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홍인숙 저
서해문집, 2007년 10월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는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의 역사"를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여성예술가들의 "개인사"를 통해 복원하고 있다. 어디 우리 역사 속 여성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마는 사실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회에서 여성의 역사를 "눈물"없이 "분노"없이 읽는다는 것이 어디 가능이나 하겠는가! 그래서 이책의 제목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가 공감될 수 밖에 없었다면 너무 감상적일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친구이자, 멋진 예술가인 많은 "여성"을 만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물론 그 반가움은 분노로 슬픔으로 변해갔고, 결국 상처로 남아 오랫동안 가슴에 쓰린 통증을 일으키겠지만,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면서도 결코 뛰어날 수 없었던 배제와 억압 구조 속에서도 나름대로 분투한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나아가, 조선과 근대를 있는 완벽한 가부장적 억압 구조속에서나마 여성 예술가의 삶이 단지 좌절과 굴종, 비애와 원통함만을 남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얻은 또다른 위안이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성예술가의 삶을 대하면서, 타고난 재주마저 다하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하거나, 열악한 삶의 조건을 뚫고 이룩한 예술적 성취마저 박탈되거나 가려져 전승된 예술적 성과물들이 미미하기 이를 데 없거나 아예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만으로도 현대를 사는 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위장된 가부장주의가 그 야만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시대를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한 아버지로서의 절박함이 일으키는 ‘공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만난 허난설헌과 허소설헌, 황진이와 이매창 등등 많은 여성예술가 중에 누구 하나 애절하게 다가오지 않은 삶이 없었지만 끝내 그 애절함이 분노와 처절함으로만 남은 몇몇 여성예술가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명순과 이월화, 그리고 나혜석... 그들은 어떻게 ‘계명된’ 근대에 조차 구조화된 가부장주의가 교묘히 작동하여 적가부장주의자를 박멸하고 응징하는가를 보여준 극명한 실예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모델'소설이라는 야만적 무기로 가부장주의에 도전하는 여성예술가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능욕하고, 삶에 대한 애착을 그 근원에서부터 파괴해버리는 근대의 계몽된 가부장주의의 수호자인 남성 예술가들의 작태는 차라리 등에 칼을 꽂는 직접적 살해보다도 더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이 있었다면, 우리 근대에는 '모델소설'이 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와같은 '모델소설'을 대하면서 나는 왜 소위 최근에 있은 '신정아 사건'이 떠올랐을까? 합법과 예술을 가장한 폭력장치를 통해 가부장주의에 도전하는 불온한 여성을 살해했던 "모델소설"이 학력위조 사건인 "신정아사건"과 어떻게 같은 맥락일수 있을까?

우리사회에 만연한 출세주의에 빠진 한 여성이, 역시 우리사회에 강고히 뿌리내린 기득권 보호장치인 "학력주의"의 틈을 비집고 권력의 언저리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다 낙마한 소위 "신정아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면, 가부장주의와 학력중심주의 그리고 여성상품화의 논리가 교묘히 결합된 한편 드라마를 보는듯했다.  

소위 잘난 여자에 대한 마초들의 숨겨진 적개심과 열등감이, 알고보니 가짜라는 사실에 직면하자 마자 "그 미친년이..."식의 폭발적인 대중적 반응으로 표출되고, 그러한 야만적 반응을 리더하는 보수신문은 연일 신정아에 대한 가십성기사로 도배를 하고 그리고 그 클라이막스가 된  "누드"로 신문 1면을 채운 문화일보의 인격살해행위까지... 그 과정에서 적어도 나는 현대문명의 기본적 합리성은 물론이고 소위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개인의 인격보호원칙은눈을 닦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고, 한국 언론의 '언론자유'로 분칠 한 얼굴 이면의 간악함을 날얼굴 그대로 직면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감히 그것은 신정아가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  김명순과 김일엽, 나혜석 그리고 이월화, 그리고 신정아 사이의 핵심적인 공통점 하나는 단지 그들이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가부장주의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면서 어쩔 수 없이,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로 분칠한 “심사임당”이나마 고액권 화폐에 사용할 인물로 채택하니 마니 하는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한편 코미디를 보는 듯 우습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변화가 근원으로부터 균열을 내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난 그대들의 슬픔을 같이 놀고 싶다.

반응형
반응형

[그래도 농촌이 희망이다]
박진도 저
한울, 2005년 12월



농촌에서 농사로 밥벌어 먹고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고 새삼 느끼고 깨달은 점이 많아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 리뷰를 쓰게 되네요^^*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한국 농촌의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온 개발독재 페러다임이 어떻게 지금껏 작동하면서 우리 농촌의 미래까지 발목잡고 있는가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사실 보수언론이나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에 의해 철저히 매도당하고, 무시당해온 농민의 입장에서 지금 농촌의 피폐함이 농민의 게으름이나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치 못하는 보수성, 무능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편에서 추진되어온 국가적인 농업희생 정책에 기인한다는 필자의 분석만으로도 가슴이 다 시원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필자는 지금의 피폐한 농촌 현실을 가져온 원인을 분석하는데 거치지 않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농촌공동체를 향한 열정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특히 서울공화국의 해체-지방이 살아야 농촌도 산다는 인식에 근거한-, 경쟁력 지상주의에 기반한 선도농 육성 정책의 폐지 등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농촌문제의 기초는 농협의 혁파에서 오고 농협의 혁파는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에서 온다는 일관된 주장은 특히나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이책을 농업 종사자, 농협관계자, 농업농촌정책을 담당하는 많은 분들이 읽고 우리 농촌을 아름답고 넉넉한 복지 공동체로 거듭나는데 기여토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상깊은구절]
농업 농촌의 가치와 사회적 역할은 지금보다 분명히 증대하고, 농촌에도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자.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농촌은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야한다. ... 농촌 주민도 도시인 못지않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생활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농촌은 경제활동 공간으로서 발전해야 한다. 농촌 지역의 기간산업인 농업의 발전뿐 아니라 농민과 비농민에게 다양한 경제활동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셋째, 농촌은 환경 및 경관 공간으로서 발전해야 한다 . ... 넷째, 농촌 지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주체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지역의 주체역량이야말로 농업 농촌 발전의 요체이다.


