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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1. 지난 가을 손에 들어왔지만 흙 묻은 손으로 두어번 뒤적이다 밀쳐두었던 시를 쓰지 않아도 좋은 날을 그리는 시인 안상학의 6번째(?)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을 읽는다. 농부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 안식의 시간 겨울이 다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 없는, 봄이 오는 낌새가 은밀히 번지는 입춘 언저리에 절박한 마음으로 시인의 말귀에 귀를 기울이고 시인의 글귀에 눈을 연다.

 

2. 시집 남아있는 날들바닥에 내 몰린 혹은 생과 사의 갈림길 생명선을 딛고 선 시인의 목소리다. 전적으로 개인적 느낌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유서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다시 슬픔을 사랑으로 이기려 사력을 다하는 의지를 느끼기도 했다. 시집의 제목은 위중한 병중에 주어진 오늘 하루의 절박함으로 어제를 뒤돌아 보고 다시 남아있는 남들을 세며 내일을 점치는 처연함을 담아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3. 안상학 시인은 늘 사랑보다 슬픔이 많은 곳, 그래서 넘치는 슬픔을 시로 달랠 수 밖에 없는 곳, 천상 시인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세상에 거처한다. 그래서 그의 싯귀를 따라가는 길은 어쩌면 구도의 길이고, 조금은 고행의 길이고, 그래서 정화의 길인지 모른다. 그의 손길에 이끌려 그가 사는 세계를 한바퀴 주유하고 나서면 코맹맹이가 되도록 싣컷 울고 난 다음 큰 슬픔 조차 눈물에 다 씻겨 가고 다시 맑은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순간을 맞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다뜻해진다. 그래서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내게 슬픔을 통한 정화의식으로 나가왔다.

 

4. 나에게 지금까지 안상학의 시는 냉정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세상을 담담하게 노래한 것으로 느겨졌다. 어떤 때는 무미건조할 정도로... 이번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지금까지의 시와는 달리 조금은 더 절박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술한잔에 들뜬 가벼운 목소리는 아니다. 죽음에 직면하고 극복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절실함을, 온기에 대한 절절함을 담고 있다.

 

5. 이제 제주에 가면 涯月을 지나며 어느 돌담밑 제주수선이 꽃을 피우는지 다시 한번 살피게 되었고, 화산도 중산간을 걸으며 죽다 남은 사람들을 기리고, 윗세오름을 넘어 날아가는 새가 입산했다 돌아오지 못한 산사람들임을 느끼게 되었다. 임하를 지날 때면 물아래 마령리 이식골 문상길 중위의 고향마을을 기억하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그 꿈이 살아있음을 몰래 들려주고 올 것 같다. 시인 안상학의 눈길은 참 넓고도 깊다.

 

6. 시집을 덮으며 나는 시인 안상학이 더 가난하고 더 외롭게 살아 더 높은시를 남겨도 좋겠지만, 사과꽃 피는 봄밤 친구들과 왁작직껄 술판을 벌이고 외로움도 가난도 잊고 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래도 저래도 다 좋으니 시인이 다시는 몸도 마음도 잃어 버린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지 않기만을 빌었다.

 

7. 참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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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 [글로벌 그린 뉴딜] 

그린뉴딜이 화두가 된지 오래지만 탈석유 재생에너지육성 정책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지금까지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린뉴딜의 개념을 재대로 이해하고자 이 책을 선택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린뉴딜을 기술 혹은 산업전환에 국한해서 이해하거나, 경기진작을 위한 토목사업에 편중된 시각으로 바라다 보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천착하고자하는 목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그린뉴딜이 가진 문명전환적 성격이 무엇이고, 그 귀결이 가져올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그 구현 과정은 어떡해야하는지 아니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제레미 리프킨의 [글로벌 그린뉴딜]을 통해 답을 구하고 싶었다.

필자가 이 책은 통해 보여주고자 한 핵심은 간단했다. 우리 인류는 화석연료를 통한 2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번영을 구가한 끝에 지구온난화로 대재앙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인류는 6번째 대멸종의 위기에 봉착했지만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 대전환과 이에 부응하는 사회대개혁을 통해 새로운 그린뉴딜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고, 그 시기는 촉박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우리의, 정부의, 세계적 차원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 책은 크게 1,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인류가 화석연료가 초래한 기후위기로 인해 전세계적인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재생에너지 경제에 기반한 그린뉴딜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필자는 신재생에너지 기반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적 변혁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세가지 요소가 갖춰져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커뮤니케이션 매개체와 동력원 그리고 운송 메커니즘 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자연 속에 무한한 햇빛이나 바람에 기반한 신재생 에너지는 한계비용을 극도로 떨어뜨려 결국 기존 시장의 비즈니스 메커니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기존 시장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서는 소유권이 접근권에 자리를 내주고 시장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부분적으로 네트워크에 공급자와 사용자로 대체된다고 본다. 즉 일부 상품 및 서비스외 이윤은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줄어들어 생산 및 유통되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거의 무료가 되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라는 현상이 나타(p.29)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필자는 공유경제를 그린 뉴딜 시대의 핵심적 특성으로 보고 공유경제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을 변확시키고 있는,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 이동성의 디지털 인프라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경제 현상이다. 이 점에서 공유경제는 18세기와 19세기에 태동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후 세계 무대에 처음 등장한 새로운 경제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p.32)”고 주장한다.

또한 신재생에너지의 한계비용이 떨어짐에 따라 기존 화석연료 기반 사업은 좌초자산으로 처분될 것이기에 투자전환시점을 앞당기는 것이 보다 경제적 합리성에 합치하는 처분임을 주장한다. 탄소거품을 하루빨리 제거함으로써 인류가 화석연료 문명의 붕괴에 수반되는 전례 없는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대혼란에 대비할 수 있다. (P.127)”고 한다. 필자는 2028년을 티핑 포인트로 보고 화석연료 문명의 붕괴를 예측한다.

