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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트라우마]불평등을 통한 문명 진단이다. 필자 리처드 월킨슨은 불평등이 지금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삶과, 제도를 포함한 존재방식을 형성해오는데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지금의 삶을 지배하는지 분석하고 탐구한다. 나아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불평등 해소 후의 우리 삶의 변화를 제시하기 위해 시도한다.

사실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라는 혐의를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 자신도 필자의 동조자가 되고 말았다. 현대인이 처한 과도한 스트레스, 정서적 장애, 정신병, 좌절, 심리적 위축 및 기만적 우월감을 포함해, 범죄, 마약, 건강과 수명의 문제까지 모든 에 깃든 불평등의 지배적 영향력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불평등은 현대 사회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필자는 먼저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불평등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1마음속의 불평등은 자기회의과대망상그리고 그 탈출구로서의 중독이라는 3개의 장으로 나누어 불평등이 어떻게 우리의 심리적 삶을 지배하는지 수많은 연구 자료를 통해 논증한다.

소득불평등은 지위와 남의 시선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키고 불안과 우울증 그리고 무기력과 절망을 초래함으로써 자기회의에 빠지게 만든다. 이는 한 사회의 우울증 발생율과 불평등 지수의 상관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심리사회학적 사실로 판명된다. 동시에 불평등은 자기회의의 극단에서 자기고양적 편견, 혹은 자기도취증을 유발한다. 불평등 지수가 높은 사회일수록 자기우월적 과대망상을 보이는 비율이 증가하고, 한 사회 내에서도 불평등지수가 높아질수록 자기도취증에 빠진 사람의 비율이 비례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자기회의와 자기도취 사이에 동요하는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중독으로 해결하려 든다.

2부에서 필자는 불평등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입장과, 능력주의 신화에 입각해 불평등의 발생을 정당화하는 입장, 계급을 분리하고, 불평등의 개인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계급행동을 논박한다. 필자에 따르면 인류는 현대인과 뇌 용량이 같은 인류가 존재한 지난 20만년에서 25만년에 이르는 세월 중 약 95%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인간사회는 대단히 평등했다”(p.205.)고 하며 채집 수렵사회의 평등이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깨어지고 축적과 불평등이 발생했음을 논증한다. 따라서 불평등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발생한 것이 아니고 역으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 것이고, “... 타고난 재능 차이가 사회위계 내 위치를 결정하기보다 사회위계 내 위치가 능력과 관심사, 재능을 결정한다”(p.253.)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소득과 부의 차이로 인간을 구분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을 조장하는 문명화된 예의는 지위우월성을 강화하는 장치에 불과하고 계급행동을 통해 계급차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개인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임을 증명한다.

마지막 3부에서 필자는 인류가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불평등 해소가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평등의 확대는 전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을 줄임으로써 더 수월하게 지속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P.345.)한다고 보고. 성장이 더 이상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한계에 이른 지점에서 문명 대전환을 통해 성장대신에 사회적 환경과 관계의 개선을 달성할 것을 요구한다.

[불평등 트라우마]가 보여주는 것은 많은 사회 현상중의 한가지인 불평등이 초래한 사회적 결과가 아니다. 오히러 필자는 불평등이 인류가 당면한 많은 문제의 한 가지가 아니라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정치 현실에서 불평등은 많은 문제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그것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하지만 아파트값 폭등은 빈부격차의 확대가 초래한 결과다. 정치개혁의 부진과 반동의 저변에는 사회개혁의 부재, 본질적으로는 불평등의 확대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불평등의 확대가 정치개혁을 좌절시키고, 정치 개혁의 부진이 불평등 심화로 귀결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에 처해있다. 괴물 트럼프의 집권과 백일우월주의자들의 반란의 저변에도 미국사회의 빈부격차의 확대가 도사리고 있고, 국지적 내분이나 전 지구적 분쟁의 저변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악의 근원은 바로 불평등이라는 괴물이다.

우리는 팬데믹 시대에 4차 산업혁명과 AI, 일자리 없는 성장, 그리고 그린 뉴딜을 이야기하지만 불평등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사고는 작동하지 않는다. 최소한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이 최저임금제 도입을 기초로 하는 노동권 강화를 전제한 사회적 대타협이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그린뉴딜은 사회적 DEAL은 빠지고 기술만능주의에 경도되어있다. 그래서 바로 지금 [불평등 트라우마]는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되는 책이다. 특히 모든 정치인들의 손에 이 책이 들려있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좀더 밝아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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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임금 : The Case for A Maximum Wage  /Sam Pizzigati 지음/ 허윤정 옮김

필자 샘 피지게티는 날로 심화되고 있는 소득 불평등이 인간의 삶에 가하는 근본적인 해악을 주목하고 이를 해소하거나 완화할 최소한의 해결책으로 [최고임금]을 제안한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한 진보정당이 총선 공약으로 [최고임금제]를 채택했지만 아직은 우리 사회에 생소하고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상황이다. 최고임금제와 쌍을 이루는 제도인 [최저임금제]는 미국의 경우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노동권의 강화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우리나라는 1986년에 최저임금제가 도입되었고 거의 4반세기를 운용해 왔는데 아직도 제도 본래의 취지를 궁극적으로 실현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1986년에 입법되고 1988년에 처음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은 시간당 462원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20218720원까지 점진적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매년 열리는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정(민간)위원간의 줄다리기를 넘어 한쪽이 퇴장한 가운데 확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회적 부의 증가속도, 노동 생산성의 상승폭, 부의 편중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최소치의 증가율로 강요되어 왔고, 그나마도 경기 불확실 등 경제 지표가 악화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억제하여 노동 측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그리고 이 과정은 늘 이데올로기 공격과 병행되어왔다. 최저임금인상이 중소상인의 경영을 악화시켜 폐업이 속출하고 따라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주요인인 듯 선전하고,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진 최저임금의 기본 정신마저 왜곡해 오고 있다. 나아가 애초에 최저임금은 열등인종을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음모론적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

최고임금에 대한 공격도 최저임금에 대한 공격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가의 창의성, 열정을 억압한다는 논리가 가장 일반적인 반대논리로 동원될 것이고 이는 한명의 뛰어난 사업가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자본 측을 옹호하는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에 대한 답변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위에 제시되어야하고, 보다 바람직한 인류공동체의 전망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최소한 인간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국한해서 행위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창의성이 경제적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고조로 실현된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인류가 얼마나 불평등한가라는 사실을 통계수치를 통해 보여주고, 이 또한 나날이 더 악화되고 있음을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정리해 제시하면서 왜 불평등을 해소해야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1장 과하다는 것의 정의에서 필자는 어느 정도의 임금 격차가 적절한지, 어느 수준이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한 논의를 다각도로 전개하면서 사회적 개입의 정당성, 적절성을 검토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임의적이고, 상황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고 사회적 숙의와 합의 과정을 통해 절절한 수준을 제어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임금격차, 자산보유 격차는 극악할 정도로 지나치고 이것을 줄여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역사적 진보의 방향이다는 것이다. 2장 최고배수의 마법에서 필자는 적절한 불평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느 수준인가를 묻고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개인의 품위있는 삶을 보장하는 첩경임을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불평등 해소책으로 상향평준화의 방법(최저임금)과 하향평준화의 방법(최고소득)을 제시하면서 소득불평등 해소가 궁극적으로 자산불평등의 해소를 가져올 것이라고 낙관한다. 또한 법적 강제와 더불어 공익에 기여하는 기업에 대한 공적 지원, 사업기회 제공 등을 하는 공공지갑을 통해 기업이 자발적으로 최고임금제에 참여하도로 유인을 제공할 것도 제안한다.

