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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개인전은 1~2년에 한번씩 있는 일이지만, 매번 개인전이 있을 때마다 똑같은 설레임과 긴장이 있을 것 같다. 화가의 남편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포장하고, 나르고, 그리고 전시관련한 이런저런 뒤치닥거리를 하긴 하지만 그 역할에 비해 가지는 설레임은 훨씬 더 크다.


2009년11월인가 가나아트 미루에서 개인전을 연지 거의 1년 6개월만에 이번에는 사간동과 인사동 사이에 있는 조그만 신생화랑 갤러리비원에서 개인전을 열게되었다. 급히 전기 계획이 잡혔지만 다행히 갤러리의 규모가 작고, 작업 컨셉이 준비된 것이 있어 전시가 가능했다. 총 9점의 작품을 싣고 사진 촬영을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하고, 다시 봉화로 싣고 왔다가 일주일 뒤 전시에 맞춰 갤러리로 싣어 나르고, 그리고 다시 오픈 파티가 있은 어제 서울행을 해야만 했다.


갤러리비원은 규모는 작지만  사람이 붐비는 Y자 거리의 모퉁이에 있고, 갤러리 앞 마당은 나무와 벤치가 있는 제법 넉넉한 공간까지 있어 알찬 전시공간을 갖춘 갤러리다. 듣기로는 주로 30대 젊은 작가의 기획전을 열어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40대 후반 작가를 초대했다고 한다. 일단 젊은 작가의 대열에 같이 끼게된 것만으로도 기분좋은 일일것 같다. 
 


어제 아침 일찍 출발을 할 예정이었지만 출발 직전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서 연락이 와서 작품을 반입할 일이 생겨버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몸만가면 될 산황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승용차에서 트럭으로 짐을 옮겨 싣고, 미술은행에 넣은 그림을 찾아 포장을 풀고 자료용 사진을 찍고, 다시 재포장을 해서 트럭에 싣고 정오를 넘겨서야 집을 나섰다.
  

봉화에서 신갈까지는 순탄한 길이었지만, 신갈부터 서울 쪽으로 차가 밀리다보니 그림 사진을 찍은 서초IC에서 차를 내릴 때는 벌써 4시가 넘었다. 단골 스투디오인 '포토리스트 강남점'을 들러 일을 마치고 다시 한남대교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했지만 진입로가 공사로 인해 차단되어 있었다. 유턴을 어렵게 하고 부산방행으로 차를 올렸다가 양제IC에서 차를 내려 다시 유턴을 한남대교쪽으로 차를 올릴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길에 오픈 시간을 다가오고 자못 긴장된 시간이었지만 5시 30분경에 인사동에 도착해서 미술은행에 들어갈 그림의 액자를 부탁하고 갤러리 비원에는 6시를 10여분 남긴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도착하기 진전에 갤러리 앞에서 텔랜트 소지섭과 한효주가 무슨 드라마를 찍고, 한효주는 갤러리를 들어와 그림을 둘러보고 방명록에 싸인을 남기고 갔다고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으면 한효주랑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조금 아쉬웠지만 남아있는 싸인으로 만족해야지^^*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보니 만신 이해경선생님과 문하생 2분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급히 인사를 나누고 차를 주차시킨뒤 갤러리로 돌아와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와 주셨지만 귀한 시간내어주신 김정헌선생님과 박명학님, 송이님, 장경호선생님, 박영숙 선생님, 윤석남선생님, 김혜승 전여성사전시관 관장님, 김혜순시인 그리고 새사연의 김점식이사님, 그리고 제주 까멜리아힐에서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노석미 님과 그의 일당여러분이 너무나 반가웠다.
개인전을 여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게 많은 분들을 오랜만에 뵐 수 있었다. 10여년만인가 이웃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계신 박불똥선생님과 네오룩 최금수 대표, 대전시립미술관 김준기학예실장님, 학고제 김지연 큐레이터 그리고 류준화의 영원한 동지분들이신 정정엽, 제미란, 하인선 님등 입김 멤버님들, 아내와 나의 옛친구들...

갤러리가 좁아 갤러리 앞 길가 벤치에 나와 앉아 계신 분들 사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고 와인을 나르고 뒷풀이 장소를 안내 하다보니 날이 저물었다. 8시가 다 되어서야 뒷풀이 장소에 도착해서 드디어 긴장을 풀수 있었다.


