜동안 일을 하다가 이명박정권 때 불법체류 노동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했고 지금도 한국가서 일하고싶다는 뜻을 내비췄다.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했고 한국식 수제비를 맜있는 깍두기와 함께 내어 놓아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에 어쨌던 한식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는데 배가 작아서 아쉬웠다. 



나에게 차메는 본격적인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마을로 느껴졌다. 차메 다음 코스인 피상만해도 해발 3300m나 되니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 차메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메에 도착하면 똥바라도 한잔하고 쏘롱라를 넘을 때 까지는 술과 담배를 절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라운드 때는 그래도 나름 절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해발 3500m인 마낭에서 마지막 술을 마시고 해발 5400m인 쏘롱라를 넘을 때까지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포탈라롯지는 밤새 정전이 되었다. 정전된 방에 일찍 올라가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난로가 있는 다이닝 룸을 떠나기 싫어 밍거적 거렸다. 그나마 다이닝 룸은 충전지를 이용해 켜진 여린 전등이 있었다. 심한 고산증으로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한 캐나다 청년과 쏘롱라를 향해 우리와 같이 올라가야할 씩씩한 스페인 청년 그리고 영어에 젬병인 우리 일행이 난로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네팔 트레킹 때는 늘 밤이 길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계절이 꼭 겨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그렇기도할 것이지만 아마도 잦은 정전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밤은 긴데 책을 보기에는 눈이 시리고, TV나 PC도 없고 폰도 와이파이가 불안전하니 마땅히 할짓이 하나도 없다. 영어가 짧으니 대화상대를  만나도 그냥 간단한 인사이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게 말하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정전마저 되어 일찍 침대에 들었지만 두 눈은 감기지 않고 의식은 말똥말똥 되살아나니  밀쳐둔 생각들이 구름처럼 밀려 왔다. 삶의 현장을 탈출해 보내게 된 두달의 네팔 망명(!)이 이후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아니면 그 자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는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을 통해 단지 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과욕이 분명한 것 같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냥 일상의 긴장 속에 굳은 의식의 근육을 풀수 있도록  내 자신에게 스스로 자유를 선물하는 것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정도를 위해서 두달의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도 좋은가는 물음에는 단호히 그렇다고 정리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여행보다 대단한 일상이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확실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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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아침 Upper Ngadibazar에서 출발하여, 바훈단다까지 오전에 걷고 Germu에서 1박을 한뒤, 1월 30일 옛 트레킹 코스 반대편 서쪽 강둑 절벽을 따라 돌을 깨고 만든 새길로 Tal까지 가서 1박을 했다.

 

우리는 Ngadi의 롯지에서 최악의 시설과 최고의 친절을 동시에 경험했다. 배갯머리에 쥐똥이 쌓이고 유리도 없는 창은 방 안밖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했지만 모처럼 손님을 맞은 사우지 사우니는 연신 우리가 자신의 롯지를 찾아주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트레킹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 라운드 둘째 날을 맞았다. 

 


점심을 먹은 바운단다까지의 길은 편안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바람도 없고 맑고 투명했다. 그냥 숨을 쉬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지는 그런 날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바훈단다의 롯지는 평화로웠다. 바훈은 브라만을 뜻하고 단다는 언덕을 뜻한다니 바훈단다는 '브라만이 사는 언덕 마을'일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카스트의 최상단 계층이 모여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깨끗하고 잘 사는 동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살 좋은 Hotel Superb View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고 싶기도했지만 마지못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못내 아쉬운 가이드는 그냥 여기서 하루를 쉬자고 제안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걸은 길이 너무 짧았다. 


   


길을 걸으며 나는 5년전의 기억과 지금을 비교하고 기억의 흔적을 드덤고 달라진 것들을 확인했다. 5년전 있던 것이 없어지고 그 때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당나귀와 댐이 그것이다. 5년전 트래킹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했던 그 많던 당나귀들이 보이질 않았다. 마르샹디강따라 찻길이 뚤리면서 그많은 당나귀와 노새들 그리고 목동들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당나귀와 노새대신 차와 기사가 더 많은 짐을 손쉽게 고산지대 마을로 나르게 되었으니 주민의 삶은 훨씬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귀전에 울리던 방울소리가 귀국후에도 한참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몽환 속으로 이끌곤 했었는데 이제 나귀의 방울과 발자욱 소리 대신에 간혹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감짝 놀래키곤 했다. 변화는 바람직하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긴 한데 그 많던 당나귀는 어디로 가고 그 목동은 운전기사가 되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은 바로 댐이었다. Upper Marsyandi 수력댐은 중국의 원조로 네팔의 전력난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세계 2위의 수자원보유국이면서 수도 카트만두 조차 하루 몇시간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은 벌써 옛이야기가 되었고 이번 여행중에는 기적같이 거의 정전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수력댐 덕분일진대 댐이 옛길을 삼키고 마을을 내쫏고 풍경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수만은 없었다. 내 보기 좋자고 그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래도 입안엔 쓴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자본에 네팔이 휘둘리지 않기를, 네팔의 개발과 발전이 네팔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어 삼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며 댐을 피해 길을 걸었다. 



