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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나리마을에 명호초등학교 스쿨버스가 들어왔습니다.

이번 일은 비나리마을이 생기고 나서 있었던 가장 큰 사건들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명호초등학교가 생긴지 74년이 넘었고, 이웃 고계초등학교가 폐교를 하는 바람에 보상차원에서 고계리마을만 스쿨버스가 다니기 시작한지 근 10여년만에 이번주부터 비나리마을에도 스쿨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14년전 비나리마을에 처음 이사왔을 때 딸애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애가 벌써 대학 2학년생이 되었습니다. 그아이를 6년 내내 아침저녁으로 차로 등하교시킨다고 무진장 고생을 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정확히 10리길인데 마을안길을 1km쯤 걷다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를 따라 3km를 더 가야만 학교가 있으니 저는 도저히 아이를 학교까지 걸려서 다니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딸애랑 동네아이둘이랑 3명을 싣고 5년을 등하교를 시켜야만 했습니다.

최근에는 비나리마을에 귀농자가 들어오고 해서 총 5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아빠나 할아버지 차를 이용해 등하교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바쁜 농사철에 아침저녁으로 두번씩이나 아이를 데리려 학교까지 갔다오는 일은 없어도 좋게 되었습니다. 비나리 아이들의 등교풍경을 보니 부럽기도하고 또 딸아이를 등하교시키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소식을 듣고 마을회관엘 달려가니 버스 도착시간인 8시 45분이 되기 전에 벌써 아이들이 하나둘 마을회관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45분이 다가오자 저 멀리 노란색 스쿨버스가 마을안길을 따라 달려오고 있는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버스는 도착하고 면소재지의 이웃 아주머니가 안전요원으로 카고계시다가 비나리마을의 5명의 아이들이 질서있게 버스에 오르는 것을 돕와주셨습니다. 이내 버스는 차를 돌려 마을회관을 뒤로한채 멀어져 갔습니다.비나리마을에 최근에 있었던 가장 큰 변화를 반가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나니 마음속에서는 또다른 욕심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비나리마을에 마을버스가 들어와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좀 편리하게 장을 보러도 가시고 보건소도 다니실 수도 있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될것같습니다. 하루빨리 비나리마을에 인구가 늘고 또 지자체에서도 노인들의 이동권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가져 마을버스가 다닐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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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부터 양일간 대구농업기술원에서 있은 정보화마을 프로그램 관리자 양성교육에 다녀왔다. 이번 교육의 주제는 화상채팅에 대한 실무적 이해와 그 활용이었는데 이는 올해부터 각 마을 정보센타를 다문화 가정을 위한 화상상봉 공간으로 활용하게 됨에따라 편성하게되었다고 한다. 

사실 마을 사업관련 교육을 자주 받다보니 이번에도 뭐 그렇커니 하고 기대를 하지 안았지만, 이번 교육에는 이전에 없었던 우리 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아주 중대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별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다문화'에 대한 배움의 시간이 있었다. 강의록을 받아든 뒤에야 다른 강좌는 몰라도 이 강좌만이라도 한번 들어볼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주제의 신선함에다가 강사의 열정까지 더해 근년에 보기드문 명강을 2시간넘게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강사는 장흔성님이라고 구미다문화가족지원센타 대표이다. 사실 너무 많은 내용을 이야기했고, 그 중에서는 쉽게 어떤 결론이나 대책을 말하기가 어려운 문제들도 많았지만 강의를 통해 배우게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떠 오르는대로  정리해 본다.