2부에서 필자는 그린뉴딜의 현실적인 실현 방안을 강구한다. 그러면서 그린뉴딜을 추진할 주력부대로서 연기금의 실제적인 주인인 작은자본가들의 군대로 연합한 노동자를 제시하고 이들이 주도하는 그린뉴딜의 세계를 새로운 사회적 자본주의라 칭한다.

연금기금이 2017년 기준 413000억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 자본이라는 사실...(P.157)”

“...세계의 노동자들이 작은 자본가들의 군대로 연합한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2017년 미국에서는 13500만 명의 노동자가 공공 및 민간 부문에서 일하고 있고, 그중 54%가 퇴직연금 기금 계획에 가입해 있다. 이는 거의 7300만 명에 달하는 파트타임 및 풀타임 노동자 코호트이며, ‘작은 자본가들의 군대가 되는 셈이다.(P.158)“

우리의 연금기금을 활용하고 자본 전략을 개발하는 것보다 노동운동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돈이 우리의 목을 자르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P.169)“

나아가 사회적 책임투자가 기초가 된 새로운 사회적 자본주의를 제기하며 이의 도래는 가치 당위가 아니라 수익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벤저민 프랠클린의 격언 선행을 통해 성장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P.185)

“...기존의 전통적인 발전소를 유지하는 것보다 새로운 대체에너지 프로젝트를 구축해 운영하는 쪽이 더 비용 효율적이 되는 변곡점에 도달했다.”(p. 147)

그린뉴딜의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비용은 과도한 국방예산의 합리화, 슈퍼리치에 대한 과세 강화, 화석연료 산업에 제공되는 보조금 삭감 등으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린뉴딜이 가져올 사회적 자본주의를 위해 몇가지 요소의 사회적 변혁을 요구한다.

먼저 피어 어셈블리(peer assembly)거버넌스를 통한 사회적 의사결정권의 수평적 확산을 요구한다. 중앙집중형 에너지 사회에서 분산형 사회로 전환하는데 있어 사회적 의사결정권의 확산과 수평적 거버넌스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권 의식을 요구한다. 이는 지구 환경 재앙을 통해 타 동식물과 더불어 멸종위기에 처한 인간의 타 생물종과의 동류의식을 말하고 중국 공산당이 당헌에 도입한 생태학적 문명개념과 합치한다고 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이 책에 피력한 그린뉴딜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현재 한국에서 진행중인 그린뉴딜 논의는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이 최저임금 도입을 포함한 노동권강화 등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도외시 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기진작에 치우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물며 지금의 그린뉴딜은 1930년대 뉴딜의 재현이 아니라 수평적 권력분산과 생태학적 인식에 기반한 새로운 인류문명의 비젼을 담고 있는 것에 비해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서의 그린뉴딜은 한참을 본류에서 벗어난 초라한 변형으로 느껴진다.

제레미리프킨의 [글로벌 그린뉴딜]은 읽기에 친절한 책은 아니었다. 필자의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회오리 바람같이 몰아가는 논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고, 따라서 전체의 서술구조는 중복되고 관련 데이터는 복잡했다. 그러다보니 320쪽 짜리 책에서 후주만 60여쪽에 달해 추가 연구를 위한 학술지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고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완독에 상당한 시간이 들었고, 읽기도 고역이었다. 그에 비해 일단 완독하고 나서 책을 다시 뒤척이면서 뒤늦게 재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이상한 책이었다. 변화가 절실한 시대에 맞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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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만리포에서 시내 버스로 태안읍 터미널로 가고, 태안에서 대전, 대전에서 안동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 안동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봉화 집까지 무사히 도착, 67일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여행은 늘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67. 국내 여행치고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고, 특히 태안해변길에 집중된 여행인 만치 여한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고, 우리의 여정은 쉽게 줄었다. 전주를 거쳐 영목에서 시작해 꽃지로, 몽산포로  다시 학암포에서 신두리로 만리포로 이어지던 여정은 끝났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몇일 더 이어가고 싶었던 길이지만 아쉽게 접고 집으로, 일상으로, 일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정을 끝내며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맺어진 인연들에 더욱더 감사하자 다짐했다.

지난 일주일 사이 겨울은 더 깊어졌고, 나에게 가장 파란만장했던 한해인 2020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겨울추위와 코로나에 기대어 남은 한해, 최대한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가지고, 지난 행적을 정리하고, 앞날을 꿈을 그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면서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바다를 보고,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일주일간 땅과 하늘, 바다와 육지사이를 걸었던 아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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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일

비오는 아침에 구례포를 출발, 신두리해변을 걷고, 소근진성을 거쳐 만리저수지, 의향3리를 지나 천리포, 만리포까지 걷고 롱비치패밀리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코로나 창궐뉴스가 계속되고 식당과 팬션에서 숙식을 거부까지 당하다 보니 잔뜩 위축되기 시작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주인부부께 인사도 남기지 못하고 파스텔 펜션을 나서는데 겨울비 답지 않은 빗줄기가 우리를 막아섰다. 빗줄기를 보나 하늘을 보나 쉬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여정을 위한 꼼꼼한 준비를 자부해왔는데 꼭 이를 때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비옷을 챙기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젠장!! 가까이 비옷을 살 곳도 없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 쓰는 것으로 비 방비를 대신하고 그나마 빗줄기가 가늘어지는 순간, 길을 나섰다. 634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으니 금방 향촌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20여분쯤 더 걸어 오른쪽으로 도로를 벗어나 향골이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한적한 농로를 따라 드문드문 농가가 흩어져 있는 마을을 관통해 신두리로 넘어가는 양청이재로 향했다.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은 인기척마저 드물었고 비가 지척이는 논두렁을 지나 언덕을 오르자 금방 마을은 끝이 났다. 다행히 그즈음 빗줄기가 가늘어 졌고, 우리는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신두리 해변에 거의 다가왔다는 느낄 수 있었다. 길은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 작은 마을을 지나 곧이어 중장비가 쓸고 지나간 지형이 넓게 퍼져있는 황무지로 이어졌다. 안내판은 공사를 하다만 것 같은 황무지가 조성중인 골프장임을 알렸다. 잠시 길을 잃고 우리는 골프장을 조성중인 사유지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돌아 나오기는 아까워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황무지를 지나 마침내 우리는 저수지를 끼고 돌아 신두리사구가 시작하는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해변은 저멀리 달아난 바닷물 때문에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었고 이 곳이 해변길 1코스 바라길의 시작점임을 알리는 표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해변과 저수지를 가르는 둑방 위로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었다. 해안으로 내려갈지 트레일을 따라 걸을지 잠시 망설였지만 해안의 사구는 어디까지가 보호구역이고 진입이 개방되어 있는 곳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아 결국 트레일을 선택했다.

