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유시민이 펜을 잡으면 다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런데 유시민이 편역한 '일본문화이야기'는 원래부터 유명한 책이란다.
이 책은 영국에서 [제노포브스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나온
세계 여러나라에 대한 문화안내서중 일본 편을  편역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위트와 해학을 문화비평과 버무린 맛깔난 책'이다. 
얇은 책에다 흥미진진한 소재, 그리고 유려한 필체와 해학들...
이런 류의 책은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틈 날때마다 짬짬이 읽어나가야 제맛인 책이다.
그런데 이책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으로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그 이유는 이책이 너무 지나치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시간 나는데로 틈틈히 읽어야될 책을 한번에 다 읽어 버렸다. 그래서 아쉼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그냥 당분간은 가방에 넣어다니면서 두고두고 재독 삼독을 할 수밖에 엀을 것 같다.

물론 재미 하나가 책은 평하는 절대지존의 기준일 수 없다. 특히나 문화비평이나, 문화안내서는 나름의 합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독자에게 충분한 공감을 주어야한다. 사실 이책의 내용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이런저런 선입견들과 대부분 합치한다. 그래도 이 책은 일본 문화연구서가 아니라 그냥 대중적 안내서이기 때문에 큰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 일본인에 대한 선입견은 너무 일반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더 그 진실성에 의문이 간다. 솔직히 나는 집단에 대한 획일적 규정에 대해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문화에 대한 극도로 단순화된 명쾌한 규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인은 본심을 숨기는 이중인격자 일까? 일본인은 결벽증을 가진 건강강박증 환자들인가? 일본은 개성이 아니라 통일성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가? 일본인에게 스포츠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극기일 뿐일까? 일본인은 자기주장이 없고 대세에 순응하는 현실적 처세주의자들인가? 사실 나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많은 책이나 개인의 발언중에서 그런류의 일본에 대한 판단이 전제된 것을 직간접적으로 느껴 왔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런 선입견을  재미나게 정리하는데 성공한 책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선입견의 원천이 되는 책인 것 같기도 하다.

한권의 책을 통해 일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은 알려고 한다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욕심쟁이에게 적합한 책이 아니다. 일본을, 일본 문화를 가볍게 스케치해 볼 수 있는 아주 가볍고 재미있는 책일 뿐이다. 그래서 조금은 불만스럽고, 아쉽기도 하지만 용도가 다른 독자에게라면 얼마든지 권해주고 싶은 책이기도한다. 
반응형
반응형

무당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왜 무당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무당이 되어갈까? 나는 솔직히 만신 이해경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유의 물음들에 대해서 별로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지독한 반종교주의자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특히나 한국 교회의 추악한 물신숭배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다. 하물며 무속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사람이 우연한 인연에 만신 이해경을 만나고 무속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지난 달에는 바쁜 일상 중에도 만신 이해경을 다룬 다큐 [사이에서]를 보고, 그의 자서전을 틈틈이 읽었다. 두권으로 된 그녀의 자서전을 덮으며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나는 결코 무속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내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경의 자서전을 알리는 글을 쓰고 이 책을 일독을 권유하고 싶은 소명감 같은 걸 느꼈다. 그것은 순전히 '이해경'이라는 사람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고, 또 설령 나와 같이 무속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세계의 매력을 공유하고 사회적, 문화예술적 의미를 읽어내는데 지대한 도움을 줄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져 드는 순간 나는 급속히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녀의 삶은 한 사람의 개인이, 그것도 한국적 상황에서 한명의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만신 이해경의 한 많고 원 많은 넋두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느새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잊어버리고 그녀와 마주앉아 그녀의 넋두리에 맞장구를 치면서 같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그녀의 삶의 여정을 동반하면서 나는 전적으로 그녀의 편이 된다. 그래서 그녀에게 고통의 원천이 되었던 그 모든 것과 맞서 주먹을 쥐기도 하고 같이 퍼질러 앉아 엉엉 울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녀가 무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무당이 된 그녀가 사는 무속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상권)을 통해 이해경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며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외로운 선장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만신의 길은 좌절이 아니라 극복의 결과로 성취된 것이었다. 그녀는 무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귀신이 되어도 남을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이겨낸 사람이고, 그래서 그녀는 ‘특별한’ 무당이 되었다.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절로 고행과 득도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고, 그래서 인간적 경지를 넘어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그녀는 당당하다 못해 의연하기조차하다.

