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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보통 추위가 아니었나보다. 일어나 물병을 찾아 컵에 물을 부으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물병을 때리자 얼음가루가 컵안으로 쏱아진다. 방에 난방이 따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망에서부터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확실히 3,000m가 넘는 고지인 피상은 추위가 확연히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4천, 5천 고지로 올라가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 걱정이다. 어제 만난 하산 트렉커들은 견디기 힘들만치 추웠다고들 호들갑을 떨었다. 마낭이 영하 20도 정도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도 겨울아침이면 영하20도정도씩 자주 내려가니깐 못견딜 정도는 아니겠구나 안도가 되었다.
 


아침으로 삶은 감자와 애플팬케익을 먹고 8시 45분 Tilicho Hotel을 나섰다. 어제 추위에 쫒기며 대충 둘러봤던 마을을 다시 한번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자 작은 강을 건너고 오른쪽으로는 Upper Pisang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마낭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탑이 하나 있다. 무슨 탑인지 멀리서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 한국인 위령탑이 아닌가. 찬찬히 읽어 보니 1989년 9월 나와 동갑내기 산악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라면 내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과 학문, 그리고 또 다른 인생길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헤메다가 다시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가 아니던가? 그 시퍼런 청춘에 그분들은 이곳 낯선땅 안나푸르나의 눈속에 잠이 드신 것이다. 대학원 진학이라고는 하지만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고싶은 삶은 살 용기는 부족하여 단지 결정을 유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 분들은 이곳 피상의 설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축복하며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시절 그 나이 때는 보통사람이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주어져 이곳 안나푸르나를 밟았다면 나의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게 주어진 우주는 좁았고, 눈은 어두웠고, 심장은 약해빠졌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나이만 먹어 온 나의 긴 삶과 청춘을 불살라 그렇게 낯선 설산에서 생을 마감한 그 분들의 짧은 삶이 대비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간이나 걸었을까? 멀리 비행장이 있다는 홈데가 보이는 언덕엘 올라섰다. 나로다라 언덕이란다. 전망대가 있고 홈데와 홈데 넘어 안나푸르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다. 배낭을 벗고 한참을 쉬며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억지로 줄이고 있던 담배를 한대 피웠다. 삶의 곡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가다가 이렇게 한번씩이라도 전망이 확 터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는 얼토당토 안한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망이야 그 자리에 그냥 만들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나가야하는 걸, 내가 게을러서, 그리고 소심한 탓에 지금 답답한 삶을 살고 있는걸 누구탓을 하겠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길은 눈속에 파묻히고 온데 간데 사라졌지만, 눈 속에 숨은 길을 찾아 네팔리들이 내놓은 발자국을 따라 끝없이 걷었다.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잠시 쉴 때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탄하면서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내 풍경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시야는 앞사람의 발자국만 쫒아 기계적인 걸음에 내몰였다. 풍경에 빠져들기엔 발길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오후 1시나 되어서야 홈데에 도착했다. Maya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온다. 우선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뒤쳐진 제주 여학생이 감감 무소식이다. 눈구덩이에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추위에 쫒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롯지의 부엌에 몰려든다. 좁은 부엌이 조리에 불편할 만치 사람들이 들어서자 가이드 한분이 남자들은 다이닝룸으로 나가달란다. 와이프와 학국인 여선생님은 부엌에 남아 롯지 주인의 아이들과 놀아준다. 역시 특수학교 선생님 이셨어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네팔 아이들 조차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식사가 끝나가자 아이들이 다가와 'pen'을 요구했다. 아내가 가방에서 한개를 꺼내 주자, 자기 언니 것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를 주고 나니 우리가 쓸 게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체크포스트에 들러 체크를 하고 홈데 비행장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라도 쏘롱라 패스가 불가능해질 경우 비행기로라도 이동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갈밭 활주로에 소형비행기를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비행기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단다. 역시 활주로는 두터운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혹시라도 지금 비행기가 온다고해도 활주로에 눈을 치우는데만 몇일은 족히 걸릴 것같다. 소형 비행장에 짧은 활주로지만 장비라고는 하나도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 눈을 치워야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하산 하게 될 경우 홈데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대안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뭉지와 브라카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도 없다. 미리 카투만두에서 듣고서 기대했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모조리 휴업중이었다. 오래 실망하고 할 것도 없이 군침만 삼키고는 그냥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눈만보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예상보다 눈이 깊어 시간이 지체되어 날이 저물기 전에 마낭에 도착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홈데를 떠난 뒤로는 빨리 마낭에 도착하는 목적말고는 아무생각없이 발을 내디뎠던것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에 자리한 마낭을 들어설 때는 산그늘이 짙어 저녁 어스름으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나마 어둠이 길을 삼키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마낭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또 사람의 활기가 사라진 마을을 구경할 흥도 나지 않았다.


