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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농촌공동체 문화’란 무엇인가
- 비나리마을에서 희망 만들기 -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고들 난리다. 실제로 세계 많은 나라 중 한국의 자살률이 수위에 이르고 더 심각하게는 그 상승세가 가장 가파르기까지 하다. 잘사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고,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 믿었지만. 뒤집어보면 경제가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심이 되고, 시장이 유일한 공정률로 여겨지고, 시장에서의 승패가 개개인의 삶을 절대적으로 좌우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어떻게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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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2009.03.06 영화"워낭소리" 촬영지 //경북봉화=최문영 기자 deer@
   세상살이를 가장 가까이서 규정하는 것은 정치나 경제제도겠지만, 그 근원에는 결국 '가치'가 있을 것이고, 기본적으로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일 것이다. 정치나 경제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지배적 문화나 가치가 먼저 바뀌어야 된다는 문제의식은 그와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전 산업화 시대부터 농촌공동체 문화는 제국주의 문화의 침탈과 자본지배, 그리고 그에  따른  물질만능주의 문화에 대한 대항문화, 나아가 대안문화로 제출되었고, 문화운동이 민중문화, 민족문화를 실천적 내용으로 하는 문화 예술인의 당위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과 외형적 경제 성장이 우리 사회의 식민적인 성격을 희석시키고, 서구화된 생활양식과 의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지역문화 담론에서 지역문화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지던 민중문화 더 나아가 농촌공동체 문화 담론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지역공동체 담론이 사라진 자리는 문화 상품의 논리와 탈현대적 개인주체 담론이 대신하고 어느덧 민중 문화는 낡고 초라한 구시대의 유물로 내팽겨 졌다. '지역문화'는 '지역축제' 혹은 '지역관광자원"의 종속개념으로 격하되었고 특히 농촌공동체 문화는 현대화되고 합리화되는 세계적 변화를 역행하는 반경제적 반시대적 잔존문화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다시금 시장 지상주의가 시대적 조류가 되고, 오직 무제한적인 시장 경쟁이 인간 개개인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살벌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문화가 인간적 삶을 지키고 공동체를 보전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농촌공동체문화'의 현재적 의미를 되묻게 한다.

사실 농촌공동체는 정체와 심각한 훼손을 넘어 소멸의 과정에 들어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적 삶을 치유하고, 인간의 본원적 가치를  회복하는데 농촌공동체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 의미 있는 작업인지 판단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우선은 마을의 현재적 삶에 대한 진단과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대항문화로서의 실효성, 대안문화로서의 성립가능성이 검토 될 수 있고, 그 한계를 짚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업인구가 전체국민의 70여%에 육박했지만 산업화 과정을 거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든 2007년 6.8%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나마 향후 10년 간 년 평균 2.7%의 농가인구 감소가 예상된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09년) 농촌인구 감소와 더불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농촌이 극단적인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듦으로써 마을 공동체의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마을 공동체의 재생산이 불가능한 마을에서 '농촌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은 피할 수 없는 소멸과정에 접어들었다. 미래가 없는 마을은 공동체 문화는 고사하고 풋풋한 인심마저 지켜질 수 없다.

   필자가 살고 있는 비나리마을 역시 이와 같은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1,000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던 마을이 현재 50여 호에 약 100여명의 인구로 줄 들었다. 이미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후대에 남길 수 있는 노령 세대들마저 한분 두 분 돌아가시고, 마을의 역사가 단절되는 만치 마을의 고유한 문화 역시도 사라져 가고 있다.
공동체 문화로 제도화된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마을동제'와 '풋거 먹는 날', 그리고 '상여계'가 전부이다. 그나마 '마을동제'는 진행할 인력의 부족과 기독교 문화에 의해 존폐의 논란에 접어든지 오래고, '상여계' 역시도 상여를 맬 인력이 줄어드는 만치 외부 상조회사의 영업에 밀려 언제 까지 존속이 가능할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풋거 먹는 날'만이 그래도 이런저런 논란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존속되어 오고는 있지만 이 역시 해가 거듭될수록 빈약해져오고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 이웃의 대소사에 주민들이 초롱불로 부조하던 초롱계의 전통은 70년대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주민의 삶 속에 녹아있는 '농촌공동체 문화'의 핵심이 그대로 온존되고 있는지는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외형화된 제도로서의 문화는 소멸과정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비나리마을 농민들은 먼저 자신의 삶을 보듬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농촌공동체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이어지고 있다. 공동육아에서 마을 공부방, 문화 예술적으로 풍부한 공간으로 농촌마을을 변화시키기 위한 비나리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 활동들, 더 나아가 도시의 생활협동조합 등 사회단체와의 외부적 연대와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 한 인근 7개리 800여 주민간의 공동사업 모색까지, 그냥 소멸해가던 농촌마을 비나리는 지역사회의 새로운 활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추동력은 외부에서 끌어오거나,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고유한 자연과 농부의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에 담긴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 가치가 지배하는 문화에 새로운 가치매김을 하는 것에서 마을은 변화를 시작했다. 농민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재인식하고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순간이 바로 그와 같은 변화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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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김천옛날솜씨마을 주민들이 지난 1일 짚으로 계란꾸러미를 만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김천=김연수기자nyskim@