왼편으로 저수지를 접하고 오른쪽으로는 썰물로 드러난 넓은 모래사장과 더 멀리 펼쳐진 약 1키로를 걸어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급히 사람의 기척이 없는 관리사 같은 빈집의 처마 밑으로 달려가 비가 잦기를 기다렸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우리는 다시 걸음을 이어갔고, 길이 갈라진 지점을 만나 해안과 나란히 나아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목재데크가 깔린 길이 갈대밭 속으로 우리를 이끌자 본격적으로 신두리 해안사구의 풍경이 펼쳐졌다. 끝을 알수 없는 갈대 숲속에서 가물가물 흐려지는 지평선을 바라다 보다 문득 우리가 길을 잃고 사막에 갇힌 듯 느껴졌다. 아니 세상을 피해 사막 속으로 숨어든 듯 평안과 안도가 그리고 조금의 외로움이 일었고 저 멀리 모래언덕 넘어 혹 어린왕자라도 마주칠까 설레임이 피어났다.

 

2키로 정도를 걸으니  위락시설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갈대마저 드문 모래 언덕들을 넘으니 신두리 관광단지 같은 곳에 도착했다. 단지를 관통하는 까페와 호텔이 즐비한 도로로 접어들자 허기를 느꼈고 우리는 한 까페에 들러 가벼운 피자로 늦은 아침겸 점심을 해결했다. 우리는 길을 계속 이어 신두리해수욕장을 벗어난 지점에서 다시 바다와 접한 해안길로 접어들었다.

비가 완전히 그치자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날릴듯한 바람을 맞으며 해안길을 따라 소근진성을 지나고 직선으로 뻗은 제방도로를 걸어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서 해안을 벗어나 천리포로 바로 넘어가기 위한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마을 초입에는 너른 논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곧게 뻗은 논두렁길을 걸어 마을을 가로질러 천리포로 가는 언덕길로 접어들어 걷기시작하고 걸음이 늘어날수록 시야는 터이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적은 드물었고 시야에 들어오는 낡아가는 집과 방치된 밭은 쇠락해가는 농촌의 슬픔을 전해주었다. 그래도 마을 한켠에서 세월을 버티고 있던 늙은 감나무 한그루가 상처받고 능욕당하고도 끝내 존엄을 잃지 앓은 늙은 인디안 추장처럼 마을을 지키녀 지난 삶의 온기를 전해주었다.

 

언덕길의 넘어서자 마자 천리포가 나왔고 천리포의 마을을 관통해 남쪽으로 계속 걸어 천리포수목원을 지나자 그곳이 만리포임을 알리느 표지판들이 나왔다. 만리포는 늘어선 호텔과 까페, 레스토랑을 통해서도 얼마나 큰 관광지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 다른 곳에서 불수 없던 서핑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겨울바다를 보는 것 만도 오금이 저리는데 추위에 아랑곳하지 안고 서핑을 하는 청춘이 부러웠다. 점심겸 저녁을 먹고 바람이 거세지는 거리를 걸어 롱비치페밀리호텔을 숙소롤 잡고 짐을 풀었다. 어두워지기전에 인근 마트에서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해결할 장을 보고 태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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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아침 8시 백사장항과 드르니 항을 이어주는 조망다리를 건너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를 그쳐 해안사구에 형성된 솔숲길을 걷고 해안으롭 멋어나 남면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읍을나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이동하고 학암포에서 걸어 구례포에 도착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다. 