10시에 자리를 파하고 옛친구부부들과 함께 커피를 한잔 나누면서 취기를 가라앉히고, 자정이 되어서야 차에 오르고 봉화로 향했다. 졸음과 싸우며 까까스레 집에 도착해보니 새벽 4시... 이렇게 또 한번의 아내의 개인전을 열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좋은 일에도 늘 아쉬움이 남는다. 항상 이런저런 행사때마다 달려와서는 같이해주고 도와주는 풍기의 강석문, 박형진 작가부부를 맥주한잔 대접못하고 보내버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강석문. 박형진 부부와 노석미씨등 까멜리아힐로 인연맺은 작가님들에게 아무 신경도 못쓰드려 너무 미안하다. 나중에 밥이라도 한끼 대접드려야겠다.  

그리고 이번 초대를 해 주신 갤러리비원 이정연대표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류준화展

 

6월3일_6월25일까지
11am - 6pm / 월요일 휴관

서울시 종로구 화동 127-3

T +82 (0)2 732 1273
F +82 (0) 2 732 1274

gallerybeone@naver.com
gallerybeone@gmail.com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
윤보선생가 방향으로 직진

버스
종로경촬서 또는 안국역 하차
윤보선 생가 방향으로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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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의 발흥, 프레게와 러셀 - 언어와 논리, 의미

- 이지훈

 

분석철학은 독일의 관념론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었다. 프레게는 [산수의 기초]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공격하고 수가 자립적인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론을 옹호한다. 러셀은 절대적 관념론의 일원론에 대항하여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다원론을 제기하고, 무어는 관념론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론을 분석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 혹은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가진 방법론적 입장을 지칭한다.

 

분석철학의 방법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로 이해했다. 이점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한 칸트의 철학적 기획과 일맥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 오성, 감성의 능력과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이 기획을 실현코자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매개로 세계에 접근해 나갈 수 있으며, 의미와 논리의 문제를 천착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한 명제의 뜻은 그 명제의 검증방법이라는 검증원리를 통해 형이상학 등의 교설이 무의미한 헛소리임을 천명한다.

 

의미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탐구하여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는 방법과 원리를 탐구하는 이론으로 존재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말해 특정한 의미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나름의 존재론을 상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이론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플라톤의 지시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2. 관념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다.

3. 사용 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의 사용에 있다.

 

지시의미이론은 고유명사에만 설득력이 있으나 마이농의 황금산 같은 가능한 존재자의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지시의미이론을 거부하면 유명론에 빠진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관념의미이론이다. 한 언어적 표현의 지시대상인 존재자가 없어도 그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의 주관성은 관념의미이론의 치명적 약점이다.

 

프레게는 지시의미이론의 약점을 언어분석을 통해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관념론이 수학적 진리마저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바탕으로 수학의 진리와 개념을 논리학의 진리와 개념으로 환원가능 하다는 논리주의입장을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어-술어 논리학을 거부하고 대신 논항-함수의 논리학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레게는 1) 수학의 함수개념을 일상언어와 논리학에 도입하고, 양화사를 발명했으며, 2) 수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고, ‘논리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입장을 수립하고, 3) 의미를 뜻과 지시체로 구분하여 수학철학에서 심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했다.

 

러셀은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은 여전히 심리주의의 잔재라고 보고 지시체만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고수하면서 마이농의 과도한 존재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문장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확정기술구를 축출해 내어 무의미함을 밝히는, 비존재자 지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기술이론은 고유명사와는 다른 확정기술이 지시체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명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산같은 것이 꼭 존재한다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보편자의 존재를 수용하는 실재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셀은 비트겐 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철학적 사고의 준칙이었던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원리와 기술이론은 논리적 원자론으로 한단계 진전을 이룬다. 

오캄의 면도날이란 존재론에서 최소의 존재자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어떤 추정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더 근원적인 실재로 대체하라는 원리로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으로 구체화된다.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임의의 명제는 기술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해 들어가면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최후의 잔여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자사실(atomic facts)이라고 한다. 이들 원자사실을 위장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논리적 고유명사로 이들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논리적 원자론은 절대적 관념론에 대항해 다원론과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철학적 입장이지만 문제제기 후 엄밀하고 통일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있어 언어, 논리, 의미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그와 같은 입장의 분석철학의 조류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세우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이나 프레게에 대한 비판은 주로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기획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이후 분석철학은 콰인 등에 의해 의미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문제의식>

1. 철학적 작업이 문명비판적 측면을 가진다고 볼 때, 프레게와 러셀의 문제의식은 관념론의 어떤 측면에 대한 공격이었을까?

