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 MB의 무농정 시대에 참여정부의 농정을 되돌아 본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다. 올해 봄철 이상 저온과 MB정부의 ‘4대강 죽이기정책에 의한 4대강 주변 농업 생산 기반 시설 파괴 등의 요인으로 인해 야채류가격이 급등하기도 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머물고 한국 농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쌀과 건고추 값이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쌀값은 80kg 한 가마에 12~3만원으로 20년 전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9만원대까지 떨어졌다. 농촌 들녘에는  농사짓는 게 죄라며 한탄하는 농민들의 한숨이 넘쳐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농촌의 현실은 정책적 소외가 거듭되어 농가의 도산과 농촌공동체의 해체가 가속화 될 것이라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MB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을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이전 노무현 정부의 농업정책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게 된다.

 

사실 참여정부는 한미FTA라는 반농업정책을 주도한 정부로 각인되어 있다.

한미 FTA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해 농업시장 등을 미국에 내어주고,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의 일부 시장을 한국자본이 차지하기 위한 '빅딜'임에 분명하다.

농업 시장의 개방을 통해 전체 무역량을 늘려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입장은 한미 FTA에 대한 농민의 반발을 야기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농업에 대한 이해와 농민에 대한 애정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농업시장과 공업-서비스 시장의 맞교환이라는 발상 자체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세계경제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한국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미 FTA가 불가피한 조처였는지, 아니면 한국경제의 총량적 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선제적 조처였는지 판단하는 일은 사실 어려운 문제다. '자본의 진보성'이라는 이해에 입각해 자본의 세계화라는 추세를 역사적 진보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하지만, 자본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적인 시장확대와 교역확대가 공동선인양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수용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내적 경제의 유지발전을 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계급적 이해관계가 조정된 시장 확대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조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이해 관계가 걸린 정책의 도입은 그로 인해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가를 명확히 하고 그 이해관계를 사회적 합의라는 큰 틀에서 조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그 점에서 참여정부의 노력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 않다.

노무현대통령 개인의 농업, 농촌에 대한 애착, 그리고 퇴임후 귀향과 마을운동 과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미국의 한미FTA발효 연기와 이명박 정권의 소고기 시장 개방 과정 등을 보면 참여정부의 한미FTA협상 과정의 치밀함과 성실함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시장우위라는 입장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농업이지만 농업 시장을 포기함으로써 획득되는 한국 경제의 이익 분의 많은 비중을 다시 농업분야로 돌리겠다는 입장은 참여정부의 농업 농촌에 대한 애착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실 많이 뻥튀기 되었을 “농업 119조 투융자와 FTA 지원기금”은 그렇게 탄생했고, 그 예산을 기반으로 해서 많은 농촌 농업 정책이 시도되었다.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 역시 그와 같은 참여정부의 농촌, 농업정책에 힘입어 내가 속해 살고 있는 농촌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마을에 유치했고, 실행했다. 국민의 정부시절부터 시행되거나 참여정부 때 시작한 농업농촌 활성화 정책들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다먼저 농민의 피부에 와 닿는 참여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은 농가부태 상환연기 및 이자 감면 정책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농촌마을 개발정책과 농업기반 투자가 진행되었다. 그들 정책의 소산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데 대표적인 것들이 ‘녹색농촌체험마을’ ‘정보화마을’ '마을종합개발사업'등의 주민주도형 상향식 농촌개발정책과 전원마을 사업등의 농촌재구성 사업, 그리고 친환경 직불제, 논농업집불제 등 각종 농업소득 보전을 위한 농업 직불금 제도의 도입이다. 물론 이들 정책을 통해 한국 농업이 발전하고 농촌마을이 풍요로워 졌다고 판단하기는 쉽지않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국민의 정부를 이은 참여정부의 농촌정책은 농업 영역의 변화 확대와 농촌의 재구성, 농촌과 도시의 관계 재설정을 통한 농촌유지정책으로 전환을 다양한 정책으로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어설픈 준비로 과도기적 낭비와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한국 농촌의 생존 로드맵을 제시하고자 애썼고 그 단초를 연 것으로 인정하고 싶다. 