   사라져버린 비나리마을의 ‘초롱계’가 초롱축제로 부활한다. 단일 마을의 부조문화를 7개 리의 마을간 부조문화로 승화시킨 새로운 축제의 형태로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초롱축제는 다양한 사회적 장치를 통해 개인과 마을 간의 일체성을 확립하고, 상호부조의 그물망 속에서 개인적 삶의 안정성을 담보하던 전통적 농촌공동체 문화를 현대화된 모습으로 재현한다. 초롱축제는 전통 농촌사회의 건강한 원시성을 재현함으로써 상처입고 고립된 주민의 삶을 치유하는 굿판이 될 것이다. 

   비나리마을은 새 꿈을 꾸고 있다. 내년에 마을 중심에 ‘학교’가 들어선다. 하지만 이 학교는 그냥 단순한 시골 학교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매개하고, 우리 사회가 추구해 나가야할 미래적 가치를 생산하고 상호 교류하는 농민학교이자 시민학교이다. ‘비나리 시민학교’는 단순한 마을 소득사업의 수단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의 실험이자, 농촌공동체 문화의 생산과 확산의 전초기지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이제 막 시작한 걸음마에 불과하고, 언젠가 ‘성공사례’가 된다고 해도, 마을을 넘어 전체 농촌에, 나아가 농촌을 넘어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사례’의 산출이 아니라 ‘가치’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한 마을의 작은 시도들은 우리 사회에 희망을 퍼뜨리는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희망을 품고 아름다운 삶을 일구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마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벌써 의성의 교촌리, 홍성의 문당리, 단양의 한드미, 화천의 토고미, 이천 부래미 같은 마을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새로운 농촌공동체의 전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들이 가꾸어 나가는 마을이 세상을 향해 퍼뜨리는 향기는 언젠가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 틀림없다.
 
