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뉴스신 서면인터뷰 원고

방향 잃은 지역정치 자생성 심어주겠다.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 계기나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면?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은 저의 청춘을 움직인 힘이었습니다. 생활에 쫒겨 무뎌진 시기도 있었지만 농민이 된 뒤에도 농민과 지역의 삶, 그리고 정치적 정의에 대한 지향은 계속 견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직업적 정치인의 삶을 추구한 적은 없지만 마을공동체 운동을 하고, 농민운동을 하고 그리고 시민 활동을 해온 저의 삶은 언제나 정치적삶이었습니다.

정치인의 삶을 처음으로 고민하게 되었던 계기는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이었습니다. 현실 정치에 대해 결벽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홀로 고고한 척 살아온 저의 삶이 한순간에 흔들렸습니다. 진흙창에서 연꽃을 피우듯 혼탁한 현실에 뿌리내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다 죽음으로 내몰린 그분의 삶을 대하고 정치에 대한 소명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 쫒겨 용기 내지 못했고 농민운동에만 주력해 오다가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통해 지역 정치 지형의 균열을 확인하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소명감에 결단을 하게 되엇습니다. 나서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지고 현실 정치의 장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후보자는 철학과 출신인데., 철학과 정치의 동질성이 무엇이고, 어떤 철학과출신 정치인이 되고 싶은가?

철학과 동문 중에 비교적 정치인이 많습니다. 그래서 던지신 질문으로 이해됩니다. 우선 철학과 정치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실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필수적인 삶의 계기라고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가집니다. 일상생활 중에 문득 다가오는 공허감은 철학적 허기일 수 있습니다. 점포세 인상에 얼굴을 찌뿌리게 될 때 정치의 부재를 느낍니다. 늘 행복에 겨워 살아가고 세상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철학도 정치도 불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둘은 부재할 때만 그 필요성을 느끼고 같이 있을 때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움직이던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가 시작됩니다. 성장 제일주의를 믿고, 오직 경제에만 매달려 온 것이 대한민국의 지난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엄청난 성장을 통해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자랑스런 대한민국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그늘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출산율은 우리 사회가 위치한 지점이 어디인지 보여줍니다. 물질적 풍요사회에 접어 들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은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리고, 공동체의 온기가 사라진 공백을 메꿀 새로운 공동체의 원리가 아직 준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국정지표를 제시하고 출범한 것은 시대적 요구라고 봅니다. 저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에 맞춰 성장 제일주의에서 벗어난 포용국가를 모색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헌신하는 정치인이 되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복지 예산을 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한 국가 공동체의 전망을 세우는 일이기에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모험가의 자세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뜨거운 가슴을 안고 차가운 땅에 발을 디딘 채 불가능한 꿈을 꾸는 모습으로 정치의 장을 헤쳐나가고 싶습니다.

울진영덕 반농지역... 어업인의 미래?

농업과 어업은 같으면서도 다른 영역입니다. 땀 흘려 자연과 맞서 세상 사람들을 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현대화된 영농과 영어의 경영 형태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더불어 땀 흘려 일하는 일차 산업 종사자에 대한 사회적 보장과 보상은 동일하게 요구되기에 농어민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어업의 특수성을 고려한 다른 정책들이 필요합니다.

먼저 어업은 경영 규모가 크고, 어민은 대규모 선주에서부터 어업 노동자까지 분포 폭이 더 넓습니다. 그리고 어업 종사자들도 외국인 노동자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반농반어의 경우가 많은 저소득 어민은 농어민 기본소득으로 보호하고, 어업 혹은 수산업의 진작을 위해서는 다른 결의 정책이 필요합니다. 먼저 어족 보호와 남북어업협력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수산가공업의 진작이 요구됩니다. 나아가 공익형수산직불제나 어업생산보험제 등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상 등 조건에 따라 작황 병동의 폭이 큰 수산업의 특성상 일정한 소득 폭을 보장할 수 있는 어업생산보험제의 경우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고 봅니다. 구체적인 설계를 어떻게 할지 소요예산이 얼마나 들지 면밀해 협의하고 연구해 조속한 시일 내에 도입해야할 것입니다.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할 덕목 3가지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이 정치인인 현실에서 정치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성 정치와 분명한 선을 긋고,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출사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외면하고 정치인을 욕하는 데는 두가지 요인이 동시에 있다고 봅니다. 먼저 정치 혐오를 통해 정치를 독점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음모가 있다고 봅니다. 가장 더러운 정치를 하는 집단일수록 정치에 대한 결벽증적인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공무원, 교사는 아직도 정당 가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렵게 선거참가연령을 18세로 낮췄지만 학교내 선거운동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정치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더러운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고하게 살아갈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다보니 국민은 정치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집니다. 기득권 정치인의 책임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치를 독점한 기득권 정치인은 권모술수와 정치공학에 능하고 개인적 권력의지는 강한데 공적 책임감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선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은 아예 정치의 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모질고 독한 사람들만 살아남는 곳이 정치판이 되어 버린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진 정치인에게는 다음 3가지 덕목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공공적 소명의식, 관행을 거부하는 용기, 새로운 길을 찾는 모험심이 없다면 정치의 장에 진입하자마자 똑같은 기성정치인으로 물들 뿐입니다.

각오/승부예측!

20여년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 해도 수확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난생 처음 나온 총선을 미리 예측해 보라는 요청은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사실 우리 지역에서 수십년간 보수정당이 권력을 독점해왔고, 그런 정치 지형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장기적 보수집권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이 쌓여있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갈망도 폭발 직전으로 늘어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권자는 현명합니다. 지난 반세기 넘어 보수 일변도로 맹목적인 지지를 몰아줬지만 중앙정부가 보수정권일 때 조차 우리 지역은 외면받고 소외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수일변도의 맹목적 지지가 오히려 지역의 이익을 놓치게 하고 지역민의 정치적 주권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지역의 보수정치세력은 공천에 목을 매지 지역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공천이 곧 당선이니 유권자는 그냥 동원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유권자는 전략적 선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권자가 대접받기 위해서는 절대 특정 세력에게 표를 몰아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0여일전 처음 유권자를 만나기 시작할 때 외면 받을까봐 두려움도 컸습니다. 하지만 지난 40여일 동안 유권자의 태도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그 속도를 415총선까지 이어간다면 지역의 정치 지형을 뒤집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상대당의 훌륭한 후보들과 당당히 맞서 토론하고 경쟁해서 민주당 승리를 지역 유권자님께 선물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반응형
반응형

그리하여 우리는 ‘노발대발’하며 하나가 되었다!