먼저 강의는 다문화문제에 앞서 경북이 가진 문화적 특수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강의에 따르면 경북이 전국에서 출산율이 최하위란다. 거기다가 경북이 다문화가정 이혼율에서도 전국 최고라고 했다. 강사께서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묻자 대부분이 여성인 피교육자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유교의 전통'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경북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그리고 강사는 다문화 가정의 일반적인 양태에 대해 설명했고, 일부 가정이 정착에 성공해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고있지만 많은 경우 실패하는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설명했다. 제시된 많은 이유 중에는 각국의 문화에 대한 상호 몰이해도 있고, 한국 남성의 결혼에 임하는 준비문제, 한국 남성의 성차별 의식 등등을 제시했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한국의 일반적인 이혼남성의 거의 대부분이 재혼을 원하는 것과 달리 이혼 여성은 35%가 재혼을 하길 원치 않는단다. 그래서 남녀성별인구구성비의 차이보다는 결혼에 대한 남여의 입장차가 '신부'의 부족을 초래하는 측면이 더 크다고 한다. 강사분께서 이 부분에서 한국 남자는 왜 혼자살지 못하는가를 물었고 수강생들은 한국 남성은 혼자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결혼만족도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너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이런 이유로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결혼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정부의 노동력 보급정책, 출산율 제고 정책과 맞물려 드라마 등을 통해 부풀려 알게된  물질적으로 풍요롬고 낭만적인 한국사회에 대한 저개발국가 여성의 동경이 만나 이루어진 다문화  가정은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사는 동기에서의 모순이 꼭 비극적 결론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관심과 교육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내가 이해하는 강의의 핵심은 국가가 사적 결혼에 개입해서 비극을 초래하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과 '다문화가족정책'이 '다문화정책'으로 변화되어 다문화 여성결혼이주자의 가족내 정착위주의 지원에서 한국사회에서 역할과 위상제고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강사는 아직 일부 지자체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문화 결혼 지원정책은 다른 형태로 바꿀것을 제안했고, 결혼이주여성의 한국사회내 위상제고를 위해 다문화 신부 대학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엔인권위가 "정부주도의 인신매매"로 까지 비판하는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인구정책, 노동력보급정책차원에서의 결혼 지원정책은 사적인 공간에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만  하지만 이들 모든 문제에 앞서 한국사회의 양성평등이 획기적으로 진전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 같았다.  

아뭏튼 이번 강의를 듣게 되어 가까운 이웃이 된 결혼이주여성을 어렵지 않게 대하게 된 현실에서 최소한 이웃의 한사람으로서 다문화가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지 고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감히 몇줄로 정리될 수 없는 풍부하고 유익했던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들을 두서없이 기록해 본다.

- 한국선원이 태평양 제도의 소녀성매매의 최대 고객으로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베트남 , 필리핀 등에 한국인 현지처 등의 2세가 수만명 버려져있다.  

- 한국인 여성과의 재혼 4~5천만원이 든다. 다문화여성과의 결혼에는 1천만원정도가 들고 이마저도 지자체에서 50%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 사적인 결혼에 지자체가 개입하여 선심성지원을 함으로써 비극을 잉태한다. 결혼중개업소가 800여개되고, 정부가 결혼중개를 하는 것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일로 유엔인권위가 한국정부가 인신매매를 주도한다고 비판한다.

- 다문화가정의 50%가 기초생활수급자이고 평균 부부의 나이차는 17년이고, 전국 18만 결혼이민자 여성중 2만명가량이 현재 가출중이다. 다문화가정의 한국인 남성은 35%가 재혼이상이다.

- 결혼이주가 노예계약인 경우가 많다. 한국 국적취득에 3~4년이 걸리다보니 싫어도 참고 억지도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도 개선을 통해 가정폭력이 가출의 원인이 될 경우 국적 취득에 제한이 없도록 조처한 뒤로 일부 개선되고는 있다.

- 60만 외국인 노동자 중 15만이 불법체류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 주는 이익을 엄청나다.

-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에 따라 나름의 매춘 시장이 형성되어, 결혼이주자의 가출문제가 또 다른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 몽골 GDP의 20%가 한국에서 송금한 돈이다.

- 다문화자녀중 40%가 중학교에서 탈락하고 고등학교에서 70%가 탈락 한다. 미국 하층게급의 고등학교 졸업률 30%와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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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영양군 수비면에 있는 [우리손배움터]에서 반가운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부활을 추동하는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님을 모시고 같이 배우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답니다.

