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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인류보편의 속성에 대한 낡은 물음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의 답을 구한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기되어 왔던 낡은 질문이다. 정답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아니면 백지상태라는 3가지 선택지 안에 있을 뿐이다. 어떤 답을 선택하든지 자유지만 왜 그와 같은 답을 선택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해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시도가 가지는 매력은 주장의 선명함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구하는 접근방식의 설실함에 있다. 필자는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분석이 아니라 실증적 사료에 입각한다. 한축으로는 현재 인간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인간본성에 대한 악한 이해를 논박하고, 또 다른 한축으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지를 실증한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최종적 주장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실증적 논거에 대한 반박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로서 나는 그의 주장에 최종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 실증에 대한 반박은 쉽지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실증의 어려움에 기인할 것이다.

 

먼저 필자는 현대 문명이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전제 위에 구축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홉스의 인간관에 기반을 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과 마키아벨리 정치학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철학적 사상적 기반이다. 구체적 현실을 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팽배하고 부정적 뉴스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다 많이 영향을 받는 부정편향에 빠져있고, 넘쳐나는 부정적 뉴스에 묻혀 가용성 편향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비관적인 견해는 기독교 초기 원죄개념 속에서도 드러난다. 원죄개념은 종교개혁 뒤에도 존속하고, 신앙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는 계몽주의 사상에 그대로 계승된다. 인간을 살인자의 후손으로 지칭한 프로이드나, 삶이란 하나의 전투라고 설파했던 헉슬리는 모두 스미드와 마키아벨리의 후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밝히는 현실을 지배하는 인간 본성은 악하다는 인식의 원인이자 결과다.

 

필자는 상식을 비집고 반박의 근거를 물색한다. 먼저 필자가 소환한 엠마 골드만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피력한 사상가들을 정신적 사기꾼이라 일갈한다. 엠마 골드만의 주장을 이어 인간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한 실증적 연구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친숙하게 접해왔던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루시퍼 이펙트/이 실험은 인지부조화와 권력의 힘을 설명)’,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대중심리 테스트), 키티 제노비스의 사건(방관자 효과/1964, 키티 제노비스가 뉴욕 시의 자기 집 근처에서 다른 많은 주민들이 알아챌 수 있는 조건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허구성에 대한 필자의 주장을 만난다. 이들 사건은 인간의 악마성을 논증하기 위한 사례들이지만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해석된 오류투성이 일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동시에 필자는 인간 본성의 선함이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은 선함을 논증해 들어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정치 지도자의 필독서였던 구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학]에 입각해 대중의 동요와 공동체의 붕괴를 촉발하기 위해 민간에 대한 무차별공습이 이루어지는데 공습의 결과는 대중들을 더 결속하게 하고 협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독일에 의한 런던 대공습,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대공습, 그리고 미국에 의한 베트남 대공습은 이를 결정한 정치집단의 의도가 무참히 박살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소기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위기에 처해 동요하고 광란에 빠지고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침착함을 잃지 않고 협력하고 의지했다. 위기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거를 격파하거나 착한 본성을 드러내는 사례들로 구성되어있다. 그 각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이 표출되는 과정을 그린 파리대왕은 아태섬에 표류한 실제 사건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실제로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은 협력하고 의지하고 희생했다. 인간은 호모퍼피로 인간의 생존력은 지능이나 근력이 아니라 친화성에서 나온다. 전쟁에서 다른 인간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공유지의 비극은 지식인의 상상이지 현실을 반영 하지 못한다. 방관자효과 이론과는 달리 현실은 재난에 처한 타인을 위해 서로 희생하는 역방관자 효과가 더 많다.