3슈퍼리치 없는 사회는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이 신분상승 강박과 과소비 그리고 개인의 좌절과 무력감을 얼마나 초래하는지 보여주면서 극단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체제가 동시에 영웅적 자선을 옹호하는 모순을 고발한다.

4장과 5장을 통해 필자는 더 공정한 사회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마지막으로 현시점까지 다양한 국가의 여러 층위에서 시도된 실행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인류의 오랜 꿈의 현실성을 확증한다.

최저임금이 가난한 자의 소득을 상향시켜 불평등을 줄이는 시도라면 최고임금은 부자들의 소득을 줄여 불평등을 줄이는 시도다. 이 둘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러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켜 보다 평등한 사회로 인류가 진입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도다. 이책은 그와 같은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고,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최고임금제도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 그리고 도입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하고 있고 좁은 지면에 비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책은 불평등 해소와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설득력을 얻어가는 과정이 난해하고 논리적 비약을 동반하거나 정서적 공감에 의존하지 않는다. 많지 않은 분량이면서, 새로운 시대적 아젠다를 대중적 언어와 객관적 자료로 잘 설명해 내고 있는 친절한 책이다. 보다 평등한 세상의 꿈을 키워가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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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교통수단이 늘고, 나름 생할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여행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신비가 발가벗겨진 여행은 조금 비싼 오락 상품이 되었고 광고 등 대중매체에 의해 부풀려진 욕구에 따른 소비행위로 추락했다. ‘착한 여행’, ‘공정 여행은 이렇게 추락한 여행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지만 우리는 늘 여행에 앞서 윤리적 자의식 앞에 일순간 망설임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여행의 기술]을 읽으면서 나는 훼손된 여행의 정신이 오롯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알랭 드 보통은 상업성이 배제된 여행 본연의 모습을 넓은 예술적 교양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회복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여전히 여행이 우리의 삶을 고양하는 의식이고 우리의 영혼에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수행임을 확인시켜준다. 덕분에 의심받던 여행의 결백은 증명되었고, 여행의 특별한 권한을 복원되었다.

여행은...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풍경을 요구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 두려움 등 회피정서... 음악이나 풍경은 이런 부분이 잠시 한눈을 팔도록 유도한다.”

알랭 드 보통은 위의 명제들을 증명하기 위해 특정한 주제와 풍경과 인물을 연결한다. “기대라는 관념과 바베이도스라는 장소와 위스망스라는 인물을 연결하고, “호기심 마드리드라는 장소와 알렉산드 폰 홈볼트라는 인물을 연결한다. 전부 9개의 주제를 장소와 인물을 통해 이해하고 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고양한다. 스쳐지나가며 소비되던 풍경이 예술적 영감이 되고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자 마자 작가의 예술적 인물학적 소양에 놀랐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와같은 교양과 지식을 장소와 엮어 의미를 산출하는 그의 인문학적 상상력에 더 탐복했다.

책을 덮고, 필자의 인도를 따라 나의 많지 않은 국내외 여행의 기억을 반추한다. 나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과 낯선 맛남을 통해 삶을 고양하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나를 억누르고 있던 마음의 짐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나의 낯선 모습을 언뜻언뜻 확인할 수 있는 신비체험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풍경과 인문학적 지식, 삶과 철학적 사유를 아우르는 지적 편력일 수는 없었고 가능한 사유를 배제하고 오감에 몰입하는 감각적 여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알랭드 보통이 제시한 여행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나의 감각적 여정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다. 소비로서의 여행은 좀더 고양될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은 좀더 가벼워져도 좋을 것 같다. 나의 여행은 늘 소비와 그 사이 어디쯤에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하고 부수적이지만 아쉬운 점 두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책값이 얼마나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호퍼나 고흐 등의 작품을 칼라로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PC를 통해 작품을 확인하다보니 책읽기가 자주 끊기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했다. 서인도 제도의 바베이도스나 영국의 레이크디스트릭트는 나에게 미지의 지역이다보니 이역시 PC에 의존해야했다. 소제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라도 한 장 그려져 있었다면 책읽기 몰입도가 좀더 높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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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저, 2012,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은국내에서 금속공학을 전공(고대 1982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하여 신학, 독일문학, 철학을 공부하여 1994년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을 획득, 이후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대학에서 강의를 해 왔고 현제 베를린 예술대학에 재직중이다.

그는 2010년 발행한 [피로사회]를 통해 독일의 베스트셀러 문화비평가로 부상했고, 한국에는 2011[권력이란 무엇인가]로 처음소개 되었다. 주요저술로는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죽음의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하이데거입문], [헤겔과 권력] 등이 있다.

이 책에서 피력한 한병철의 현실 인식을 보면 신자유주의의 병리학적 징후로 우울증을 이해하고, 우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의 과잉에서 찾고 있고, 이 문제의식이 전편에 퍼져있다.

 

2014년 차이트지의 밀스 보잉 등과의 인터뷰 기사 : 현실인식과 실천적 함의를 보여주는 언설

-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독재하에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경영자입니다. 가시적 악의 소멸을 주장. (논란의 여지)

- 자기가 강제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그 강제를 자유로 느낀다면 , 그건 자유의 종말입니다. 1980년대에는 인구조사를 시행하려고하자 모든 사람이 시위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 구조상으로는 지금 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 페이스북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합니다. 경작하라.... 결국 수확을 걷어가는 것은 봉건 영주들이죠. 이것은 소통의 착취입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물적 자원 때문에라도 어쨌던 이대로 계속가지는 않을 겁니다. 원유는 50년 정도면 고갈됩니다...”(현실의 변화가능성을 인정?)

- 그래서 레닌도 말했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라!”(낙관, 진보주의?)

- “이 세상에 대해서 기뻐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앎도 없고 정보만 있어요.”(비관, 염세?)

 

[피로사회]

피로사회는 작은 판형의 70여쪽의 책으로 총 7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7장중 전반부 4장까지 요약 발제.

