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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여행에 앞서 같은 시리즈인 [후쿠오카]편과 함께 구입했다. 후쿠오카편에 실망한 만치 그 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후인벳부편에도 당연히 실망했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 보는 것이 맞겠지만 적어도 이런류의 여행안내서는 좀더 다양하고 풍부한 컨텐츠를 다루어주어 다양한 독자에게 고루 만족을 주어야할것으로 생각된다.
 
규슈여행관련 책에서 유후인에 대한 여행 정보를 다루고 있긴하지만 유후인 여행시 휴대할 목적으로 콤펙트한 여행안내서를 구할려고 했고 검색에서 유일하게 잡혔던 책이었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이 책을 구입했다.

너무 야박한 평을 하게 되어 가슴아프지만, [후쿠오카]편과 거의 중복된 '여행코디네이트'도 불만스러웠고 작은 책에 산만하게 들어가 있는 사진 정보는 너무 지나쳤다싶은 만치 많았다. 진짜 여행과정 내내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볍고 알찬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휴대용 영행안내서를 원했었는데 책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인터넷상에서만 확인하고 구입한 나의 불찰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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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일본여행에 앞서 사전정보가 아무것도 없이 떠났던 첫여행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열심히 책도 사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그리고 죄종단계에서 집을 떠나기 몇일전 휴대용 여행안내서가 필요할듯해서 이 책을 구입했다.

결론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특히 후쿠오카 여행의 목적이 먹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조금은 심하다 싶을 만치 쇼핑정보와 업소정보뿐이다.

사실 쇼핑정보는 공항 등에 비치된 홍보지만 보아도 충분하고, 그리고 대부분의 소소한 정보들은 인터넷에 늘려있다. 그래도 굳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이유는 '책'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때문일 것이다.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시켜놓아 한눈에 원하는 정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가벼운 휴대용 여행안내서일망정 홍보지 이상의 깊이있는 정보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 덧붙이면, 감성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본문 편집디자인이 전혀 가독성을 고려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책을 충분히 알아보고 사야하는데 이번 경우는 실패한 선택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만족할 수 없었고, 짐이 될 것 같아 여행을 떠나면서 가져가지도 않게 되었다. 모든 면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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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족 일본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래도 결혼 20주년 기념여행이라는 기분을 나게 하는 이벤트를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료칸이었다. 이전에 가족이랑 떨어져  혼자서 단체연수로 규슈여행을 갔을 때 이런저런 대중(?) 료칸같은데서 몇밤을 지낸 적이 있었고, 그때 료칸의 멋에 반해 오랫동안 가족만의 여행을 꿈꿔왔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전체 5박의 일정중 1박을 선상에서 하고, 3박을 값싼 비즈니스 호텔을 이용한다고 해도 적어도 하루만은 료칸에서 하룻밤의 사치를 향휴하는 것으로 잡았다.

하지만 료칸은 비용이 만만치가 않고, 서비스가 천태만상이어서 선택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단 지역은 처와 딸을 동반한 여행이니만치 쿠로가와나 고코노에보다는 일본 여성들이 최고로 좋아한다는 유후인으로  정했다. 그렇지만 유후인만 해도 100여개의 료칸이 성업중이다보니 최종 결정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일단은 가격도 싸면서 독립된 노천탕도 있는 중급정도의 료칸 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유데이 코우노쿠라]다.

코우노쿠라는 유후인 역에서 좀 거리가 되었지만 다행히 료칸측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차량을 보내준다고해서 미리 송영예약까지 한뒤 출국을 했다. 아침에 하카다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터미날로 이동하여 '유후인고'라는 고속버스를 이용 점심무렵에 유후인에 도착했다. 역앞에 있는 가게의 코인락커에 가방을 넣어두고  유후인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오후 5시가 다가오자  약속장소인 유후인 역앞엘 나갔다.  역시 일본답게도 정확한 시간에 송영승합차가 도착했다. 밝게 웃는 젊은 여성분이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 유후인 외곽을 삥 둘러 10여분만에 코우노쿠라에 도착했다. 

