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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번은 정말 고마운 번호고, 꼭 필요한 번호지만 가능하면 걸 일이 없는 것이 제일 좋은 그런 번호다. 어쩌다 기사를 보면 술취한 시민이 자기 집을 못찾겠다고 전화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장난으로 허위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119번은 평생 걸일이 없이 사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걸 일이 없었던 119번을 
최근 몇년 사이에 3번이나 걸게 되었다.  그것도 나 자신이 사고를 당하거나 한 경우가 아니라 3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119번을 걸게 된 것은 의정부에 사는 친구집을 찾아가던 밤늦은 시간에  바로 내차 앞에서 일어난 오토바이 사고 때문이었다. 나의 왼쪽 차선을 달리던 봉고차와 그뒤를 달리던 오토바이가 거의 동시에 내차 앞으로 차선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봉고차와 오토바이가 측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잠시 잠깐이지만 오토바이와 사람이 붕 날라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3바퀴정도 굴러서 도로가로 튕겨나갔다.  나는 급정거를 했고 사고를 낸 봉고차의 운전자도 급히 차를 세우고 뛰어나왔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경황이 없었다. 부상을 심하게 당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얼굴에 피를 흘렸지만 의식이 있었고, 봉고운전자가 부상자를 돌보는 사이 나는 급히 119로 전화를 했다.
 
평생 처음 당한 일이라 응급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가슴졸이고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때 더 황당했던 것은 현장에 제일먼저 도착한 차가 119 구급차가 아니라 렉카차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음 사설 응급차가 도착하고 마지막으로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날 자정이나 되어 도착한 친구집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에 대해 성토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번째 역시 차를 운전하는 중에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추락사고 때문이었다. 강변 국도를 따라 달리는데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내앞에서 달리던 승용차가 다리를 건러려고 죄회전하다가 다리 난간을 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급히 차를 세우고 10여m 다리밑을 내려다보니 차가 뒤집어져 강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일단 119에 전화를 하고, 강둑이 낮은 곳까지 달려가 겨우 강으로 내려섰다. 이때 강 반대편에서 사고를 목격한 한 분이 달려오고 있었다. 두사람이서 물에 반쯤 잠긴 승용차를 세워보려고 발악을 했지만 불가능했다. 같이 구조에 나선 그분은 혼탁해진 강물 때문에 차량 내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깨어진 창문으로 손을 넣어 차량 탑승자가 운전자 한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미 의식이 없는 부상자의 머리를 물 밖으로 들어올려 혹시라도 슴이 붙어 있다면 호흡을 할 수 있게 하는 사이에도 구조대원들은 쉬 오지 않았다. 파출소가 사고지점에서 2km도 되지 않았지만 10분이 휠씬 지난 후에야 경찰과 119대원들이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안타깝게도 사고자는 끝내 목숨을 건질 수 없었다.

그날 같이 구조에 나섰던 그분은 지역사회에서 자주 마주칠 기회가 있는데 나는 그분을 만날 때마다 지금도 존경과 감사의 정을 느낀다. 온몸이 후덜거리는 그런 끔찍한 사고 현장에서 무서움을 억누르고 사력을 다해 낯선 사고자를 구조하려 애썼던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분의 아내를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그날 이후 한 3일 정도 팔다리가 쑤시는 정도의 고생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몸살이 나서 몇일을 들어누워 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주 청송을 가는 길에 영양의 한 삼거리에서 내 앞을 달리던 오토바이가 좌회전을 하다 좌쪽에서 직진하던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목격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우측을 주시하다가 좌측에서 온 차량 한대가 지나가자마자 뒤따라오던 트럭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삼거리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사고 같았다. 순식간에 오토바이와 운전자가 트럭에 부딪히면서 엉퀴어 도로를 몇바퀴 구른 뒤에 멈춰섰다. 운전자는 나이가 드신 할아버지신데 헬멧밑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다리도 뒤틀린것 같았지만 다행히 의식이 있어 보였다. 무조건 119로 전화부터 걸고 차에서 내렸다. 사고를 낸 트럭 운전자와 뒤따라오던 차량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곧바로 경찰이 도착했다. 사고로 인해 차량도 밀리고, 더 이상 할 수있는 일이 없어 구급차가 오는 것도 못보고 사고를 수습하는 경찰관에게 명함만 건네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이날 119에 전화를 걸었을 때 사고 위치를 물어 인근 주유소 사람들에게 위치를 물어 답을 드렸는데, 곧이어  핸드폰 위치추척을 한다는 문자가 들어왔고, 몇분 지나지 않아 현장에 출동한 대원으로부터 온 전화인지 사고 위치를 묻는 전화를 또 받았다. 그리고 이후 영양경찰서에서 최초 목격자인 나에게 사고의 경위에 대해 묻는 전화를 2번 받게 되었다. 다행히 사고자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준 경찰관이  고마웠다.