(하권)에서 내림굿을 받고 드디어 무당이 된 이해경은 이때부터 시작하게 된 또 다른 싸움의 과정을 풀어나간다. 그녀는 무속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홀대에 맞서 조용한 싸움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타락한 한국 현대 무속세계에 메스를 들이민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만치 스스로 물신주의에 빠지고, 상업화의 길로 접어든 한국 무속을 질타한다. 그리고 무속의 원시적 건강성을 회복할 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 길은 쉬 드러나지도 않고 그녀를 둘러싼 안팎의 세계는 모두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그와 같은 고난의 과정에서 그녀는 운명인 듯 한국 무속의 사회적 건강성을 찾아 예술로 승화하는 기회를 포착한다. 다시 상권을 되돌아보면 그녀는 무병만을 앓은 것이 아니라 예병까지 앓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녀로서만 만족할 수 없는 예술적 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무수리이면서 동시에 굿을 주관하고, 나아가 무대 위에서 예술로 승화된 무속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물론 그녀는 철저히 사제이고자 하고, 예술의 장에 세워진 ‘굿’일지라도 철저히 그 신성함을 지키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신 이해경의 삶을 통해 볼 때, 한국 무속이 종교성을 탈각한 문화예술로서만 존립한다고 해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인은 철저히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해경을 통해 사제가 아니라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40여 년 전 어린 시절 밤새 동네 골목 안에 울러 퍼지던 꽹과리 소리는 어린 소년에게 단지 무서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누누이 반복해서 제도화된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신’의 어리석음과 그 병폐에 대해 들어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 그렇게 비난하던 ‘미신’의 속성을 제도화된 종교가 더 철저히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무속인 이해경의 삶은 타 종교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위한 인증투쟁과 병행해서 한국 무속세계를 정화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성 제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존재의 신성, 생명의 영성, 나아가 세계의 종교성 자체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지 타인의 심성 속에 일어나는 신비체험을 손가락질하거나 비하할 이유가 없다. 단 종교의 이름으로 물질과 권력을 탐하는 현 한국사회의 종교현상에 대해 비판적일 뿐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인정한다. 한국의 무속이 여타 종교들과 대등하게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현대인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하나의 치유 방법이라면, 거리에 산재한 신경정신과 못지않게 충분히 그 존재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평생 처음 접해 본 무속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 만신 이해경님께 감사드린다. 그녀의 자서전 [혼의 소리, 몸의 소리]를 통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좀 더 넓힐 수 있었다. 무속의 세계를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보다 넓어진 세상의 지평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반응형
반응형
무당은 신과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존재다. 그들은 신의 권능을 빌어 권세를 얻고 간혹 세상을 호령하기도 하지만, 주로 세상의 권능이 비켜선 곳에 없는듯 숨어살면서 5,0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5,000년 동안 무당은 시대에 따라 사회적 대우를 달리 받았지만 세상의 처분과 무관하게 항상 세상의 시시콜콜한 잡사에 관여해 왔다. 서구적 합리성이 우리사회를 지배한 현대에 들어와 그들의 사회적 존재감은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주류사회의 제도화된 종교를 통해 세상 속에 공인된 지위와 부, 권능을 인정받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종교상인'들과는 달리 제도권밖에 축출되어 음지에 숨어 살면서도 한번도 세상과의 끈을 놓친 적이 없다.  무당은 그들을 축출한 지배권력마저 존재의 실존적 한계와 탐욕의 괴리 속에서 그들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 잘났다는 정치인들 조차 선거철이 되면 바리바리 돈보따리를 싸들고 그들 '무당'의 권능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 때문이다.
   