반응형
반응형


[사진에 미치다]는 얼마전 무료사진서비스 사이트 개설 이벤트에서 얻은 책이다. 
이 사이트에 와이프가 노무현 대통령과 찍었던 사진을 찾게된 추억담을 올려
5등으로 선정되었다. 무척 신이났고 기분이 좋았지만
이 책을 손에 넣기 까지는 순탄치가 않았다.
책을 받을 사람의 인적사항과 주민증 사본을 보낼달라고했지만
메일은 들어가지 않았고 몇번이나 반송되어 왔다.
그 사이트의 고객게시판에 사정을 알려서 겨우 받게 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그렇듯 무엇인가를 공짜로 받게되면 
무조건 기분좋은  일이긴하지만 별반 쓸모 없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가 넘치는 세상에 살면서
누군들 사진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겠냐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진에 대해 책 몇권 재대로 읽은 적은 없지만
항상 사진에 대한 이해에 목말라왔던 것은 또한 사실이다.

농사일에, 그리고 게으름에 읽지 못하고 쌓아놓은 책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사진에 대한 책이라는 기대에다가, 작은 판형과 얇은 두께가 주는 적은 부담.
그리고 무엇보다 상품으로 받은 책에 대한 예우를 고려해서
[사진에 미치다]를 먼저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사진에 대해 알고 싶은 초보자에게 필요한 책으로,
사진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들어봄직한 유명 사진가들을 포함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진가 까지 총 11명의 사진가를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11명을 어떻게 왜 선정한지는 끝내 알수 없었지만,
아마 필자의 개인적 취향 이상의 사진에 대한 어떤 입장이
선정의 기준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뭏튼 이 책은 사진가의 삶, 사진가의 활동, 사진가의 생각을 이해함으로써
역으로 사진을 이해하기위한 통로를 제시하고자 집필된 책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성공여부에 대해선 부정적이지만!
사실 초보적 의문이지만 어떻게 사진이 예술이 되는가에 대해 늘 궁금했지만
그리고 사진이 어떻게 회화와 더불어 예술의 한 장르로서
공존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 채은 그런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만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솔직히 이 책은 성공한 사진가의 '성공기'정도라고 보면 차라리 더 적당해 보인다.
부자되기. 성공하기 관련 책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진가로 성공하기 혹은 사진가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기가 한권 더 추가된 셈이다.

책을 덮으며 여전히 남는 의문을 곱씹어 본다.
사진이 무엇인지, 왜 사진을 찍는지.
그리고 좋은 사진가가 어떤 사진가 인지...
아쉽지만 이 책은 좋은 사진은 어떤 사진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단 한마디, '좋은 사진가는 성공한 사진가'고,
'좋은 사진은 성공한 사진가가 찍은 사진이다!'는 것 말고는...

책을 덮으며 후회한다.
읽을 책을 선정할 때는 좀더 신중해야지!
그리고 세상사가 주는 지혜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한다.
역시 공짜는 공짜답다! 
 
반응형
반응형

기술문명의 발전과 이를 통한 대중매체의 폭발적 증가는
지식과 정보의 보편화와 동시에 집중화를 낳았다.
그와같은 사회 기술적 변화가 몰고온 극적인 변화중의 하나가
바로 '스타'라는 신인류의 출현이다.
현대사회는 극장이나 TV의  스크린 혹은 라디오의 전파를 통해
낡은 시대의 지배자인 장군이나 황제가 아니라 새로운 권력자인 '스타'를 낳았다.
처음에 그들은 가수이거나 배우였지만,
어느새 스포츠맨이었고 그리고 글을 다루는 작가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같은 시대적 조류의 끝에서 나는 여행가 스타들을 보았다.
그들은 여행을 하고,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글로 쓰고
그리고 대중강연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나 하던 여행이, 아무나 하는 여행으로 변하더니,
결국 여행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그 절정이 바로 여행가 스타인 셈이다.
세상은 바야흐르 여행자가 스타가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실 여행은 누구에게나 문호가 열려있다.
누군들 배낭하나 달랑 매고 길을 나서지 못하겠는가?
없으면 없는데로 노숙여행을 떠나고,
있으면 있는데로 크루저여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막상 배낭을 짊어지고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순간
온갖 사회적, 심리적 압박에 직면하게 되고
그리고 대부분 문지방을 넘어서려던 걸음을 슬그머니 거두고
얌전히 자신의 성에 눌러앉아 애써 싸멘 배낭을 풀게된다.

세상에는 여행없이도 잘 사는 크레마뇽인에서 진화를 포기한 인종이 있는가 하면,
여행이 일탈인 사람이 있고. 더 진화하여 여행이 생활인 사람이 있다.
하지만 진화의 끝에는 생활이 곧 여행인 최신인류가 존재한다.
 그 최신인류의 한명인 유성룡을 만났다.
바로 [생활여행자]란 책을 통해!