어제는 노을없는 5코스 노을길을 완주하고, 집나온 지 처음으로 실망스런 저녁을 먹고, 여정의 끝에 김기덕 감독의 사망 소식마저 들었다.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하루였지만 영화감독 김기덕은 낯설은 이국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고,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의 고향이 봉화라는 이유로 딱 한번 생가터를 찾아 이웃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해 들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죽음은 계속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천제적인 영화감독으로 살다, 성추문으로 상처받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가야 했던 그의 운명이 애닯았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과 잘못의 댓가는 또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에 그의 영광과 치욕이 함께 그의 죽음을 통해 무로 돌아가길 빌었다. 죽음 뒤에 따르는 비난도 생전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칭송도 이제 산자의 몫이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드르니항에서 태안 8경의 하나인 몽산포로 이어지는 4코스 솔모랫길을 완주하기 위해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다. 백사장항에서 드르니항으로 넘어가는 인도교는 엄청난 높이에 큰 규모로 지어져 다리를 건너는 내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생활도로도 아니고 물론 차도 다닐 수 없고 오직 트레커나 관광객을 위한 다리치고는 너무나 거창했다. 그래도 막상 다리위에서 바라다 보는 서해의 풍경은 장엄했다. 다리를 건너자 아침 해가 동쪽하늘로부터 비추기 시작했다. 석양대신 여명을 사진에 담고 드르니를 벗어나 갯벌과 양어장 사이의 둑방길을 따라 길을 이어나가자 바다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신온리라는 지명의 염전이 펼쳐졌다. 염전을 따라 걷다보니 길은 다시 솔숲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는 고운 모래밭에 형성된 솔숲 사이를 쉼 없이 걸어 나갔다. 2시간을 걸려 6키로쯤 솔숲을 걸은 끝에 청포대에 이르렀고, 길은 다시 해변을 따라 달산포까지 이어졌다. 해수욕장은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로 나뉘어져 이름을 얻고 있었지만 뚜렷한 경계도, 이름을 나눈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그냥 하나의 해변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바닷새 무리를 만나 걸음을 멈추기도 했고, 그래도 주말이라고 해변에서, 솔숲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깰 정도는 되지 못했고, 그냥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빨아들이며 아무런 동요도 없는 적멸의 영역에 들어선 듯 가볍고 평화로운 걸음을 이어가니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길이 줄어 몽산포의 헤수욕장의 남쪽 끝단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몽산포로 접어들 무렵 시간은 정오를 넘어서고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해변을 다라 가서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 길을 육지 쪽으로 틀어 남면 면소재지로 기수를 돌렸다. 금방 나올 것 같던 시가지는 쉬 나오지 않았고, 배고픔에 거의 지쳐갈 즈음 남면 면사무소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건너길 모서리에 자리한 후줄구레한 식당은 한눈에 썩 끌리지는 않았지만 배는 고프고 다른 대안을 찾기도 귀찮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신성식당이라는 이름의 동네 식당에는 이미 피크를 넘긴 점심시간이기도 해선지 조용했다. 공사장 인부차림의 손님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드시고 계셨지만 이내 식당에는 우리만 손님으로 남게 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추천하는데로 평소에 먹고 싶던 물곰탕을 시켰다. 이내 상이 차려지고 물곰탕이 나왔다. 그런데 웬걸,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푸짐하고 시원하고 맛있는 식사를 만났다. 아침도 먹지않고 오전에 15키로를 쉬지 않고 걷고 나서 만난 물곰탕은 허기와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남면에서 오전 걷기를 멈추고 버스를 타고 태안읍으로 이동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의 북단이자, 해변길 1코스의 시작점인 학암포롤 향했다. 남면에서 태안읍을 거쳐 다시 남폭운전하던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도착하는데는 한시간을 조금 넘는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암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를 얻을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다보니 걸음을 조금 더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학암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풍경이 아름다운 만치 그만치 사람의 발길이 잣고 상업화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애써 눈을 바다로 돌려 섬과 해안이 조화로운 풍경만을 담았다. 해안까지 바짝 붙어 형성된 사설 텐트촌과 방갈로, 그리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가들을 피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나갔다4키로 정도를 한시간 동안 걸으니 구례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구례포 역시 해안쪽 모레사구에는 텐트촌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예상외로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아이들이 텐트사이를 뛰어다니고 여기 저기 고기곱는 연기조차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텐트장을 들어서는 차들도 적지 않았다.

해안을 벗어나 634번 지방도를 따라 드문드문 자리한 민박과 펜션을 찾아 나섰지만 쉬 숙박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집은 영업을 접었는지 문이 잠겨있었고, 어떤 집은 아예 코로나 때문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문적박대를 했다. 다행히 길가의 펜션 안내판을 보고 전화를 돌린 끝에 파스텔팬션에 여정을 풀 수 있었다. 코로나가 휴가 풍경도 바꿔놓았는지 텐트촌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막상 펜션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은 팬션 역시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주인의 소개로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을 소개 받았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식당은 영업중이었고, 막 도착한 경찰관들이 식사를 위해 식당을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뒤이어 우리가 식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주인이 질색을 하면 우리를 외면했다. 코로나 때문에 단골 손님외의 여행객들은 손님으로 받을 수 없다며 매몰차게 우리를 문적박대 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것은 사실이었지만 뭐 코로나 공포가 그런 대응을 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소로 돌아와 주인아주머니를 찾아 라면이라도 빌려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슈퍼마켓이 있고 차로 우리를 데려다 주셨고 라면과 도시락 등 간단한 식재료를 구입해 숙소롤 돌아올 수 있었고, 주인아주머니께서 맛있는 김치까지 한포기 내어주시는 바람에 그나마 저녁을 성찬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 나온지 4일동안 옷점에서 만나 신세를 졌던 최씨 할머니, 장곡에서 차를 태워졌던 주민분에 이어 오늘 예정에 없던 차를 태워주고 김치를 내어준 파스텔 팬션을 이번 여정의 3번째 은인으로 기억에 남겼다.

저녁을 먹으며 켠 TV는 코로나가 다시 대유행기로 접어들었다는 뉴스로 도배를 했다. 숙박시설이 비고 손님을 거부하던 팬션과 식당도 경험하고 나니 우리도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정을 줄일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 이틀 정도 일정을 늘일까했던 나의 생각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는 초소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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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꽃지해변 델마호텔을 나와 드르니항을 향해 출발 방포항과 기지포 해수욕장을 지나 드르니항과 다리 하나를 두고 마주한 백사장항에서 멈춰 럭스팬션텔에서 여장을 풀엇다.

