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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0시부터 한미 FTA가 발효되었습니다.

한국 농업농촌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 명백한 마당에

가만히 등짐짓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제 경북의 농업경영인 협회, 농민회, 생활개선회 등

회원 농민 3천여명이 새누리당 경북도당앞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정치가 농민의 삶을 팽개치면

농민은 결국 정치를 바꾸기 위해 일서설 수 밖에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농민의 조직이어야할 농협이

농민을 지배하고 농민의 이해에 반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린 현실을 규탄하기 위해

농협경북 본부까지 1시간 넘는 시간행진을 했습니다.

이 바쁜 철에 밭이 아니라 거리로 나와야만하는 처지가

서글프고 울분도 일었지만 이렇게 농민들이 모여

농업 농촌을 지키고 농민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장엄하기조차 했습니다.

 

깨어있는 농민이 있는한 한국 농업농촌은 그리 쉽게

몰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당장 미국산 포도쥬스가 반값으로 판매되기 시작하고

값싼 소고기며 쌀이며 온갖 먹거리가 우리의 밥상을 위협하겠지만

우리 농민이 치열하게 싸우는 꼭 만치

우리 농업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미 FTA가 발효된 2012년 3월 15일,

이날은 한국 농업이 사망선고를 받은 날이 아니고

한국 농민이 새롭게 깨어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시작한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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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여정이다. 딸에 오후 5시쯤 도착하기 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하산이라고 느긋하게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남은 15일의 일정을 고려해 시간을 아껴야했다. 사실 남은 여정이 빡빡해서라기 보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겠지만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로,  포카라에서 ABC코스를 다녀오고 다시 포카라에서 좀 느긋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베시사하르로 되돌아 내려오는 여정에서는 올라갈 때보다 꼭 2배의 속도로 걷기를 강행했다. 차메에서 출발해 상행 때 하루 걸리던 티망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내려왔다. 티망에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일러 다나큐까지 더 내려와서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티망에 도착할 때 쯤 혹시 배가 고프지 않냐고 파샹에게 물었다. 네팔리들은 보통 아침을 먹지 않거나 간단히 해결하고 오전 11시전에 이른 점심겸 아침을 먹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포터를 위해 점심을 11시정도는 먹을 수 있도록 여정을 배려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혹시 오전 일정이 늦어지면 꼭 파샹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리가 파샹을 생각하는 만치 또 파샹은 우리 생활습관에 자신을 맞추려 했고 그러다보니 12시 이전에 점심을 먹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탄촉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눈 것을 제외하곤 간식도 휴식도 없이 계속 걸었다. 혹시라도 파샹이 배가 고프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파샹은 또 'No problem!'이다.


점심을 좀더 내려가 다라파니 정도에서 먹기로 결정하고 티망을 스쳐지나갈 때 상행 때 묵은 롯지 앞을 지났다. 마당에서 롯지 사오니(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파샹과 무슨 이야긴지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돌담에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자니 사오니께선 파샹을 줄 차 한 잔과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퍄상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책을 건넸다. 그 책은 내가 상행 때 짐을 줄인답시고 룸 탁자에 남겨두고 온 [바가바드기타]가 아닌가. 매정하게 버린 강아지가 다시 돌아왔다면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좀 머슥하기도 한 이중적인 감정이 일었다. '내가 잊고 간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다'고 말을 하기에는 책보기가 낯부끄럽기도 했고, 책을 챙겨놓았다가 전해주는 사오니의 정성과 그 책을 자랑스레 건네주는 파샹의 우쭐함에 찬물을 끼얹기도 싫었다. 무조건 반가운 표정을 짓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사실 별반 반갑지 않은 [바가바드 기타]가 다시 나의 품에 돌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폭설이 와서 쏘롱라가 막히지 않았다면, 티망을 지나면서 묵었던 롯지 앞을 지나는 시간에 사오니가 마당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사오니께서 불쏘시개로 태우거나 그냥 쓰레기로 버려버렸다면, 혹은 롯지 룸에 두었다가 어떤 한국인 트레커가 한국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책이 아닌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쳤는지를 생각하니 [바가바드기타]를 다시는 가벼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억만겁의 인연이 겹쳐 나의 손에 돌아온 [바가바드 기타]를 그동안 짐이 줄어 여유로와진 배낭에 고히 모셨다.


티망에 도착하기전에 차메와 티망사이에 있는 탄촉이란 마을에서 블랙티를 한잔 나눌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티하우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시키는데 바로 차메서 부터 상하행 여정을 같이 하고 있는 한국 남녀 청년과 그들의 포터가 도착했다. 블랙티 6잔을 시키고 그들이 내놓은 네팔 쿠키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고 있는데 화장실 갔던 아내가 화장실 자물쇠와 키 뭉치를 변기에 빠뜨려 버렸다며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 것같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웬걸 티하우스의 여주인은 또 'No problem'이란다. 이런저런 여행후기에서 네팔리들과의 나쁜 해후에 대한 글들을 읽은 적이 여러번 있었지만 우리가 라운드 중에 만난 인연은 하나같이 선하고 친절한 네팔리 뿐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자물쇠는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공산품으로 적어도 블랙티 몇잔을 팔아서는 살 수 없는 값이 분명했지만 여주인은 꽨찮다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나려다 마음에 남는 미안함때문에 아내와 잠시 답례를 고민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많이 입을 기회가 없었던 자신의 추리닝 상의를 배낭에서 꺼내 티하우스의 사오니에게 드렸다. 한국돈으로 오육만원은 족히 하는 추리닝이 아까웠지만 아내는 미련이 없어 보였고, 추리닝을 받은 사오니는 의외의 선물에 너무 즐거운 표정을 지으니 잠시 들던 아깝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나큐에 오후 1시쯤 도착해서 포탈라게스트 하우스에서 어제 눈에 젖은 옷을 햇살좋은 마당에 늘어놓고 달밧을 시켰다. 'Potala'는 티벳 불교의 성지 '포탈라궁'이나 포탈라궁이 있는 지역의 지명을 가리킬 것이다. 티벳탄이 운영하는 롯지답게 다이닝룸 한쪽에는 불교식 제단이 설치되어있고 제단앞에선 귀여운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얼굴에 온통 콧물을 바르고 있어 더 귀여운 아이들이 사진기를 들이되자 이쁘게 웃어준다. 햇살이 비치는 창밖에는 맑은 하늘이 싱그럽고 눈이 가쉰 골목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 풍경같이 따사롭고 한가로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거리를 힘겨운 삶의 짐을 지고 상행하는 네팔리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짐을 진 그분들이 이어가는 세상살이를 고달프게 느끼기엔 따스한 햇살과 파란하늘, 한가한 골목의 풍경이 너무 평화롭다. 같이 짐을 지고 올라가며 서로 농을 치는 네팔리의 표정에도 웃음이 한가득이다. 내 마음의 평화가 단지 투사되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의 평화가 온 세상의 평화이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파샹은 '태양열 온수'가 된다며 머리를 감을 것을 권했다. 머리를 감은지 한참이나 되었고 슬슬 머리가 건질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고도가 있어 추위가 겁이 났다. 파샹만 머리를 감고 아내와 난 사양했다. 양배추 볶음이 같이 나온 달맛을 맛있게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니 막 도착했을 때 와는 달리 한기가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머리를 감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며 길을 나섰다.