신경성 폭력

[피로사회]의 첫문장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작자의 저술이 현대문명에 대한 문화병리학적 진단서 임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 병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점염성이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로 면역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였다. 냉전의 종식으로 대표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된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제시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이질성은 탈경계 과정에 걸림돌이 될뿐이다. 그것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늘 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상태로 특징지어진다. 문화이론 담론과 생활감정자체를 지배하는 혼성화 경향 역시 면역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는 부정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런 부정으로 인해 파멸되기 대문에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신경성질환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에 따른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한 병리적 상태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온다. 보들리야르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상태와 같은 발언은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체주의를 면역학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이론적 약점을 드러낸다.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반응이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신경성 폭력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폭력이론은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서술하려는논리적 혼란에 빠져 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러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고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와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 깃든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저항을 일으키지 않는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고,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푸코규율사회는 더이상 오늘날의 사회가 아니다. 21세기의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사회의 주민은 더이상 복종적 주체라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따라서 통제사회같은 개념은 더이상 적절성이 없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현대는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은 사라지고 할수있다는 긍정적이 이를 대체했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이는 생산성의 최대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일정한 수준의 생산성에 이르면 금지의 부정성보다 성과의 패러다임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능력의 긍정성이 훨씬 더 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란 축면에서 당위와 능력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한 규율적 행위 조종 모델에서 자기주도성과 자기 책임을 요규하는 규범으로 대체하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고,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고 본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에도 있다. 애랭베르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자기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과 우울증을 초래한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부담의 증가도 기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한다. 그렇게 나온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퇴화이다. 먹이를 먹으면서 주위를 살피는 동물의 수준이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좋은 삶에 대한 사색은 불가능하고 날이 갈수록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 강화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빼았겼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는데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사물의 향기를 볼수있다던 폴 세잔은 깊은 사색적 관찰을 통해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고 할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다닌다.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세계앞에서 현대인은 무력하다. 과잉활동성속에서 사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에게 관조적 요소가 제거되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활동적 삶

한나 아렌트[활동적 삶]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녀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한나 아렌트에게 행동의 가능성은 탄생을 지향한다. 기적은 인간 탄생 자체, 그리고 인간이 그러한 탄생의 힘을 바탕으로 행동하여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에 있다. 이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며 탄생은 인간에게 그러한 행동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리하여 행동은 종교적인 차원으로 숭화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리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제작과 행동을 아루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진다.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익명성 속에 자아를 용해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고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상태에 빠져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해답을 요구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 상실하고 극단적 허무에 직면했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났다. 노동하는 동물이 유적 노동을 하고 있다면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났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다. 이로인해 허무는 더욱 강화되었다. 서사성이 사라진 죽음에 직면한 벌거벗은 생명은 그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벌거벗은 생명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삶은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져 있다.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벗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죽지않는 자들이다. 여기스 사케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차제로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 날 진행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주인은 스스로 노에가 된다. 그는 포로이자 감돆관이며 희생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주인이면서 노예가 된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제 인간은 우울증에 빠져 탈진하여 무력해진 나치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에 대항하는 어떤 효과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사유의 힘을 손상받지 않은 소수의 행동에 호소한다. 노동하는 동물에 대항하는 활동적 삶을 피력하던 한나 아렌트는 결국 사유의 힘, 철학적 사색의 힘에 투항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되어 있으면 근대적 호라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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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면역학적 적은 과연 사라졌는가? 자본 가노동자의 대립은 내재화되어 나 스스로 경영하는 자본가이자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되었다는 언설의 현실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자본의 탐욕, 부의 편중, 환경의 파괴, 위험의 증대, 민주주의의 훼손 이 모든 현장에 투쟁의 대상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행동하지 않는가는 정치심리학적 문제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하는 것 아닐까? 몰라!

성과사회패러다임은 이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하버마스 마르쿠제 등에 의해 제기된 자발적 복종, 체제내화, 그리고 그람시의 헤게머니 이론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특히 푸코의 파놉티콘이론이 규율사회의 징표라면 후기의 통치성은 자발성에 포박된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를 분석하는 틀로 성과사회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병철 입론의 독특성은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하는것이 아닌가? 대중적이고 문학적인 언설로 철학적 주제를 다룬 점 그리고 동아시아를 통한 서양문화의 비판(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적 입지를 찾는 것으 도 다른 과제일것.

자기착취란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서가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장정일) 노동자는 자기 경영의 강박때문에 노동강도를 높이고 일거수일투족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자본증식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할 뿐이다. 노동자는 자기경영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자본의 노예이다.

그의 문화병리학적 진단의 심오함은 실천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가장 중요한 주체의 문제에서 한병철은 무력하다. 개별화되고 파편회된 자기경영의 주체인 개인은 우울증의 원인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 힐링에 몰입하는 현대적 개인을 정당화한다. 늘 그렇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물론 한병철이 사회정치적 실천을 등한시하는 입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화병리학적 사회진단은 현실 이해의 출발점이지 실천적 함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병철의 한계가 아니라 문화병리학의 한계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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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히로시, 노부오카 료스케 지음(2012)

정영희 옮김(2015)

남해의봄날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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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작은 섬 아마초에 도시의 몇몇 청년이 도착했다. 그들은 30대의 나이로 일본 대도시에서 살면서 잘 나가는 직장인이거나 나름의 영역에서 삶의 터전을 일궈나가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시에 기반한 삶의 미래에 더이상 희망을 느낄 수 없었다. 취업난, 과도한 경쟁, 날로 악화되는 환경, 사회적으로 각박해진 삶의 조건들은 어느날 그들이 느끼는 도시적 삶이 끝나가고 있다는 징표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은 황무지처럼 방치되었기에 차라리 더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 외딴섬 아마에서 보다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책은 그들 청년들이 아마로 이주를 결정하게된 나름의 이유와 과정, 그리고 이주후 자신들의 꿈을 일궈하가는 경험담으로 채워져있다.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주관적 언어로 지난 5년간의 섬생활 속에서 가진 일상의 서정과 경험을 풀어놓은 이책은 그래서 읽기가 쉽다. 