이번 자리를 준비한 영양의 젊은 일꾼들이 부럽기도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피폐해가는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지역의 젊은 일꾼들이 한분이라도 더 참가하여 좋은 뜻을 나누고 같이 배우는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마을만들기'를 설파하지만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서 쉬 농촌 주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농촌 마을 밖에서는 마을만들기를 외치지만 정작 마을안에서는 반향이 없고, 생태나 환경에 대한 논의들도 마을안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유는 마을 안과 밖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한 그로인해 마을밖에서 마을에 바라는 요구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기할 것입니다. 이런 갭을 해결하는데 박원순님의 오랜 경험과  지혜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재 진행중인 비나리마을 사업을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전망을 세우고 있는 마을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시없는 좋은 교육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가치지향으로나 실무적 지침으로나 큰 힘을 얻는 귀한 기회가 될 이번 강연에 경북 북부지역 시군의 농민들이 많이 참여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봉화 명호지역의 젊은 일꾼들은 당일 강연이 있는 영양 수비까지 함께 이동하기로 하고 더불어 [박원순의 희망열차]에 우리의 작은 힘이나마 더한다는 의미에서 봉화지역에 2~3장 정도의 플랭카드를 우리 힘으로 제작해 게시할 계획입니다.

농촌! 농민들 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민을 포함한 모두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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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마을 네트워크]가 제천 대전리에 [마을 이야기 학교]를 펼쳐놓은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번째 마을 기획전을 가진다고 했다. 오래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은 살려 마을주민의 발길을 모으고, 지난 겨울내내 주민의 열의를 모아 마을기획전을 마련했단다. 지난 토요일, [생전 처음]이라는 이름의 마을기획전이 궁금하기도 했고, 예마네 식구님들도 보고싶은 마음에 문경 사불암 걷기 모임에 갔던 길에 바로 대전리로 향했다.
 
오픈시간이 오후 2시로 잡혀있었는데 우리가 대전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교정에는 예마네 대장이신 김정헌선생님께서 방송국 카메라앞에서서 인터뷰를 진행중이셨다. 눈인사만 나누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이미 전시 오픈식은 끝났고, 이날 전시의 주인공이신 주민들과 손님들은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교실 한켠에는 오픈 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다시 복도로 나와 전시 공간과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복도에서 부터 전시를 펼친 한 칸의 교실에는 주민의 열정이 담긴 자화상에서 부터 풍경화, 그리고 겨울내내 공부했던 국어공부 영어공부의 흔적들, 그리고 입주작가의 도움으로  만든 돌 전각 작품과 이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그들 강좌에 참여하고 과정을 마쳤음을 증명하는 수료증까지 온갖종류의 작품들이 작은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으로 붓을 들었고, 영어를 공부했고, 그리고 마을 행사의 주인공이 되신 주민들의 작품은 오래전 바로 그 교실을 채웠을 아이들이 일으켰을 소란과 열기를 되살려주고 있었다. 소박한 전시물들을 산만하게 배치하여 더더욱 지난 시간의 아이들이 북적거렸을 정감 넘치는 교실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나는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오신 김정헌 선생님과 박명학선생님 그리고 송이양과 송이양의 친구와 함께 손님들이 다 떠난 오픈상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나누었다. 그동안 예마네의 활동에 대해 듣기도하고, 나의 비나리 마을 사업에 대한 말씀도 드리면서 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대전리분교 교정에 저녁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교실을 나와 수리중인 교장사택을 같이 둘러보고, 해가 지는 교정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벌써 수리해서 숙소로 사용중인 교사사택에 다시 모여앉아 송이양 친구가 난생 처음으로 만든 돼지등뼈감자탕을 안주로해서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야기 학교"는  작년에 만화가 한분이 입주하면서 상설화되었고, 그분들의 자발적 봉사로 주민과 함께하는 한글교실, 영어교실, 그림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겨우내 진행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김정헌 선생님이 마을노인회에 가입한 이야기며, 예마네 식구들이 마을주민과 친해져가는 과정도 듣고, 또 도시이주민들의 친화력 부족과 주민과의 불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길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번 전시가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쓸쓸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이날 전시가 있기까지 예마네 식구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생활근거지인 서울에서 계속 오고가며 길에서 보낸 비용과 시간도 그렇고, '대중문화활동'이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 작업과의 괴리를 감수해야하는 부분도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것 같았다.

아직도 교사는 자비를 들여 수리가 진행중이었고,  젊은 만화가 한분이 아예 입주를 해서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학교가 상시 오픈되고 온기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겨우내 시설 여기저기는 동파라는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부 공모에 참여해 기금을 받기도 했지만 산출없는 마을사업에 지속적으로 자비를 투여해야 하는 점도 마을과 문화예술인의 관계맺기를 가로막는 큰 장애로 작용할 것 같았다.  