다라파니를 지나고 카르테에 접어드니 휘날리는 적기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파샹에게 물어보니 마오주의자가 장악하고 있는 마을이란다. 몇년 전에는 정부군과 맞선 자치주로 전운이 감돌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마오주의 정당이 집권당이 된 마당이니 더 이상의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단지 적기는 우리 마을이 어떤 사상을 공유하고 어떤 마을의 미래를 꿈꾸는지 나타내주는 표식으로만 다가왔다. 그들이 공유한 사상이나 공통의 꿈이 가진 현실성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을의 공기가 달리 느껴졌다. 여전히 인적은 많지 않았지만 햇살은 더 따스하고 마을이 가진 문화적 정치적 저력이 마을의 밝을 미래를 예견케했다.



상행길에 'South korea is good!'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주던 네팔리를 만났던 지점의 롯지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차를 마셨다. 한 때 꿈꾸던 해방구를 네팔의 안나푸르나 산중에서 만난 셈이니 잠시 머물며 담배라도 한가치 안할 수가 없었다. 적기가 휘날리는 마을 '카르테'를 벗어나려는 찰나 '맛있는 김치있어요' 라고 쓰인 한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표지판은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많은 트레커들이 오고 있고 또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네팔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글표지판이 보여 주는 현실과 마을 입구를 지키던 붉은 깃발이 품고 있는 꿈이 공존하는 카르테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오후 5시에 오늘의 목적지 딸에 도착했다. 역시 '김치있어요'라고 씌여 있는 마르상디 호텔 마당에는 노란 단국화가 길손을 맞이했다. 이츰 룸에 짐을 풀고 마당에 내려와 파란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잔하며 딸에 내리는 저녁 어스름을 맞았다. 오늘 하루 상행 이틀분 여정을 주파하며 고도 약 2,700미터에서 1,700미터까지 1,000미터를 내려왔다. 이틀동안 백설의 설국에서 초록의 겨울 아열대 지역까지 약 46km를 걸어 고도를 1,700여미터 줄인 셈이다. 이틀 연속된 강행군으로 몸은 지칠데로 지쳤지만 핫샤워를 하고, 파샹이 좋아하는 피자까지 시켜 푸짐한 저녁상에 로컬와인까지 한잔 나누니 몸이 봄햇살에 눈처럼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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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단체 협의회 초대로 정태인 선생의 강연

[한미FTA가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를 듣고 나니 정신이 아찔하다.

농민의 한 사람으로 무역확대를 위해 한국 농업 시장을 내어주는
한미 FTA에 대해 당연히 반대해 왔지만 
한미 FTA에 대해 그 이상의 이해 없이 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반대해 왔다. 

그런데 막상 MB가 한미 FTA를  3월 15일 발효한다고 선언한 시점에서 늦게나마
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 정태인 선생을 모시고
그 실체적 진실을 알기위한 귀한 강연회를 가지게 되었다.  

지난 3월 9일 봉화군 농민회 회원의 한 사람으로 동지들과
비나리 자활농장 아주머니들을 모시고
강연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봉화군 청소년 수련관 입구에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동지들이 행사준비에 한창이다.
안내 전단을 돌리고 플랭카드를 설치하고
경상북도만 거부하고 있는 친환경 무상급식과
한미FTA 폐기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동지들과 반가히 인사를 나누고 둘러보니
강연회가 열리는 오후 2시가 다가오는데
강연을 들어러 온 사람이 채 스무명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정태인 선생이 도착하고 강연히 시작하고 나니
다행히 약 150여명의 청중이 강당을 메우고 있었다.


이날 정태인선생의 강연 내용 중에 새롭게 인식한 딱 두가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미FTA의 전선은 한국과 미국이 아니라  한미자본과 한미민중사이에 그어져 있다.
정부는 한미 FTA가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고 국내 산업간 상반된 이해관계가 일부 있을 수 있으나 전체 국부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 주장해 왔다. 이는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보수권력의 낡아빠진 술수긴 하지만 아직도 가장 효과적으로 국민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선전술이다. 당장 나부터 정부의 술수에 넘어가 농업이 입는 손해를 타산업이 얻는 이익에서 떼내어 메꾸어만 준다면 한미 FTA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생각해 왔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자본은 국경도 없고 국적도 없는 탐욕 그자체에 불과한데 아직도 우리는 '민족자본'같은 순진한 생각에 빠져있지 않은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미FTA가 미국인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과 미국의 자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2. 한미FTA의 목적은 무역확대가 아니라 복지(공공영역)의 시장화다.
미국시장이 한국 수출량의 8.5%에 불과한데, 한미 FTA로 무역이 - 이 역시 불투명하지만 - 자신들의 주장대로 일정정도 증가한다고해도 별 대수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본이 한미FTA에 목을 메는 것은 시장확대에 한계에 도달해 더이상의 출구가 없는 지금 그동안 공공영역으로 분리되어 잠식하지 못하고 있던 철도, 우편, 의료 등의 역역을 침탈하여 사회적 보호장치를 해체함으로서 사회에 대한 자본의 총체적 지배를 획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미국식 법제, 문명을 벗어던진 벌거벗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한국까지 이식하려할 것이고, 이는 곧 삼성같은 한국 자본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기도이다.     

 

 

사실 마을에서 주민들을 만날 때 한미FTA에 대해 간혹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항상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내야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뿐인데, 우리 아들 직장에서 쫒갸 나오지 않는게 더 중요하다. 농사 망해도 공장이 잘 돌아가는데 도움된다면 한미 FTA에 찬성해야 안되겠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라가 잘살게 된다는데 농민 이익만 이기적으로 주장하면 되겠나?"는 것이었다. 대부분 대중은 '국익주의적' 사고에 빠져있고 또 공공역역의 시장화에 대해서는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한게 사실인 것 같다. 향후 정권교체와 한미FTA 폐기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미FTA 의 실체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값진 강연을 접할 수 있게 해준 봉화군 농민회와 초대에 응해주신 정태인 선생님께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참 힘들고 바쁘시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태인선생의 강연을 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권을 교체하고 나서 공중파방송에서 정태인 선생을 다시 뵐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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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창밖은 흐리고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미련없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지만 막상 아침을 맞았는데도 상황이 변화된게 없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다이님 룸에 모인 트레커들 역시 어제 올라온 한국인 남성 한분만 빼고 모두 하산을 결정한 상태다. 티벳탄 브레드를 먹고 룸으로 돌아와 하산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예티호텔을 나서니 차메에서 동행했지만 다른 숙소에서 지내게 된 한국인 여성분은 기상이 좋아질 때까지 하루이틀 더 기다려 보겠다며 남으시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 순간적으로 멈짓거렸다. 하지만 마낭에서 이삼일 지체하다 결국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을 하게 되면 안나푸르나 라운드뿐 아니라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다시 자라는 미련의 싹을 잘랐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그리고 큰 아쉬움과 또 하나의 삶의 과제를 안고 뒤돌아섰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살아생전에 꼭 한번 다시 쏘롱라를 찾아야만할 것같은 과업을 받은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낭을 벗어나자마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재법 굵은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내리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치 거칠게 쏱아졌다. 지상에 닿은 눈조차 다시 바람을 타고 대지를 쓸고 지나가며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눈발이 세어지는 만치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앞서간 트레커들 덕분에 다행히 길은 눈위에 드러나 있었다. 눈을 피해 고개를 수그리고 길의 흔적만 쫒아 말없는 행군이 이어졌다. 브라카에서 잠깐 티하우스를 들러 몸을 녹였다. 티하우스의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의 차림에 가난이 묻어났지만 애틋한 삶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두잔의 히말라야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파샹이 마시는 밀크차를 두잔 더 주문해서 모두 5잔의 차를 마시고도 90루피밖에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몇잔의 차를 팔아 어린 자식과 더불어 겨울을 나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이 애틋했다.