[2013 자원봉사자 봉하캠프 회원후기] “내가 좋아서”라는, 놀라운 힘 확인한 1박2일

회원 ‘송화’님

 

 

노란 바람개비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 하나,
태양 볕을 홀로 묵묵히 받아내고 있는 큰 바위 둘,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하하 호호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 셋,
수많은 장면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 곳에 오롯이 머물고 있었다.

지난 주말 봉하마을에서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1박2일 캠프가 열렸다. 실은 나는 자원봉사자에게 마련된 캠프인지 모르고 신청했다가 운 좋게 얻어 탄 외부인이었다. 그저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뿐 제대로 자원봉사를 해본 적이 없다. 타인 아닌 타인으로 캠프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이번 여행은 봉하마을에 머물게 된 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마운 여행이었다.

8월 10일 토요일 아침. 기대에 부푼 마음을 안고 봉하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버스가 출발하고 나니 기대감보다 큰 초면의 어색함이 엄습해왔다. 어리둥절하게 서서 사람들이 서로 인사 나누는 모습을 구경하고, 그들이 흥겹게 어우러지는 것을 그저 멀찍이서 바라만 보았다. ‘혼자라도 봉하마을을 실컷 즐기다가 가야지’하던 중에 불행 중 다행으로 같이 점심을 먹자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고마운 언니 둘. 통성명을 하고 갖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색함 속에 작은 물꼬가 트이자 친해지는 건 순간이었다.

대학 3학년 영화학도가 만난 ‘내마음속 대통령’

마침내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먼저 오신 자원봉사자 여러분이 우리를 반겼다. 언니 오빠들도 있고, 삼촌과 이모뻘 되는 분들도 많다. 직업과 사는 곳도 참 다양했다. 대구에서 두 딸과 함께 열심히 노무현 대통령님을 응원하고 계신다는 분, 남자친구와 지지하는 당이 달라 고민이시라는 분, 부모님과 정치성향이 달라 갈등을 겪고 계신다는 분, 주변사람들 몰래 오셨다는 분, 매주 한 번씩은 꼭 봉하에 와야 마음이 놓인다는 분, 대통령님이 서거하신 뒤부터 습관처럼 봉하마을을 찾는다는 분, 온라인 활동만 하다가 처음 나오셨다는 분…, 다들 처음 뵌 분들이었지만 모두가 참 좋은 사람들이란 느낌이 들었다. 하나같이 유쾌하고 싱그러움이 묻어났다.

나는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 소중한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1박2일 내내 카메라와 캠코더를 들고 다녔다. 처음엔 내 스스로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의식을 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잘 다가갈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싫어하시거나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꺼림칙해 하실 수도 있다는 우려감, 촬영을 하면서도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촬영을 아예 중단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저기요 학생, 촬영 말인 데요…’하는 부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오히려 사람들이 먼저 호기심 있게 다가와주었고, 응원을 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도와주겠다는 분도 계셔서 나는 점점 더 대범해질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소문으로만 듣던 아방궁(?)에 들다

대통령님 묘역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예를 표하는 모습, 영상 40도에 달하는 폭염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대통령 길을 오르는 모습, 봉화산에 올라 평화롭고 아늑한 대지 본연의 풍경도 감사한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앞사람과 뒷사람이 하는 농담과 산속 가득 울려 퍼지는 유쾌한 웃음소리, 방문하는 곳마다 대통령님의 관한 갖가지 숨은 일화가 영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대통령의 길을 걷기 전 노무현 대통령님의 사저를 직접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더위에 지친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권양숙 여사님께서 시원한 차와 수박을 내어주셨다. 환한 웃음, 따스한 그 마음은 카메라에 담지 않기로 했다. 온전히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은 마음이었다.

사저는 목재로 벽이 둘러싸여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방이 분리된, 조금 불편하지만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고 느낄 수 있는 구조였다. 잘 정돈된 마당엔 꽃과 들풀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다. 지붕이 낮은 게 눈에 띄었는데,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설계했다고 한다. 대통령님이 업무를 보고 책을 읽으셨던 서재, 사자바위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의 사랑방, 소담하지만 기품이 있는 정원. 곳곳에서 소탈하고 진실된 마음이 느껴졌다. 집 안팎의 풍경만 보면 모르는 사람이 봐도 어떤 이가 살고 있는지 절로 느껴질 만했다. 아름다운 집이었다.

자원봉사자 60여 명이 한목소리로 ‘노발대발’했던 밤

그리고 두 번째 날, 아니 봉하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명계남 선생님의 명강연, 김정호 대표와 김경수 본부장과의 살가운 대화, 몸과 마음이 하나 되었던 ‘별밤 운동회’ 그리고 뒤풀이까지… 밤 깊은지 모르고 ‘노발대발’(무현재단이 전해야 한민국이 전한다)를 외치며 보낸 탓에 표정들이 다들 가관(?)이다. 눈곱조차 제대로 떼지 못한 채 부어있는 얼굴들이 하나 둘 마당으로 모였다. 마치 오래 함께 산 한식구들처럼 격의 없는 모습. 우리들 사이의 작은 벽은 밤사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화포천 길을 따라 페달을 밟았다. 싱그럽고 향기 좋은 풀 냄새와 흙내음이 아침잠을 깨웠다. 마음이 정화되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이 노무현 대통령님도 자주 산책하며 오갔던 길이라고 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화포천 자전거 산책을 마치고 방앗간에 들러 김정호 대표에게 친환경 농사와 봉하쌀의 이모저모를 배워 듣는데 특별한 손님이 우리를 찾아주셨다. 어제 권양숙 여사님에 이은 두 번째 깜짝손님의 등장이다. 문재인 의원님이셨다. 최근 좋지 않은 일들이 이어져서 그런지 조금 수척해진 모습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와 힘 그리고 희망이 실려 있었다. 어렵지만 함께 이겨나가자는 말에 용기가 솟았다.