   배용준은 배우다. 그의 한 마디, 그의 동작 하나에 수천수만의 팬들이 울고 웃는다. 돈으로 환산된 상품 배용준은 거의 천문학적 금액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미래는 농부가 되고 싶단다. 마케팅전략에 따른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귀농'이 현대인의 로망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결국 경제가 모든 것을 짓누르고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 뒤, 개인의 삶은 그만치 더 처절해지고, 공허해진 탓 일거다.  '귀농'이 현대인의 로망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의 고유한 성격, 자연과 나의 삶이 노동으로 맞닿아 있고, 합리화된 사회적 관계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온전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세상, 제도화된 사회적 안전망이 미비한 우리 사회의 천박성이 끊임없이 개인의 삶을 벼랑으로 내 몲으로서 체제에 대한 복종과 순응을 강요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전통적 인간 관계망 속에서 개인의 안전한 삶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공동운명체인 농촌공동체, 그것이 바로 현대인에게 '농부'의 꿈을 꾸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라져가는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그 문화를 가꾸는 일은 복고적 취향이 아니라 인간적 삶을 지켜내기 위한 새로운 가치의 탐색 과정이다.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찾는데 ‘가치’의 방향타 없이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농촌은 ‘농산물 산지’이자 새로운 생태적 가치, 대안적 공동체, 그리고 미래적 가치의 생산 기지이다. 공동선의 극대화를 통한 개인적 삶의 안전성 확보와 개인 복지 수준의 향상을 기해왔던 상호부조와 두레의 전통에 기반한 농촌공동체 문화가 시장지상주의의 반공동체성을 치유하는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은 먼저 지역문화에서 ‘농촌공동체 문화’가 갖는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그 가치를 올곧게 세우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풍성한 농촌공동체 문화가 지역문화를 이끌고, 지역문화가 내재적 가치를 배제하고 경제적 가치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신자유주의가 황폐화시킨 세상을 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송성일 | 2009-10-01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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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운동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를 통해 문화와 예술은 경제발전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민주화를 추동함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문화사회’의 실현을 앞당기는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문화운동의 큰 줄기는 자연스레 문화자치와 문화 민주화로, 그리고 문화의 탈 경제화, 탈 물질화로 모아졌다.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진보적 문화담론이 공론의 장을 차지함은 물론, 문화운동세력이 ‘민주정권’의 일익을 담당하는 데에까지 이르러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과제가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으로 집약되듯, 문화운동의 중심과제 역시 ‘지역문화자치’로 ‘지역문화 분권’으로 압축되었다. 지역의 문화적 분권과 자치는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고양함으로써, 지방자치와 분권의 실현에 선순환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일정 정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도 했다. 정부가 2001년을 ‘지역문화의 해’로 정하고, “사람, 삶터,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 것이 그런 흐름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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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뉴시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아 관객상을 수상한 ‘워낭소리’가 오는 13일부터 22일까지 강릉시 포남동 자비복지원 소극장에서 앵콜 상영된다.(사잔=강릉씨네마떼끄 제공)/ 박진완기자 jwpark@newsis.com <관련기사 있음>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역문화’라는 말은 지역문화의 철저한 파괴를 통해 지금의 의미를 획득했다. ‘독립’의 의미가 주권을 잃고 나서 깨닫게 되었듯, 일제강점기를 통해 민속문화-전통문화로 이루어진 지역문화의 가치가 부정되고 상징이 파괴된 뒤, 그리고 일제의 지배 정신을 잇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지역문화-공동체문화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지역문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저히 파괴된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한 지역문화를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의 현대사는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민주적 가치의 보편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민중 문화와 교양 문화, 참여와 순수라는 두 줄기의 흐름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문화적 지평을 넓히고, 정신적 풍요를 축적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 모든 영역의 경제화를 지향한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합법적’으로 부정되는 신권위주의 시대에, 문화는 심각한 학습장애와 퇴행에 빠져들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한한 배려를 보편화했던 문화의 흐름이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문화가 문화산업과 등치되고, 문화정책이 경제정책에 부속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일궈온 우리의 문화적 토대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주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외면당하자 진보적 문화는 방향성을 잃고 공황상태에 빠져 스스로 진전시켜온 성과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는 반복하지만 진전되고, 퇴행하지만 더 큰 도약을 초래해왔듯이, 지금의 문화적 퇴행은 지역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모든 당위가 의문시되고 모든 가치가 부정되는 시점에서, 다시 그 당위성을 묻고, 가치의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문화의 ‘자율과 자치, 분권’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가, 그리고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긴 호흡, 먼 눈길로 낡은 과제와 마주해야한다. 인류의 역사가 쌓아온 보편적 가치를 가지며 그와 같은 낡은 과제를 새롭게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지역문화는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것이지, ‘지역 문화’의 구체적 내용을 예단함으로써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마주하게 된 낡은 과제는, 지역문화의 식민화와 정치적 간섭, 그리고 경제화로부터의 해방이다.