사실 우리사회의 응급체계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고경험만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몇번의 사고 경험을 통해 119구조대원같이 세상에 곡 필요하지만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시는 분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지금보다 현격히 개선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런 분들이  대접받고 존경받는 사회가 선진국이 아니겠는가. 물론 인원도 늘려 근무조건도 개선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한적한 농촌같이 소방서나 경찰서로 부터 먼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응급체계의 헛점을 보완해서 매번 사고때마다 경험했듯, 발만 동동 구르며 응급차가 오기를 기다려야하는 상황이 지금보다는 좀더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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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서 연극 활동중인 [나무닭움직임연구소]
http://namoodak.wordpress.com/ 에서 연락이 왔단다.
국제환경연극 프로젝트에 참가해 [움직이는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한여름 연극예술잔치를 가지게 되었는데
일정이 임박해져 소품 제작을 도와달란단다. 
8월 9일,그림을 그리는 아내덕에 오랜만에 청송으로 달렸다.
청량산을 가로질러 부슬비가 내리는 몇개의 지방도를 달리고
영양과 청송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하게되어 경찰관에게 참고인으로 명함까지 남긴뒤
어렵게 청송에 도착했다.
 

주어진 과업은 고래두마리를 채색하는 일!
우리가 채색할 고래는 어미고래와 새끼고래 각 1마리로
종류는 귀신고래라고 했다.
찾아보니 귀신고래의 국제적 명칭은  Korean Gray Whale로
유일한 한국계 고래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울산 장생포가  오염되고 뱃길이 분주해지면서
벌써 삼십몇년동안 귀신고래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단다.
무려 45톤이나 나가기도 하는 대형고래면서
귀신같이 바위사이를 잘 빠져다녀
이름 붙었다는 귀신고래가 
이제는 한국의 환경재앙을 상징하는

슬픈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료가 없어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출력한 조그마한 사진에 의존해
귀신고래를 그렸지만 오후 늦게 빗발이 날리기 시작할 때까지 
어미고래 한마리만 겨우 완성을 하고,
아직 천도 씌우지 못하고 있던 새끼고래는 
시작도 못하고 청송을 떠나와야했다.


근 2년만에 들른 '나무닭'은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해온
흔적을 구석구석 간직하고 있었다.
2년전에 비해 훨씬 정리된 주변환경도 그렇고
이런저런 소품들도 그동안 상당히 늘어나 보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무닭연구소가 사용하고 있는 폐교 건물공간마다
지역의 어린이들부터, 멀리 남미에서 온 연극인,
타지역의 대안교육기관의 학생들까지
사람의 온기가 넘쳐난다는 사실이었다.


지역에서 온갖 열악한 조건을 다 감수하면서
지역문화예술을 일구는 장소익 선생과 동료분들의 열정에 탐복하고,
폐교를 꽉채운 지역주민과 어린이, 연극인의 열기와
아름다운 소품들을 사진기에 담았다.