이른 오후에 게르무 레인보우 롯지에 도착했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마르샹디 동쪽강둑위에 형성된 게르무 마을은 아름다웠고, 레인보우 롯지는 깨끗하고 운치있었다. 여유있는 오후시간을 빨래와 샤워, 그리고 편안한 휴식으로 보내고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행복의 절정에는 늘 그늘이 끼기 마련일까? 바훈단다를 지나며 문득 얼굴을 스쳐지나는 바람에 나의 청춘을 지배하던 불안을 환기했다. 수만갈래의 길이 앞에 놓여있던 시절 그 어느 길도 선택할수 없어 불안만이 나의 자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헤어날 수 없었던 불안의 심연에서 나마 그 불안사이를 비집고 게으름을 만끽하던 나의 청춘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있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속을 비집고 정체를 드러낸 그 느낌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면 내 나머지 삶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지나간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려받는 축복이다.



게르무에서는 씼고 쉬고 잠도 잘 잤지만 포터 바순의 나쁜 술버릇이 드러났다. 전날 나디에서 술주정이 부끄러웠던지 바순은 내가 권한 락시까지 거절하며 쏘롱라패스후에 묵디나트에서나 같이 한잔하자며 패스전에는 '노소주'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부억을 들락날락 거리던 바순은 호언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술냄새를 풍기며 수다스러워졌다. 더 가관인 것은 알콜이상의 뭔가를 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 실없이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모두들 침실로 흩어졌지만 잠자리에 든 뒤에도 룸의 얇은 벽을 통해 한참을 동료 라마라쉬와 떠들어되는 라마의 취한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가파른 강둑을 내려와 마르샹디강을 건너니 상계가 나오고 강의 서쪽 길을 걸어 Shrichaur의 Boomerang 롯지를 지났다. 시리사우르를 지나자 지그재그의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강과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Jagat 이후에는 강을 건너 티벳탄이 소금을 나르던 아름다운 산길을 당나귀와 한줄로 나란히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 서쪽으로 새로 찻길이 나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구길은 관리가 안되는지 여기저기 산사태로 끊겨 있고 었다. 딸까지는 가파른 암벽 절벽을 깨서 만든 위태로운 돌길이 이어졌다. 발아래 천길 낭떨어지 아래 마르샹디 강이 흐르고 머리위 절벽은 돌이라도 굴러내리지 않을까 위태롭기까지 했다. 대신 소금을 나르던 티벳탄의 발길을 따라 걷던 옛길의 따뜻함은 줄었지만 가파른 절벽위를 가르는 길은 시원함을 넘어 아찔한 조망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로난 찻길이 우리를 딸까지 이끄는 동안 다행히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놀래키던 차를 몇대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길이 오르락내리락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새길은 구길보다 평탄하긴했어도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을 만들 수 없어 보이던 절벽을 깨고 돌면서 길을 내다보니 길은 산 구비를 따라 멀리 돌기도하고 아예 마르샹디강이 보이지 않는 산넘어가지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농가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집에서 키우는 염소가 있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새길은 우리를 쉬 지치게 했다. 딸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 빨리 지쳐갔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딸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딸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를 출발할 때 파샹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있었다.  어떤 트레커가 축구공과 학용품을 맡기면서 고산지대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했다. 파샹님은 그 축구공과 학용품을 우리가 좀 전달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사실 트레킹 짐을 싸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짐만남기는 것이 철칙인데 예정에 없던 축구공 3개와 문구 한짐을 맡아 고산지대까지 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마련해 주었던 분의 따뜻한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각자의 배낭에 한개씩의 축구공과 문구를 나누어 지고 왔다.  딸이라고해봤자 고작 해발 1700여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아직 공을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날 첨으로 예정에 없던 축구공 나눔을 해야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망치로 자갈을 깨고 있었다. 집을 짖거나 도로를 포장할 때 사용할 잔자갈을 직접 망치로 깨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했다. 눈과 코주변은 물론 온 몸을 돌먼지로  뽀얗게  뒤집어 쓴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나마스태를 외쳤다. 하루에 1달러전후의 저임금 아동노동이 극심하다는 네팔의 현장을 우리는 한가로운 트래커로 막딱뜨린 셈이었다. 값싼 동정심이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지만 순간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고 축구공을  꺼냈다. 한 아이를 불러 축구공을 주었다. 이 아저시가 왜 이러지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남겨질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나의 유년을 느끼고 세상의 가난과 그 가난 속에서 삶의 온기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얼굴로 기억될 딸에서 하루의 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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