 

앞이 보이지 않는 농촌현실에서 이전 참여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을 되돌아보고 재평가하는 일은 꼭 필요한다. 그것은 현재의 암흑을 통해 지난 시절의 빛과 어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여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농업농촌정책의 모태가 되는 노무현대통령의 농업농촌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잇는 자료로  <농업,농촌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저자 노무현, 학술지 月刊 議政評論 35('91.7) pp.29-32,발행일 1991.)가 있다. (국회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열람과 복사 신청이 가능) UR로 가위눌림 당한 한국 농업의 생존 전략을 피력한 짧은 글이지만 농촌, 농업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이 글을 통해 당시 국회의원이던 노무현대통령은 농촌의 부흥이 국가발전의 초석임을 주장하면서 그를 위해 투자의 소외 영역이었던 농업에 기반 투자를 확대하고 유통 합리화와 농업보조금 정책, 농산물 가격보장 정책 등을 펼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정책을 부분적으로 현실화하는데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고 그 결실을 보기 전에 한국 농촌은 다시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참여정부는 한미FTA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다. 참여정부는 일부 진보세력으로부터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한 정부, 당시의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극우 보수세력과 정책적 이념적 차별이 없는 세력으로 비난받고 매도당했다. 좌우의 협공 속에서 참여정부는 나름의 길을 찾기 위해 분투했지만 사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부로 낙인 찍혔고, 그리고 당의 해체와 함께 노무현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시 극우 보수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은 이전 참여정부가 진보좌파적 입장에 입각한 정부는 아니지만 최소한 좌우를 아우르는 합리적 노선을 모색했고 장기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정책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정부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을 극우 보수세력은 이해했고 그래서 끝없이 노무현 정부를 우파적 정책을 펼 때 조차 친북 좌파로 매도했고 공격했다. 하지만 일부 진보세력은 그 점을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진보세력의 동반몰락을 초래하는데 일조했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농정의 방향성이나 이념적 기반, 그리고 그 기반위에 그렸던 한국 농업농촌의 미래상에 대해 섣부른 평가나 결론을 내고 싶지 않다. 단지 열린 자세로 평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만을 명확히 하고 싶다 
나는 한 명의 농민으로서 "노무현대통령이 꿈꾸던 한국 농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긍금하다.

 

준비중인 다음 글

<참여정부의 농정: ‘농업은 포기하고 농촌을 살리자?”>

 

 더 읽어 볼 자료 :

 

<노무현 정부의 '농업·농촌 종합대책안'의 문제점>

저자 박창규, 녹색평론 통권 제74 (2004. 1·2) pp.102-112 , 2004.

 

<119조 투융자계획의 허와 실 :노무현정부의농업농촌발전계획에 대한 검토>

저자 전농 정책실 , 농민의 길 통권 3 (2003. 12) pp.71-78. 

 

<참여정부 농촌개발정책의 회고>

저자 이병기, 농촌지도와 개발. 15권 제1 (2008 3), pp.145-175 출처한국농촌지도학회

 

<21세기형 농업 농촌을 위한 농정패러다임의 전화>

이일영외 지음, 한국노동연구원 2007, 2, [농업농촌의 이해]