어제 우리의 발길은 샛별길코스 의 종점이자 서해안의 아름다운 노을을 대표한다는 꽃지에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도착한 꽃지해변은 잔뜩 기대했던 노을을 우리에게 선물하지 않았다. 날씨는 흐렸고, 구름을 비낀 하늘조차 노을을 품지 못했다. 일출이든 석양이든 행운이 따라야만 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석양없는 저녁어스름이 내리는 해변을 싣컷 걷고 편안한 잠을 잤다. 늦은 아침 눈을 뜨니 창밖을 자욱한 안개로 오늘 하루 불안한 여정을 예감케 했다. 배낭을 뒤척여 남은 먹을거리로 아침을 해결하고 델마호텔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 드르니항으로 향했다. 꽃지 해변 주차장을 벗어나자 마자 도보용 현수교를 지나 방포항으로 건너갔다. 방포는 수산관련 창고가 늘어선 소박한 어촌마을이었는데 의외의 곳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크지 않은 규모의 [바다목장체험장]이 들어서 있었다. 작은 규모지만 그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기대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다른 농어촌에 즐비한 관에서 지원하고 마을에서 운영하는 시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은 실망감을 안고 나와 방포해변으로 넘어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높지않은 언덕의 정점에 있는 전망대에서 지나온 꽃지해변을 뒤돌아봤다. 슬픈 사랑을 전하던 할미할애비바위 넘어 끝없이 펼쳐진 꽃지해수욕장에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방포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적없는 겨울 방포해수욕장은 아름답고 호젓했고 조금은 쓸쓸하기조차 했다. 꽃지 못지않은 너른 모래사장의 끝은 어디인지 가물가물했지만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겨울 바다의 정취에 취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끝날 것 같지 안않 모래사장은 끝이 나고 우리는 석양길은 우리를 야트막한 산길로 이끌었다.

내륙지역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서해안 답게 벌써 수확이 끝났어야할 배추가 시퍼렇게 자라고 있는 산자락에서 농부 한분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고 나 자신도 배추농사 끝내고 모처럼 여행을 왔노라 말씀드렸더니 너무 반가워하셨다. 같은 농부끼리 만나 올해 가물어서 힘들었던 일이며, 폭락했던 가을 배추값과 어떤 배추 품종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참을 대화하다 인사를 나누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끝없는 바닷 풍경에 시린 눈을 쉬기에 적당할만치 산길을 걷자 두에기 해변이 나왔다. 두에기 해수욕장은 방포나 그보다 훨씬 넓었던 꽃지해수욕장과 달리 아담한 가족해수욕장 같은 분위기였다. 겨울 바다의 멋은 꽃지나 방포가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막상 해수욕 철이라면 나는 덜 붐비는 소박하고 아담한 두에기 해수욕장을 찾을 것 같았다. 금새 두에기 해변을 벗어나 길은 다시 밧개해수욕장으로 이어졌다. 서해안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해안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해수욕장은 그 이름조차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꽃지, 방포, 두에기, 밧개... 밧개해변에서 다시 긴 걸음을 걷고 우리는 다시 바닷 쪽으로 내민 야트막한 야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야산의 정점에는 목재 테라스로 꾸민 작은 전망대가 나왔다. 다리도 쉴 겸 배낭을 벗고 도인들이 유달리 많았다던 두여해변을 눈에 담고, 바닷바람은 가슴에 품었다. 남은 빵과 과일로 점심을 해결하는 중에 한 무리의 트렉커들이 전망대로 들어섰다. 해변길을 걷기 시작한지 이틀만에 첫 여행자를 만난 반가움에 먹던 밀감을 나누고 서로의 행운을 축원하며 헤어졌다.

두여해변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치 모래사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꽃지보다 훨씬 긴 해변을 따라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단락 지을 수 없는 해변을 따라 두여해수욕장, 안면해수욕장, 기지포해수욕장, 삼봉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이어졌다. 안내 지도를 보니 그 끝을 가르는 작은 산을 넘으면 오늘의 목적지 드르니항이 자리잡고 있었다.

10리길도 넘어보이는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걸었다. 아무런 에피소드도 돌출적인 볼거리도 예상못한 사건도 없이 그야말로 풍속도 풍향도 변하지 않고 바닷새의 울음소리조차 시계추 같이 주기적인 정물화속에 나 자신이 녹아들었다. 다리는 걸었지만 의식은 낮잠을 자는 듯 몽롱해질 즈음 멀리서 보이지 않던 작은 강이 모래사장을 끊고 우리는 발길을 돌려 해안을 잠시 벗어나 창정교라는 다리를 건너야했다.

다리를 건너 시지포로 이어지는 길은 해안 사구에 형성된 솔숲으로 이어졌다. 낙엽쌓인 모랫길과 간혹 목재 데크로 이어지는 시지포 생태 탕방로를 따라 걷는 길은 의외로 많은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가능한한 눈길을 피하며 옷깃이라도 스칠까 경계하며 멀찍이 빗겨났다. 이런 기괴한 행동을 통해 우리가 코로나19시대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했다.

해안이 끝나는 지점에서 유카가 무성한 삼봉이라는 작은 산을 비켜 백사장해수욕장에 도착하고 이내 드르니항이 건너다 보이는 백사장항의 위락지로 들어섰다. 횟집과 호텔이 즐비하고 수산물 가게들도 늘어선 백사장항에서 오랜만에 작은 무리나마 인파를 마주쳤다. 우리도 한 무리가 되어 가게들을 구경하며 숙소를 찾아 나섰고 우리의 취향과는 다른 조금은 낡은 한 모텔을 예약했다. 담배 냄새에 쩔고 어두침침한 모텔은 내가 기피하는 첫번째 숙소임에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골목을 누비다 해안에서 마을 쪽으로 좀 들어간 한적한 식당에서 짬뽕을 먹고 다시 숙소에 돌아와 한 쉼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배고픈 긴밤을 견뎌야하는 상황이 될까 걱정되어 다시 숙소를 나와 가까운 횟집에서 회덮밥으로 저녁을 먹으니 하루가 저물고 계획한 여정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자각이 몰려왔다. 무심한 시간은 원망하며 남은 일정을 꿈꾸며 깊고 편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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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830분에 영목항회관을 출발, 가경주마을에서 해변과 만나 고남제방길을 거쳐 장곡리까지 이동, 장곡리에서 트럭을 얻어타고 안면읍으로 나가 점심식사를 하고 장을 보고 걸어서 꽃지해변에 도착, 델마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8시30분 숙소를 나와 멀리 원산도를 지나 보령까지 이어지는 신설 연육교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방향표지판을 뒤로하고 ‘태안해변길 7코스 바람길’을 걷기 시작했다. 출발부터 해안을 따라 걸어서야 하는데 해변길이 계속 이어지는지 확인이 되지 않아 지도에 나와있는 길을 선택하다보니 찻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버스로 들어왔던 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30여분을 걷다가 이내 도로를 벗어나 해안 쪽을 향해 서진했다. 인적이 드문 만수동이라는 작은 마을을 가로질러 끝없는 갯벌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까지가 갯벌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모를 풍경을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길은 우리를 해안을 벗어난 작은 야산으로 이끌었다. 묵은 밭과 갈대 사이를 비집고 야산을 넘으니 가경주라는 마을이 나왔다. 안내판을 보니 마을 풍경이 아름다워 佳景地라는 지명이 붙었고 이것이 나중에 佳景州라는 마을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했다.

