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란 어떤 마을일까? 그보다 먼저 필자가 이해하는 ‘예술가’와 ‘마을’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필자는 어떤 '예술가'를 만나고 또 어떤 '마을'을 찾았을까?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를 읽었다.

 

이 책은 필자가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라는 직을 부당하게 잃고, '중앙권력'의 저열한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다스리고 그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찾아 전국을 주유한 흔적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돈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인연이 닿는 예술가들을 찾아, 그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섰고, 예술가가 없어도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활로를 찾고 활기를 일궈나가는 마을도 마다않고 방문했다.

 

그가 만난 예술가는 다양했다. 주민과 담을 쌓고 철저히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예술가도 있었고, 마을 주민과 더불어 마을의 잃어버린 생기를 예술을 통해 불어넣어보고자 시도하는 현장 활동가도 있었다. 그들 모두의 공통분모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그 모든 만남을 통해 얻은 결론도 쉬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 자신과 마을과의 관계, 마을살이 속에서 예술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의식이 있든 없든 예술가가 사는 마을은 조금은 특별했다. 독자인 나는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워 필자의 걸음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렸고, 이런 저런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곁눈질 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결국 '예술가'는 누구인가, 예술가와 민중은 어떤 관계여야 할까 혹은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같은 규범적 물음을 일단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또 이상적인 마을의 상, 예술을 매개로 한 공동체라는 이상향의 꿈을 접었다. 그것은 필자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가 견지해 온 사회 속에서 예술가가 가지는 역할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 예술이 공동체적 삶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를 잠시 밀쳐두기로 마음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며, 사회적 부정의를 고발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발언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조차 선전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적 향유가 근본이 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또한 예술가는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나 공동체의 주류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회에 변화의 염감을 불어넣는 불온한 아웃사이드이고, 아웃사이드이기를 포기했을 때라도 예술가는 가장 평범한 공동체의 일원이거나, 아니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예술가가 되는 지점이 바로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찾은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뭔가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현실의 예술 생태계나 예술가의 존재방식과는 조금씩 다른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술가들의 삶을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를 넘어 세계화의 파고에 휩쓸려 ‘마을’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가는 현실에서 ‘마을’을 새롭게 정립해서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일궈나가는데 있어서 예술이 마을 재건을 추동하는 영감을 촉발하는 그런 마을들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술가다. 그가 꿈꾸는 마을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농부이면서 시인이고, 동시에 예술가고 철학자인 세상일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을의 연대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오던 이상향이다. 이 책을 통해 마을공화국의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단초를 끝내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는 존경하는 필자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불어 많은 예술가를 만나그들의 마을살이가 어떻게 시도되고 있는지 그 궁극은 꿈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필자가 찾아 주었던  한 마을의 주민으로서 이 책을 읽고, 예술가와 농부의 구분이 사라진 세상,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넘는 어떤 곳에서 만들어질 마을공화국의 꿈을 가슴에 나누어 담는다.

반응형
반응형

 

김남희의 여행기는 긴 사랑의 이야기다.

못다한 청춘의 사랑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 그녀의 여행기는

애닲은 연가가 되어 나를 만났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여행기는  

한 여자의 지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의 흔적을  털고  더 깊어지고 넓어져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의 여행기는 여전히 연가다.

그녀의 사랑은 여행을 통해, 그 여정에서 만난 숯한 인연을 통해

여자의 남자에 대한 사랑,

남자의 여자에 대한 사랑을 넘어

성정체성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에 이르고

마침내 세상 사람 모두와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에 다다랐다.

 

처음 만난 김남희의 소녀적 감수성이

삶에 지친 나에게 잃어가는 삶의 신비와 꿈,

가벼워진 추억과 무뎌진 그리움을 되살리는 마법으로 다가왔다면

어느새 그녀의 소녀적 감수성은 진부함과 유치함으로  퇴락하며

나에게서 멀어져 갔었다.

 

다시 고마운 인연으로 김남희의 '[외로운이 외로움에게]를 만났다.

늘 길위에 살고싶지만 세상의 연에 발목잡힌 나약한 한 인간에게

다시 떠나는 자의, 길 떠날 수 있는 자의 용기와  꿈,

그리고 길떠난 자 만이 마주할 수 있는 내밀한 존재의 외로움고 그리움을 담고

이 책은 다가왔다.

 

여행이 '소비'인 시대에 여행이 사치가 아니라 숙명인 사람,

여행이 곧 삶이자 구도인 사람을 만나

여행의 설레임을 회복하는 일은 기분좋은 일이다.

"한때는  꽃을 사모하였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치는 

김남희의  여행에세이 [외로움이 외로움에게]가

바로 여행의 꿈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책이 아닐까싶다.