'연극'이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기척 자체도 귀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귀한 농촌에서
연극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정을 나누고
지역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다.
개인적인 욕망을 접어둔채 청송의 작은 마을에서
연극을 통해 지역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나무닭]의 활동에 한량없는 부러움과 존경심이 일었다.
하루낮의 나무닭 순례를 마치고
나의 삶의 터전인 비나리마을로 돌아온 저녁

나는 황량한 벌판을 처음 마주한 얼치기 농부의 마음으로
나의 삶과 나의 마을을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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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봉화와 동일한 문화권이라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봉화군 명호면의 대부분이 행정구역 개편이 있기 전에는 안동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단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집에서 차로 10분도 달리지 않아 안동땅으로 접어들고 안동 도심까지라고해도 거리로 40km, 시간으로 50분이면 충분한 동일한 생활권이기조차하다. 사실 그런 연유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사적인 이유들때문에 나는 사실 봉화보다는 안동에 걸음하는 일이 더 잦다. 지난 말복에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할 즈음 권기혁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의성김씨집안의 사빈서원이 새롭게 복원되고 있는데, 집주인이 미리 몇몇 지인을 청해 서원 구경도 시키고 조촐한 음악회도 가진다는 것이다. 사실 몸도 피곤하고 그리고 딸아이가 밤에 영주로 내려와 마중을 나가기로 되어있었지만 명균, 승균 형님을 비롯해 좋은 분들 만나는 재미에 딸아이 만날 장소를 안동으로 바꾸고 집을 나섰다.


안동대를 지나 얼마가지 않아 도착한 사빈서원은 아담한 골에 강당과 주사, 사당 등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고, 누각에 올라 골짜기 확트인  아랫쪽으로 바라다 보니 내앞 반변천쪽 전경이 시원스레 들어왔다. 누각에는 나중에 들어 알았지만 '우물가식당'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계시다는 김연숙시인 부부께서 음식을 장만하고 계셨고, 마당에는 사진작가이신 강병두선생께서 먼저 도착해 사빈서원의 저녁을 카메라에 담고 계셨다. 오랜만에 뵌 강병두선생과 인사를 나누고, 금새 해가 기울고 저녁어스름이 마당에 깔리는 중에 주인이신 명균, 승균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 사실 과문한 탓에 내력도 잘 모르는 사빈서원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사람이 좋아 참석한 자리지만 사빈서원이 있어 마련된 자리니 만치 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한분 두분 들어서기 시작한 안동의 학자며 예술인들을 맞았다. 그리고 이날의 자리를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라 사람 사는 멋을 한껏 향유할 수 있는 고귀한 자리로 격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게 될 기타리스트인 권희경, 조민규 부부가 마침내 도착했다. 두 부부 기타리스트가 조율을 하고 손을 푸는 사이, 우리 부부는 명균 형님이  박경환선생님 부부등 먼저 도착하신 분들과 차를 나누는 자리에 끼여, 차를 얻어 마시며 사람의 멋과 향기를 음미했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서원을 덮자 누각에 올라 술과 음식을 나무며 권희경님의 기타연주에 빠져들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구랑 가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그건 인생이란 긴 여정도 마찬가지고, 한곡의 음악을 듣는 짧은 순간에도 마찬가진 것 같다. 비록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알고 지내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마냥 고맙고. 그런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뿌듯하게 느껴지는 존경스런 선생님들과 더불어 듣는 기타소리는 황홀하기만 했다. 기타는 조민규선생의 손으로, 명균형님의 손으로 전해지면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는 사빈서원의 밤은 깊어갔다. 하지만 딸아이와의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원통할 만치 아쉬웠지만 자리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세상의 형제중 가장 우애가 깊으시고 그리고 이날 자리를 마련해주신 명균, 승균 형님 부부, 연락을 넣어주고 길 안내까지 해주신 늘 봉사하시고 희생하시는 도해 권기혁선생님, 학자의 삶을 사시면서 타고난 예술적 끼를 숨길 수 없어 늘 예술인들과 함께 삶을 나누시는 박경환 선생님 부부, 두번 뵈었지만 안동 딴따라판마다 다 낄 것 같은 안동병원 김종규 선생님, 또 내가 아는 음악가 중에 가장 겸손하고 소박하신 권희경, 조민규 부부, 강병두사진작가님, 그리고 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하지 못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지역사회에서 늘 뵙고 부댓길 것만 같은 많은 분들과의 인연이 고맙다.  존경하는 분들과 함께해서 좋았고, 좋은 음악이 있어 더 행복했던 2011년의 말복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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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비나리와 이웃 마을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인 '풋거 먹는 날'이었습니다. 
'풋거 먹는 날'은  여름의 정점이자 가을의 시작점인 백중날,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이날부터 기세를 잃어갈 마을길 풀도 베고,
조촐한 술과 음식을 나누며
곧 맞이할 수확철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풋거 먹는 날'은 달리 '머슴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풋거'는 덜 일은 곡식이나 과일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추석을 한달여 앞둔 시점에
여름내내 고생만한 머슴들에게
힘겨운 가을 추수에 들어가기전
일종의 격려 차원에서
덜 익은 곡식이라도 거둬 잔치를 열어준데서
"머슴의 날"이
연유했다고 합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농민 모두가 세상의 머슴이 되었지만
아무도 농민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직접 풋거먹는 날을 챙겨
스스로를 격려하고 곧 시작할 고추 수롹에 앞서
한더위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 잡습니다. 
이날 하루만이라도 마을 주민들은 
온종일 일손을 놓고
  싣컷 먹고, 웃고, 즐겨야합니다.
 