 

하지만 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600만 명을 학살한 가스실을 만들고 가장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적 문명을 동반하는가는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답한다. 그가 제사하는 답은 권력이 부패하는 과정인 후천적 반사회화공감의 역설을 제기한다. 특히 공감은 혈통, 영토 등 근친성을 공유하는 집단 간 내부 결속과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타성을 가져온다. 배타성은 타자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 하는 폭력성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사피엔스]의 필자 유발 하라리와 브레흐만이 대척한다. 하라리는 인간이 가진 상상의 공동체가 인간의 유대와 결속 공감을 통한 문명의 창조를 낳았다고 본다면, 브레흐만은 그 상상의 공동체가 동시에 인간을 가장 잔인한 동물로 만드는 함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섬뜩하고 기발하고 향후 논의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명료하고 직선적이라 따라가기가 쉽다보니 분량에 비해 드물게 잘 익히는 책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쉬 그의 결론에 동의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반복하는 플라시보 효과와 시노보 효과를 대비해 펼친 주장은 논증이 아니라 도덕적 제안으로 들린다.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인간본성이 선하다고 이해하는 순간 인간본성은 선하게 귀결된다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희망사항이고 교리에 가깝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현실속의 악을 줄이고 선을 증진하기 위한 대응은 논리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와 같은 필자의 입장은 지구온난화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며 비관적인 주장을 펼치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 정말 지구가 종말을 맞을지도 모르니 인간의 회복탄력성을 믿고 낙관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은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희망사항의 피력으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한권의 책으로 가치를 따진다면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인류 문명이 가진 비극의 지점들을 짚고 희망을 만들기 위한 지식인의 모범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자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성찰과 모색은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지식인의 책무이고 이에 충실한 필자는 기본소득제의 선구자를 자청하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필자의 다음 책은 아마도 기본소득제에 관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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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노예가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는 세상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미래세대는 까마득한 옛날 기본소득을 꿈꾸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노예해방, 양성평등, 기본소득... 현실이 되기 전에는 꿈이었지만 그 꿈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는 순간 현실이 되었습니다.

 

인류 문명은 인간을 궁핍에서 해방시켜 풍요와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풍요는 모두의 것이 아니고 번영은 극소수의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인류가 쌓아온 자산에 대한 모든 인간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필요했고, 경제적 공포가 인간을 일로 내몰아 인류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거짓말을 폐기할 것을 우리는 주장합니다.!!

 

4차 산업혁명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경제적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 선전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실직과 궁핍입니다. AI와 빅 데이터, 그리고 로봇이 인류를 고역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힘겹게 생계를 해결하게 해 주던 초라한 일자리마저 빼앗으려 듭니다. 일자리 없는 성장, 초극단화 된 경제적 불평등, 출생률 제로와 지역 소멸의 시대는 기술문명의 성과가 소수의 손에 독점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작은 조정을 통한 현실의 유지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기본소득을 통해 생존경쟁의 밀림에서 해방된 최초의 인류로 살기를 원합니다. 생계를 협박해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강제노동의 시대가 가고, 휴식과 일이 조화로운 진정한 자아실현의 수단인 아름다운 노동의 시대가 오기를 갈구할 뿐입니다.

 

하지만 아직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세계에 유래가 없다. 너무 많은 재원이 든다. 아무도 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도전은 세계의 변화를 이끌 것입니다. 기존 체제의 낭비는 극에 달하고 있고, 예산 합리화를 동반한 토지, 태양, 바람 등 공적 자산의 이용에 대한 과세, 로봇 AI 등 인류가 쌓은 공적 기술에 대한 과세만으로도 기본소득의 재원은 충분히 충당 가능합니다. 이미 진행된 사회실험에서 기본소득이 오히려 일에 대한 안정성을 증대시키고 노동의욕을 상승시킨다는 보고가 즐비합니다.

 

기본소득이 보장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상상합니다.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인간 삶의 기본을 사회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인간을 동물의 삶에서 해방시키는 첫 출발이 될 것입니다. 극단적 가난이 사라집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합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자리로 내몰리고, 극단적 피로에도 트럭을 몰고 사지로 나서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쟁에 내몰려 좌절하고 자살하는 학생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서울만 있고 지역사회는 붕괴하는 지역소멸의 시대가 끝날 것입니다. 특정 직업군에만 특권이 집중되어 엘리트 카르텔이 형성되고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는 가고 사회의 진정한 필수노동이 대접받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자식 키울 사회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사회는 초저출산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소득은 내 아이의 장래에 대한 부담을 줄여 저출산의 문제조차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생계의 위협에서 해방된 인류는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며 이웃에 봉사하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진정한 삶의 행복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 기본소득운동 봉화본부는 기본소득이 우리 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사상임을 선언합니다.

