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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어설픈 겨울의 흔적을 마지막 씻고 내려가는 비가 내린다.

밭 장만이 끝나고 채 고추를 심지 못한 농부들은

애간장이 타 들어가고,

고추를 심어 한숨을 돌렸던 어르신 역시  고추모 쓰러지고,

밭둑 떠내려가는 장대비에 가슴을 졸인다.

농사가 없어 날품을 파는 사람은

하루 벌이가 없어 딱 그만치 가벼워진 마음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마당에 듣는 비소리에 이끌려

유념의 달콤한 꿈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봄비 같지 않은 비가 봄의 대지를 적시는 날 아침,

나는 창을 열고 산천을 내다보고,

나의 삶을 들여다 본다.

비가 와서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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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人열

현대백화점 미아점 10주년 기념展


참여작가 / 1부 : 천경자_김영미_강유림_이수경_한지선 
                2부 : 황영자_류준화_조정화_홍지연윤정원

주최 / 현대백화점 미아점 주관 / 아트세인 주관_정영숙((갤러리세인, 아트세인 디렉터,( blog.naver.com/jysagnes)_이은희(큐레이터)

관람시간 / 11:00am~08:00pm

현대백화점 미아점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성북구 길음동 20번지 현대백화점 미아점 10층 Tel. +82.10.9327.9515/+82.2.3474.7290

갤러리 H는 현대백화점 미아점 개점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 10인열전』을 개최한다. 국내 여성작가 중 원로, 중진, 그리고 신진작가에 이르기까지 회화, 입체작품 등 장르를 초월하여 열정이 가득한 10명 작가의 작품을 4, 5월에 2회 걸쳐 전시한다. ● 국내에서 첫 여류 서양화이자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한 나혜석, 초상화에 뛰어났던 근대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은 여성이 활동하기에는 척박한 시대상황에서도 화가의 길을 당차게 걸었던 인물이다. 이처럼 당당하게 시대에 저항하거나 천부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여성작가들은 현대미술에서는 소수자가 아니다. 최근 작가들을 조사하고 섭외하면서 여성작가들의 인원이 4~5년 전보다 월등이 증가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숫자의 증원을 넘어 중요한 가치는 작품 내용일 것이다. ● 이번 전시는 원로세대 천경자, 황영자부터 중견작가 김영미, 류준화 그리고 40대 전후 역량 있는 작가 강유림, 한지선, 조정화, 홍지연 또한 신진작가 이수경, 윤정원에 이르기까지 독자적 감성의 발현이 탁월한 작가로 구성하여 단편적이지만 한국 여성작가의 한 흐름을 소개하는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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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이라는 수단으로 영국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로 부터 인도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는 무소유와 평화라는 가치를 끝까지 관철하며 아름다운 인류공동체의 이상을 추구했다. 그는 대중을 이끌고 해방투쟁을 수행한 현실주의자이면서, 권력과 금력 그리고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인도의 신분차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폐지시키기 위해 투쟁했고, 온간 인종적, 종교적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갈구했다. 하지만 간디는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해방되고나서 얼마안있어 이슬람교를 부인하고 카스트제도를 옹호하는 흰두교도가 쏜 흉탄에 서거했다. 그리고 그는 인도인의 가슴에 또 하나의 신으로 남게되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전부이다.

빈라덴은 사우디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기에 영국에 유학을 다녀왔고, 이슬람교리에 깊이 심취했으며,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에 소련이 침공하자 아프칸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이슬람 전사의 조직인 무자헤딘에 헌신했다. 그는 유산으로 물러받은 엄청난 부를 이용해 무자헤딘에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직접 무장전사로서 전투에도 참여하기도 하면서 이슬람의 해방을 추구하는 알카에다라는 국제적인 조직을 결성하는 등 이슬람의 탁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의 아프칸 침공을 빌미로 이슬람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군수물자지원과 군사기술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한때 소련이라는 북극곰을 잡기위한 미국의 사냥개 역할도 마다않던 빈라덴이지만 소련과 아프칸 간의 전쟁이 끝나고 다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국면이되면서 빈라덴은 다시 전면적인 반미, 반 이스라엘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 유명한, 항공기를 이용한 911 미국무역센타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911공격을 빌미로 아프칸과 이라크 등을 공격하며 대이슬람전쟁을 확대하고 노골적인 중동 지배야욕을 드러내며 반미투쟁의 상징이된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10여년간 강행한다. 그리고 몇일전 미국은 빈라덴의 사살을 공표하며 '테러와와 전쟁'에서 한 단계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알카에다 등 반미 전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섬멸작적을 예고하고 있다. 