3개 반으로 이루어진 비나리마을은
풋거 먹는 잔치를 각 반별로 가져오고 있는데,
올해 내가 속한 3반은
비나리마을의 새주민이 된지 2년차인
민서네 집으로 모였습니다.
민서네는 얼마전 TV의 한 다큐프로그램에서
 낯선 마을에 들어와 손수 흙푸대집을 지으며
산골마을 주민으로 정착해 나가는 과정을 방송하여
큰 인기를 얻고 갑자기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했던
바로 그집 입니다.
http://binari.invil.org/servlet/org/invil/commonbank/board/PgRetrieveBoardSrv



민서네 집에 모인 3반 주민들은
TV에서나 보던 민서네 흙푸대집을 안밖을 드나들면서
구석구석 살펴보고 집주인의 솜씨에 탐복하기도 하고,
비나리마을의 새 주민이 된 민서네를 격려했습니다.
모처럼 주민들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마을 어르신의 당부말씀도 듣고
마을 현안에 대한 의견도 나누면서
준비한 술과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비나리마을의 여름은 가고
풍요로운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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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전 오성윤 감독이 황선미 원작인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화영화로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참뒤 친구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와 동영상을 보이며 친구들과 아이들의 평을 구했다. 그리고 잊혀져버린 지 몇년만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 언론의 대대적인 호평과 지원을 받으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안동의 극장을 찾았다. 2개의 개봉관 중 한 곳에서 바로 상영을 시작했지만 낮시간대에 한정되어 있는 상영시간때문에 지난 주말에야 조조 타임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번 영화를 급히 보게 된 것은 오성윤 감독이 만든 영화를 꼭 봐야되겠다는 의무감과 더불어 한국 애니메이션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수작이라는 언론 평가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조조타임에 들어선 극장에는 아이들끼리 오거나 아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의 관객들만 가득했고 아이를 다 키워버린 우리같은 어른 관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단 만화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의 선입견, 혹은 지금까지 만화영화가 단지 아이들 영화에 머문 한국 만화영화의 현실을 확인하면서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국 만화영화의 맥을 짚고 있지 못한 관객의 한사람의 눈으로 한국 만화영화사에 있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위상을 가름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고 일단 가능한한 원작의 내용을 잊고, 영화 자체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90여분의 상영시간이 금방 지나고 관객들이 서둘러 빠져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극장을 나섰다. 언론의 극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다른 만화영화들에 비해 장명장면의 아름다움이 매우 독보적이었고, 서정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생명의 리얼리티를 살리고 있는 측면, 알려진 제작기간이 6여년인 것 처럼 오랜 시간동안 조탁을 거듭해 거둔 높은 완성도가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재미와 교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속에서 , 특히 오성윤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작품의 회화성과 캐릭터의 연기력을 살리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의도는 일정정도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뭏튼 개봉 일주일을 넘기면서 관객 동원에 성공하고 언론의 폭발적인 호평을 끌어낸 성공적인 만화영화 한편으로 등극한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국 영화사의 한페이지에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성윤 감독이 한국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감독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뒤짚고 곱씹어 봤다. 그래서 관객의 한사람으로서 앞으로 나올 더 좋은 작품을 바라는 욕심에 아주 사소한 그리고 주관적이기까지 한 희망사항을 몇가지 정리해 봤다.
 