그들은 도시에서 하던 직업경력이나 기업운영 경험을 토대로 하고 외딴 섬 아마의 섬자원을 자산으로 새로운 벤처사업을 시도한다. 그들은 섬과 도시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섬을 알리고 농수산물을 유통하는 홍보마케팅사업에 열중하기도 하고, 수산물 가공이나 판매 등의 새로운 방식들을 도입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청년들이 섬으로 이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다. 이들의 시도는 우리가  흔히 볼수있는 지역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저질러지는 난개발의 현실과는 대척점에 서있다. 그들은 지역의 풍토나 여건을 살피지 않고 무분별하게 공해 공장을 유치하여 농어촌같은 소외지역에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정부의 세수를 늘이는 방식과는 와전히 달랐다. 도시에서의 이력과 경험을 토대로 벤처기업 메구리노와를 만들지만 그들의 도시의 자원이나 도시적 기획을 무조건적으로 이식하여 지역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지역의 풍토와 자원 그리고 문화에 기반해 조화로운 지공동체의 강화에 기여하는 사업영역과 사업수행방식을 모색했다.이는 그들이 날로 피폐해가는 자본주의 일본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갈구를 지역공동체에 대한 애착, 아마초에 대한 절대적 사랑으로 승화했기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초의 시도는 아직 진행중이다. 따라서 이 책은 농어촌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성공적인 대안 모델을 만들어냈다기 보다는 성공적인 모델을 찾아 나가기위한 기본적인 관점, 방식, 철학을 보여준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어보인다. 지역사회에 청년세대가 유입되고 지역기반의 사회적 경제를 구축해 낸다면, 지역단위의 공동체가 자족적인 삶이 가능한 단위로 복원되고 항구적인 자생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생력을 가진 지역공동체의 연대로 더 큰 사회를 이뤄나가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안전하고 안정된 세상이될 것이 분명하다. 이책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일본에서 청년세대들이 기존의 체제를 탈출해 새로운 공동체의 구축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물론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도 그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들의 시도에서 나는 작은 희망을 본다. 변화가 꽉 막힌 세상, 빈틈없이 짜여져있고 그 속에서 움짝달싹못하고 생명력을 잃어가는 청춘들이 드디어 발랄한 반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체제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근본적인 도전이 시골이라는 자본주의의 변방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빼앗고 주거와 의료 교육 등 최소한의 삶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제거함으로써 소위 상위 1%를 위한 세상에 도달한 신자유주의시대에 체제내에서 무력화된 청년들이 드디어 자각을 통해 체제의 균열을 내기위한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청년세대들도 환경 평화운동에 기반하고 문화예술을 수단으로한 다양한 지역 공동체 활동에 투신하고 있다. 체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사회구성을 향한 성과로 드러날 수 있을지 알수없지만 적어도 불평등과 부정의가 고착된 정체된 세상으로만 보이던 우리 사회의 저변에서 청년들의 작은 반란들이 모의되고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희망적이다. 그들의 시도가 성공하기를 그리고 그들 청년세대들의 시도에 기성세대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울지 고민하면서 이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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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는 유해조수다. 유해조수는 농작물 등에 해를 끼치는 동물로 법적으로 지정되어 있어 정해진 기간에 죽여도 좋은, 아니 죽일수록 좋은 동물이다. 그런데 그 유해의 기준을 사람이 정하니 사람에 해로운 동물이 정확한 뜻일 것이다. 산골로 찾아들어와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아저씨는 너구리와 그것도 자신의 참깨 농사를 방해하는 유해조수인 너구리와 맞닥뜨린다. 그런데 웬걸 서로 적대하면 박멸해야 될 너구리와 화가는 인간과 유해조수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로 대면한다. 먼저 말을 건넨 건 너구리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귀를 가진 것은 예술가 아저씨다.


이렇게 소통을 시작한 너구리와 화가아저씨는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거리를 나누고 마침내 삶을 나눈다. 그 둘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몰입해 들어가다 보면 독자인 나도 어느새 너구리의 친구가 되고 화가아저씨의 이웃이 되어 그들과 같이 꿈을 나누게 된다. 너구리와 화가아저씨의 티격태격 입담에 책을 읽는 내내 가슴 따뜻해져 오고 얼굴에 웃음 가득 머금을 수 있지만 [참깨밭 너구리]는 사실 슬픈 이야기이다. 단지 너구리가 죽어서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죽기 마련이고 죽음자체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어떤 죽음인가가 그 슬픔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너구리의 죽음을 통해 화가아저씨의 마음을 읽어본다. 너구리와 꿈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구리는 그냥 유해 조수의 한 마리일 뿐이다. 올무를 놓고 몽둥이를 들고 너구리를 찾아 휩쓸고 다니는 너구리 사냥꾼은 사실 우리사회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재벌이고 공안이고 검찰이고 언론이고 청와대다, 그들이 쫒는 것은 너구리가 아니라 너구리가 가진 불온한 꿈이다. 우리사회의 수많은 꿈 많은 그래서 불온한 너구리들은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있다.

 

어쩌면 참깨밭 너구리는 화가 아저씨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 산골짜기에서 원래부터 살고 있던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의 천박함이 싫어, 온갖 부정한 것들이 판치고 부정의가 지배질서를 이루는 세상이 싫어 산속마을을 찾아들어온 화가아저씨가 가슴속에 품고 들어와 산속에 풀어준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자식을 건사하는 것은 둘째고 자신이 먹을 것 조차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너구리는 동시에 화가아저씨의 모습이기도 하다. 주제넘게 인류의 종말이나 지구 생명체의 종말 정도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종말을 걱정하는 너구리의 무모함은 화가아저씨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가 아저씨는 순수예술 종말론이 횡행하고 시장에 굴복한 상업의 한 품목으로 전략한 그림을 통해 시대에 뒤떨어지게도 아름다움의 궁극에 도달하려고하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것을 고사하고 자신의 입에 풀칠조차 하기에 힘든 궁색한 처지다.

 

너구리의 사유방식은 인간 문명과 대척점을 이룬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인간의 사유방식, 문제 제기 방식이나 해결 방식의 근거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너구리는 화가 아저씨의 소유권에 기반한 사고, ‘상식에 입각한 처신에 일침을 가하고, 삶의 이유가 되는 궁극적인 물음을 잃어버린 화가아저씨를 비소한다. 왜 사는지, 우리는 무엇인지. 우주의 끝은 어디인지... 화가아저씨는 너구리를 통해 비로소 긍극적인 질문들을 되찾는다. 그리고 삶 전체를 던져 진리를 추구하는 너구리의 삶을 통해 진실, 진리, 그리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자신의 결기를 세운다.

 

참 오랜만에 읽은 동화다. 동화를 규정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책을 다 동화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동화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싸늘한 진실을 분석적 언어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세상의 꿈을 꾸게 하는 그런 책이다. 동화적 환상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책 [참깨밭 너구리]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인 것은 싸늘한 현실세계를 투영한 너구리와 화가아저씨가 살던 마을 너머에 있을 그 어떤 세상에 대한 어렴풋한 꿈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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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2 발제요약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더숲


 

이 책은 탈자본주의적 삶의 가능성을 개인차원에서 구현한 기록이다. 프롤로그의 첫문장은 레닌의 말 혁명은 변두리에서 시작된다로 시작된다. 필자 이타루는 오카야마 현 가쓰야마라는 작은 변두리 마을에서 자동차나 선박을 만드는 대공장이나 핸드폰 같은 IT기술, 혹은 금융같은 현존 자본주의의 중앙이 아니라 이라는 초라한 변방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혁명은 부패하는 경제라고 명명했다.

이타루가 자본주의 극복 대안으로 제시한 [부패하는 경제]는 이윤의 축적이 자본의 필연적 자기증식 운동인 자본주의의 근본원리를 거부하는 이윤 없는 경제이자, 노동의 투여로 생산된 부를 소비하는 과정자체가 밀가루를 발효시켜 맛과 향을 머금은 빵을 만들 듯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그런 경제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은 5장씩으로 구성된 두 파트로 나뉘어 있다. [1부 부패하지 않는 경제]는 자본주의 현실비판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적 통찰을 중심에 둔 이론적 고찰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경험 속에서 봉착했던 싸늘하고 혹독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혹독한 사회에서 보다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를 접하게 되고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맑스 자본론의 핵심을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2부 부패하는 경제]에서는 시골빵집 다루마리의 도전을 흥미진지하게 정리하면서 다루마리가 어떻게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자본론으로 대표되는 맑스주의의 실현일 수 있는지 나름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입론은 맛있는 빵을 가능하게 하는 균, 균의 활동인 발효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건강한 빵 맛있는 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토대로 지역과 시골, 그리고 순환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윤을 거부하는 경영철학과 빵을 통해 사람을 키우고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려는 도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책은 마무리된다.