반응형
반응형


진보든 보수든 고노무현 대통령을 철저히 무시하고 저주했고,
그가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지금까지 그를 격하하고 능욕하는데
침을 튀기는 자들이 있다. 
사실 조중동이나 그 추종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여전히 진보세력 중 일부는 한미FTA와 이라크파병, 대연정제안 등의 사례를 들며
삼성과 노무현의 유착, 정치적 무이념, 나아가 진보를 가장한 보수의 간첩 운운 하며
그를 능욕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충분히 근거있는 입장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참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니깐
그르거니 하고 일단 이들은 도외시 하자.
이들에 대한 판단은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참 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대통령을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에 기대어서나마 나는 이 암담한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역사적 징조를 보고싶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세상]은 보편적 인권이 존중되고,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복지제도가 완비된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정의가 통하는 그런 세상이다.
고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인간 개개인의 삶이 보호되고 존중되며,
보다 덜 경쟁적인 사회적 풍토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진실과 정의가, 그리고 옳은 사람이 존중받는
[사람사는 세상]을 예견케하는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섰던 정치적 포지션을 문제삼으며
진보의 적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를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재임기간동아 실행한 치적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의 매력에 끌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궁극적으로 정치인으로 살았던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그의 정치적 실천과 사람됨을 통일적으로 바라다 보는게 옳다고 보지만
사실 유독 노무현대통령에 대해서만은 정서적 판단이 앞선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깊이에서 치미는 울컥함이 있다.
그것은 그가 비겁한 정치검찰의 공작의 희생양이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재임기간 내내, 아니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되던 그 순간에 조차
나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굴종의 삶을 강요했던 부정의한 역사에 대한 한국민중의 승리의 감격을 나누었고
그리고 끈질긴 지배세력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에 치를 떨고 맞서야했기 때문이다. 
권모술수와 음모가 항상 승리하는 세상,
돈과 권력이 정의를 짓누르고, 거짓과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 노무현의 반역의 삶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바라는
민중의 염원을 현실에 구현했기 때문이고
그 지난한 도정에 같이 서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독선과 비열한 음모, 부정의와 거짓이 판치는
MB정권의 치하에서 3번째 5월을 맞았다.  
5월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자기 삶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의 다하지 못한 정치적 역정을 계속하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달이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진솔함,
특정 정책적 결정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면서조차
그 진정성에 끌려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 노무현이
뼈에 사무치게 그립다.
반응형
반응형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의 필자 김창호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그의 정치 철학을 같이 하고자 했다. 그는 참여정부의 일원으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사람이다. 필자는 참여정부의 성공과 좌절, 성과와 한계에 대해 두루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를 꼭 쓰고 싶다는 꿈을 종결짓지 못하고 떠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잇길 희망했다. 그리고 , 이 책 [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저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내려놓기 직전까지 "진보의 시대를 대비한 미래 담론을 준비하여 선투자 후복지, 성장 중심의 50년간 이어 온 보수주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희망으로 진보의 미래’를 집필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후보시절 스스로 이야기했듯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한 사람으로 끝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미완에 그친 그의 작업은 [진보의 미래]로 출간되었지만,  필자 김창호는 그 작업의 연장선에 이 책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놓기를 원한다.
 
이 책에서 김창호는 보수의 사회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하고자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정통 진보'로 부터도 버림받은 참여정부의 핵심인사의 한사람으로서 현실 정치의 파란만장한 경험을 토대로 다시 진보란 무엇인지, 어떻게 지속가능한 진보를 확보할 수 있을지 고뇌한다.
먼저 그는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가를 묻는다.

'정통진보' 세력은 자본지배에 대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극복 대안을 추구하는가가 '진보정치'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보고, 참여정부가 자본에 대해, 삼성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고 비난한다. 이제 대해 필자는 보수의 시대에 현실적 진보세력이 할 수 있는 자본 지배에 대한 저항은 직접적 반자본 투쟁이 아니라 자본지배의 실체를 가리는 언론특권과 지역주의의 청산이 현실적 실천의 방안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확충하고, 진보 어젠다를 보편하고 그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필자가 제시하는 진보정치의 다는 아니다. 그는 정치체제의 민주화에서 사회경제체제, 다시 생활세계로 이어지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확보된 민주적 가치와 자원을 재구조화하여 풍부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본다. 즉, 다양화한 균열쟁점들인 문화, 예술, 환경, 젠더 등  생활세계에서 진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담론이다. 하지만 자신이 당선되거나 집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소주파지만 개혁적 보수, 혹은 중도좌파의 낙선과 실권에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한  '정통진보'의 근본주의는 현실 정치 지형에서 결과적으로 극우 보수, 반공 보수세력의 집권에 기여하며 중도좌파와 동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끝없는 '정통 진보'에 대한 애착과 함께 깊은 아쉬움을 가지고 다시 묻는다. 현실정치속에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진보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이 물음에는  진보정치의 지속 가능성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진보정치의 연대가능성에 대한 필자의 피끓는 갈구를 담겨 있다.