 

2.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도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 문제를 푸는 해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될 것 같다. 인간이 가진 사고 체계 중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 역시도 의문이다.

 

3. 분석철학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남은 잔여는 몇 개의 언어학적 지식들 뿐인 거시 아닌가? 분석적 방법이 언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인식적 오류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존재론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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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

-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적용될 철학의 가능성

- 지훈


어렵게 바슐라르를 읽었다. 사실 길지 않은 글에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것을 다시 축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는 바슐라르를 철학자라기 보다는 예술철학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 불 등 상상력의 4대근원에 대한 글을 오래전에 읽었던 것으로도 기억된다. 하지만 알고보니 바슐라르는 콩트의 문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당대 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한 실증정신을 확립하여 새로운 과학정신을 수립코자 시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그의 인식론은 과학을 넘어 예술의 영역에까지 적용코자 시도했고, 그 시도의 결과가 바로 저가 이전에 읽었던 바슐라르의 저작들이었나 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지훈은 이 글에서 바슐라르의 과학인식론만을 살피고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너무 내용적으로 많고, 논변은 복잡하다 .

 

먼저 바슐라르는 새로운 과학정신에 입각한 인식론을 수립하기 위해 과학의 불연속적 발전에 주목하고 이를 지속적 단절로 개념화한다. 그는 상식과 감각, 또는 기존 이론의 전제 등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인식의 걸림돌을 문제를 발생시킨 인식의 틀을 대체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을 인식적 단절이라고 보고, 이런 단절은 과학의 거시적 역사는 미시적 차원에서 상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바로  지속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이 현상영역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현상을 산출하는 근원인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비실증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성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만치 그 현상의 배후가 되는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방법론이 바로 현상-기술개념이다. 이 개념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현상과 본체의 괴리를 극복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 인간존재론 차원의 단절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열린 정신의 합리적 유물론에 도달 할 수 있고, ‘폐쇄적 코기토에서 실천적 코기토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렇게 주어진 인식의 걸림돌과 맞서는 능동성을 욕망과 욕구의 구분에서 찾고 꿈을 향한 욕망의 무한 긍정을 통해 주관적 심리적 오류를 극복하고 단절과 상승의 원동력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바슐라르는 현실적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욕구와 상상력의 원천인 욕망을 구분한다. 그는 욕구가 만들어내 주관적 오류는 사이비과학을 낳는데 반해 욕망에 원천한 꿈의 역동성은 진정한 과학의 역사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사의 불연속과 귀납적 종합을 규명하며, 신생이론과 선행이론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귀납’ ‘포섭을 제시하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오류에 대한 개방성새로운특성으로 하며 기존의 합리성에서 벗어난 꿈, 상상력, 욕망, 의지 같은 개념을 원동력으로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푸코에 와서 무한 긍정되는 비합리적 요소가 여전히 긍정적 억압의 통제 대상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지훈의 글을 읽고 여전히 남는 의문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현대 과학의 성과를 과연 과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학 속에 있는 비과학적 요소의 개입양상을 해명하여 새로운 과학철학의 장을 개척한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의 인식론은 문학적요소가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 같은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수립과정에서 스스로 긍정적 억압을 어는 정도 성공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론이 합리성을 잃으면 주의주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바슐라르는 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상상력에 그의 지적 궤적이 가 닿아 있고 그곳에 인식의 닻을 내린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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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 지훈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그의 제자이자 나중에 푸코의 스승이 되는 캉길렘을 통해 계승된다. 캉길렘은 바슈라르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과학사연구의 인식론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그는 콩트의 세포이론 해석에서 바슐라르의 욕구/욕망범주를 보다 객관적인 사회정치적 범주로 전환했고, 이는 한 시대의 지식 형성에 개입하는 사회적 힘과 규율의 문제를 다루는 푸코 사상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셸 세르는 콩트의 연속성’, 바슐라르의 단절과 다른 입장으로 과학의 진보는 인정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수의 용어로 묶을 만한 단일한 진리의 연대기적 축적은 없다고 보는 특이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이성의 역할을 신뢰하고,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세르는 바슐라르를 비판하는데, 바슐라르가 이성을 과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예술, 인문학 등을 몽상의 영역으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의 입장은 이성의 폐쇄적 절대주의로 나가지 않고, 개방적 합리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한 체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이 아니라 다른 체계들과 서로 작용하고 보충하는 이성으로서의 개방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체계의 개방성은 자기체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바로 그로부터 합리성이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르의 인식론은 전체로서의 체계라는 근대적 이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의 입장에서 한 체계의 절대적 완결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르는 철학이 바다를 떠돌다 잠시 만나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영원히 정착할 안정된 대륙, 세계를 한 번에 구성해줄 철학은 없다고 본다. 바로 이점에서 세르는 맥루한과 비교되기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보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또 다른 미디어의 형식이 되는 내용/형식의 상호 순환적 영향관계를 제기하며 궁극적인 기원, 최종적인 원형을 거부한다. 화자와 청자,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순화하며 상호 반전되는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맥루한의 입장은 기원의 신화를 해체하고, 기원을 통해 성립하는 닫힌 체계를 논박하는 세르의 입장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중심은 끝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한 체계 내부의 교환을 모두 매개하고 제어하는 초월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체계 외부의 끊임없는 유입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열린 구조는 소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르와 맥루한은 이질적인 매체, 이질적인 지식의 공존에 대한 입장에서 갈라진다. 세르는 맥루한과는 달리 공존의 관점에서 소통의 숨은 요소인 소음에 주목한다. 세르는 이 소음의 개입과 간섭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사유 발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에 대한 입장에서도 세르와 맥류한은 갈라선다. 맥루한은 in-formation에서 ‘in’의 의미를 중립적인 질료를 형상 속에 집어넣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세르는 ‘in’을 고정된 형상이 없는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맥루한에게 개별 매체는 자기완결적이지만, 세르에게 매체들은 이질동상적이다. 세르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보를 천사에 비유하며 소통하고 이동하는 정보자체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런데 소통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며, 나름의 주고받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은 위반되고, 규칙을 위반한 요소는 배제되는데 여기에는 초월축출이 일어난다. 이상적인 교환체계는 이들 기식자를 효과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안전하게 닫힌 체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한 축출은 불가능하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기식자는 늘 상존한다. 이들 기식자는 체계의 안밖에 걸쳐 있으면서 한 체계의 외부를 지속적으로 체계의 내부와 공존토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 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체계의 생성을 낳기도 한다.