 

 

반응형
반응형

참으라고, 참으면 복이온다고, 그리고 너가 가진 분노의 거의 대부분은 너 자신이 못난까닭에 생겨난 극히 사적인 정서적 장애의 산물이라고 우리는 세뇌되어왔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삼성이라는 재벌이 우리 사회의 모든 부를 독식해 들어가고, 물질적 부를 넘어 우리의 정신세계마저 잠식해 윤리와 가치의 측도마저 그들의 손에 움켜지는 꼴을 보고도 강건너 불구경하듯하고, 법정의가 아니라 검찰마피아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중 삼중의 잣대로 조자룡이 헌칼쓰듯 국민을 향해 마음대로 사법권을 휘두르는 꼴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

되돌아보면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초등학교시절부터 우리는 복종하는 법만 배웠고, '학교가서 선생님 말씀 잘들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세뇌되어 왔다. 숙제를 안해서, 청소를 못해서, 지각을 해서 그것도 아니면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손바닥을 맞고, 빰을 맞고, 간혹가다간 발길질에 차이면서까지 우리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군대라는 조직속에서 부정과 불의,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순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길러졌다.

그렇게 공적으로 분노할줄 모르게 길들여진 우리는 분노를 오직 사적인 관계에 국한 해서 폭발시켜왔다.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정부를 향해서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동사무소 창구의 말단 직원을 향해 폭언을 하고,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속수무책 당하면서도 미어터지는 지하철 구내에서 가방을 치고 지나가는 어린학생에게 분개한다. 부조리한 세상의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짓눌려 살면서도 내면에 샇여가는 분노를 미쳐 스스로 확인하고 표출하지 못한채 엉뚱한 사적 공간에서 불현듯 터져나오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맨날 사고를 치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이자 정치가인 스테판 에셀은 세상을 향해 외친다. "분노하라!"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프랑스에도 분노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가보네?"라고 중얼거리며!

필자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활동 과정에서 수립하고 국민적 동의를 획득한 프랑스사회가 추구해나갈 미래상과 가치가 금력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되어 왜곡되고, 국제 정치가 아직 정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진 않은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청년들에게 독려하고 비폭력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만 이 책이 200만부이상 팔렸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프랑스는 이 책이 불필요한 사회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분노하라]를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런 부정의에 대한 저항에 나설 것을 동의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랑스는 대독전쟁이 종결되자 바로 민족반역자를 단호히 처단하고, 레지스탕스활동 성과를 토대로 국가지표를 수립한 나라가 아닌가.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친일반역자에 의해 오히려 독립운동가가 처단되고 오직 그들의 영속적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수립되고 국가의 미래상이 논의되어 온 나라다. 그래서 이 책 [분노하라]는 바로 한국 사회를 위한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사회에 충만한 좌절과 고통, 분노의 진원을 되돌아보고 사적 분노를 넘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정의로운 봉기에 나설 수 있는 작은 계기를 마련하길 빈다.

이 땅의 청년들은 취업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등록금 하나만은 '선진화'된 대한민국의 대학에 분노해야한다. 이 땅의 교육자는 사회적 낙오자를 양산하고, 인간성마저 파괴하면서도 오직 경쟁제일주의 성적 제일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해야한다. 어디 그 뿐인가. 이땅엔 왜 그리 분노할 일이 많은지... 소수의 재벌 집안이 국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습하는 현실, 국민적 동의없이 국토를 도륙내는 사대강죽이기사업이 버젓이 진행되는 현실, 언론 지식인이 보편적 이익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언론마피아의 조직보호를 위해 부역하는 현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복지 정책 요구가 '거지건성'으로 비하되는 현실... 우리는 모든 부조리에 분노한다.

이 시간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은 전국에서 모인 희망버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희망버스는 정당한 분노를 통해 희망을 만든다. 버스가득 분노가 넘치지만 분노버스가 아니라 희망버스인 이유는 그 분노가 정당하고 정의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테판에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가 쓴 수십쪽에 불과한 이 글이 뭐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글은 그가 살아온 삶의 진실성에서 우러난 '진실'을 담고 있기때문에 감동을 준다. 이 땅의 대학생들의 손에 이 책 한권씩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을 꿈꿔본다.