사실 마을과 예술가의 관계맺기를 도덕적 차원,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요청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범적 사례를 도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잘 알려진 몇몇 예술가의 경우를 보아도,  20여년을 넘어 마을에 정착해 작업하면서 마을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진행해 왔지만 성과는 더디고 삶은 너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예술가가 살아가기에는 마을에 예술가가 숨쉬고 살아갈 삶의 공간이 쉬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또 예술가 자신의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삶 전체를 싣는 '마을로의 이주'를 결행하지 않고도 물론 다양한 결합방식이 있고, 이것이 보다 현실적이기도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또 마을이 대상화되고,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투영되거나, 외부에서 마을에 일시적으로 투입된 문화 예술적 자원이 마을과 어떤 트러블을 일으키기가 쉬울 것같다. 마을이 '작업'에 이용되기만 하고 마을주민이 향유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먼 '예술'이 될 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속에 들어와 삶속에 녹아들지 않는 이벤트성 문화예술 '행사'는 마을에 활력을 증진하는 긍정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어쨌던 예술가가 마을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을 공동체에 문화예술의 향유기회를 넓혀나가고 궁극적으로는 마을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거듭나게하는데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생존방식과 관계형식을 창출해야하는 과제를 더불어 짊어지고 나가야하는데 이는 사실 작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사실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마을은 또 뭔지 잘 모르겠다. 예술이 마을주민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기도하고, 예술마을이 예술인의 동호인 마을이 아닌다음에는 입주한 작가에게 너무 큰 부담으로 과제가 부과되기도 하기에 쉽게 예술마을을 주장하기에는 두렵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주민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마을을 넘어 주민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꿈꾸지만 맑스가 말한 "노동자 농민이 동시에 예술가이지 철학자인 세상"의 꿈만치나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직은 공동체 문화활동가는 외로운 혁명가일 수밖에없고 그러다보니 예술마을은 [예술마을네트워크]로  조직화되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또한 힘든 길이기도한 [마을예술네트워크]의 활동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발고 미력하나마 그들이 가는 길에 한발 걸치고 뒤따라라도 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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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부터 봉화 문화원 기타교실을 수강중이다.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 저녁6시30분부터 2시간의 강습이다.

기타는 나에게 청춘의 다하지 못한 목마름의 상징이다.
한번도 제대로 쳐 본적이 없었기에 기타는 오히려 더 애절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런 기타를 쉰의 나이에 다시 배우기로 했다.
사실 10대 이후로 로망스나 겨우 칠줄 알다가 더 이상 나아지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평생을 한달에 두어번 기타를 들었다 놨다 해 온게 고작이다.
그러다보니 그나마 옛 실력도 온데 간데 없이 다 사라지고
오직 기타에 대한 그리움만 잔뜩 쌓이게 되었다.

그 갈망을 딸애에게 전가한 때문인지 딸애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클래식 기타 동호회에 빠져 전공공부보다 써클 활동에 더 열심인것 같다.
한번씩 딸애가 집에 내려와 기타를 치면 
나의 기타에 대한 갈망을 더 깊어졌다.
영화 [ONCE]의 주제가 "Falling Slowly"의 선율은 연주하는 
딸애가 이쁘고 대견스럽지만 마음한구석에 셈도 나고
기타에 대한 절실한 갈망도 깊어만 갔다. 
거기다가,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기타를 배워보겠다고 거짓 다짐만 해왔는데
그렇게 갈망한 여유는 나의 삶에서는 영영 생길 것 같지 않다는 확신마저 들었고,
그러는 와중에 봉화 문화원에서 기타교실을 진행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실 무진장 쑥스럽고 도대체 어떤 부류의 수강생일까 걱정도 되었지만
지난 3월2일 케이스도 없는 떼묻은 기타를 들고 봉화문화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모든 걱정은 다 근거없는 것이었다.
일단 수강생은 나이나 직업면에서 다양하기 이를데 없었다.
초딩부터 50대의 아저씨까지, 나같은 농사꾼에서 공무원
그리고 학교 선생님도 기타를 배우고자 한 자리에 모였다. 
남녀 노소가 어우려져 같이 기타를 배우는 풍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풍경속에 같이 들어가 이제 경우 계이름을 익히려드는
40~50대 아저씨 아줌마들과 같이 기타의 울림속에 잠겨드는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삶의 기쁨, 살아있음의 희열을 준다.