코우노쿠라는 벌써 여러번 료칸예약사이트를 통하거나, 블로그를 뒤져 친숙해져 있었다. 차가 도착하자 마당까지 쫒아나온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환영을 받으며 물과 나무가 어우려진 일본식 정원을 지나 본관에 들어섰다. 조그마한 로비에 카운터가 있고, 여주인은 간단한 인사 후에 숙박부를 내밀었다. 숙박부를 적고나자 직원은 앞장서서 시설안내를 했다. 로비의 왼쪽은 공동식사처고 오른쪽으로 좁은 복도가 나오고 바로 공용 온천이 았었다. 공용온천 출입구 앞에는 작은 쇼파와 기념품 판매대, 여행 안내 홍보불같은 것이 비치되어 있었고, 공용온천은 남여 탕 입구가 나란이 붙어있었고, 온천을 들어서면 바로 실내탕이고 실내탕에 붙어 노천탕으로 나가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하루밤을 지낼 방은 본관의 현관을 나와 본관의 왼편에 있는 별채의 첫호실이었다. 무릎높이에 있는 열쇠를 열고 들어선 방은 지붕이 높은 다다미방으로 침실과 코다츠가 있는 다실이 붙어있는 형식으로 세식구가 자기에는 공간이 아까울 만치 큰방이었다. 옷장과 이불장은 벽장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이런저런 가구와 도자기 같은 장식품들로 실내가 꾸며져 있었다. 침실방의 한쪽에 미닫이 문을 열자 화장대와 세면시설이 있는 작은 방이 나왔고, 그 방에서 또 다른 문을 열자 그 방은 일본다운 작은 화장실이었다. 앙증맞은 공간에 설치된 세면실과 화장실을 보니 진해에서 일본식건물이었던 이모집과 외삼촌 집에서 숨박꼭질하고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어린시절 놀던 일본식 집들은 모두 목조 2층 건물이었고, 또 구석구석 작은 공간들이 많아 사촌들과 숨박꼭질놀이를 하고 놀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숨겨진 공간이 많은 집들은 그만치 또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수많은 이야기거리와 가슴 아린 추억을 담고 있었다. 벌써 40여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꼬마의 뇌리속에 묻혀 있던 추억들이 이렇게 유후인의 한 료칸에서 상기되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졌다. 장례도 참석하지 못했던 이모님의 다정했던 얼굴이 떠오르고 지금은 다 연락을 끊고 사는 외사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방을 안내하고 저녁 식사시간을 예약받은 직원 아주머니가 방을 나가자 우리세 식구는 기다렸다는 듯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온 방을 뒤지듯이 구석구석 살펴보고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던지고 유카타를 입었다. 색상이 중성적이라서 딸과 아내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을 수 있도록 버버리 장갑같이 엄지발가락만 따로 있는 양말을 신었다. 사진을 찍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를 마시고도 저녁식사까지는 시간이 남아 세식구가 모두 남여공용탕과 전용 노천탕으로 헤어져 온천을 했다. 남여공용탕은 하나의 탕을 남녀탕으로 간막이를 하고, 다시 각각의 탕을 실내외로 간막이쳐서 노천탕과 실내탕으로 나눈 그런 구조였다. 실내탕 바닥에도 노천탕에서 흘러들어온 낙엽이 손에 잡혔고, 남여탕은 대나무 한겹으로 구분되어 있어 서로 대화를 나눌수도 있었다. 절묘하게 택일을 한 덕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모두 8실이라는 료칸에 손님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저녁 늦게 부부로 보이는 한쌍의 손님이 들어오긴 했지만 아뭏튼 공용탕마저 독탕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료칸매너(?)의 부담없이 싣컷 즐길수 있었다.

흩어진 세식구가 다시 모여 식사처에서 소위 '가이세끼' 요리로 저녁을 들었다. 기대가 너무 컸는지 그렇게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해산물과 육고기를 고루 갖춘 일본 요리를 한 코스씩 즐기다 보니 무려 한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식사 한끼에 90분 걸린 것은 내 오십 평생 처음일 것이다. 직원 한분이 거의 우리 테이블에 붙어있다시피하며 음식을 내어오고 접시를 치우고 그리고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각각의 요리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체질이 머슴체질이다 보니 난생 처음 받는 서비스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다가 한번씩 이렇게나마  대접받는 시간들을 갖는 것도 괜잖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방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직원이 이부자리를 깔아놓았다.  료칸에서의 시간을 잠으로 다 보내기가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사실 료칸을 먹고 씻고 자기위한 공간이 아닌가. 특히나 전날 선상에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샌데다가  또 하루종일 유후인 거리를 헤메다보니 피곤이 물밀듯 몰려왔다. 도대체 저녁을 먹고 나서 잠들기 전에 우리 세식구가 무슨 대화를 하고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 만치 깊고 편안한 잠속으로 골아 떨어졌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새벽 일찍부터 눈을 떳다. 무슨 특명이라도 받은 듯이 식전 온천을 즐기기 위해 탕을 찾아 들었다. 얼굴에 눈을 맞으며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수에 눈이 내려 녹는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다 봤다. 문득 이 호사를 누려도 좋을지 별일이 없을지 걱정이 될만치 그 순간의 시간이 너무나 충만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오래동안 누적된 마음의 때가 녹아 흐르는 듯 편안햐졌고 사르르 두눈이 감겼다. 

저녁에 먹었던 가이세끼요리에 비해 훨씬 간단한, 하지만 너무나 넉넉한 아침을 먹고 나서도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은 코우노쿠라에서 보내고 싶어 송영 시간을 10시로 부탁했다. 아침식사후 또 세식구는 각각의 탕으로 흩어져 온천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코우노쿠라 근처 마을을 산책했다. 아무것도 없는 간혹 눈발이 흩어지는 평범한 일본 농촌의 마을안길을 걸으며 코우노쿠라에서 보낸 하루밤의 사치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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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초, 마을 사업 관련해서 마을주민과 함께 일본 연수를 떠났고 그때 1시간 정도 유후인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쳐 그 짧은 1시간마저 유후인을 보는둥마는둥 보내고 말았지만, 그때 가이드로부터 유후인이 '일본여성이 일생에 꼭 한번 여행을 오고 싶어하는 곳'으로 최고로 인기있는 관광지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리고 귀국후 이런저런 자료를 보면서 유후인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지난 1월 23일에야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1박까지 하는 넉넉한 일정으로 유후인을 찾았다.