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무당'이 다큐멘타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창재 감독은 만신 이해경을 통해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합리와 광기의 사이에서 무당이 되어가는 법과 살아가는 법을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합리의 영역에서 축출된 무속의 세계를 다시 합리와 광기의 사이에 걸쳐놓는다. 그럼으로써 이창재는  합리성의 단독지배로 만신창이되고 신성이 제거된 현대인의 삶을 구원하고자 하는지 모른다.

[사이에서]는 '인희'라는 20대 중후반의 여성이 무병을 앓다 무당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전편을 통해 추적한다. 왜, 어떤 사람이, 어떻게 무당이 되는가? 그렇게 운명이든, 팔자든 무당이 된 사람들은 이세상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세상과 관계하는가? 감독의 시선은 주류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편향적일지 모른다. 카메라의 눈은 제3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엑션을 취하지만, 관객은 금새 만신 이해경의 눈에서 감독의 눈길을 읽고 만다. 감독은 철두철미하게 카메라 앵글에 잡힌 바로 그 사람의 눈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그 지점에서 공감과 연민이 피어나고, 관객인 나도 감독의 눈과 만신이해경의 눈으로 [사이에서]에 몰입해버린다.

관객의 관점을 훔친 다큐멘타리는 성공작일 것이다. 그점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남는 의문은 부정할 수 없다. [사이에서]는 탈아가 단순히 이상심리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지, 합리성의 지배영역 바같에 있는 초자연적 광기가 있는 것인지, 제도권 종교와 달리 체계도 경전도 교리도 없는 무속이 우리 삶속에 5,000년의 역사를 끈질기게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다 말해주지 않는다. 이점 신성은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는 인정하지 못하고, 무속의 존재가치가 부당하게 폄화되는 현실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스스로 무속의 권능을  인정할 수 없는 나 스스로의  인식이 갖는 한계가 야기하는 의문인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뭏튼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의식속에 감춰진 샤머니즘을 드러냄으로써 최소한 '무당'이라고 불리는 우리사회의 한 부류의 소수자의 삶을 양지로 끌어내어 그들 삶의 고유한 가치를 만천하에 공포한 [사이에서]는 명작 다큐멘타리임엔 틀림 없어 보인다.









반응형
반응형



첫 규슈 방문 때 일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두번째 규슈방문때 일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여행이라고 해봤자 두번의 규슈 여행이 전부지만, 난 벌써 일본 마니아가 되었고 일본여행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여행정보서를 벗어나 김남희의 [일본의 걷고싶은 길] 2편 규슈/시코쿠 편을 먼저 읽고, 추가로 1편 홋가이도/혼슈편을 구입해 손에 쥐었다.

몇편의 여행서를 읽어 나가다 보니 어느순간 내가 여행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해 보게되었다. 먼저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여행 계획이 있거나 최소한 머지않은 미래에 여행을 갈 수 있을 것 같거나 최소한 가고싶은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서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여행을 갈 것 같지 않은 지역에 대한 여행서라도 어떤 대리 경험이나 대리 만족을 위해 여행서를 읽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여행서는 하도 낡아서 여행정보서로서의 의미도 없고 대리경험을 줄 것 같지도 않지만 읽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는 여행서가 여행서의 한계 넘어 인간 삶의 이해를 깊이하는 역사적 안목이나, 철학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나에게 김남희의 책[일본의 걷고싶은길 1편 홋카이도 혼슈]는 어떤 책일까?  나는 가까운 미래에 혼슈를, 구체적으로는 오사카와 교토 그리고 도쿄를 여행하고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한 그 열망을 1년이상 유예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나는 이 책을 통해 임박한 여행 목적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위해서 읽지는 않았다. 한달쯤 뒤에 이 책에서 다룬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지금 나에게 혼슈와 홋카이도는 구체적인 여행정보가 필요한 곳은 아니다. 그러면 나는 이책을 여행의 간접경험을 얻거나 삶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깊이하기 위해 읽었던 것일까? 일정정도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바로 이점에서 나는 [일본의 걷고싶은길 1편 홋카이도 혼슈]에 몰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김남희의 글을 몇편 읽었고, 그리고 서가에는 앞으로 읽기 위해 미리 구입해둔 [유럽의 걷고 싶은 길]과 [소심하고..... 산티아고]가 꽂혀있다. 나름 김남희 마니아를 자처하지만 솔직히 이젠 조금 식상해지기 시작하는 면이 있다. 김남희의 소녀적 감수성이 주는 편안함과 따스함에 반했지만 그녀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삶을 이해하는 통찰력이라든지 세상을 바라다보는 인식의 폭같은 것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속좁은 독자의 투덜거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적어도 여행서를 읽는 재미는 최소한 세상을 바라다 보고 이해하는 안목을 넑히는데 있다고 본다.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지금 여행설 ㄹ 한가롭게 읽고 잇을 처지가 아니라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던 여행서가 철학서가 되어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점에서 김남희가 옳은 것은 분명하다.

