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의 대표적  환경 농업 마을 하면 가장 먼저 문당리가 떠오른다. 나아가 문당리는 환경농업 말고도 여러가지 정부 지원 마을 사업을 시도하고 지역 공동체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가장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화천의 토고미마을, 이천의 부래미 마을, 그리고 단양의 한드미 마을까지 성공적으로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다양한 사업을 수행해 온 마을 을 보면 어느 마을이나 반드시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문당리도 마찬가지다.  한국 환경 농업의 메카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바로 주형로선생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오늘의 [문당환경농업마을]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책 [작은 농부의 100년계획서]는 희망제작소에서 기획된'희망을 여는 사람들' 시리즈 중 9번째 책이다. 희망제작소는 주로 우리 사회의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지역사회나 농업, 그리고 퇴직자 등에 주목하고 그들을 통해 우리사회의 대안적 희망을 모색해 왔다. 그와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희망을 여는 사람들' 시리즈는 그동안  옥천신문을 만든 오한흥님, 장성 한마음공동체를 만든 남상도님, 바보군수라 통하는 완주군수 임정엽님 등을 취재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각각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왔다.



이 책은 어떻게 인간 주형로가 농부가 되었는지, 그것도 환경농업을 선도하는 환경농업운동가로 변신하여 문당리를 중심으로한 지역사회일원을 환경농업단지로 만들고 전국적으로 환경 생태농업의 중요성을 확산시키는데 몰두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해 준다. 또한 그가 매 순간의 선택의 귀로에서 어떻게 옳은 길을 선택했고, 그렇게 선택한 길을 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 알아가는 만치 작은 농부 주형로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고, 한명의 훌융한 농촌운동가의 삶에는 또 다른 수많은 동반자가 같이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와 함께한 동반자중에는 누구보다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있을 것이고, 또한 그의 뜻을 함께한 이웃 농민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작은 농부 주형로를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고, 좌절의 순간 일으켜세운 스승 홍순명을 빼고는 오늘의 주형로, 오늘의 문당리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스승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스승 홍순명과 제자 주형로의 관계는 스승도 드물고 제자다운 제자 역시 귀한 세태에서 큰 귀감이 된다. 거의 극적이다시피한 오리농법의 도입 계기가 바로 그의 스승 홍순명선생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도 대단하지만, 그와같은 계기로 도입된 오리농법이 고 노무현대통령에 의해 봉하마을에 도입되는 과정 역시 감동적이다. 의인은 의인을 알아본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모두가 버리다시피한 농업/농촌에서 새 희망을 찾아 먼길을 걸어온 주형로의 발자취를 정리한 이책에서 주형로에 의해 오리농법이 우리나라에 보급되는 데 있어서 스승 홍순명의 극적인 역할 못지 않게 감동적인 것은 바로 [문당리 100년 계획서]다. 이 역시 일본의 농촌에서 벤치마킹해 온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마을의 미래를 구체화한 '꿈'을 담고 정리하는 노력이 향후 마을 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챈 주형로의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미래가 없다는 농촌에서 한권의 보고서로 구체화된 마을의 꿈은 지친 농민에게 희망을 주고, 지표를 상실한 마을 공동체에 구체적인 미래상을 제시함으로써 동력을 일으켜세우는 지대한 역할을 해내었을 것이다.

농촌마을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온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아직 마을 사업의  방향성마저 잡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독자의 한 사람에게 다가온 작은 농부 주형로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참 많지만 우선은 마을사업의 과정에서 받는 고통 그리고 즐거움은 이루다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모든 과정이 글의 행간을 넘어 뼈져리게 느껴져 오는 것은 같은 농업인으로서 가지는 동병상린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면 주형로님은 유별난 구석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결기와 고집으로만 똘똘뭉친 그런 사람은 아닌것 같다. 사실 옹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람이 사람사이에 통로를 만들고, 의기를 투합시키고, 더불어 마을 공동체를 일구어나가는 일은 한다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형로선생은 희망제작소의 주목을 받기 전부터 유명인사다. 그동안 수많은 상을 타고, 언론에 노출되어왔고, 무엇보다 같은 입장의 농민들에게는 하나의 멘토로 자리잡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때 주형로선생에게는 희망제작소가 기획한 '희망을 여는 사람들'에 선정된 것은 다른 모든 보상을 합치고도 남을 경사가 아닐까 생각이 된다. 농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축하드린다.




반응형
반응형

내가 이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다. 과연 유기농법으로 사과재배가 가능할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내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감당할만 한 농법인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농사 10년 동안 참 많은 작목을 키웠다. 수박부터 감자, 고구마는 물론 고추에 각종 잡곡 거기다가 참깨며 대추농사까지 지었으니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능한 작목의 거의 다를 키워본 셈이다. 초기 5여년은 일반농법으로 남들처럼 농약치고 화학 비료 뿌리는 농사를 지었고, 그리고 다시 몇년은 [저농약농산물인증]을 받고 비료와 농약을 관행 사용량의 절반이하로 줄여가며 농사를 지었다. 5년전부터는 아예 비료와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고  [무농약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13년동안의 경험을 통해 농사가 힘들고 돈안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고, 나아가 한국 농업의 미래는 더 비관적이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달리 개인적인 대책을 세울 재주는 없고해서 우선 땅파먹는 밭농사는 면해보자고 올봄 큰 맘먹고 2000여평의 밭에 450여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다. 와이프는 나름의 직업이 있기때문에 순전히 내 혼자하는 농사로 그 정도 규모의 사과밭이 적당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과 농사에 대한 기술이 전무한데다가 특히나 사과 친환경 재배에 대해서는 더더군다나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동안의 친환경 농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보다는 그 어려움을 더 절실히 느껴오던 터에, 사과재배를 무턱대고 유기농법으로 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것 같았다.  일단은 유기농 사과재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최종 판단을 내려야할 처지에서 이책을 주문했다