반응형
반응형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얻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어렵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절실해 지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세상을 참 아름답게 살았던 한사람과 그 사람의 죽음으로 혼자 남은 또 한 사람의 우정이 있다.  관포지교가 친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이야기 한다면, 이 두사람의 우정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고 함께 그길을 걸은 동지적 신뢰에 바탕한 지고지순한 우정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뒤  '관포지교'를 대신해  이 두사람의 우정을 나타내는 새로운 고사성어로 '노문지교'가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우리시대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의 지표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데에는 친구 문재인이 있다. 이 책 '운명'은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길 원했던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사람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길위에서 같이한 도반 노무현과 맺었던 30년 우정의 기록이다. 필자는 반역의 무리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친구 노무현을 회상하며, 자신의 인생역정이 어떻게 노무현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친구 노무현과 어떻게 꿈을 나누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0년 우정을 나누던 친구를 먼저 보내고, 같이 가고자한 길을 다시 혼자서 떠나야하는 사람의 깊은 고뇌를 담고 있다.

문재인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고, 학창시절을 회상하지만 그것 모두는 결국 노무현과의 만남으로 수렴되는 개인사 저변에 흐르는 한 시대의 도저한 정신사를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는 '운명'을 이야기하고 이 책의 제목을 삼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대통령 노무현'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고, 친구 문재인과 함께한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다하지 못한 시대적 책무에 짓눌려 한으로 남은 먼저간 친구와 살아남아 그 책무를 다해야할 또 다른 친구의 남은 삶의 무게 때문이다.

이 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난 참여정부 5년을 규정하는 주요 이슈들에 대한 입장을 표출하며, 우리시대가 극복해 나가야될 다양한 과제와 그 과제를 현실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현실인식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정치적 논쟁의 여지를 열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입장에 대해 동의하지만 나는 오직 이책 '운명'을 한 시대를 살아간 멋진 두 인간의 지고지순한 우정의 기록물로만 보고싶다.
반응형
반응형

분석철학의 발흥, 프레게와 러셀 - 언어와 논리, 의미

- 이지훈

 

분석철학은 독일의 관념론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었다. 프레게는 [산수의 기초]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공격하고 수가 자립적인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론을 옹호한다. 러셀은 절대적 관념론의 일원론에 대항하여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다원론을 제기하고, 무어는 관념론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론을 분석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데, 분석철학은 언어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 혹은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가진 방법론적 입장을 지칭한다.

 

분석철학의 방법론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로 이해했다. 이점 이성의 한계를 긋고자 한 칸트의 철학적 기획과 일맥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 오성, 감성의 능력과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이 기획을 실현코자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매개로 세계에 접근해 나갈 수 있으며, 의미와 논리의 문제를 천착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한 명제의 뜻은 그 명제의 검증방법이라는 검증원리를 통해 형이상학 등의 교설이 무의미한 헛소리임을 천명한다.

 

의미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탐구하여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는 방법과 원리를 탐구하는 이론으로 존재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말해 특정한 의미이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나름의 존재론을 상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의미이론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플라톤의 지시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2. 관념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다.

3. 사용 의미이론 : 한 언어적 표현은 그것의 사용에 있다.

 

지시의미이론은 고유명사에만 설득력이 있으나 마이농의 황금산 같은 가능한 존재자의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지시의미이론을 거부하면 유명론에 빠진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관념의미이론이다. 한 언어적 표현의 지시대상인 존재자가 없어도 그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의 주관성은 관념의미이론의 치명적 약점이다.

 

프레게는 지시의미이론의 약점을 언어분석을 통해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관념론이 수학적 진리마저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바탕으로 수학의 진리와 개념을 논리학의 진리와 개념으로 환원가능 하다는 논리주의입장을 제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어-술어 논리학을 거부하고 대신 논항-함수의 논리학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레게는 1) 수학의 함수개념을 일상언어와 논리학에 도입하고, 양화사를 발명했으며, 2) 수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고, ‘논리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입장을 수립하고, 3) 의미를 뜻과 지시체로 구분하여 수학철학에서 심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했다.

 

러셀은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은 여전히 심리주의의 잔재라고 보고 지시체만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시의미이론과 실재론을 고수하면서 마이농의 과도한 존재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문장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확정기술구를 축출해 내어 무의미함을 밝히는, 비존재자 지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기술이론은 고유명사와는 다른 확정기술이 지시체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명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산같은 것이 꼭 존재한다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보편자의 존재를 수용하는 실재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셀은 비트겐 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철학적 사고의 준칙이었던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원리와 기술이론은 논리적 원자론으로 한단계 진전을 이룬다. 

오캄의 면도날이란 존재론에서 최소의 존재자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어떤 추정된 실재가 있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더 근원적인 실재로 대체하라는 원리로 러셀에 의해 논리적 원자론으로 구체화된다.