하여튼 이책을 통해 레분토와 북알프스 다테야마 여행의 꿈을 가질 수 있게된 점, 필자에게 감사 드린다.  
반응형
반응형

 
이 책은 일본여행에 앞서 같은 시리즈인 [후쿠오카]편과 함께 구입했다. 후쿠오카편에 실망한 만치 그 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후인벳부편에도 당연히 실망했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 보는 것이 맞겠지만 적어도 이런류의 여행안내서는 좀더 다양하고 풍부한 컨텐츠를 다루어주어 다양한 독자에게 고루 만족을 주어야할것으로 생각된다.
 
규슈여행관련 책에서 유후인에 대한 여행 정보를 다루고 있긴하지만 유후인 여행시 휴대할 목적으로 콤펙트한 여행안내서를 구할려고 했고 검색에서 유일하게 잡혔던 책이었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이 책을 구입했다.

너무 야박한 평을 하게 되어 가슴아프지만, [후쿠오카]편과 거의 중복된 '여행코디네이트'도 불만스러웠고 작은 책에 산만하게 들어가 있는 사진 정보는 너무 지나쳤다싶은 만치 많았다. 진짜 여행과정 내내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볍고 알찬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휴대용 영행안내서를 원했었는데 책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인터넷상에서만 확인하고 구입한 나의 불찰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두번째 일본여행에 앞서 사전정보가 아무것도 없이 떠났던 첫여행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열심히 책도 사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그리고 죄종단계에서 집을 떠나기 몇일전 휴대용 여행안내서가 필요할듯해서 이 책을 구입했다.

결론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특히 후쿠오카 여행의 목적이 먹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조금은 심하다 싶을 만치 쇼핑정보와 업소정보뿐이다.

사실 쇼핑정보는 공항 등에 비치된 홍보지만 보아도 충분하고, 그리고 대부분의 소소한 정보들은 인터넷에 늘려있다. 그래도 굳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이유는 '책'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때문일 것이다.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시켜놓아 한눈에 원하는 정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가벼운 휴대용 여행안내서일망정 홍보지 이상의 깊이있는 정보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 덧붙이면, 감성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본문 편집디자인이 전혀 가독성을 고려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책을 충분히 알아보고 사야하는데 이번 경우는 실패한 선택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만족할 수 없었고, 짐이 될 것 같아 여행을 떠나면서 가져가지도 않게 되었다. 모든 면이 아쉽다.