먼저  사실적인 파스텔톤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 위에서 나그네와 족제비의 싸움, 잎싹과 족제비의 싸움, 초록의 경주 장면 등 박진감 넘치는 활극을 전개함으로써 목가적인 서정성과 속도감을 동시에 추구한 것으로 보이는데 왠지 조금의 부조화가 남는 듯했다. 서정적 배경과 강력한 색체와 형태의 캐릭터의 부조화도 마찬가지 느낌이다.
또한 영화가 원작동화에 기반하다보니 전체 내용적 측면에서 원작의 틀에 갇힐 수밖에 없겠지만 원작이 가지는 가족주의적 태도 - 엄마가 입양한 자식을 잘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는 설정은 너무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가 갖는 좀 평면적인 성격도 어린이용 만화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단순화한 것 같았고,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도입한 몇몇 장치들이 스트레오 타입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불편했다. 달수를 보면 인어공주의 세바스찬이 생각이 나고, 초록이의 파수꾼선발 경주대회를 보면 헤리포터가 생각이 나고, 또한 각각의 캐릭터는 디즈니 냄새가 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관객이 가지는 이와같은 주관적인 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마당을 나온 암탉]은 지금 까지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다시 써야할 만치 중요한 수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 늦기 전, 온 가족이 손잡고 꼭 영화관을 찾아 다른 어떤 영화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볼 것을 이웃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먼 훗날
 오성윤감독의 또 다른 작품이 세계 만화영화사에 한 획을 긋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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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초 봉화문화원 기타교실에 수강 등록을 하고
그동안 딱 한번 밖에 빠진 것 말고는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강좌에 참여해 왔다.

나이만 들고 실력은 없는 늦깍이 수강생이 될까봐 몇번을 망설이다가
수강등록을 했지만 다행히 연령대도 다양하고
기타 실력도 특별한 수강생이 아무도 없어
그나마 난 잘 치는 축에 들어 우쭐해해도 좋을 정도 였다.


수강생은 무려 45명이 등록을 했고 매주 서른명 정도가 수업에 참가하는데
평생 처음으로 기타를 잡으신다는 한갑이 넘은 어르신도 계시고,
2~30년전 학창시절에 잠시 기타를 두드려보다가 이제 아이들 다 키워 놓고기타를 다시 배워보겠다고 오신 아주머니들도 계셨다.
물론 엄마등쌀에 할 수 없이 기타를 들고 와서는
수업시간 내내 장난만 치다가 돌아가는 개구장이
초등학교아이들까지 있었지만
그래도 기타를, 기타음악을 정말 좋아하시는 분들인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기타수업을 네댓달 참가하다보니
이제 기타를 사랑하는 수강생들 대부분과도 친하게되었고
주초가 되면 벌써부터 수요일 저녁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기타를 새로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봉화문화원의 제안으로 그중에서 조금 실력이 나은 사람들로
합주단을 꾸려 
봉화은어축제의 부속행사인
지역문화한마당에 참가 하기로 했다.

수업시간의 절반이상을 연주회 연습으로 채우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따로 연습을 해서 오기도 했는데,
처음 합주 때는 도저히 무대에 올라갈 것 같지 않아 절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주 두주 시간이 쌓이면서 몰라보게 실력이 늘고
합주의 재미를 알아가게 되었다.
조금씩 다른 스타일은 둘째고
박자도 제각각이고 멜로디도 매번 놓치고 틀리고 하면서도
그래도 같이 어울려 한곡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재미는 
좁은 연습실의 더위를 잊게하기에 충분했다.


연주 전 마지막 주에는 단원들이 모여 따로 연습도 하고,
공연 당일에는 오후내내 연습과 리허설로 땀을 흘린 뒤에
드디어 봉화 내성천변 야외 무대에 올랐다.
연주곡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뉴질랜드 음악을 편곡한 '연가'와

기타음악중 가장 유명한 '로망스'를 편곡한 "Rumb Flamenka"
그리고 가요 "개구장이"를 준비했지만
행사진행 문제로 두곡만 연주를 했다.
수백명의 관중이 올려다보고,
화려한 조명속에서 강사님을 포함한 9명의 연주단원들은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무대에 올랐지만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긴장을 풀고
연주 자체에 몰입하여 즐기는 모습이었다.