 

논리적 원자론에 따르면 임의의 명제는 기술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해 들어가면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최후의 잔여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자사실(atomic facts)이라고 한다. 이들 원자사실을 위장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논리적 고유명사로 이들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논리적 원자론은 절대적 관념론에 대항해 다원론과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철학적 입장이지만 문제제기 후 엄밀하고 통일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있어 언어, 논리, 의미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그와 같은 입장의 분석철학의 조류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세우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이나 프레게에 대한 비판은 주로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기획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이후 분석철학은 콰인 등에 의해 의미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문제의식>

1. 철학적 작업이 문명비판적 측면을 가진다고 볼 때, 프레게와 러셀의 문제의식은 관념론의 어떤 측면에 대한 공격이었을까?

 

2. 프레게의 실재론이나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도 그 자체 하나의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 문제를 푸는 해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될 것 같다. 인간이 가진 사고 체계 중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 역시도 의문이다.

 

3. 분석철학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남은 잔여는 몇 개의 언어학적 지식들 뿐인 거시 아닌가? 분석적 방법이 언어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인식적 오류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존재론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것일까?

----------------------------

 

반응형
반응형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

-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적용될 철학의 가능성

- 지훈


어렵게 바슐라르를 읽었다. 사실 길지 않은 글에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것을 다시 축약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노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는 바슐라르를 철학자라기 보다는 예술철학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 불 등 상상력의 4대근원에 대한 글을 오래전에 읽었던 것으로도 기억된다. 하지만 알고보니 바슐라르는 콩트의 문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당대 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한 실증정신을 확립하여 새로운 과학정신을 수립코자 시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그의 인식론은 과학을 넘어 예술의 영역에까지 적용코자 시도했고, 그 시도의 결과가 바로 저가 이전에 읽었던 바슐라르의 저작들이었나 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지훈은 이 글에서 바슐라르의 과학인식론만을 살피고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너무 내용적으로 많고, 논변은 복잡하다 .

 

먼저 바슐라르는 새로운 과학정신에 입각한 인식론을 수립하기 위해 과학의 불연속적 발전에 주목하고 이를 지속적 단절로 개념화한다. 그는 상식과 감각, 또는 기존 이론의 전제 등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인식의 걸림돌을 문제를 발생시킨 인식의 틀을 대체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을 인식적 단절이라고 보고, 이런 단절은 과학의 거시적 역사는 미시적 차원에서 상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바로  지속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이 현상영역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현상을 산출하는 근원인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비실증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성이 현상을 만들어내는 만치 그 현상의 배후가 되는 본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방법론이 바로 현상-기술개념이다. 이 개념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현상과 본체의 괴리를 극복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 인간존재론 차원의 단절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열린 정신의 합리적 유물론에 도달 할 수 있고, ‘폐쇄적 코기토에서 실천적 코기토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렇게 주어진 인식의 걸림돌과 맞서는 능동성을 욕망과 욕구의 구분에서 찾고 꿈을 향한 욕망의 무한 긍정을 통해 주관적 심리적 오류를 극복하고 단절과 상승의 원동력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바슐라르는 현실적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욕구와 상상력의 원천인 욕망을 구분한다. 그는 욕구가 만들어내 주관적 오류는 사이비과학을 낳는데 반해 욕망에 원천한 꿈의 역동성은 진정한 과학의 역사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사의 불연속과 귀납적 종합을 규명하며, 신생이론과 선행이론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귀납’ ‘포섭을 제시하기도 한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오류에 대한 개방성새로운특성으로 하며 기존의 합리성에서 벗어난 꿈, 상상력, 욕망, 의지 같은 개념을 원동력으로 포함시켰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푸코에 와서 무한 긍정되는 비합리적 요소가 여전히 긍정적 억압의 통제 대상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지훈의 글을 읽고 여전히 남는 의문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현대 과학의 성과를 과연 과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학 속에 있는 비과학적 요소의 개입양상을 해명하여 새로운 과학철학의 장을 개척한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의 인식론은 문학적요소가 너무나 깊이 개입한 것 같은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수립과정에서 스스로 긍정적 억압을 어는 정도 성공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론이 합리성을 잃으면 주의주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철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바슐라르는 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상상력에 그의 지적 궤적이 가 닿아 있고 그곳에 인식의 닻을 내린 지도 모르겠다.


