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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라는 부제를 단 [진보의 미래]는 미완의 저술이다. 하지만  '미완'이란 수식어는 나태의 결과나 능력의 부재, 혹은 자연적 한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진보의 미래]에 담고자 했던 바로 그 진보의 진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의해 강제된 수식어다세상에 어디 완결된 삶이 있고, 완결된 역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많은 독자는 이 책이 미완으로 끝난 것만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완을 강제한 무자비한 권력의 독기가 여전히 서슬퍼른 세상에서처음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진정한 대통령,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필자 노무현의 손에서 미완으로 남은 책을 전해 받는 순간 나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숨을 가빠졌으며 코 끝에는 희미한 피 냄새와 짙은 국화꽃 향기가 느껴졌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어디 진보의 진전이 저절로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진보는 투쟁의 산물이며, 소수지배에 대한 다수 인민의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진보의 미래'를 말하고 도모할 수 있겠는가? 지난 봄, 필자 노무현은 우리 곁은 떠나갔고 우리 손에는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진보의 미래'가 고스란히 과제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필자의 고뇌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정은 필자가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의 엄중함과 그 실천의 지난함을 마주하는 엄숙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이상주의자로, 그리고 그 꿈을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실현하려 했던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살았다. 이 책은 그 이상주의자의 현실 속 투쟁의 발자취이자 고뇌의 옹근 결과물이다행간에서 읽는 피와 눈물의 흔적은 그와 같은 투쟁의 여정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자 노무현이 이상주의자인 이유는 이 책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지 않아 금방 드러난다. 성장주의, 개발만능주의, 물질주의가 뼛속까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이고 또한 '역사의 진운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히 세상을 '더불어 사는 복지 공동체'로 바꾸려는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그 이상이 필자의 삶을 정치적 실천으로 이끌었고, 정치가의 한 명으로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까지 오르는 정치적 역정을 걷게 했다. 그 역정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그의 입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이 했고, 그의 좌절은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에 다름 아니었다그것은 그가 정치적 실천의 역정에서 '불가능한 꿈'을 구체적 현실 속에 구현하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고뇌하고 분투한 결과이다그의 두뇌는 명석했고, 그의 가슴은 뜨거웠기에 그의 정치적 선택은 치밀하지만 차갑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이었지만 살가운 온기가 느껴졌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역정의 전과정의 발자취를 담고 있지만 특히 정치적 실천의 절정에 섰던 지난 5년간의 대통령직 수행의 과정에서 절감했을 우리 사회의 역사적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개혁 정치가의 좌절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뒷받침 없이 보수시대에 진보정치를 펼쳤던 외로운 검투사의 좌절감이 행간에 묻어있음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재임 5년의 과제를 연구와 저술을 통해 마저 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마저 꺾인 자리에 남겨진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뇌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 사회의 실종된 거대담론의 부활을 촉구한다. 필자가 정치의 장에서 수행하고자 했던 역할의 한계는 바로 국민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의 한계라는 엄연한 진실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 프레임에 대한 회의 없이, 국가 권력이 아직도 국민에 대한 지배수단의 성격을 가지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증진하는데 기여하는 시민의 자발적 의사 결집체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천박한 정치공학과 미시 정책적 차원의 담론에 매몰된 정치 현실을 질타한다.  

필자는 사람이 성장과 개발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되는 경제만능주의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만, 국민의 생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거대 미디어이고, 그와 같은 미디어를 지배하는 것은 돈인 세상에서 그 지배권력의 무한 반복하는 연결 고리를 끊을 힘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인터넷이란 신병기가 있지만 완벽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책이라는 지적 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선택은 어쩌면 무기력한 자의 불가피한 결정으로 오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정치동학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적 안목에서 인간의 이성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 위에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변화시켜나가는 인간 지성의 힘이다그와 같은 인간지성의 힘을 통해 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개선시켜나가고자 했던 그의 고민의 지점은 명확했다.

90%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이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적 산출물을 독점하는 10%밖에 되지 않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표를 던지는가?

왜 진보세력은 중도 개혁세력의 성공을 통해 진보의 지평을 넓혀나가지 않고 극우 보수세력과 함께 중도개혁세력을 협공함으로써 중도개혁세력과 동반 몰락의 길을 선택하는가?