- 우리는 국가 전체로 기본소득을 실시하기 전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영역, 수준을 찾고, 지금 당장 농민으로부터 기본소득을 시작하기 위한 정책적 준비를 하겠습니다.

- 우리는 기본소득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조직화하고 정치적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 시도할 것입니다.

- 우리는 기본소득을 위한 폭넓은 연대를 구하고 혁명적 사회운동으로 승화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2021427

기본소득국민운동 봉화본부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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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농민수당을 올해로 3번째 받았다. 50만원에서 시작해 작년 70만원, 올해는 80만원을 받았다. 임기내 100만원 군수 공약이니만치 실현될거라고 믿든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경상북도 농민수당지원조례에 따라 내년부터는 도예산이 투입되고, 기존 기초단체 주도의 농민수당 정책에 변동이 예상된다.

도가 기준을 정하고 기시행 지자체가 그 기준으로 하향조정되는 사태에 대한 우려가 들려온다. 나는 이번 기회에 한발 더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도농민수당은 그것대로 시행하고, 기존 '봉화군농업인경영안정자금'이라는 이름의 소득지원을 '봉화군농민기본소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농민수당은 시장에서 배제된 농업의 공익적 다원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다. 농민기본소득은 생계에 대한 위협을 통해 작동하는 기존 시스템을 대체하는 대문명전환을 이끌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가는 마중물이다. 다음 대선은 기본소득 아젠다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지방에서 먼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이끈다는 측면에서도 '봉화군 농민기본소득'은 큰 의미가 있다. '봉화군농민기본소득'을 통해 봉화군이 대한민국 변화의 중심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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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농민기본소득지원 최종 토론회> 토론문

일 시 : 2021.04. 08. 14:0016:00

장 소 : 안동시 농업인회관(3)

(054-853-5557) 안동시 공단로 126(수상동 820-118)

주 관 : 안동시의회 농촌사랑연구회

참석인원 : 50여명(시의회, 농민단체, 시민단체, , 전문가 등)

주요내용 : 조례제정 및 지원정책 도입을 위한 의견수렴토론

안동에서 시작하는 한국농정의 전환

농민기본소득 조례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는 바로 역시 안동이다!’였다. 한국 농민운동의 성지이자 가장 전형적인 농도인 안동에서 누구도 전면적으로 다루지 못한 농업보조사업을 소환하고 이를 농민기본소득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시도가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말 많고 탈 많은 농업보조사업은 낮은 실효성도 문제지만 농민 주체성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다. 보조대상 농기계의 가격 왜곡, 보조 농자재의 과다투입, 보조 작목의 과다입식과 그에 따른 가격 폭락(단양 아로니아 사태)은 차라리 작은 폐해인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보조사업을 미끼로 해 농민을 줄 세우고, 다방 농사하는 관변농업인을 양성해 농민의 자립성을 죽이고 자조의 정신을 고갈시켰다는 것이다. 농업 경쟁력 강화라는 보조사업의 원래의 취지가 시행과정에서 왜곡되어 그 본연의 취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조사업을 바로 잡는 과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혜를 집중해서 받는 일부 대농의 반발과 행정의 편의주의, 이해 업자의 저항도 우려될 뿐 아니라 보조사업에 길들여진 일부 중소 농민들의 저항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봉화군 농가경영안전자금 도입 사례

봉화군농민회는 2018년 군수 선거를 계기로 군수후보 초청 농정 토론회를 개최했고, 다행히 두 후보 다 초청에 응했고, 봉화군농민회가 농업보조사업의 폐해를 지적하며 대안으로 제시한 농민수당제를 공약으로 채택했다. 이후 조례 제정 과정에서 일부 농민단체가 농민수당명칭 사용을 반대하여 경영안정자금으로 결정되었고, 여성농민 중심의 농민당 개별 지급요구도 제기되었지만 묵살되었다. 농민수당제 도입 과정에서 지역 내 농민 단체 간 힘겨루기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 가구별 지급과 경영안정자금을 수용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지급금액은 지역상품권으로 해서 2019년에는 가구당 50만원, 2020년에는 70만원이 지불되었고, 올해 2021년에는 80만원이 지급될 예정이다. 지급효과를 살펴보면 먼저 농민수당을 받는 농민이 이를 농업노동에 대한 사회적 보상, 혹은 농민보너스로 받아들이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비농민 주민의 반발은 미미했고, 지역 중소상의 매출 증가에 따른 농민수당 지급에 대한 지지 여론이 많았다. 진행과정에서 일부 농업보조사업 축소 등 농업예산의 전용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농업 예산의 순증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는 예산 편성상 꼼수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농업보조사업과 농민수당(농민기본소득)이 연동되는 것에 대한 농민집단 내 합의가 불충분함을 보여준다.