반응형
반응형

집권 10년만에 민주개혁세력이 보수우파의 극력한 저항과 진보세력의 협공속에 몰락하고 박정희를 닮은 짝퉁 개발독재자 MB가 대통령이 된지 3년이 흘렀다. 그동안 진보좌파세력과 합리적 중도보수에 가까운 민주개혁세력은 상상도 할수 없었던 우리사회의 정치적 퇴행을 목도하면서 한편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한편으로는 시대적 과제를 읽고 그 과제를 수행할 세력을 묶는 연대의 정치를 갈망해왔다. 지난 6.2지방선거의 실험적 연대는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열 가능성을 확인하는 장이 되었고, 일부 세력들 간에 보다 심화된 실질적 연대의 틀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 즈음에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나왔다. 부재가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인 이 책은 인터넷 진보언론의 신화를 창조한 오연호가 우리시대 진보적 지식인의 대명사가 된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를 여러 달에 걸쳐 만나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다시 집권을 할수 있을까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아젠다를 놓고 대담을 나눈 결과물이다. 진보세력의 집권플랜을 논하는 책이다고 해서 선입견을 가질 수 있지만 사실 [진보집권플랜]은 의외로 가벼운 책이다. 사전 질문지를 제시하고 심도깊은 이론적 입장을 정리해서 답변하는 식의 대담이 아니라 오다가다 시간나는 데로 가볍게 까페에서 커피 한잔을 나누며 담소를 즐기며 조국이 가진 평상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저자 오연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은 정밀한 이론적 논쟁이 아니라 진보세력의 집권을 위한 대중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을 출판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덧붙여 필자는 진보교수 조국을 통해 진보세력의 집권전략을 공론화하는 것과 더불어 조국 교수 개인의 정치적 무게를 달아보고 현실 정치의 장에 론칭해 보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필자의 집필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선은 이 책이 진보개혁세력간의 연대없이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다 넓게 인식시켜나가는데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담의 내용 대부분은 한국내 진보세력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그리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같이할 수 없을 정도의 기본적인 공통의 인식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진보세력은 정치적 인물의 풀이 협소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그나마도 정치의 영역과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이 나누어져 일정정도 서로 금기시하는 풍토에서 '정치적 인물'의 선택지를 늘이고 미리미리 키워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책임에 분명해 보인다 .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담의 과정이 소위 '강남좌파'간의 공감대와  우애를 넘어 시대적 과제를 중심으로한 보편적 시대의식 같은 것을 찾아보고, 그것을 진보세력 사이에 연대를 위한 공통된 기반으로 제시하는 과정 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의 시대적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진보담론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이 진보 세력의 집권전략을 창출하기 위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이상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다시말해 이 책은 희망사항을 설파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플랜'이 없다. 또한 조국 교수가 아니라 정치인 조국을 드러내기위한 필자의 노력이 조금은 부족해보인다. 필자 개인의 정서적 공감대를 넘어 '정치인 조국'의 상품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전 서울대 총장 출신의 몇몇 정치인의 경우 오랫동안 뜸을 들이며 입질이나 하는 기회주의적인 처신끝에 정치의 장에서 퇴출되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그들과는 분명 다른 삶을 살아온 조국교수는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과정도 그들과는 분명다를 것이라 생각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차별성을 갖는 지성인, 그리고 진보적 지도자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식의 구태연한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이 국면을 치고 나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 조국'을 보고싶다.

그리고 진보집권플랜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이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반응형
반응형

한 아름의 여행서적들이 생겼다. 만만찮은 책값때문에 구입을 망설여왔던 걷기길 관련 여행서적들을 공짜로 얻어다가 책상위에 쌓아놓았다. 책무더기를 바라 보니 마음 든든한게 올해 겨울나기는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망설임없이 첫 책으로 서명숙의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을 집어 들었다. 재작년에 한번 그리고 작년에 한번 다녀온 제주 올레길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어서이기도 했고, 요즘 내가 맡아 하고 있는 일이 [외씨버선길] 봉화구간의 스토리 자원조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제주 올레길은 단지 걷기길의 성공적인 개발사례만이 아니다. 올레길은 '길'을 떠나서도  단연 최고의 '지역 개발' 분야의 성공사례이다. 지역 개발 현장은 항상 "가치의 실현과 주민의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에 대한 욕구"가 충돌하는 현장이기도하다. 그런데 어떻게 필자 서명숙은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스스로 이름 붙인 '공구리주의'에 맞서 올곧게 생태적 가치, 원시적 공동체성을 지켜내면서도 '올레길'을 통해 지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적으로도 풍성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경이롭기만하다. 나의 올레길에 대한, 올레길을 일구어낸 필자에 대한 놀라움과 존경의 마음으로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 책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은 서명숙 자신이 기록한 올레길의 역사이자 올레주의의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걷기길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된 실무지침서이다. 이책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난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 작당을 하고 어떻게 길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봉착한 난관들을 헤쳐나갔는지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길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필자 개인의 삶의 과정 속에서 얽힌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한 에세이 인지 혼동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은 올레길이 구상되고 현실화 되는 과정 맡바닥에 놓여 있는 가장 중심적인 토대가 바로 사람에 대한 그녀의 사랑임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서귀포 시장 한 구퉁이에서 [서명숙상회]를 꾸려왔던 어머니, 그녀의 든든한 동반자인 두 분의 남동생, 그리고 대포동의 네 여자, 그리고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고 힘이 되어 주었던 기업가들의 이야기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름없는 올레꾼들의 가슴저미는 구구절절한 삶의 이야기들이 나닐까 한다.  병든 육체와 상처입은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올레길을 걸으며 병을 치유하고 생명의 건강성을 회복해 나가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한쪽 구석이 따뜻해져옮을 느낀다. 

