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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회는 지난 10월28일 여의도에서 진행된 한미FTA저지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농민회 동지들은 모두가 사과수확에 하루가 급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일손을 뒤로 미루고 길을 나섰습니다. 
여의도에 도착해서는 비싼 주차비에 모두들 놀랐지만 다행히 하루 최고 15,000원인 한강 둔치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있었고, 국회앞까지 걸어서 집회에 합류했습니다.
집회에 도착하자마자 도로옆 화단에 펼쳐앉아 춘양동지들이 춘양장터에서 준비해온 김밥과 삶은 계란으로 늦은 점심을 떼우고 본격적으로 집회에 합류했습니다.

집회가 행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한미FTA국회상정을 막기위해 국회 진입을 시도했지만 시위자보다 더 많은 경찰과 물대포를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연행했습니다. 경찰과 대치하는 곳 마다 맨 앞줄에는 여성동지들이 나서 몸으로 악으로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습니다.  결국 폭력경찰에의해 다 연행되었지만 용감하게 국회경내에 진입해 한미 FTA 결사 반대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모습에 가슴 뜨거웠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동지들의 부축을 받으며 국회 경내에 들어선 백기완선생님의 투쟁에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오후 늦게 이날 국회상정을 포기한다는 소식에 시위를 정리하고 봉화동지들은 한강둔치공원에 다시 모여 남은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날 하루의 노고를 서로 치하하며 동지애를 다졌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싸워오신 농민회선배 동지들과 함께한 가슴벅찬 하루였습니다

이날 최고의 히트는 서울올라가는 동안 길학이 형님이 제안한 구호였습니다.
"고추수입 앞장서는 명박이 고추 똑따삐자!!"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꼭 연단에 올라가 이 구호를 외쳐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히트는 면사무소에서 온 '동향파악' 전화였습니다.
두려울 게 없기에 참가자 명단 불러주고 "면장님이 여비주실라꼬예?"라고 되물었더니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시작되어 군사독재시절에나 하던 주민 동향파악이 명박이 시대에 다시 부활한 것을 보니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국 농업을 볼모로 내어주고, 나아가 한국을 미국의 한 주로 갖다바치려는 이완용의 후손 이명박 일당의 시도가 11월 초에 다시 있을 거랍니다. 한미FTA저지를 위한 투쟁에 더 많은 농민이 함께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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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행히 아내의 생일을 잊지 않았다.
오후 늦게 봉화읍까지 나가
아내가 좋아하는 치즈케익 하나를 달랑 사들고 와
저녁밥상머리에 올려 놓았다.

다행히 와인한병이 집에 있어
매일 먹는 평범한 밥상머리에
와인과 케익을 올려 놓으니 재법 그럴싸한 생일상이 되었다.

49살 먹은 아내는 케익에
춧불을 꽂는 나에게 불만스런 한마디를 던진다.
'뭔 케익에 초를 그렇게 많이 쫒노?"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원하든 않든 세월은 가고 
나도 늙고 아내도 늙어가는 것을!
"누가 나이 많이 먹으라그랬나?"
싸늘하게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초에 불을 당기고 
생일축하한다는 말한마디로 모든 걸 대신하고
촛불을 끄게하고
박수를 치고
와인을 한잔 나누었다.

그렇게 아내의 성대한 49번째 생일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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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년 10월10일 있은 경북농민대회를 다녀왔습니다.


올해 농산물이 비싸다고
농민이 돈을 벌고 부자가 된듯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름 내내 이어진 장마로 농사비를 배로 늘고
수확은 반으로 줄었는데
그나마 다행스럽게
그네들이 신봉하는 시장원리에 따라
농산물 가격이 오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오른 농산물 가격마저 못마땅한 현정권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정권은  1%를 위한 경제 정책을 통해
국가 경제를 파탄내고 
급기야 물가폭등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마하고자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체 물가 상승을 주도한양
여론몰이 끝에
돼지고기 수입에 항공료까지 보조해 주며