사실 쉰살이 되어 계이름을 익히기 시작하는 수강생들이 언제 로망스라도 칠까,
그리고 평생 아람브라 궁전을 쳐 보기나 할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아마 다 아니라도 좋을 것 같다.
그냥 배우는 것 자체가 주는 기쁨 만으로도
나도 그렇고 그분들도 그렇고 다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이니깐!

내 삶 속으로 다시 들어온 기타가 내 삶의 끝까지 동행하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천지신명께 빈다.
 





기타배우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인연을 제공해 주신
봉화문화원 강영선 사무국장님과 기타교실의 강사이신 조선화님께 감사드립니다.

* 수업시간 : 매주 수요일 오후 6시30분부터 약 2시간
*  현재 수강생 약 35명 / 학기당 2만5천원의 수강료
*  문의처 : 봉화문화원 054-673-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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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9일 (토) 사불산 걷기

사불산은 이번 달 산행이 결정되고서야 처음 알게 된 산이다. 인테넷을 이용해 찾아보니 사불산은 문경시 동북쪽의 단양과 접해있는 공덕산(912m)을 칭하며, 공덕산에 속한 작은 봉우리에 4면에 불상을 양각한 사불암이라는 바위가 있다고해서 그렇게도 불린다고 했다.
이날의 일정은 사불산 등정후 대승사를 둘러보고 절에서 봉양을 하든지 아니면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헤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좋은 분들과 산길이나 걸으며 봄볕이나 싣컷 쐬고 말았을 사실은 좀 민밋한 일정이었는데, 문경시 엄원식 학예사님의 안내로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주차장에서 부터 시작해 등반일정 내내 같이하시며 산과 절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시고, 윤필암과 대승사에 미리 연락을 넣어 분에 넘치는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게되었다. 봄 풍경을 마음에 담고, 엄학예사님의 배려로 텅빈 머리에 역사 문화적 지식을 가득 전해 받은 것도  부족해 두손 가득 선물보따리까지 들고 산을 내려오니 인연들이 모두 한없이 고맙고  염치없기도 했지만 조금 과장하면 혹시 "운수좋으날" 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하기조차 했다^^*
  
산행 시간을 착각하는 바람에 아침부터 정신없이 달려 일행과 합류한 것이 9시 40분 전후, 윤필암아래 주차장에서 미리 도착한 일행과 엄원식 학예사님이 비석앞에서 비석의 유래와 대승사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고 계셨다. 일행을 기다리게 해 한없이 죄송스러워지만 마른 산을 씻어 내리는 봄바람에 이내 나는 산에 빠져들고 일행들과 함께 대승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때  창건되었다고하는데 이후 몇번의 화재가 있었고 가까이는 1956년 대화재로 인해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고 거의 소실되었다고 했다. 이후 중건이 진행되어오고 있으며, 근년에들어 템플스테이에 필요한 건축물까지 신축하는 바람에 절의 풍광이 조금은 산란하고 어수선해보였다. 그점이 봅시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절에 사는 사람의 뜻을 무시하고, 절을 보러오는 사람의 뜻만 주장할 수는 없는 이치아닌가. 

주지스님께 양해를 구하고 예불중인 대웅전에 들어가 보물 575호인 [목각아미타여래입상]을 보고, 엄학예사님의 배려로 사찰내의 이런저런 문화유산에 얽힌 재미있고 유익한 설명을 들었다. 대웅전앞 대승선원에 걸린 2개의 편액에 씌인 "地湧雙蓮(지용쌍연)"  "天降四佛(천강사불)" 이라는 두 구절이 대승사의 창건설화를 대신한다고 했다. 절을 창건한 지용이 죽고 연꽃 2송이 피었고, 사불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경내의 이런저런 문화유산에 덧붙여 경내를 어슬렁 거리는 하얀 진돗개의 사연까지 듣고 나서 경내를 벗어나 윤필암으로 향했다. 절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가파를 경사가 이어지는 난코스가 이어졌다. 일행들은 겉옷을 벗어 들기 시작했지만 목적지인 사불암에 그리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사불암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사불암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취하고 또 봄볕과 보바람에 취해 한참을 쉬다가 올라온 길을 되짚어 윤필암으로 향했다.  
 