티하우스의 따뜻한 부뚜막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목적지 차메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려야했다. 티하우스를 나와 뭉지와 홈데, 피상까지 단숨에 내달랐다. 올라올 때 묵었던 피상의 틸리초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체력을 장담할 수 없어 다른 트레커들보다 먼저 일어나 출발했다. 한시간 정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늦게 출발한 한국인 학생들이 우리를 추월했다. 거침없이 내리는 눈은 배낭이며 어깨며 머리며 할 것없이 수북히 쌓였다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목덜미에 쌓인 눈이 속을 썪였다. 배낭과 등사이에 흘러든 눈이 체온으로 녹아 옷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축축해진 등이 당장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에 열이 나도록 걷고 있을 때는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급격히 체온을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눈발은 옅어졌다 다시 강해지기를 반복했지만 하루종일 멈추지 않았다. 퍄상은 틈 날때마다 확짝 웃으며 "Goog Decision! We are Lucky!"를 외쳤다. 마낭에 머물렸다간 어쩌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한채 몇일동안 갇혀버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폭설이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거친 눈보라 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그나마 오후부터는 마음도 조금 풀리고 자신감도 붙으면서 폭설이 내리는 안나푸르나 진풍경에 빠져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나푸르나의 설경을 두눈에 가득 담고 아내와 눈만 마주치면 "우와 죽인다!"를 백번도 더 외친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걷는듯 신비롭고 장엄한 풍경 속에 한 생명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폭설 속에도 마낭을 향해 올라오는 트레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두명씩 올라가는 트레커들도 서너 팀 만났지만 한번은 7~8명 되는 한팀의 한국인 트레커들과도 만났다. 올라가는 분들은 위의 상황을 물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행운을 빌었다. 한번은 네팔 트레킹을 몇 번 하셨다는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분은 나의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며 포터에게 왜 더 많은 짐을 지우지 않냐며 물어왔다.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너무 지쳐보이거나 약해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뭏튼 그분의 나에 대한 선의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나는 파샹을 쳐다보고 눈웃음을 보냈고, 파샹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고산지대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져 나르던 네팔리들이 우리같은 약골에 비해 두세배의 짐을 져 나를는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파샹이 고용된 포터라기 보다는 라운드 내내 그냥 동행길의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좋은 그 역할 다 하고 있었다.


피상을 떠나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디카리포카리와 브라탕 탈레규를 거쳐 차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인 5시 반에 하루의 강행군이 끝났다. 이틀 걸려 올라갔던 거리를 하루만에 내려온 것이다. 올라갈 때 묵었던 마낭주의 수도 차메의 같은 숙소인 마르상디 만다라호텔에 지을 풀었다. 벌써 도착한 트레커와 네팔리들이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타오르는 장작난로를 둘러싸고 서너명의 호주청년들, 1명의 일본인 산악인과 너댓명의 가이드와 셀파들, 그리고 한국인 학생과 포터가 다이닝룸을 채우고 있었다.


일본인 산악인은 오늘 지나온 마을 피상을 내려다보는 해발 6090m의 피상피크를 등정하고 막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많이 지쳐보였고 거의 주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거친 숨을 쉬며 자신의 육체적 변화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문산악인으로 많은 산들을 등정했고, 이번에는 혼자서 세명의 셀파와 같이 피상피크를 올랐단다. 알고보니 피상피크는 피상에 있던 한국인 위령비에 새겨진 고인들이 등정하다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산이었다. 그의 나이는 60살이라고 했다. 그 연세에 만만하지 않은 정상을 등정하고 왔으니 그의 지친 모습과 주변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에 집중해 있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같이 했던 셀파들은 모두 큰일을 막 치룬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함과 조금은 들떤 모습이었다.


7시가 넘어 사면이 어둠에 둘러쌓여 깜깜하게된 뒤에야 마낭에서 비슷하게 출발했던 3명의 독일 트레커가 도착했다. 같이 피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보다 늦게 출발한 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윗마을 어딘가에 숙소를 잡아거니 생각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둠이 덮친 위험한 길을 마다않고 차메까지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눈을 뒤집어 쓰고 추위에 지친 그들을 위해 글거리는 난로가에 모여 앉아 얼굴이 발갇게 익은 우리는 모두 일어나 환호를 질러주고 박수를 쳤다. 3000m이상의 고도에서 그것도 한치앞이 안보이는 폭설을 뚫고 하루에 800m의 고도를 줄이며 28km를 걷는 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독일인 트레커 중 형인 사람은 이번이 9번째 네팔 트레킹이라고 했다. 마지막 까지 마낭에서 쏘롱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 내려갈 것인지 갈등할 때 그의 판단은 나에게도 중요했다. 그는 혼자라면 쏘롱라 패스를 강행할 생각이었지만 첫 트레킹에 고산증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동생과 재수씨와 같이 강행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하산을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포터 파샹의 판단이 더 중요했지만 트레킹 베테랑인 그의 판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수고한 파샹을 위해 네팔 막걸리인 '창'을 시켰다. '창'은 곡물로 빗은 술인데 메뉴에는 'Local Beer'라고 나와 있었다. 맥주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막걸리와 술의 색이나 맛이 비슷했다. 아내와 나도 한잔씩 마셨는데 이날은 힘든 여정때문이기도 했지만 상행 때의 긴장감이 사라져서인지 거의 모든 트레커들이 '창'과 '락시'를 주문했다. 파샹은 전문산악인이 꿈이다보니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은 좋아하지만 딱 한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술값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절제하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파샹은 늘 그 한잔을 한모금 한모금 맛을 음미하면서 아끼며 마셨다.