올레길은 경쟁만능주의와 속도전에 지쳐 병들어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원시성을 회복케하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그녀의 애틋한 인간애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올레길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한 구도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야심가의 욕망의 실현과정과 또 한 연약한 인간의 구도과정 사이에서 그녀의 올레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올레길은 '옳음과 현실적 욕망'을 통일시킨 건강한 지역개발의 사례이듯 그녀에게 이 길은 자아실현과 구도의 과정이 통일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 서명숙은 올레길의 제안자이자 기획자이고, 사람을  모아서 일을 도모하는 조직가이자, 구상을 실무적으로 처리해 현실화시켜내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온갖 모습으로 이 책의 갈피갈피마다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그 모든 아이텐티티를 떠나 그녀는 그냥 "제주의 여자"라고 부르고 싶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거센 파도를 맞서 삶을 일구고 지켜내온 제주의 여자는 모두 '설문대 할망'이다.  설문대할망같은 파워와 카리스마을 가지고 제주를 깊이 사랑했기에 '올레길'이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올레길에서는 그저 풍광에 넋을 잃고 길이 좋아, 마냥 바닷바람에 취해 아무 생각없이 걸을 수 있었다. 두번째의 올레길은 봉화군등 4개 시군이 함께 만들려고 하는 [외씨버선길]을 위한 워크삽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이 때도 나는 그냥 한도  끝도 없이 올레길을 걷고싶었지만 [워크삽] 일정때문에 길걷기 욕구를 제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았지만 다행히 처음으로 올레길을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단법인 올레의 일꾼인 안은주선생의 강의를 통해 감히 [올레주의]라고 이름 붙혀도 좋을 올레길만의 정신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올레길을 필자 서명숙을 통해 더욱 깊이 알게 해준 이 책을 만나게 된 인연이 고맙다.

'올레길'은 걷기길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만이 아니다. 올레길은 반토목주의에 입각한 지역개발사업의 전형을 제시한다. 나는 그것을 '올레주의'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책을 덮으며 외친다.

[올레주의] 만세! 만만세!!
반응형
반응형

김남희를 통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알게되었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온다.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고, 가던 길을 그냥 가기에는 왠지 억울한 순간.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그런 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010935451&code=900306
경향신문 연재글에서 우연히 만난 김남희의 이 문장에 매료되어 까미노를 알게되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카미노 관련 책과 자료를 모으며 언젠가는 꼭 길을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까미노는 시들해져버리고 나는 다시 시코쿠길에 필이 꽂히기 시작했다.

올초 평생 처음 떠난  일본 여행을 전후해 일본 관련 책들을 보고, 일본에 매료되었고 시코쿠 길을 알게 되었다. 시코쿠길은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고보 다이시의 순례길을 따라 일본을 이루는 4개 섬중 제일 작은 시코쿠 섬 둘레의 88개 사찰을 도는 1200km의 길이다. 그 길은 고보 다이시의 깨달음을 함께하는 엄숙한 길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단지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나누며 일본의 삶과 문화를 깊이 느끼고 배우고 즐기기에 너무나 좋은 도보여행길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시코쿠 길은 나의 3번째 일본 여행길 목록에 올려졌고, 그리고 다음달 계획잡아놓은 결혼 20주년 규슈가족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책 [일본의 걷고싶은길2-규슈, 시코쿠 편]을 읽게 되었다. 