꿈같은 1박2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캠코더의 촬영 표시등에도 이내 불이 꺼졌다. 솔직히 더운 날씨에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고, 등산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은 주저했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가는 봉하버스에 앉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셔버렸다. 뭔가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못 다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봉하로 간 까닭은?

버스 안에서 대통령님의 애창곡 ‘작은 연인들’을 합창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내 나이보다 오래된 노래라 가사도 음정도 잘 모르지만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가슴 뭉클했다.

이제는 좀 더 속내를 터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캠프에 참여 신청을 한 건 당연히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다른 마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내 욕심은 봉하마을을 향해 움직이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생각 그리고 그 사람들을 봉하로 모이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카메라에 담아가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지. 그러나 아직 잘 모르겠다. 1박2일 동안 많은 자원봉사자 분들이 나와의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분명한 대답을 주진 않았다. 대신에 묘하게 자꾸 떠오르는 대답이 하나 있다. “내가 좋아서.”

많은 분들이 같은 말을 했다. 내게는 복잡한 퍼즐 같은 그 말을 이리저리 조합해본다. 내가 좋아서? 그냥 좋으니까 봉하에 온다? 봉하에 무엇이 있기에 그리 좋을까. 퍼즐을 잘못 맞췄는지 애초에 맞출 필요가 없던 것인지, 나 역시 ‘내가 좋아서’라는 말밖에는 별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사람들 속엔 씨앗이 있다.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다른 씨앗. 우리는 느리지만, 또 생각보다는 빨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을 닮아가면서 말이다. 다음번 봉하행에서는 어떤 느낌이 들까? 내 카메라에 담길 풍경도 지금과도 또 다를 테지. 아름다운 세상, 봉하와의 재회가 기다려진다.


반응형
반응형

도시농업을 통한 도시재생과 도시해체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몇년전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가까이 두고 읽었다는 책의 목록이 공개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그뒤 구입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맙게도 친절한 이웃으로 부터 먼저 선물을 받게되었다.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온 [아바나의 탄생]은 나의 게으름과 산만함에 쫒겨 책장 한켠에 몇년을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었다.  

[아바나의 탄생]이 나의 책장에 방치되어 있던 세월동안 생태도시 아바나는 참 친숙한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작동불능에 빠질 조짐을 보이자 사람들은 부지런히 쿠바를 찾았다고 한다. 환경운동가나 농촌운동가는 물론이고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발길까지 부지런히 쿠바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쿠바는 신자유주의의 작동유무이전에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도시의 황폐화, 후쿠시마가 보여준 핵재앙, 지구온난화가 불러온 기상재앙 등 기존의 세계를 지탱해왔던 기반이 흔들리게 될 때마다  우리의 의식에서 되살아나는 어떤 이상향 같은 곳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 쿠바는 하나의 엄연한 생태적 대안 모델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부당한 무역봉쇄정책에 맞선 생존전략으로 채택된 쿠바의 도시농업 도시공동체 사업이지만 이제는 쿠바모델이 에너지 위기- 경제위기 대응전략이 아니라  하나의 엄연한 존속가능한 반생태적 자본주의 대안 모델로 모색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쿠바의 도전은 적지않은 충격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도 살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가질정도로 소비적 반생태적 삶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사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본 사람은 다 아는 유기농의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전국적으로 보편화시키는 과정은 참으로 고무적이었다.  "중앙집권적 '복지국가'의 체제를 개조하여 의사와 환자와의 동반자적 관계에 의해  개인의 자연치유력과 커뮤니티의 힘을 이끌어내는 '자급적인 의료'로 전환을 꾀"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중국의학을 도입해 약품등 물자부족으로 인해 의료가 중단된 서양의학을 대체해 나가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로 감동적이었다. 특히 빈곤문제를 사회자본의 활성화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문제의식은 낙후된 한국의 복지 인식에 비해 훨씬 진전된 것으로 느껴졌다. 저에너지를 넘어 에너지 제로 사회를 향한 쿠바의 노력은 핵위기에 노출된 한국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아뭏튼 쿠바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사회 구성을 상상할 때 불가능하다고 밀쳐두게 되는 영역이 그만치 줄어들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한명의 농부로서 이 책의 내용을 다시금 음미해 보면 몇가지 의구심을 피할 수 없었다. 도시농업과 농촌농업의 건강한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하는지 이 책은 다루고 있지 않았다. 사실 사회 시스템 전반이 바뀌지 않고 도시농업을 도시 재생 프로그램으로 적용가능할지도 잘 이해되질 않았다. 도시 근교의 텃밭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서울 도심에 개인적 취미 생활정도가 아니라 유의미한 채소밭이 가꾸어질 수 있다는 것이 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앞장서서  황폐한 서울의 삶을 치유하기 위해 공동체의 가치와 도시농업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분명히 의미있는 일이고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시속으로 들어간 농촌이 진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해 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도시는 도시적인 편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급기야 농촌스런 가치마저 흡수하게 되는 현실이 결국 농촌의 존재가치를 손상하는 로 나아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농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도시농업을 통한 도시의 재생이 더나아가 도시의 해체로 나아가야하지 않을까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도시의 해체는 지방과 서울의 차별을 사라지게 하고 나아가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시의 유지 존속을 위한 많은 노력들 대신에 도시해체를 통해 시가 갖는 병폐 자체를 해소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센프란시스코 등 소개된 다른 도시의 도시농업은 쿠바의 도시농업과 비교될 수 없어보인다. 도시농업을 통해 도시 재생이 과연 가능할까는 의구심을 가지는 사례는 바로 서울이나  센프란시스코와 같은 도시의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 쿠바의 사례는 그런 도시의 사례와 분명히 단전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아바나는 도시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속에서 도시의 해체ㄹ르 통해 도시를 구한 사례가 아닐까? 그런데 과연 서울이, 센프란시스코에 쿠바의 사례를 적용하는게 가능할까? 사실 많은 고민이 필요한 지점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끝내 해결되지 않는 한가지 의문이 남았다. "카스트로 정권은 이전까지의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 체제를 개혁하고, 관청을 반으로 줄이는 철저한 행정개혁을 추진하면서 시장과 경쟁원리를 끌어들여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동을 시험하고 있다'는 필자 요시다 타로의 진술을 어디까지가 질실인지 가름할 어떤 논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 극복 방안으로 주목받는 쿠바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동을 시험하는 사례로 언급된다는 점은 아무리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쿠바의 노력은 중앙집권적 국가주의 사회주의에서 민주적 분권적 사회주의로의 전환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농민시장을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제도로 이해하는 필자의 입장을 나는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는 데 있어 보다 폭넓은 자유를 얻었다.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는 늘 경험에 종속된다. 그 한계를 깨고 상상력을 넓혀주는 책은 분명히 양서일 것이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그와같은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에게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그런 책임에 분명하다.