 

안동시 도입예정인 농민기본소득제에 대한 촌평

안동시가 시도하는 농민기본소득은 복지예산의 추가 투입이나 농업 예산의 증액 없이 기존의 보조사업 중심의 농업예산에서 이용 가능한 부분을 찾아 농민들에게 직접 지불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럽 등 선진 농업국의 경우도 농업 예산의 많은 비중을 직접지불로 지급하고 있는데 이들 역시 보조사업중심의 농정 폐해를 겪으면서 자연스레 직접지불로 정책적 귀결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보조사업 집중 수혜자의 반발이 있겠지만 기존의 농업 보조사업을 정리하여 농민기본소득으로 지불한다는 취지라 비농민의 저항은 미미할 것으로 예상 된다.

농민기본소득제 도입 후 기대되는 변화는 당장 농민의 직업적 자긍심이 고양되고, 삶의 안정성이 커지면서 장기적으로 이농 감소와 귀농 증가까지 기대해 볼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농민 삶의 안정성이 커지는 만치 작목전환이나 신기술도입, 새로운 투자에 대한 개개인의 욕구가 증대하고, 장기적으로 합리적 경작체계가 정착할 것으로 기대되고 동시에 농촌마을 공동체의 활성화도 뒤따를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3~400개에 이르는 보조사업을 처리한다고 산더미 같은 서류에 묻혀 지내는 현장 공무원들의 업무 부담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그만치 농민에 대한 기술지도, 마케팅 지원 등 중심으로 업무 재배치가 일어나 농민들은 이중으로 수혜를 입게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생존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농사일은 하는 농민은 비료와 농약을 과다투입 하던 착취농업에서 벗어나 생명을 가꾸는 즐거움을 되찾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농민기본소득제 도입을 위한 정책적 준비

교과서적으로 말해 농민기본소득은 실패한 농정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다. 따라서 농업예산을 투입하는 농업 정책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 개조를 위한 사회실험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복지예산이든 농업예산이든 농민에게 일정 금액이 안정적으로 지급됨으로써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 장기적 발전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 중앙정부 주체로 시행중인 공익형직불제와 지자체 주체로 시행예정인 농민수당그리고 농민기본소득제는 개념규정과 상호 관계정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농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부분의 국민은 농민은 공익형직불에 더해 농민수당도 받는데 농민기본소득까지 달라는 말인가 반문할 지도 모른다.

공익형 직불제와 농민수당, 그리고 농민기본소득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현실적으로 농민수당이 기본소득적 성격을 가지게 설계되어 있고, 기본소득이 수당적 성격을 가지게 설계되어 서로 개념이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농업의 공익성에 대한 사회적 보상인 농민수당 혹은 공익형 직불제와 농민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적배당인 농민기본소득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농민수당과 공익형직불제는 주체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로 구분되는 점 말고는 농업의 다원적이고 공익적인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거의 동일선상의 제도다. 따라서 이 둘은 통합하여 지방정부가 주체가 되고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단일 정책으로 자리매김 될 필요가 있다. 농민기본소득은 보편적 국민기본소득으로 나가는 과정상, 재원의 준비나 국민적 합의 수준에 따라 도입되는 범주형 기본소득으로 개념적 정립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농민기본소득제는 농민수당(공익형직불제)과 병행하여 시행되어야 하고, 보편적 기본소득제가 도입되었을 때 농민기본소득제는 일정한 경과기간을 거친 뒤 자연스레 소멸될 것으로 예상된다.