이책은 규슈와 오키나와 그리고 시코쿠 섬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규슈의 유후인과 부속섬인 야쿠시마, 오이타현의 유후인, 오키나와 본섬과 부속섬인 이시카기섬, 이리오모테섬 그리고 이 책의 3분지2를 채우고 있는 시코쿠 순례길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책은 기본적인 여행 안내 정보를 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여행 안내서는 아니다. 김남희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지만 정보는 덤일뿐이고 책은 줄기는 작가의 사색의 흔적이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소통과 교감의 기록이다.


이 책의 첫장을 채우고 있는 야쿠시마는 규슈 남단에 부속되어있고 울릉도의 3배정도 되는 크기의 섬이란다. 일년 내내 비가내리고 원시 열대림이 덮여있는 이 섬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원령공주]의 배경이기도 하다. 물이끼가 바위를 덮고, 수백년 된 삼나무가 울창해 그 숲속 어디엔가  숲을 지키는 정령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섬이다. 그 섬을 걷고 도 걸어 수령이 7,200여년이 되었다는 삼나무 조몬스기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필자 김남희가 정념 삶을 과정 속에서 내칠 수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 인간과 우주, 삶과 죽음의 신비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길인듯 하고, 긴 여정끝에 만난 조몬스기는 필자 김남희에게 말없이 세상의 진리를 전해  줄 것 같다. 최소한 야쿠시마를 걸다보면 육식화된 몸, 동물적인 정신이 숲의 정기에 씻겨 초식화된 몸으로 식물적인 정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김남희를 통해 내 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의 목록에 야쿠시마를 올려본다.

필자의 두번째 발길은 오이타 현의 유후인으로 향한다. 유후인은 유휴가케산으로로 둘러쳐진 조그마한 마을이다. 온천이 있고, 조그마한 가게들이 빼꼭히 들어찬 거리가 있고, 작은 미술관과 민예점들이 늘어선 관광지다. 유후인은 1970년대에 와서 '기획된' 관광마을이란다. 하지만 '관광마을'의 어감이 주는 인공적 혹은 조잡한 이미지가 필자를 통해 유후인의 역사를 들어보면 확 사라진다. 대규모 개발과 보전의 갈림길에서 주민자치기구를 결성하여 보전의 길을 선택하고, 단순한 보전을 넘어 마을이 존속할 수 있는 생활기반을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주민들의 삶과 같이 해 왔던 지역 문화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단장을 통해 오늘날 일본인이 살아 생전에 가장 가고싶어 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했단다. 껍데기만 보고 다소 실망스러웠던 유후인을 필자를 통해 다시 느껴 볼 수 있게 된 점이 너무 고맙다.



필자의 발길은 오끼나와와 이시가키섬 등을 거쳐 시코쿠에 이른다. 이책의 2/3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시코쿠 길은 책의 분량만치 오랜 역사를 가진 순례길이다.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양축의 하나인 불교의 순례길이자 수백년동안 민중의 삶속에 녹아 든 풍습과 문화를 낳은 시코쿠 순례길은 어쩌면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걷기 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따라 김남희는 이 길을 만든 당사자인 고보 다이시의 가르침이 아니라 시코쿠 순례길이 만든 길가 주민들의 인정과 삶을 대하는 태도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까고 있는 것 같다. 이 길을 걷고 나면 사람에 의해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사사로운 원과 한이 보편적인 인류애로 승화될 것 같은 희망을 준다. 나도 언젠가 오헨로상이 되어 시코쿠 길위에서 상처 받은 다른 사람들과 포옹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김남희가 고맙다.