그는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지 않는다.
그는 생활이, 삶이 곧 여행이기 대문이다.
그의 여행기는 사막의 푸른도시라는 조드푸르에서 울진 불영계곡까지,
봉화의 승부와 석포를 지나 봉화읍내 앵두다방까지 종횡무진 이어지지만
그의 여행은 지리적 물리적 공간이동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에곤실레에서 에바 케시디로,
손인호와 남인수에서 시인 이성복까지 그의 여행은 이어지지만
이런 대단한 문화적 아이콘에만 머물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한, 모든 존재에 대한
그의 따뜻한 눈길이 가 닿는 곳 전부는 그의 여행지이자
성소이고 순례지이다. 

'어느 가난한 시인은 가난을 팔아 가난을 벗어나느데'
유성용은 여행을 팔아 여전히 여행을 떠나니
그야말로 여행중독자가 아니라 생활중독자이고
그의 생활은 곧 여행이다.

사실 원초적 여행은 나로부터의 벗어남, 나의 욕망의 내려놓음,
나의 가치관 나의 경험 나의 기억들, 나의 관계들 에서 탈주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여행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도처에 있고 무시로 있고 통속적이기도 한 행위이고 습관이기조차하다.
여행마저 삶에서 제거해 버린다면 우리는 미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물과 산소, 그리고 탄수화물과 함께 여행은 현대인에게 생존을 위한 필수비타민이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여행의 묘미에 한번이라도 취해본 사람은 그 끈질긴 중독으로 부터 
영영 벗어나기는 글러버린 것이다.
치유법은 단 한가지다.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

지난 몇일 여행자 스타 유성용의 [생활여행자]와 함께한 
나의 시간은 긴, 뜻깊은 여행이었다.
반응형
반응형


-산재한 죽음의 고유성을 회복함으로써 현대적 삶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다.
 

[애도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분리된채 가려진 죽음의 현재성을 되살리는 작품이다. 현대인은 위대한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신에 의한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성공했고, 그렇게 창조된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재정립했다. 과학은 인간을 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고, 인간의 삶은 그 자연적 한계를 모두 극복한듯 보였다. 자연은 인간의 이성아래 재정립되고, 인간의 삶에서 모든 자연적-비합리적 요소를 배재할 듯 보였다. 하지만 현대과학을 통해 극복한 삶은 그 극대화된 합리성과, 위대한 과학의 은총아래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장벽에 봉착한다. 그것은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그 의미를 달리했지만 죽음은 생명탄생과 짝을 같이해 인간의 삶에서 비과학적인 영역, 이성적 빛이 비춰질 수 없는 영역으로 끝내 남게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 굴복하며 신의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오만해진 인간은 그 증표인 죽음의 처리에 골몰한다.  


여기서 절대화된 과학, 산업화된 자연,, 절대화된 이성의 빛아래 '죽음'은 필연의 영역에서 잘못 끼어든 실수거나, 제거되어야할 우연적인 오류로 처리된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격리되고, 가려지고, 잊혀지고 만다. 죽음은 삶에 우연적으로 잘못 끼어든 잡티나 불순물일뿐 우연적인 발생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청소하듯 흔적조차 지워버려야할 것으로 격하된다.


[애도하는 사람]은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죽음과 삶의 잘못된 분리를 고발한다. 삶은 죽음의 이면일뿐 독립되거나 분리될 수 없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본질임을 폭로한다. <애도하는사람>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지천이 죽음이고 그 죽음의 사이사이에 삶이 기생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일본 도시의 풍경이 <애도하는 사람>이 펼쳐지는 구체적 현실이다. 일본 고유의 죽음의 미학에 기반한 작가는 죽음으로 곽찬 도시를 통해 충만한 삶의 의미를 되살린다. 이 삶과 죽음의 역설이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에서 극복된다. 그 극복의 과정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삶의 존재 이유를 찾는 시즈토의 순례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시즈토의 애도여행은 스스로 직면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그는 타인의 죽음의 무가치성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아무도 주목하거나  안타까와하지 않는 죽음은 세상과 격리된채 철저히 삶과 세상과 격리된채 어느날 갑자기 절대적 무로 인간을 덮쳐온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누리며 미래의 삶을 준비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죽음은 비현실이기 때문이다. 시즈토의 애도여행은 죽음의 현재성을 회복하는 순례의 여정이다. 시즈토에게 죽음의 현재성을 극복하는 의식은 잊혀진 죽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그 삶과 죽음을 하나로 애도하는 의식이다. 불타가 죽음의 허망함에 직면하고, 삶의 공허함에 절망한채 성을 나가 구도의 길을 떠나듯 그렇게 시즈토는 집을 나섰지만 그가 걸은 구도의 길은 우주의 원리나 존재의 근원을 꿰뚫는 위대한 깨달음의 길은 아니다. 소박한 개개인의 죽음 하나하나에 '그는 누구에게 사랑받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누구에게 감사를 받은적이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차가운 죽음에 삶의 온기를 불어넣고, 그 삶의 허망함에 죽음의 숭고함을 부가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극복한다.
그의 깨달음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잊혀지면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잊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잊혀진 모든 사람의 죽음속에 나의 죽음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한다면,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기억될 수 있고,그 기억된 모든 사람의 죽음 속에 나의 죽음이 있게 된다. 기억된 죽음은 허무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죽음은 허망하지 않은 삶을 가능케 한다.