간디는 인도의 성인이 되었고, 한국에서 조차 청소년기부터 '위인전'을 통해 완전한 삶의 전형으로 배워야하는 20세기 최고의 위인중 한명으로 알려져있다. 한국에만도 '간디'를 내세운 교육기관의 이름이 한둘이 아니고 생태적 삶, 금욕적 삶의 전형으로 까지 추앙받고 있다. 간디에 대한 그런 판단은 동서양의 구분을 뛰어 넘으며 이미 하나의 통일적인 상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빈라덴에 대한 평가는 이슬람세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바깥세상에서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우리는 빈라덴의 죽음을 테러분자에 대한 정당한 처단이라며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영상과 더불어 이슬람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에 대한 야만적 학살행위라며 이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는 시위대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그 사이 어디쯤 빈 라덴의 참 모습이 있을 것 같다.

'비폭력 불복종'이라는 무기를 든 간디를 영국 제죽주의들은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나는 솔직히 그점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하는데 간디의 비폭력 노선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당시에도 무장저항운동을 시도했던 조직들이 활동했을 것이 분명하고, 또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불복종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식민지들도 독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인의 입장에서 비폭력노선과 무장 투쟁 노선중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이고 합당한 선택이었을까는 그리 쉽게 판단해 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닌것 같다.

빈라덴은 테러리스트라고 명명한 자들은 사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군사력 우위를 바탕으로 정당한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해 오고 있는 세력들이다.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버리고 패주하는 이라크 장병 수만명을 사막의 한가운데서 에서 첨단 무기로 살육했다. 아들 부시는 아프칸과 또다시 이라크를 침공해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해 수십만의 인명을 아무 꺼리낌없이 살육했다. 미국은 세계 수백곳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것을 불의로 몰아세우며 무자비한 군사공격과 정보공작을 일삼고 있다. 그리고 오직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정보를 가진 무고한 시민을 포함해 알카에다 요원 등을 납치해 관타나모 기지에 강제 구금하고 첨단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고문을 자행해 정보를 얻었다. 미국은 그렇게 얻어낸 정보를 이용해 비 무장상태인 빈라덴을 가족과 함께 사살하고, 그의 육신마저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은 테러리스트를 정당하게 응징했다고 주장하며 승리에 도취해 광분하고 있다.

나는 우선 간디의 삶이 정확히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간디는 식민지배 권력자들의 기준에서 용납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간디는 세계적인 인물로 등극하면서 20세기가 낳은 위인의 한명이 될 수 있었다. 빈라덴의 본모습에 대해서도 나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빈 라덴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이익에 철저히 맞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 전사였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간디와 빈라덴은 비슷하지만 다른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은 서방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인도의 해방, 이슬람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간디는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고 서방의 인정과 지지를 얻어 위인으로 등극했다. 빈라덴은 무장노선을 견지했고 서방의 철저한 증오심의 대상이 되어 테러리스트의 수괴로 몰아세워졌고 끝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나는 간디와 빈 라덴에 대한 일면적인 평가에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진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미국인의 진실, 이슬람의 진실은 서로 다르다. 영국의 진실과 인도의 진실도 아마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간디가 옳은지 빈라덴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간디와 빈 라덴 두 사람의 간극이 사실은 그리 넓지 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빈라덴을 무장투쟁 전사로 만든 시대와 그 시대를 주도한 미국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슬람인의 가슴에 영원한 별이 된 빈라덴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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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내성천-영주댐 순례를 마치고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새중동식당'이다. 평범한 외관과 단초로운 메뉴지만 나온 음식에는 시골인심이 듬뿍 담겨있다.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지율스님을 반가이 맞이하는 걸 봐서 두분의 인연이 깊어보였다.


밥을 먹으며 지율스님과 가벼운 말씀을 몇마디 나눈 것에 불과 했지만 식사를 마치자 나도 모르게 스님의 삶에 대해, 스님의 생각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분의 삶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경외심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 앙상한 뼈대가 승복위로 들어나고 왠지 조금의 걸음에도 지쳐보이시는 모습을 대할 때는 가슴 깊이에서 울컥 생명가진 모든 것의 어쩔 수 없는 안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냥 맛난 것 드시고, 따뜻한 방에서 편히 지내셔도 좋을 분이 어찌 그리도 힘든 삶을 살으시는지 안스럽기도 하고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불경스러움에 놀래기도 했다.


나중에 아내가 지율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언론에 비친 지율스님은 엄격하고 강인한 인상으로 다가왔는데, 직접 뵈니 너무 가날프고 여린 분이더라.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할 수 있었을까 이해가 잘 안되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 자신이 약하고 여리기 때문에 세상의 여리고 약한 뭍 생명들에 대해 무심할 수 없었는가보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상주보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강이 있고, 마을이 있고, 두어마리 물새가 한가로히 놀고 있는 그런 강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우리를 맞은 강은 그야말로 공사현장 그자체였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인간 마음대로 막고 틀은 물이 고여 썩어가고, 그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듯, 레미콘차들은 오고가며 계속 콘크리트를 붓고 있었다.
 