 

 

아침을 굶고 출발한 탓에 배가 고파왔고 마을에 들어서다 혹시라도 식당이 있나 두리번 거렸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주민에게 물어보니 근처에는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가경주마을의 해안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다시 길은 언덕으로 이어졌고 언덕길을 따라 현대식 펜션 사이를 걸어 가경주를 벗어났다.

 

 

늘어선 팬션이 끝나는 지점에서 옷점마을(고남4리)이 우리를 반겼다. 조개부리 체험마을로도 알려져 있어 혹시라도 식사를 해결할 식당이나 마트가 있지 을까 기대했지만 마을은 소박했고, 조용했다. 정감넘치는 좁고 꼬불꼬불한 마을길을 접어들어 얼마걷지 않아서 나지막한 집에 조그만 점방이 나왔다. 과자와 음료수 몇가지 정도가 진열되어있는 구멍가게에는 다행히 라면도 보였다.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한 가게에 문을 여니 할머니 한분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아내는 컵라면과 식수, 과자를 사고 나는 가게앞 조그마한 평상에서 물끓일 준비를 했는데 주인 할머니가 우리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날도 찬데 한데서 고생하지 말고 라면 끓여줄테니 집에 들어오라고 종용하셨고 우리는 못이기는척 방에 들어섰다. 막상 방에 들어가 할머니를뵈니 할머니께선 한쪽 다리를 잃고 불편하신 몸으로 우리를 위해 라면을 끓이고 계신게 아닌가! 뭉클한 마음에 그냥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오신 듯 반갑고 애틋하고 늘 찾아뵙던 분을 다시 만난 듯 긴장이 풀렸다. 차려주신 상을 받아 라면과 맛있는 김치를 먹으며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살며보는 집은 구석구석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고, 할머니의 삶을 이루는 자식이며 손주들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가게를 나섰지만 할머니의 삶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환대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 남아 나의 삶을 따듯하게 데워줄 것 같았다.

 

 

옷점 마을을 지나 다시 해안을 따라 북상하니 해안을 따라 직선으로 뻗은 제방이 나왔고, ‘고남제방길’이라고 했다. 제방길에 올라서니 새삼 시원한 바닷바람이 싱그러웠다. 맑은 햇살과 확 트인 시야, 그리고 시원한 바람까지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고남제방길을 지나 또다른 제방길이 이어지고 모래밭이 넓게 펼쳐진 ‘바람아래’라는 해안에 도착했다. 배낭을 벗고 모래를 만지며 쉬다가 산길로 올라서 다시 7코스 바람길의 시작점인 황포로 발길을 옮겼다. 산길을 걷다보니 오늘 걸음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장곡이라는 곳에서 벤치를 만났다. 잠시 쉬면서 다음 코스에 대해 아내랑 의견을 나누다보니 무엇보다 식사가 문제가 되었다. 아침과 점심을 겸해 라면 한 개를 먹은 것이 전부인데다가 얼마를 더 가야 식당이 나올까 불확실했다. 우리는 과감하게 코스를 벗어나 마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장곡에서 해변길을 벗어나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역시나 식당을 찾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버스로 면소재지로 나갈 마음을 먹고 장곡리 마을회관마당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회관에 트럭이 한 대 들어서는 걸 보고 다가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버스 시간을 물으니 원하는 데까지 태워줄테니 무조건 타라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운 분을 만나 농사이야기, 염전이며 새우 양식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안면읍까지 나와버렸다.

 

 

안면수산시장에서 늦은 점심은 먹고 4km를 더 걸어 꽃지해변에 도착했다. 공원 주차장 한켠에 있는 델마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방을 얻고 꽃지해변으로 나섰다. 통일 신라 시대 장보고 장군을 따라 출정나간 남편 ‘승언’을 기다리던 아내 ‘미도’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다 바위가 되었다는 할미바위와 그 할미의 한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할아비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구름낀 서쪽 바다로 넘어가고 바다는 물이 빠져 우리는 저녁 어스름 속에 슬픈 사연을 품고 서있는 할미바위와 할애비바위까지 걸어 주변을 서성이며 꽃지해변의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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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아침 9시경 한옥마을에서 택시로 전주고속터미날 도착, 대전행 버스를 타고 11시경 대전터미날에 도착, 태안행 버스를 기다리며 점심을 먹고 쇼핑을 즐기다가 12시반경 태안으로 출발했다. 태안에서 안면행 버스를 갈아타고 15시경 안면에 도착, 15 20분 영목행 533번버스를 타고 16시경 이번 트레킹의 출발점인 영목항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소박한 한옥민박집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제공하는 조식을 사양하고 전날 들고 다니던 간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거리로 나섰다. 우리의 목적지 태안을 향해 간다는 설레임이 앞섰지만 그렇게 바쁠 것도 없는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전주 터미널에서 쉽게 대전행 버스를 잡았다. 버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몰두 하다보니 이내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터미널에 도착하고 보니 전날 묵었던 전주와 대비되어 촌에서 다시 도시로 나온 듯 휘황찬란했다. 붐비는 대합실과 다양한 가게들이 성업중이다보니 사람들이 마스크만 쓰지 않았다면 코로나가 오기 전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내는 트레킹에 맞는 바지를 사고, 나는 대합실을 서성이며 다음 버스로 이어지는 여백을 만끽하며 기억창고를 살찌웠다.