필자의 지속가능한 진보정치에 대한 모색은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위기에 대한 진단, 그리고 한국의 제 사회세력 정치세력의 공공성의 상실에 대한 진단으로 나아간다. 그는 '연대의 틀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자로서 참여정부의 통한의 실패를 자인하기도 하지만, 시민세력의 미성숙,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위기, 권력화된 보수언론, 사회 제세력의 사익화, 그에따른 공공성의 위기라는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에서 나름 진보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최소한 진보정치의 가능한 토대를 넓혀나가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진보정치 실현을 위한 참여정부의 노력이 좌절된 지점에는 한국 보수의 강고한 벽이 존재한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가 합리성과 정당성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강력한 힘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저변을 장악한 강고한 조직기반이라는 월등한 물질적 힘을 보수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허물기 위한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역정치의 부활, 다양한 층위의 깨어있는 시민의 공동체, 그리고 문화적 층위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다. 물론 그들 저변의 변화가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하는 진보정치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중요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애끓는 토로는 참여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라는 주홍글씨로 이어진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우리사회에서 이미 악마의 주술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의성과 추상성이 강화되어 문화적, 이데올리기적 함의를 갖는 도덕적 용어로 변질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좌파의 비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정치상황을 되돌아 보면 신자유주의라는 한 마디로 친자본 보수 우익과, 중도좌파 참여정부의 구별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 궁극적으로 보수 우익의 지배를 돕는 우를 범한 점은 부인하긴 어렵다. 필자는 민주, 참여정부 10년의 '신자유주의'는 선택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자본지배를 근본적으로 대체한 대안이나 가능성이 없는 역사국면에서 시장의 진보성을 인정하고, 복지정책을 그사회적 처방으로 제시한다.    

사실 [다시진보를 생각한다]의 독자로서 이책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큰 문제의식에서 공감하고 공유해야햐할 지점이 많다고 본다. 특히 진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현실정치속에서 구현 가능한 진보적 의제를 생산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집필이, 그리고 진보개혁세력내 꼬리표붙이기나 사적 증오에 기반한 비난에서 벗어나 생산적 토론과 지적 작업으로 이어지길 빈다. 

학자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참여정부의 국정홍보처장을 거쳐 다시 정치가로 변신을 도모하고 있는 김창호의 성공적인 정치역정이 자신이 제시한 한국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정일 수 있길 빈다.

반응형
반응형
 

정치적 논쟁은 쉽고 재미있다. 정치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봐도 그렇고, 하나의 정치적 기사에 대한 댓글 논쟁만 봐도 그렇다.누구나 쉽게 참여하고, 답을 제시한다. 나름의 '확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리고 그 '확신'에 기대어 쉽게 정책적 대안까지 제출한다. 어쩌면 인간이 바로 정치적 동물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고아니면 정치적 관심도가 유달리 높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대중적 정치 과잉이 이론가들, 학자들에게서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한번씩은 지식인의 자기 확신이 가지기만을 넘어 자기주장의 절대화로 나아가는 모습을 목도한다. 관념의 덫에 빠졌다고나 할까? 그 예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고, 이 책도 그와 같은 예를 보여주는 여러 글들을 담고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지만 그 만치 또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책이 담고 있는 몇몇 주장들은 자기 모순에 빠져있다. 그런 판단을 하는 나의 시각도 마찬가지로 관념의 덫에 빠져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말이다.