모든 자연스러움이 야만이고, 자연은 철저히 정복해야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대중은 그런 권력자의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마찰을 회피하기위해 모른척 외면함으로써 눈앞의 저런 파괴와 뭍생명에 대한 대량 학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자신도 분노만할뿐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혼동스럽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상주보를 뒤로하고 경천대로 향하는 길에 경천교를 건넜다. 운전을 하지 않는 일행들은 차에서 내려 다리를 걸어서 건넜고, 차를 운전하는 분들은 차를 다리 건너 자전거박물관 옆에 주차를 해 놓고 역시 다리에 올라 모래를 퍼담는 포크레인과 질주하는 덤프트럭이 점령하고 있는 낙동강을 내려다봤다. 모래를 싣은 덤프트럭이 눈으로봐서 시속 7~80k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속도로 강둑을 질주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 바람에 흩날리고 강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의연했지만
고통을 참고 속깊은 울음을 삼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강은 죽어가는데 경천대를 찾는 상춘객의 발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50대 후반의 남여가 무리지어 와작지껄하게 웃으며 개나리꽃이 만발한 산길을 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고개를 조금만 돌려 보면 보이는 강의 파괴현장에 대해선 무관심해 보였다. 눈 앞의 봄꽃을 즐기면서도 바로 발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대대적인 자연파괴행위에 대해선 무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궁금했다.    


경천대에 올라  비록 상처투성이일망정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운 강이 그냥 죽어가도록 바라다보고만 있어야하는 현실이 가슴아팠다. 단지 강의 마지막 모습을 내려다 보고 마음속 깊이 그 풍경을 새기고 또 새겼다. 일행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고 지율스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날의 순례는 마무리했다.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길에 경천대에 있는 정자를 지났다. 정자는 이름하여 무우정이란다. '걱정이 없다'는 무우정이지만 무우정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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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죽이기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지만 아직도 강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대전시립미술관 김준기 큐레이터와 일행 10여명이 4대강 공사 현장을 순례하기 위해 봉화엘 왔다. 봉화는 4대강 공사 영역은 아니지만 낙동강의 한 시발점으로 본격적인 4대강 공사현장인 영주의 영주댐과 안동, 그리고 예천, 상주로 이어지는 낙동강 상류 4대강 현장으로 나가는 출발점이다. 토요일 예천 회룡포와 안동 화회를 순례한 일행은 밤이 늦은 시간에 봉화 우리집으로 집결했다. 


미처 낮시간에 합류하지 못해 자정이 다되어가는 시간까지 모여든 분들의 면면은 다채로왔다. 4대강 사업에 대해 관심이 없다가 이번 순례를 통해 그 실상을 알게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대학원 과정 학생부터, 4대강 현장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젊은 작가분들, 그리고 마음으로 아파했지만 4대강 공사 현장까지 와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교수님들까지 함께했다. 예술을 빼고는 공통분모가 많지 않은 분들이 오직 한분의 적극적인 독려로 4대강 사업 현장의 내성천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고 했다.

 

낙동강 답사를 위해 비나리마을에 모여들었지만, 모처럼 산골마을에서 보내는 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준비해 둔 술이 동이 나자 몇몇분들은 왕복 한시간이 걸리는 봉화읍까지 가서 술을 공수해가며 산골마을 비나리의 밤을 밝히기도 했다.
 


술과 함께 새벽을 맞은 분들이지만 하루 일정을 위해 어김없이 아침 7시에 기상을 하고,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내성천을 향했다. 약속장소인 평은초등학교는 한참을 헤맨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울타리에는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중인 영주댐 공사와 관련한 주민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플랭카드와 영주댐공사 시행처에서 걸어놓은 플랭카드가 걸려있었다. 이쁜 시골학교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시작해서 내성천을 걸으며 봄날의 하루 낮을 보낼 수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학교울타리에 걸린 플랭카드만 보고도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봄볕 가득한 평은 초등학교 교정을 10여분 거닐다가 이날 우리 일행을 안내할 분들을 맞았다. 이날 같이할 분들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맞이하고 보니 이날 우리 일행을 이끌어주실 분은 천성산지킴이이신 지율스님아니신가. 지율스님과 같이 오신분들은 비디오작가한분과 사진작가 한분 그리고 지금 조계사내에서 진행중인 '스페이스 모레'를 기획한 박은선 작가였다. 이분들 모두 4대강 사업에 맞서 낙동강을 기록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여 낙동강의 원시적 아름다움과 그 야만적 파괴과정마저 기억시키는 일에 몰두해 오고 계신 분들이었다.


낙동강 가까이 살면서도 늘 함께하지 못해 마음 무거웠는데 막상 이분들과 첫 맞남을 가지자마자 오히려 늘 이렇게 같이 해 온양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것은 강과 함께 해 온 분들이 타인의 삶에 대해 가지는 강물같이 넉넉한 포용력과 사랑 때문인 것만 같았다.