다이닝룸의 온기가 아쉬워 쉬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참을 파샹과 우리가 오늘 얼마나 좋은 결정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되뇌이며 건배를 했다. 힘든 여정을 잘 견뎌낸 아내와 자칭 'Strong Man'인 나 그리고 우리 부부의 길동무가 되어준 파샹은 서로를 치켜세우고 격려하며 또 건배를 했다. 그리고 파샹이 궁금해하는 한국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는 네팔에 대해 이갸기를 나누었다. 파샹은 자신은 부자를, 권력자를 혐오하는 마오주의자라고 고백했다. 나 역시 나의 정치적 입장과 한국의 정치상황, 네팔의 정치상황에 대해 짧은 언어와 식견으로 혼동스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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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기로 한 날이 밝았다. 보통은 안나푸르나 라운드 중 고도적응을 위해 마낭에서 하루를 쉰다고 한다. 우리는 고도적응이 아니라 쏘롱라로 올라갈 건지 말것인지 결정을 위한 대기상태로 마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구하려 방을 나서니 파샹이 잠깐 기다리란다. 파샹은 금방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을 한주전자 구해서 가져왔다. 따뜻한 물이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물을 아껴 아내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다이닝룸에 올라갔다. 어제 하이캠프 등에서 하산했다던 청년들은 아침을 먹고 아쉬운듯 머뭇거리다 호텔을 떠나고 고스란히 상행중인 일행만 다이님룸에 남았다.  

 


피상에서 같이 올라온 트레커들은 우두커니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낼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방에서 지내자니 춥고 할 일도 마땅찮다. 마낭 시내를 돌아다니고 가게도 들러 시간을 보내자니 문을 연 가게도 인적도 드물었다. 서로들 뭘 하고 지낼건지 궁금해 하고, 가이드가 전해오는 주변 지역의 기상과 길 상황에 대한 소식들을 취합하며 오늘 하루 계획과 이후 여정을 결정하기 위해 조금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한가한 아침 나절을 다이닝룸에서 머무는 동안 비관적인 소식이 속속 도착했다. '쏘롱라는 현재까지 내린 눈만으로도 넘을 수가 없을 뿐아니라 날씨가 계속 안좋아 더 많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마라', '마낭에서 한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인 아이스 레이크로 가는 길도 눈이 많이 쌓여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틸리초로 가는 길 역시도 눈에 묻혀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단다. 그나마 강사르까지는 접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라고 했다.


아름다운 강마을 강사르는 이번 여정에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파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과감히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와 간단한 비상식량을 챙기고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강사르 쪽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돌아올테니 파샹은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어라고 권했다, 하지만 결국 파샹도 우리부부만 보내기가 걱정스러웠나보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다른 트레커들도 나름의 여정을 잡거나 아니면 상황파악 겸 산책겸 마을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모두 호텔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낭의 거리는 눈더미에 묻혀있었다. 간혹 추위에 웅크린 주민들과 조우하곤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산중도시인 마낭의 거리치고는 너무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쏘롱라 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을을 관통하자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틸리초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표지를 만났다. 막상 마낭시가지를 벗어나 틸리초쪽으로 방향을 잡고나니 파샹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눈속에 묻혀버린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결국 대여섯번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했지만 틸리초쪽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길을 모른다고 뒤 늦게 고백한 파샹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우리 부부보다 몇십미터 앞서서 둔턱에 올라 길을 살피기도 하면서 용감히 앞서나갔다. 파샹은 길을 찾지 못하고 눈밭을 헤메기 시작했다. 길을 물을 사람을 찾은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이 조금 이어졌지만 오래지않아 다행히 바람에 눈이 쓸려 지나간 길의 자락을 발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강사르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왼편으로 마르샹디 강을 끼고 가파른 절벽을 따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걸으며 눈과 산, 그리고 마르샹디 강이 이룬 환상적인 풍경에 빠져들었다. 마르샹디 강은 상류쪽 협곡에서 내려오는 두줄기의 강이 합쳐져 넓은 수역과 광활한 고수부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른쪽 협곡은 쏘롱라쪽에서 내려오는 줄기고, 왼쪽의 협곡은 틸리초에서 발원하여 강사르를 지나쳐 오는 강이라고 했는데, 이들 두 줄기의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강사르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갑자기 시야에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야생염소의 무리가 들어왔다. 파샹은 이들 야생염소를 Tahr라고 한다며 너무 반가워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가 일정 고도 이상에서 이들 야생염소를 만날 수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라도 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들 야생염소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단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만치 귀한 야생염소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바로 지척에서 무리로 만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염소 무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절벽을 타는 야생염소의 발걸음을 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강쪽으로부터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길을 가로질러 산쪽 언덕으로 뛰어가는 야생염소을 뒤따르자니 그들이 굴리고 간 돌이 내 쪽으로 쏱아져 내려서 더이상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파샹의 말로는 야생염소가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구르는 돌도 있지만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염소가 의도적으로 돌을 굴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단다. 그래도 그들 야생염소의 모습을 그럭저럭 사진에 담아 뿌듯한 마음으로 행운을 현실화할 방도를 생각하며 길을 이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귀국하자마자 로또를 사볼까며 농을 치며 로또가 당첨된 상황을 상상하는 재미에 신이났다.


마르샹디강을 건너 좁고 가파른데다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올랐다. 오른쪽은 강바닥까지 떨어지는 수십미터의 수직 낭떠러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고 계속 전진하자니 감수해야할 위험이 너무 컸다. 마음속에 공포가 자라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파샹이 절벽쪽으로 넘어져 수십미터 낭떠러지를 미끄러내려가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슬라이딩을 하여 파샹이 메고 있는 배낭의 끈을 움켜쥐고 당겨 올렸고, 파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털며 일어섰다.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고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런데 파샹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것이 아닌가? 파샹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이었다고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마라고, 장난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사고로 이어진다고 재차 주장을 했고 파샹은 조금 머슥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을 한뒤 언덕길을 마저 올라 멀리 강사르 마을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강사르 마을은 시야에 들어오는데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을 건너기 전의 길과는 달리 쌓인 눈의 깊이와 길의 여건이 또 달랐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전진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결국 강사르마을과 마르샹디 강, 그리고 산과 강의 조화가 만들어 낸 풍경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더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기로 하고 뒤돌아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낭 거의 다 와서야 강사르를 찾아 길을 나선 한국인 트레커들을 만났다. 길 상황을 전하고 모두 같이 호텔로 돌아왔다.

다이닝룸에 난로를 피우자, 강가푸르나 딸까지 다녀왔다며 독일인 트레커들이 들어섰다. 강가푸르나까지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접근이 가능했단다. 조금있으니 오늘 피상에서 올라왔다는 한국인 남성 트레커 한분이 들어섰다. 그분은 가이드나 포터도 없이 포카라서 부터 트레킹을 시작하셨다는데 베시사하르에 이르기 전에는 마을을 찾기 전에 날이 저물어 노숙까지 하며 강행군을 하셨다고 했다. 한국에서 물리 선생님을 하신다는 그분은 보통 배짱이 아니신 분 같았다. 그분이 한국에서 준비해 오신 누룽지 차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에 구수한 한국 밥의 맛과 향을 기억해 보았다.