더불어 시즈토의 어머니 준코의 발병과 죽음의 과정은 철저한 죽음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녀는 죽음을 찬미하고, 탐미한다. 공포가 제거된 죽음, 자연스런 삶의 한 과정으로서의 죽음은 아들 시즈토의 죽음의 순례길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삶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삶의 무게를 내려 놓음으로써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줄여나가는 작업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 과정을 통해 역으로 그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깨우쳐가는 죽음의 여정은 철저히 아들 시즈토의 순례길과 겹쳐지면 또 다른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상, 죽음에 직면한 한 개인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준다.

[애도하는 사람]시즈토와 더불어 애도여행을 동반하는 도반은 또 있다. '에그노'라 불리며 삶의 지고지순한 신비와 가치를 잃어버린 마키노 고타로는 시즈코의 애도 여행을 추적하는과정에서 숭고한 죽음의 가능성을 깨닫고 다시 삶의 신비와 가치를 회복한다. 사쿠야와 유기요 역시 시즈코의 애도여행을 동반하면서 죽음에 대한 욕망, 삶과 분리된, 절망적인 삶으로부터 탈주한 죽음의 탐미를 포기한다.

[애도화는 사람]은 해피엔딩이다. 어머니 준코의 죽음은 여동생 미시오의 출산과 겹치며 삶과 죽음의 통일을 완성한다. 애도하는 사람 시즈코의 구도의 길은 마키노 고타로와 유기요가 뒤따른다. 

[애도하는 사람]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작가 텐도 아라타는 이 지점에서 위대한 세계구원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죽음의 개별성을 회복하라. 그를 통해 개별적 삶의 허무가 극복되고, 바로 내 삶의 고유성, 내 삶의 존재이유와 의미가 창조되나니!!

"죽은 자들은 자신을 애도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애도하는 사람]이 무의미한 죽음, 따라서 허망한 삶에 직면한 현대인에게 던지는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다.

반응형
반응형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의 필자 김창호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그의 정치 철학을 같이 하고자 했다. 그는 참여정부의 일원으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사람이다. 필자는 참여정부의 성공과 좌절, 성과와 한계에 대해 두루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를 꼭 쓰고 싶다는 꿈을 종결짓지 못하고 떠난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잇길 희망했다. 그리고 , 이 책 [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저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내려놓기 직전까지 "진보의 시대를 대비한 미래 담론을 준비하여 선투자 후복지, 성장 중심의 50년간 이어 온 보수주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희망으로 진보의 미래’를 집필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후보시절 스스로 이야기했듯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한 사람으로 끝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미완에 그친 그의 작업은 [진보의 미래]로 출간되었지만,  필자 김창호는 그 작업의 연장선에 이 책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놓기를 원한다.
 
이 책에서 김창호는 보수의 사회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하고자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정통 진보'로 부터도 버림받은 참여정부의 핵심인사의 한사람으로서 현실 정치의 파란만장한 경험을 토대로 다시 진보란 무엇인지, 어떻게 지속가능한 진보를 확보할 수 있을지 고뇌한다.
먼저 그는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가를 묻는다.

'정통진보' 세력은 자본지배에 대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극복 대안을 추구하는가가 '진보정치'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보고, 참여정부가 자본에 대해, 삼성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고 비난한다. 이제 대해 필자는 보수의 시대에 현실적 진보세력이 할 수 있는 자본 지배에 대한 저항은 직접적 반자본 투쟁이 아니라 자본지배의 실체를 가리는 언론특권과 지역주의의 청산이 현실적 실천의 방안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확충하고, 진보 어젠다를 보편하고 그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필자가 제시하는 진보정치의 다는 아니다. 그는 정치체제의 민주화에서 사회경제체제, 다시 생활세계로 이어지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확보된 민주적 가치와 자원을 재구조화하여 풍부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본다. 즉, 다양화한 균열쟁점들인 문화, 예술, 환경, 젠더 등  생활세계에서 진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담론이다. 하지만 자신이 당선되거나 집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소주파지만 개혁적 보수, 혹은 중도좌파의 낙선과 실권에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한  '정통진보'의 근본주의는 현실 정치 지형에서 결과적으로 극우 보수, 반공 보수세력의 집권에 기여하며 중도좌파와 동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끝없는 '정통 진보'에 대한 애착과 함께 깊은 아쉬움을 가지고 다시 묻는다. 현실정치속에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진보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이 물음에는  진보정치의 지속 가능성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진보정치의 연대가능성에 대한 필자의 피끓는 갈구를 담겨 있다.

필자의 지속가능한 진보정치에 대한 모색은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위기에 대한 진단, 그리고 한국의 제 사회세력 정치세력의 공공성의 상실에 대한 진단으로 나아간다. 그는 '연대의 틀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자로서 참여정부의 통한의 실패를 자인하기도 하지만, 시민세력의 미성숙, 대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위기, 권력화된 보수언론, 사회 제세력의 사익화, 그에따른 공공성의 위기라는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에서 나름 진보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최소한 진보정치의 가능한 토대를 넓혀나가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진보정치 실현을 위한 참여정부의 노력이 좌절된 지점에는 한국 보수의 강고한 벽이 존재한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가 합리성과 정당성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강력한 힘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저변을 장악한 강고한 조직기반이라는 월등한 물질적 힘을 보수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허물기 위한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역정치의 부활, 다양한 층위의 깨어있는 시민의 공동체, 그리고 문화적 층위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다. 물론 그들 저변의 변화가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하는 진보정치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중요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애끓는 토로는 참여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라는 주홍글씨로 이어진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우리사회에서 이미 악마의 주술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의성과 추상성이 강화되어 문화적, 이데올리기적 함의를 갖는 도덕적 용어로 변질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좌파의 비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정치상황을 되돌아 보면 신자유주의라는 한 마디로 친자본 보수 우익과, 중도좌파 참여정부의 구별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 궁극적으로 보수 우익의 지배를 돕는 우를 범한 점은 부인하긴 어렵다. 필자는 민주, 참여정부 10년의 '신자유주의'는 선택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자본지배를 근본적으로 대체한 대안이나 가능성이 없는 역사국면에서 시장의 진보성을 인정하고, 복지정책을 그사회적 처방으로 제시한다.    