 

모든 가치가 하나의 시장, 단일한 화폐가치로 환원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지역문화는 존립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다. 서울의 문화가 문화적 가치판단의 준거가 되고, 지역문화가 그 하위문화로 평가 절하되는 시대에, 공상의 차원으로 추락한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동일한 시장 메커니즘과 가치체계를 수용하면서,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묻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망상이다. 지역문화의 가능성은 지배문화의 틀을 벗어던지고, 인류의 자산인 보편 가치의 지역적 특성에 기반해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권이라는 가치, 자연과 인간의 일체성 회복,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지역문화의 독립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정치적이다. 문화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의 장이다. 문화계 전반을 휩쓸고 있는 매카시 선풍은, 문화의 그런 속성을 대변한다. 현 정권이 수행하는 문화정책을 ‘좌익척결’에 두고, 문화예술을 지배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쯤으로 ‘천대’하는 풍조는 참을만하다. 문제는 문화의 정치화가 아니라, 여러 입장들이 모아지는 방식이 얼마나 높은 합의수준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문화는 정치적이되 정치권력에 복속되어서는 안되고, 문화의 장에서 ‘정치’의 관철은 ‘문화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 길이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관철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사회에서, 정권교체가 문화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정책이 공안과 결합해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의 정치 과잉이 초래한 권력에 복속된 문화 관료주의가 지역문화에 어떻게 파급될지, 정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반달리즘이 막 열매 맺기 시작한 지역문화 운동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치의 문화개입이 지역문화를 정치 과잉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역민의 생활에 뿌리내리는 지역문화 담론의 형성이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 지역정치, 지역의 삶, 지역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회복함으로써 지역문화는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식민화와 정치적 과잉의 근저에는 ‘문화의 경제화’가 있다. 상품화된 대중문화가 상품화되지 못하는 모든 가치를 몰아내고, 문화산업적 시각이 문화정책을 대신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경제는 사라지고, 경제를 위한 인간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지역축제의 붐이 지역문화의 붐이 아니라 문화의 경제 종속을 드러내고, 문화가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 뉴딜정책을 포장하는 하나의 장식으로 전략했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4대강사업의 첫 삽을 뜨는 홍보이벤트가 이루어지는 현실은, 안동의 문화가 대표적 토목사업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문화의 탈 경제화는 시장으로부터 버려진 탈 경제적 가치의 복권과 확산에서 시작된다. ‘실용’이란 마법에 걸려 맥을 못 추는 인권과 복지, 민주주의와 생태환경을 복권시키는 지역차원의 미시적 실천이 어쩌면 문화의 탈 경제화를 추동하는 저변의 힘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식민화된 지역문화를 해방하고, 문화의 정치 과잉과 경제화를 역전시켜 정치와 경제의 문화화를 성취할 수 있는지는 사실 낡은 과제다. ‘민중문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70년대를 관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과제는 우여곡절 속에 수행되어 왔고, 신자유주의와 신권위주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었을 뿐이다. 과제의 심원함이 해결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길이 있다면 그것은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화는 표피적 자극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관통하는 심원한 강이다. 일희일비하는 대증적 처방으로 그 흐름을 역전시키거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없다. 문화의 성숙은 항상 기본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 기본은 민주주의와 분권, 그리고 재발견된 일상의 가치에 있고, 그와 같은 기본을 성취하는 출발점은 문화라는 큰 강의 시발점이면서 동시에 그 종착지이기도한 ‘지역’에 있다.
송성일 | 2009-08-07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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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를 밝고 활기차게 이끄는 힘은 생동하는 ‘지역문화’에서 나온다. 미래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지역문화가 지역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문화가 사회 구성원의 행동을 결정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의 문화는 우리 사회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로 이끄는 힘의 원천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지역만의 문화가 가진 특수성을 진단해야한다.
 