 

반응형
반응형

 

싸우는 법이 아니라 이기는 법을 배우는 책

 

만델라는 자신의 삶의 역정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이라 말한다. 그 길은 자유를 향한 길이었기에 멀 수 밖에 없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먼나먼 길이라고는하지만 자유를 향한 길이기에 중간에 주저앉지 않고 참고 버텨낼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만델라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해방 투쟁은 먼길이었을지언정 불투명한 길은 아니었다. 아파라트헤이트를 분쇄하고, 다인종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한 투쟁의 대열은 명확한 목표를 공유했다. 영미의 불투명한 자세가 끊임없이 문제를 꼬이게 하고 본질을 흐려놓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라는 든든한 기반위에서 도덕적 정치적 명분을 동시에 움켜지고 치룬 질 수 없는 투쟁의 길이었다.

그렇다고 남아프리카 해방 투쟁이 희희낙낙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에 기반한 백인지배 권력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가 그러했듯 소위 문화 통치라 부를 수 있는 포섭 회유책에서 부터, 원주민 부족간 분쟁을 부추키는 분할통치 수법, 저항 세력에 대한 합법을 가장한 정치적 억압, 그리고 테러와 암살이라는 비합법적 방법을 넘어 나찌를 연상케할 만한 대량 학살까지 백인 정부는 그들의 기득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세상에서 흑인 청년 만델라가 갈 수 있는 길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백인 지배질서를 수용하고 그 아래 부역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꾀하는 길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존귀한 백인과 미천한 흑인의 이분법이 통용되는 세상의 부정의를 향해 분노하고 저항하는 길이었다. 만델라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해방을 끝내 쟁취했다. 

두어달 전 만델라의 자서전을 선물받았을 때 지금 왠 뜬금없는 만델라인가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서 한쪽 두쪽 읽기 시작한 뒤 나는 만델라의 삶에 빠져들었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배울수 있는 것이 많긴 하겠지만 그로부터 얻은 배움이 고스란히 나의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반동의 시대, 파시즘이 온갖 치장을 하고 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거짓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 만델라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구체적인 답보다 훨씬 깊은 영감을 제시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넘어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살것인가를 다시금 되묻게 하는 만델라의 일대기가 다시 먼 전망을 모색해야하는 우리에게 참 좋은 교과서가 될 것같다.

나는 만델라의 삶의 역정을 따라가며 투사의 삶보다는 친근한 인간적 면모를 가진 한 사람의 성인을 연상했다. 그것은 이 책이 사후적으로 지난 투쟁을 정리하는 자서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만델라의 삶에서 분노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없이 정의를 위한 투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마는 만델라는 인종차별이라는 극악한 부정의에 맞서 흑인우월주의나 타인종 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인종이 조화로운 삶을 사는 세상을 추구했다.  백인정권의 포악한 억압에 맞서 만델라가 무장투쟁 노선을 선언하고 '민족의 창'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군사훈련과 군사적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평온하고 담대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대적투쟁에서 보였던 만델라의 노선은 전선 내부의 분열과 대립과정에서도 그대로 견지되었다. 해방을 위한 투쟁의 도정에서 그가 속한 ANC(아프리카 민족회의)와 ANC의 온건노선에 반대해 조직된 PAC(범아프리카회의)가 분립하여 대치할 때도 그는 두조직이 적대하는 상황에 빠지지않도록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흑인 우파를 대표하는 인카타자유당과 줄루족의 분열주의와 참혹한 테러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만데라는 결국 백인 이든 줄루족이든 같이 위대한 남아프리카인으로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견지했다. 그와같은 만델라의 연대와 평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입장은 결국 남아프리카 인민과 세계인의 공감을 획득하게 된다. 결국 해방투쟁을 군사적 전투가 아니라 국제적 여론에 힘입은 지난한 협상의 과정을 통해 승리한다. 만델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와같은 연대와 평화의 정신이 아닌가싶다.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탈 수 있었던 것도  만델라 자신이 견지한 평화와 연대의 원칙 때문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백인 정권으로부터 해방되고나서도 만델라의 원칙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진실을 밝히되, 처벌하지 않는다'는 만델라의 입장은 수많은 목숨을 받쳐 승리한 세력이 쉽게 채택할 수 있는 노선은 아니었다. 내부적인 반발과 권력을 잃은 구백인정권의 비협조와 조소는 만델라를 곤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델라는 그와같은 노선을 통해 결국 진정한 승리를 챙취한다. 청춘을 바친 투쟁과 27년의 감옥살이, 그리고 수년에 걸친 협상과정을 통해 만델라는 백인정권을 해체하지만 그의 진정한 승리는 정권 장악뒤에 진행된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나는 그의 삶을 통해 어떻게 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덤으로 이책을 번역한 김대중전 대통령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만델라와 김대중..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유사점을 가진 것 같다. 오랜 세월 억압속에서도 평생을 정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끝내 승리를 가져온 점 뿐 아니라 투쟁과정에서 견지한 비적대적 입장, 정권 장악뒤에 가진 신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 나아가 그와같은 노선을 인정받아 노벨 펑화상을 타게 되는 것까지 똑같다. 만델라와 김대중 이 두 사람의 힘은 사실 일희일비하지 않는 담대함에 있는 것 같다.  