사실 [다시진보를 생각한다]의 독자로서 이책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큰 문제의식에서 공감하고 공유해야햐할 지점이 많다고 본다. 특히 진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현실정치속에서 구현 가능한 진보적 의제를 생산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집필이, 그리고 진보개혁세력내 꼬리표붙이기나 사적 증오에 기반한 비난에서 벗어나 생산적 토론과 지적 작업으로 이어지길 빈다. 

학자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참여정부의 국정홍보처장을 거쳐 다시 정치가로 변신을 도모하고 있는 김창호의 성공적인 정치역정이 자신이 제시한 한국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정일 수 있길 빈다.

반응형
반응형
 

한권의 단편 소설선을 통해 그 사회의 문학, 나아가 문화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다. 당연한 이야기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를 읽기 시작하면서 그와 같은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마주하고 서반어 문화권에 대한 일천한 지식에 기반한 막연한 동경과 이국 취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감히 단편소설선” 한권을 통해 라틴의 역사 문화 그리고 문학을 통째로 맛보고 싶었다. 그것이 6권으로 이루어진 [창비 세계문학전집]중 제일 먼저 이 책을 고르게 한 유일한 이유다.

솔직히 나는 <미션>이라는 영화와 마르게스의 [백년동안의 고독] 그리고 미국에 예속된 군사 독재 정권의 폭정과  빅토르 하라의 음악 외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책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가 담고 있는 10나라의 작가가 쓴 19편의 작품은 애당초 주제나 사조상의 분류를 통한 맥락적 이해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각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학사적 이해 역시 나의 몫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를 통해 한편 한편의 단편, 한명 한명의 작가를 날 것 그대로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라틴문학에 대해 무지한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역자 김현균은 책의 앞뒤에 실린 <책을 엮으며>  <해설_지역주의와 세계주의, 이중의 유혹>을 통해 충분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조차 없었다면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무려 19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이 책을 통해 나는 사실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덧붙여 각 작품의 작가에 대한 간략한 안내와 게제 작품에 대한 짤막한 해설, 각 작품의 끝에 <더 읽을거리>라는 안내글이 붙여져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이 책에 게제된 19명의 작가와 그의 대표 단편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식견을 갖춘 독자가 그리 흔지 않을 것이라는 역자의 판단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치 역자는 작품 선정에 고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라틴 문학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심한 마음에 역자의 해설을 먼저 읽고 작품을 읽어 나가다 보니, 나의 책 읽기는 시대와 국경을 뛰어 넘는 각 작품을 나름대로 교차하는 몇가지 주/객관적 기준을 통해 분류하거나 서로 상반된 주제나 사조의 작품을 대조 비교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물론 여성주의, 혹은 환상적 리얼리즘 등과 같이 이미 주어진 분류에 따라 동일한 작품 군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이 아우르는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폭이 너무나 넓다보니 나의 노력은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라틴 문학 세계의 깊고 넓은 세계를 날것으로 직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에 실린 작품을 읽어 보면, 그와 같은 라틴아메리카 문화적 이종교배와 이로 인해 산출된 다양한 양상의 정신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 세계에는 현대물질문명으로 인해 붕괴되는 목가적 삶을 그린 레오뽈도 알사스의 <안녕 꼬르데라>로 부터, 선진 문물이나 이국에 대해 경도된 취향을 주제로 한 루벤 다리오의 <중국여제의 죽음>이 있다. 또한 인간의 헛된 욕망과 악마성을 몽환적으로 그려낸 오사리오 끼로가의 <목 잘린 암탉>이 있는가 하면, 시간의 가역성을, 절대 시간의 공존성- 흘러가는 일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공존하는 시간의 존재방식-을 묘사한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 이 있다. 하층민의 고통을 폐병으로 죽어가는 아이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묘사한 혜수스 페르난데스 산또스의 <까까머리>가 있는가 하면, 현대 문명으로 제거된  존재 세계의 신비성을 '마술적 사실주의'를 통해 회복시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거대한 날개가 달린 상늙은이>가 있다. 그뿐이 아니라 역자가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 변방이라고 했던 여성적 감수성과 여성적 상상력을 '마술적 사실주의'를 통해 회복시켜주는 마리아 루이사 봄발 의 <나무>는 후안 까롤로스 오네띠의 <환영해, >과 또 다른 세계로 대척해 있다. <환영해, >은 밥과 로베르또로 분열된 자아가 시간에 의해 소모되어가는 인간 실존의 무력화를 통해 꿈도 희망도 없는 패배자로 자아를 확인하고 그 과정을 통해 화자와 동시에 화해하는 인간을 보여주지만, 가부장적 권위로부터 독립된 자아 찾기에 성공한 봄발의 <나무>의 여주인공 브리히다처럼 꿈에 부풀어 있지 않다. 홀리오 꼬르다사르의 <드러누운 밤>에서 죽음은 현실과 몽환 사이에 스며들어 그 둘을 분리 불가능하게 섞어 버리는 동시에 두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진리로 죽음의 승리를 보여준다면, 후안 룰포의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에서 죽음은 멕시코의 현실에서 갖는 죽음의 현실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폭력과 증오, 살인과 보복, 공포와 죄의식이 의식의 저변에서 지배하는 비극적인 존재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에 실린 19편의 작품을 분류하거나 특정 사조로 가려내는 작업의 고통을 통해 그만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가 풍부하고, 짧은 문학사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성취라는 면에서 어떤 문화권보다도 압도적인 문학적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닺게 된다.  이 책은 그 풍부한 정치적, 철학적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는 작품들을 뭉텅그려 라틴문학 이런 것이다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지는 않는다단지 이 책을 엮고 옮긴 이는 이들 다양한 작품들의 저변에 흐르는 어떤 공통적 기반을 독자가 느껴 불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책을 통해 이해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풍속성을 기반으로해 민중적 삶의 현실을 이야기 하거나, 서구라는 식민 모국과의 관계에서 갖는 선망과 자기질시, 거역과 자기 긍정의 복잡한 알고리즘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라틴 문학에는 구체적 현실속에서 모순적 현실에 저항하는 인간 군상이 있는가 하면, 몽환적 세계로 물러나 현실의 문제를 해소하는 인간 군상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극도로 혼란스럽고, 양립불가능한 정신세계가 공존하는 라틴아메리카 정신문화의 저변에는 항상 '몽환적 의식'이 있어 이 극단들을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싶기도 한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환상적 사실주의>가 그 지역성을 대표하는 개념인지, 아니면 다양한 사조의 하나를 뜻하는 지 나는 모른다. 단지 이책을 통해 이해한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세계는 하나의 사조가 아닌 지역문학의 특성으로 "환상 혹은 몽환"이라고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환상적 사실주의'라는 것이 바로 서구 문명의 정복이 라틴 아메리카인의 정신세계에  초래한 원초적 폭력성과 죄의식을 제어하고  치유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식된 정복자의 문명과 학살당한 인디오의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되었을 양립 불가능한 것의 통합을 가능하도록 하는데 환상과 몽환이 요구되었을 곳이기 때문이다. 이 환상과 몽환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적 저변을 흐르는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자리잡고, 그 기반위에 양립부가능해 보이는 다양한 이념과 사조, 주제와 양식의 문학이 꽃 필 수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는 그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데 일정정도 성공한 책으로 보인다. 덤으로 애초에 이 책을 쥐면서 가졌던 라틴아메리카 문화, 정신 세계를 통채로 맛보고 싶었던 나의 욕구는 충족되었지만, 금새 더 큰 갈증으로 자라 나를 다음 독서로 내몬다. 