내가 아는 유후인은 참 특별한 관광지다. 대단한 역사문화적 자산이 남겨진 곳도 아니고, 자연 경관이 유별나서 사람을 매혹시키는 그런 곳도 아니다. 골프장이나 대형 리조트, 호텔 인프라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현대문명의 현란함도 도시적 매력도 없고 그렇다고 전원의 목가적 풍경만으로는 관광지가 되기에 아무리 봐도 부족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만2천여 명에 동서 8km, 남북 22km의 유후인은 년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일본 최고의 관광지중 하나다. 유후인은 인구나 도시 면적으로만 본다면 봉화읍 정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매력이 유후인을 그토록 성공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게 했을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우선 유후인을 인상짓는 몇 가지 자원을 생각해 봤다. 유후인을 내려다보는 해발 1500m가 넘는 유후다게라는 산이 있다. 유후다케는 아소쿠주 국립공원의 일부로 화산작용으로 생겨난 산이다. 이 유후다케를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산록이 유후인을 둘러싸고 있다. 산세로 따진다면 물론 보기에 아름다운 산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유후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유후다케는 유후인의 명성을 통해 알려진 산으로 유후인의 작은 자원일 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후인을 찾았던 사람들은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를 잊지 못한다. 긴린코 호수는 관광객이 제일 많이 붐비는 거리의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연못이다. 석양이 비칠 때면 호수에서 뛰어오르는 붕어의 비늘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긴린코(金鱗湖)라고 이름 붙인 호수다.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 항상 김이 피어나는 신비로운 호수로 주변의 아기자기한 미술관이나 카페들과 잘 어울려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호수지만 자그마한 크기의 호수에 불과하다. 긴린코 호수가 가진 이름의 의미가 관광객의 흥미를 끄는 것도 사실이고, 주변경관과 어우려져 신비로운 매력을 드러내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탄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 역시 유후인의 매력을 다 설명해 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다.


유후인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대표작인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이치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형상화한 케릭터 상품이 즐비하고, 전문 가게들마저 성업 중이다. 이 역시 유후인의 큰 관광자원의 하나지만 유후인의 명성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유후인의 참 매력을 드러내는 규정은 다름 아닌 “친환경 관광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자원들이 유후인을 친환경관광도시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친환경 관광도시 유후인이 탄생되었는지 살펴보지 않고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유후인은 1975년 오이타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유후인의 대표적 호텔건물이 붕괴하는 등 참사를 겪었다. 당시 유후인은 인근의 유명한 관광지인 벳부 덕분에 ‘작은 벳부’라고 불리며 지명도가 높아지던 시기였는데 지진에 의해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지진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마을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마을재건위원회는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 사업 같은 개발을 통한 극복 방안과 유후인의 고유한 경관을 보존하면서 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개발 방향을 높고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투표를 통한 주민의 선택으로 ‘보존’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주민자치위원회는 음악제와 영화제 등을 만드는 등 유후인을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마을로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정감 있는 마을 만들기 조례’를 재정하고 지역의 농업, 관광, 주민의 삶까지 아우르는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지역 개발 모델을 구상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1988년에는 유후인에 3,600실 규모의 대형 리조트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주민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기도 했지만 민관이 함께 이를 저지하고, 아예 1990년에는 유후인 내에 5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는 조례까지 재정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 주민들의 노력이 오늘날 유후인을 전국 최고의 ‘친환경관광도시’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후인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지역의 발전 방향을 잡아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주민자치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당연히도 주민주도적인 공유 과정이 선행되었다. 결정과정의 공유는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라 할 것이다. 유후인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과정은 좁게 보면 유후인 인근의 최대 관광지인 벳부와의 차별성을 찾고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벳부가 일본경제의 상승기에 단체관광, 기업관광이 주를 이룰 때 번성하여 남성중심, 밤거리와 유흥가, 대형 숙박시설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휴후인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유후인 관광자원은 여성 중심적이고 가족중심적인 가치에 기반 하여, 예술, 문화쇼핑, 생활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후인은 시대적 트랜드의 변화를 먼저 읽고 자신의 고유한 차별적 가치를 그 중심에 세움으로써 성공적인 지역개발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유후인 만의 고유한 관광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유노쓰보’ 거리다. 이 거리는 유후인역에서 긴린코 호수에 이르는 약 2km정도 되는 거리다. 이 길을 중심으로 작은 골목길들이 이어져 있고, 골목 마다 수십 개의 미술관과 공방, 베이커리, 까페, 그리고 각종 특산물과 기념품, 공예품, 골동품 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시설의 화려한 건물은 하나도 없고 오밀조밀한 거리에 그만그만한 규모의 소박한 미술관들이 전부다. 사실 어느 것이나 하나를 떼어놓고 본다면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런데 유노쓰보 거리의 이들 모든 것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일년에 400만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중심적인 매력으로 승화한다. 사람들은 문화예술의 빛 아래서 나름의 취향에 따라 금상 고로케와 유후인 에끼벤을 사먹고, 유후인 버거와 유후인 롤케익을 즐기며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유후인은 대중의 소박한 정서에 철저히 부합하는 관광지다. 특별히 화려한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거리에 대중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작은 자원들이 어울려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의 행복한 삶을 우선시 하는 관광개발을 펼쳤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규모 호텔이 들어설 경우, 지자체는 세입 증대라는 이익이 있겠지만 주민과 관광객의 관계는 단절되고, 고유한 지역의 경관과 정서는 파괴되고 만다. 유후인은 그런 식의 대형 호텔의 건설을 저지하면서 오늘날 100여개의 중소 료칸이 성업하게 되는 여건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렇게 지켜진 료칸 자체가 하나의 중심적인 유후인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유후인 거리를 걷다보면 관광지라기보다는 잠시 산책 나온 거리, 내 집에서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숙하고 마음 편안한 공원에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그것은 유후인의 거리가 관광이 아니라 ‘생활’, ‘체험’을 모토로 하는 유후인의 관광정신을 철저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유후인으로 선택한 것은 먼저 우리가족이 유후인의 매력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부가적으로 내가 사는 봉화, 그리고 비나리마을의 바람직한 개발 방향에 대한 착안을 얻기 위해서 였다. 1박2일의 유후인 여행으로 뭐 대단한 성과를 얻을 수있겠냐만 그래도 오랫동안 유후인은 나의 뇌리에 남아 곱씹어야 될 생각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 떠나서도 그 이틀 동안 동안 딸과 아내와 함께 유노쓰보거리를 걸으며 다코야끼를 사먹고, 벌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던 행복한 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나의 메마른 삶을 훈훈하게 뎁혀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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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10년만에 민주개혁세력이 보수우파의 극력한 저항과 진보세력의 협공속에 몰락하고 박정희를 닮은 짝퉁 개발독재자 MB가 대통령이 된지 3년이 흘렀다. 그동안 진보좌파세력과 합리적 중도보수에 가까운 민주개혁세력은 상상도 할수 없었던 우리사회의 정치적 퇴행을 목도하면서 한편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한편으로는 시대적 과제를 읽고 그 과제를 수행할 세력을 묶는 연대의 정치를 갈망해왔다. 지난 6.2지방선거의 실험적 연대는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열 가능성을 확인하는 장이 되었고, 일부 세력들 간에 보다 심화된 실질적 연대의 틀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 즈음에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나왔다. 부재가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인 이 책은 인터넷 진보언론의 신화를 창조한 오연호가 우리시대 진보적 지식인의 대명사가 된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를 여러 달에 걸쳐 만나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다시 집권을 할수 있을까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아젠다를 놓고 대담을 나눈 결과물이다. 진보세력의 집권플랜을 논하는 책이다고 해서 선입견을 가질 수 있지만 사실 [진보집권플랜]은 의외로 가벼운 책이다. 사전 질문지를 제시하고 심도깊은 이론적 입장을 정리해서 답변하는 식의 대담이 아니라 오다가다 시간나는 데로 가볍게 까페에서 커피 한잔을 나누며 담소를 즐기며 조국이 가진 평상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저자 오연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은 정밀한 이론적 논쟁이 아니라 진보세력의 집권을 위한 대중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출판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덧붙여 필자는 진보교수 조국을 통해 진보세력의 집권전략을 공론화하는 것과 더불어 조국 교수 개인의 정치적 무게를 달아보고 현실 정치의 장에 론칭해 보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필자의 집필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선은 이 책이 진보개혁세력간의 연대없이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다 넓게 인식시켜나가는데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담의 내용 대부분은 한국내 진보세력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그리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같이할 수 없을 정도의 기본적인 공통의 인식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진보세력은 정치적 인물의 풀이 협소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그나마도 정치의 영역과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이 나누어져 일정정도 서로 금기시하는 풍토에서 '정치적 인물'의 선택지를 늘이고 미리미리 키워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책임에 분명해 보인다 .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담의 과정이 소위 '강남좌파'간의 공감대와  우애를 넘어 시대적 과제를 중심으로한 보편적 시대의식 같은 것을 찾아보고, 그것을 진보세력 사이에 연대를 위한 공통된 기반으로 제시하는 과정 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의 시대적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진보담론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이 진보 세력의 집권전략을 창출하기 위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이상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다시말해 이 책은 희망사항을 설파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플랜'이 없다. 또한 조국 교수가 아니라 정치인 조국을 드러내기위한 필자의 노력이 조금은 부족해보인다. 필자 개인의 정서적 공감대를 넘어 '정치인 조국'의 상품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전 서울대 총장 출신의 몇몇 정치인의 경우 오랫동안 뜸을 들이며 입질이나 하는 기회주의적인 처신끝에 정치의 장에서 퇴출되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그들과는 분명 다른 삶을 살아온 조국교수는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과정도 그들과는 분명다를 것이라 생각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차별성을 갖는 지성인, 그리고 진보적 지도자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식의 구태연한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이 국면을 치고 나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 조국'을 보고싶다.