망국적 농산물 수입을 자행해 그나마 올랐던 농산물 가격마저
바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흉년에 농산물 가격마저 없는 농촌은
연말에 닥칠 농자금 상환에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고,
농자재 외상값에 농자금 이자 그리고 아이들 등록금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바로 이를 때 정책적 구제에 나서야할 국가는 침묵하고 있고,
농민이 사회의 일원임을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농민들은 경북도청으로 달려가
'재난지구'지정 등을 통한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존재이유를 묻고,  
농민의 사회적 기여도에 맞는 공정한(!) 정책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멀찌기 물대포를 세워놓고 로봇같은 무장 경찰로 애워싸고
우리의 목소리를 짓눌렀습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우리가 뜻을 같이하고 
없는 주머니 털어 버스 대절해서
같이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며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경북농민대회에 참여하고나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러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같이한 이웃형님이 있고, 형수님이 있고,
아우가 있고 어르신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늘 지는 싸움을 해도 농민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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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농촌체험마을을 시작하면서 아내와 같이 한번씩 하게된
체험프로그램중 자연미술체험을 그래도 가장 오래동안 유지해왔다.
자연미술체험은 나무나 풀 등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잇는 재료에다가
물감이나 여타 소재들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거나
스스로 원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하는
그야말로 난장판 미술체험에 가까운 프로그램이다.

지난주에는 봉화송이축제장에서 4일간 체험을 진행하고
어제는 이웃 고계리에 자리잡은 폐교를 이용한 [청량산장]에서
봉화군 농산물 고객을 대상으로하는 홍보 행사에 초대된
생협회원 어린이를 위한 부속프로그램으로
자연미술체험을 진행했다.

이날은 부실한 준비로 허겁지겁  체험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한 아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불현듯
자연미술체험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보게 되었다.
같은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해오면서
그냥 타성에 젖어 시간을 떼우고
자연미술체험의 의미나 교육적 효과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걸 만들어볼까?"
한 남자 아이이 대답이 가관이다.
"독사가 다리잘린 토끼 즙빨아먹는 모양 만들래요."

그 아이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지만
게임이나 폭력적 만화 등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 그 보다는 폭력적인 세상의 영향일 가능성이 더 많다!)
아니면 선생님을 골려주려는
의도된 폭력성의 표출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그 아이의 대답은 그동안 미술체험과정에서 느꼈던 요즘 아이들에 대해
몇가지 문제도 되짚어 보고, 프로그램의 의미를 되묻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고민하게 되었다 .

먼저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이 서로 협력하거나
어린 동생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이는 내 자식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 외동으로 자라 가정내에서
협력의 기회를 많이 가져보지 못했을 것이고,
학교 교욱과정에서도 부족한 협동성을 키워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것 같다.

이 점은 부모님들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간혹 아이들과 같이 체험에 참가하는 부모님들이 있지만
자기 아이만 돕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경우는 많이 볼 수 있는데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경우는 많지 않은게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공격성이다.
이는 나무재료 등으로 만들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만들어보라고 하면
남자아이들은 총을 가장 많이 만드는 것에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체험과정에서 친구들과 도구 사용 순서 등에서 부딪힐 때 그대로 노출되는 된다.
심한 경우는 친구의 고통에 둔감해서 
친구가 글루건에 화상을 입어 울고 있어도
웃으면서 놀리는 경우까지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유사한 체험을 많이 해 온
학습과잉아이들이 보이는 '이거 많이 해봤는데'식의 반응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사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출해내거나 부족한 점을 개선해 내지 못한 
체험선생이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 스스로 놀이를 찾고
놀이를 통해 학습하는 과정을 용납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아이들의 삶을 장악해 들어가는 요즘의 교육관이나
교육제도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뭏튼 끝나지 않은 고민이지만
최소한 자연미술체험이
자연재료를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싶은 바를 실현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넓히고,
생명에 대한 사랑을 체득하는 과정을 통해 정서적으로 순화될 수 있고,
친구들과 더불어 과제를 수행하면서 협동심을 기르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이고 학습과잉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지금과는 좀 다른 새로운
'공동체 미술프로그램'으로 거듭 나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구체적 모습이 어떨지 모르지만
올 겨울내내 새로운 프로그램을 모색하는 과정을 겪고
내년에는 좀 색다른 미술체험을 진행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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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부터 농사를 지었으니 벌써 올해까지 꼭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고 적지 않은 변화도 있었지만
꼭 그때 15년전 내가 첫발은 디뎠던
비나리마을의 가을을 잊을 수 없다.