반응형
반응형

[행복한 인문학]은 무슨 뜻일까? 인문학을 하면 행복해진다? 아니면 인문학은 의당 인간의 행복에 복무해야한다. 그것도 아니면 인문학은 당연히 행복학이다? 아마 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까지 인문학은 인간의 보편적 행복에 기여해오지 못했는가? 아마도 이책은 그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대중인문학 강연의 성과물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문학이, 아니 일반 학문과 지식이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인류공동체의 선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역할하거나, 학자 개인의 지적 교양적 수단 혹은 생계 수단에 불과했던 측면이 있다. 그래서 '지식소매상'이라는 자조가 학자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흘러나오고, 인문학 무용론을 넘어 '인문학의 종말론'까지 회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우리 사회가 가진 특수성에 기인 한 바도 크다.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급속히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전통적 인문학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급조해서 수입한 서구의 인문학은 아직 내재화되지 못한 이런 상태에서 오직 경제성장, 경제대국의 길로 매진해온 우리에게 '인문학'은 거의 말라붙은 개뼈다귀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몇년전부터 갑자기 '인문학강좌'붐이 일었다. 2006년 '가난한 이를 위한 희망수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교육자 얼 쇼리스의 방한 즈음해서 한국에도 인문학 강좌가 종교단체나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개설되었다. 2010년 현재는 이곳 경북 봉화군까지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는 플랭카드가 거리에 걸려 있을 정도이니 이는 필시 전국적인 현상일거다. 그런데 왜 지금 인문학일까?

막연히 드는 두요인은 서로 상극적이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턴가 일정하게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어 이제 인간의 가치, 삶의 질을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일정한 경제성장을 뒤이어 국가부도사태라는 IMF와 양극화의 심화가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삶의 안정성을 근본으로부터 흔들어 놓았다. 바로 이 두 요인이 부딧는 자리에 인문학이 개입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고고한 인문학이 천박한 시장거리에서 '무식한'대중을 만나 소통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않다. 인문학이 고작 자본주의체제의 패해를 뒤치닥거리함으로써 체제 안정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해도 좋은가, 오갈데 없는 고학력 실업자들 푼돈벌이 시켜주기 위한 수단아니냐는 의혹이 그것이다.
사실 이런 부정적 의문을 해소하는 길은 인문학이 복지를 강화하고 경쟁을 완화하여 인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제도화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줄 수 밖에는 없어 보인다.
이런 의문의 이면에는 최근의 '인문학 강좌'를  이전의 소위 '의식화'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다. '의식화'가 체제저항적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개인을 변혁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학습과정이었다면, 인문학강좌는 체제 내적 인간 개인의 정신적 만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체제에 순치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갈라지는 의견은 봉합하기란 쉽지않다. 근본적인 인식의 기반, 가치 기반 자체가 다를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키는 일은 쉽지가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래서 [인문학강좌]가 무의미하던가 유해한가 하는 의문에만 답하고 싶다.  모든 시대, 모든 국면에서 근본주의 기획이 항상 올바른 선택, 최고의 지고지순한 도적적 결정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이 가로 막힌 지점에서 상처받은 체제내적 인간의 개인적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진보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제도화하고 보편화 함으로써 인간 삶의 가능성을 한단계 끌어올리냐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사회밖으로 내팽겨치진 '하류인간'을 사회와 다시 소통할 수 있게하는 매개로서의 인문학,
'인간'의 무리에서 이탈한 무리를 다시 인간으로 복귀시키는 치유의 인문학을 통해 "일상화된 모욕사회"를 극복하고 인간 개개인이 주체의식을 회복함으로써 얼 숄리스가 제안한 윤리적 민주주의의 구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처방이 어디있겠는가?
사실 다운그레이도와 귀농, 자발적 가난이 유행인 것만치 체제는 간고하고 개인은 무력하다. 지금 반체제가 아니라 탈체제하는 개인이 늘어나지만 언젠가는 체제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봉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살아야되는 개개인 삶의 소중함은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 소중함을 찾는데 인문학이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단연 인문학은 행복학일 수 있을 것이다.
 