그리고 진보집권플랜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이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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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일본농촌마을 선진지 견학으로 규슈여행을 다녀왔다. 즐겁고 의미있는 연수이긴 했어도 공적인 일정이 주는 아쉬움도 많았다. 나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일본의 멋에 매료되었고 특히 일본 농촌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렸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작은 다짐 하나를 했다. 빠른 시일내에 다시한번 가족과 함께 유후인이랑 야나가와를 보러가겠다고. 그리고 작년 10월이 결혼 20주년이다보니 충분히 핑게도 되었고, 틈틈히 웹을 뒤져 규슈여행 정보를 모아나갔다. 가까운 규슈지만 엄연히 외국인데 일본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자유여행을 가려고 하니 사전 준비가 많아야 했다. 늦었지만 난생 처음하는 단독 해외여행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여행안내서적들도 사서 읽고,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일본어회화에다, 영어회화 공부까지 하기 시작하고 이러저런 블로그를 찾아 여행기를 읽어나갔다. 나중에는 유후인과 후쿠오카를 가지않고도 모스버거와 벌꿀 아이스크림 그리고 금상고로케의 맛을 논하는 유후인, 후쿠오카 전문가가 되다 시피했다. 그리고 10월이 다가오면서 드디어 교통편과 숙박편 예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딸애의 합류와 이런저런 다른 사정까지 겹쳐 일정은 12월로 연기되고,  '대기'상태의 배편을 구한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한뒤, 배편이 틀어지면서 예약된 숙소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해를 넘기고 지난 1월 22일 드디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동안 집을 지켜야되는,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우리집 똥강아지 초롱이가 서운한 눈빛으로 우릴 배웅했지만 개무시하고 악세레다를 밟았다. 