이시카와 다쿠지라가 쓴 [기적의 사과]는 일본의 대표적인 친환경 사과 농사꾼인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분의 친환경 사과농사의 궤적을 담고 있다. 필자의 눈은 단지 그의 사과농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무라의 인생 역정과 삶의 철학을 파고 든다. 다시말해 이책은 기무라씨의 무농약, 무비료 사과재배 성공기를 통해 곧바로 현대 문명비판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기술만능, 효율만능에 젖은 현대 농업을 대체할 대안적 농업,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기적의 사과]는 이 책의 제목이기 이전에 먼저 기무라가 재배한 사과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한가보다. 10여년의 고난을 겪고 나서 기무라씨가 키운 사과는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사과로 일본인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고 한다. 그가 키운 사과는 온라인상에서 주문을 받자마자 3분만에 매진되기도 하고, 그가 키운 사과만 재료로 쓰는 한 레스토랑에서 스프를 먹어보려고 하면 무려 1년전에 예약을 해야지만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이런 사실만 두고 본다고해도 기무라의 사과농사는 거의 '기적'을 낳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기무라씨의 사과농사는 그 결과만 두고보면 누구라도 따라 해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보면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오직 그 만의 삶을 담고 있다. 단순히 사과농사가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 나아가 그의 인생관이 그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사실 과도한 인간의 개입과 기술의 도입을 거부하고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중시하는 기무라씨의 농법은 지금은 너무 잘 알려져있다. 최근들어 온갖 친환경 농법이 소개되어 있고, 기무라씨가 실천한 '자연농법'은 하나의 주요한 친환경 농법으로 국내에도 잘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기무라씨에게 있어서 친환경 농업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문제는 실천이고 실천을 통한 가능성의 확인일 것인데, 나는 그 지난한 과정을 감내할 자신이 있는가?  

책을 펴고 흥미진진한 기무라씨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금새 뒤표지에 이른다. 그만치 그의 삶이 드라마틱하고 필자의 생동감 넘치는 필력이 감탄스럽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애초에 이 책을 손에 쥐게된 이유를 되짚어 보면, 내가 의도한 소기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는 판단이 든다. 이 책은 사과재배 기술을 다루는 책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헛읽은 것은 분명 아닌데 책을 다 읽고 난 뒷맛이 무척 쓰다. 기무라씨가 성공한 친환경 사과 재배를 나라고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가 감내한 지난한 세월을 되씹어보면 그를 따를 자신이 없다.

이 책의 필자가 전제한 많은 '가치'들이 있다. 그것을 시시콜콜히 나열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책을 통해 다시 야기된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이 과제로 남았다. 그 과제를 해결하는 지점에서 나의 사과농사가 시작될 것 같다. 

우선은 이책을 통해 농업에만 유독 현대 과학의 적용을 기피하는 정서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나는 물음이 생겼다. 자동차없는 생활이나 현대적 의술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듯이 현대 과학문명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경계와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원리주의적 비판과 맹신사이의 균형이 필요할 것이고 결국 개인은 합리적 타협점을 찾아 삶의 지표로 삼거나 생활의 준거로 삼는 것이 아닐까한다. 그러면 농업은 그 합리적 타협점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주변에서보면 농약을 물쓰듯하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현대 기술 문명을 거부하고 오직 호미와 낫만으로 한가족이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분도 계신다. 단순한 도구와 육제적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그분들을 나는 무척 존경하지만 따라 할 자신도 없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 책의 저자 이시카와 다쿠치는 명실공히 '대중작가'인듯. 농업에 대한 지식의 전달보다는 가ㅣ무라 아끼노리씨의 삶, 그리고 그의 농사 철학에 서술의 중심을 두고 이 책을 쓰고 있다. 농민을 대상으로 한 [기무라 아끼노리의 유기농 사과 재배기술] 이라는 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 [기적의 사과]는 문제는 농업을 단순화, 신비화함으로써 대중의 농업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안타깝지만 농민은 생태운동가가 아니다. 품종개량과 새로운 작목의 이식  그리고 고품질 고상품성을 중시하는 시대가 고투입 석유농업을 보편화 했다. 시대 탓을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남들이 차로 서울 부산을 오르락거릴 때 자전거나 아니면 지게를 지고  걸어서 짐을 나르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농업은 인류가 영위해 온 가장 오래된 산업의 하나이고 또 생명을 다루는 원초적인 노동이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인지 농업에 대한 이해는 특히나 이념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결국 농법과 이념이 상호 침투되어 나중에는 '농업 기술'이 아니라 '농업 도덕'이 되어 버리는데 이는 개인들의 사고뿐 아니라 농업정책에 혼란을 초래하는 측면이 있다. '기적의 사과'에서 기적만큼이나 비실재적이고 비합리적인 재배기술은 많은 사람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겠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동의할 수가 없다. 솔직히 농업에 부가되는 도덕적 가치, 도덕적 의미가 농업, 농민에게 득일까 해일까 모르겠다.

책이 보여주는 세상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간격 혹은 균열을 나의 개인적인 분열일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책과 현실이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다시 나의 사과농사는 출발점에 서 있다.
반응형
반응형


'나는 치명적이다'! 
'왜?'
'여자니깐!'
여자는 '아름다워서, 위험해서, 위대해서' 치명적이다.
누구에게?
다름아닌 남성권력에게!!
 