늦은 오후 네팔리들이 마을회관 같은데서 영화상영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부부는 난로가를 떠나기 싫어 그냥 다이닝룸에 머물렀고 트레커들은 주변 나들이를 갔다가 속속 도착했다. 눈에 갇혀 내일의 여정을 결정할 수 없는 트레커들과 네팔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마낭에서의 이틀째 밤을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접한 정보와 이날 강사르 쪽으로 접근해왔던 경험을 아울러 최종적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독일인팀도 동생과 제수가 고산증을 보이며 두통에 시달리는 상황때문에 하산을 결정했다. 오늘 도착한 한명의 한국인 트레커만 남기고 같은 호텔에 묵은 모든 트레커가 하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또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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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지어 먹고 살기도 바쁜데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읽기를 외면할 수도 없다.
'협동조합기본법' 통과! 농협은행 탄생! 농어업회의소 추진!
3월 15일 발효예정인 한미 FTA와 MB가 호언하는 한중 FTA를 일단 재쳐두고도 올해 들어 굶직한 농업관련 이슈만 세가지나 된다. 농업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 농업인은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형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어 농민들이 할 수 있는게 뭐가 생겼는지, 농협은행의 탄생이 농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지자체에서 적극 나서 권유하고 있는 '농어업회의소'가 뭐하자는 것인지 거저 어리벙벙할 뿐이다.

궁금한게 많던 차에 때마침 봉화군에서 [농어업회의소]설립을 위한 읍면 순회설명회를 가진다고 했다.  세 가지 중 한가지 이슈만이라도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설명회가 열리는 명호면 사무소를 찾았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주민들이 참석을 했다.

이날 강연자는 정명채 한국농어촌복지 포럼 대표로, '한국농어촌경제연구원'을 이끄셨고 신활력사업,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통합의료보험 등의 영역에서 많은 기여를 해 오신 저명한 선생님이시다. 

이날 강연의 요지는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속에서 '농업'이 핵심적인 위상을 가지며 이에 대한 우리의 생존 전략은 '협치농정'에 의한 '자치농업'의 구축이  유일하고, '농어업회의소'는 이를 위한 필수적인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은 군사력이라는 수단에서 '농업'의 장악을 통한 세계 지배로 변화되어 왔다.

2.  미국은 곡물메이저인 카길과 농식품 유통 메이저인 델몬트, 돌 등의 자본을 통한 세계지배에 나서고 있으며 UR협상에 카킬의 부회장이 대표로 참석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들어나듯 '무역자유화'는 결국 미국 곡물메지저를 통한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에 불과하다.

3. 온두라스의 예를 보면, 델몬트사는 '적지적작' 원리를 내세우며 바나나의 최적지로 온두라스를 지목, 대대적인 바바나 농사를 독려하면서 농자금의 융자, 기술보급, 유통지원을 10여년간 진행했다. 그결과 온두라스 농지의 50% 이상이 바나나 농장으로 전환되었는데, 이후 돌이킬 수 없이 바나나 단일 농업이 온두라스에 정착되자마자 델몬트는 전세계 냉장유통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는 자사의 힘을 배경으로 바나나 수매가를 통한 지배와 통제뿐아니라 다양한 수단을 동원 바나나농장 자체를 모조리 인수하여 온두라스 농업을 송두리채 수용하고 그 나라 농민을 농업 노동자로 전략시켰다. 이런 식으로 전세계 바나나 유통의 70% 이상을 장악했고 그 지배 구조는 공고화되어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다.

4.  GATT, UR, FTA 등조차 결국은 미국 자본의 이해에 따른 세계 지배전략일 뿐이다. 하지만 국제적 역관계에서 이를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5. 한국기업의 국제적 유통망 사업을 위한 컴소시엄이 시도되었지만 카길의 압력으로 거의 100% 카길의 원료를 공급받아 가공하는 국내 식품대기업이 참여를 포기 이사업 자체가 무산되었다.

6. 당진에 카길 자본에 의한 대규모 식용유 회사가 설립중인데 이는 단순한 식용유 공장이 아니라 한국 농업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전진기지다. 이들은 전통식품인 간장, 고추장, 된장 등의 시장 까지 다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나아가 전통장류뿐 아니라 한국 농업 전체를 장악하고, 국가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

7.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도 60%이상의 주식을 소유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반영한다. 출자배당을 통한 국부유출이 심각하고, 재벌을 이를 벌충하기 위해 중소업 고유 영역까지 침범해서 부의 수탈에 나서고 있다. 

8.  이들 모든 변화에 대응해서 우리 농업 농촌을 지키기 위한 자치 조직이 필요하다. 농어업회의소가 바로 그 답니다. 농어업회의소는 국제규약, 국제법인 UR등의 지배나 간섭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9. 독일의 경우 농업회의소가 독일 농업을 지키는 첨병으로 쿼터제(경작허가제) 등을 통한 생산량조절, 농자금, 농지, 농업정책 전반에 대해 실제적인 자율적 자치농업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 프랑스 등도 동일한 예로 들 수 있다.

10. 결국 그들 선진국의 선례에서 보듯 농업회의소는 자본의 지배로 부터 농업을 지키기위한 '자치농정'의 구현을 위한 수단으로 수립되었다.

11. 한국도 헌법 123조 5항 '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해야한다.'는 조항을 가지고 있고 헌법적 보장위에서 자치농업을 위한 농어업회의소를 수립해야한다.

12. 농어업회의소는 먼저 '법'을 제정하여 농업과 농업인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정책 결정, 국가간 협상, 예산 결정 등에 농어업회의소의 의결을 전제하도록 해야한다. 진작 그랬다면 한미FTA는 부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13.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협동조합화로 외국 자본의 침탈로 부터 우리 산업을 지켜낼 수 있겠지만 우선은 농식품 생산, 유통, 가공 분야를 협동조합화하여 대자본 침탈을 저지해야하고 이를 위해 농업인회의소가 나서서 농업 고유 영역으로 법제화해야한다. 


강연자인 정명채 선생님은 참 하실 말씀이 많으신 분 같았다. 장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고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모자라 질의 응답도 없이 서둘러 다음 일정을 진행해야했다. 이번 설명회에서 그 점은 참으로 아쉬웠다. 

내용적으로 본다면 이분 강연의 결론은 농업회의소라는 자치 조직을 통해 UR, 한미FTA의 파고를 이겨내고 우리 농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씀하신 거의 대부분 내용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이분이 제시한 최종적인 제안에 대해서는 솔직히 충분히 수긍하긴 힘든 면이 있었다.

농어업회의소의 필요성을 피력하기 위해 미국자본의 횡포, 한국 재벌의 탐욕에 대해 충분히 인식을 같이함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대응에서는 100%공감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반농업 친재벌, 친미 정권인 현 정부가 한국 농업을 거들낼 결정들을 다 하고 난 뒤에 '한국 농업 큰일 났다'고 외치며 농어업회의소를 건립하여 자치농정을 이룩하고 이를 통해 한국 농업을 지켜내자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사실 모든 정책을 바로 정권차원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것은 피해야하고 따라서 농어업회의소 추진자체를 MB의 음모로 격하시키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하지만 몇가지는 석연잖은 점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농민회 등 농민 단체들이 비록 단일한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는 인식은 문제가 있고, 또 농민단체의 협의체는 법외 임의 단체라서 '농업자치'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오직 '농어업회의소'만이 헌법에 보장된 농민 자조 조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원론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사변에 불과하지만 다음의 의문은 게속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자본주의사회구성을 지향하지 않더라도 탈 UR 아니면 최소한 내수 중심의 국가 경제 비젼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할까? 미국자본의 세계 지배 전략을 거부하면 우리도 북한 같은 인민이 굶어죽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까? 한미 FTA가 한국 재벌의 이해를 반영하고, 한국 재벌을 미국 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미 FTA를 기정사실화하는 인식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MB정권 교체후에 한미FTA 파기를 위한 준비를 미리부터 해 나가야 하는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날 농업업회의소 가입원서를 제출했다. 농업업회의소가 농업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꽤 유력한 수단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라져 있는 농업인 조직, 조직화되지 않는 농업인을 묶을 수 있는 조직적 대안으로 농어업회의소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를 빈다.