그 고즈넉한 가을 하늘아래 펼쳐진 평화로운 마을전경...
살다보면 사람일은 알수 없으니 내가 설혹 비나리마을을 떠나
또 다른 낮천 거리에 헤메게 될지라도
그 때 그 비나리마을의 풍광은
고스란히 나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해 두해 농사를 지어 가면서
그 평화로운 풍경뒤에 감춰진 한국 농촌의 참담한 현실을
눈으로 몸으로 느껴갈 수 밖에 없었다.
말로서, 글로서 알고 있덨던 실상보다 춸씬더
참혹한 농촌의 실상은 그 어떤 처방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해 보였고,
한 때는 내 자식을 키우며 살아갈 터전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탈농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든 살아보겟다고 농사를 벌이고,
정부가 지원하는 이런 저런 마을사업을 벌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수가 없다는 점에
늘 목말라하면서 결
국 농촌, 농업의 문제는
농민이 주체적으로 나서  

해결할 수 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농민회에 가입하고 농민동지들과 전망을 찾고
한국 농촌의 미래 비젼을 공유하고자 했지만
처음 몇년은 우선 내 농사기반이라도 닦고 나서 가입하자고
미루게 되었고,
다음 몇년은 이런저런 마을 사업에 정신이 팔려
미쳐 농민회 가입을 생각지도 못했고,

그리고 최근까지는 농민회의 이념적 지향에서 동의하지 못하는
몇가지 점들과
지역농민회와의 연결의 어려움 때문에
가입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미뤘던 농민회 가입이 이뤄지고
지난 금요일에는 명호면에서 농민회가 소집한
자역 농업인대표자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선 자리, 두려운 자리였지만
농민회의 뚝심과 지역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을 몸소 느낄수 있었고,
비록 조직이 쇠락했지만 여전히 농민들 사이에서는
농민회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회 회원 개개인의 무한정한 헌신의 삶을 목도할 수 있었고,   
그동안 관변단체로 여겨 배제했던 농업경영인회 등도
농민회와 동반자로서
투쟁에 같이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는 기쁨도 있었다.

나아가 지역 각종 농민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시는
지역 형님들 선배님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으로부터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의 다른 농민단체 형님들께서도
지금은 와해된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 지회를 복원하는 과제를
맡기면서
도와주시겠다고 나서는데 고무되어
나는 연말까지 봉화군 농민회 명호면 지회를
복원하겠다는 공언을 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를 통해 10월 10일 경북도내 각 시군 농민단체와 마찬가지로
봉화군 농작물피해대책위원회에서도
버스 10대 이상을 동원하기로 하고, 

이에 명호면은 버스 한대를 맞춰 각 단체가 인원과 비용을 배정하여  
경북 도청앞으로 집결 [경북농민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의 했다.

농민회를 가입하자마자 벌써 몸이 바빠지게되었다.
아직 밭에 할일도 태산인데 내 주머니에서 비용을 갹출해 가면서
집회에 참가하게 되니 이게 무슨 망조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농사 15년 만에 농민회 가입을 통해
나의 삶이 또 다른 비약을 하게 된 것임을 확신하다.
나는 이제 진짜 농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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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축제 기간 4일동안 자연미술체험부스를 맡아 오고가면서

다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농민들의 절규가 담긴 현수막들이다.
물론 내가 농사로 밥먹고 살아야하는 처지기 때문에
그들 구호가 더욱 절실히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축제장의 어떤 볼거리보다도 농민회에서 붙인현수막이
더 가슴에 와닿는 진짜 이유는  
군민의 절대다수인  농민의 이해와 무관한 축제가 
농민의 절망과 소외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기 때문이다.

농업, 농민의 문제... 한 지자체의 문제일 수도 없고 
결국의 국가의 정체성과 맞불리는 문제겠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할 수 있고 지자체가 선도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얼마든지 있어 보이는데 
나는 아직 지역에서 희망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농민이 주인되는 세상.
농민이 대접받고 농업의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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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밥상머리에서 '다단계에 빠진 대학생'  이야기가 나왔다. 한 언론사에 따르면 서울의 거여동, 마천동에 일대에 5,00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 쪽방집단 합숙을 하고 있단다. 서울 전역으로 보면 약 1만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서울시의  대학생 수를 약 100만명으로 상정한다면 학생 백명당 1명은 다단계에 빠져있는 셈이었다.

대학생 딸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남의 일로만 느껴질 수 없기도 했지만, 다 떠나서 왜 우리 대학생들이 그렇게 다단계로 내몰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고 분통이 터졌다. 아내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왜 그럴까, 왜 대학생들이 다단계로 내몰리거나 스스로 몰려들까 묻고 또 물었다.

먼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대해진 물직적 욕망, 돈에 대한 집착이 다단계로 학생들의 발길을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생활고든 소비벽이든 늘 돈이 궁하도록 생활패턴이 셋팅되어 있다. 이는 물론 대학생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또한 이는 학생 개개인의 생활습관이나 '정신상태'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물질지향적 사회시스템, 가치 체계 전반이 개인을 지배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하튼 한국의 대학생들은 늘궁핍하다.