남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가 시작되자 모든 권력은 남성성과 합체한다.
교회와 군주, 왕실과 문중은 남성권력의 화신이다.
여자는 신성한 권력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위험세력이다.
모든 여자는 남성을 유혹해 권력의 비밀을 탐지해내는 데릴라거나
경국지색의 양귀비거나 요녀 장희빈이다. 
지배자인 남성권력에게 여성과 남성이 우열이 아닌 상호 의존적 관계임을 주장하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선지적 여성은 바로 '마녀'였다.
그리고 간혹 남성권력에 균열을 주는 전위적 여성이 출몰했지만
가차없이 색출되었고 무자비하게 처단당했다.
'왜? '
'여자니깐!!'

그렇게 남성권력은 탕녀와 마녀, 요조 숙녀와 열녀를 만들었고
나혜석을 처단하고 신사임당을 옹립했다.

인류는 자신의 어머니가 여성이고, 자신의 딸이 또한 여성임을 자각하는데 수천년의 세월을 필요로했다. 여자가 여류작가가 되고 다시 여성작가가 되는데도 만만치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문명의 진보는 여성과 남성의 상호의존성과 동등성은 증명했고, 그리고 드디어 여성이 작가가 되고, 작가가 여성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마녀사냥꾼은 자본의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위대한 마녀사냥꾼은  여성의 상품화라는 신 병기로 무장한채 숲을 나왔고 순식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이제 자본화된 남성권력은 실효성을 잃은 마녀를 대신해 비쥬얼 섹시스타를 앞세우며 지구의 절반인 여성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에 여자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섹시한 상품이길 거부하는 여성은 이제 찌질이거나, 루즈다. 성형과 다이어트는 여성이 인간이 되기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다.
섹시스타는 외친다.
'섹시 천국! 불신 지옥!' 

지배권력에 대한 반역의 음모는 권력의 바같에 웅크린 바로 그 찌질이와 루즈들 사이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혁명은 남성권력의 바같에서 앙칼진 목소리로 일어난다. 여성은 남성지배사회를 전복하려는 반란의 주모자들이다. 그 반란녀들이 예술이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들은 지배권력의 바닥을 보았고 예술이란 무기를 벼려 지배자 남성의 등에 칼이 아니라 꽃을 꽂는다. 예술이라는 신병기는 꽃잎처럼 부드러워 적을 상처내지 않은채 굴복시키고, 거위털보다 부드러워 뭇생명이 깃든다.  차가운 금속성 칼날을 삭히는 촉촉함과 생명의 온기를 가져 인프루앤자보다도 빠른 전염성을 가진 그녀들의 무기는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그래서 여성예술가는 모두 전위이고 혁명가다.



그런 시대, 그런 세상에서 필자 제미란은 한국의 대표적 여성예술가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녀들과 포옹하고, 대화하고, 차와 밥을 나누며 그녀들의 예술세계를 헤집고, 느끼고, 참여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온전히 한권의 책안에 담아냈다.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14명의 여성 작가를 담고있는 [나는 치명적이다-경계를 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예술]은 여성적 삶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영위되고 예술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성작가론이자 동시에 여성예술론이다. 여자인 나는 어떻게 작가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동시에 여성작가인 나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속에 온전히 녹여넣고 나만의 내밀한 세계를 창조하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필자 제미란은 사실 또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14명의 여성예술가의 아뜨리에를 찾아 나선 것은 단지 그들 작가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그들의 예술세계를 향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리움이 된 그림을 찾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기 위한 순례의 길목에서 단지 14명의 여성예술가를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값싼 기획출판물과는 달리 [치명적이다]는 필자 제미란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예술적 탐색과정, 그리고 그녀들과의 맞남으로 응축된 자신의 삶의 기록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적 고뇌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다]는 결국 미술가 제미란의 예술론이기도 하다.

제미란이 만난 14명의 여성작가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는 끈은 여성성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여성성을 예술로 구현해낸 작가가 있는가하면 여성주의적 자각을 작업으로 승화시킨 작가도 있다. 그것을 여성적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로 나누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그녀들은 회화와 설치, 행위예술과 공예를 아우른다.

필자의 입담과 필력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어느새 14명의 그녀들을 아우르는 여성미술의 고갱이를 대면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으면서도 그들 14명의 여성작가가 가진 공통분모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의 여성미술의 지평이 그만치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성미술이 미술의 한 파트가 아니라 미술전체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트렌드라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자가 초두에 던지 '공명(共鳴)'이라는 화두앞에 다시하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공명은 동일한 삶의 기반, 경험의 공유를 넘어 존재기반의 본질적인 동질성에 기반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적 현실에서 여성으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14명의 작가가 일으키는 공명의 사이클 어디쯤에 필자 제미란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끄트머리 어디쯤 미미한 구석에 독자인 나의 자리역시 가지고 싶다.
김원숙, 김은주, 김주연, 함연주, 유미옥, 윤석남, 윤희수, 류준화...... 제미란, 그리고 나!

반응형
반응형

<일본재발견>의 저자 이우광은 삼성경제 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본연구팀장이다. 저자는 인본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일본에 대해 더 알고싶은 것들 대부분에 대해 충분히 알려줄 수 있는 분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한 블로거의 리뷰를 보고 책의 구입을 결정했다.