왜 사람들은 성장을 통해 복지가 달성된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을 맹신하는가? 왜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재벌의 이익이 자신의 주머니 사정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은 자신이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복지의 증대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고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을 받아들이는가?


학벌주의, 지역주의 , 그리고 재벌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권력, 교육마피아와 검찰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근본적 변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는 극우보수세력의 집단 광기가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위의 과제를 천착했다. 그리고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그는 그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책을 덮으며, 필자 노무현을 질시하고 저주하고 끝내 살해한 자들에 대한 피끓는 분노로 몸서리치고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무거운 역사적 짐을 살아남은 자에게 남기고 간 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가슴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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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조국 교수가 인기가 많다고 한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으면서 거기다가 '개념'까지 있는 인물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하여튼  섹시한 진보 인사의 한명인 조국은 그 뛰어난 상품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한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한마디 한 동작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번 붐은 조국이 낸 [진보집권플랜]과 바로 이 책 [조국,대한민국에 고한다]가 촉발한 듯하지만 그보다는 이명박의 폭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세력화 되고 있지 못한 무능한 진보세력의 현 정치구도에서 대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측면이 많아보인다. 다시 말해 조국에 대한 인기는 일정정도 대중들이 선호하는 인물, 학벌, 개인적 자질 등등에 기반하고 있는게 사실 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현 정치적 지형이 대안적 진보, 다시말해 '성찰하는 진보' 인사를 요청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해 혹은 오해를 가지고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를 읽고나서 솔직히 조금은 아쉬움을 느꼈다. 은연중에 나는 그의 책을 통해 무슨 대단한 신체제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미래상을 제시하고 그를 구현하기위한 정교한 로드맵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25년은 된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사회구성체 논쟁'류의 책이나 당시의 이런저런 정치서적을 통해 늘 단언적이고 명료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시'를 제공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은 분명하고 적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될 사회상은 명료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는 모든 정치 서적이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을 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그와같은 실천이론의 한계가 진보세력의 답보상태를 지속시키는데 일정정도 기여한 측면이 있고, 여하한 이유에서건 정체된 진보의 이론, 조직, 실천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조국이 말하는 성찰하는 진보의 요구로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때 그 청년들은 세월을 겪고 현실은 훨씬 더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입장에서 조국은 명료한 시대규정과 체제분석, 그리고 전략 전술을 내어놓지 않고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사회의 진보, 우리사회의 진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 진보적 상식 혹은 합리적 상식을 각각의 세력 혹은 분야를 향해 직언한다.

먼저 조국은 MB가 이상사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두바이와 싱가포르의 허상을 지적함으로써 현정부의 국정철학의 부재 혹은 그 시대적 낙후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을 향해 쓴소리를 내어 놓는다. 그의 발언은 시민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기도하고 법률가의 눈에 비친 부정의한 법현실을 질타하고 올바른 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의 자본에 대한 고언에 이 책의 핵심이 놓여있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대한 규정, 체제모색적 이해없이 현 시대는 극복될 수 없음을 필자 역시 인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 역시 충분하지 않은 내용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다.   

사실 이책은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해 놓은 글이 아니다. 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단속적으로 언론에 게제한 것을 모아놓은 이 책은 참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을 덮고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를 도모하기엔 좀 어려움이 따른다. 부분은 다 공감하고 수용하면서도 책을 덮고 그려보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세상의 상은 그렇게 투명하게 다가오질 않기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필자 조국의 다음 저술은, 물론 극단적인 나 개인적 기대에 불과하지만. 좀더 확실한 우리사회의 비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글로 채워졌으면 한다. 
  
물론 독자의 한사람이 갖는 주제넘는 기대와는 별도로 이책은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공이 인정하는 가치 기반을 높이는 작업에 일정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하며, 정정당당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정한 룰의 만들고 그 수준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세력은 합리적 보수세력에 기생하는 극우 파시스트세력을 스스로 떨쳐내가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진보 개혁은 시대정신을 읽고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진보적 정책, 대안 체제의 발굴에 보다 유능해져야할 것이다.

조국같은 분이 그와같은 상식의 전도사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매개하고, 진보적 가치에 대한 합당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을 도모하는 거간꾼으로 나선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 한권이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는데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런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사회의 정치적 상식의 격을 높이는데에 일정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뭏튼 필자 조국이 건강한 좌파지식인, 한국의  노옴 촘스키로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기를 빈다.  