 


일행들과 함께 두터운 양말과 신발을 벗고 운곡천이 가마득히 잊어버린 만들어낸 금빛 모래속으로 달려들어갔다. 발바닥에 와닿는 모래의 촉감이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불러내고, 몸속 깊이 숨어버린 자연과의 교감능력을 되살리는 듯 나의 숨은 가빠지고 몸을 나를듯 가벼워졌다. 차가운 강물로 내려서자 온못에 찌릿하게 전해져 오는 한기가 자연이 내게 전해주는 어떤 메시지 같았다. "정신차려라. 너가 사는 꼴의 전체를 둘러봐라. 너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몸이 자연과 닿는 순간 나는 인간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잃어버린 원시적 생명력, 자연적 삶의 건강성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지율스님은 모래와 물의 이야기를 통해 강의 소중함, 그리고 바로 이 내성천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전해주셨다. 지율스님의 꾸밈없는 말씀, 군더더기없이 담백한 말씀엔 깉은 깨달음이 묻어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이게 되었다. 모래 한알의 소중함, 물 한방울의 신비함을 공감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어우러짐이 어떠해야하는지 저절로 터득하게 될 것 같았다. 지율스님의 말씀은 단지 MB의 사대강 죽이기에 반대하는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양식 전반에 대해 되돌아보게하는 울림이 있었다.


모래를 밟고 강물에 발을 적시고, 모래알 한알 한알을 만지고 놀면서 내성천에서 노는 시간은 행복했다. 내성천은 순레의 장소가 아니라 놀이의 장소였다. 그냥 강의 아름다움에 빠져 놀다보면 저절로 그 순간만이라도 생태주의자가 되고 환경운동가가 될 것 같았다. 지율스님이 왜 사람들의 발길을 강으로 모으려고하셨는지 강에 와서 보니 저절로 알것 같았다. 구구절절한 설명도 필요없이 그냥 고즈넉이 흐르는 강을 바라다만 보아도 왜 4대강 사업이 저질러져서는 안될 자연에 대한 가공할 파괴행위이고, 강에 깃들여사는 뭍 생명에 대한 대량학살행위인지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 일정을 위해 강을 나오면서 낯익은 분을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천경배님이 아니신가. 성공회신부이신 천경배님은  영주지역에서 오롯이 내성천을 지키기위해 삶을 받쳐오고 계신 분이신데 이전에 블로그 등을 통해 인사만 주고 받다가 이날 처음으로 직접 뵙게되었다. 그것도 내성천에서 모래를 딛고 서서 천경배신부님을 뵙게 되니 이것도 무슨 전조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것만 같았다. 앞으로 자주뵙고 현장에서 같이 할 수 있기를 스스로 다짐하면서 작별을 했다.   


내성천에서 발길을 돌려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진행중인 영주댐 공사현장으로 향했다. 봄의 강은 아름다웠고, 강이 길을 따라 흐르는지, 길이 강을 따라 이어지는지 모를만치 길조차 자연스러운 네성천을 따라 금강마을에 도착했다. 금강마을은 영주댐으로 인해 곧 철거되고 수몰될 마을이라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들이 물속에 잠겨버리다니, 마을에서 삶의 영위해 오던 숱한 사람들의 가슴에 또 얼마만한 상처를 남기고 이 마을이 사라져 갈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마을회관에서 도시에서 할머니를 뵈러 온 아이들이 놀고 있고, 아직 마을 들녘에 경운기 소리가 들리지만 늦어도 올해 말까지는 모든것이 다 사라질 예정이라고 했다. 이미 보상은 거의 다 끝난것 같았고, 마을은 이미 비어지기 시작했지만 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아직 어디로 가서 살지 마음도 정하고 있질 못하셨다. 도시에 있는 아들집으로 갈지 무몰지 밖에 조성될 이주단지로 들어갈지 아니면 멀리 영주시에 단간방이라도 얻어서 들어가야할지도 마음정하지 못한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만 가득했다. 


금강마을의 문화재인 장씨 고택을 들어서자 고택을 지키고 살고계신 할머니께서 우리를 맞이 하신다.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게절인데도 한데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에 머리를 감고 계셨다. 급히 일행을 맞아 경황없어 하시면서도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시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장씨고택의 할머니께서도 아직 어디로 가실지 마음을 못정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냥 사람들이 찾아와서 좋다고만 하시고 번거롭게만 해드리고 집을 나서는 우리 손을 잡으시고 그냥 '맨입'에 보내는게 마음아프다시면서 뭐라도 하나 먹고 가라고 붙드신다.    


할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서 나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할머니의 삶을 포함해 이 모든 것이 댐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질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오는 포크레인 소리가 마을의 평온을 흔들었지만 그래도 끝내 이 모든 것이 물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의 힘은 우리의 이 소박한 희망들을 무자비하게 꺽어버리겠지...