또한 한국사회의 대학생들은 심화되어가는 한국의 정글 자본주의, 극소수 재벌의 독식으로 치닫는 카지노 자본주의 속에서 아무런 개인적 대응력을 갖추지 못한채 절망하고 있다. 여기서 카지노 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한 종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위 '돈내고 돈먹는' 사회에서 그들의 미래는 사회적, 정책적 수단을 통해서 최소한 수준조차도 전혀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대학생들 대부분은 졸업과 동시에 실업의 늪에 빠지거나 기대에 못미치는 불안정하고 자존감을 주지 못하는 일자리에 삶의 기탁해야할 형편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안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개인 주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무너진뒤 성숙한 개인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들이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집단이라는 권위에 의존해 매몰되는 현상의 하나가 한국사회의 폭발적인 종교산업의 번창을 가져왔듯, 같은 이유에서 다단계의 폭발적 번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는 다단계 속성을 가지고, 모든 다단계 역시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집단적 의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사실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언제 한번 입시로 부터 자유롭게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정신적 모색의 기회를 가져보기나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롭고 그래서 소속감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한국의 대학생들은 궁핍한 주머니,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외로움 이라는 세가지 이유에서 다단계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뉴스를 검색했다. 기사를 읽다가 발견한 것이지만 부정적 내용의 기사에는 꼭 '다단계' 앞에 '불법'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기사는 불법 다단계와 합법다단계가 구별되어야 하고 합법 다단계는 당연히 보호 받아야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참을 검색해 봤지만 과문한 탓으로 불법다단계와 합법다단계을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자본금의 규모, 합숙의 강요 유무, 반품의 가능 유무 등등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차이를 나열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지만 다단계의 가치 창출(?) 시스템의 본질적 차이로 불법과 비불법을 나누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 고용창출 등 다단계의 순기능을 주장하는 기사도 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사회에서 약 360만 명 정도가 다단계 종사자란다. 전국의 총 취업자수를
2300만명이라고 본다면 360만이라는 숫자의 크기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360만 다단계 종사자가 취업자통계에 포함되었는지 알수 없고, 또한 소위 합법다단계 종사자 수만 집계 한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떤 경우든 충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단계가 지배하는 한국 대학 사회의 모습은 카지노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가슴은 분통으로 터지지만 해결을 위한 처방은 단순하다. 지금보다 학비는 훨씬 싸져야 한다. 반값등록금은 그래서 나온 주장이다. 생존경쟁은 완화되어야하고, 이는 복지의 강화만이 유일한 방책이다. 사회적 안정망과 재교육 시스템이 갖춰지고, 사회적 가치가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대학가 다단계 기승' 같은 문제는 그야말로 봄눈녹듯 사라질 것이다. 물론 자살공화국의 오명도 더불어 사라지고 말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숙제를 우리손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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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소위 '고추파동'이 났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가 살던 진해서는 아예 국내산 고추를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것 같다. 어머니가 고추를 사지 못해 걱정하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결국 인도, 멕시코 등으로 부터 수입했다는 모양도 다르고 맛도 맵기만 한 이상한 고추를 평년의 고추값보다도 더 비싸게 사서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까마득이 잊었다. 내 자신이 농사꾼이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1년에 우리가족이 고작해야 5근의 고추도 먹지 않는 식생활의 변화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얼치기 농사꾼이 되어 벌써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추값은 내가 고추농사를 하든 말든 매년 가을만 되면 나의 주관심사의 하나가 되었다. 고추값은 이곳 산골 농민의 1년 생계가 달린 문제고, 그에 따라 당연히 지역 상가의 경기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97년 IMF로 온나라가 들썩이던 그 때, 내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비나리마을은 IMF보다도 고추값 폭락으로 더 고통받고 있었다. 고추 상품 1근 600g가격이 2,200원전후로 형성이 되면서 끝물 고추수확을 포기한 집이 한집두집이 아니었다. 그해 고추수확에 나선 할머니들의 하루 일당이 20,000원에서 22,000원 정도 였으니 하루 일당으로 약 10근의 상품 건고추를 받아가는 셈이었다. 숙련된 한명의 인부가 하루수확하는 건고추 양이 약 40~50근 정도이고, 또 인부들은 따로 교통비를 지불하고 인근의 영주 등으로부터 매일 공수해 오든지 아니면 아예 가을 내내 불러서 같이 지내면서 먹이고 재워야했기 때문에 인부를 사서 수확을 하느니 차라리 하품은 수확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추값 폭락의 와중에 고추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사고속에서 하나의 로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른바 "1978년 고추파동의 추억"이었다. 