 

 

대중교통으로 이어지는 하루일정이 영목항에서 끝나기까지 한번의 택시와 4번의 버스를 타야했다. 전주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태안으로, 태안에서 안면으로, 다시 안면에서 영목으로 이어지는 버스 여행은 착착 맞아떨어지는 연결 버스 덕분에 기대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루종일 차를 타는 지겨운 하루 일정중에도 대전이라는 대도시 대합실의 번화함도 즐기고, 태안의 정감넘치는 소박한 터미널의 정취도 즐기고, 안면읍의 장터에서 버스를 내려 영목으로 이어지는 버스를 기다리며 느꼈던 시골 장터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서정조차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배낭을 메고 여행중이어서일 것이다. 마지막 늦은 오후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무겁게 내려앉은 흐린 하늘아래 찬바람만 가득한 영목항 종점에 발을 내디딜 때 왠지 모르게 울컷 솟아나던 서글픔이 있었다. 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는 다시 못볼 인연들에 대한 애도의 정감인지, 아니면 바닷바람이 상기시킨 고향진해와 그 바닷가에서 놀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어린시절의 추억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정된 라디오 인터뷰가 있어 미리 ‘영목항회관’에 방을 잡고 아내는 바닷가 스케치를 나갔다. 난생처음 여행지에서 준비가 덜된 라디오 인터뷰를 어설프게 마치고 막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영목항으로 나섰다. 가설다리로 연결된 바지선을 따라 작은 고깃배들이 수십척 정박해 있는 저녁바닷가는 평화로웠다. 바람이 잦아든 해안에는 찬 공기가 내리누르고 인기척 없는 선착장엔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짧은 산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회덮밥’으로 긴 이동이 이루어진 하루의 노고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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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년, 나는 힘들 때 마다 곧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앞세워 견뎌 왔다. 초겨울 배추작업까지 끝난 뒤, 아침마다 된서리가 차창을 하얗게 뒤덮은 대설이 지나서야 마침내 배낭을 쌌다. 여행이 지난 고역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당히 여행할 권리를 앞세우며 일상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늘 바다가 그립고, ‘한량없이 걷고 싶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 태안 해변길을 이번 겨울의 여행지로 선택했다. 해지는 바닷가를 한량없이 걷고 싶은 욕망이 앞섰고 무엇보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미지의 장소라는 점 때문에 안면도를 선택했다. 일정이 다가오자 태안 군청에서 보내준 자료를 잠자리에 들 때 마다 뒤척이며 대충의 코스와 전체 여정의 얼개를 잡았다. 대중교통으로 도시간 이동을 하고 적당히 걷고, 많이 쉬고, 최대한 잘 먹는 일주일 여정의 청사진을 그렸다.

127일 배추 작업을 일달락 짓고 남은 뒷정리를 남겨둔채 짐을 꾸리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태안으로 들어가기 전 중간 기착지를 전주 한옥마을로 정하고, 8일 아침 일찍 이웃의 차를 얻어타고 영주역을 향했다. 몇일 있으면 낡은 중앙선 철도를 개선한 새 노선으로 기차가 다니게 된다는 뉴스에 그래도 봉화살이 24년동안 드문드문 신세를 졌던 낡은 중앙선 철도를 마지막으로 달리고 싶었다. 버스를 타면 전주로 바로 갈수도 있었지만 굳이 영주에서 제천, 제천에서 오송, 오송에서 다시 전주로 갈아타는 기차를 선택했다. 나의 여행은 늘 공간적인 목적지는 부수적이고,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시간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동수단의 효율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12월 8일 아침 7시51분영주역출발, 제천에서 오송행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오송에서 내려 전주행 KTX에 올라 오전 11시34분 전주역 도착, 한옥마을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한옥민박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플랫폼을 짓누르는 영주역 풍경이 새로웠다. 모두가 어깨를 움츠리고 마스크를 쓴 얼굴을 외투 속에 묻고서 침묵하는 긴 시간이 지난 뒤 예정보다 11분 연착한 제천행 열차가 도착했다. 751분 영주역을 출발한 열차는 낯익은 영주 시내를 돌고 풍기를 지나 소백산을 뚫고 단양, 제천으로 달렸다. 1시간이 지났을까, 그대로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 까지 달려갔으면 좋으련만 언몸이 녹고 출발의 긴장이 풀릴 즈음 열차는 제천역에 도착했다. 이어지는 오송행 열차를 갈아탈 시간을 다 허비한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 문이 닫히기 시작한 열차에 뛰어올랐다. 아내의 배낭은 문짝에 끼여 한참을 당기고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시 오송에서 내려 이미 시간을 놓쳐버린 전주행 열차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달려오는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승무원의 독려에 힘입어 사력을 다해 난생처음 타보는 KTX에 몸을 실었다.

불과 서너시간만에 3번을 경험하는 객실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승객이 하나같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옷깃에 최대한 얼굴을 묻은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열차여행은 화장실과 식당칸이 있고, 내부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고, 조금은 웃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는 여유가 주어진다는 기대를 했지만 코로나 창궐기의 열차는 그러지 못했다. 난생 처음 타보는 KTX조차 꼼짝없이 좌석에 갇혀 숨막히는 침묵과 무거운 진동만을 느끼며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했다.