 

1부 부패하지 않는 경제

- 자연계는 부패를 통해 모든 물질이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을 겪는다. 부패는 생명을 가능하게하고 모든 생명이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는 자연의 섭리다. 이를 경제에 적용하면 각자의 삶을 즐겁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부패의 경제학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는 착안에서 이책은 시작한다.

1장 무언가 잘못되었다.

- 필자는 농업을 전공 농업관련업체에서 일함.

- 하지만 농업조차 과도한 경쟁에 노출되어있었고, 부정이 만연해있음에 실망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됨

- 유기농산물 유통회사에서도 납품 비리기 횡행하고 이를 고발한 필자가 오히러 왕따를 당하고, 유기농 생산자조차 농산물을 돈을 벌기위한 상품으로밖에 보지 않는 상황에 절망 작아도 진짜인 일을 강구함.

- 그 과정에서 의사였다가 대동아전쟁에서 전사한 할아버지의 계시로 빵을 만들기로 함. 시골 주치의가 꿈이었던 할아버지의 꿈을 이어 시골 빵집을 하기로 결심함.

2장 마르크스와의 만남

- 이후 필자는 4년반 동안 4군데의 빵집을 전전하며 기술을 습득하고 20074월 후쿠시마와 가까운 지바현에 개점함

- 개점 하면서 경영방침을 세울 때 정직한 재료로 정성껏 만들고 이에 부응하는 정당한 가격을 받자는 경영방침을 세움,

- 하지만 빵을 만들어보니 재료가격이 등락을 거듭했고 이것이 국제 곡물메이저의 장난에 의한 것임을 간파하게 되었고

- 국제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시골의 작은 빵집이 휘둘리는 상황에 직면함.

- 이런 고민의 과정에서 제야학자인 아버지의 권유로 자본론을 읽고 이 세계에는 시스템의 바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내 가게를 가지고 바같 세상으로 탈출하겠다는 희망은 허구임을 깨닫고 진지하게 마르크스와 내면하기 시작함,.

 

3장 마르크스와 노동력이야기

- 필자는 빵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제과점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혹독한 근무조건에 직면함

- 자본론을 읽어보니 19세기 영국의 빵집역시 잔혹한 근무조건에 노동자들이 혹사당한 역사적 사실과 지금 현실속의 필자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낌.

- 이는 굳이 빵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에 공통되며 마르크스 사후 150년이 지난 현대사회에서 조차 삶의 편리가 늘고 물자가 풍부해졌다고는 하나 노동자에게 강제되는 가혹한 환경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느낌.

-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본가는 노동자의 농동력을 구매하여 이윤을 만들어내고 그런 조건하에서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 밖에 없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1 : 상품이란 대체 무엇인가?

- 자본주의 체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상품의 정체를 먼저 밝혀내면 된다고 간파한 자가 바로 마르크스다.

상품의 조건 1. 사용가치가 있을 것

상품의 조건 2. ‘노동에 의해 만들어 질 것

상품의 조건 3. ‘교환될 것.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2 : 상품의 가격에 숨은 비밀

가격을 결정하는 교환가치는 그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변동시키는 2차적 요인에 불과하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3 : 내가 받는 임금의 정체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지만 특수한 성격을 가진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징1 : 사는 사람은 자본가에 국한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징2 :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임금이다.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해당한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4 : 이윤의 탄생과정

노동력을 구입하는 교환가치와 구입한 노동력을 이용해 만들어낸 교환가치의 차이가 바로 이윤이다. 자본가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극대화하고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극소화하기위해 분투한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5 : 노동력을 팔았지만 결국...

착취당하는 노동자는 억울하겠지만 노동력의 거래과정에 어떤 부정이 개입된 것은 아니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유로운 신분일 때 이다. 따라서 노동력을 떼어서 팔기 tlfag은 사람은 가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면 된다.

 

4장 균과 기술혁신이야기

인류는 6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밀가루 반죽을 구어 먹었고, 4~5천 년 전 발효된 밀가루반죽으로 만든 빵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19세기말 메이지 초기에 빵이 전래되었고 발효기술이 제빵의 핵심이어서 도제식 수업으로 제빵의 기술을 이어나갔는데 1920~30년대에 이스트 제조법이 보급되면서 빵집의 경영과 노동 형태가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기술혁신의 의미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6 : 기술혁신은 이윤을 늘린다.

이스트의 등장으로 제빵이 보다 손쉽게 이루어지고 생산성이 향상되지만 노동자의 근무조건은 변화가 없다. 신기술의 창안으로 노동시간을 늘이지 않고도 이윤을 증가시킬 수 있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7 : 누구를 위한 기술혁신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신기술의 창안으로 이윤이 증대하지만 경쟁사회인 자본주의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윤은 기술혁신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8 : 마지막에 웃는 자

자본가가 기술혁신으로 얻은 이윤은 가격경쟁으로 인해 기술혁신 이전으로 떨어지고, 상품의 가격도 떨어진다. 하지만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비례하기 때문에 상품가격 하락에 따라 동반 하락한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이다.

 

* 시골빵집의 마르크스 강의9 : 싸구려 일, 싸구려 음식

TPP, FTA 등으로 농산물 가격이 싸지면 분명 식료품의 가격은 내려간다. 하지만 식료품 등 생활필수품의 가격 하락은 궁극적으로 노동력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기 때문에 싸구려 일자리를 쏟아낼 뿐이다. 이스트의 재조법이 보편화되면서 숙련된 제빵기술자가 불필요해지고 값싼 단순노동자가 빵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기술혁신이 결국 값싼 일자리를 만들 뿐이다.

 

5장 부패하지 않는 빵과 부패하지 않는 돈

- 부패하지 않는 빵과 부패하는 빵/ 부패하지 않는 돈과 부패하는 돈을 빗대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부패하는 경제]를 제시

- 미국 수입밀로 만들 밀가루는 살충제가 들어가 있어 이것으로 만든 빵은 잘 썩지않는다.

- 필자는 시간도둑이라는 캐릭터로 유명한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로부터 부패하지 않는 돈이라는 착안을 가져옴. [엔데의 유언 모모의 작가 엔데, 삶의 근원에서 돈을 묻는다](카와무라 아츠노리 지음)

- 자본주의는 부패하지 않는 돈의 무한증식으로 모순이 발생한다. 이 돈을 부패하게 함으로써 다시말해 증식을 중단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2부 부패하는 경제

부패는 생명에게 불필요한 것들 또는 불순한 것들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다루마리는 이윤이 아니라 순환과 발효에 초점을 맞춘 부패하는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도전이다.

 

1장 어서오세요. 여기는 시골빵집입니다.