이책 [희망의 인문학]을 읽는 재미는 무엇보다. 인문학 강의에 참가한 학자들의 글 중간중간에 게제된 수강생의 글을 읽는 데에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공감과 애틋한 개개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히 느끼게 해주는 이들 글들이 "희망의 인문학 강좌"를 통해 나같은 필부도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반응형
반응형
유러피언 드림 상세보기


'선진'이란 개념이 한국인의 삶을 토끼몰이하는 절대 명제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정권때 부터일 것이다. 그 시대부터 '수출입국'이란 모토로 국민을 몰아세우고, '선진국'이라는 이상향을 국가의 미래상으로 삼아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공동체나 환경 등의 가치를 '경제'에 종속시켜왔다. 불행히도 당시 절대적 가난에 처해있던 나라 사정에 비추어 봐서 일정정도 개발독재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는 자들에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초기 자본축적의 폭력적 과정이 불가피한 자본주의의 발전 경로인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결국 궁정동의 총소리로 개발독재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모토는 개발독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넘어 한국인의 삶을 규정하고 모든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는 절대성과 더불어 아무데나 갖다붙이면 되는 보편성마저 획득하게 되었다. 그로말미암아 사실 '선진'이란 개념은 애매모호성을 더해가며 급기야 몰개념화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고 '선진'의 망령은 사라진 것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국민의 뇌리에 내면화된 선진병은 급기야 이명박이라는 기형정권을 낳았고 시대착오적인 정권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MB정권이 출현하자마자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선진노사관계, 선진 정치문화, 선진 농업, 선진, 선진, 선진... 이란 단어를 다시금 듣게 되었는데, 선진'이란 개념은 오랜세월 잠복해 있으면서 몰개념화를 넘어 개념변신까지 해 버렸다. MB정권에 의해 '선진'은 가장 낡은 것을 가리키지만 가장 앞선 것을 가리킨다는 환각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악마의 주문이 된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는 없고 오직 자본가의 이익에 복종하는 노사관계가 '선진'노사관계가 되었고,야당도 안중에 없고 비판언론도 없고  정권이 입맛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선진정치'란다.  농민이 다 죽어 나가도록 농촌의 초토화를 앞당기는 것이 바로 '선진 농업 정책'이라 하고, 대미종속과 대북 대결주의의 확대를 '선진외교'라 한다. 
이런 세상에서 고노무현대통령께서 생을 마감하시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는 책이 바로 이책 '유러피언 드림'이다. 유럽피언 드림은 진정한 선진이 무엇인지를, 우리사회가 미래에 구현해야될 사회의 전형, 가치지향은 무엇이어야하는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꼭 읽어봐야할 책이다. 정명(正名)은 허위와 기만이 난무하는 혼탁한 시대일수록 꼭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책은 문명비판적 입장에서 현대 사회를 이끌던 가치인 '아메리칸 드림'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유러피언 드림'이 리더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제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단순히 인류가 지향해야할 가치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시장자본주의가 이끌어왔던 구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미래지향적 프로젝트로, 지금까지의 세계는 개인의 사리추구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면 다가올 사회는 공공선, 복지의 극대화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하는 역사적 동인을 시민사회의 성장에서 찾았고, 그 최종적 실현 형태를 탈국가화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 보았다.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민족국가라는 영토기반사회는 약화되고, 탈영토 탈국가화한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출현하는데 이는 영토기반 의무(국방의 의무 등)와 재산권에서 탈피해 집단 참여, 보편적 인권에 기반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사회기구(Civil Society Organization)라는 시민권력의 출현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국가가 후퇴한 자리에서 시장 권력의 절대화가 완성되었지만 이제 시장권력은 시민사회기구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추동하는 세력을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사회기구로 대체한 제레미 리프킨의 시각은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지만 현실성있는 노동개념의 정리가 뒤따른다면 필자가 제안한 CSO개념을 꼭 거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유러피언드림]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필자의 주장이 곧바로 우리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내리는 적실성 있는 진단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이제는 우리 국민이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망령을 떨쳐버릴 때도 되었다. 박정희를 밟고 넘어서는 지점에서 진정한 선진화가 시작될 것이다. 이 정도의 경제적 발전이 있기까지 박정희가 기여한 몫을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가치 지향을 어디에 둘것인가를 두고 볼 때 이제 박정희식 개발독제 패러다임, 아메리칸 드림은 그 효용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나야했기 때문이다.