윤필암은 작은 건물 한두채로 이루어진 그런 암자가 아니라 일반 사찰보다도 작지 않은 규모였다. 더군다나 전국에서 사찰음식으로 제일로 유명한 곳이기도하고 윤필암의 다실은 엄학예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역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실중 하나로 손꼽힌단다. 학예사의 배려로 그런 다실에서 마일스님을 뵙고 절에서 손수 준비한 떡과 차를 나누었다. 차를 나누며 스님의 삶과 속세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어떻게 같고 도 어떻게 다른지 많은 생각을 했다. 마일스님의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표정이 한 사람의 삶이 가진 행과 불행의 무게를 되돌아보게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실을 나서 점심 공양 약속시간이 지난 대승사로 다시 행했다. 공양실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막 다실에서 떡과 차로 배로 채운 뒤였지만 사찰음식의 맑고 깊은 맛에 취해 한끼니의 식사가 주는 행복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양을 마치고 엄학예사를 따라 주지스님이신 철산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일행 모두 절에서 운영하는 '대승요'에서 구운 다기세트를 한아름 씩 선물로 받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복원공사중인 근암서원을 들러보는 것으로  이날 모임을 마무리했다.

다과를 내어주신 윤필암 마일스님, 다기를 선물해주신 대승산 주지 철산스님, 풍부한 하루 여정을 준비해 주신 문경시 학예연구사 엄원식님, 그리고 이날 즐겁고 행복한 산행의 인연을 만들어주신 이기자님을 비롯한 일행 모두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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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이 펜을 잡으면 다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런데 유시민이 편역한 '일본문화이야기'는 원래부터 유명한 책이란다.
이 책은 영국에서 [제노포브스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나온
세계 여러나라에 대한 문화안내서중 일본 편을  편역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위트와 해학을 문화비평과 버무린 맛깔난 책'이다. 
얇은 책에다 흥미진진한 소재, 그리고 유려한 필체와 해학들...
이런 류의 책은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틈 날때마다 짬짬이 읽어나가야 제맛인 책이다.
그런데 이책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으로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그 이유는 이책이 너무 지나치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시간 나는데로 틈틈히 읽어야될 책을 한번에 다 읽어 버렸다. 그래서 아쉼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그냥 당분간은 가방에 넣어다니면서 두고두고 재독 삼독을 할 수밖에 엀을 것 같다.

물론 재미 하나가 책은 평하는 절대지존의 기준일 수 없다. 특히나 문화비평이나, 문화안내서는 나름의 합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독자에게 충분한 공감을 주어야한다. 사실 이책의 내용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이런저런 선입견들과 대부분 합치한다. 그래도 이 책은 일본 문화연구서가 아니라 그냥 대중적 안내서이기 때문에 큰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 일본인에 대한 선입견은 너무 일반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더 그 진실성에 의문이 간다. 솔직히 나는 집단에 대한 획일적 규정에 대해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문화에 대한 극도로 단순화된 명쾌한 규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인은 본심을 숨기는 이중인격자 일까? 일본인은 결벽증을 가진 건강강박증 환자들인가? 일본은 개성이 아니라 통일성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가? 일본인에게 스포츠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극기일 뿐일까? 일본인은 자기주장이 없고 대세에 순응하는 현실적 처세주의자들인가? 사실 나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많은 책이나 개인의 발언중에서 그런류의 일본에 대한 판단이 전제된 것을 직간접적으로 느껴 왔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런 선입견을  재미나게 정리하는데 성공한 책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선입견의 원천이 되는 책인 것 같기도 하다.