 

세르는 이와 같은 소음, 기식자, 제외된 제3자 같은 것들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담론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창조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세르는 진정한 소통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닌 것과 과학의 관계에서 바슐라르는 비대칭적 시각인 바면 세르는 과학 아닌 것에서 과학성을 읽고, 과학 속에서 비과학성을 있는 대칭적 시각을 보인다. 그렇다고 세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지적 무정부상태에 빠지진 않는다. 그에게는 과학과 예술을 통일하는 근본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사가 참의 역사만은 아니지만  참된 개념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들, 개념화 형식의 집합이다. 따라서 세르는 연대기적 순서의 과학적 진보, 사회적 진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를 보다 포괄해서 보여주는 관점의 존재가능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진보를 인정한다. 세르에게 시간개념은 비일적선적 개념으로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다발을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오늘날의 복잡성의 과학에 걸맛는 인식론이다.    

 

세르의 인식론은 정보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르의 인식론을 바로 인터넷 소통, 정보사회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보인다. 이지훈의 이 글만을 통해 이해한 세르는 소음의 배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한 체제의 외부와 내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폭력성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중심의 이동과 다극화에 대한 담론은 현실 이해와 일정 정도 괴리되는 측면을 가지기도 한다. 세상은 권력의 속성, 자본의 지배라는 틀이 여전히 온존하며 오히려 더 강화되는 면을 보인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민주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더 교묘하게 정보는 관리 통제되고 집중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정보의 유통구조가 복잡화 되고 점점 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전화하면서 정보의 통제자는 빅브라더가 되고 보이지 않는 신이 되어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르는 세계의 열린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세계지배질서는 여전히 닫힌 구조로 강건하게 유지 존속되고 있고, 닫힌 구조의 근원이 되는 계급구조는 고착화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르의 지식의 세계-대수학에 바탕을 둔 열린 구조는 현실의 세계-자본에 바탕을 둔 닫힌 구조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과학과 철학의 행복한 맛남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해석은 종종 이론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가지는 심리적 반응, 정서적 반응일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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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0일 화요일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참고문헌>

이지훈, “콩트와 실증주의 인식론의 기초, [현대철학의 모험]

[서양철학사] 램프레이트, 을유문화사

 

콩트는 19세기의 과학적 성과를 철학적 사고의 토대로 끌어들였다. 그는 생시몽으로부터 인류 문명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스스로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엄밀성과 확실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다. 콩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에서 기반해 실증 가능한 것만을 철학의 영역, 학문의 영역에 남기고 실증 불가능한 지식들, 비과학적 인식론을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팽개쳐 버렸다.