 

유러피언 드림이 품고 있는 가치와 핵심 개념을 나열해 보는 것으로 리뷰를 마무리해보자.

보편적 인권, 개방적 네트워크, 공감,다단계 통치체게, 포괄성, 자연의 내재적 가치, 자연과의 연대, 시스템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도덕성...

이들 개념을 나열하다보면 '불교적 세계관'을 일정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유러피언 드림은 아시안 드림의 서구버전인지도 모르겠다. 더 공부가 필요한 지점이다.    

 

반응형
반응형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읽고
 

뉴욕의 다섯 자치구중 하나로 <브루클린>은 '브루클린 다리'로 맨하턴과 이어져 있는 현대적 도시다. 하지만 브루클린은 다섯자치구중 인구가 가장 많을뿐 아니라 다른 자치구, 아니 미국의 하고 많은 도시와는 다른 특별한 곳이다. 사실 브루클린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다.  '브루클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만해도 여러권이고 무엇보다 내 개인에게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열연한 창녀 "트랄라"의 사랑이 중심적인 이야기로 남겨진 이 영화는 사실 브루클린의 거리보다 그 강력한 음악에 더 매혹되었던 게 사실이다. 이 영화를 통해 다가온 브루클린은 산업화의 결과만 취한 모던하고 이기적인 '강남'같은 시가지가 아니라, 산업화의 혼탁한 과정을 날것 그대로 다 싸안고 있는 혼란한 공업도시, 항국도시인 '안산'이나 '인천'같은 도시의 하나였다. 이 영화 속 브루클린에서 나는 더이상 잃은 것도 밀려날 곳도 없는 바닥인생의 악다귀같은 삶들이 뒤엉켜 있고, 마약과 범죄, 절망만이 거리에 가득한 속에서도 사랑을 피우고 인간적 삶의 아름다움을 일궈내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같은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었다. 서구인에게 인도의 시궁창같은 거리가 인간 삶의 원초적 아름다운, 그 숭고함을 찾을 수 있는 싱싱한 삶의 현장이듯, 브루클린은 인간 욕망의 배설구, 만악의 찌꺼기가 흘러드는 시궁창같은 현대도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켜가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음을 상징하는 문화코드였다.

하지만 이책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다가온 브루클린은 또 조금은 다른 이미지다. 암에 걸리고 이혼마저 당하고, 거기다가 하나 있는 딸과도 불화에 빠진 의지가지 없는 초로의 전직 보험모집인 네이선 글래스가 '조용히 죽을 만한 곳을 찾아'들어 온 곳이 바로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네이선 그래스의 고향으로 3살때 부모의 손을 잡고 이사를 떠나야 했던 이미 기억속에 남은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시가지이고 주택지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보였던 산업화의 부정적 상징성 같은 것도 없고,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고는 애당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화롭고 단조로운 도시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브루클린 풍자극]의 작가 폴 오스터가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의 시각으로 브루클린의 거리를 '줌인'하는 순간 브루클린의 작은 카페며, 거리를 스치는 택시안, 그리고 집으로 가는 작은 길모퉁이에도 이름없는 초라한 삶들이 변주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책 가득 넘쳐난다. 독자인 나는 또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눈 깜짝할새 브루클린의 거리로, 해리의 고서점 구석진 서가 옆으로 빨려들어간다.

폴 오스터의 제기발랄한 입담에 매혹되지 않을 독자가 없을 것같지만 사실 이책 [브루클린 풍자극]의 매력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도시적 삶이 인간개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고립된 개인이 생존을 위해 무한 경쟁하는 밀림이 바로 도시라면 이 책은 폴 오스터의 문명비판적 시각을 통해 그와 같은 도시속에서 살아가는 독자에게 다시 가족주의가 회복된 아름다운 서정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를 보여주고, 인간적 삶에 목마른 독자의 목을 축여준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이야기는 바로 사랑의 이야기 즉 '러브 스토리'다. 서로 교차하며 엉키고,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돌파하며 끝내 사랑으로 발전하는 인간 군상의 삶을 통해 폴 오스터는 바로 사랑의 전도사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추상화된 사랑, 지고지순한 이상화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철저히 속된 사랑 이야기이기에 독자인 나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랑을 인간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서 남는 희미한 의문이 있다. 도대체 '풍자극'은 또 무엇일까? 왜 이소설은 '풍자극'이라 이름붙였을까? 작가 폴오스터는 브루클린의 사랑이야기로 무엇을 풍자하고자 했을까? 사랑없는 시대? 가족없는 시대? 사랑만이 희망이다고 하면서 사실은 '희망의 허구성'을 풍자했을까? 이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끝내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먼저 행간 곳곳에 등장하는 부시와 공화당에 대한 조롱은 나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나름의 쾌감을 주었지만 이 창치는 이 소설의 전체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이 소설이 끝나는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는 '위대한 아메리카'의 상징인 뉴욕 맨하탄의 세계 무역 센타가 이슬람 해방전사의 공격으로 무참히 무너져 내리기 46분 전이다. 다시말해 브루클린 풍자극이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가 브루클린에서 회복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평범한 사람을 위한 전기 집필 대행이라는 새로운 사업 구상을 통해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하고자 결심하면서 이 소설이 끝나는 시점이다. 개인 '네이선'의 희망의 전주곡이 울러 퍼지고 그리고 46분뒤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상징성이 붕괴되는 교차점에서 분명 폴 오스터는 무엇인가를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독자의 한명일 뿐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