연주중에 상황을 살핀답시고
단원들의 모습을 둘러보다 내가 칠 멜로디를 놓치기도 하고
메뚜긴지 큰 모기지 알수 없지만
곤충으로 짐작되는 놈이 내 목덜미에 앉아
연주내내 왔다갔다 신경을 거슬리게했지만
연주가 끝나고 관중들의 큰 박수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끝없는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봉화문화원에서 지원해준 "출연료"를 들고
봉화읍의 유일한 까페인 '물향기'에서 뒤풀이를 했다.
맥주를 한잔 나누면서 그동안 못나눈 사적인 이야기들도 주고받고
기타에 대한 사랑도 고백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밤이 깊어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다음 두가지는 마음에 담고 뒷풀이를 파했다.
연말에 봉화 문화원 학예발표회 때는
적당한 곡을 골라 수강생 모두가 같이 연주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봉화에도 '기타동호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겠다.
잘 치기는 포기했지만 그냥 즐기기를 원하는
기타음악 애호가들의 모임을 일생 같이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이 그만치 더 알찰 것이라 느껴진다.

이날의 행복을 안겨준 봉화문화원과
영주소리누리 음악학원 조선화 선생님,
그리고 같이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해준
수강생 모두에게 나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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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영화학과에 진학해서 벌써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영화를 얼마나 배웠는지는 알수 없지만

재법 겉멋도 들어가고 나름대로

영화를 이해하는 폭도 넓어진것 같기도 합니다.

한학기에 고작해야 두어번 만나는 것이 전부지만

가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는

그래도 영화학도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방학숙제로 5분짜리 영화를 직접 촬영한다고

스텝이며 배우며 8~9명을 이끌고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카메라며 각종 조명기구 등

장비를 한 차 실어오고, 아역배우 조겨루 군(http://blog.naver.com/0504jij)

과 어머니, 그리고 저 연배의
배우 한분까지 모시고

2박3일의 촬영일짜를 빡빡하게 채워나갔습니다.



저 역시 딸아이를 돕느라고 늦게 도착한 일행을 봉화읍에서 싣어나르고

또 각종 소품을 조달하느라 나름대로 바쁘게 3일을 보냈습니다.

이웃으로 부터 낚시가방을 빌려오고

마을 식당에서 매운탕거리로 수족관에 받아둔

살아있는 물고기까지 몇마리 얻어서 소품으로 조달했습니다.

딸아이의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과정 자체를 즐기고,

영화에 대해 이해를 넓히고 사랑을 깊이할 수 있었습니다.



의외로 집요하게 원하는 장면을 얻기위해 열번 스무번 NG가 나도

지친 스텝들을 독려하고, 짜증난 아역배우를 달래서 다시 촬영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조금 대견하기도 했고,

설사 결국 영화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친구들과 같이 작업하던 지금의 그 순간들이

나중에 큰 추억거리이자

세상사는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20여년전 영화판에 있는 친구 덕분에

저가 유일하게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영화 [파업전야]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고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홍석연씨를

만날 수 있었던 점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유명한 배우가 딸아이의 실험작품에 출연할 줄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처음뵙고 어디서 많이 뵌 분같아 골똘이 생각하다가

어렵게 어슴프레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고

직접 여쭈어 보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뭏튼 지난 주말 딸아이의
영화 작업과정을 지켜보면서

잠시 덥고 습한 우기의 불쾌함을 잊고,

딸아이의 친구들과 아역배우 조겨루, 그리고 홍석연배우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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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최저임금위원회가 노동자 단체를 배제한 상태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을 처리했다.  시급 4,580원을 날치기 처리하면서 언론은 6% 라는 상승율을 전면에 내세우며 날치기처리의 부당성과 4,580원의 초라함을 숨기려 했다.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외면하고, 가진 자들만을 위한 세상으로 몰아가는 자본가들의 부에 대한 극악한 집착과 맹목이 두렵기조차하지만 최저임금의 비현실성과 부당성을 떠나
우리 사회에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너무나 많고 또 짙다. 그중에서 노인 노동에 대한 부당한 댓가와 처우가  가장 큰 그늘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몇일전 몇년째 고추가루를 보내드리고 있는 부산의 한 냉면집의 부탁으로
고추를 구하러 영주의 고추도매상거리를 찾았다. 벌써 7월 하순을 접어드는 탓에 마을에도 고추가 떨어져 시장을 찾았지만 도매상거리서마저 고추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달여만 있으면 햇고추가 나오기 시작할터이니
묵은 고추를 쌓아둔 가게가 없었다.