 

영주댐 공사현장을 둘러보는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고 묵묵히 공사현장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 참혹한 현장에서 무슨 말인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는 생각에 모두가 공감하는듯 한참의 침묵이 흐른뒤에 언덕을 내려왔다. 오전의 내성천 순례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내성천의 아름다움과 영주댐 공사현장의 참혹함이 대비되어 오랜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나의 비겁함을 일깨우는 죽비소리를 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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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마을은 산과 강이 어울리는 마을이지만 또 옛것과 새것이 어울리고, 농업과 예술이 어우러진 마을입니다. 아직 시작으로부터 몇발자욱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올 여름이며 마을에 작은 커뮤니티 센타가 문을 열고  갖가지 인문학 강좌를 포함해 다양한 공동체 문화와 연관된 공연과 행사 등으로 마을이 붐비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마을공동체문화의 성지면서, 예술이 마을공동체와 결합해 마을의 삶을 풍부하게하는 작은 사례이길 도모하고 있는 비나리마을은 언제부턴가 다양한 예술가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마을을 찾기도하고, 마을의 풍광을 캔파스에 담는 화가들의 발길도 이어집니다. 또한 마을과 예술의 건강한 관계를 도모하는 문화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의 방문도 드물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는 MB정권에 의해 저지러지고 있는 4개강 파괴현장을 답사나온 경희대 미대 학장님과 교수님 그리고 대학원생들, 그리고 개인적인 인연으로 함께한 예술인들이 마을을 찾았습니다.  이분들의 방문은 마을과의 인연으로 비나리마을 사업과 관련한자문위원을 수락해주신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술이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예술은 또 마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쉽지 않은 과제지만 삶과 예술이 함께해야하고, 상처 받은 삶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고 해체의 위기에 빠진 현장인 마을에 예술이 함께해야한다는 당위에 많은 분들이 공감합니다. 마을이  예술을 통해 다시 생명력을 되찾고 건강한 삶들이 붐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최소한 마을을 이루는 작은 삶들이 보다 아름답고 풍부한 공간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데 작은 기여는 할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예술이 마을의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면 보다 많은 도시민의 발길역시 마을로  향할 것입니다. 예술을 통해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지는 또 하나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밤새 잔을 기울이며 마음과 생각을 나눴던 분들이 아침 일찍 또 다른 일정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마을을 떠나는 길에 공사중인 마을커뮤티니 센타엘 들러 이렇게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마을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지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지만 머지않아 이분 한분한분의 손길과 발길이 비나리마을에 사람의 발길이 늘고 사람의 향기기 잩어지는데 기여하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찾는 비나리마을의 미래가 밝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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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2011년 발행, 21세기북스)를 읽고

요즘 조국 교수가 인기가 많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으면서 거기다가 '개념'까지 있는 인물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하여튼 섹시한 진보 인사의 한명인 조국은 그 뛰어난 상품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한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한마디 한 동작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번 붐은 조국이 낸 [진보집권플랜]과 바로 이 책 [조국,대한민국에 고한다]가 촉발한 듯하지만 그보다는 이명박의 폭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세력화 되고 있지 못한 무능한 진보세력의 현 정치구도에서 대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측면이 많아보인다. 다시 말해 조국에 대한 인기는 일정정도 대중들이 선호하는 인물, 학벌, 개인적 자질 등등에 기반하고 있는게 사실 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현 정치적 지형이 대안적 진보, 다시말해 '성찰하는 진보' 인사를 요청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해 혹은 오해를 가지고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를 읽고나서 솔직히 조금은 아쉬움을 느꼈다. 은연중에 나는 그의 책을 통해 무슨 대단한 신체제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미래상을 제시하고 그를 구현하기위한 정교한 로드맵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25년은 된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사회구성체 논쟁'류의 책이나 당시의 이런저런 정치서적을 통해 늘 단언적이고 명료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시'를 제공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은 분명하고 적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될 사회상은 명료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는 모든 정치 서적이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을 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그와같은 실천이론의 한계가 진보세력의 답보상태를 지속시키는데 일정정도 기여한 측면이 있고, 여하한 이유에서건 정체된 진보의 이론, 조직, 실천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조국이 말하는 성찰하는 진보의 요구로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때 그 청년들은 세월을 겪고 현실은 훨씬 더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입장에서 조국은 명료한 시대규정과 체제분석, 그리고 전략 전술을 내어놓지 않고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사회의 진보, 우리사회의 진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 진보적 상식 혹은 합리적 상식을 각각의 세력 혹은 분야를 향해 직언한다.

먼저 조국은 MB가 이상사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두바이와 싱가포르의 허상을 지적함으로써 현정부의 국정철학의 부재 혹은 그 시대적 낙후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을 향해 쓴소리를 내어 놓는다. 그의 발언은 시민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기도하고 법률가의 눈에 비친 부정의한 법현실을 질타하고 올바른 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의 자본에 대한 고언에 이 책의 핵심이 놓여있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대한 규정, 체제모색적 이해없이 현 시대는 극복될 수 없음을 필자 역시 인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 역시 충분하지 않은 내용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다.