안동시에서 시도하는 [농민기본소득제]는 개념정의상 농민수당에 가깝다. 농업 예산의 합리화를 통해 재원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나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 측면에서도 농민수당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도조례에 따른 농민수당과 매칭되어 시행하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농업 예산을 재원으로 한다는 면에서 비농민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고, 지금까지 시행된 타시군의 농민 수당이 월 5만원 수준에 머문 것에 비해 실제적으로 소득적의미가 있는 금액으로 설계되고 있고, 정기성 등 기본소득제의 기본정신에 부합하게 설계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농민기본소득이라 불러도 좋다.

(농민수당 + 농민기본소득) 과 공익형직불제로 설계하든 농민기본소득과 (농민수당+공익형직불제)로 설계하든 수혜 농민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몇 가지 더 바란다면 먼저 안동시가 도입을 시도하는 [농민기본소득]이 보편적 기본소득을 앞당기는 문명전환의 출발점의 의미를 획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위해 경상북도 조례에 따른 농민수당을 도입하는 것과 별도로 농민기본소득제를 도입하는 것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나아가 소득적 의미가 크도록 지급액이 가능한 높게 설계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 농민들의 바람대로 가구당 지급이 아니라 남녀 농민 모두에게 인당 지급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들 요구를 충족하는 안동시 농민기본소득조례는 아마도 한국 농업정책의 전환을 넘어 사회개조를 향한 거대한 발자국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해보인다. 안동시농민기본소득 조례 재정 노력에 한명의 농민으로서 큰 박수를 보낸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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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yes24.com/document/14104939

 

식물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다.

내가 이해하는 “식물혁명”은 식물을 바라 보는 우리 관점의 혁명을 말한다. 지금 까지 식물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한 종류로 물과 공기처럼 꼭 필요하지만 그리 귀하지 않은 자연 자원중의

blog.yes24.com

내가 이해하는 식물혁명은 식물을 바라 보는 우리 관점의 혁명을 말한다. 지금 까지 식물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한 종류로 물과 공기처럼 꼭 필요하지만 그리 귀하지 않은 자연 자원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필자 스테파노 만쿠소는 이 책 [식물혁명]을 통해 그와 같은 식물에 대한 낡은 이해를 뒤집고 식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신비롭고, 풍부하고, 또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필자는 이 책 [식물혁명]을 수준 높은 식물학적 지식을 담고 있는 과학책이자, 동시에 식물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는 실용서로 만들었다. 나아가 이 책은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를 이끈 문명을 동물적 문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대체할 식물적 문명을 제안하는 문명 비판서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인류를 이끈 기계문명은 동물조직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으며 사회조직조차 동물세계의 위계적이고 집중적인 권력 구조를 답습해서 채택해 왔는데, 이제 새롭게 이룩해야할 문명은 식물의 분산적이고 협력적인 구조를 원용하고, 저투입 고효율인 식물의 존재방식을 따라 새롭게 생태문명을 구현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문명은 식물적 생존 시스템을 원용하는 새로운 식물적 문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문명 비판적 주장까지 이르는 과정은 풍부한 식물학적 지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스테파노 만쿠소는 식물은 의식이 없다는 편견에 대해 도전한다. 필자는 뇌의 존재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생명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식물유기체는 뇌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용기관 없이 지능이 발달했다는 점을 주장한다. 실험을 통해 미모사는 뇌 없이 기억하는 식물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이어서 지금까지 동물을 모방하는 기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적용한 기술적 사례에 대해 소개한다. 아인슈타인은 신중하게 자연을 바라보면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인간은 동물을 중심으로 보고 식물을 소홀히 다뤘다고 본다. 필자는 이제 식물적 문명을 이끌 플랜토이드를 제안한다. 우리가 아는 안드로이드(Android 人造人間)는 인간의 외형과 특성을 모방하는 시스템을 말하고(로봇은 체코어 ‘robota’에서 왔다.) 이것을 뛰어넘어 식물의 작용에서 영감을 얻은 로봇인 plantoid는 향후 화성탐사는 물론 오염물질제거 등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의 가능성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식물은 단지 인간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염감이나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유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아놀리가 발견한 보퀼라는 실물계의 젤리그로 불리며 자신이 타고 올라가고 있는 관목의 잎에 따라 스스로 잎 모습을 변형시키는 위장술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모방사실보다 이 식물이 무엇을 어떻게 모방해야할지 어떻게 스스로 인식하는가에 라는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스테파노 만쿠소는 자연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시각 등 인식시스템이 존재한다고 보고,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아직 해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식물역시 분명한 인식과 판단이라는 결정과정을 가동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아가 인간과 식물의 동반자 관계를 탐색해보면 이 관계를 통해 종족의 존속과 번성을 이룬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인 밀, 옥수수, 쌀이라고 한다. 이 세 작물은 인류가 섭취하는 칼로리의 액 60%를 공급하고 있고, 미국인 한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의 약 69%를 옥수수 단 한 종류가 공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인간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줌으로써 이들 작물은 지구 표면을 가장 넓게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사례로 렌즈 콩밭에서 자라는 살갈퀴라는 잡초를 들고 있다. 이는 바빌로프의 모방이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살갈퀴는 렌즈콩 밭에서 자라면서 스스로 모방하고 변형되어 자신의 열매가 렌즈콩을 닮아가도록 한다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부분은 결과론적인 것을 의식적 모방으로 오도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간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다.