내가 가진 일본과의 인연은 4일간의 짧은 여행 한번과 와이프의 일본인 친구 두분의 이틀간의 우리집 체류, 그리고 몇편의 소설과 만화영화로 만난 것이 전부다. 사실 일본은 올해초 큐슈의 농촌마을사업에 대한 연수를 다녀오게 되면서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된 나라다. 그전에는 일본에 대해 거의 무관심했다. 일본은 나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양 착각속에 방치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한번의 여행을 계기로 갑자기 나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짧은 여행으로 받은  일본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본은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이 있는 깨끗한 나라' 였다. 이후 일본은 지속적인 나의 관심국가가 되었고, 올 가을이면 두번째 일본여행도 떠나볼 계획이다. 
   

이 책 <일본재발견>은 일본의 문화, 일본인의 삶 전반을 다루고 있는 일본 안내서는 아니다. 전문 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인 필자가 보다 대중적인 필치로 일본경제, 나아가 경제적 측면의 일본문화와 일본 사회에대한 나름의 이해를 피력한 책일  뿐이다. 한국인에게 일본은 항상 '경제'적 라이블로서  먼저 다가오고, 다음으로 우리 자신의 문화적 거울이랄까, 우리를 들여다보고 비교해보고 분석해 보는데 준거가 되는 나라로 받아들여지는 성격이 강하다. 다시말해 일본은 한국인의 의식속에서 경제뿐 아니라 문화적 비교대상, 경쟁대상인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과 한국은  이십세기초 수십년에 걸쳐 병탄이라는 특수한 악연이 있는 관계로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고, 공평무사하게 판단하기가 어려운 역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대한 판단은 항상 과소와 과대의 양극단에서 표출된다. 따라서 필자는 과소평가와 과대평가사이에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일본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고자 한다. 물론 경제, 경영적 관점에서 바라다본 일본이라는 한계와 특징을 동시에 드러내지만 필자는 한국인의 의식속에 굴절된 일본의 상을 바로잡고자 시도한다. 물론 그 시도는 일정정도 성공하고 또 일정정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장으로 구성된 이책의 첫장은 일본의 사회 문화적 트랜드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다. 이미 유행어가 되어버린 '오타쿠'나 '더블싱글', '하류', '초식남', '미니멀 라이프' 등에 대한 소개와 분석을 통해 현재 일본이 처해있는 객관적인 문화적, 정신적 상황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들 유행어를 통해 일본의 현상황에 대한 이해의 문을 열고 곧장 일본의 경제를 파고 든다. 이책의 나머지 4개 장은 모두 경제를 주제로 한다. 이들 4개의 장은 '일본의 CEO', '일본의 경쟁력', '경제전략', '국가 시스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그와같은 주제를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막연한 경쟁의식을 기반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일본으로 부터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회피하여 일본을 이길 것인가?'가 이 책을 집필한 필자의 유일한 관심사로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일본은 일본전문가에게조차 객관적 대상일수가 없었나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로 일본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일본과 한국은 좋은 이웃이자 협력상대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책의 내용은 일본의 경제를 근간으로 하지만  경제 지표를 통계수치로 제시하고,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는 난해한 작업을 담고 있지 않다. 이책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다. 다시말해 이 책은 경제를 통해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화화된 경제를 소제로 삼고있어 경제 문외한이자 일본 초보자인 나같은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그런데 쉽고 가벼운 책의 한계인지 '삼성경제연구소적 편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필자의 일본 이해에 나타나는 몇가지 편향이 눈에 거슬린다. 먼저 '경쟁'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은 경제나 기업을 모르는 나같은 독자가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모험을 시도하지 않고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현상유지적인 조화를 도모하는 입장'을 나타내는 '요코나라비의식'에 대한 비판이  현 자본주의 사회의 보상체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미국식 CEO제도에 대한 선망으로 귀결되는 것이 바로 그와같은 필자의 인식의 한계를 나타낸다. 다시말해  "일본 CEO는 미국같은 충분한 보상이 없어 현상유지적이고 모혐을 회피한다'는 필자의 견해는 공감할 수 없다. 필자의  경쟁력 절대주의는 위험하다.  삼성이 재산과 경영권의 세습에 골몰하고, 노조에 대한 원시적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나름의 경쟁력'은 가질 수 있다면, 높은 경쟁력 하나로 모든 악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일본 경제의 비효율성이 삼성이 임원에 대한 성공보수를 수십억씩 주는 그런 제도와 문화가 없어서라면 차라리 비효율이 더 낮지않을까? 기업의 경쟁력을 올리기 위한 임원의 성공보수 수십억은 노조를 탄압하고 탈법을 자행하는 비 윤리적 기업관행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경쟁력절대주의' 사고의 한계는 쉽게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경제의 사회성, 경제의 정치성에 대한 고려없이 너무 경쟁에만 매몰되어 있다. 노예제도가 '경쟁력'이 있다고 정당화되고 다시 도입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JAL의 부도, 토요타자동차의 위기, 소니의 정체 등을 바로 이해하고 이를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화두인  '잃어버린 10년'으로 나타나는  일본사회전반의 위기를 이해하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적, 논리적 연관성에 대한 일목요연한 이해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 각각의 사실이 나열되어 있을 뿐 경제에 투영된 일본의 전체상을 제시하는데 이 책은 성공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도 나 스스로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와같은 이책의 나열식 서술이 가지는 한계때문이다. 이책은 입체적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통해 현제 일본의 전체상을 제시하는데 일정정도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일본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뢰'의 문화,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 소비의 증가와, 사회적 기부, 사회적 참여의 증가 등 침체에 빠진 일본이라는 상과 어울리지 않는 많은 현상과 최소 벌이와 소비를 지향하면서도 사회적 기부에 아낌이 없는 신세대의  미니멀라이프 스타일은 가히 오늘의 일본이 과연 위기인가를 의심케 할만치 일본 사회의 긍정성과 건강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어쩌면 일본은 침체에 빠진 것이 아니고 '정상화'된 것이 아닐까? 경제만능주의, 개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그 어수선함이 '역동성'으로 미화되는 시대가 가고 나면 우리도 어쩌면 '맥'이 빠진것 같은 사회, 외향적 성취보다 내면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책을 덮으며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내가 일본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몇가지를 정리해 본다. 먼저 예의바르고 도덕적인 개인과 군국주의적 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두번째 서양의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면서도 기독교의 침탈로부터 신도와 불교를 지켜낸 일본만의 정신구조가 무엇인지 알고싶다. 세번째 철저한 안전의식, 장인정신에 대한 신봉, 사회의 도덕적 투명성 등에도 불구하고 지금 초래되고 있는 일본경제의 침체는 어디에 기인하는 걸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반응형
반응형