사실 이책은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해 놓은 글이 아니다. 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단속적으로 언론에 게제한 것을 모아놓은 이 책은 참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을 덮고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를 도모하기엔 좀 어려움이 따른다. 부분은 다 공감하고 수용하면서도 책을 덮고 그려보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세상의 상은 그렇게 투명하게 다가오질 않기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필자 조국의 다음 저술은, 물론 극단적인 나 개인적 기대에 불과하지만. 좀더 확실한 우리사회의 비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글로 채워졌으면 한다.

물론 독자의 한사람이 갖는 주제넘는 기대와는 별도로 이책은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공이 인정하는 가치 기반을 높이는 작업에 일정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하며, 정정당당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정한 룰의 만들고 그 수준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세력은 합리적 보수세력에 기생하는 극우 파시스트세력을 스스로 떨쳐내가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진보 개혁은 시대정신을 읽고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진보적 정책, 대안 체제의 발굴에 보다 유능해져야할 것이다.

조국같은 분이 그와같은 상식의 전도사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매개하고, 진보적 가치에 대한 합당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을 도모하는 거간꾼으로 나선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 한권이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는데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런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사회의 정치적 상식의 격을 높이는데에 일정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뭏튼 필자 조국이 건강한 좌파지식인, 한국의 노옴 촘스키로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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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초등학교 2011 운영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명호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쉰명을 넘지 않는 봉화군 명호면 소제지의 조그마한 시골학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학부모들은 운영위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잘 몰랐는데다가, 학교의 편의대로 편안한 사람을 지목하여 임명을 하고 형식적인 회의를 진행해 온 듯합니다. 그러던 것이 한 학보무가 우연한 기회에 학교측에서 특정인을 지목하여 운영위원으로 임명하려한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에 몇 학부모가 문제를 제기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요구한 끝에 이번 운영위원회가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4일, 학부모 위원2인과 교직원 위원 2인, 그리고 학부모 위원의 추천을 받은 지역주민 1인 등 5명으로 구성된 명호초등학교 운영위원회가 2011년 첫 회의를 가졌습니다. 저는 지역주민 몫으로 학부모들의 추천으로 운영위원으로 참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운영위원회를 참석하고 나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아 마음이 편치 않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실  첫 회의다 보니 간단한 상견례도 가지고 앞으로 학교 운영위원회를 어떤 마음으로 참여할 것인지, 또는 학교 운영위원회를 통해 지역사회와 학교의 건강한 관계의 형성이나 교류 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감을 잡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은 그동안 학교운영위원회를 형식적으로 구성해서 거의 음성적으로 운영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향후 운영위원회의 정상화를 촉구하고싶었고, 운영위원회가 학교측에서 제시하는 문서나 받고 대충 읽다가 박수나치고 커피나 한잔하고 헤어지는 식으로 운영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은 긴장을 가지고 밀도있는 운영을 하고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첫 운영위원회 이틀전에 전화상으로 회의 통보를 받고 회의 직전에 회의 안건에 대한 자료를 건네받은 입장에서는 회의에 임하는 학교측의 성실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회의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저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먼저 바쁜 일상을 이유로 운영위원으로 참여를 해 달라는 이웃 학무모들의 요청을 스스로 수락하고도 '초등학교 운영위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운영 되어야 하는지, 학교운영위원회의 권한과 의무는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교육일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개진할 수 있는 것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채로 회의에 참석하는 불성실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학교는 마을 공동체의 주요한 한 축으로 주민들의 삶과 긴밀히 결합되어 주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결집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주민의 꿈을 그리고, 마을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게 하는 정신적 활력의 생산공장이었습니다. 주민이 쌀을 모아 터를 사고 벽돌을 찍어 학교를 지었고, 선생님은 학생들의 선생님일 뿐아니라 마을 지식인의 산표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역할모델이 되었고, 지역 주민의 기대와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진전되고 또 그만치 마을이 붕괴되면서 마을공동체에서 가지던 학교의 위상은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지역 학교의 선생님이 어떤 분이 계시고 어떤분이 오고 가셨는지 마을 주민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학교는 그동안 지역사회내에서 가졌던 모든 역할을 다 버리고 오직 경쟁교육, 입시교육의 하위 기지로서의 역할만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학력평가 전국 몇 위, 도내 몇 위라는 잣대로 평가되는 시골학교는 대부분 그 자신의 독자적 가치와 무관하게 형편없는 하류 학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시골학교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 문제를 푸는 장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산골학교의 특별한 가치를 빛나게하는 교육을 실현하고, 지역공동체와 통합된 학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미미한 기여라도 하는 운영위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2011년 명호초등학교 첫운영위원회를 가진뒤 또 하나의 큰 숙제를 떠맡은 기분입니다. 다행스럽게 산골마을의 학교는 학부모와 선생님이 함께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움 학교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작기 때문에, 그리고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산골학교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다른 생명,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사는 삶의 가치는 익히고, 마을 공동체와 하나된 학교를 만드는 일을 제일 먼저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명호초등학교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운영위원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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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전도사 박원순 변호사가 이웃 영양군에 있는 우리손산촌유학센타에 [상생의 농촌 마을만들기와 사회적기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왔다. 이번 강연은 희망제작소 창립 5주년기념으로 전국 50개 지역을 순회 강연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영양에서 지역활동을 하시는 분의 연락을 미리 받고 내가 사는 봉화군 지역사회에 이 소식을 전하자 명호면의 젊은 친구들이 자비를 들여 자발적으로 강연을 알리는 플랭카드를 만들어 달기까지했다. 그리고 오늘 명호의 젊은 친구들은 2대의 차로 나누어 타고 출발을 하고, 봉화자활센타에서는 아예 관광버스를 전세내어 50여명의 자활사업 참여자를 이끌고 영양으로 향했다. 


