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떠났다. 지난 보름 같이 먹고 자고 걸었던 도반들은 먼저 귀국길에 올랐다. 허허로운 마음에 힘없이 타멜을 걸었다. 식욕도 없이 저녁을 떼우고 깊지만 불안한 잠을 잤다. 가볍게 찾아온 우울. 하지만 새벽 늘어진 의식을 깨워 본격적인 여정을 준비했다. 짱구나라얀과 파나우티, 둘리켈과 나가르곳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파나우티행을 결정했다. 박타푸르와는 또다른 중세문화가 있고 한적한 시골도시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사전 지식이었다. 단기 일정인 만치 짐을 줄이기위해 두 개의 대형 배낭을 호텔에 맡기고 오직 50리터 배낭 한 개만 준비해서 길을 나섰다. 박타푸르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일 거라는 확신에 룸보이가 제안한 다른 길을 무시하고 타멜을 가로질러 1킬로미터나 걸리는 라트나버스 파크로 향했다. 행운이 따랐는지 오직 두 번을 물은 끝에 파나우티행 버스에 탑승했다.
라트나 버스파크를 출발한 버스는 Arniko HWY를 따라 박타푸르를 지나 Banepa를 향해 달렸다. 버스파크에서 마이크로버스의 조수들이 계속해서 "바네파!"를 외치며 호객하는 걸로 미루어봐서 바네파가 교통의 요지인 것같았다. 박다푸르를 지나 외곽으로 갈 수록 흰 연기를 뿜고있는 높다란 굴뚝이 이어졌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에서 볼수 있었던 그 많은 붉은 벽돌집이 여기서 만들어진 벽돌로 세워진것 같았다. 평화로운 시골풍경과는 어룰리지않았고 무엇보다 매쾌한 연기가 재채기를 일으켰다. 나의 관념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원한 공기, 신령한 설산과 아름다운 전원, 맑은 강과 영적인 삶이 있는 네팔이 있다면, 이곳에 터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은 차라리 저 삭막한 벽돌공장이 있는 풍경이 더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노동과 저임금, 혹독한 노동환경과 아동노동의 현장을 배낭을 메고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의 마음이 아렸다.
카트만두에서 Panauti까지는 4km이상의 비포장길을 포함해 30여km의 거리에 불과했다. 잦은 정류소 마다 정차하고는 승객을 내리고 싣다보니 2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정오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날과 시장이 혼재된 거리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파나우티의 Indreshwor Mahadev Temple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작은 박다푸르 같은 느낌의 구역이 나왔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커뮤니티 안내센타가 나왔다. 근무하는 아가씨에게 숙소 소개를 부탁하니 마을에서 운영하는 숙소가 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사원을 스쳐지나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골목끝에 좁다란 3층 건물로 우리를데려갔지만 문이 잠겨 한참을 지체했다. 아랫층에는 주민이 살고 있고 맨 위층 옥탑방만 숙소로 제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숙소는 불결했고, 부실했다. 혹독한 추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는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출입문은 유리창이 아니라 그물망만 씌워져있었다. 그래도 사설 호텔보다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숙소에서 하루를 나기로 마음을 먹고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는 1600루피의 숙박료를 내고 팜플릿과 책자를 찢어 창을 가렸다.
짐을 풀고 숙소를 나섰다. 사원의 부설 박물관에 6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지만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유물은 없었다. 파나우티 사원과 지역의 유래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문을 건성으로 읽고, 박물관을 나와 한적한 사원의 평화를 즐겼다. 사원을 나와 아이들이 뛰어 놀고,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담소를 즐기다가 낯선 이방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골목길을 지났다. 마을은 크지 않았고 외부 방문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얼마걷지 않아 사원의 끝이자 파나우티를 성지로 만들어준 두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 Bashuki Nag Temple에 멈춰섰다. 카트만두의 파슈파티나트 처럼 화장을 하는 장소에 이르니 이 지역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사원을 세우고 마을이 형성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신성함 역시 깃들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위와 비둘기 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사원의 탑으로 몰려드는 까마귀 떼의 소란에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서광이 비치는 사원과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 여정의 행운을 빌었다. 바로 짐을 챙기고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전날 점심을 식당에서 먹고난뒤 연이은 두끼를 전날 아침에 카트만두 부띠끄호텔에서 제공한 토스트 두어장에 컵라면 하나, 그리고 조금의 과자만 가지고 해결했다. 열악한 숙소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커피포트가 있어 컵라면 조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식당이 있는 곳까지 나갔다 돌아오기도 귀잖았고, 한번씩은 당연한 것을 건너 뛰어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Panauti를 떠나 나모붓다로 향하는 길은 가슴 부풀었다. 오늘은 어떤 우연과 그로인한 난관과 희열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을까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숙소를 나섰다. 이른 아침 햇살에 대지를 덮은 서리가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시골길을 따라 maps.me가 가리키는 7.8km의 길을 걸었다. 등교를 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직장인, 그리고 일터로 나가는 농부와 소까지 마주치기도하고 나란히 걷기도 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간혹 지나가는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우리를 괴롭혔지만 전반적으로 거리는 쾌적했고 전원은 아름다웠다. 오렌지 농장을 지날 때면 녹색농원에 점점히 박힌 주항색 빛깔의 조화에 눈을 뗄수가 없었고, 관광지가 아니라 네팔 농촌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 더욱 좋았다. 조형적인 이랑을 만들고 무엇인가를 심고 있는 밭 풍경을 만나 살펴보니 감자를 심고 있었다. 우리 처럼 직선의 이랑이 아니라 미로같은 이랑을 만들고 감자를 심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묻지 못했다. 전날 버스를 타고 지나며 보았던 벽돌공장들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주변과 부조화를 이루며 돌출적으로 솟아있고 굴뚝과 검은 연기, 그리고 흙더미 사이를 오가며 인부들은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를 피해 종종 걸음으로 공장 지역을 벗어났다.