반응형
반응형

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 지훈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그의 제자이자 나중에 푸코의 스승이 되는 캉길렘을 통해 계승된다. 캉길렘은 바슈라르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과학사연구의 인식론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그는 콩트의 세포이론 해석에서 바슐라르의 욕구/욕망범주를 보다 객관적인 사회정치적 범주로 전환했고, 이는 한 시대의 지식 형성에 개입하는 사회적 힘과 규율의 문제를 다루는 푸코 사상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셸 세르는 콩트의 연속성’, 바슐라르의 단절과 다른 입장으로 과학의 진보는 인정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수의 용어로 묶을 만한 단일한 진리의 연대기적 축적은 없다고 보는 특이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이성의 역할을 신뢰하고,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세르는 바슐라르를 비판하는데, 바슐라르가 이성을 과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예술, 인문학 등을 몽상의 영역으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의 입장은 이성의 폐쇄적 절대주의로 나가지 않고, 개방적 합리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한 체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이 아니라 다른 체계들과 서로 작용하고 보충하는 이성으로서의 개방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체계의 개방성은 자기체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바로 그로부터 합리성이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르의 인식론은 전체로서의 체계라는 근대적 이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의 입장에서 한 체계의 절대적 완결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르는 철학이 바다를 떠돌다 잠시 만나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영원히 정착할 안정된 대륙, 세계를 한 번에 구성해줄 철학은 없다고 본다. 바로 이점에서 세르는 맥루한과 비교되기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보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또 다른 미디어의 형식이 되는 내용/형식의 상호 순환적 영향관계를 제기하며 궁극적인 기원, 최종적인 원형을 거부한다. 화자와 청자,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순화하며 상호 반전되는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맥루한의 입장은 기원의 신화를 해체하고, 기원을 통해 성립하는 닫힌 체계를 논박하는 세르의 입장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중심은 끝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한 체계 내부의 교환을 모두 매개하고 제어하는 초월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체계 외부의 끊임없는 유입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열린 구조는 소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르와 맥루한은 이질적인 매체, 이질적인 지식의 공존에 대한 입장에서 갈라진다. 세르는 맥루한과는 달리 공존의 관점에서 소통의 숨은 요소인 소음에 주목한다. 세르는 이 소음의 개입과 간섭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사유 발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에 대한 입장에서도 세르와 맥류한은 갈라선다. 맥루한은 in-formation에서 ‘in’의 의미를 중립적인 질료를 형상 속에 집어넣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세르는 ‘in’을 고정된 형상이 없는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맥루한에게 개별 매체는 자기완결적이지만, 세르에게 매체들은 이질동상적이다. 세르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보를 천사에 비유하며 소통하고 이동하는 정보자체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런데 소통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며, 나름의 주고받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은 위반되고, 규칙을 위반한 요소는 배제되는데 여기에는 초월축출이 일어난다. 이상적인 교환체계는 이들 기식자를 효과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안전하게 닫힌 체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한 축출은 불가능하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기식자는 늘 상존한다. 이들 기식자는 체계의 안밖에 걸쳐 있으면서 한 체계의 외부를 지속적으로 체계의 내부와 공존토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 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체계의 생성을 낳기도 한다.

 

세르는 이와 같은 소음, 기식자, 제외된 제3자 같은 것들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담론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창조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세르는 진정한 소통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닌 것과 과학의 관계에서 바슐라르는 비대칭적 시각인 바면 세르는 과학 아닌 것에서 과학성을 읽고, 과학 속에서 비과학성을 있는 대칭적 시각을 보인다. 그렇다고 세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지적 무정부상태에 빠지진 않는다. 그에게는 과학과 예술을 통일하는 근본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사가 참의 역사만은 아니지만  참된 개념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들, 개념화 형식의 집합이다. 따라서 세르는 연대기적 순서의 과학적 진보, 사회적 진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를 보다 포괄해서 보여주는 관점의 존재가능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진보를 인정한다. 세르에게 시간개념은 비일적선적 개념으로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다발을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오늘날의 복잡성의 과학에 걸맛는 인식론이다.    

 

세르의 인식론은 정보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르의 인식론을 바로 인터넷 소통, 정보사회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보인다. 이지훈의 이 글만을 통해 이해한 세르는 소음의 배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한 체제의 외부와 내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폭력성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중심의 이동과 다극화에 대한 담론은 현실 이해와 일정 정도 괴리되는 측면을 가지기도 한다. 세상은 권력의 속성, 자본의 지배라는 틀이 여전히 온존하며 오히려 더 강화되는 면을 보인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민주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더 교묘하게 정보는 관리 통제되고 집중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정보의 유통구조가 복잡화 되고 점점 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전화하면서 정보의 통제자는 빅브라더가 되고 보이지 않는 신이 되어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르는 세계의 열린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세계지배질서는 여전히 닫힌 구조로 강건하게 유지 존속되고 있고, 닫힌 구조의 근원이 되는 계급구조는 고착화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르의 지식의 세계-대수학에 바탕을 둔 열린 구조는 현실의 세계-자본에 바탕을 둔 닫힌 구조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과학과 철학의 행복한 맛남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해석은 종종 이론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가지는 심리적 반응, 정서적 반응일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반응형
반응형