강연자 정명채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 하셨다.
"깨어있는 농민의 조직이 한국 농업농촌의 마지막 보루다!"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이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그래서 의견을 달리함에도 인간적 호감, 진정성에 대한 공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같다. 
 
강연을 통해 처음 뵌 분이지만 정명채 선생님은 소탈하시면서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분으로 느껴졌고, 진정성있는 한국 농업 농촌의 우군임에 분명해 보였다. 그런 분의 강연을 직접 듣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어 참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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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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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회는 2월 27일 봉화장날 봉화읍 농협 봉화군지부앞에서 집회를 시작해,
2월 29일 춘양장날에는 춘양농협앞에서,
그리고 오늘 3월 2일은 봉화군청앞에서 3차 집회를 열었다.

이번 집회는 지난 16년간 비료제조업체들의 담합으로 농가가 짊어져야했던 1조 6천억원을
그 부담자인 농민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 1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에 따라
길게는 16년간 비료값 담합으로 취한 부당이익에 대해
828억원의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그로인해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했던 농민에게는 아무런
배상책이 나오질 않고 있다.

이에 전국 농민회는 소송인단을 구성하여
농민들이 부당하게 부담해야했던 비료값을 돌려받기위한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이를 국민에게 알리고 더불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진 한국 농업 농촌에 마지막 치명타가 될
한미 FTA에 반대하는 농민의 뜻을 결집하기 위해 집회를 열게 되었다.

또한 작년 이상기후로 인해 폐농되다시피한
농가들을 살리기 위한 대책을  경상북도 도지사에게 요구했지만 
고작 200억의 예산으로 한 농가당 200만을 연리 3%로로
1년간 융자해 주는 것으로 생색을 내고 있다.
그것도 200만원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포함한 온갖 서류를 요구해
사실상 아무도 융자를 신청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봉화군 농민회는 피해금액을 800만원으로 현실화하고
상환기간을 연장하고, 서류도 간소화해
실제적으로 피해농가가 이 기금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추가 요구안을
집회를 마무리하면서 봉화군과 경상북도에 제출했다.

우수도 지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준비해야하는 시점에
바쁜 일손을 멈추고 집회를 여는 농민들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치미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춘양장날 집회에는 장을 보러 나오신 농민들께서
모두 쉰명이 넘게  농민소송인단에 가입원서를 내고 1만원이라는 참가비용을 
내 주시는 걸 보고 힘이났지만
우리 농민형제들이 늘상 밭이 아니라 이렇게 거리로 나서야되는
우리의 농촌 현실이 참으로 원통했다.

하지만 재벌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미끼로 던져지는 한국 농업, 한국 농촌의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하시는 농민회 동지들의 
희생적이고 실천적인 삶이 있는한 아직 한국농촌에는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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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아내 류준화가 "인생이여 고마워요"展에 참여하고,
이 전시와 관련해 남편인 나와 지인인 안상학 시인이 작가 관련 글을 쓴 관계로
3명이 대전까지 전시오픈에 참가하기 위해 동행하게 되었다.

봉화를 출발하는 날 아침은 새벽부터 분주를 떨어야 했다.
산골에 살다보면  한번 도시로 나가는 일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게 된다. 
집을 비우기 위한 준비도 만만치 않지만
그동안 밀쳐 두었던 온갖 잡사를 다 처치해야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택배 보낼 농산물 두 박스부터 포장을 하고, 
가는 길에 안동 장모님한테 들러 드릴 김치와 감자를 챙기고,

3일동안 굶어 죽지 않도록 초롱이 사료도 듬뿍 주고,
화목 보일러도 둘러보고, 그리고 혹시 어디 문이 열려 있지나 않은지, 
동파위험은 없는지 살펴야하는 곳도 여러 곳이다.
또 하필 이날 농협 농자금 배당을 위한 마을 회의란다.
앞집 형님에게 달려가 여유가 된다면 최대한 많이
배정을 좀 해줍시사 부탁을 드리고,
대전 전시 오픈에 참가한뒤
다음 날 명절 때 가지 못한 고향 진해에 들를 계획이다보니

따로 챙겨야하는 짐들도 챙겼다.

다행히 서둔 탓에 출발은 늦지않게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농협에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이 조합원 대학생 자녀에게 주는
장학금 100만원의 신청 마감일이란다.

마을에 다른 신청자가 있어 올해 타는 걸 포기했는데 
지역에 학생이 줄어 여분이 생겼다고 급히 신청하란다. 
고맙게도 소소한 일까지 챙겨주신 지소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여유도 없이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면사무소를 들러 아이 학자금 관련해서 서류를 떼고
다시 그것을 들고 농협에 가서 처리를 하는데 이게 순탄하질 않다. 
필요한 서류가 늘어나고 결국 서울있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등록금 고지서를 보내라고 농협 팩스번호를 알려주는 것으로 일단 농협 일은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체국에 들러 택배를 발송하고
영주로 내달렸다.

영주에서는 아내의 은행 일이 기다리고 있다.
불필요해진 통장과 카드를 해지하고 
카드로 자동결제되던 보험 등의 결제 계좌를 옮기는 일인데
급하진 않지만 집 나온 김에 처리해 버릴 요랑이었다.

은행일이 끝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안상학 시인을 만나기 위해
안동으로 내달리면서야 카드 해지를 깜빡했다는 사실이 생각났지만
어쩔 수 없다.

안동에서는 안시인과 대전으로 떠나기 전에
장모님한테 들러 감자와 김치를 전해드리기로 했는데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안시인이 미리 주문까지 해둔 식당에 들러
안동국시를 한그릇씩 하고 나니
감자며 김치는 안시인 몫으로 내려놓고 
바로 대전으로 향해야만할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대전으로 달리는 내내 안시인과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길 나누다보니
예정보다 자꾸 시간이 늦어져 조금은 초조했지만
그래도 운전이 전혀 지루하질 않다.
아내 덕에 안시인을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었는데

처음으로 한 차를 같이 타고 객지로 여행을 하게 된 셈이다.

몇번을 길을 잘못들어 지체한 뒤에 급히 도착한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타는
보기 드문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참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전에 대전 농산물검사소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시립미술관 창작센타 이름으로 미술관의 별관처럼 사용하는 건물이란다.