 

이책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은 인터뷰어 지승호가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인사들과 나눈 인터뷰를 정리한 책이다. 인터뷰의 내용은 책이 출간된 시기의 노무현정권에 대한 비판을 주로하면서 대한민국의 식민지성, 자본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끝끝내 베알이 꼴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말이 있다. 공감이 가는 군사적 전술이다. 시골에 살면서 알게 되었지만, 농지가 붙어있거나 집의 경계가 겹쳐있어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과 감정적으로 가장 먼이웃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사상적 스펙트럼을 놓고 본다면 "원교근공"이 아니라  "근교원공"이 보다 정직한 역사적 선택이고, 현실적으로 주장하는바 정치 이념에 충실한 선택이 아닐까? 왜냐면 정치투쟁은 단순한 정치적 패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가치전쟁이고, 영토쟁탈전이 아니라 보다 인간적인 복지 공동체를 향한 이념투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세력의 지형을 본다면 제도권밖의 극좌 조직부터 제도권안의 극좌파를 대표하는 사회당, 그리고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씩 이동해보면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이 있을 것이고 더 오른쪽에는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 민주당이 있다. 여기까지가 좌파를 비롯한 합리적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본다면 그 반대쪽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에 결쳐있는 잡탕보수우익을 아우르는 단일 정당인 한나라당이 있다. 물론 보수정당인 친박연대나 자유선진당이 있긴하지만 이들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단지 보스를 달리하는 세력으로 '한나라당류'로 뭉쳐봐도 좋을 것이다. 필자와 인터뷰를  한 진보적 지식인은 아마도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정도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참여당과 민주당으로 분화되기전의 '열린우리당'이 여당인 시절 왜 좌파는 '중도개혁세력'을 자임하는 열린우리당을 정치적 연대세력에서 배제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현실인식과 자기 비판없이 '노무현정권'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늘어 놓고 있다.


그래서 이책은 혼란스럽다. 극히 정치적인 비판의 끝에 무당파적인 입장을 표방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지식인의 이중성이 보인다. 자신의 정파적 입장의 선명성을 주장하면서 여타 정치세력의 입장차를 두루뭉실 뭉개어 버리는 태도에서 연대의 결핍에 시달리는 진보세력의 고질병이 보이기도 한다. 내용적으로 세세하게 비판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사실 리뷰는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 ''에 대한 나의 이해를 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나의 미천한 책읽기가 나의 뇌리에 남긴 긴 여운의 문제의식을 나열하는 것으로 리뷰를 마치고 싶다.

 

먼저 노정권에 대한 비판이 소위 중도 개혁세력에 대한 수구세력의 공격에 동조하여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역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두번째진보의 지평을 넓혀내는 비판이 아니라, 중도개혁세력을 무력화하면서 그 영향으로 진보의 몫마저 잃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닌가?

 세번째. 진보 의제는 대통령의 몫이 아니라 진보적 아젠다를 국민적 의제로 키워내야 하는 진보세력의 몫이다. 그것을 제출하고 국민적 인정을 끌어냄으로서 대통령이 정책적으로 체택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줘야하는것 아닌가?

네번째, 기본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복지예산을 가지고 '분배'중심의 좌파정권이라는 비난을 퍼붓고, 북한과의 최소 수준의 평화공존 정책조차도 북한에 휘둘리는 일방적 퍼주기 정책으로 매도하는 수구냉전세력과의 역관계에서 소위 진보세력이 힘을 보태준 것이 있기나 하나? 오히려 어긋장을 놓아 중도개혁세력인 노정권을 무력화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진보세력이 수구냉전세력의 지배권을 넗히는데 기여한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 아닌가

다섯번째, 진보세력이 하는 많은 주장들중 많은 부분이 도덕적 선언에 불과하고, 실천력을 담보하기 힘든 것은 왜일까? 지적 유희, 자기논리의 탐닉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이상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구체적 현실에서 수행해야 할 당면한 과제를 설정하고, 실행하기위한 전술,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명쾌한 답을 듣고 싶다