한권의 책을 통해 일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은 알려고 한다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욕심쟁이에게 적합한 책이 아니다. 일본을, 일본 문화를 가볍게 스케치해 볼 수 있는 아주 가볍고 재미있는 책일 뿐이다. 그래서 조금은 불만스럽고, 아쉽기도 하지만 용도가 다른 독자에게라면 얼마든지 권해주고 싶은 책이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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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때문에 겨우내 철시되었던 봉화장이 얼마 전부터 문을 열었습니다. 오랜만에 열리는 장터에서 사람구경도 하고 봄을 알리는 산나물도 사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미루어 오다가 저번 장날에나 시장 구경을 갈 수 있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찾은 봉화장은 아직 구제역의 여파 때문인지 썰렁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봄은 문턱까지 왔다지만 장을 쓸고 지나는 바람은 아직 차갑고, 괭한 장터에 사람발길조차 드뭅니다. 장을 보러 온 사람보다 장에 물건을 팔러 온 할머니들이 더 많은 봉화장터엔 지난 가을 거두어 두었던 말린 무청이며 겨우내 잘 간수해온 사과랑 고구마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펼쳐놓은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은 돈 욕심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어 보입니다.

그래도 장터를 쓸고 지나는 찬바람 사이에 봄 내음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부지런한 할머니의 손길에 첫 선을 보인 한소쿠리 씩의 냉이와 달래 때문입니다. 장터를 거닐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봄은 결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봄은 그렇게 부지런한 할머니의 손길 덕분에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언 땅에 호미질을 하시며 냉이를 캐는 할머니의 손길이 언 땅도 녹이고, 천지신명의 언 마음도 녹일 것입니다. 그렇게 강이 풀리고 햇살이 풀려 마을 안길에 사람의 발길이 늘고, 마을을 가로 지르는 개울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얼음이 녹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잠든 나무를 깨우고, 깊은 잠에서 깬 개구리가 마실을 나오기 시작합니다. 마실 나온 개구리 소리에 산수유 꽃봉우리가 깨어나고 봄꽃 향기에 나비들이 날아들면 세상천지에 봄의 향연이 시작됩니다.

봄을 만들어 가는 할머니의 손을 다시 봅니다. 달래를 다듬는 할머니의 거친 손이 가슴 아프지만, 그 거친 손으로 생애 내내 이루었을 많을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 거룩한 손으로 이룩한 창조물들은 참으로 크고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친 할머니의 손은 어떤 예술가의 손보다도 더 거룩한 손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섭리는 할머니의 위대한 손이 만들어 낸 창조물들을 천시합니다. 할머니가 지고 오신 광주리에 담긴 농산물을 다 팔아봤자 돈으로는 정말 몇 푼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지고 온 광주리에 담긴 농산물들이 다 팔려 좀 더 가벼운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멀린 도시에서 자라고 있을 손주를 생각하며, 차창 넘어 봄이 오는 먼 산을 보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져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또 한번 주어진 봄의 의미를 생각하고 충만한 하루하루의 삶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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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왜 무당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무당이 되어갈까? 나는 솔직히 만신 이해경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유의 물음들에 대해서 별로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지독한 반종교주의자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특히나 한국 교회의 추악한 물신숭배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다. 하물며 무속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사람이 우연한 인연에 만신 이해경을 만나고 무속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지난 달에는 바쁜 일상 중에도 만신 이해경을 다룬 다큐 [사이에서]를 보고, 그의 자서전을 틈틈이 읽었다. 두권으로 된 그녀의 자서전을 덮으며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나는 결코 무속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내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경의 자서전을 알리는 글을 쓰고 이 책을 일독을 권유하고 싶은 소명감 같은 걸 느꼈다. 그것은 순전히 '이해경'이라는 사람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고, 또 설령 나와 같이 무속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세계의 매력을 공유하고 사회적, 문화예술적 의미를 읽어내는데 지대한 도움을 줄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져 드는 순간 나는 급속히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녀의 삶은 한 사람의 개인이, 그것도 한국적 상황에서 한명의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만신 이해경의 한 많고 원 많은 넋두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느새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잊어버리고 그녀와 마주앉아 그녀의 넋두리에 맞장구를 치면서 같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그녀의 삶의 여정을 동반하면서 나는 전적으로 그녀의 편이 된다. 그래서 그녀에게 고통의 원천이 되었던 그 모든 것과 맞서 주먹을 쥐기도 하고 같이 퍼질러 앉아 엉엉 울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녀가 무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무당이 된 그녀가 사는 무속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상권)을 통해 이해경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며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외로운 선장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만신의 길은 좌절이 아니라 극복의 결과로 성취된 것이었다. 그녀는 무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귀신이 되어도 남을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이겨낸 사람이고, 그래서 그녀는 ‘특별한’ 무당이 되었다.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절로 고행과 득도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고, 그래서 인간적 경지를 넘어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그녀는 당당하다 못해 의연하기조차하다.