대선이 끝난뒤 한국의 진보 개혁 세력은 큰 혼돈에 빠진듯하다. 내부적으로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또다른 분열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대선 패배의 원인분석과 그에 따른 책임부여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학적 비판이나 정파적 이해에 얽힌 기싸움은 진보개혁세력의 미래에 아무런 희망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조중동 프레임을 그대로 채용한채 자행되는 '친노패권주의' 운운하는 마녀사냥이나, 좌편향 우편향으로 흔들리며 제기되는 선거전략의 이념적 편향에 대한 분석은 극히 위험해보인다. 연대의 방식에 대한 분석과 검토를 넘어, 연대 무용론까지 나가버리는 청산적 태도는 비의회주의적 변혁노선에서나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진지를 온전히 보전하겠다는 소수좌파정당의 고집은 51대 49라는 판세로 결정되는 선거판에서 채택할 수 있는 전략으로는 적합하지 않기때문이다. 이 모든 의문에 대해 만델라는 정답이 아니라 그 답을 찾기 위한 바른 태도를 보여준다.  

뜬금없는 시기에 만델라의 일대기를 읽고 나는 그의 삶이 전해 주는 메시지를 싸우는 "방법을 넘어 승리하는 방법"로 읽었다. 극히 주관적인 감상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싸움에 번번히 지는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아직 승리하는 법에 서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델라의 싸움과는 달리 목표는 분명하데 상대는 훨씬 불투명한 싸움을 해야하는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만델라가 주는 메시지는 그뿐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보다 담대해지고, 나아가 작은 정파적 차이에 대해 서로 관대해지고 파도치는 정치적 지형에 따라 보다 유연해 진다면 파시스트 잔당에 의해 장악된 기득권세력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를 획득하는 날이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얻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어렵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절실해 지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세상을 참 아름답게 살았던 한사람과 그 사람의 죽음으로 혼자 남은 또 한 사람의 우정이 있다.  관포지교가 친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이야기 한다면, 이 두사람의 우정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고 함께 그길을 걸은 동지적 신뢰에 바탕한 지고지순한 우정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뒤  '관포지교'를 대신해  이 두사람의 우정을 나타내는 새로운 고사성어로 '노문지교'가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우리시대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의 지표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데에는 친구 문재인이 있다. 이 책 '운명'은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길 원했던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사람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길위에서 같이한 도반 노무현과 맺었던 30년 우정의 기록이다. 필자는 반역의 무리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친구 노무현을 회상하며, 자신의 인생역정이 어떻게 노무현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친구 노무현과 어떻게 꿈을 나누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0년 우정을 나누던 친구를 먼저 보내고, 같이 가고자한 길을 다시 혼자서 떠나야하는 사람의 깊은 고뇌를 담고 있다.

문재인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고, 학창시절을 회상하지만 그것 모두는 결국 노무현과의 만남으로 수렴되는 개인사 저변에 흐르는 한 시대의 도저한 정신사를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는 '운명'을 이야기하고 이 책의 제목을 삼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대통령 노무현'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고, 친구 문재인과 함께한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다하지 못한 시대적 책무에 짓눌려 한으로 남은 먼저간 친구와 살아남아 그 책무를 다해야할 또 다른 친구의 남은 삶의 무게 때문이다.

이 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난 참여정부 5년을 규정하는 주요 이슈들에 대한 입장을 표출하며, 우리시대가 극복해 나가야될 다양한 과제와 그 과제를 현실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현실인식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정치적 논쟁의 여지를 열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입장에 대해 동의하지만 나는 오직 이책 '운명'을 한 시대를 살아간 멋진 두 인간의 지고지순한 우정의 기록물로만 보고싶다.
반응형
반응형

지난 4월 30일, 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성지 내 청소년수련관에서 참여당 삼각끈담쟁이동호회 회원들과 가족 그리고 기타 참여당 지지자들이 단합대회를 가졌다. 준비단계에서 100여명의 회원 가족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지만갑작스런 폭우성 비바람에 참가 인원이 30여명으로 줄었다. 
주최측인 봉화군지구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신 "사과꽃향기"님을 비롯한 지역 당원가족분들이 여러 날을 준비해 100여명이상의 손님을 맞을 음식과 잠자리등 충분한 준비를 하였지만 직전에 있은 김해을 재선거 결과와 행사 당일의 불순한 기후 때문에 참가인원이 대폭줄게 된 것이었다.

나는 참여당 당원이 아니지만 아내가 참여당 당원이다보니 "사과꽃향기"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게되었고,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단지 봉화지역분들이 보고싶어 행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사과꽃향기님은 1여년전 연락을 주시어 만나게된 분으로 척박한 지역 토양에서 기필코 참여당 지구당을 만들고말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나에게 연락을 하셨던 분이다. 그분의 열의에 감명을 받고 어떻게든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긴 했지만 내 자신이 정치적 기반이 조금은 다르고 무엇보다 일상의 삶에 쫒겨 이내 잊어 버리고 말았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을 가지고 정치적 지지자로서 그의 정치적 꿈을 실천하는 한명의 시민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이지만  참여당의 당원이 아닌 타당의 당원인 사람으로 이날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기우와는 달리 행사 참여자 모두가 반겨주시고 배려해 주신 덕에 참으로 편안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나 행사 예상 참여자가 대폭 줄어들어 힘빠지고, 성의없는 행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나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고 모이신 한분한분이 열정과 동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즐겁고 진지한 행사를 진행해나갔다.