여섯째, 진보적 지식인들은 '노정권의 무지'(홍세화), '철학의 빈곤'  ',, '(박노자) 들의 개념으로 노무현정권을 비판하는데 이는 노무현대통령을 '무식하다'고 비판하는 조선일보의 논조를 그대로 답습하는 학력 우월의식을 가진 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노무현대통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노무현을 죽인 세력은 현 MB정권과 검찰마피아만이 아니다. 어쩌면 더 큰 상처는 바로 '약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정치가 그립다'면서 노무현대통령의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리던 이들 몇몇 진보인사들이다.  그의 사후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이 때늦은 사랑고백을 늘어놓았지만, 사자의 길은 간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 책이 참여정부 후반기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갖는 한계가 있다면 이해해 주고 싶다. 노무현대통령을 욕만해도 되는 상황에서 이런 류의 책은 분명 시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이 무책임한 변설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 다시한번 이전의 자기주장을 되돌아 보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회주의자"가 성립할 수 있는 진보세력의 유연성을 보고 싶다. 바로 그때가 진보세력의 수권능력이 갖춰진 때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응형
반응형

[
성공과 좌절]은 노무현대통령의 유고다. 그런데 이 책이 못다한 그의 삶, 정치적 역정을 담담히 정리하고, 완결 지은 유고라면 얼마나 좋을까. 통탄스럽게도 이 책은 미완이다. 그래서 많은 아쉬움과, 많은 과제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가 남긴 또 다른 유고인 [진보의 미래]가 대통령 노무현의 [정치철학]을 피력했다면, [성공과 좌절]은 인간 노무현의 정치 역정을 비롯한 일생을 담은 [회고록]이다. [진보의 미래]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과제를 남겼다면 바로 이 책 [성공과 좌절]은 한국사회에서 성공적인인간의 삶, 성공적인 정치가로서의 삶이 가능한 사회는 어떤 세상일까를 묻고 있다.

 

[성공과 좌절]은 그가 삶의 종비부를 찍으며 남긴 짧은 유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퇴임후 고향 봉하마을에 돌아와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로 궁지에 몰리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최소의 가치들마저 철저히 농락당한 상태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입장 그리고 그 즈음의 활동에 대한 글로 나아간다. 그리고 2장에서 자신의 출생에서 성장, 대통령 당선과 재임, 퇴임과 귀향의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대통령으로 이끌었던 참여정부 5년의 공과에 대한 입장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정치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시민주권시대에 대한 뜨거운 희망으로 책을 맺는다.

 

사실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고 정치적 입지에 성공한 [노무현대통령]이지만 그가 발 딛고 선 정치적 입지가 세력화되지 못하다보니 재임기간 내내 제대로 자신의 정치 철학을 펼쳐보지 못한다.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은 돈, 지위, 학벌, 특정지역이라는 기성 특권에 기생하지 않은 자발적인 불특정 다수이다. 그러다보니 재벌, 파시스트잔당, 그들의 선전지인  조중동을 필두로 한 언론마피아, 바로 그들의 지배를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권력기관인 검찰마피아 등의 집요한 공격과 음해에 쉽게 무너져 내린다. 그는 기득권의 조롱과 한편이어야했던 많은 정치 세셕의 조소를 받으며 고립무원의 지경에서 외롭고 비참한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 자신의 정치적 역정을 비탄하거나 세상의 몰이해, 세상을 지배하는 더러운 힘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하지만 그는 숙명론자나 온갖 악에도 저항하지 않는 무한 자비의 부처는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자신이 서있던 역사적 지점을 정확히 꿰뚫는 역사인식과 그러한 역사적 인식 위에서 도출한 시대적 과제 그리고 그  자신의 정치적, 인간적 처신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 노무현의 진면목을 만난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나 정책적 호오의 차원을 넘어 인간 노무현의 진정성에 그의 모든 매력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이책 [성공과 좌절]은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이 그르지 않음을 그리고 왜 그의 죽음에 왜그리도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고 분노했는지 알수 있게 해 준다.

 

사족을 달자면, 제목 [성공과 좌절]은 시간의 순서에 따른 성공 후의 좌절로 오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현실 정치 국면에서 좌절한 정치적 이상에 대한 많은 이갸기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그의 정치 역정을 통해 성취했던 정치적 이상, 꿈에 대한 자부도 그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담고 있다. 그가 스스로 실패한 삶, 실패한 정치인으로 자기규정을 내렸다고해도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였고,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가 남긴 정치적 영향력, 펼치고자했던 정치적 꿈은 향후 한국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죽었지만 노무현의 시대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스스로 묻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대통령을 가져봤다는 가슴 뭉클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까?' ' 그런 대통령을 더러운 권력의 음모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자가 그를 존경할 자겨이나 있기나 할까? 그리고 더 큰 물음에 빠져든다. 역사란 무엇인지,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한 인간의 삶은 또 어떠해야 하는지...