오늘은  "꿈많은 청년" 노무현 대통령의 기일이다. 그래서 내리는 비인가 보다. 전날 시작한 비가 하루 온종일 내리고도 못다내린양 밤늦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농사일에 쫒겨 도착한지 일주일 넘어 손에 들지 못했던 책을 펼쳤다. 그는 [운명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깊은 슬픔을 감춘듯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싱긋이 웃어보이며 우리를 떠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는 너무도 컸다. 세상은 꺼꾸로 돌기 시작했다. 해는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졌으며, 낮에 달이 뜨고, 밤에 해가 떴다.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전용어가 되었고, 평화는 전쟁을, 환경은 무자비한 토건공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모든 진보적 가치는 좌익뺄갱이의 기만선전술에 불과한 것으로, 복지에 대한 요구는 거지근성으로 치부되었다. 진솔함과 정직함은 무능력의 다른 이름으로 뜻이 바뀌었고, 분권과 자치, 대화와 타협은 사전에서 사라졌다.  

[운명이다]는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간단한 가족사와 어린시절의 추억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자의식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가난에 대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 자라나는 청년 노무현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나고 자라고 살았던 시대,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대의 흔적들을 만난다. 그는 어떻게 한 평범한 인간이 시대의 격랑속에서 한명의 시민운동가로 정치가로 그리고 마침내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살았고 그리고 죽어갔는지 담담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이야기를, 한명의 정치가가 아니라 한명의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불의에 맞섰고, 어떻게 '사람사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분투했는지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묻어난다. 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를, 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실패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쉬 끝나지 않고았 낙숫물소리와 함께  신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나는 오늘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나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어야했다. 지인으로 부터 문자가 온다. '혹시 봉하마을에 와 계신가 해서요?' 나는 오늘 집을 나서지 않았다. 하루종일 [운명이다]를 읽고 그의 삶을, 그리고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생각했다. 가슴이 미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삶과 우리시대의 과제가 뒤엉킨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묻고 또 물었다. 



그는 부림사건을 통해 새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긴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었다. 도반이 없어도, 노자가 떨어져도 그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길의 끝이 모멸과 오욕, 좌절과 실패의 구렁텅이일지라도 그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지구가 꺼꾸로 돌기 시작하던 날 [운명이다]는 멈춘다. 그의 삶은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술수가 정직을, 돈이 사랑을 이기는 세상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은 비장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이웃 형님의 한분같이 소탈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의 죽음은 그만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었기에! 책을 덮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의 몫이다. 그가 던지고 간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꿈은 온전히 우리 손아귀에 남아있다. 그리고 삶들은 계속되고 그 꿈은 싹을 피우고 자라날 것이다. 노무현의 자서전은 우리의 자서전이 되고, 우리의 자서전은 완결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한다. 그것은 운명이기 때문다!!

반응형
반응형


<길위의 미술관>을 썼던 제미란님이 새 책을 내었네요.
국내외 14명의 대표적 여성작가를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의 예술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얻은 필자와의 개인적 교감까지
한권의 책으로 고스란히 담아내었네요.
김원숙, 윤석남, 함연주, 윤희수 등을 포함해
저의 아내 류준화도 14명의 작가중 한명으로 포함되었는데,
표지 그림이 지난 2009년 11월 가나아트에서 가진 개인적에 출품했던 
아내의 작품 [물의 몸]이라서 더 자랑스럽네요.

책이 도착하는데로 열심히 읽고 한편의 초라한 서평이라도 올리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황톨톨이가 옛날에 정짓담살이 혔지

희망제작소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총서 21
정병귀 외 글 / 2009.06 이매진

--------------------

책제목만 보고 마음대로 상상했다. 황톨톨이는 황씨 성을 가진 툴툴거리길 잘 했던 사람이고, 정짓담살이는 '정짓간'이 '부엌'을 의미하니깐 동냥질을 했다는 말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되었는데 '황톨톨이'는 황씨 성까지만 맞고, '톨톨이'는 톨톨 털어서 마지막 낳은 딸이다. 다음 자식은 아들을 낳을 것이다'는 의미란다. '정짓담살이'는 남의집 식모살이를  뜻한단다.

이렇게 이책은 우리의 삶의 토대이면서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져버린 토속적 삶을 담고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옛 선인들인 것은 절대 아니다.  이책의 주인공은 20세기 초중반에 나서 21세기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부모 세대로 모두 현존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들의 삶은 그대로 한국 근대사가 되고 그분들의 세간살이는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이 된다. 그것은 지난 한세기 동안 굴곡 많은 한국 근대사 때문이기도하지만, 또한 지난 개발독재시대를 지나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낡았다는 이유로 무가치한 것으로 배척되고, 먹거리에서 입을거리까지, 주택부터 교통수단, 다양한 생필품 결국 가치체계, 신앙, 덕목같은 정신세계마저 급격한 변화를 넘어 완벽한 단절과 '아메리칸 스탠다드'로 재구축된 우리의 뿌리없는 삶때문이다.