행사중에 참여자 한분한분이 자기소개를 하는 기회가 있 을때 나는 나의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봉화군 같은 지역사회에서 진보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당을 달리할지라도 당원동지나 진배없이 반갑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나아가 수구 한나라당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경북북부지역의 봉화군 같은 지역사회에서는 최소한 반한나라당을 지향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동지적 연대를 가지고 서로 협력해야함을 주장했다. 

이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봉화군에 참여당  진성당원이 불과 수명에 불과하고, 잘 모르긴 해도 사회당이나 진보신당은 물론 민주노동장, 나아가 민주당 마저 진성당원이 몇명에 불과하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지역 현실에서 서울 중심의 중앙정치무대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정당들이 뿔뿔이 흩어지도록 하는 작은 정치적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비록 정치적 지향이 달라 정당을 달리할 지라도 동일한 정치적 실천의 기반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

지난 재보선이후 이명박정부, 수구 한나라당을 제압하고 다시 우리 사회를 진보의 길, 평화의 길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면서 진보개혁진영의 통합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진행은 지지부진하고  통합을 위한 논의과정이 생산적이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진보개혁세력의 대통합과 민주개혁정부로의 교체를 희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다소간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현실에서 봉화군같은 정치적으로 척박한 토양에서 몇몇에 지나지 않는 진보개혁인사들이 지역사회에 진보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실천을 같이하고 통합을 위한 토론과 학습을 선도적으로 진행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아가 밤낮 정치권을 비판하는 민주시민 개개인이 자신이 상대적으로나마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을 하고 큰 틀에서 우리사회가 진전시켜나가야할 가치를 진작시키는 일에 작은 실천들을 같이 해 나간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중앙'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작은 지역에서 해 내고 오히러 '중앙'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한 당의 당원이 서너명에 불과한 봉화군이지만  "봉화군 진보개혁군민 연석회의"같은 모임을 하면서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큰 차이의 해법을 찾아내는 작업을 선도적으로 해나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나는 그날 참여당 봉화군 지구당 준비위원회 위원장님과 그외의 당원들의 열정, 그리고 그 순수한 인간미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사회의 좋은 분들이 한분두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을 하고, 그런 분들이 어떻게든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지역사회에서 사회당 당원이 참여당의 지구당이 건설될 수 있도록 당원모집에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4대강 죽이기 같은 명백한 정치적 이슈에 공동대응을 한다면, 지리멸렬한 중앙정치가 바귀고 나아가 불의한 세상조차 쉽게 바꿔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반응형
반응형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2011년 발행, 21세기북스)를 읽고

요즘 조국 교수가 인기가 많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으면서 거기다가 '개념'까지 있는 인물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하여튼 섹시한 진보 인사의 한명인 조국은 그 뛰어난 상품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한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한마디 한 동작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번 붐은 조국이 낸 [진보집권플랜]과 바로 이 책 [조국,대한민국에 고한다]가 촉발한 듯하지만 그보다는 이명박의 폭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세력화 되고 있지 못한 무능한 진보세력의 현 정치구도에서 대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측면이 많아보인다. 다시 말해 조국에 대한 인기는 일정정도 대중들이 선호하는 인물, 학벌, 개인적 자질 등등에 기반하고 있는게 사실 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현 정치적 지형이 대안적 진보, 다시말해 '성찰하는 진보' 인사를 요청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해 혹은 오해를 가지고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를 읽고나서 솔직히 조금은 아쉬움을 느꼈다. 은연중에 나는 그의 책을 통해 무슨 대단한 신체제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미래상을 제시하고 그를 구현하기위한 정교한 로드맵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25년은 된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사회구성체 논쟁'류의 책이나 당시의 이런저런 정치서적을 통해 늘 단언적이고 명료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시'를 제공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은 분명하고 적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될 사회상은 명료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는 모든 정치 서적이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을 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그와같은 실천이론의 한계가 진보세력의 답보상태를 지속시키는데 일정정도 기여한 측면이 있고, 여하한 이유에서건 정체된 진보의 이론, 조직, 실천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조국이 말하는 성찰하는 진보의 요구로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때 그 청년들은 세월을 겪고 현실은 훨씬 더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입장에서 조국은 명료한 시대규정과 체제분석, 그리고 전략 전술을 내어놓지 않고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사회의 진보, 우리사회의 진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 진보적 상식 혹은 합리적 상식을 각각의 세력 혹은 분야를 향해 직언한다.

먼저 조국은 MB가 이상사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두바이와 싱가포르의 허상을 지적함으로써 현정부의 국정철학의 부재 혹은 그 시대적 낙후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을 향해 쓴소리를 내어 놓는다. 그의 발언은 시민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기도하고 법률가의 눈에 비친 부정의한 법현실을 질타하고 올바른 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의 자본에 대한 고언에 이 책의 핵심이 놓여있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대한 규정, 체제모색적 이해없이 현 시대는 극복될 수 없음을 필자 역시 인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 역시 충분하지 않은 내용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다.

사실 이책은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해 놓은 글이 아니다. 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단속적으로 언론에 게제한 것을 모아놓은 이 책은 참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을 덮고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를 도모하기엔 좀 어려움이 따른다. 부분은 다 공감하고 수용하면서도 책을 덮고 그려보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세상의 상은 그렇게 투명하게 다가오질 않기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필자 조국의 다음 저술은, 물론 극단적인 나 개인적 기대에 불과하지만. 좀더 확실한 우리사회의 비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글로 채워졌으면 한다.

물론 독자의 한사람이 갖는 주제넘는 기대와는 별도로 이책은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공이 인정하는 가치 기반을 높이는 작업에 일정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하며, 정정당당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정한 룰의 만들고 그 수준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세력은 합리적 보수세력에 기생하는 극우 파시스트세력을 스스로 떨쳐내가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진보 개혁은 시대정신을 읽고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진보적 정책, 대안 체제의 발굴에 보다 유능해져야할 것이다.