안동 강변의 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안동역을 들어섰다. 한달전 예매를 하고 프린터해 둔 티킷을 주머니를 뒤척여 찾아 놓았지만 승무원 누구도 기차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예매를 하면서 안동에서 부산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이 걸리지만 기차로는 4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랑,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랑 한참을 갈등했지만 근 7~8년만에 하게 될 기차여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플랫폼을 들어서는 나의 가슴은 벌써 여행의 흥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식구가 함께 챙겨야될 가방의 수를 확인하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몫을 나누다보니 금방 기차가 도착했다. 12시 12분 안동발, 16시 27분  부산 부전역도착예정인 무궁화호는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좌석번호를 찾아  선반에 짐들을 올려놓고 
차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안동의 익숙한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낯선 풍경들이 차장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카페열차칸을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페열차칸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찾아 들어선 카페열차는 텅텅 비어있었고, 매장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창을 스치는 겨울 산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끈한 원두 커피 한잔의 향기에 취했다. 카페칸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객실 차창을 스치던 바로 그 풍경이 아니었다. 커피향 가득한 까페열차칸에서 바라다보는 차창밖 풍경은 지난 추억을 고스란히 환기시켰다. 어린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은 깬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든 새벽, 소년의 귀에 울려오던 새벽기차소리는 두려웠던 밤이 다 가고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원의 소리에 다름아니었다. 중학교3학년 시절 갑자기 공부에 신명이 붙어 책보다 더 많은 도시락을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기차를 타고 전교 1등으로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발역인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짦은 시간동안 새벽기운이 걷혀가는 세상을 차창밖으로 바라다보던 소년의 가슴은 온갖 굴레에 묶인 지금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할 미래에 대한 꿈들로 벅차올랐다. 
 


안동을 벗어난 기차는 간혹 낙동강을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의 지류들을 건너기도 하고, 의성과 군위를 지나면서는 낙동가의 본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아름다운 겨울강을 바라다불 수만은 없었다. 한달쯤 전 구미에 일이 있어 갔다가 4대강사업으로 구미보를 설치하는 공사장 주변을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듣던 4대강사업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강변 농토에 끝없이 쌓여있는 준설토 무더기와 거대한 보기둥을 보면서 경악했다. 한 인간의 야욕이 무참히 뭉개버린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만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절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평화의 강이 끊기고 무자비하게 파괴된 공사 현장이 곧 나타날 것만 같아 창밖 강풍경을 바라다보는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기차는 부산 부전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짐을 들고 부전시장쪽으로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서 였지만, 승선수속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고, 가야할 전철 구간은 몇개되지 않았다. 가방을 끌고서 부전시장을 구경하자는 아내와겨루다가 그냥 길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포장마차에서 말로만 듣던 부산오뎅을 사먹기도하고, 중앙역에서 국제여객터미날까지 굳이 걸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 국제 여객터미날에 도착하고보니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좁은 대합실을 들어서니 의외로 인파가 넘쳐나고 여행객의 설레임으로 후끈겨렸다. 비행기 삯에 비해 배삯이 싸서 그런지, 아니면 승객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어설프고 조금은 지저분한 여객터미날은 여행사별, 단체별로 무리를 지어 인원을 점검하고 여권과 승선티킷을 나누어주는 등 부산했다. 개별 자유여행에 오른 우리가족만 일행이 없이 홀가분하게 보였고 넓지 않은 터미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승선시간을 기다렸다. 


발권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린뒤에 먼저 출항할 시모노세끼행 성희호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과정을 구경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타고갈 하카다행 뉴카멜리아호 승객들의 승선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제사 후쿠오카행 배를 타게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설레임을 안고 들어선 승선장에는 면세점이 있었지만 잠깐 구경만하고는 곧장 배에 첫발을 디뎠다. 뉴카멜리아호 갑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렇게 큰 배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울릉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울릉거림이 파도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객실은 카멜리아호의 3층,4층,5층에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가족은 4층의 12명이 들어가는 한 다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남녀실이 다르거나 혹은 비슷한 가족여행객들로만 같은 호실 손님을 몰아준다든지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우리 선실은 전부 개인 남자 승객뿐이었다.  우리가족은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갇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행이 우리 호실의 승객은 7~8명에 불과해 넉넉한 자리에 트렁크를 벽삼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여행이란게 이런 불편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며 스스로를 위무하며 저녁 7시 승선후 11시 30분 출발까지 선상의 여행을 시작했다.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각종 자판기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갑판으로 나가  어둠에 싸인 부산항과 부산시의 야경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카멜리아호는 일본 선적인지 선내에서는 엔화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고 자판기로 판매하는 상품들 역시 일본 상품들 이었다. 배를 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이미 일본에서의 시간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만히 서 있는 배에서 보내는 시간의 지루함을 줄일 순 있었지만 4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한 공간에서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도 고파왔지만 선내 레스토랑은 예약된 단체 손님을 우선 받고 8시40여분이 지나서야 일반 개인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일부 메뉴는 이미 매진이 된 상태였지만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자며 3명이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값은 각 850엔 정도 였고 그런데로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날 압권인 음식은 단연 연어알밥이었다. 국내에서 먹던 일반적인 알밥만을 생각하고 연어알밥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아가씨가 몇번을 반복해서 연어알밥을 드실 수 있으시겠냐고 되물어왔다. 먼저 국적을 묻고 연어알밥은 비린내가 많이 나서 한국사람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뭐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고는 고집스레 주문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차려진 그릇의 뚜껑을 열자마자 와이프는 스필버거의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눈알이 둥둥 떠 있는 스프를 연상시킨다면 질겁을 했다. 나는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연어알이 입안에서 터질때마다 비릿한 생선 썩은 냄새 같은게 입안에 퍼지면서 거의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남은 2인분의 다른 음식을  3명이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부산앞바다의 밤은 깊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부산항 밤바다를 바라다보고 기념사진도 찍다가 선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설핏 든 사이 배의 출렁거림이 느껴져 눈을 떴다. 배가 출항을 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나선 갑판에서 바라다 보는 부상항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바라다 보며 멀어져 가는 나의 지난 시간들도 더불어 작별했다.  