대전시립미술관 송미경 큐레이터가 기획한
[인생이여 고마워요]전은 
작품과 작가의 삶을 동시에 대중에게 내보이는
보통의 전시와는 다른 특별한 전시였다. 
주로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살면서
더불어 사는 삶을 모색하는 작가들인 
류준화, 이진경, 박석신 등 5명의 작가가 작품을 걸고,
또 각각의 작가마다 2명의 지인들이 작가에 대한 글을 쓰고 
그것을 '잡지' 형태의 책으로 묶었단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집어든 도록이 참 재미있다.

기획의 특수성 때문인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 작가마다 동행한 지인들만해도 적지가 않았고 
그럭저럭 관객도 많아 보였다.
특히나 성광명 작가와 동행한 지리산학교 중심의 인사들이 엄청났다.
전시장을 제대로 둘러 보기도 전에  
얼떨결에 대전 MBC에서 나온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고는
송미경 선생님,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그리고 다른 작가의 동행인인 박남준 시인 등과도 인사도 나누다 보니 
전시 오픈 행사를 알렸다.

송미경선생님의 사회로 대전시의회의장의 인사,
그리고 대전시립미술관 관장님이 외유중이어서
김준기 선생님의 환영사로 이어지다가
5명의 작가, 그리고 안상학을 비롯한 시인들의 인사로
식이 끝나고 간단하지 않은 오픈 음식을 먹고는 바로
저녁식사 자리로 옮겼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하루밤 신세를 지기로 한
참여작가 정순자님의 소여공방으로 향했다.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방을
막무가내 휘저으며 서른명이 넘는 전시관계자분과 그 지인들이 엉켜
밤이 늦도록 술과 노래, 환담을 나누며 
하루 낮을 정리하고 하루 밤을 향유했다.
좋은 분들 많이 만나 즐겁고,
농사꾼인 나의 일상과 사뭇 다른 세상속에서 보내게 되어
무척이나 환상적이었던 하루였다.  

전시 타이틀인 [인생이여 고마워요]는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가 노래로 불러 더 유명해진
시인이자 가수였던 비올레타 파라가 쓰고 부른 노래란다.
비올레타 파라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자살하는 그 순간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고마워했는지 궁금하다.
삶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긴 순간 그녀 자신의 주어진 삶을 스스로
마무리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생이여 고마워요]전은 역설적 의미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인생의 고마움을 체득하고 작업에 그 고마움을 녹여내는 작가를 모아
그들의 고마운 삶과 그 삶을 담은 작품을 동시에 전시하는 
특별한 기획전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대전시립미술관 송미경 학예사님, 김준기 학예연구실장님, 
작가의 작업장 까지 전국을 누비며 사진을 찍어주신 김완모 사진작가님,
그리고 아내에게 글을 주고 전시 타이틀을 적어준
안상학시인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개 요

전시기간 : 2012. 2.24~5.20(87 일)

전시장소 : 창작센터 전시실

전시내용 : 5작가 30(회화, 공예, 설치, 영상, 사진, )

참여예상작가 : 류준화(서양화, 경북봉화), 박석신(한국화, 대전),

성광명(공예, 경남하동), 이진경(서양화, 경기 파주)

정순자(공예, 충남 공주)

추진계획

진정성을 품고 있는 작가들의 삶이 담겨 있는 전시 개최

- 휴먼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 본성의 한 단면인 위로와 위안을 제공코자 함.

작가의 삶에 주목,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형 전시로 연출

- 작품을 통한 작가적 접근 방식에서 작가의 삶을 통한 작품에의 접근방법으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소통구조를 제시코자 함.

일반인에게 친밀성과 동질성이 만나는 지점을 제공

- 다소 난해한 현대미술의 관람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신의 삶의 한 부분과 맞다는 지점이 제공되는 리얼리티 전시를 개최코자 함.

특이사항

전시구성

- 삶의 이야기와 모습들, 작품들을 함께 전시한다.

- 이번 전시에 수록 된 작가글들을 전시장에 배치한다.

이번 전시는 평론가의 글이 아니라 주변에 함께 살고 있는 지인들의 작가관련 글을 싣는다.

- 성광명작가 (신희지(잡지 <차와 문화> 기자), 이원규(시인, 지리산 거주), 박남준(시인, 지리산 거주)

- 류준화작가 (송성일(농부, 남편, 봉화거주), 안상학(시인, 안동거주)

- 정순자작가 (김정홍(소설가, 서울거주), 이기웅(한의사, 논산거주)

- 박석신작가 (최서연(방송작가, 서울거주), 송인걸(기자, 대전거주)

전시기간 중 이벤트 행사

- 성광명과 지리산 사람들

공지영의 책 <지리산의 행복학교>에 나오는 버들치 시인, 낙장불입시인, RPM 여사등이 함께하여 지리산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며, 자체 결성된 동네밴드의 공연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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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피자를 먹고 830 마르샹디 만다라 호텔을 출발했다. 마을이 아침 추위에 얼어붙어 있는 시간, 멀리 산정은 눈부신 햇살로 깨어나고 있었다. 차메를 벗어나면서 아내와 그리고 다시 퍄상과 기념 사진을 찍고 눈 쌓인 침엽수 숲길로 접어 들었다. 눈다운 눈이 쌓여있는 지대로 접어드니 길을 걷는 느낌이 색다르다. 고개는 자꾸 아래로 향한다. 쌓인 눈을 보고,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깍아 만든 조랑말 길을 걸었다. 다시 숲을 만나니 '설국' '닥터지바고'의 장면들이 뜬금없이 기억났다. 숲 속에서 만난 눈은 마당이나 길에서 만나던 눈과 기억을 되살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달랐다. 그냥 이렇게 눈 덮인 숲 속을 하루 종일 헤매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점심을 브라탕에서 먹고 오후 일찍 처음으로 3,000m이상 고산지대 마을인 피상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여정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기만 한다면 여행의 묘미는 반감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을 먹기로 한 브라탕에는 영업을 하고 있는 롯지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마을에는 한 명의 주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폭설에 영업은 고사하고 자신이 먹을 양식을 조달 받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일 것이다. 겨울 한철 산을 내려와 배를 채우고 체온을 보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겨울을 나기에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집을 떠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 없는 생존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겨울 비수기... 생존마저 쉽지 않은 주민들은 아이를 앞세우고 최소한의 살림만 챙겨 하산을 한다. 마을은 비고 혹 지나는 트레커만 마을에 인기척을 남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네팔리들이 떠난 자리에 왜 문명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호사로운 트레커들이 발길을 디미는지...

 


브라탕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계획은 깨어지고 다시 길을 걸었다. 파샹은 하산중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선 다음 마을인 디쿠르 포카리에 문은 연 롯지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브라탕에 도착할 때는 고프지도 않던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고, 괜히 조갑증이 들었지만 다행히 디쿠르 포카리까지 가는 길은 완만하고 그리 길지 않았다. 오후 1가 조금 넘어 디쿠르 포카리에 도착했다. 디쿠르 포카리에서 먹은 식사는 최악이었다. 식재료가 넉넉하지도 않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트레커들에게 충분한 질의 음식을 서비스할 이유도 없었는가 보다. 달밧의 밥은 식은 밥을 다시 뎁힌 것이 분명해 보였고, 따라 나오는 찬들도 부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가 고팠다는 사실이지만 결국 다시 길을 떠나는 즈음에 포터들이 롯지 주인에게 항의하는 사단이 났다. 거기다가 메뉴에다가 스티커로 붙여 올린 가격을 적어놓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고, 먼저 출발한 우리에게 뒤에 출발해 다시 만난 트렉커들이 알려주었다. 어차피 한번 스쳐 지나가는 길인데 우리는 실망할 것도 서운한 것도 없었지만 늘상 다녀야 되는 포터들에겐 롯지의 그런 처사가 참기 어려웠나 보다.