이책은 그와같은 현실에서 사라져 가는 우리 삶의 원형질을 담고 있는 농촌공동체의 토속적 삶을 발굴하고 그 삶속에 오랜 세월동안 숙성시켜 온 인류가 지켜가야할 미래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기획된 책이다. 지역사회 혹은 농촌공동체는
자본의 변방이지만 세상의 변방이 아니다. 바로 그 전통적 공동체성이 살아있는 지역사회의 가치를 발굴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총서’는 희망제작소 뿌리 센터에 의해 기획되고 출판사 이메진을 통해 발간된 21번째 책이다.
 

겁나게 재미진 백운 사람들 이야기라는 부재가 달려 있는 [황톨톨이..]는 백운 이라는 농촌 마을을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 사는 이야기 치고 재미진이야기가 아닌 경우는 어디있겠는가? 삽짝밖을 지나가는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라도 붙들고 막걸리라도 한잔 건네며 할매요. 할매 옛날이야기나 함 해보소라고 해 보시라. 봇물 터지듯 구구절절 이어지는 고달픈 인생살이, 왠 사연도 그렇게 많은지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고,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적으면 소설책 10권도 더 될거”라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씀은 조금의 거짓이라곤 없다.

백운 마을 사람들의 살아 온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비나리마을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와 오버랩되고, 뒤섞인다. 시집살이오기전에 꿈 같은 소녀시절, 부모형제와 오손도손 모여살며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며 살던 아름다운 그리운 시절의 추억담을 시작으로 할머니의 말씀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얼굴도 모르는 양반한테 시집이라곤 와서 사랑은 고사하고 허구한날 시어머니 구박에 서방은 노름질에 술타령이고 그래도 더러운게 목숨이라고 견디다보니 애는 왜그리 덜컹덜컹 잘 들어앉는지 10남매를 줄줄이 낳아 키우다 보니…  그리고 그 서방님은 일찌기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보고싶지 않으시냐는 나의 당돌한 물음에 '그놈에 영감 살아 돌아올까 겁난다'던 이웃 할머니도 이제 이 세상사람이 아니시다. 

이렇게 [황톨톨이
… ]는 아린 우리 부모세대의 삶을 통해, 바로 지금 한국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옛날 이야기책이 아니라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한 책이다. 단지 과거를 보여주는데서 끝나지 않고 한국 농촌의 미래, 세상의 미래를 같이 생각해 보게하는 가치있는 책이다.

 

반응형
반응형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뭐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질문에는 꼭 아무 쓸모없는 철학 공부는 왜 했냐는 공격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질문 끝에는 꼭 능청스런 표정으로 철학을 [철학관]과 관련 지으며 혹시 사주 팔자 볼 줄 아냐고 물어오곤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들어가 1990년대 초반까지 다녔지만, 나는 그뒤 어떤 '철학적 사유'도 없이 막 사는 삶을 살아왔고, 그나마 학교다니면서 얻었던 빈약한 철학적 지식마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깡그리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 세월동안 '철학'과 관련해서는 그런 성가신 질문을 모면하는 나만의 메뉴얼을 갖추었을 뿐이다. 일단은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웃고 넘기지만 알만한 사람이 그것도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올 때는 일단 상대를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

아이고 무식하기는,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하고 뭐했는데요?” 

좀 더 편한 관계일 땐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니 상판데기 관상을 보니 올해 넘기기 힘들겠다. 우야면 좋노!”

그리곤 이런저런 개론서에서 배웠던 어원적인 분석을 보여주며 [philosophy = philos()+ Sophia()]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니, 세계관이니 그러다가도 안되면 철학자체의 개념 변천사까지 들먹여본다.



인간의 모든 지적인 행위 전체를 아우르며 학문'이 곧 '철학이었던 시대를 지나, 철학에서 자연과학이 분리되고, 다시 심리학마저 철학에서 분리 되면서 철학에 정체성의 위기가 초래되고 철학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은 곧 철학의 영역을 축소하는 과정이었다고. 이렇게 말해 보지만 이것은 질문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 것이 분명하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은 '철학'의 현실적인 쓰임새가 무엇인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도대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나 자신도 그같은 질문자의 물음을 해소해 줄만한 답을 제시하기가 궁색하다는 데 있다.
   
그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철학에 대한 이해, 혹은 나 자신의 태도가 이제와서 다시 철학을 공부하고싶은 나의 욕망을 근거짓는 주춧돌일 수 있다. 왜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철학공부가 다시하고싶은가! 지금 다시 하는 철학공부가 나에게 대단한 깨달음을 주거나, 세상을 바라다보는 통찰력을 가져다 줄 것같지도 않고, 내가 하는 농사, 마을일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의 생계를 해결하거나 나의 사회적 활동을 북돋아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더더군다나 이미 학자의 길을 가기에는 멀어져도 한참은 벗어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대단한 저술가가 되거나, 하다못해 나름의 '인생철학'을 구축하고 어떤 수준에서든 한명의 사상가나 철학자로 입신할 가능성은 사실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철학공부를 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들과 더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철학의 매력때문이다.