시코쿠와 규수 지역의 대표적 걷기길에 대한 김남희의 여행기인 이책은 일본의 도시에 국한된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겐 일본 이해의 폭을 일본의 농촌, 일본의 자연까지 넓힐 수 있도록 안내할 것 같다. 그리고 김남희가 길을 걷는 내내  '친절한 일본인과 뻔뻔한 일본정부'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일본의 매혹적인 문화가 어떻게 평생을 가져왔던 일본에 대한 선입견과 조화를 이루거나 그 선입견을 수정해 나갈 지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김남희의 발길을 따라 일본의 자연, 일본인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속속들이 만나다 보면 추악한 국가권력과 분리된 일본의 매력을 갈등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본의걷고 싶은 길]을 만나 다시 한번 더 일본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한달 앞으로 다가온 규슈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 부푼다.
반응형
반응형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의 사상적 지평을 연 지성의 토대가 되는 청년시절 독서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오해도 많고 열성팬도 많은 '정치인' 유시민에게는 어쩌면 최종적 '입장'이 아니라 그 입장의 원천을 드러내는 일이 꼭 필요했었다고 보는데, 바로 그와같은 역할을 거뜬히 하고 있다. 물론 필자 유시민의 집필 동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데 있고, 그것은 바로 지표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길찾기, 즉 한국사회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의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나아갈 바에 대한 모색일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 [청춘의 독서]는 청춘시절 독서의 중요성이나 책읽기의 방법을 청춘들에게 들려주는 측면보다는 필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과제를 지고 살아가야 할 이미 기성세대가 된 나같은 독자와 그 고민을 나누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길은 잃'은 유시민은 오래된 지도를 다시 편다. 그 지도는 청춘시절 읽었던, 이후 유시민의 삶의 방향을 이끈 나침판같은 역할을 해주던 주옥같은 14권의 고전이다. 그리고 다시 길이 보이지않는 지금 그는 새로운 지도가 아니라 바로 그 낡은 지도를 다시 편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리영희의 [전화시대의 논리], 칼막스의 [공산당선언], 사마천의 [사기], 다윈의 [종의기원],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맹자], ... 어느 것 한권 무겁지 않은 책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 14권의 고전이 세상의 근본을 모두 보여주거나 우리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은 보여주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필자 유시민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근본을 이루는 가치의 보고를 다시 뒤적거림으로써 저만치 나아간 자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자의 태도를 되찾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막무가내 밀어부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대한 바보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그 근본으로 돌아가 초심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주할 수 있었던 그의 겸손한 삶의 태도가 참 건강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 http://usimin.net/  에서 퍼옴

근본을 되짚는 [청춘의 독서]는 그렇다고 한가한 고전읽기의 흔적은 아니다. 그는 치열한 현실에 두발을 딛고 달음박질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는 마음으로 현실과 책속을 오간다. 그 접점이 어디이고, 그의 사색의 과정이 가져올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휴머니스트 유시민의 젊고 건강한 정치적 행보와 삶의 여정을 지켜보고 싶다.

유시민은 이제 젊은 정치인이 아니라 50대의 기성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항상 청춘을 갈망했고, 그의 지지자들 역시 청춘일 수 밖에 없었다.  자연적 나이를 뛰어넘는 그의 젊음은 바로 독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그가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노무현대통령의 삶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이다. 독서하는 정치인, 지성적 정치인에 목마른 한국사회에 그와같은 정치인의 큰 획을 긋는 유시민의 이후 삶의 행로에 큰 행운이 함께하길 빈다. 그의 행운이 한국사회의 행운과 일치하기를, 그의 정치 여정이 표면적으론 다르지만 근본에서 같은 세력이 더불어 민주주의의 기초를 지키며 우리사회가 나아가야될 큰 비젼을 함께 모색하며 그 토대를 쌓는 과정일 수 있기를 또한 기원한다.   
  
[청춘의 독서]를 읽으며 나는 비슷한 연배로서 이제는 잊어져가는 아련한 꿈들을 되새긴다. 그리고 잊었던 이름들을 불러본다. 칼 막스, 라스콜리니코프, 쇼냐, 이명준...  그리고 늦은 숙제를 떠 안는다. 다음 두권의 책을 꼭 읽어봐야지.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필자가 [진보와 빈곤]에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한번 적어본다.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 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엑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상태로 전락한다.(.....)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Progressive and Poverty, p531~533.)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