[YES24] 조국의 상식, 대한민국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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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분노하라

참으라고, 참으면 복이온다고, 그리고 너가 가진 분노의 거의 대부분은 너 자신이 못난까닭에 생겨난 극히 사적인 정서적 장애의 산물이라고 우리는 세뇌되어왔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삼성이라는 재벌이 우리 사회의 모든 부를 독식해 들어가고, 물질적 부를 넘어 우리의 정신세계마저 잠식해 윤리와 가치의 측도마저 그들의 손에 움켜지는 꼴을 보고도 강건너 불구경하듯하고, 법정의가 아니라 검찰마피아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중 삼중의 잣대로 조자룡이 헌칼쓰듯 국민을 향해 마음대로 사법권을 휘두르는 꼴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 

되돌아보면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초등학교시절부터 우리는 복종하는 법만 배웠고, '학교가서 선생님 말씀 잘들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세뇌되어 왔다. 숙제를 안해서, 청소를 못해서, 지각을 해서 그것도 아니면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손바닥을 맞고, 빰을 맞고, 간혹가다간 발길질에 차이면서까지 우리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군대라는 조직속에서 부정과 불의,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순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길러졌다.

그렇게 공적으로 분노할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는 분노를 오직 사적인 관계에 국한 해서 폭발시켜왔다.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정부를 향해서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동사무소 창구의 말단 직원을 향해 폭언을 하고,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속수무책 당하면서도 미어터지는 지하철 구내에서 가방을 치고 지나가는 어린학생에게 분개한다. 부조리한 세상의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짓눌려 살면서도 내면에 샇여가는 분노를 미쳐 스스로 확인하고 표출하지 못한채 엉뚱한 사적 공간에서 불현듯 터져나오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맨날 사고를 치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이자 정치가인 스테판 에셀은 세상을 향해 외친다. "분노하라!"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프랑스에도 분노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가보네?"라고 중얼거리며! 

필자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활동 과정에서 수립하고 국민적 동의를 획득한 프랑스사회가 추구해나갈 미래상과 가치가 금력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되어 왜곡되고, 국제 정치가 아직 정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진 않은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청년들에게 독려하고 비폭력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만 이 책이 200만부이상 팔렸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프랑스는 이 책이 불필요한 사회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분노하라]를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런 부정의에 대한 저항에 나설 것을 동의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랑스는 대독전쟁이 종결되자 바로 민족반역자를 단호히 처단하고, 레지스탕스활동 성과를 토대로 국가지표를 수립한 나라가 아닌가.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친일반역자에 의해 오히려 독립운동가가 처단되고 오직 그들의 영속적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수립되고 국가의 미래상이 논의되어 온 나라다.  그래서 이 책 [분노하라]는 바로 한국 사회를 위한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사회에 충만한 좌절과 고통, 분노의 진원을 되돌아보고 사적 분노를 넘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정의로운 봉기에 나설 수 있는 작은 계기를 마련하길 빈다.  

이 땅의 청년들은 취업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등록금 하나만은 '선진화'된 대한민국의 대학에 분노해야한다. 이 땅의 교육자는 사회적 낙오자를 양산하고, 인간성마저 파괴하면서도 오직 경쟁제일주의 성적 제일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해야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이땅엔 왜 그리 분노할 일이 많은지... 소수의 재벌 집안이 국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습하는 현실, 국민적 동의없이 국토를 도륙내는 사대강죽이기사업이 버젓이 진행되는 현실, 언론 지식인이 보편적 이익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언론마피아의 조직보호를 위해 부역하는 현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복지 정책 요구가 '거지건성'으로 비하되는 현실... 우리는 모든 부조리에 분노한다.

이 시간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은 전국에서 모인 희망버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희망버스는  정당한 분노를 통해 희망을 만든다. 버스가득 분노가 넘치지만 분노버스가 아니라 희망버스인 이유는 그 분노가 정당하고 정의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테판에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가 쓴 수십쪽에 불과한 이 글이 뭐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글은 그가 살아온 삶의 진실성에서 우러난  '진실'을 담고 있기때문에 감동을 준다. 이 땅의 대학생들의 손에 이 책 한권씩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을 꿈꿔본다.
 


[YES24] 기로에 선 대한민국을 위한 책,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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