 

그리고 필자는 근육 없이 이동하는 식물의 능력을 확인하고, 페퍼라는 학자가 타임렙스를 이용해 이를 증빙했던 사례를 제시한다. 즉 식물은 동물과 다른 방식으로 지능을 갖추고 있고, 근육 없이 나름대로 운동할 수 있는 유기체라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식물 구조를 원용한 건축물로 빅토리아 연꽃을 모방한 크리스탈 팰리스의 사례를 들고 있고 나아가 우주라는 조건에서 식물의 생존가능성을 연구한 결과를 제시하고, 극악한 건조기후에서도 2000년 이상 생명을 이어가는 웰위치아 미라빌리스라는 식물을 소개하면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식물을 여러가치 측면에서 모방하고 활용가능함을 제시한다.

 

이 모든 식물의 특징에 대한 분석 끝에 필자는 새로운 사회솔루션으로 초록민주주의를 제시한다. 필자는 민주주의가 자연에 대항하는 제도라는 주장이 자연을 거스르는 개인적인 권력에 대한 갈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보고, 엄격한 노동기능의 구분과 확고한 계급구조 때문에 발전했던 사회들이 앞으로는 더 이산 존속하지 못할 것이라 예견하다.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탈피해 자기 영토에 정착하여 분산화 되고, 사회자체의 여러 세포들에게 결정권과 통제 기능을 나누어 주는 권력이 수평 분산된 그물형으로 탈바꿈한 초록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등 식물의 구조와 비슷한 탈 중심적 통신기술의 발달 덕분에 비계급적이고 분산형인 조직의 예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위기피디아의 사례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식물적 시스템에 가장 부합하는 사회제도로 계층구조 없이 구성원 전체에 의존하는 협동조합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현대 기술에 의해 네크워크라는 특별한 힘으로 통합된 협동조합의 전통이 미래를 위한 가치 있는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덧붙여 필자는 현제 직면하고 있는 농업 문제를 진단하면서 수많은 선진농업 지역에서 작물의 농산물 수확량이 이미 생물학적 최대치에 도달했다고 진단하고. 나아가 선진국의 획일적인 산업형 단작재배방식이 기후위기에 특히 치명적이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다양성이 살아있는 재배방식으로 전화해야 됨을 역설한다. 이런 필자의 입장은 그 진위를 떠나 인류가 직면한 식량 문제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선임에 분명하다.

 

이 책 [식물혁명]은 식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기후 변화 등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전략을 식물의 생존전략에서 배워오고 원용할 수 있음을 피력하는 식물적 문명을 주창하는 문명비판서다. 큰 기대없이 집어 든 책이 일으킨 반전은 기대밖의 충격을 주었고, 필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시각의 탁월함과 지적 신선함은 책읽기의 즐거움을 배가했다. [식물혁명]은 가볍게 읽기 시작해서 무겁게 내려놓은 책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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