2011 5 10일 화요일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참고문헌>

이지훈, “콩트와 실증주의 인식론의 기초, [현대철학의 모험]

[서양철학사] 램프레이트, 을유문화사

 

콩트는 19세기의 과학적 성과를 철학적 사고의 토대로 끌어들였다. 그는 생시몽으로부터 인류 문명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스스로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엄밀성과 확실성에 대한 확신에 이르렀다. 콩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에서 기반해 실증 가능한 것만을 철학의 영역, 학문의 영역에 남기고 실증 불가능한 지식들, 비과학적 인식론을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로 팽개쳐 버렸다.

그는 인류의 사고 단계를 3단계로 나누고,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이어 과학적 단계로 불렀다. 신학적 단계는 미지의 세계를 인격적 정서에 의해 설명하고, 가상적 공상적으로 이해한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인격적 힘을 이용한 세계 이해에서 벗어나 경험적 현상을 넘어 선본질이나실체등과 같은 추상적인 술어로 세계를 설명한다. 과학적 인식의 단계에 접어들면 현상을 실증적인 소여로 받아들이고 이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탐구하여 일반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와 같이 분류한 인류의 사고 단계를 바로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로 등치 시키면서, 콩트는 자신이 살아가던 당대를 <과학적-실증적 단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가장 뒤떨어진 영역인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방면에까지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을 사회학의 영역까지 확장하여사회물리학즉 사회과학을 정립하는 사상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던보오부인과의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개인의 정감활동이 이성의 힘의 지배를 벗어남을 깨닫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교육, 종교적 훈육에 골몰하게 되고 급기야는 <인류교>라는 종교의 창시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요한 철학적 성과는 지훈의 글에서 다루고 있듯 <실증주의 인식론>에 있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실학으로 볼 수 있으며, 상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실증주의의 상대성은 세계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는 통일과학의 이념을 부정하고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실증주의는 과학주의와 차이가 있는데 과학주의가 과학이론은 모두 경험적 명제로 구성된다는 입장과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진 반면 실증주의는 현실성, 유용성, 확실성, 정확성, 유기적 상대성 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또한 콩트는 과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높이사지만 모든 과학지식의 수학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는 수학적 형식화를 과학의 보편토대로 보지 않고 개별과학의 고유성, 상대성을 인정한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과학을 합리적 허구로 본다. 과학은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그 연구 과정에서 가설을 도입하나 가설은 수학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수학은 추상적 허구적 성격을 가지며, 실험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허구지만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주의가 과학지식은 역사적, 상호주관적, 집체적 동의를 통해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에 대한 상대주의와 역사성의 인정은 지식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부여한다.

콩트는 인식의 추상적인 발생근거 자체보다는 인간의 앎, 지식의 성립 근거를 있는 그대로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콩트는 철학의 토대는 인식론이라고 보고  인식론은 과학의 성찰을 통해 구성하고, 과학의 성찰은 과학의 역사에 관한 성찰이라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상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철학체계를 거부하고, 철학적 주장이 과학의 성과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핵심 개념>

실증

연역과 종합의 통일

경험과 법칙의 대등화

과학의 상대성

수학의 허구성

 

<문제제기>

1. 실증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의 차이는 무엇일까?

콩트는 과학적 방법을 절대화하는 과학주의를 배격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의 실증주의를 피력한다. 실증주의가 학문 영역간 방법론의 상대주의를 인정하지만 과학주의를 배격한다고해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만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하며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배격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적 방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낸다. 나는 어디까지가 형이상학적 방법이고 어디부터 과학적 방법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겠다.

 

2. 실증가능한 것의 범주는 어디까지 일까?