그는 인류의 사고 단계를 3단계로 나누고,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이어 과학적 단계로 불렀다. 신학적 단계는 미지의 세계를 인격적 정서에 의해 설명하고, 가상적 공상적으로 이해한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인격적 힘을 이용한 세계 이해에서 벗어나 경험적 현상을 넘어 선본질이나실체등과 같은 추상적인 술어로 세계를 설명한다. 과학적 인식의 단계에 접어들면 현상을 실증적인 소여로 받아들이고 이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탐구하여 일반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와 같이 분류한 인류의 사고 단계를 바로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로 등치 시키면서, 콩트는 자신이 살아가던 당대를 <과학적-실증적 단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가장 뒤떨어진 영역인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방면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을 사회학의 영역까지 확장하여사회물리학즉 사회과학을 정립하는 사상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던보오부인과의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개인의 정감활동이 이성의 힘의 지배를 벗어남을 깨닫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교육, 종교적 훈육에 골몰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류교>라는 종교의 창시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요한 철학적 성과는 지훈의 글에서 다루고 있듯 <실증주의 인식론>에 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실학으로 볼 수 있으며, 상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실증주의의 상대성은 세계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는 통일과학의 이념을 부정하고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실증주의는 과학주의와 차이가 있는데 과학주의가 과학이론은 모두 경험적 명제로 구성된다는 입장과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진 반면 실증주의는 현실성, 유용성, 확실성, 정확성, 유기적 상대성 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또한 콩트는 과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높이사지만 모든 과학지식의 수학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는 수학적 형식화를 과학의 보편토대로 보지 않고 개별과학의 고유성, 상대성을 인정한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과학을 합리적 허구로 본다. 과학은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그 연구 과정에서 가설을 도입하나 가설은 수학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수학은 추상적 허구적 성격을 가지며, 실험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허구지만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주의가 과학지식은 역사적, 상호주관적, 집체적 동의를 통해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와 역사성의 인정은 지식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부여한다.

콩트는 인식의 추상적인 발생근거 자체보다는 인간의 앎, 지식의 성립 근거를 있는 그대로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콩트는 철학의 토대는 인식론이라고 보고  인식론은 과학의 성찰을 통해 구성하고, 과학의 성찰은 과학의 역사에 관한 성찰이라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상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철학체계를 거부하고, 철학적 주장이 과학의 성과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핵심 개념>

실증

연역과 종합의 통일

경험과 법칙의 대등화

과학의 상대성

수학의 허구성

 

<문제제기>

1. 실증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의 차이는 무엇일까?

콩트는 과학적 방법을 절대화하는 과학주의를 배격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의 실증주의를 피력한다. 실증주의가 학문 영역간 방법론의 상대주의를 인정하지만 과학주의를 배격한다고해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만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하며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낸다. 나는 어디까지가 형이상학적 방법이고 어디부터 과학적 방법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

 

2. 실증가능한 것의 범주는 어디까지 일까?

콩트는 물리적 세계를 포함해, 사회적, 정신적 현상까지 실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그가 시큐러리스트(비종교적 도덕주이자)인 점을 보면 신학을 거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술영역까지도 실증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검증(실증) 가능한 것의 영역을 그렇게 넓게 잡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3. ‘경험의 모호성, 주어진 소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다양한 논지에 대해 실증주의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철학은 주어진 경험의 주관적 성격과 모호성, 나의 감성적 인식의 불활실성, 일반화된 지식의 오류가능성 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인간 사고의 흔적이다. 그와 같은 인식비판의 기초를 외면하고 곧바로 주어진 소여, 경험, 과학적 검증 가능성이라는 지평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한정하는 것은 실용적태도인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실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 생명의 신비와 죽음, 영적 경험과 예술적 환타지, 그리고 당장 이렇게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나의 우울…-  바로 이것들이야 말로 인간이 철학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학조차 끝내 건드리지 못한 미지의 영역와 끊임없이 생성되는 신비가 넘쳐나는 세계내 존재인 인간은 항상 주어진 경험 그 이상의 것을 탐구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그와 같은 이유로 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는 칸트의 인식비판으로부터 후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앞으로 더 공부가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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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제대로 철학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또 늘 마음 한구석엔  인식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있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쫒기고 게으름에 밀려 공부는 늘 뒷전이었고 이렇게 그냥 나이만 먹었다. 그렇게 먹은 나이 마흔 후반에서 쉰언저리를 맴도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 지인 두어분이 '철학'공부를 같이 하자고 찾아왔다. 사실 농사로 밥벌어 먹고 아이 대학보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고, 또 겁없이 벌여놓은 마을 사업이 갈수록 태산이다보니, 마음을 끌렸지만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오신 두분의 절실함이 끝내 나로 하여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공부에 대한 절박함없이, 공부를 할 만한 삶의 여건도 되지 못하는 형편에서 허욕으로 시작한 철학공부지만 철학적 사유 이전에 철학서적에 대한 독서의 편린이나마 편지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 정리해 보고 싶었다. 외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냥 그렇게 늘 더불어 공부하는 삶이 진정 아름답고 알찬 삶이 아니겠는가는 믿음 하나로 나는 편지를 썼다.
 