지도가 가리키는 거리보다 훤씬 더 걷고 휠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 뒤에 나모붓다에 도착했다. 숙소와 가게들로 이루어진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절의 초입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은 불탑이 있는 마당 한쪽을 제외하곤 식당들이 빙둘러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햇살 좋은 가게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해결했다. 불탑을 도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한무리의 백인 여성들로 이루어진 승려들이 불탑앞에서 예배를 올렸다. 우리도 불탑을 한바퀴 돌고 오색 타르초가 휘날리는 계단을 올라 나모붓다사원의 본전에 도착했다. 조망 좋은 산능선을 따라 형성된 사원은 세월의 흔적은 많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멀리 히말라야 설산까지 이어지는 광할한 대지를 배경으로 좁은 터에 아기자개하게 배치된 사찰의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오래전 왕국의 자비롭고 현명한 왕자 마하사티가 우연히 굶주린 호랑이를 만났는데 자신의 몸을 보시하고 부처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라고 했다.
시원한 조망을 가진 아름다운 사찰에서 스케치하는 아내 덕에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올라갔던 그 계단을 통해 나모붓다사원을 나와 둘리켈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정확한 정류소 위치와 버스 도착시간을 알수가 없어 그냥 하염없이 둘리켈 쪽으로 방향으로 잡아 걷기로 했다.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걸어 첫마을이 나왔을 때 우리가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 확인된 버스 정류장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버스를 기다렸다. 화물차가 지나가자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네팔리들은 화물차에 올라타고 사라져갔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해서 우리 부부만 남는 상황이 게속되자 불안감이 몰려왔다. 혹시 이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마땅한 숙소를 찾을 수도 없는 산중턱마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냥 둘리켈행 버스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일단은 최대한 걷기로 마음을 먹고 또 다시 낯선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30분을 채 걷지 않아서 승용차 한대가 다가오더니 우리의 목적지를 물었다. 우리의 목적지와는 조금 어긋나지만 같이 갈수 있는데 까지 태워주겠다는 차에 염치 불구하고 올라탔다. 승용차에는 네팔청년과 네덜란드여성이 타고 있었고 둘은 인근 트리뷰반 대학교와 관련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건넨뒤 졸음이 오기 시작할 무렵 차는 둘리켈로 들어섰고 삼거리 버스파크에서 우리는 내리고 승용차는 왼쪽으로 틀어 트리뷰반대학쪽으로 떠나갔다. 고마운 마음을 대신해 아내는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 한장은 찢어 선물했다.
다행히 승용차를 얻어타는 바람에 쉽게 둘리켈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 대해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 계획도 없어 막상 도착하고나니 난감했다. 우선 호텔을 찾기로 했다. 터미날 근처다 보니 여러개의 호텔이 산재해 있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여행객의 행색을 보고 건달같은 호객꾼이 우리를 따라붙었다. 호텔을 들어서면 한발 먼저 카운터에 달려가 우리를 자신이 데리고 온 손님으로 소개하고 호텔비를 흥정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러번 이야기하고 뿌리쳤지만 우리의 대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날을 곧 질것 같은데 호텔을 정하지 못하고 건달까지 따라 붙은 상황이 불안감을 일으켰다. 어렵게 택시를 타고 여행안내서에 소개된 호텔로 가자고 했지만 기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호텔의 위치를 몰랐다. 결국 택시 기사는 그 건달한테 핸드폰까지 빌려쓰며 길을 물어보는 상황이 되고, 외딴 산길을 불안하게 헤매던 끝에 어두워지기 직전 '파노라마롯지'라는 호텔에 도착했다. 예상 택시비의 두배를 물고 들어선 호텔은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부분적인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롯지의 주인은 친절했고 우리가 요구하는데로 어두운 전등을 갈아주고 전기 스토브까지 내어주었고 음식과 이부자리는 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낮시간의 불안감이 이어지면서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북쪽과 동쪽으로 창이 나 있어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히말랴야 설산이 시야에 잡히고 침대에 앉아 정면 동쪽으로 바라보면 일출을 볼수 있는 전망 좋은 방에서 침대위 이불속에서 꿈같은 일출을 맞았다. 떠오르는 해가 온 세상을 비추자 지난날 오후부터 밤새 나를 사로 잡았던 불안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 왜 인지도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물러가자 방안 가득 환희가 넘쳤다. 내가 묵고 있는 이 호텔의 이 공간이 세상에서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기쁜 마음으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은 따뜻했고, 아름다웠고 조금은 신비롭고 한산한 산길이었는데, 간혹 경비원이 경비를 서고 있어 정부 시설이 접해있는지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The Dwarika's Resort"라는 고급 리조트의 외곽 산책길이었다. 내가 묵은 롯지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숙박비를 내야하는 The Dwarika's Resort의 산책길을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한 셈이었다.
산책끝에 panorama view lodge에 하루를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인근의 네팔 청년들의 데이트 장소로 보이던 Devisthan이라는 뷰포인트에 올라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책을 읽고 일지를 적고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파노라마롯지에서의 꿈같은 이틀을 보냈다. 기록할 것이 없어 더 좋았던 이틀의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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