지난 몇일 알고보면 파샹이 늘상 이용하고 안면이 있는 롯지에서 묵게 되었지만 파샹은 꼭 마지막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내가 롯지의 선택권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꼭 롯지를 선택하기 전에 나의 의사를 물었는데 사실 '이러러저러해서 이 롯지가 좋고 저 롯지는 좋지 않다. 어떤 롯지를 선택하겟는가?'는 식으로 물어오니 솔직히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OK! This is good!' 한 마디는 단지 파샹을 존중하는 제스추어불과했다. 특별히 고집할 이유가 없는한 가이드나 포터가 선택하는 롯지에 대부분 머무는가보다. 우리도 그랬고, 다른 팀들도 다 그랬는데, 오직 한명만 다른 롯지로 향했다. 그분의 포터가 원하는 단골롯지로 향한것 같다, 우리는 'Yeti Hotel'을 들어섰다.


마당은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만 남기고 모조리 누구덩이다. 사람이 사는지, 영업은 하는지 온기라곤 없고 인기척도 없다. 파샹이 윗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룸번호를 알려주며 키를 준다. 키를 들고 가까스레 찾은 방에 짐을 부리고, 이틀밤을 지낼 곳이라서 빨래를 맡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 세탁소는 많았지만 문을 연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네팔리 말로는 주인이 카트만두로 겨울을 나러 갔단다 . '그래, 이 와중에 왠 빨래는... ' 쉽게 포기하고 롯지로 돌아와 양말이라도 빨 요랑이었지만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맨 위층인 4층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겉에서 보기엔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의아했었는데 그동안 트렉커들이 몰려왔나보다. 호주 등에서 왔다는 20세전후의 예닐곱명의 젊은이들로 다이닝룸이 왁작지걸 소란스럽다. 같은 일행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쏘롱패디나 하이캠프 등에서 이삼일씩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쏘롱라를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왔단다. 어디 미개척지를 정복이라도 하고 온양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의 열기로 다이닝 룸이 후끈거렸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까지 부르며 차가운 안나푸르나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적이 드문 산중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 만치 반가운 일이 없지만 올라가기위해 마낭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중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썩반갑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올라 갈 것인가 되돌아 내려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셈이다. 파샹은 계속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놓으며 설사 쏘롱라를 통과한다고 해도 묵디나트, 까그베니까지 완전히 빙판이라서 위험하기 이를데 없단다. 솔직히 같이한 몇일사이 파샹은 항상 짧은 하루의 목표치, 그리고 느린 일정을 제안했다. 가이드가 편안한 일정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혹시라도 위험이 따르는 시도는 피하고자하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하지만 파샹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다보면 트렉킹이 그야말로 관광투어가 되어버릴 것이 붐명했다. 판단을 마낭에서 지내는 이틀동안 천천히 상황파악을 더 하고 내리자고 미루었지만 사실 나 역시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한고비를 넘기고 다음 일정을 확정한 청년들은 홀가분함때문인지 계속 들떠 있었고 시끄럽기까지 했다. 상행인 트레커들은 나이도 나이였지만 몸도 그만치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또 아직 쏘롱라 패스를 포기할 것인지 시도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의 긴장감 때문인지 난로가에 둘러앉아 묵묵히 불만 쬐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상행인 일행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저녁을 주문했는데 그때 먼저 주문한 청년들이 음식이 나왔다. 돌접시 위에서 계속 지글거리며 맛난 향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음식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인 야크스테이크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거의 동시에 모두 '주문 취소'를 외치고는 주문을 다시 하겠다고 나섰다. 800루피면 비싼편에 드는 다른 음식값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지만 강행군을 한 이날 하루는 그래도 다들 그 정도의 저녁 식사비가 아깝지 않은 눈치였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와 이날 최고의 음식으로 고단한 육신을 위로하고 따뜻한 다이님룸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화장실은 물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는 화장실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은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바람역시 거세져 약한 외창을 부서져라 흔들어댔지만 곤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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