몇집을 스쳐지나가다가 할머니 한분이 가게 앞마당에서 고추 꼭지를 다듬는 모습을 발견하고 고추맛을 보고, 주인할머니를 만나  가격을 흥정하고, 구입을 결정했다. 문제는 고추가루를 급히 보내어야하다보니 현장에서 바로 고추를 다듬어 가는 편이 나을것 같아 꼭지를 다 따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인할머니가 이웃가게에서 고추꼭지를 딸 할머니를 한분 더 구해오시어 주인할머니를 포함해 3분의 할머니가 고추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농협마트에서 시장을 보고 1시간만에 돌아왔지만 아직 작업은 진행중이어서 작업하시는 할머니들과 잠시잠깐동안  꼭지 따는 노임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추 꼭지를 따는 노임은 꼭지를 딴 고추 1kg당 300원에서, 상태가 좋지않아 가위로 병든부위를 오려내는 작업을 할 경우 1kg에 600원까지 받으신단다.   내가 2시간가량을 기다려 받은 고추는 36kg이니깐 할머니 3분이 2시간 가량 작업을 해서 15.000원정도의 작업비를 번 셈이었다. 시급으로 따진다면 할머니 한분당 약 2500원정도씩이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한개 600원짜리 얼음과자를 사드렸지만 그 얼음과자 한개값이면 고추꼭지를 2kg이나 따야한다는 사실에 죄지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감조차 많지않아 보통 하루에 만원 정도의 벌이가 되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나오신다고 할머니는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어셨다. 고추 꼭지를 따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작업은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손가락도 아프고, 어깨쭉지며 허리며 한시간만 작업해도 가위를 집어던지고 싶을 만치 고통스런 작업이다. 아무리 만성이 되었다고 해도 고추꼭지를 따고 일어서는 할머니는 한참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시고야만다.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절대로 심심풀이 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요즘 길을 가다보면 '노인일자리사업'이란 글자가 찍인 초록색 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줍고 풀을 베는 노인분들의 무리를 만나볼 수 있다. 들어보니 하루 4시간 일주일 2~3일 일하고 월 20만원 가량을 받으신단다. 정확한 임급과 노동조건은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퇴약볕아래 쓰레기를 줍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울컷 화가 치민다. 우리사회가 노인분들에게 눈꼽만하 임금으로 길가 쓰레기까지 줍게만드는 것을 목도하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것을 '생산적복지'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인네 한분한분은 우리 사회에 충분한 자기역할을 다해 오신 분으로 응당 노후가 보장되고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일자리조차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려 거의 경쟁적으로 담당공무원에게 매달리는 노인분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리고 단지 돈이 아니고 존엄한 삶을 위한 '일'에 대한 요구가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평생을 충분히 노동해온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집게를 들리고 쓰레기를 줍게 해서 월 20여만원의 댓가를 주는 제도를 무슨 노인일자리 복지정책인양 하는 것이 너무나 못마땅하다.

적어도 노인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을지, 노인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존엄한'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져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노인복지정책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당당해 질 수 있는 사회가 진짜 선진국이다. 
노인분들에게 그분들이 받아야할 응분의 댓가를 지불하는 사회가 바로 공정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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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라고, 참으면 복이온다고, 그리고 너가 가진 분노의 거의 대부분은 너 자신이 못난까닭에 생겨난 극히 사적인 정서적 장애의 산물이라고 우리는 세뇌되어왔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삼성이라는 재벌이 우리 사회의 모든 부를 독식해 들어가고, 물질적 부를 넘어 우리의 정신세계마저 잠식해 윤리와 가치의 측도마저 그들의 손에 움켜지는 꼴을 보고도 강건너 불구경하듯하고, 법정의가 아니라 검찰마피아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중 삼중의 잣대로 조자룡이 헌칼쓰듯 국민을 향해 마음대로 사법권을 휘두르는 꼴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

되돌아보면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초등학교시절부터 우리는 복종하는 법만 배웠고, '학교가서 선생님 말씀 잘들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세뇌되어 왔다. 숙제를 안해서, 청소를 못해서, 지각을 해서 그것도 아니면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손바닥을 맞고, 빰을 맞고, 간혹가다간 발길질에 차이면서까지 우리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군대라는 조직속에서 부정과 불의,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순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길러졌다.