배를 타고 떠나는 일본여행을 꿈꿔온지 오래다. 선상에서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맞는 일출, 그리고 일몰, 바다 한가운데서 보는 밤 하늘의 별들... 그리고 파도소리.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에 별도, 일출도 볼수가 없었다. 빛마져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멀미까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갖는 여행의 꿈은, 막상 길 떠나게 되면서 막닥뜨리는 구질구질한 현실과 의외의 변수들에 의해 뭉개져 버리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 꿈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삶은 항상 의외의 사건들로 가득차고, 늘 미지의 것을 남겨 놓고 있지. 그래서 세상은 신비롭고,  삶은 살만하지 않은가? 낯선 여행만큼이나 설레임 가득찬 나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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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의 색이 바래고 자신의 삶을 이끌던 의미 혹은 희망 같은게 하잖아 보이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 내가 그랬다.대충 살아 온 시간들,  확 늘어버린 나이, 불투명한 앞날... 거기다가 앞으로 살아갈 동안 의지할 수 있는 돈도 재능도 사람도 가지고 있지 못한 빈털털이라는 사실까지 어느 것 하나 위안을 얻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 삶의 가치, 가능성, 의미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사람에 대한,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신비감마저 잃어버리고 어쩌면 삶이 다하는 그날 까지 이렇게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늙어가야하지 않을까하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러나가 지난주 분명 일탈일 수 밖에 없는 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결혼20주년을 핑게로, 멀리 규슈까지. 이런저런 즐거움과 행복감 충만한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생각지도 않은 유후인의 화가 東 勝吉(ひがし かつきち)과의 만남이다.


東 勝吉은 오이타 현에서 1908년에 태어나 유후인에서 2007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그를 유후인의 화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의 노후를 보내고 영면한곳이 바로 유후인의 노인요양원인 '온수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화가로서의 활동이 바로 그 유후인의 '온수원'에서 시작되었고,  작품의 전부가 이루어졌고, 또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찾은 유후인에서 아내와 딸과 더불어 하루 낮을 보내고 하루밤의 사치를 위한 료칸의 송영을 기다리는 시간, 한기를 피하고자 유후인 역사의 대기실 같은 작은 홀에 들어섰다. 30여평의 홀의 사면에는 수준이 고르지 못한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그림 한점한점을 한참을 둘러보다가 그 그림들이 83세 이상의 노인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놀래기도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전시회가  바로 유후인이 낳은 어떤 화가를 기념하기위한 정기 공모전이었고, 그 화가는 다름아닌 83세에 첫 붓을 잡은 東 勝吉이라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東 勝吉은 가난하고 힘든 삶 끝에 78세에 유후인의 노인보호시설인 '온수원'에 입소하고 83세가 되어서야 평생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89세에 바로 그 유후인 역 홀에서  첫 전시회를 가지고 2007년 99세에 숨을 거두기 까지 작업에 몰두 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의 작품을 예술적으로 평가할 재주가 없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의 작품은 어느 프로 작가의 작품들보다도 뛰어나게 아름다왔으며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여행 내내 곱씹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83년 동안 고이 간직하고 살아왔으면서도 그전에는 그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예술은 후천적인 노력보다는 천부적인 재능이 더 중요할까? 화가가 되고 싶은데 타고난 재주가 없어 예술이라는 병을 평생 앓아야만 하는 사람은 불행할까, 아니면 불가능한 꿈이나마 가지고 살아가니 행복하다고 해야할까? 그가 노년에나마 화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노인 복지 시스템 덕분이겠지? 건데 어떻게 예술교육이라곤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붓에서 저런 색이, 저런 선이, 저런 조형미가 탄생할 수 있었지?  끝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고리를 물ㄹ고 일어났지만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 가능성의 실현 여부를 떠나 하나의 삶이 가진 가능성의 존재 자체가 그 삶을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삶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고히 간직하고 무덤속으로 가져가버리겠지만 하여튼 바닥나지 않는 가능성의 영역안에 자신의 삶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東 勝吉을 알게 되고 기쁘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제 쉰이다, 희망을 갖자!

http://www.yufuinartstock.com/ARTSTOC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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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0주년 첫 가족 일본여행을 떠나며...

나는 호젓이 떠나는 여행을 꿈꾸고, 혼자만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여행은 모든 익숙한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다.
멀리서 바라다 보는 '나',  '나'를 둘러싼 삶터,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길을 나서면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 된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수평선 넘어 번지는 석양을
그 자신의 눈으로 바라다 본다.


낯선 눈으로 익숙한 것을 바라다보는 생소함이 내가 꿈꾸는 여행의 묘미다.
하지만 그 생소함은 너무 친숙해서 느끼지 못하게 된 사물들을 발견하게하고,
익숙함의 궁극을 나타내는 나자신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의 상처받은 신비를 치유하는데 묘약이 될 것이다.