벌써 달이 바뀌었습니다. 비나리 천지는 소생하는 생명들이 내뿜는 연두빛으로 가득합니다. 언제부턴가 새 봄을 맞으면 이 봄을 보지 못하고 지난 겨울 세상을 버린 뭍 생명을 애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고, ‘나’라는 한 생명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봄을 맞는 환희는 의미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인가 봅니다.

철학’을 같이 공부하겠다고 말씀을 드린뒤 [현대철학의 모험]을 구입하고, 지금은 잊혀진 어린시절의 친구 얼굴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애쓰듯 이미 생소해진 개념들을 뒤적거리며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저의 손에는 지푸라기 하나 조차 잡히는 게 없습니다.

난해한 - 저한테만 그런지 모르지만 – 책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또 생각은 옆길로 빠져듭니다. 이걸 읽으면, 이걸 이해하면 나는 지혜로와지나? 아니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까?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찾는 나태한 의식을 깨워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러한 물음은 앞으로도 책을 읽는 도정 내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계속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더 혼돈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학교를 다닐 때 잠시잠깐식이라도 맛을 보았던 것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철학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도 훨씬 넓고 심원합니다. 인디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나름의 철학이 있을을 터이고 그것은 아프리카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다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한국만 해도 책으로 묶어 질 수 없는 제도권밖의 무속신앙과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하여 이룩한 다양한 세계관이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인식의 성실성을 촉발하기는 커녕, 그냥 인식의 끈을 놓아버리는 의식유기의 상태로 저를 몰았습니다. 치밀하고 집요한 인식의 추적을 포기하고 그냥 그대로 대충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연에 힘입어 다시금 철학책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지평이기에 미리 포기하는 삶대신, 좋은 분들 만나 마음 편하게 인류의 철학적 사유의 자취를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읽기 시작한 책이 이제사 제2부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까지 통독한 생성존재론과 해석학, 현상학에 대한 정리는 불행히도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일단 엘레야학파, 플라톤의 사고가 어떻게 서양의 철학적 사고를 지배해 왔고 그것이 이떻게 서양 근세 철학까지 이어져 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이정우가 현대 철학의 분기점을 ‘시간’의 복권에서 찾고, 생성과 시간을 일차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사고를 “생성 존재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해석학과 현상학은 이전에 공부할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가볍게 통독한 수준에서 그 많은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기가 벅차기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그렇게 분류되는 철학자 한명한명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적인 학자가 하는 철학공부와 먹고사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생을 받쳐야만하는 생활인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애초에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학자들이 내린 최종적 성과를 나의 삶의, 인식의 지표로 받아들여도 좋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면 쉬 납득할수도 없습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면서 동시에 시인이고 철학자인 삶이 가능한 세상의 꿈은 아직 구현되지 못했고 저 개인의 삶조차 그와같은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하는 삶의 고통, 혹은 부담을 차라리 종교에 귀의 함으로써 들어버리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중들의 안일함이 한국 종교산업의 번영을 초래했겠지요.

그런 나태한 의식에 빠지지 않기위해 이번주부터 콩트에서 시작해 매주 한 꼭지씩 읽고 정리한 생각을 메일로 나누겠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두 꼭지의 글-사르트르와 콩트-은 잘 읽었습니다. 지적, 인식적 성실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 저가 토를 달 수 있는 글이 아닌것 같습니다. 사실 토론이 되면 좋겠지만 토론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감상 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나누다가 기회가 되면 차라도 나누면서 자리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올해 주 1회 봉화문화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강좌는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주 6일을 마을사업관련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고 또 하루 시간 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다 겨울에 집중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리지 못하고 한달은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마음을 정하고 그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자리로 기어듭니다.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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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 2011_0603 ▶ 2011_0625 / 일요일 휴관