콩트는 물리적 세계를 포함해, 사회적, 정신적 현상까지 실증 가능한 영역으로 보았다. 그가 시큐러리스트(비종교적 도덕주이자)인 점을 보면 신학을 거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술영역까지도 실증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검증(실증) 가능한 것의 영역을 그렇게 넓게 잡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3. ‘경험의 모호성, 주어진 소여의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다양한 논지에 대해 실증주의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철학은 주어진 경험의 주관적 성격과 모호성, 나의 감성적 인식의 불활실성, 일반화된 지식의 오류가능성 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인간 사고의 흔적이다. 그와 같은 인식비판의 기초를 외면하고 곧바로 주어진 소여, 경험, 과학적 검증 가능성이라는 지평으로 철학적 인식론을 한정하는 것은 실용적태도인지 몰라도 인간의 궁극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실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 생명의 신비와 죽음, 영적 경험과 예술적 환타지, 그리고 당장 이렇게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나의 우울…-  바로 이것들이야 말로 인간이 철학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학조차 끝내 건드리지 못한 미지의 영역와 끊임없이 생성되는 신비가 넘쳐나는 세계내 존재인 인간은 항상 주어진 경험 그 이상의 것을 탐구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그와 같은 이유로 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는 칸트의 인식비판으로부터 후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앞으로 더 공부가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반응형
반응형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제대로 철학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또 늘 마음 한구석엔  인식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있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쫒기고 게으름에 밀려 공부는 늘 뒷전이었고 이렇게 그냥 나이만 먹었다. 그렇게 먹은 나이 마흔 후반에서 쉰언저리를 맴도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 지인 두어분이 '철학'공부를 같이 하자고 찾아왔다. 사실 농사로 밥벌어 먹고 아이 대학보내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고, 또 겁없이 벌여놓은 마을 사업이 갈수록 태산이다보니, 마음을 끌렸지만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오신 두분의 절실함이 끝내 나로 하여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들었다. 

공부에 대한 절박함없이, 공부를 할 만한 삶의 여건도 되지 못하는 형편에서 허욕으로 시작한 철학공부지만 철학적 사유 이전에 철학서적에 대한 독서의 편린이나마 편지 글로 정리하여 블로그에 정리해 보고 싶었다. 외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냥 그렇게 늘 더불어 공부하는 삶이 진정 아름답고 알찬 삶이 아니겠는가는 믿음 하나로 나는 편지를 썼다.
 



벌써 달이 바뀌었습니다. 비나리 천지는 소생하는 생명들이 내뿜는 연두빛으로 가득합니다. 언제부턴가 새 봄을 맞으면 이 봄을 보지 못하고 지난 겨울 세상을 버린 뭍 생명을 애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고, ‘나’라는 한 생명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봄을 맞는 환희는 의미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인가 봅니다.

철학’을 같이 공부하겠다고 말씀을 드린뒤 [현대철학의 모험]을 구입하고, 지금은 잊혀진 어린시절의 친구 얼굴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애쓰듯 이미 생소해진 개념들을 뒤적거리며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저의 손에는 지푸라기 하나 조차 잡히는 게 없습니다.

난해한 - 저한테만 그런지 모르지만 – 책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또 생각은 옆길로 빠져듭니다. 이걸 읽으면, 이걸 이해하면 나는 지혜로와지나? 아니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까?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찾는 나태한 의식을 깨워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러한 물음은 앞으로도 책을 읽는 도정 내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계속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더 혼돈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학교를 다닐 때 잠시잠깐식이라도 맛을 보았던 것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철학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도 훨씬 넓고 심원합니다. 인디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나름의 철학이 있을을 터이고 그것은 아프리카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다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한국만 해도 책으로 묶어 질 수 없는 제도권밖의 무속신앙과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하여 이룩한 다양한 세계관이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은 인식의 성실성을 촉발하기는 커녕, 그냥 인식의 끈을 놓아버리는 의식유기의 상태로 저를 몰았습니다. 치밀하고 집요한 인식의 추적을 포기하고 그냥 그대로 대충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연에 힘입어 다시금 철학책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지평이기에 미리 포기하는 삶대신, 좋은 분들 만나 마음 편하게 인류의 철학적 사유의 자취를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읽기 시작한 책이 이제사 제2부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제까지 통독한 생성존재론과 해석학, 현상학에 대한 정리는 불행히도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일단 엘레야학파, 플라톤의 사고가 어떻게 서양의 철학적 사고를 지배해 왔고 그것이 이떻게 서양 근세 철학까지 이어져 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이정우가 현대 철학의 분기점을 ‘시간’의 복권에서 찾고, 생성과 시간을 일차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사고를 “생성 존재론”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해석학과 현상학은 이전에 공부할 때도 그렇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가볍게 통독한 수준에서 그 많은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기가 벅차기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그렇게 분류되는 철학자 한명한명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적인 학자가 하는 철학공부와 먹고사는 일에 거의 대부분의 생을 받쳐야만하는 생활인이 할 수 있는 철학공부는 애초에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학자들이 내린 최종적 성과를 나의 삶의, 인식의 지표로 받아들여도 좋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 보면 쉬 납득할수도 없습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면서 동시에 시인이고 철학자인 삶이 가능한 세상의 꿈은 아직 구현되지 못했고 저 개인의 삶조차 그와같은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하는 삶의 고통, 혹은 부담을 차라리 종교에 귀의 함으로써 들어버리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중들의 안일함이 한국 종교산업의 번영을 초래했겠지요.