불불레서부터 차메까지는 다른 동행 없이 우리부부만 걸었는데, 오늘 처음 차메에서 만난 트레커들과 동행이 되었다. 특수학교 선생님이신 학국인 여성분, 인도에서 왔다는 한국 청년, 제주에서 왔다는 한국 여학생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벗이 되었고, 차메의 롯지에서 만난 호주인과 이번 여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났던 독인인들도 그룹이 되어 조금은 위험해져 가는 눈길을 같이 걸었다. 혹시라도 시야에서 멀어지면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되고, 앞서가다 쉬고 있을 때 도착하기라도 하면 서로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관계만으로도 여정의 피로가 줄고 낯설고 깊은 숲이 주는 무서움도 잊을 수 있었다.


디쿠르 포카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후 3 30, 목적지인 피상에 도착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3,000m 고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피상은 Upper Pisang Low Pisang으로 나누어져 있는 제법 큰 마을인데 동행 중 한 분만 Upper Pisang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모두는 Low Pisang Tilicho Hotel에 짐을 풀었다. 듣기로는 오래 전부터 적기가 휘날리고 있었다는 겨울 피상은 인적마저 드물어 활기라곤 없었다. 멀리 Upper Pisang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일찍 짐을 푼 한국 청년은 Upper Pisang까지 산책을 다녀와서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추위에 쫒겨 가까운 마을 길만 잠깐 산책하고 돌아왔다. 내려다보는 마을 풍광이 아름답다고는 했지만 올려다보는 마을풍경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데 풀이 돋고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계절이 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생각하니 언제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바깥 추위를 듬뿍 안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롯지 주인은 다이닝 룸에 막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차메서 부터 롯지에 난로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고도가 높아지는 그만치 추워지고 또 트레커의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이닝 룸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서먹한 사람들과 하나의 난로를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았다. 호주인 3, 독일인 3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둘러앉았다. 한국인 사이에는 벌써 서먹함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외국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호주인 3명은 부자 지간이라고 했다. 1995년에 왔던 트레킹의 기억을 아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장성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았단다. 독인인은 두 형제와 아우의 아내 사이인데, 형은 이번이 9번째 네팔 여행이라고 했다. 동생과 제수씨는 첫 안나푸르나 여행인데 형의 권유로 동행하게 되었단다.


각자의 여행 동기는 다르겠지만 롯지의 난로가에 앉아 있는 서양인 트레커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책을 들었다는 것! 독인인 세분도 책을 읽고 있었지만 호주인 부자는 조금 색달랐다. 호주인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네리나]를 읽고 있었다. 두꺼운 책인데, 바로 그 책을 15여년 전 네팔 여행 때 들고 다니며 읽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확인이라도 하시듯 호주인 아버지는 책갈피에서 그때 받았던 영수증 하나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엄마에게 내보일 때보다도 더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 뒤에 지난 세월 동안 쌓았을, 인생의 애환을 얼마나 많이 감추고 있을까?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동행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세월 동안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 세월을 되돌아 보는 그의 마음에는 어떤 서정이 물들고 있을까? 모든 게 궁금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큰아들은 [Empire: How Britain Made the Modern World]를 읽고 있었다. 제목만 들어도 골치가 찌근거리는 책을 트레킹의 동반자로 선택한 그의 취향이 유별나 보였다. 여행 때는 평소에 읽히지 않던 두꺼운 책을 들고 떠나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땐 그냥 우스개 소리로만 여겼는데 진짜 그는 그런 신조를 받드는 사람을 만난 셈이었다. 그리고 아우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 좋았다.


난로가에 둘러앉아 모두 책을 읽고 있는 사이 이번 여정에 같이했다 티망에서 버린 [바가바드 기타]를 아쉬워 하며 나는 대책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의 상념은 종횡무진 흐트러지고, 의식의 시간조차 무너졌다. 모든 기억의 직선과 곡선이 자신의 고도를 잃고 엉켜버렸다. 오직 책과 연관된 기억의 타래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공부에 완전히 흥을 잃고 밤새 읽던 책들, 결국 학교생활을 접고 방구석에 처박혀 읽어대던 책들, 그리고 정말 책을 읽어야 했던 대학시절 나태한 생활 속에서 간간히 잡았던 책들이 기억나면서 그 책들을 통해 접한 세상의 이야기들, 그 책을 통해 만들어나갔던 내 인생의 꿈들, 삶의 의미들을 반추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 시절, 책이 열었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어른의 눈으로 꼭 다시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세월에 침식된 기억은 다시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마저 깡그리 잊어 버렸다. 누구나 한번쯤 읽고 던져버렸을 [이방인]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고 있는 사람과 마주앉아 나는 그 책을 읽던 소년의 눈에 세상을 다시 둘러본다. 이제는 책과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세상에는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핑계를 얻었다. 하지만 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조차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늘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인식의 목마름은 회피할 수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을 끌어가는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나의 사는 방식, 나의 세상에 대한 처신을 뒤돌아본다.



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이란다, 물론 한시적이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 멀리 있는 를 바라다 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시간 속에서 남은 상처, 편견, 편향, 나쁜 기억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여행기간 동안만이라도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간 자유로운가 스스로 묻는다. 낯선 길, 낯선 마을,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의 취향과 다른 음식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잠시 잠깐 잊혀지는 익숙한 일상은 늘 나의 뇌리를 따라다닌다. 그나마 한정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나의 익술한 삶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준 환희의 기억을 가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집 떠나온지 9, 안나푸르나를 걷기 시작한지 6일이다. 이제 서서히 안나푸르나의 모든 것에 익숙해 지고 있다.


호사로운 여정이다. 포터 퍄상의 극진한 서비스와 걷고, 먹고, 놀고, 자는 하루의 일과가 길을 따라 이어진다. 벌써 6일째. 아직 이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많다. 이제 쉰! 아직 네 인생에 주어진 시간도 많다. 이번 여행의 기회를 준 모든 사람, 모든 운명에 감사한다. 그리고 응당 세상을 향해 그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이지만, 우선은 나의 여정이 나의 아내, 나의 포터 그리고 숱하게 만난 트레커와 내가 거쳐 지나간 모든 마을, 모든 롯지의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 작은 기쁨, 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같은 생명으로서의 연대감, 연민 같은 것이 남았으면 좋겠다. 관광객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뒹구는 맥주 캔, 과자봉지, 담배꽁초, 그리고 무시당했다는 불쾌감, 욕망의 자극, 부러움이나 열등감, 시기심... 그런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를 네팔리의 신, 티벳탄의 신들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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