(하권)에서 내림굿을 받고 드디어 무당이 된 이해경은 이때부터 시작하게 된 또 다른 싸움의 과정을 풀어나간다. 그녀는 무속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홀대에 맞서 조용한 싸움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타락한 한국 현대 무속세계에 메스를 들이민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만치 스스로 물신주의에 빠지고, 상업화의 길로 접어든 한국 무속을 질타한다. 그리고 무속의 원시적 건강성을 회복할 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 길은 쉬 드러나지도 않고 그녀를 둘러싼 안팎의 세계는 모두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그와 같은 고난의 과정에서 그녀는 운명인 듯 한국 무속의 사회적 건강성을 찾아 예술로 승화하는 기회를 포착한다. 다시 상권을 되돌아보면 그녀는 무병만을 앓은 것이 아니라 예병까지 앓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녀로서만 만족할 수 없는 예술적 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무수리이면서 동시에 굿을 주관하고, 나아가 무대 위에서 예술로 승화된 무속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물론 그녀는 철저히 사제이고자 하고, 예술의 장에 세워진 ‘굿’일지라도 철저히 그 신성함을 지키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신 이해경의 삶을 통해 볼 때, 한국 무속이 종교성을 탈각한 문화예술로서만 존립한다고 해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인은 철저히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해경을 통해 사제가 아니라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40여 년 전 어린 시절 밤새 동네 골목 안에 울러 퍼지던 꽹과리 소리는 어린 소년에게 단지 무서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누누이 반복해서 제도화된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신’의 어리석음과 그 병폐에 대해 들어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 그렇게 비난하던 ‘미신’의 속성을 제도화된 종교가 더 철저히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무속인 이해경의 삶은 타 종교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위한 인증투쟁과 병행해서 한국 무속세계를 정화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성 제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존재의 신성, 생명의 영성, 나아가 세계의 종교성 자체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지 타인의 심성 속에 일어나는 신비체험을 손가락질하거나 비하할 이유가 없다. 단 종교의 이름으로 물질과 권력을 탐하는 현 한국사회의 종교현상에 대해 비판적일 뿐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인정한다. 한국의 무속이 여타 종교들과 대등하게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하나의 치유 방법이라면, 거리에 산재한 신경정신과 못지않게 충분히 그 존재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평생 처음 접해 본 무속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 만신 이해경님께 감사드린다. 그녀의 자서전 [혼의 소리, 몸의 소리]를 통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좀 더 넓힐 수 있었다. 무속의 세계를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보다 넓어진 세상의 지평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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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지만 소돼지같은 짐승들에겐
다시는 없어야될 참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수천 수만마리 소와 돼지가 오직 구제역이라는 전염병이 번져
고기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위한다는 이유로
마무가내로 생매장되고 대량 살육되었습니다.

인간이 참 죄가 많습니다.
신이 없기에 다행스럽긴하지만,
인간의 죄를 누가 물을까 두렵습니다.


이웃 마을까지 구제역이 번져 이웃 소들이 살처분되는 와중에도
비나리 소들은 다행히 구제역 참화를 비켜났습니다.
전래가 없는 대량 살육의 와중에 태어난 송아지가 이만치 자라
어미의 사랑속에서 따사로운 봄햇살을 맞고 있습니다.
생명의 안스러움과 그 애틋함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간디가 그랬답니다.
"문명사회의 척도는 그 사회에도 동물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이다"
잡식성 동물인 인간이 육식을 회피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채식주의자들이 있긴하지만 인류의 0.1%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기를 위해 짐승을 키우고, 그 고기를 죄책감없이 취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한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좀더 경건해져야할 것입니다.
저 애틋한 송아지의 맑은 눈을 바라다보면서 
지금 당장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가능한 육식을 줄여 나가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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