안동사람을 ‘안동사람’이라 하며, 예천사람을 ‘예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사람의 몸에 베여있는 소속 사회의 지역성, 달리 말해 그 지역 문화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역문화를 진단하고 그 특수성을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경북북부지역의 문화가 가진 특수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서 보는 지역 문화에 대한 평가나 우리지역주민 자신이 느끼는 지역 문화에 대한 평가도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한 행정단위를 넘어서는 지역의 범주를 설정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어려움은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지역 문화의 특성과 내밀한 속성의 괴리를 밝혀내는 일은 더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지역문화는 몇 가지 시정 슬로건들 속에서 피상적이긴 하지만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비의 고장 영주’,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충효의 고장 예천’ 등의 슬로건이 함축하는 지역 문화의 특수성은, 먼저 ‘유교적 전통’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부여이다. 지역사회에서 발행되는 다양한 홍보물은 물론 문예지나 전문연구서들에서도 ‘유교적 전통’을 다루거나, 그 덕목을 표명하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반도 전체가 오랜 역사를 통해 유불선의 가르침이 내면화되어 있고, 특히 ‘경세(經世)의 사상인 유학이 현실세계에 가지는 영향력은 단연 우세한 것이 사실이지만, ‘경북 북부지역’은 특히 우리나라 어느 지역사회보다 유별나게 유교적 덕목의 가치가 절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우리 지역사회가 퇴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대 유학자를 배출하고, 오랜 역사와 시대를 이끈 정신적 자산의 생산지로서 그 위상을 유지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선이 붕괴한 이후 서구적 문물이 주도한 현대화와 산업화의 격동에서 상대적으로 비켜서 전통사회의 틀과 가치를 오랫동안 보존해온 덕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북북부지역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유불선 특히 유학을 중심에 놓지 않고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 우리의 지역문화는 오랜 정신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향유하는 데서 기초하고, 지역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트렌드의 문화를 창달하기 위해서도 이 전통적 기반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전통이 갖는 긍정적 힘은 전통적 기반위에 사는 사람들의 지혜로운 혁신의 자세에 의해 현실화된다.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지역사회가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현대화된 삶을 영위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지역문화는 지역성에 대한 건강한 인식에 토대해야 한다. 지역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가치부여는 사회의 근원적 병폐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혈연주의, 지연주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지방주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의 정치를 지배하는 ‘지역주의’는 민주주의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많은 정치가들이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지만, 더 많은 정치가들이 지역주의를 입신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잘못된 무리의식이 초래한 혈연, 학연, 지연중심의 연고주의는, 사회의 합리성을 떨어뜨리고 정의를 실현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학벌, 문벌, 족벌을 넘어 언론 패밀리와 검찰 패밀리를 뜻하는 ‘언벌’, ‘검벌’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기는 현실은, 지역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새롭고 건강한 인식이 주도하는 탈 연고주의적인 문화트렌드만이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지역주의와 집단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해야 한다. 내 것만이 옳고 오래된 것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완고한 태도는, 유교의 폐습과 가치 있는 유교 전통과 혼돈하게 한다. 그 결과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유교적 엄숙주의, 가부장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가 판치는 박제화된 문화를 지역사회에 온존시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로부터 지역을 소외된 정체의 늪에 빠뜨린다.
 
전통은 미래지향적 가치와 만나 새롭게 태어난다. 사장된 전통을 살리는 힘은 혁신에 있으며, 혁신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교조화된 경직성을 벗어던지는 순간,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버려야할 봉건시대의 잔재를 전통적 가치로 지키는 어리석은 짓은 과감히 버려야하고, 정태적인 전통문화의 답습은 하지 말아야한다. 최근에 축제가 전통에 토대하면서도 새로운 창작극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전통을 미래지향적으로 재해석하는 산물이다. 하회별신굿놀이에 나타나는 지배계급, 즉 양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식이, 우리 시대의 지배계급인 재벌과 기성 정치권, 물질주의와 성적 지상주의를 조장하는 종교집단과 사학재단,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보수언론과 권력에 기생하는 검찰 등, 권력을 가진 기관으로 향할 때 그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지난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던 창작 마당극인 ‘굿모닝 허도령’에 대한 인기는 그것을 잘 말해준다.
 