점심시간에 도착한 전주역전은 한산했고 찬바람이 가득했다. 우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으며 전주의 공기를 통해 전주만의 느낌을 탐색했다. 조금은 낡고 스산한 거리의 풍경에서 옛 고도의 사라진 영광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버스로 동부시장까지 이동한 뒤 전주 한옥 마을로 향했다. 한옥마을은 최근에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로 이름을 날리는 만치 코로나 와중에서도 관광지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이성계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는 경기전담벼락을 따라 소박하고 정겨운 거리를 걸었다. 한산한 중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드문드문 문을 닫은 가게들 사이로 뜨거운 김을 거리로 뿜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 한산해서 좋으면서도 동시에 좀더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고 문 닫은 가게들이 성업중인 활기찬 시절에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경기전을 둘러보고 한옥마을 주변 거리를 배회했다. 어진박물관을 비롯해 실내 공간은 모두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었고, 역사 유적이나 명승지는 코로나 시기에 맞춰 수리를 하는지 하나같이 공사 중이었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가 처형되었던 터에 100여년 전에 지어졌다는 전동성당을 비롯해 전주성의 풍남문, 조선시대 객사로 지어졌다는 풍패지관이 모두 공사중이라 지나쳤고, 문이 닫힌 전통문화전당 등을 스쳐지나 황량한 전주 거리를 오후 내내 걷기만 했다. 까페라도 들러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지친 다리도 쉬고 몸도 녹이고 싶었지만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니 그조차 포기했다. 전주 단팥죽과 단팥빵을 찾아 한참을 더 누볐지만 찾지 못하고 손님이 붐비는 수제만두집에서 요기를 하는 것으로 오후 일정을 접었다.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는 소리풍경이라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민박을 잡고, 짐을 풀고 따끈한 방바닥에 기대어 한참을 쉰 뒤에 다시 거리로 나와 저녁을 먹었다. 그냥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웠지만 뚜렷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파고 들어 읽히지 않는 책과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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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트라우마]불평등을 통한 문명 진단이다. 필자 리처드 월킨슨은 불평등이 지금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삶과, 제도를 포함한 존재방식을 형성해오는데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지금의 삶을 지배하는지 분석하고 탐구한다. 나아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불평등 해소 후의 우리 삶의 변화를 제시하기 위해 시도한다.

사실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라는 혐의를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 자신도 필자의 동조자가 되고 말았다. 현대인이 처한 과도한 스트레스, 정서적 장애, 정신병, 좌절, 심리적 위축 및 기만적 우월감을 포함해, 범죄, 마약, 건강과 수명의 문제까지 모든 에 깃든 불평등의 지배적 영향력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불평등은 현대 사회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필자는 먼저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불평등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1마음속의 불평등은 자기회의과대망상그리고 그 탈출구로서의 중독이라는 3개의 장으로 나누어 불평등이 어떻게 우리의 심리적 삶을 지배하는지 수많은 연구 자료를 통해 논증한다.

소득불평등은 지위와 남의 시선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키고 불안과 우울증 그리고 무기력과 절망을 초래함으로써 자기회의에 빠지게 만든다. 이는 한 사회의 우울증 발생율과 불평등 지수의 상관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심리사회학적 사실로 판명된다. 동시에 불평등은 자기회의의 극단에서 자기고양적 편견, 혹은 자기도취증을 유발한다. 불평등 지수가 높은 사회일수록 자기우월적 과대망상을 보이는 비율이 증가하고, 한 사회 내에서도 불평등지수가 높아질수록 자기도취증에 빠진 사람의 비율이 비례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자기회의와 자기도취 사이에 동요하는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중독으로 해결하려 든다.

2부에서 필자는 불평등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입장과, 능력주의 신화에 입각해 불평등의 발생을 정당화하는 입장, 계급을 분리하고, 불평등의 개인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계급행동을 논박한다. 필자에 따르면 인류는 현대인과 뇌 용량이 같은 인류가 존재한 지난 20만년에서 25만년에 이르는 세월 중 약 95%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인간사회는 대단히 평등했다”(p.205.)고 하며 채집 수렵사회의 평등이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깨어지고 축적과 불평등이 발생했음을 논증한다. 따라서 불평등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발생한 것이 아니고 역으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 것이고, “... 타고난 재능 차이가 사회위계 내 위치를 결정하기보다 사회위계 내 위치가 능력과 관심사, 재능을 결정한다”(p.253.)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소득과 부의 차이로 인간을 구분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을 조장하는 문명화된 예의는 지위우월성을 강화하는 장치에 불과하고 계급행동을 통해 계급차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개인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임을 증명한다.

마지막 3부에서 필자는 인류가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불평등 해소가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평등의 확대는 전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을 줄임으로써 더 수월하게 지속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P.345.)한다고 보고. 성장이 더 이상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한계에 이른 지점에서 문명 대전환을 통해 성장대신에 사회적 환경과 관계의 개선을 달성할 것을 요구한다.

[불평등 트라우마]가 보여주는 것은 많은 사회 현상중의 한가지인 불평등이 초래한 사회적 결과가 아니다. 오히러 필자는 불평등이 인류가 당면한 많은 문제의 한 가지가 아니라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정치 현실에서 불평등은 많은 문제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그것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하지만 아파트값 폭등은 빈부격차의 확대가 초래한 결과다. 정치개혁의 부진과 반동의 저변에는 사회개혁의 부재, 본질적으로는 불평등의 확대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불평등의 확대가 정치개혁을 좌절시키고, 정치 개혁의 부진이 불평등 심화로 귀결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에 처해있다. 괴물 트럼프의 집권과 백일우월주의자들의 반란의 저변에도 미국사회의 빈부격차의 확대가 도사리고 있고, 국지적 내분이나 전 지구적 분쟁의 저변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악의 근원은 바로 불평등이라는 괴물이다.

우리는 팬데믹 시대에 4차 산업혁명과 AI, 일자리 없는 성장, 그리고 그린 뉴딜을 이야기하지만 불평등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사고는 작동하지 않는다. 최소한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이 최저임금제 도입을 기초로 하는 노동권 강화를 전제한 사회적 대타협이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그린뉴딜은 사회적 DEAL은 빠지고 기술만능주의에 경도되어있다. 그래서 바로 지금 [불평등 트라우마]는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되는 책이다. 특히 모든 정치인들의 손에 이 책이 들려있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좀더 밝아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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