1978년 도시에 살던 우리 가족이 고추를 구하지 못해, 아니 고추 살 돈이 없어 헉헉되던 시절  고추농사를 짖던 분들은 일생에 다시 못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고추 한근을 보자기에 싸서 봉화장엘 들고 나가 팔면, 이런저런 부식거리도 사고, 고무신도 사서 들어오는 길에 선술집에서 막걸리한잔을 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도대체 고추한근이 얼마였기에 그럴수 있었는가하면 그때 가격으로 무려 만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대충 6~7만원으 족히 될것이다. 그러니고추 한근이면 충분히 그럴말한 값어치가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죽기 1년전, 한국 농촌에 선물로 남긴 것이 바로 고추 1근 1만원의 신화다. 이는 새마을운동이란 무기로 한국 농촌공동체를 해체한 일등공신인 박정희가 아직도 옛어르신의 뇌리에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데 적지 않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직도 '그때가 좋았는데...'를 읊조리는 어르신은 꼭 고추 한근 1만원의 신화를 입에 올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33년만에 다시 '고추파동'이 났다. 하지만 이번 고추파동은 평년작의 50% 이상 감수한 1978년 정도의 파동에는 미치지 못하는가보다. 오올해  평년수확량의 약 34% 정도가 감수된 전망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격면에서도 1978년의 만원은 지급 가격 2만원의 족히 3배이상의 화폐 가치를 띤다고 볼 때 올해의 고추값 상승은 '고추파동'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조금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올해 고추 수확예상량은 평년보다 약 34% 정도 감수된 7만9천여톤으로 보고 있다. 신문들을 보면 현재 소비자 가격은 약 2만원 정도로 형성되고 있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매주 400여톤, 총 8,000여톤의 정부물량이 시장에 풀릴 것으로 보이고, 또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추석이 지나면서 고추값이 하락세로 접어 들것이라는 기사가 넘쳐난다.

이들 고추 관련 기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의 전제는 현재 형성되고 있는 고추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이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MB가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고 물가고로 서민의 목을 죄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농민이지만 지나친 농사물 가격상승은 바람직하지 않다는데 동감한다. 하지만 올해 고추가격과 수확량을 감안하면 평년에 비해 농민이 얼마정도 경제적 이익을 보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량 감소에 따른 가격 상승은 시장경제의 신봉자들인 그들에겐 '공정'하기 이를데 없는 현상인데, 농산물 가격하락에 그렇게도 둔감한 정부가 가격 상승에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니 참 어이가 없다.

아뭏튼 나는 고추의 생산 전과정을 소상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국 농촌공동체의 유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고추 한근 2만원은 결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곧 지나가버라겠지만, 나는  올해 처음으로 정상적인 고추가격을 기쁜마음으로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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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종합사업 청량산비나리권역 위원들과

횡성군 공근면 금계리에 있는 금계권역에 견학을 다녀왔다.
금계권역은 2009년도 평가에서 전국 최우수 권역으로 선정되어
추가 상사업비 5억원을 받을 정도로 
성공적인 마을사업의 사레로 알려져 왔다.

곧 마을사업 운영을 시작해야된 우리 권역의 입장에서는
앞서가는 마을의 사례를 통해 우리마을의 발전방향을 타진해보고
세세한 마을운영의 노하우를 배우는 기회가 필요했기때문에
고추와 사과 수확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바쁜철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서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마을사업이 잘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각종 평가에서 높은 정수를 받은 맣은 마을들을 견학가 봤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획기적인 마을,
참으로 성공적인 마을은 많이 보질 못했다.
이번 견학에는 무엇보다 소득사업을 어떻게 착안하여 만들어 내고
주민들과 함께 운영해 나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근 3시 을 달려 도착한 금계권역은 특별한 관광자원이 없고
유명한 횡성 한우를 사육하는 농가가 많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많아 보였다.

마을위원장으로 부터 전해들은 금계 권역은
마을사업이 주민의 생업인 농업과 폭넓게 결합하고 있는 면도 그렇고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마을 운영의 노하우도 그렇고
여러가지 면에서 부러운 점이 많은 마을이었다.