먼저 나는 학생시절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너무 하지 않은 학부시절이 끝나면서 그 사실이 너무 아쉬워 무작정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없이 오직 나태한 학부시절 못한 공부를 다시 한번 재대로 해 보겠다는 얄팍한 욕구에 이끌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사실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던 7~8개월동안 공부한 것 말고는 대학원 시절 역시 학부시절을 지배했던 게으름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결혼과 여타 사회적 활동까지 부가된 대학원시절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끝내 학위조차 얻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못다한 지적 탐구에 대한 미련이 그 솔직한 이유의 하나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스스로 받아들이기가 참 곤혹스럽긴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를 잊고 살다가도 동년배의 나온 배와 벗겨진 이마를 마주하거나, 나와 친구들의 다 자라버린 자식을 대하게되면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진학은 물론 군대를 간 아이들도 하나둘이 아니고, 반갑지않은 청접장이 날아들 날도 얼마남지 않은게 사실이다. 마흔 아홉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참 막연하지만 내삶의 의미를 묻고 싶은 욕구가 마음 한켠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허무의 바다인 세상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그 무의미가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느낌들을, 세상의 본질이 허무만을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천착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 같다. 

사실 서양 철학은 재정립을 거듭하다가 비트겐슈타인에 와서는
가치판단마저 배제되고 철학이 순전히 언어의 의미를 명학히하는 작업으로 국한되기도했지만 사실 철학이 삶의 의미를 묻는 지적 사유가 아니라면
철학은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내가 스스로 이해하는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근거를 묻는 인식적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사는지, 생물학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는 이유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이 이해하는 철학이,
대중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사용하는 철학과 같은 의미일 순 없다.
'철학'을 검색어로 웹검색을 해보면 당장 드러나지만
우리는 일상속에서 수없이 많은 경우에 '철학'이라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정치가들의 '통치철학', 자본가들의 '경영철학', 교사들의 '교육철학' 등등
대중적 의미에서 '철학'은 어떤 판단이나 사고의 저변에 그것을 가능케하는 근본 원리같은 걸 말하는것 같다. 다시말해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학문, 모든 사고, 모든 행위의 저변을 형성하는 인식의 틀이나, 가치의 근거같을것을 '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철학'을 비학문적 도닦기를 포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대중들의 뇌리속에서 철학은 '학문'과 '득도'를 다 포괄하는 인간의 인식적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철저히 학문적 견지에서 이해한다. '득도'는 도인들의 몫이고 나는 득도에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명징한 세계인식과 나의 삶을 근거짓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속에서 나의 작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어떻게 철학공부를 할 것인가에 있다.
사실 대학시절, 학자의 길을 나의 인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때에는 학자만치 시시껄렁한 삶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틀, 교수라는 직업이 나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옭아매는 걸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길로 인도하는 방식의 철학공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농사로 밥벌어먹고살아야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좀 달라야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선은 어쩔수 없이 주제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지적 성과도 시간적 여유도 없는 처지에 맞춰 철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이어갈 생각이다.

'철학하기'와 '철학자로 살기'가 괴리된 현실에서  '재미'와 지적 허영으로 하는 철학공부를 벗어날 방도를 미리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하는 철학공부가 그 과정에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막연히 희망해 본다. 

반응형
반응형

소피 칼은 최고의 거짓말장이다. 그녀에게 타인을 속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고, 나중에는 자신마저 속일 수 있는 정말 탁월한 거짓말장이다. 그녀의 글은 읽는 사람은 모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는 그녀 자신도 스스로 한 말이, 스스로 쓴 글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것인지 모르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는 예술적 성취를 만끽한다. 그녀는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악이 선을 이기는 세상의 못된 섭리를 비판하거나, 아니면 꽉짜인 진실이 지배하는 갑갑한 세상을 허물어뜨리고 가상의 영역까지 확대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그녀의 예술적 의도가 문명비판인지 세계창조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사진예술가이자, 개념예술가, 설치미술가이기도하고 또한 문학과 미술, 문학과 사진의 영역을 넘나드는 예술장르의 장벽을 허무는 파괴의 여왕이기도 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딱 한가지였다. 그녀는 익명으로 소위 심부름센타에 의뢰해서 자신의 신상정보를 제공하고 바로 자신 '소피 칼'을 추적하게 한다. 심부름센타의 사설 탐정이 그녀를 미행해 찍은 사진과 그녀를 추적해 작성한 자료를 넘겨 받은 그녀는 [미행]이라는 책의 자료로 고스란히 활용한다. 한낮 심주름센타의 사설탐정이 건넨 사진과 자료가 그녀의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선세이셔널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피 칼의 예술적 성취에 감응한 와이프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진실된 이야기]는 그녀의 그와같은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그녀는 객관적 태도로 바같세상의 아름다움을 논하거나 탐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작품 속에 개입한다. 객관적 태도로 위장하고 '신'의 손으로 그린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관습적 방법을 내팽겨치고, 그녀는 자신의 예술작품 구석구석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을 예술적 소재이자 창조적 주제로 격상시킨다. 최소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 그녀는 창조신이자 스스로 만든 세계의 지배자이다. 소피 칼은 재래의 '초상화'의 기법을 차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은, 초상화 속에서 대상화된 작가와 대상화된 자신을 그리는 초상화 밖의 화가로 구분되는 방식을 거부한다. 그녀는 재래의 자전적 소설 속에서 대상화된 작가와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 밖의 작가가 구별되는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히 개입하고 동화되고  작품안과 작품밖의 자신이 한시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진실된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 특수성을 갇는다.