평일 오전에 열린 강연은 예상했던대로 참여가 저조해 봉화에서 간 사람들이 영양 주민들보다 휠씬 많은 것 같았다. 원래의 강연장소는 영양군청의 비협조로 우리손 산촌유학센타로 정해졌다가 봉화자활센타의 단체 참여로 영양성당으로 급히 변경되었다.  갑작스런 강연 장소변경에 따른 이유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경북 북부지역사회의 정치적 낙후성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았다.  박원순 같은 시민운동가에 대한 관의 시대착오적인 대우도 그렇고 지역주민의 대책없는 보수적 편향, 극우적 정치성향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지역공동체활동을 하는 우리 지역사회의 낮은 주체적역량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9시30분에 시작하는 강연에 늦지않기위해 8시에 비나리마을을 출발했다.  918번 지방도를 따라 봄농사준비로 기지개를 펴는 영양의 봄 언덕을 1시간여 달려 영양읍에 도착했다. 역시 남루한 농촌의 소도읍인 영양읍을 가로질러 강연이 열린 영양성당에 도착했다.  참 오랜만에 성당경내에 들어선 때문인지 카토릭신자였던 어린시절의 추억도 떠오르고, 또 종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종교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가톨릭교회의 물량적 성장과 보수화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영양군내에서 이런 일에 장소를 제공해줄 기관이나 단체가 성당밖에 없다는 사실이 고맙기도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대중강연이 다 그렇겠지만 강연의 내용은 평이하고 단순했다. 박원순씨 자신의 삶의 역정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것인가, 어떤 가치에 기반한 삶을 살것인가는 말씀을 이어나갔고, 그리고 '커뮤니티 비지니스'의 여러 성공사례를 들어 우리 농촌사회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미래를 맞이하자는 내용의 강연을 이어갔다. 편안하고 친근한 화법,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 박원순같은 대중활동가만이 갖는 자질이 부러웠다. 


한시간정도의 강연을 이어 질의 응답시간을 한시간 정도 가졌다. 중1아이의 어머니께서 아이 교육에 대한 질문도 하고, 희망제작소와 지역주민의 구체적인 연대와 결합방식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방앗간'을 운영하는 명호의 나무아빠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박원순씨의 생각도 묻다보니 11시조금넘어 강연은 끝이났다.


강연을 끝나고 성당 마당엘 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단체별로 박원순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성당을 나섰다. 일터로 바삐 돌아와야할 형편이었지만 주체측에서 식당을 예약한 탓에 원하지 않는 8,000원 짜리 비빔밥을 억지로 먹고 오후일과를 위해 명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오늘 강연에서 박원순님한테 하고싶었지만 주제와의 관련성때문에 하지 못한 질문을 생각해봤다. 박원순씨는 전 정부시절 정부비판에 날을 세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극단적인 반환경 반인권 반민주 반노동 정권인 MB정권하에서 오히려 비판의 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은 혹시 최근 골몰하고 있는 '사회디자인'과 '정치'를 분리하여, 사회디자인의 고유 영역에 몰두하고 '정치'의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고 있는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 '희망제작소의 무상 인턴사원' 논란 뉴스를 접했다. 많은 논란거리가 있지만 나는 자식이 대학졸업후에도 부모로부터 생활비를 받아가며 인턴사원을 한다는 것에 대해 정서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결국 '희망제작소'같은 비영리 사회단체에 인턴사원이 되기위해선 생활비 걱정이없는 부자집 자식이 되어야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때문이다. 비록 사기업과 다른 비영리사회단체일 지라도 자원봉사자와는 다른 인턴 사원에게 하루 5000원의 식비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비, 교통비, 용돈 정도는 주는것이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한 의지조차 지나치면 독선의 길로 빠지기쉽고, 내적 확신에 충만하다보면 타인의 작은 삶들을 보지못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는게 아닐까 쉽다.  
  
책으로만 접했던 박원순변호사를 가까이서 접하고 농촌에서 희망만들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는 시간을 가진 날, 나는 또 숱한 고민을 덤으로 안고 일터로 돌아왔다. 언제나 출발점에 머물러 있는 마을 사업도 그렇고 마을사업을 진행 하는 과정에서 갖는 나의 역할에 대한 진전없는 생각들도 꼬리를 물었다.