무엇보다 오랜 친환경 벼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살림 생협과 협력사업을 해오고 있는 점은 너무 부러왔다.
그리고 그 기반위에 친환경 쌀을 공급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원재료를 가공해 누룽지를 만들어 또 한살림에 공급하고 있었다.
마을 종합개발사업이 그렇게 구체적인 마을 농업 자원과 결합되어
생산성있는 가공 사업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우로 유명한 횡성에 걸맞게 
한우 체험장을 만들어 위탁사육으로 소득을 올리는 모습도 좋았고,
고냉지 배추를 기반으로해서 준비중인 김치가공공장,
마을주민을 고객으로 한 마을방앗간 등도
지역에 맞는 아이템으로 성공가능성이 엿보였다.


특히 권순근 마을운영위원장의 훌륭한 마을운영마인드가 덧보였다.
마을 주민을 설득해 체험학교 운영자를 외부에서 영입해 마을 자원으로 만든다던지, 능력있는 마을사무장을 영입하여
마을 사업을 꾸려나가시는 모습은 마을사업이 어떻게 운영되어야하고
어떤 발전 방향성을 가져야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책임감있게 활동해 나가시는 모습으로 보였다. 참 존경스러웠다.


공동 생산과 유통의 경험의 거의 없고
대신 관광레저업이 다른 농촌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우리 권역에서는
또 나름의 독자적인 마을사업의 방향성을 찾아야겠지만

우선적으로 지역 농업기반에서 출발해서 
자연자원과 인문학 등 문화 예술자원을 개발,
농촌관광을 결합해 나가는 로드맵을 명확히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관광레저사업이 농업과 결합하지 못한 채로 추진된다면
마을사업이 지역주민의 이해관계와 괴리될 수 밖에 없고
결국 사업의 지속성과 안정성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성공적인 사례로 알려진 대부분의 마을사업이
관계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타 마을의 선진지 견학 고객을 베이스로 하여 발전해 나가다가
그자체에 매몰되어 자립성을 상실하는 경우들이 드러있는데,
그 점에있어서 금계권역은 다른 부정적인 사례와는 달리
튼튼한 농업기반을 갖추고 있는 점이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 

하루 낮의 짧은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이번 견학을 준비하신
유현소프트 조석호과장님,

농촌공사 영주지사 김태어 감독님, 그리고
바쁜 일을 잠시 놓고 기꺼이 견학에 참여해 주신
마을 위원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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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밭두렁공부방 학부모회의가 있었다.

그동안 밭두렁공부방은 명호면민회관을 빌려

명호 어린이들의 방과후 휴식과 보호, 학습 등을 진행해 왔는데

급작스럽게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공간을

비워줘야할 형편이 되어버렸다.

명호면에 '어린이 집'이 들어오면서 지금 공부방으로 사용중인

공간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기로 했기때문이다.

공부방이나 어린이집이나 똑같이 명호면민을 위한

육아나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소중한 사업들인데

어떻게 하다보니 공간문제로 이 두 사업이 충돌을 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사업 추진 결정과정에서 충분히 공부방의 의견을

수렴 하는 노력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충분한 논의와 대책마련없이 사업이 추진되면서

공부방이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하고 있는 공부방을 가볍게 여기고

전경련의 지원과 군의 예산으로 하는사업에만 올인하는 

관료적이고 성과주의적 관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정을 알게 된 몇몇 주민들이

다양한 채녈을 통해 공부방사업을 위한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고

중단기적인 문제해결 방안까지 마련되게 되었다.

장기대책으로는 2013년까지 명호초등학교와 교섭하여

마을종합개발사업 예산으로 아동센타겸 실내체육관을

짓도록 추진하기로 했다.

이 사업은 아직까지 변수가 많지만 지연민이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준비해 나가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당장은 명호면의 협조를 구해 면장 사택을

공사기간중 사용할 수 있도록 추진해 보기로 했고,

그리고 면민회관 1층을 어린이집으로 리모델링 하듯

군청에 별도의 예산을 요구해 2층을 공부방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도록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는 지역의원을 비롯해

많은 지역일꾼들이 참석해 나름대로 위의 결정사항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결의할 수 있었다.

모처럼 밭두렁공부방 학부모 회의에

학부모도 아닌 사람이지만 참석하여

지역민의 현안을 같이 고민하고 논의할 수 있어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공부방을 위해 늘 애써온 봉화자활후견센타,

그리고 학부모여러분들의 노고가 우리 지역을 더 아름답고

사람살만한 마을로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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