그렇게 공적으로 분노할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는 분노를 오직 사적인 관계에 국한 해서 폭발시켜왔다.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정부를 향해서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동사무소 창구의 말단 직원을 향해 폭언을 하고,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속수무책 당하면서도 미어터지는 지하철 구내에서 가방을 치고 지나가는 어린학생에게 분개한다. 부조리한 세상의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짓눌려 살면서도 내면에 샇여가는 분노를 미쳐 스스로 확인하고 표출하지 못한채 엉뚱한 사적 공간에서 불현듯 터져나오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맨날 사고를 치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이자 정치가인 스테판 에셀은 세상을 향해 외친다. "분노하라!"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프랑스에도 분노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가보네?"라고 중얼거리며!

필자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활동 과정에서 수립하고 국민적 동의를 획득한 프랑스사회가 추구해나갈 미래상과 가치가 금력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되어 왜곡되고, 국제 정치가 아직 정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진 않은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청년들에게 독려하고 비폭력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만 이 책이 200만부이상 팔렸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프랑스는 이 책이 불필요한 사회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분노하라]를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런 부정의에 대한 저항에 나설 것을 동의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랑스는 대독전쟁이 종결되자 바로 민족반역자를 단호히 처단하고, 레지스탕스활동 성과를 토대로 국가지표를 수립한 나라가 아닌가.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친일반역자에 의해 오히려 독립운동가가 처단되고 오직 그들의 영속적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수립되고 국가의 미래상이 논의되어 온 나라다. 그래서 이 책 [분노하라]는 바로 한국 사회를 위한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사회에 충만한 좌절과 고통, 분노의 진원을 되돌아보고 사적 분노를 넘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정의로운 봉기에 나설 수 있는 작은 계기를 마련하길 빈다.

이 땅의 청년들은 취업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등록금 하나만은 '선진화'된 대한민국의 대학에 분노해야한다. 이 땅의 교육자는 사회적 낙오자를 양산하고, 인간성마저 파괴하면서도 오직 경쟁제일주의 성적 제일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해야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이땅엔 왜 그리 분노할 일이 많은지... 소수의 재벌 집안이 국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습하는 현실, 국민적 동의없이 국토를 도륙내는 사대강죽이기사업이 버젓이 진행되는 현실, 언론 지식인이 보편적 이익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언론마피아의 조직보호를 위해 부역하는 현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복지 정책 요구가 '거지건성'으로 비하되는 현실... 우리는 모든 부조리에 분노한다.

이 시간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은 전국에서 모인 희망버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희망버스는 정당한 분노를 통해 희망을 만든다. 버스가득 분노가 넘치지만 분노버스가 아니라 희망버스인 이유는 그 분노가 정당하고 정의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테판에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가 쓴 수십쪽에 불과한 이 글이 뭐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글은 그가 살아온 삶의 진실성에서 우러난 '진실'을 담고 있기때문에 감동을 준다. 이 땅의 대학생들의 손에 이 책 한권씩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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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여름이 깊어갑니다.

장마비가 계속되고

그 사이사이 퇴약볕이 내리쬐는 비나리마을 길모퉁이마다

붉은 접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지난 겨울 몸을 드러냈던 거친 산전은

무성한 고추잎으로 덮여 초록빛이 가득합니다.


산은 더 검푸른 빛을 띠고,

바람은 또 그만치 더 시원해져가는 비나리 여름은

이번 비가 그치면 여름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겠지요.


긴 수박밭골에 앉아 비와 퇴약볕을 번갈아 맞아가며

막바지 수박 순치기로 여름을 맞는

비나리 농부들의 등짝이 애닮프지만

그렇게 또 절기가 지나 가을이 오면

이 모든 고역은 다 보상받고도 남을

넉넉한 수확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장마비가 계속되는 비나리마을 아침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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