객관화된 자신을 '그'의 눈으로 바라다보면서 '그'가 산 삶을 되짚어보고,
'그'가 살아갈 앞날의 삶을 꿈꾸는 여행은 결국 떠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다.
나는 더 멋진 유랑을 꿈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여행일뿐이다.
여행은 길고 지루한 인생이라는 길위에서 잠시 느티나무 그늘로 스며들어
낡은 운동화나마 벗어 먼지를 털고 다시 신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운동화를 고쳐신고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번져오는 햇살과
파란 하늘을 바라다 보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여행이 단순한 '소비행위'일뿐인 시대에
그래도 굳이쇼핑센타를 가지 않고 배낭을 매고 길을 나서는 것은 
단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나
몸에 베어있어 버리지 못하는 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그 신비를 잃지 않길 바라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이 설레임으로 가득차길 빈다.
세상의 모든 작은 여행들이 우주여행의 황홀함을 나눠갖는다면
사람들은 좀더 따뜻하고 충만한 의미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난생 처음으로 가족일본 여행을 떠난다.
우리 가족은 규슈에서 5박6일의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할 것이다.
유후인의 거리를 지나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마을 속으로 스며들고
후쿠오카 빌딩 숲의 한 모둥이에 쳐박혀 잊혀져가는 가게에서 우동을 먹으며,
익숙한 가족의 의미와 인연의 깊이를 되짚고 
우리가 살아있는 이 세계의 신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싶다.
그리고 다시 진부한 일상으로 돌아와 진부하지 않은 삶을 도모하고 싶다.
익숙한 모든 것을 그리워하기 위한 떠남에서 돌아야
모든 존재와 모든 관계에 스민 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1월22일 봉화출발 / 부산발 카멜리아호
1월23일 하카다항 도착 유후인으로 이동 / 코우노쿠라 료칸에서 1박
1월24일 후쿠오카로 이동 /하카다도큐 엑셀 호텔 1박
1월25일 야나가와로 이동/ 다자이후 관광 / 1박
1월26일 후쿠오카 관광 / 1박
1월27일 하카다항 출발 부산 귀환
1월28일 봉화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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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름의 여행서적들이 생겼다. 만만찮은 책값때문에 구입을 망설여왔던 걷기길 관련 여행서적들을 공짜로 얻어다가 책상위에 쌓아놓았다. 책무더기를 바라 보니 마음 든든한게 올해 겨울나기는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망설임없이 첫 책으로 서명숙의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을 집어 들었다. 재작년에 한번 그리고 작년에 한번 다녀온 제주 올레길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어서이기도 했고, 요즘 내가 맡아 하고 있는 일이 [외씨버선길] 봉화구간의 스토리 자원조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제주 올레길은 단지 걷기길의 성공적인 개발사례만이 아니다. 올레길은 '길'을 떠나서도  단연 최고의 '지역 개발' 분야의 성공사례이다. 지역 개발 현장은 항상 "가치의 실현과 주민의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에 대한 욕구"가 충돌하는 현장이기도하다. 그런데 어떻게 필자 서명숙은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스스로 이름 붙인 '공구리주의'에 맞서 올곧게 생태적 가치, 원시적 공동체성을 지켜내면서도 '올레길'을 통해 지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적으로도 풍성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경이롭기만하다. 나의 올레길에 대한, 올레길을 일구어낸 필자에 대한 놀라움과 존경의 마음으로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 책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은 서명숙 자신이 기록한 올레길의 역사이자 올레주의의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걷기길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된 실무지침서이다. 이책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난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 작당을 하고 어떻게 길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봉착한 난관들을 헤쳐나갔는지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길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필자 개인의 삶의 과정 속에서 얽힌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한 에세이 인지 혼동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은 올레길이 구상되고 현실화 되는 과정 맡바닥에 놓여 있는 가장 중심적인 토대가 바로 사람에 대한 그녀의 사랑임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서귀포 시장 한 구퉁이에서 [서명숙상회]를 꾸려왔던 어머니, 그녀의 든든한 동반자인 두 분의 남동생, 그리고 대포동의 네 여자, 그리고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고 힘이 되어 주었던 기업가들의 이야기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름없는 올레꾼들의 가슴저미는 구구절절한 삶의 이야기들이 나닐까 한다.  병든 육체와 상처입은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올레길을 걸으며 병을 치유하고 생명의 건강성을 회복해 나가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한쪽 구석이 따뜻해져옮을 느낀다. 

올레길은 경쟁만능주의와 속도전에 지쳐 병들어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원시성을 회복케하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그녀의 애틋한 인간애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올레길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한 구도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야심가의 욕망의 실현과정과 또 한 연약한 인간의 구도과정 사이에서 그녀의 올레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올레길은 '옳음과 현실적 욕망'을 통일시킨 건강한 지역개발의 사례이듯 그녀에게 이 길은 자아실현과 구도의 과정이 통일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 서명숙은 올레길의 제안자이자 기획자이고, 사람을  모아서 일을 도모하는 조직가이자, 구상을 실무적으로 처리해 현실화시켜내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온갖 모습으로 이 책의 갈피갈피마다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그 모든 아이텐티티를 떠나 그녀는 그냥 "제주의 여자"라고 부르고 싶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거센 파도를 맞서 삶을 일구고 지켜내온 제주의 여자는 모두 '설문대 할망'이다.  설문대할망같은 파워와 카리스마을 가지고 제주를 깊이 사랑했기에 '올레길'이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올레길에서는 그저 풍광에 넋을 잃고 길이 좋아, 마냥 바닷바람에 취해 아무 생각없이 걸을 수 있었다. 두번째의 올레길은 봉화군등 4개 시군이 함께 만들려고 하는 [외씨버선길]을 위한 워크삽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이 때도 나는 그냥 한도  끝도 없이 올레길을 걷고싶었지만 [워크삽] 일정때문에 길걷기 욕구를 제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았지만 다행히 처음으로 올레길을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단법인 올레의 일꾼인 안은주선생의 강의를 통해 감히 [올레주의]라고 이름 붙혀도 좋을 올레길만의 정신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올레길을 필자 서명숙을 통해 더욱 깊이 알게 해준 이 책을 만나게 된 인연이 고맙다.