류준화_봄의제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81.8×227.3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003g | 류준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비원Gallery b'ONE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Tel. +82.2.732.1273www.gallerybeone.kr

태양을 머금고 대지와 접신한 소녀의 판타지● 류준화 내러티브의 핵심은 여성과 생명이다. 그는 소녀와 물 이미지로 여성의 몸과 생명의 근원을 이야기한다. 소녀의 이미지는 몽환의 세계를 떠도는 아바타이자 현실의 억압을 비켜서기 위한 환상이다. 여성성을 대변하는 아바타로서의 소녀 이미지는 류준화 내러티브를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그는 자신의 회화 속에 소녀를 등장시킴으로써 여하한 풍경이나 상황 속에 놓인 캐릭터로 하여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생명의 메시지를 말하게 하다. 물은 매우 근원적인 물질형식이다. 그러나 물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물은 다른 존재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류준화의 물 그림이 꼭 그렇다. 물 속에 있거나 물 위에 떠 있는 다른 존재들로 인해 생명의 근원인 물의 실재가 드러난다. 요컨대 소녀와 물은 여성과 생명, 나아가 인간과 자연을 향한 류준화 이야기의 뿌리이다.

류준화_식물소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72.7cm
류준화_봄의소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72.7cm

류준화 스타일은 은근하면서도 단호하고, 얇고 투명하면서도 두께가 있다. 그의 도상 하나하나에는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낸 형태와 색채의 단아함이 배어 있다. 그는 붓질은 물론이고 흘리기와 긁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번짐과 뭉침, 번들거림과 겹침 등 특유의 색감과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쳐 왔는데, 특히 근작에 이르러 독창성과 고유성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고유의 캐릭터를 구축해서 몇 년간의 변주 과정을 거치면서도 자기복제의 위험성과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은 류준화 스타일이 구축해온 단단한 회화성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낱개 이미지들은 비교적 심플한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잡한 색감과 질감을 드러낸다. 하나하나의 형상 속에는 매우 꼼꼼하고 섬세한 손길이 묻어 있다. 여러 차례 색을 올려 단아하고 깊은 화면을 만들어내는 그의 진지한 노동은 스타일의 독창성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류준화_빛을모으다_캔버스에 아크릭채색, 콘테, 석회_72.7×91cm

근작을 통해서 류준화는 소녀와 물을 중심으로 이야기 틀을 만들어 기존의 흐름에 또 하나의 요소를 더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소녀는 물과 더불어 대지를 만난다. 씨앗을 품어주고 길러내는 대지 또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은 물질로서의 흙이 아니라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마치 물이 강이나 바다로서 현현하는 것처럼 대지나 산맥의 모습으로 나타난 흙을 존재는 생명의 서사를 생성하는 또 하나의 모티프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물과 흙은 매우 빈번하게 은유적 수사로 등장하곤 한다. 류준화는 물과 흙, 강과 대지를 통해서 여성성과 생명의 서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는 산맥과 머리카락, 피와 꽃 등을 중의적 수사로 얽어놓았다.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카락이 산맥이 되어 흐른다. 선홍빛으로 번져나간 피가 붉은 꽃으로 활짝 핀다. 그는 이처럼 중의적 수사를 채택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생명성에 관해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펼친다.

류준화_대지의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91×116.7cm
류준화_낮과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45×145cm

대지에 엎드려 잠든 소녀에게 붉은 피는 꽃이 되어 몸을 타고 흐른다. 새를 안고 있는 소녀의 어깨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함께 있다. 꽃을 입은 소녀는 새를 들고 있다. 천상과 지상의 메신저인 새를 든 소녀는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빛을 주는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소녀'이다. 대지를 안고 잠든 몽환적인 소녀의 얼굴에는 어머니 대지와 만나는 순간의 고결함이 담겨있다. 창백한 소녀의 얼굴은 검은 머리카락과 교차하고 소녀와 대지를 꿰뚫는 눈부신 태양이 생명을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은 류준화의 그림을 판타지의 일환으로 읽게 하는 주요 장치이다. 인간과 대자연의 존재를 얽어놓은 그의 화면에는 가시적인 세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환상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태양을 머금고 대지와 접신한 소녀의 판타지. 이것이 우리의 삶을 한 꺼풀 더 깊고 두텁게 읽어내는 류준화 내러티브의 현재이다. ■ 김준기

Vol.20110607g |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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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들른 봉화장은

연두빛 머금은 봄나물 향기가 넘쳐나고

막 농번기를 끝낸 산골할머니의 여유로운 발길이 모여듭니다.