- 다루마리는 필자 이타루와 아내 마리코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 다루마리는 5가지 효모를 이용 30가지 정도의 빵을 만들고 주3일근무에 년 1개월 휴가를 실현하면서 빵 가격은 400엔정도에 월매출 200만엔, 연매출 2,000만엔정도를 실현하고 있다.

- 아이 둘을 포함한 4식구와 2명의 직원 2명의 알바를 채용하고 있다.

 

2장 균의 목소리를 들어라

- 순수배양균은 상품화된 이스트 같이 정제된 배양군을 말하고 천연누룩균은 생활환경속에 자연발생된 잡다한 누룩균의 복합체를 말한다. 천연누룩균은 자연환경에서 자라 생명력이 강하고 균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관리가 어려워 제빵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 필자는 천연누룩균이 빵의 깊은 맛을 가능하게 하는데 일단 군의 다양성에서 맛의 풍부함이 온다고 한다.

- 또한 빵을 만드는 재료와 토양을 같이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발효를 가능하게 한다.

- 기적의 사과 주인공 기무라 아키노리의 자연농업에 공감하면서 영양성분 과잉의 유기농 쌀도 거부하고 오직 자연재배 쌀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균이 부패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 듯, 인위적으로 동원된 돈이 부패하지 않는 자본주의경제를 이룬다. 천연균이 부패하는 빵을 만들고 자연을 순화시키듯, 인위적으로 동원된 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각자가 행복한 아름다운 세상이 가능하다.

 

3장 참다운 시골살이는 순환

- 필자는 방황하는 청년기를 보내다 1994년 부친을 따라 헝가리에 거주하게 되면서 시골살이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됨

- 귀국후 농업관현 학과에 다니며 시골생활에 대한 꿈을 키우고

- 졸업후 농업관련업체에서 근무하다 시골에서 까페를 하는 꿈을 가진 아내를 만나

- 2008년 지바현 이스미 시에서 빵집을 시작함.

-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터지자 아이들은 위해 안전한 곳을 물색하던 중 발효문화와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오카야마현의 가쓰야마라는 시골마을에 정착하게 됨.

- 필자는 시골에 사는 사람의 남다른 각오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빵으로 지역 순환을 실현하겠다고 함.

- [엔데의 유언]에 보면 돈을 사람들이 생활에서 사용하는 교환을 위한 돈과 자본이 사업을 통해 불리려 하는 돈으로 나누고 전혀 다른 이 두 종류의 돈에 동일한 법정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엔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통화라는 것을 제안했다.

- 엔데의 유언에 나온 지역통화의 사례는 지역 농업을 활성화시킨 미국의 이타카라는 마을의 통화인 이카타 아워가 있다. 이 지폐에는 다음과 같은 이념이 인쇄되어있다고 한다.

- 이카타 아워는 우리지역의 자원을 재활용함으로써 지역 경제를 자극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에 일조한다. 이타카 아워는 우리의 기능, 체력, 도구, 삼림, 들판 , , 등 우리 지역 본래의 자본에 의해 유지된다. (‘엔데의 유언)

- 필자는 이카타 아워의 이념이 바로 자신이 빵집을 통해 실현하고자하는 이상적인 경제라고 고백한다.

- 다루마리에서 만들고자 하는 빵은 지역통화같이 지역의 자원을 이용해 만들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만드는데 기여함은 물론 지역의 자연과 환경이 생태게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되찾게 해주는 빵이다.

 

4장 착취하지 않는 경영형태 이윤 남기지 않기

- 필자에게 시골빵집은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기반이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 따라서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공산주의사회는 꿈꿨지만 필자는 한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생산수단을 가지는 방식이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피력한다.

- 그런 의미에서 소상인개념을 차용하여 소경영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햐결하는 실마리가 될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를 발효시키는 소상인들의 연대가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 소상인의 핵심가치는 이운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규모만 작다고 소상인이 아니라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지 않아야 진정한 소상인이다.

- 이를 위해 소상인은 노동자가 생산한 만큼 노동자에게 정확히 돌려주면 이윤은 발생하지 않는다.

 

5장 빵을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또 하나의 도전

- 빵을 만들며 살아가는 필자의 생활철학을 정리한 장으로 전통적 지혜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지역사회의 장인들인 죽세공과 궁목수 그리고 제빵사의 소중함을 주장

- 그리고 일과 삶의 조화work-life balance와 일상의 행복을 위해 휴식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 글로벌화니 식량문제니 지구공동체의 회복이니 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빵을 가지고 접근하겠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먹고 싶은 것을 지키고 싶어서, 생활과 일이 하나가 된 인생을 살고 싶어서 빵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 그리고 돈은 미래를 선택하는 투표권이다. 몇 년에 한번 있는 선거의 한 표보다 매일 쓰는 돈이 현실을 움직이는 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

- 개인적인 탈자본주의적 삶의 실천이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대체할 수 있을까?

1. 보편화가능성?

2. 체제변혁에너지로 승화가능한가?

3. 24장에서 제안된 사회적 소유가 아니라 소규모의 개인적 소유가 현대 산업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 소유가 가능한 산업영역이 극히 제한되어있지 않은가

소상인의 연대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타루가 꿈꾸는 것은 자본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덜 잔인한 자본주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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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업을 통한 도시재생과 도시해체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몇년전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가까이 두고 읽었다는 책의 목록이 공개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그뒤 구입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맙게도 친절한 이웃으로 부터 먼저 선물을 받게되었다.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온 [아바나의 탄생]은 나의 게으름과 산만함에 쫒겨 책장 한켠에 몇년을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었다.  