'올레길'은 걷기길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만이 아니다. 올레길은 반토목주의에 입각한 지역개발사업의 전형을 제시한다. 나는 그것을 '올레주의'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책을 덮으며 외친다.

[올레주의]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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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 봉화군 등 4개 시군이 공동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외씨버선길]의 봉화구간 스토리 자원조사 일을 하고있다. 건성으로 지나치거나 찾아갔던 춘양면의 88번 도로를 따라 길 양쪽으로 형성된 촌락을 중심으로 설화나 민화, 혹은 기타 문화예술자원 그리고 자연 경관 자원등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외씨버선길 봉화구간만의 색을 찾기위해 고심하고 있다. 스토리 자원이 될만한 아이템의 단순 수집작업은 그럭저럭 진행하고 있는데 그렇게 수집된 아이템을 정리하고 선별하여 길의 테마를 드러내줄 수 있는 스토리로 묶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그저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사진을 찍는 재미에 이 일을 맡긴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에는 여러가지로 역부족인게 사실이다. 짧은 기간, 작은 보수 그리고 더 짧은 식견!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일은 이미 맡았고 하여튼 진행되고 있으니 그냥 쭈욱 나가는 수밖에...

그래도 이 일이 주는 즐거움은 많다.  무심히 지나치던 차창밖의 작은 풍경들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가 뜨겁게 만나는 기쁨. 인근에 살면서도 삶의 체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생각만 있고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는 기쁨, 또 존재의 아름다움과 삶의 깊이를 전해주는 찰나의 느낌들과의 해후...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까지 작업 진행과정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성과는 무엇보다 영화감독 김기덕의 고향마을을 알게되고, 그의 생가터를 찾아가 다시 한번 그의 영화를, 그리고 산골아이에서 국제적인 영화감독으로 입신한 한 인간의 삶을 생각해 본 것이 아닐까싶다.

사실 김기덕 감독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처와 그의 영화에 대해 그리고 최근 뉴스에 전해진 그의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새로 개설될 걷기길의 스토리자원 발굴 작업 중에 만난 그 였기에 나의 사고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을 낳은 산골마을만의 특별한 감수성 체험'어쩌고 저쩌고 하는 프로그램이나 '한국의 가장 영화의 한 장면같은 길' 혹은 '가장 영화찍기 좋은 길' 뭐 그딴 망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뭏튼 한달여전 김기덕 김독이 후배들에게 배반당해 폐인이 다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고, 그리고 그 몇일뒤 다시 그 뉴스가 순전히 오보라는 기사 역시도 보았다. 개인의 삶을 무책임하고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기자들의 천박함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해 버린 기사였지만 김기덕의 어린시절을 기억하고 계시고, 돌아가신 김기덕 감독의 부친과 친구되신다는 박세윤(84세) 할아버지가 그의 근황을 물어 올 때는 괜히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덕이 요즘도 영화찍나, 우째 지내는고? 참 대단한 상도 많이 탓제.... 뭐가카더라 그...'라고 말씀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뭐 국제적인 영화상을 다안 받았니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니더. 요즘도 열심히 영화 찍지예.' 라고 김기덕 감독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기라도한 것처럼, 그의 삶을 두둔하고 지켜줘야한다는 듯이 대답하고 말았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 대부분을 본 처와 거의 보지 않은 나의 대화는 진전될 수 없었지만 마초적 감성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통찰력과 미적 깊이가 있어 매력적인 영화감독이라는 처의 평에 머리를 끄덕거리며 다시 그의 영화를 보도록 하겠다고 마음먹어 보기도 하고, 그의 영화가 진실을 직시케 함으로써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여  높은 예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는 면도 그렇고 학벌도 돈도 따라서 인맥도 없이 예술적 열정 하나로 영화감독으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그의 삶이 가진 굴곡이 어쩌면 비빌 구석이라곤 한군데도 없이 우리 사회의 병폐의 근원이 되는 모든 금기들을 건드렸던  고 노무현대통령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나누면서 하루의 과업을 마무리 했다.

2004년 고향을 방문해 송이축제장에서 펜 싸인회도 하고 고향후배를 위한 강연도 했었다는 그는 몇몇 고향 분들에게 '자신'을 고향을 위해서라면 이용해도 좋다고 까지 말씀하셨다고하는데 그를 맞은 봉화는 그의 크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도로변의 쌈지 공원을 '김기덕공원'으로 만들자던 젊은 지역 일꾼의 제안 마저 지역사회가 무시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걸 보면 참 씁쓸하기조차 하다.  
 
오직 그의 앞날에 큰 예술적 성취가 있기를 그리고 불온한 세상의 섭리에 맞서 그만의 멋진 세계를 구축해 내고 그러면서도 내내 행복한 한 개인의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기를 빈다. 

* 김기덕 감독의 고향집터를 알려주고 약도까지 그려주신 춘양목송이마을 곽진희 관리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김기덕 감독이 태어나고 초등학교까지 다녔던 봉화군 춘먕면 서벽리 마을 입구

김기덕 감독의 생가터를 가르켜주는 박세윤 할아버지.
 

김기덕 감독의 고향집은 헐리고 그 터는 사과나무가 심겨져있다.

김기덕 감독의 부친과 친구였다는 박세윤 할아버지와 기념사진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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