 

온갖 술수와 음모, 거짓이 난무하는 혼란스런 시대에 우리는 진정성’에 목마르다.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바꾸려 한,  불경한 꿈을 가졌던 대통령 노무현이 그립다.

 

반응형
반응형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12일 코엑스대서양홀에서 열린 전원마을 페스티발 개막식에 참석한 노무현대통령이 전시관들을 둘러보고 있다

2006년 농림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귀농자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노무현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우리 부부를 정식으로 초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노짱을 가까이서 뵐 수 있다는 한가지 기대로 선뜻 승락하고, 밭끝에서 머리 끝까지 15만원짜리 이마트 패션으로 치장을 하고, 봉화군청에서 기사와 함께 내어준 시커멓고 커다란 차에 올랐습니다. 서울행 내내 가슴두근거렸지만 막상 행사장에 도착해서는 경호원들의 움직임과 경호견, 그리고 주위의 모든 진기한 풍경에 넋을 잃었습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봉화군청 직원이 급히 넥타이를 구입해 오고 그리고 그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꿈에 그리던 노짱이 입장하고 계셨습니다. 마음깊이 우러나는 존경과 사랑으로 뜨거운 박수로 맞이했었습니다.
갑자기 농림수산위원장이라는 국회의원이 예정에 없이 참여하는 바람에 저는 위의 사진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래도 흐뭇한 표정으로 맨오른쪽 저의 와이프가 노짱부부와 함께 기념 사진 찍는 풍경을 바라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찍은 사진은 당시 농림부 직원이 전해 주기로 했지만 결국 받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뒤 보도자료나 신문 기사 등에서 저의 와이프 모습이 짤리지 않은 사진을 혹시라도 찾을 수 있을까 몇번이나 검색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몇번 허탕을 치고 기억 속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몇일전, 인터넷 서핑중 우연히 보도사진을 블로거가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 제공하는 사이트인 [뉴스뱅크이미지 F]가 문을 열었다는 기사을 접했습니다.
올해 새로운 각오로 시작한 블로그를 잘 꾸릴려면 '무료 보도 사진'을 활용하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뉴스뱅크이미지 F]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포스팅중 보도사진이 필요하게되어 [뉴스뱅크이미지 F]에 접속했습니다. 그리고 언뜻 잊어버린 '전원마을 페스티발 개막식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혹시하는 마음으로 '전원마을'을 검색어로 넣고 클릭을 하자마자 와~~ 그토록 찾아 헤매었지만 결코 찾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즐거웠던 기억을 되살려주는 이 사진이 너무 반가워 저의 블로그에 올려봅니다.
그리고 곧 출력해서 코팅하고, 액자까지 해서 저희집 가보로 모실 작정입니다.
블로그를 꾸리는 데 큰 힘이 될 보도사진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무엇보다 잊어버린 지난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되찾게 해준 [뉴스뱅크이미지 F]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반응형
반응형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라는 부제를 단 [진보의 미래]는 미완의 저술이다. 하지만  '미완'이란 수식어는 나태의 결과나 능력의 부재, 혹은 자연적 한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진보의 미래]에 담고자 했던 바로 그 진보의 진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강제된 수식어다세상에 어디 완결된 삶이 있고, 완결된 역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많은 독자는 이 책이 미완으로 끝난 것만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완을 강제한 무자비한 권력의 독기가 여전히 서슬퍼른 세상에서처음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진정한 대통령,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필자 노무현의 손에서 미완으로 남은 책을 전해 받는 순간 나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숨을 가빠졌으며 코 끝에는 희미한 피 냄새와 짙은 국화꽃 향기가 느껴졌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어디 진보의 진전이 저절로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진보는 투쟁의 산물이며, 소수지배에 대한 다수 인민의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진보의 미래'를 말하고 도모할 수 있겠는가? 지난 봄, 필자 노무현은 우리 곁은 떠나갔고 우리 손에는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진보의 미래'가 고스란히 과제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필자의 고뇌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정은 필자가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의 엄중함과 그 실천의 지난함을 마주하는 엄숙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이상주의자로, 그리고 그 꿈을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실현하려 했던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살았다. 이 책은 그 이상주의자의 현실 속 투쟁의 발자취이자 고뇌의 옹근 결과물이다행간에서 읽는 피와 눈물의 흔적은 그와 같은 투쟁의 여정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자 노무현이 이상주의자인 이유는 이 책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지 않아 금방 드러난다. 성장주의, 개발만능주의, 물질주의가 뼛속까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이고 또한 '역사의 진운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히 세상을 '더불어 사는 복지 공동체'로 바꾸려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그 이상이 필자의 삶을 정치적 실천으로 이끌었고, 정치가의 한 명으로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까지 오르는 정치적 역정을 걷게 했다. 그 역정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그의 입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이 했고, 그의 좌절은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에 다름 아니었다그것은 그가 정치적 실천의 역정에서 '불가능한 꿈'을 구체적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고뇌하고 분투한 결과이다그의 두뇌는 명석했고, 그의 가슴은 뜨거웠기에 그의 정치적 선택은 치밀하지만 차갑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이었지만 살가운 온기가 느껴졌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역정의 전과정의 발자취를 담고 있지만 특히 정치적 실천의 절정에 섰던 지난 5년간의 대통령직 수행의 과정에서 절감했을 우리 사회의 역사적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개혁 정치가의 좌절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뒷받침 없이 보수시대에 진보정치를 펼쳤던 외로운 검투사의 좌절감이 행간에 묻어있음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재임 5년의 과제를 연구와 저술을 통해 마저 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마저 꺾인 자리에 남겨진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뇌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 사회의 실종된 거대담론의 부활을 촉구한다. 필자가 정치의 장에서 수행하고자 했던 역할의 한계는 바로 국민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의 한계라는 엄연한 진실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에 대한 회의 없이, 국가 권력이 아직도 국민에 대한 지배수단의 성격을 가지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증진하는데 기여하는 시민의 자발적 의사 결집체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천박한 정치공학과 미시 정책적 차원의 담론에 매몰된 정치 현실을 질타한다.  