[진실된 이야기]는 엄마의 남자 친구가 친부가 아닐까 짐작하고 의심하는 아홉살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좀도둑질 재미에 빠진 열한살 때의 이야기가 가벼운 웃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면, 책을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웃음기는 사라지고 처절한 한 여자의 삶이 이어진다. 이혼과 결혼, 또 결별 그리고 결혼,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사물과 사연들, 그리고 임의적이고 심각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지만 책의 결론은 없다. 어쩌면 소피칼은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가져온 지난 삶을 실제로 살았던 삶과, 살았으면 하는 삶, 그렇게 살 수도 있었던, 가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던 가상의 삶을 섞고 비벼 완전한 하나의 '거짓된 그러나 진실된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피 칼은 자전적 소설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다. [진실된 이야기]는 그녀의 도저한 예술적 도발을 이어가는 과정상 섹션과 섹션 사이의 잠깐동안의 휴지기에 불과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또한 온전히 그녀의 예술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이기도하다. 짧고 난삽한 [진실된이야기]속에서 만난 소피칼의 진면목이 그녀의 다음 작품으로 눈을 가게 만든다.

반응형
반응형

[길위의 미술관]
제미란
이프, 2007년 10월 

필자 제미란은 어느날 보따리를 쌌는가보다. 그리고 길을 나서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를 만나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밤새 수다를 떨고 회포를 풀었단다. 그 여정이 가진 의미를 좀 번듯하게 정리하자면 필자에게 그림을 보러 떠나는 일은 ‘순례’의 여정이자 여행자를 위한  "치유"의 과정이었고, 그리고 그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단다.


그런데 그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사실 평범할 수 있다. “길에서 쓴 그림일기”인가하는 책도 그렇고 뭐 ‘길’과 ‘화가’, 혹은 ‘길’과 ‘문학’을 짝 짓는 일은 ‘결혼중매업’만치 ‘통속적’이다. 자칫 제목만으로는 통속이라는 늪에 빠질듯 위태롭던 이 책이, 독자인 나에게 이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여성미술 순례’라는 소제목이다.


좀 어거지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가 다름 아닌 “여성”이란 사실은 이 시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데가 있다. ‘계급’이라는 화두가 잠복하면서 ‘여성’과 ‘환경‘이 시대정신을 담는 화두로 급속히 대체되던 시대를 청년으로 살았고, 그 열정으로 나머지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세대가 바로 필자 그리고 독자인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뭇 싱겁게 끝나 버릴 수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이, 필자와 필자가 만난 작가와의 사이에 ‘여성’이라는 공통성에 기반 한 정서적 공감대 혹은 세계관이 있어 이토록 애절하고 신파적인 감동을 줄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 본다. 하지만 도대체 그 “여성”의 삶이라는 공통성이 뭐길래, 도대체 그 “여성성”이 갖는 세계관의 차이가 뭐길래 사상적 동지를 만난듯 필자와 작가는 그토록 애절할 수 있었을까?


참 많은 여성 작가의 구구절절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필자가 명시적으로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보질 못했다. 오히려 필자는 작가와 그림을 마주한 개인적 소회와 ‘사적인 대화’를 통해 그 ‘여성성’을 구현해 내고 있는 듯했고, 그것을 읽어 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듯했다. 그래서 더 ‘여성’적 글쓰기에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또 하나, 독자는 호기심 하나로 필자의 생채기를 들여다 본다. 방관자의 특권일 것이다. 나는 필자의 ‘언어장애’를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충돌에서 빗어진 ‘개인’의 좌절로 읽었다. 필자는 한 특수한 시기의 삶이 가졌던 규정성에 의해 침묵이 강요되었던 자신의 정신적 고통 혹은 상처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유과정의 설득력이, 치유를 필요로 했던 상처의 ‘우연성’에 의해 손상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일까? 동일한 시대 동일한 상황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 받닸던 기억이 있는 독자로서 필자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토록 절실했던가? 스스로의 삶의 진정성에 그만치 충실했던가? 시대를 탓할 만치 우리는 당당한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뭐 시간이 흐른다고 알아질 문제도 아닐 것이다. 길에서 만나 작가들의 크기에 비해 필자의 고뇌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러한 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세상에 위대한 삶은 따로 있을지언정, 크기가 작은 삶, 가치가 작은 삶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인데, 개인에게 사적인 고뇌는 세상의 전부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듯 이 책은 나같은 나태한 독자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귀찮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은 엉뚱하다. 책속에서 미술, 특히나 여성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인 내가 잘 잡히지 않는 갈피를 찾아 헤메다 문득 자신의 지난 시절 기억과 내면의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있는 스스로를 섬짖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한번 더 읽어 봐야겠다.“



필자가 길에서 만난 니키 드 생팔, 키키 스미스, 루이 브루주아 등과 그들의 대표작들은 겨우 한두번 인쇄매체나 전자매체에서 마주한 것이 고작인 무식한 독자인 내가 필자 나름의 작가론이나 작품론이라 할 수 있는 해석과 의미부여에 대해 구구절절 토를 달거나 평가할 자질도 이유도 없다. 그냥 새 세상을 알아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낯선 대양을 항해하는 초보 항해사의 어설픈 설레임과 괜한 호기 아마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지적, 정서적 반응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 바깥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팔자에 없던 낸시 스페로와 낸 골딩과의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친절한 필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책을 통해 적어도 나의 무미건조한 삶에 삶이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그리고 치열하고 진실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남성과 다른 여성의 삶은 떠 얼마나 다르게 절실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미술 역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표현의 한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끝났지만, 아마 필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인 나는 책을 덮었지만, 그 여정의 동반자로서 여전히 길 중에 서 있다. 그리고 긴 여정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할 할 것 같다. 그리고 필자와 필자가 만나 작가와 긴 인생의 도반이고 싶다. 

나는 이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 필자 제미란의 글맛을 두루 나누어서 좋고, 여성과 여성 작가에 대한 세상의 이해가 넓어져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미란은, 모든 독자가 만나서 와인 한잔 사 달라고 졸라 긴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은 그런 필자이기 때문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