[아바나의 탄생]이 나의 책장에 방치되어 있던 세월동안 생태도시 아바나는 참 친숙한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작동불능에 빠질 조짐을 보이자 사람들은 부지런히 쿠바를 찾았다고 한다. 환경운동가나 농촌운동가는 물론이고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발길까지 부지런히 쿠바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쿠바는 신자유주의의 작동유무이전에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도시의 황폐화, 후쿠시마가 보여준 핵재앙, 지구온난화가 불러온 기상재앙 등 기존의 세계를 지탱해왔던 기반이 흔들리게 될 때마다  우리의 의식에서 되살아나는 어떤 이상향 같은 곳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 쿠바는 하나의 엄연한 생태적 대안 모델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부당한 무역봉쇄정책에 맞선 생존전략으로 채택된 쿠바의 도시농업 도시공동체 사업이지만 이제는 쿠바모델이 에너지 위기- 경제위기 대응전략이 아니라  하나의 엄연한 존속가능한 반생태적 자본주의 대안 모델로 모색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쿠바의 도전은 적지않은 충격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도 살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가질정도로 소비적 반생태적 삶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사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본 사람은 다 아는 유기농의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전국적으로 보편화시키는 과정은 참으로 고무적이었다.  "중앙집권적 '복지국가'의 체제를 개조하여 의사와 환자와의 동반자적 관계에 의해  개인의 자연치유력과 커뮤니티의 힘을 이끌어내는 '자급적인 의료'로 전환을 꾀"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중국의학을 도입해 약품등 물자부족으로 인해 의료가 중단된 서양의학을 대체해 나가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로 감동적이었다. 특히 빈곤문제를 사회자본의 활성화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문제의식은 낙후된 한국의 복지 인식에 비해 훨씬 진전된 것으로 느껴졌다. 저에너지를 넘어 에너지 제로 사회를 향한 쿠바의 노력은 핵위기에 노출된 한국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아뭏튼 쿠바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사회 구성을 상상할 때 불가능하다고 밀쳐두게 되는 영역이 그만치 줄어들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한명의 농부로서 이 책의 내용을 다시금 음미해 보면 몇가지 의구심을 피할 수 없었다. 도시농업과 농촌농업의 건강한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하는지 이 책은 다루고 있지 않았다. 사실 사회 시스템 전반이 바뀌지 않고 도시농업을 도시 재생 프로그램으로 적용가능할지도 잘 이해되질 않았다. 도시 근교의 텃밭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서울 도심에 개인적 취미 생활정도가 아니라 유의미한 채소밭이 가꾸어질 수 있다는 것이 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앞장서서  황폐한 서울의 삶을 치유하기 위해 공동체의 가치와 도시농업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분명히 의미있는 일이고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시속으로 들어간 농촌이 진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해 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도시는 도시적인 편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급기야 농촌스런 가치마저 흡수하게 되는 현실이 결국 농촌의 존재가치를 손상하는 로 나아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농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도시농업을 통한 도시의 재생이 더나아가 도시의 해체로 나아가야하지 않을까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도시의 해체는 지방과 서울의 차별을 사라지게 하고 나아가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시의 유지 존속을 위한 많은 노력들 대신에 도시해체를 통해 시가 갖는 병폐 자체를 해소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센프란시스코 등 소개된 다른 도시의 도시농업은 쿠바의 도시농업과 비교될 수 없어보인다. 도시농업을 통해 도시 재생이 과연 가능할까는 의구심을 가지는 사례는 바로 서울이나  센프란시스코와 같은 도시의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 쿠바의 사례는 그런 도시의 사례와 분명히 단전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아바나는 도시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속에서 도시의 해체ㄹ르 통해 도시를 구한 사례가 아닐까? 그런데 과연 서울이, 센프란시스코에 쿠바의 사례를 적용하는게 가능할까? 사실 많은 고민이 필요한 지점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끝내 해결되지 않는 한가지 의문이 남았다. "카스트로 정권은 이전까지의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 체제를 개혁하고, 관청을 반으로 줄이는 철저한 행정개혁을 추진하면서 시장과 경쟁원리를 끌어들여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동을 시험하고 있다'는 필자 요시다 타로의 진술을 어디까지가 질실인지 가름할 어떤 논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 극복 방안으로 주목받는 쿠바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동을 시험하는 사례로 언급된다는 점은 아무리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쿠바의 노력은 중앙집권적 국가주의 사회주의에서 민주적 분권적 사회주의로의 전환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농민시장을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제도로 이해하는 필자의 입장을 나는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는 데 있어 보다 폭넓은 자유를 얻었다.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는 늘 경험에 종속된다. 그 한계를 깨고 상상력을 넓혀주는 책은 분명히 양서일 것이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그와같은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에 누구에게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그런 책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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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법이 아니라 이기는 법을 배우는 책

 

만델라는 자신의 삶의 역정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이라 말한다. 그 길은 자유를 향한 길이었기에 멀 수 밖에 없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먼나먼 길이라고는하지만 자유를 향한 길이기에 중간에 주저앉지 않고 참고 버텨낼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만델라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해방 투쟁은 먼길이었을지언정 불투명한 길은 아니었다. 아파라트헤이트를 분쇄하고, 다인종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한 투쟁의 대열은 명확한 목표를 공유했다. 영미의 불투명한 자세가 끊임없이 문제를 꼬이게 하고 본질을 흐려놓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라는 든든한 기반위에서 도덕적 정치적 명분을 동시에 움켜지고 치룬 질 수 없는 투쟁의 길이었다.

그렇다고 남아프리카 해방 투쟁이 희희낙낙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에 기반한 백인지배 권력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가 그러했듯 소위 문화 통치라 부를 수 있는 포섭 회유책에서 부터, 원주민 부족간 분쟁을 부추키는 분할통치 수법, 저항 세력에 대한 합법을 가장한 정치적 억압, 그리고 테러와 암살이라는 비합법적 방법을 넘어 나찌를 연상케할 만한 대량 학살까지 백인 정부는 그들의 기득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세상에서 흑인 청년 만델라가 갈 수 있는 길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백인 지배질서를 수용하고 그 아래 부역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꾀하는 길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존귀한 백인과 미천한 흑인의 이분법이 통용되는 세상의 부정의를 향해 분노하고 저항하는 길이었다. 만델라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해방을 끝내 쟁취했다. 

두어달 전 만델라의 자서전을 선물받았을 때 지금 왠 뜬금없는 만델라인가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서 한쪽 두쪽 읽기 시작한 뒤 나는 만델라의 삶에 빠져들었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배울수 있는 것이 많긴 하겠지만 그로부터 얻은 배움이 고스란히 나의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반동의 시대, 파시즘이 온갖 치장을 하고 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거짓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 만델라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구체적인 답보다 훨씬 깊은 영감을 제시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넘어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살것인가를 다시금 되묻게 하는 만델라의 일대기가 다시 먼 전망을 모색해야하는 우리에게 참 좋은 교과서가 될 것같다.

나는 만델라의 삶의 역정을 따라가며 투사의 삶보다는 친근한 인간적 면모를 가진 한 사람의 성인을 연상했다. 그것은 이 책이 사후적으로 지난 투쟁을 정리하는 자서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만델라의 삶에서 분노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없이 정의를 위한 투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마는 만델라는 인종차별이라는 극악한 부정의에 맞서 흑인우월주의나 타인종 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인종이 조화로운 삶을 사는 세상을 추구했다.  백인정권의 포악한 억압에 맞서 만델라가 무장투쟁 노선을 선언하고 '민족의 창'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군사훈련과 군사적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평온하고 담대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대적투쟁에서 보였던 만델라의 노선은 전선 내부의 분열과 대립과정에서도 그대로 견지되었다. 해방을 위한 투쟁의 도정에서 그가 속한 ANC(아프리카 민족회의)와 ANC의 온건노선에 반대해 조직된 PAC(범아프리카회의)가 분립하여 대치할 때도 그는 두조직이 적대하는 상황에 빠지지않도록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흑인 우파를 대표하는 인카타자유당과 줄루족의 분열주의와 참혹한 테러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만데라는 결국 백인 이든 줄루족이든 같이 위대한 남아프리카인으로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전제를 견지했다. 그와같은 만델라의 연대와 평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입장은 결국 남아프리카 인민과 세계인의 공감을 획득하게 된다. 결국 해방투쟁을 군사적 전투가 아니라 국제적 여론에 힘입은 지난한 협상의 과정을 통해 승리한다. 만델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와같은 연대와 평화의 정신이 아닌가싶다.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탈 수 있었던 것도  만델라 자신이 견지한 평화와 연대의 원칙 때문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백인 정권으로부터 해방되고나서도 만델라의 원칙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진실을 밝히되, 처벌하지 않는다'는 만델라의 입장은 수많은 목숨을 받쳐 승리한 세력이 쉽게 채택할 수 있는 노선은 아니었다. 내부적인 반발과 권력을 잃은 구백인정권의 비협조와 조소는 만델라를 곤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델라는 그와같은 노선을 통해 결국 진정한 승리를 챙취한다. 청춘을 바친 투쟁과 27년의 감옥살이, 그리고 수년에 걸친 협상과정을 통해 만델라는 백인정권을 해체하지만 그의 진정한 승리는 정권 장악뒤에 진행된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나는 그의 삶을 통해 어떻게 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덤으로 이책을 번역한 김대중전 대통령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만델라와 김대중..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유사점을 가진 것 같다. 오랜 세월 억압속에서도 평생을 정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끝내 승리를 가져온 점 뿐 아니라 투쟁과정에서 견지한 비적대적 입장, 정권 장악뒤에 가진 신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 나아가 그와같은 노선을 인정받아 노벨 펑화상을 타게 되는 것까지 똑같다. 만델라와 김대중 이 두 사람의 힘은 사실 일희일비하지 않는 담대함에 있는 것 같다.  

