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최고급 버스라는 자가담바를 타고 포카라 카투만두간 트리뷰반 하이웨이를 하루종일 달렸다. 예상 시간 7시간이라고 하지만 예상은 그냥 예상일 뿐이었다. 버스가 겨우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설 무렵 출발한지 9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지만 버스는 아늑했고 길은 편안했다. 일반 마이크로버스 같은 난폭운전도 없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지루함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푹신한 좌석에 깊게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난밤 꾸었던 지독한 꿈을 회상했다.
늘 반복되는 꿈이지만 세월이 가도 공포는 줄지 않았다. 나의 악몽은 늘 30살 전후에 멈춰 있다. 대학원생의 신분이지만 학문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삶의 전망도 없고, 결혼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방도도 없는데 목을 죄는 수업의 하중은 날로 더해가는그때로 나는 다시 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늘 나는 나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외를 할려고하지만 내가 가르칠수 있을까 영어는 원래 못하고 수학은 다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하지 가슴졸인다. 이어진 꿈에서 리포터를 제출해야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해야하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냥 식은 땀을 흘리며 쫒기게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과사무실엘 갔는데 갑자기 내가 학생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졸업식장을 갔는데 내가 졸업생이 맞는지 학점은 다 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당황하며 잠을 깼다. 늘 반복된 꿈이지만 사랑곳까지 와서 같은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선잠을 깨고나니 기분이 착잡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지 25년이 넘었는데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 시절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검문소를 지나자 시커면 흙먼지가 거리를 휩쓸고 버스를 덮쳤다. 창틈으로 스민 먼지에 이내 목은 칼칼해지고 뿌연 흙먼지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로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비가 내린 기억조차 없는 건기다 보니 한순간 앞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두터운 먼지가 거리를 덮고 있는데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들어선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 종점인 안나푸르나 호텔 마당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뷰띠끄호텔에 메일로 픽업을 부탁해놓은 택시와 룸보이 빔센이 우리를 맞았다. 교통체증으로 정확히 예정시간 3시간을 넘겨 우리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그 3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단지 알리는 표정이 더 당혹스러웠다. 혹시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도 오후 벌이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어떤 경우도쫒기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 여유롭고 관대한 네팔인의 품성이 부러웠다. 모처럼 숙소 인근의 마은틴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아까운 저녁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일행의 출국을 앞두고 온전히 남은 카트만두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지 못했다. 호텔을 나와 타멜 거리거리를 걷고 쇼핑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논의 끝에 박타푸르를 향했다.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기에 파수파티나트와 보드낫을 다녀왔기 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값지게 보내기에 박타푸르만한 곳이 없었다.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박타푸르는 지난 2015년 4월 25일 대지진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데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부 건물은 흔적없이 무너져 내렸고, 골목몰목의 건물들 조차 긴 막대와 대나무로 아슬아슬하게 받쳐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기에 살까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위험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같았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파탄과 더불어 카트만두벨리의 3대왕국의 하나로 17세기 후반 조성된 왕국이라고했다. 순례자의 도시를 의미하며 BHADGAON이라고도 불리는 박타푸르는 다른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되어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바르 광장을 지나 지명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도자기가마터도 지나고 여러가지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도 지나 눈에 익은 Nyatapola 탑에 이르렀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이고 그앞쪽 마당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5년전 차를 마시던 기억이 새로웠다.
광장과 사원으로 어우러진 구역을 서쪽으로 나와 인공호수 근처에 이르자 많은 인파들의 북적되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풍경을 쫒아 학교 운동장 같은 곳을 드러서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가사를 입고 무슨 예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가사를 입은 아이들이 승려가 되는 예식을 올리는 그런 자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사는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10여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의상이 달라 꼭 부족을 달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다른 팀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 늘어놓은 게시판 같은 것에는 기부금으로 보이는 목록을 적어놓기도 했고 마당 한켠에는 손수건 모양의 여러색갈의 천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참가자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한 눈으로 인파들 사이를 헤메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파크를 찾았다. 박타푸르를 떠나려는 우리 눈앞에 갑자기 전통밴드가 지나가고 신상을 앞세운 행진이 이어졌다. 타악기 중심의 거친 연주는 애조와 더불어 신령한 서정을 선물했다. 가락과 풍광에 매혹되어 행렬의 끝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놓았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니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타멜로 이어지는 거리의 공터에는 수천명의 궁중이 모여 있고 길은 인파로 넘쳐났다. 무슨 정치 집회인지 축제인지를 끝내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군중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까스레 타멜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 광장 인근에서 와이프를 잊어버렸다. 입장료를 10불이나 내야되는 구역인데 와이프는 현지주민같은 자연스런 걸음으로 무사통과를 해 버렸고 우리 일행은 쫒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 그냥 연락을 시도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행들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까페에 들어가 와이프랑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은 되다가 말다가 불완전했지만 겨우겨우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들은 먼저 네와르 음식 전문점이면서 문화공연도 하는 유명하다는 Nepali Chulo로 향했다. 일행들에겐 오늘이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Nepali Chulo는 여러군데 묻고 정보를 얻어 가장 고급스런 네팔전통식당으로 알고 선택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가슴을 졸인 끝에 와이프는 릭샤를 타고 도착했고 공연과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네팔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평범했고,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식당건물이 음식값을 부풀려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네팔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조금은 억울하게 끝이 났다.
15일 친구들은 트리뷰반 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우리부부는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부부 단독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라 조금은 홀가분하고 들떠야할 것 같아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호텔을 나섰고 네팔민속박물관을 찾아 나라얀히티왕궁앞의 더바마그 거리를 걸었다. 지도에는 나와있는 민속박물관은 찾지 못하고 인근에서 옥류관이라는 북한식당을 우연히 맞딱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식당을 들어섰는데 우리를 맞는 여성 종업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주관적인 느낌일까 의아했지만 최대한 편하게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에 대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낯설음이 현지 네팔리 식당보다 더한 느낌이 들었다. 찾지 못한 민속박물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네팔산지가 3년이 된다는 종업원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볼까봐 미리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아팠다. 정치 체제의 차이가 같은 한 민족사이에서도 이리 정서적 벽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보름을 같이 했던 일행들이 떠난 타멜거리를 걸으며 저녁을 맞았다. 5명의 일행이 떠나간 타멜은 갑자기 텅 비어보였다. 나에게는 네팔 여정을 같이 하기 전의 친구는 네팔 여행을 같이한 뒤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평생 네팔의 추억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으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야했고, 마음 따뜻해야했다. 그런데 쓸쓸함이 밀려오고 걸음은 허전해졌다. 조금은 고급스런 저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일찍 들어온 호텔에서 남은 한달 반의 여정을 계획하며 얉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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