필자는 사람이 성장과 개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되는 경제만능주의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만, 국민의 생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거대 미디어이고, 그와 같은 미디어를 지배하는 것은 돈인 세상에서 그 지배권력의 무한 반복하는 연결 고리를 끊을 힘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인터넷이란 신병기가 있지만 완벽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책이라는 지적 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선택은 어쩌면 무기력한 자의 불가피한 결정으로 오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정치동학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적 안목에서 인간의 이성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 위에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변화시켜나가는 인간 지성의 힘이다그와 같은 인간지성의 힘을 통해 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개선시켜나가고자 했던 그의 고민의 지점은 명확했다.

90%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이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적 산출물을 독점하는 10%밖에 되지 않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표를 던지는가?

왜 진보세력은 중도 개혁세력의 성공을 통해 진보의 지평을 넓혀나가지 않고 극우 보수세력과 함께 중도개혁세력을 협공함으로써 중도개혁세력과 동반 몰락의 길을 선택하는가?

왜 사람들은 성장을 통해 복지가 달성된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을 맹신하는가? 왜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재벌의 이익이 자신의 주머니 사정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은 자신이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복지의 증대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고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을 받아들이는가?


학벌주의, 지역주의 , 그리고 재벌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권력, 교육마피아와 검찰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근본적 변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는 극우보수세력의 집단 광기가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위의 과제를 천착했다. 그리고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그는 그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책을 덮으며, 필자 노무현을 질시하고 저주하고 끝내 살해한 자들에 대한 피끓는 분노로 몸서리치고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무거운 역사적 짐을 살아남은 자에게 남기고 간 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가슴 저민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