그런 나태한 의식에 빠지지 않기위해 이번주부터 콩트에서 시작해 매주 한 꼭지씩 읽고 정리한 생각을 메일로 나누겠습니다. 우선 보내주신 두 꼭지의 글-사르트르와 콩트-은 잘 읽었습니다. 지적, 인식적 성실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 저가 토를 달 수 있는 글이 아닌것 같습니다. 사실 토론이 되면 좋겠지만 토론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감상 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을 나누다가 기회가 되면 차라도 나누면서 자리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올해 주 1회 봉화문화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기타강좌는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주 6일을 마을사업관련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고 또 하루 시간 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다 겨울에 집중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리지 못하고 한달은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마음을 정하고 그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자리로 기어듭니다.

2011.5.3



반응형
반응형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 2011년 발행, 21세기북스)를 읽고

요즘 조국 교수가 인기가 많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으면서 거기다가 '개념'까지 있는 인물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하여튼 섹시한 진보 인사의 한명인 조국은 그 뛰어난 상품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한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한마디 한 동작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번 붐은 조국이 낸 [진보집권플랜]과 바로 이 책 [조국,대한민국에 고한다]가 촉발한 듯하지만 그보다는 이명박의 폭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세력화 되고 있지 못한 무능한 진보세력의 현 정치구도에서 대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측면이 많아보인다. 다시 말해 조국에 대한 인기는 일정정도 대중들이 선호하는 인물, 학벌, 개인적 자질 등등에 기반하고 있는게 사실 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현 정치적 지형이 대안적 진보, 다시말해 '성찰하는 진보' 인사를 요청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해 혹은 오해를 가지고 [조국, 대한민국에 고한다]를 읽고나서 솔직히 조금은 아쉬움을 느꼈다. 은연중에 나는 그의 책을 통해 무슨 대단한 신체제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미래상을 제시하고 그를 구현하기위한 정교한 로드맵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25년은 된 것 같은데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사회구성체 논쟁'류의 책이나 당시의 이런저런 정치서적을 통해 늘 단언적이고 명료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시'를 제공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은 분명하고 적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될 사회상은 명료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는 모든 정치 서적이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을 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그와같은 실천이론의 한계가 진보세력의 답보상태를 지속시키는데 일정정도 기여한 측면이 있고, 여하한 이유에서건 정체된 진보의 이론, 조직, 실천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조국이 말하는 성찰하는 진보의 요구로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때 그 청년들은 세월을 겪고 현실은 훨씬 더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입장에서 조국은 명료한 시대규정과 체제분석, 그리고 전략 전술을 내어놓지 않고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사회의 진보, 우리사회의 진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 진보적 상식 혹은 합리적 상식을 각각의 세력 혹은 분야를 향해 직언한다.

먼저 조국은 MB가 이상사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두바이와 싱가포르의 허상을 지적함으로써 현정부의 국정철학의 부재 혹은 그 시대적 낙후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을 향해 쓴소리를 내어 놓는다. 그의 발언은 시민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기도하고 법률가의 눈에 비친 부정의한 법현실을 질타하고 올바른 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의 자본에 대한 고언에 이 책의 핵심이 놓여있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대한 규정, 체제모색적 이해없이 현 시대는 극복될 수 없음을 필자 역시 인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 역시 충분하지 않은 내용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다.

사실 이책은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해 놓은 글이 아니다. 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단속적으로 언론에 게제한 것을 모아놓은 이 책은 참 쉽게 읽힌다. 하지만 책을 덮고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를 도모하기엔 좀 어려움이 따른다. 부분은 다 공감하고 수용하면서도 책을 덮고 그려보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세상의 상은 그렇게 투명하게 다가오질 않기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필자 조국의 다음 저술은, 물론 극단적인 나 개인적 기대에 불과하지만. 좀더 확실한 우리사회의 비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글로 채워졌으면 한다.

물론 독자의 한사람이 갖는 주제넘는 기대와는 별도로 이책은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공이 인정하는 가치 기반을 높이는 작업에 일정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훨씬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하며, 정정당당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정한 룰의 만들고 그 수준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세력은 합리적 보수세력에 기생하는 극우 파시스트세력을 스스로 떨쳐내가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진보 개혁은 시대정신을 읽고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진보적 정책, 대안 체제의 발굴에 보다 유능해져야할 것이다.

조국같은 분이 그와같은 상식의 전도사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매개하고, 진보적 가치에 대한 합당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공정한 경쟁을 도모하는 거간꾼으로 나선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 한권이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는데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런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사회의 정치적 상식의 격을 높이는데에 일정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뭏튼 필자 조국이 건강한 좌파지식인, 한국의 노옴 촘스키로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기를 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