조국같은 분이 그와같은 상식의 전도사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매개하고, 진보적 가치에 대한 합당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을 도모하는 거간꾼으로 나선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 한권이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는데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런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사회의 정치적 상식의 격을 높이는데에 일정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뭏튼 필자 조국이 건강한 좌파지식인, 한국의 노옴 촘스키로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기를 빈다.

반응형
반응형


일주일째 봉화군 등 4개 시군이 공동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외씨버선길]의 봉화구간 스토리 자원조사 일을 하고있다. 건성으로 지나치거나 찾아갔던 춘양면의 88번 도로를 따라 길 양쪽으로 형성된 촌락을 중심으로 설화나 민화, 혹은 기타 문화예술자원 그리고 자연 경관 자원등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외씨버선길 봉화구간만의 색을 찾기위해 고심하고 있다. 스토리 자원이 될만한 아이템의 단순 수집작업은 그럭저럭 진행하고 있는데 그렇게 수집된 아이템을 정리하고 선별하여 길의 테마를 드러내줄 수 있는 스토리로 묶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그저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는 재미에 이 일을 맡긴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에는 여러가지로 역부족인게 사실이다. 짧은 기간, 작은 보수 그리고 더 짧은 식견!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일은 이미 맡았고 하여튼 진행되고 있으니 그냥 쭈욱 나가는 수밖에...

그래도 이 일이 주는 즐거움은 많다.  무심히 지나치던 차창밖의 작은 풍경들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가 뜨겁게 만나는 기쁨. 인근에 살면서도 삶의 체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생각만 있고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는 기쁨, 또 존재의 아름다움과 삶의 깊이를 전해주는 찰나의 느낌들과의 해후...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까지 작업 진행과정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성과는 무엇보다 영화감독 김기덕의 고향마을을 알게되고, 그의 생가터를 찾아가 다시 한번 그의 영화를, 그리고 산골아이에서 국제적인 영화감독으로 입신한 한 인간의 삶을 생각해 본 것이 아닐까싶다.

사실 김기덕 감독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처와 그의 영화에 대해 그리고 최근 뉴스에 전해진 그의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새로 개설될 걷기길의 스토리자원 발굴 작업 중에 만난 그 였기에 나의 사고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을 낳은 산골마을만의 특별한 감수성 체험'어쩌고 저쩌고 하는 프로그램이나 '한국의 가장 영화의 한 장면같은 길' 혹은 '가장 영화찍기 좋은 길' 뭐 그딴 망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뭏튼 한달여전 김기덕 김독이 후배들에게 배반당해 폐인이 다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고, 그리고 그 몇일뒤 다시 그 뉴스가 순전히 오보라는 기사 역시도 보았다. 개인의 삶을 무책임하고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기자들의 천박함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해 버린 기사였지만 김기덕의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계시고, 돌아가신 김기덕 감독의 부친과 친구되신다는 박세윤(84세) 할아버지가 그의 근황을 물어 올 때는 괜히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덕이 요즘도 영화찍나, 우째 지내는고? 참 대단한 상도 많이 탓제.... 뭐가카더라 그...'라고 말씀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뭐 국제적인 영화상을 다안 받았니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니더. 요즘도 열심히 영화 찍지예.' 라고 김기덕 감독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기라도한 것처럼, 그의 삶을 두둔하고 지켜줘야한다는 듯이 대답하고 말았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 대부분을 본 처와 거의 보지 않은 나의 대화는 진전될 수 없었지만 마초적 감성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통찰력과 미적 깊이가 있어 매력적인 영화감독이라는 처의 평에 머리를 끄덕거리며 다시 그의 영화를 보도록 하겠다고 마음먹어 보기도 하고, 그의 영화가 진실을 직시케 함으로써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여  높은 예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는 면도 그렇고 학벌도 돈도 따라서 인맥도 없이 예술적 열정 하나로 영화감독으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그의 삶이 가진 굴곡이 어쩌면 비빌 구석이라곤 한군데도 없이 우리 사회의 병폐의 근원이 되는 모든 금기들을 건드렸던  고 노무현대통령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나누면서 하루의 과업을 마무리 했다.

2004년 고향을 방문해 송이축제장에서 펜 싸인회도 하고 고향후배를 위한 강연도 했었다는 그는 몇몇 고향 분들에게 '자신'을 고향을 위해서라면 이용해도 좋다고 까지 말씀하셨다고하는데 그를 맞은 봉화는 그의 크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도로변의 쌈지 공원을 '김기덕공원'으로 만들자던 젊은 지역 일꾼의 제안 마저 지역사회가 무시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걸 보면 참 씁쓸하기조차 하다.  
 
오직 그의 앞날에 큰 예술적 성취가 있기를 그리고 불온한 세상의 섭리에 맞서 그만의 멋진 세계를 구축해 내고 그러면서도 내내 행복한 한 개인의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기를 빈다. 

* 김기덕 감독의 고향집터를 알려주고 약도까지 그려주신 춘양목송이마을 곽진희 관리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김기덕 감독이 태어나고 초등학교까지 다녔던 봉화군 춘먕면 서벽리 마을 입구

김기덕 감독의 생가터를 가르켜주는 박세윤 할아버지.
 

김기덕 감독의 고향집은 헐리고 그 터는 사과나무가 심겨져있다.

김기덕 감독의 부친과 친구였다는 박세윤 할아버지와 기념사진 한컷! 