대선이 끝난뒤 한국의 진보 개혁 세력은 큰 혼돈에 빠진듯하다. 내부적으로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또다른 분열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대선 패배의 원인분석과 그에 따른 책임부여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학적 비판이나 정파적 이해에 얽힌 기싸움은 진보개혁세력의 미래에 아무런 희망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조중동 프레임을 그대로 채용한채 자행되는 '친노패권주의' 운운하는 마녀사냥이나, 좌편향 우편향으로 흔들리며 제기되는 선거전략의 이념적 편향에 대한 분석은 극히 위험해보인다. 연대의 방식에 대한 분석과 검토를 넘어, 연대 무용론까지 나가버리는 청산적 태도는 비의회주의적 변혁노선에서나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진지를 온전히 보전하겠다는 소수좌파정당의 고집은 51대 49라는 판세로 결정되는 선거판에서 채택할 수 있는 전략으로는 적합하지 않기때문이다. 이 모든 의문에 대해 만델라는 정답이 아니라 그 답을 찾기 위한 바른 태도를 보여준다.  

뜬금없는 시기에 만델라의 일대기를 읽고 나는 그의 삶이 전해 주는 메시지를 싸우는 "방법을 넘어 승리하는 방법"로 읽었다. 극히 주관적인 감상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싸움에 번번히 지는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아직 승리하는 법에 서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델라의 싸움과는 달리 목표는 분명하데 상대는 훨씬 불투명한 싸움을 해야하는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만델라가 주는 메시지는 그뿐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보다 담대해지고, 나아가 작은 정파적 차이에 대해 서로 관대해지고 파도치는 정치적 지형에 따라 보다 유연해 진다면 파시스트 잔당에 의해 장악된 기득권세력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를 획득하는 날이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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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동녘, 2010.

 

21명의 철학자와 21명의 시인을 짝지어 그들의 사유가 기반한 공통된 정신을 축출하고 추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태어난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독자로서 다시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 역시 쉬운 일일 수 없다. 따라서 이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되읽어 봄으로써 그 어려움을 대신한다.

 

‘철학의 능선’을 오르던 필자는 문학의 장르중 고도감이 제일 높은 시와 철학이 공유한 동일한 정신에 주목한다. 능선은 쉽게 오를 수 없지만 도달하면 좋은 조망을 얻을 수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로 결국 우리 삶을 조망하기 위한 여정이다. 플로로그에서 필자는 인문학의 정신을 드러내는 이성복 시인의 잠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2001)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일상적 세계를 동요시키고 낯선세계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의 성격이다. 이는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이고 “철학은 삶을 낯설게 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시와 같은 예술과 철학은 동일한 정신을 공유한다.

시에는 주관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이, 철학책에는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용어들이 산재한다. 이것은 시인과 철학자가 친숙한 세계가 아닌 원초적으로 낯선 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따라서 시와 철학은 독자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 난해함은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불쾌함에서 비롯된다. 시는 기존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낯선 상처 혹은 어떤 감각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말하려고 하는데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시는 어렵다.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 문법을 만드는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기존의 그물로 잡을 수 없는 새로운 물고기를 잡기위해 새로운 그물을 짜는 일과 같다.

흔히 시는 주관적인 것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가진다. 하지만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다.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인이기도 하다. 사실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끝단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이다.

낯선 느낌은 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시인은 그 느낌을 포착해 전달하려고 온갖 단어와 상징을 찾고, 철학자는 기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거나 혹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그 낯선 느낌을 보편적인 논리로 포착하려고 한다. 그래서 철학과 시는 어렵다.

철학자와 시인들이 우리를 ‘사실’과 ‘안전’의 세계에서 ‘느낌’과 ‘위험’의 세계로 내모는 진정한 속내는 스티노자의 자유정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주저 [윤리학]에서 ‘코나투스의 윤리학’ 피력한다. 코나투스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타자와 연결되어야한다.

들뢰즈는 인간이 과거에 만들어진 주름을 가지고 있고, 현재에도 주름을 계속 만들고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피력한다. 이것은 우리가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외부가 있다는 것, 즉 타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부 혹은 타자가 우리 삶에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주름이 만들어 진다.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정치’가 발생한다.

스피노자의 사유로 되돌아와서 보자. 인간은 “기쁨을 지속하고 슬픔을 피해야만 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쁨은 타자의 기쁨을 방해해서는 안되고 결국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라는 개념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그래서 기쁨의 윤리학은 자유의 정치학으로 변모한다. 피에르 크라스트르라는 정치인류학자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지향했던 인디언 사회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이런 자유정신이다. 기쁨과 자유, 이것이 철학과 시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의 궁극적인 꿈이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철학의 대중화와 인문학의 보편화를 추구하는 강신주의 지적 여정의 선상에 있는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선 철학과 시를 마주하게 함으로서 우리 삶을 낯설게하고 궁극적으로 “진정한 삶을 복원”하고자 한다. 저자의 의도가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와 철학이 ‘일상적 삶을 낯설게 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필자의 문제의식, 그리고 진정한 삶을 위한 자유의 정치학으로 전개되어가는 필자의 사유의 여정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하지만 박노해와 김남주를 위시한 21명의 시인과 아감벤과 데리다를 포함한 21명의 철학자를 한권의 책에서 만나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다. 감칠맛나는 지적 소품과 장치,  그리고 매혹적인 필자의 글발에 취해 한권의 책을 훗딱 읽어버린 뒤 짧은 꿈에서 깬듯 알지못할 허전함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필자의 폭넓은 지식에 압도되었지만 '대중적 인문학 상품'의 달콤하지만 깊지안은 뒷맛때문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자유의 정신을 뼈대로 이들을 살로 내장으로 근육으로 만들어 한권 책을 저술할 수 있는 필자의 발랄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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