얼마 전 안동의 한 종가에서 이루어진 관례(冠禮)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행사’로만 복원된 관례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정말 소중하다. 관례의 복원은 땅에 떨어진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려는 값진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관례를 참관하면서 ‘낡은 형식에 가치 있는 내용이 얽매여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낡은 형식을 바꾸지 않아 그 내용마저 받아들여지지 않는 꼴인 것이다. 아직도 전통예절교육, 충효교육이니 하는 고정관념을 강요받으며 자라는 청소년이, 전통은 소중한 것이 아니라 고루하고 답답한 것으로 인식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역이 발랄한 현대 문화예술의 부흥을 주도할 때, 우리 지역이 전통문화의 소비지에서 현대문화의 생산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지역사회가 갖는 유구한 역사성이 고리타분한 것으로 간주되고 지역주민들로부터 배타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벗어나, 지역문화가 지역의 역사를 배경으로 발랄한 현대문화로 승화될 수 있도록, 개방되고 참신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고택 복원도 중요하고 전통문화의 수호도 중요하지만, 생동감 있는 현대전위예술 등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 생산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지역사회에 넘쳐날 때, 지난 조선 500년을 문화적으로 주도했듯이 현대에도 지역사회가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정신문화를 선도하며, 세대, 지역을 통합하고 상생하는 문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송성일 | 2009-06-23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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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몰린 '지방'을 살리는 힘의 원천을 '지역문화'에서 찾는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이미 서울 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지방은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고 더 이상 생존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은 불모의 땅이 된지 오래이다. 돈과 사람을 무제한적으로 흡수하는 블랙홀에 다름없는 서울은 그 대척점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지방을 식민통치한다. 그러다 보니 인적 물적 자원은 물론 교육, 행정, 의료, 나아가 문화, 예술 같은 정신적 자원마저 모두 서울로 흡수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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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뉴시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아 관객상을 수상한 ‘워낭소리’가 오는 13일부터 22일까지 강릉시 포남동 자비복지원 소극장에서 앵콜 상영된다.(사잔=강릉씨네마떼끄 제공)/ 박진완기자 jwpark@newsis.com <관련기사 있음>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그것도 부족해 국토의 불균형 발전에서 오는 이익을 독점하는 세력은, 모든 자원의 수도권 집중이 가져오는 폐해를 막고, 전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만든 '수도권규제' 법률마저 무력화하려는 욕심을 드러낸다. 그들의 논리를 따르면, 이미 산업, 교육, 문화의 경쟁력을 상실한 지방은, 그들이 생산한 산업과 문화의 상품을 구매하고, 아직도 흡수되지 않고 남아있는 인적, 물적, 문화적 자원을 공급하며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의 입장에서 지역은 여전히 삶의 터전이다.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강구해서, 계속적으로 유지 발전되어야 할 생활공간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가능성을 찾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산업이 번성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더 많은 산업이 유치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더 모이는 만큼 생활기반 인프라를 비롯한 교육, 행정, 의료 등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야 한다는 그들의 순환논리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지역의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문화'가 아닐까. 어떻게 문화가 고사 직전의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전략적 영역이 될 수 있는가? 먼저 문화는 우열의 차이가 없는 고유한 삶의 양식으로, 기술경쟁에서 비켜선 비경쟁적 가치를 가진 정신적 자산이다. 따라서 '지역문화'는 중앙의 지배-종속관계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삶의 전망'을 제시해주는 역동성의 근저가 될 수 있다. 중앙의 경제적 지배를 넘어설 힘의 원천을 가진 지역 문화는, 경제적 소외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풍요로움과 비례해 지역을 활기 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지표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주관적' 생활 만족도, 행복지수가 높은 지역은 의외로 많다. 미국에 비해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그렇고, 서울에 비해 봉화나 영양 주민의 삶의 만족도가 낮다고만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자기만족이 정체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체성'의 확보는 변화와 발전을 추동할 전제이자,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단지 그 가능성을 열어줄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사실 지역문화는 좁은 의미로 지방의 '문화예술'을 말하기도 하고, 지역의 정신적, 역사적 자산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문화라는 폭넓은 저변은 몇 가지의 행정조치나, 몇몇 문화 동호인이나 예술가의 노력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어떻게 지역 문화를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지역문화를 어떻게 지역을 성장시키기 위한 동력이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그 가능성을 구체화하여 성과를 얻은 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역문화를 지방을 일으키는 역동성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먼저 '워낭소리'라는 한편의 독립영화가 보여준 힘을 생각해보자. 사실 '워낭소리'는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가장 흔한 삶의 풍경을 카메라를 통해 현대인의 요구에 맞게 가공한 것일 뿐이다. 워낭소리 신드롬은 현대인이 농촌이 중심인 우리 지역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하나의 사건이다. 물론 농촌이 문화적 원료를 제공하고 도시적 기호에 맞춘 가공을 통해 대박을 터트린 문화상품인 ‘워낭소리’는, 그 수혜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추가 장치가 필요하다.