반응형
반응형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의 사상적 지평을 연 지성의 토대가 되는 청년시절 독서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오해도 많고 열성팬도 많은 '정치인' 유시민에게는 어쩌면 최종적 '입장'이 아니라 그 입장의 원천을 드러내는 일이 꼭 필요했었다고 보는데, 바로 그와같은 역할을 거뜬히 하고 있다. 물론 필자 유시민의 집필 동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데 있고, 그것은 바로 지표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길찾기, 즉 한국사회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의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나아갈 바에 대한 모색일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 [청춘의 독서]는 청춘시절 독서의 중요성이나 책읽기의 방법을 청춘들에게 들려주는 측면보다는 필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과제를 지고 살아가야 할 이미 기성세대가 된 나같은 독자와 그 고민을 나누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길은 잃'은 유시민은 오래된 지도를 다시 편다. 그 지도는 청춘시절 읽었던, 이후 유시민의 삶의 방향을 이끈 나침판같은 역할을 해주던 주옥같은 14권의 고전이다. 그리고 다시 길이 보이지않는 지금 그는 새로운 지도가 아니라 바로 그 낡은 지도를 다시 편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리영희의 [전화시대의 논리], 칼막스의 [공산당선언], 사마천의 [사기], 다윈의 [종의기원],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맹자], ... 어느 것 한권 무겁지 않은 책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 14권의 고전이 세상의 근본을 모두 보여주거나 우리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은 보여주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필자 유시민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근본을 이루는 가치의 보고를 다시 뒤적거림으로써 저만치 나아간 자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자의 태도를 되찾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막무가내 밀어부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대한 바보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그 근본으로 돌아가 초심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주할 수 있었던 그의 겸손한 삶의 태도가 참 건강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 http://usimin.net/  에서 퍼옴

근본을 되짚는 [청춘의 독서]는 그렇다고 한가한 고전읽기의 흔적은 아니다. 그는 치열한 현실에 두발을 딛고 달음박질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는 마음으로 현실과 책속을 오간다. 그 접점이 어디이고, 그의 사색의 과정이 가져올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휴머니스트 유시민의 젊고 건강한 정치적 행보와 삶의 여정을 지켜보고 싶다.

유시민은 이제 젊은 정치인이 아니라 50대의 기성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항상 청춘을 갈망했고, 그의 지지자들 역시 청춘일 수 밖에 없었다.  자연적 나이를 뛰어넘는 그의 젊음은 바로 독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그가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노무현대통령의 삶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이다. 독서하는 정치인, 지성적 정치인에 목마른 한국사회에 그와같은 정치인의 큰 획을 긋는 유시민의 이후 삶의 행로에 큰 행운이 함께하길 빈다. 그의 행운이 한국사회의 행운과 일치하기를, 그의 정치 여정이 표면적으론 다르지만 근본에서 같은 세력이 더불어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며 우리사회가 나아가야될 큰 비젼을 함께 모색하며 그 토대를 쌓는 과정일 수 있기를 또한 기원한다.   
  
[청춘의 독서]를 읽으며 나는 비슷한 연배로서 이제는 잊어져가는 아련한 꿈들을 되새긴다. 그리고 잊었던 이름들을 불러본다. 칼 막스, 라스콜리니코프, 쇼냐, 이명준...  그리고 늦은 숙제를 떠 안는다. 다음 두권의 책을 꼭 읽어봐야지.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필자가 [진보와 빈곤]에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한번 적어본다.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 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엑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상태로 전락한다.(.....)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Progressive and Poverty, p531~533.) 


반응형
반응형


오늘은  "꿈많은 청년" 노무현 대통령의 기일이다. 그래서 내리는 비인가 보다. 전날 시작한 비가 하루 온종일 내리고도 못다내린양 밤늦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농사일에 쫒겨 도착한지 일주일 넘어 손에 들지 못했던 책을 펼쳤다. 그는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깊은 슬픔을 감춘듯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싱긋이 웃어보이며 우리를 떠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는 너무도 컸다. 세상은 꺼꾸로 돌기 시작했다. 해는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졌으며, 낮에 달이 뜨고, 밤에 해가 떴다.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전용어가 되었고, 평화는 전쟁을, 환경은 무자비한 토건공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모든 진보적 가치는 좌익뺄갱이의 기만선전술에 불과한 것으로, 복지에 대한 요구는 거지근성으로 치부되었다. 진솔함과 정직함은 무능력의 다른 이름으로 뜻이 바뀌었고, 분권과 자치, 대화와 타협은 사전에서 사라졌다.  

[운명이다]는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간단한 가족사와 어린시절의 추억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자의식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가난에 대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 자라나는 청년 노무현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나고 자라고 살았던 시대,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대의 흔적들을 만난다. 그는 어떻게 한 평범한 인간이 시대의 격랑속에서 한명의 시민운동가로 정치가로 그리고 마침내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살았고 그리고 죽어갔는지 담담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이야기를, 한명의 정치가가 아니라 한명의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불의에 맞섰고, 어떻게 '사람사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분투했는지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묻어난다. 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를, 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실패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쉬 끝나지 않고았 낙숫물소리와 함께  신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나는 오늘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나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어야했다. 지인으로 부터 문자가 온다. '혹시 봉하마을에 와 계신가 해서요?' 나는 오늘 집을 나서지 않았다. 하루종일 [운명이다]를 읽고 그의 삶을, 그리고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생각했다. 가슴이 미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삶과 우리시대의 과제가 뒤엉킨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묻고 또 물었다. 



그는 부림사건을 통해 새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긴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었다. 도반이 없어도, 노자가 떨어져도 그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길의 끝이 모멸과 오욕, 좌절과 실패의 구렁텅이일지라도 그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지구가 꺼꾸로 돌기 시작하던 날 [운명이다]는 멈춘다. 그의 삶은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술수가 정직을, 돈이 사랑을 이기는 세상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은 비장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이웃 형님의 한분같이 소탈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의 죽음은 그만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었기에! 책을 덮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의 몫이다. 그가 던지고 간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꿈은 온전히 우리 손아귀에 남아있다. 그리고 삶들은 계속되고 그 꿈은 싹을 피우고 자라날 것이다. 노무현의 자서전은 우리의 자서전이 되고, 우리의 자서전은 완결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한다. 그것은 운명이기 때문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