그래도 아직 일한 밭이 있고, 같이할 젊은 친구들이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겠지?
또 삽이나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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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름이 띠띠미란다. 그 이름에 끌려 기억하게된 띠띠미는 산수유로 유명한 마을이다. 수령이 100년에서 400년에 이르는 산수유 나무들이 밭이며 길이며 할것없이 온 동네안에 사람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을이름은 산수유와는 무관하게 마을의 골짜기가 문수산으로 막혀 있다고 해서 막다른 마을, 두동(斗洞)이라고도 하고, 뒷드물이라고도 하는데 발음하기 좋게 '띠디물', '띠띠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봉화문학회에서 벌써 5회째 띠띠미마을에 산수유가 만개할 때에 맞춰 시낭송회를 가져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지만 올해 처음으로 띠띠미마을을 찾게 되었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 오후 지인과 아내와 함께 띠띠미 가는 길에 있는 우곡약수터에 들러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잠시나마 길을 헤메다가 산불조심 계도 중인 공무원인듯한 분의 안내를 받아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있는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 숲이 낯선 방문객을 반긴다.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마을의 자존심을 지켜온 '마을숲'이 남아있는 마을을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괜히 경건해진다. 마을숲이 보전되어 온 마을은 그냥 흔한 그런 마을이 아니라 왠지 더 깊은 유래와 더 넉넉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로 다가온다. 유구한 세월동안 겪어왔을 온갖 세파와 천재지변속에서도 바로 마을숲이 있어 그 마을은 그렇게 지켜지고 이어져왔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마을숲을 지나자 밭을 밀어 임시로 닦아 놓은 주차장에 수십대의 차량이 정열해있었고, 벌써 도착한 낯익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급한 인사를 나누고 마을 길을 따라 산수유 꽃그늘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늦은 한파에 아직은 만개하지 못한 산수유 꽃봉우리가 아쉬웠지만 그래도 산수유마을 띠띠미 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고, 산수유가 만개한 띠띠미의 모습 마저 마음에 그려졌다.  산수유나무 그늘을 찾아 걷는 한무리의 사람들의 스쳐지나기도 하고, 행사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공무원들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도하면서 이내 시낭송이 있을 마을의 끝자락의 고택에 당도했다. 


고택을 들어서는 길가에는 봉화문학회 회원의 시에  청초 이순섭님이 그린 시화판들이 놓여져 있었고, 고택의 정문에는 공무원들이 손을 맞는 문지기를 서고 있었다. 반가운 인사를 맞으며 들어선 고택마당에는 벌써 모듬북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진런히 놓여진 관람석은 텅비었지만 다행히 마당안밖에 모여든 사람들은 마당 가득놓인 좌석을 채우고도 남을만했다.


하지만 손님의 면면을 둘러보고 행사 프로그램의 구성등을 눈여겨보니 이 행사가 마을의 행사가 되지 못하는구나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마을 청년회회장님이 연세가 65세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냐마는 그래도 마을의 산수유꽃을  맞이하는 행사가 단지 마을의 옛영화를 추억하거나 이런저런 문화 예술 행사를 위한 사라져 가는 풍광을 제공하는 배경으로만 이용되는 것 같기만 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마을 부녀회에서 순두부와 파전을 만들어 팔고, 마을주민 한분이 조금의 농산물을 들고 나와 마을길가에서 팔고있는 모습은 볼 수 이써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전공연이 끝나고 공식적인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고택을 나섰다. 작은 문화행사에서마저 늘어놓는 인사말 잔치가 지겹기도했고, 사실 행사 프로그램보다 '띠띠미마을'이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둘러보는 마을은 한국 농촌의 여느 마을에 비해 전통적인 마을의 풍광이 휠씬 더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에 의한 침식과 시대적 풍조에 따른 이농으로 인해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띠띠미 마을은 남루하고 무기력했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사라진 마을에는 노인네들의 발길마저 드물었다. 꽹한 바람이 마을길을 휩쓸고 지나가자 여기저기에 펄럭거리는 폐비닐 조각이 마을을 더욱 스산하게 했다.

 


마을을 한바뀌 둘러보고 집으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멋이 살아있는 농촌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농촌에는 불편함과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살지않게되었다. 더 이상 인적 순환이 불가능해 사그라들고 있는 마을에 도시민이 찾아들어 농촌의 향수를 느끼고 즐긴다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년에 하루 이틀있는 이런 류의 행사가 이 마을에는, 아 마을에 사는 주민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사람의 발길이 그리운 마을에 일년에 단 하루라도 외지인의 발길이 부산하고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다면 그나마도 무조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찬바람만 가득찬 꽹한 마을길에 아이들이 몰려다니고, 쓰러져가는 돌담위로 정겨운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먹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과한 욕심을 가진 나같은 사람에게는 아쉬움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어떻게 마을에 새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어디서 마을 재생의 희망이 올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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