물질만능주의, 효율만능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우리의 삶을 절망과 불안으로 내모는 현대인의 삶에서, 그 대안적 가치인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정서적 가치, 공동체주의는 현대인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 지역사회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적 삶을 향유케 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지역문화'로서 구현하고 있고, 바로 여기에 지역사회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치가 고갈된 도시문화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지역문화는, 어느 순간 현대를 지배하는 역관계를 전도할 지렛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귀농'이 유행이 되었다. 도시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귀농하게 된 사람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귀농'의 근저에는 살림의 가치. 상생의 가치를 함유한 농촌문화, 공동체 문화 즉, 지역문화에 대한 도시민의 갈구가 있다. 이렇게 '이농'에서 '귀농'으로 시대적 흐름을 바꾼 힘은 바로 지역문화에서 나온다. 자연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갈구하는 현대인에게, 우리가 가진 지역문화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얼마든지 있다. '안동간고등어'나 '안동버버리찰떡' '닭실한과' 등은 누가 뭐래도 문화상품이다. '안동간고등어'는 안동이 아니면 전국 어디에서도 생산할 수 없는 안동만의 고유한 문화상품이다. 흔해 빠진 고등어가 안동의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세례를 받는 순간 값진 '안동간고등어'가 되는 것은 고등어의 힘이 아니라 안동이 가진 문화의 힘이다. 봉화 닭실마을에서 만들어지는 '닭실한과'는, 봉화 닭실마을 아주머니들의 손맛이 만든 명품한과지만, 그 맛 역시 닭실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에서 유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현재 봉화군에서는 '전국스토리텔링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지역의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토대로, 콘텐츠 제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지역의 고유한 역사, 문화, 자연자원을 발굴하며, 지역의 새로운 성장력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번 시도는, 서울을 떠난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을 유치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 지자체의 이런 노력이 바로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문화를 문화의 산업경쟁력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근시안은 피해야하지만, 이는 '문화적이지 못한' 문화산업적인 사고에만 한정된 문제이다. 지역을 살리는 힘은 지역사회에 없는 것을 유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유치하고, 공장을 유치하고, 관공서나 공기업을 유치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애써 찾을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주목해 보자. 지역주민의 삶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경제의 활력을 가져다줄 보고가 바로 우리가 가진 '지역문화'라고 생각한다.

 2009-05-12  경북 북부권 문화정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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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현암사)


<1993년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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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씨
40여년간 우직하게 농사짓고 나무를 키워 온 전우익 할아버지는 "진짜 잘 사는 것은 어떤 거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 직접 만든 작은 책상이나 박 전등갓에서 고집쟁이 농사꾼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느껴진다.

 

 전우익

 1925년 ~ 200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봉화 출생

[책읽는 경향]경북에서-혼자만 잘 살믄…

경향신문 | 2008-04-07 22:55:06

10년 전, 청년기 내내 살았다고 자부하던 가치지향적 삶이 공허해진 순간, 나는 서울을 떠나 봉화의 비나리 마을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가혹한 농업노동 속에 내 삶을 던졌다. 끝없는 호미질과 단순 반복되는 고추 수확 작업…. 그때 어떤 지인은 내 바뀐 삶을 보고 자학이라 했다. 스스로도 그런 삶의 변화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년을 견디던 중 어느날 허리 굽은 낯선 노인 한 분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혹시 송선생 아니시껴? 지가 전우익일시더.” 그렇게 전우익 선생님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라는 내 삶의 새로운 지침을 들고 나의 무너진 삶 속에 걸어 들어오셨다. 사실, 필자를 뵙기 훨씬 전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잊었다. 그렇게 던져 버린 책이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순간,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충동적 결정에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주었음은 물론 내 삶의 새로운 지향점을 일깨워 주었다.

경쟁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소수의 승리자를 위해 절대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해내는 세상, 물질적 부가 끊임없이 증대하지만 가난은 제도화되고 보편화되어 모두가 불안에 허덕이는 세상, ‘나 혼자만’ 잘 살면 되는 세상에서 이 책은 나에게 작고, 단순하고, 낮은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자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은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고, 가난하려야 가난할 수 없는 삶이라고 깨우쳐 주고 있으니, 누가 한 권의 책이 한 인간의 삶을 이끌어 주기에 부족하다 하는가?

〈송성일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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