함지박 가득 미나리며, 철늦은 두릅이며,막 캐온 도라지가 넘쳐나고

멀리 남쪽지방에서 올라온 햇마늘이며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풋고추가 작은 소쿠리에 이쁘게 담겨

산골할머니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봉화하고도 한참을 더 들어간

산골짜기 끝 어느 마을에서

평생을 호미질로 산전을 일궈 자식 먹이고 가르쳤을

등굽은 할머니께서도

봄산 가득한 뻐꾸기 소리에 가슴 울렁이고

갑자기 세상사 궁금한게 늘어나

굽은 지팡이 딛고 산굽이 걸어,

한참을 기다린 버스를 타고 봉화장엘 나왔습니다.


할머니 살아 생전 인연들이 갈수록 줄고,

이제 귀도 눈도 어두워, 기억마저도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남은 기억의 한 자락을 움켜지고

먼 친구들의 안부를 나누고,

이제 인적이 사라지고 녹음방초만 우거진

친정마을 소식을 더듬어 봅니다.

     

한번씩 들러는 봉화장에서

나는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다시금 사람사는 맛과 멋을 되찾는 의식을 치룹니다.


늦은 봄, 봉화장에서 여러분을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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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마을 눈덮인 빈밭이 을씨년스럽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부지런한 계절은 벌써 여름의 초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늙은 황소 느린 걸음으로 언제 그 너른 밭을 다 갈았는지,
할머니 쑤셔오는 무릎으로 언제 그 긴골에 비닐을 다깔았는지

 

비나리마을 마지막 서리가 지나간 5월 첫날이 지나자,
비나리 비탈진 밭마다 고추와 수박이 심기고,
옥수수와 땅콩이 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름비 같은 비가 내린 요 몇일 사이
비나리마을은 여름을 닮아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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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명의 발전은 아마 공감능력의 확대와 보조를 같이할 겁니다.
나의 고통이 전부인 단계에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단계로,
그리고 씨족과 부족을 넘어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자신의 삶과 일치시켜나가는 단계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류애라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인류를 넘어
생명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자비와 연민이 화두가 되는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단계는 시간적 전후와 무관하게 
서로 얽히고 섥혀 중첩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오신날 저는 밭에 일을 나갔습니다.
작년 봄에 심어 놓고 그 동안 돌보지 못한 사과나무를 살펴보고,
활착에 실패해 말라죽은 나무를 뽑고
새 나무를 심기위해서 였습니다.

하루의 고단한 일과를 마칠 때쯤,
밭 한가운데서 놓여있는 덫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덫이 내 사과밭 한가운데에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농산물 피해가 있어도
덫을 이용해 산짐승을 해치는 것에 반감을 가지신 분이

누군가 설치해 놓은 덫을 뜯어 내 밭에 던져놓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덫 가까이에 다가가 살펴보는 순간
섬짓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고라니의 발목이 덫에  끼여있었습니다.
유추해보니 덫에 끼인 고라니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다 덫을 매어놓은 줄이 풀리고
발목을 파고 드는 덫의 쇠이빨에 고통 받으면서
발목이 썩어 절단될 동안 덫을 달고 다니다가
내 사과밭에 와서야 섞은 발목과 함께 덫을
내려놓을 수 있었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나마 생명을 건지고,
발목과 함께지만 살을 파고 드는 덫의 쇠이빨로부터
벗어난 고라니의 눈물어린 눈빛에
슬픈 안도의 빛이 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뭏튼 덫의 이빨에 여전히 물려있는  
고라니의 떨어진 발목을 바라다 보면서

고라니의 고통과 인간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비나리 같은 산간마을은 고라니등의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심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산짐승을 몰아내고 농산물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극약을 묻힌 곡식으로 산새들을 잡기도하고 
여러가지 덫으로 산돼지나 고라니를 잡기도합니다.
물론 총으로 이루어지는 사냥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의 하나입니다.

저는 농사를 짓고 산짐승에 의한 농작물 피해를 매년 당하지만
그냥 참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지 1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산짐승을 잡는 이웃 농민을 욕하진 못합니다.
그분들의 피해도 보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덫처럼 극단적인 고통을 주는 
산짐승 대처 방법은 피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 고라니를 쫒아버리든지,
꼭 죽여야 하다고해도 고통을 덜 주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사과밭에 자신의 발목과 함께
덫을 남겨놓은 고라니의 고통을 통해

생명 누리는 것들간의 공감과 자비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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