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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토) 비나리마을에서 명진스님의 귀한 말씀자리가 있습니다.

명진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을 지내셨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삼성동 봉은사 주지를 지내셨습니다.

귀한 자리 정성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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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 귀농 15년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보따리 싸들고 서울을 떠나온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 흘러 나는 삼십대 중반의 새신랑에서 오십대 초반의 중년으로 변했다.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얼치기 귀농자에서 이제 산골 마을 비나리의 어엿한 주민의 한 사람이 되었고,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농부가 되었다. 물론 세월이 저절로 나를 비나리마을의 주민으로, 농부로 만들어준 것만은 아니다. 한명의 농부, 한명의 마을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인고의 세월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고 쉽지 않은 고난의 통과의례를 헤쳐 나와야 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니 아득한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아직 갈 길이 더 먼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하면 귀농 실패 한다’라는 제목의 전문가연하는 분들의 글에 나오는 딱 그런 귀농을 했다. 세상살이에 지쳤고, 그리고 막연한 농촌살이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막무가내 보따리를 쌌다. 내가 받은 귀농관련 교육이라고는 농협주관의 2박3일 교육이 전부였고, 그리고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요구된다는 최소한의 자금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이고, 저 허리 굽은 노인네도 농사지어 자식 다 키우고 밥 안 굶고 살고 있는데 시퍼렇게 젊은 내가 설마 처자식 굶길라고. 하는 오기만 잔뜩 가슴에 품고 낯선 마을에 짐을 풀고 난생 처음으로 호미를 잡았다.

그리고 농촌의 실상을 잘 아시는 분들이면 쉽게 예상하시겠지만 나는 번번이 엎어지고 깨어졌다. 벼랑 끝에 내몰려 다시 귀도를 고려해야할 만치 절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산골마을은 각자도생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가졌던 산골살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많은 부분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내가 어려울 때 이웃은 외면하지 않았고, 또 이웃이 고난에 처했을 때 내 역시 무심할 수 없었다. 흩어진 기억을 추슬러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품삯에 연연하지 않고 해 떨어진 고구마 밭에서 수확을 거들어 주시던 이웃 할머니, 도끼 자루 만드는 일부터 장작 패는 일까지 고스란히 삶의 지혜를 전수해 주셨던 이웃 어르신, 어떻게 하면 희망이 사그라지는 농촌에서 아름답고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이 고민을 나누던 젊은 친구들이 있어 나는 좌절할 수 없었다. 해거름에 지쳐 돌아오는 날 아득한 눈빛으로 맞으시며 ‘인자 오는가’라는 한마디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해주시던 앞집 형님,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피땀으로 농사지은 수박이 한줄기 소나기에 다 갈라져도 몇 개 남지 않은 성한 놈을 골라 이왕 망한 농사 맛이라도 보라며 가져다주시던 바로 그런 이웃이 있어 나는 이제 어엿한 비나리마을의 주민의 한사람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공동체에 눈을 뜨고 더불어 사는 재미를 맛보게 했던 [청량산감자작목반]의 일원이 되고, 또 농촌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앞서가던 이웃의 손에 이끌려 [관북 팜스테이마을]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세상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 농사지어 내 가족 먹여 살리겠다던 나의 삶의 모토는 폐기되었다. 산골살이를 시작한지 오륙년이 지나면서 소위 다양한 공동체 사업, 특히 도농교류사업에 참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이 지원하고 주민이 주도하는 도농교류사업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세월이 가고 성과가 쌓이면서 이제는 농민회와 같은 농민 자치조직이나 협동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의 형식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도농교류가 먹거리의 공급처와 소비처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도시와 농촌을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고 이를 통해 도시와 더불어 농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도농교류의 일면성이 갖는 위험을 자각 하고 외부와의 관계보다 내부의 변화를 중심에 둔 사업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오직 ‘소득증대’만이 마을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주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가치기반의 공유와 귀속감 형성을 통한 정체성 확립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자각에 이르기도 했다. 나의 관심은 녹색체험마을과 정보화마을 사업에서 마을공부방이나 자활농장으로, 체험프로그램에서 동제나 초롱계같은 마을의 전래풍습으로, 도농교류에서 주민교육 중심의 “마을학교”로 관심의 중심이 바뀌었다.

이제 다양한 마을사업의 작은 성과로 ‘비나리마을학교’라는 외적 인프라와 그 ‘학교’를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혹은 가치를 빈약하게나마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주말이면 도시의 청년학생들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러 마을을 찾고, 주중이면 주민들이 같이 모여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지키고 고양시킬 다양한 배움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초라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조금의 시간과 좀 더 많은 열정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농사는 뒷전이고 이웃과 더불어 ‘비나리마을학교’를 통해 마을의 가치, 농업 농촌의 가치,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모으고 다듬어서 세상에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하루라도 빨리 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 주어진 일에 조갑증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나는 세상을 버렸지만 마을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마을살이를 통해 더불어 사는 재미를 찾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수 있었다. 그것은 땅을 일구며 누대를 살아오신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의 심원한 삶의 지혜에 내가 감화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을이 갖고 있는 유구한 역사가 전해주는 에너지에 내가 동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자신이 생애동안 내렸던 수많은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을 ‘귀농’이라고 자신한다. 그렇게 선택한 길은 온갖 위험과 유혹이 도사린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한참을 왔지만 아직 갈 길이 더 멀다. 나는 그래서 좋다. 쉽지 않고 또 멀기까지 한 길의 매력에 공감하는 분이라며 나는 스스럼없이 귀농을 권할 것이다.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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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진 산골마을은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산짐승 울음소리만 간혹 정적을 깰뿐 사람 사는 흔적은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어둠이 설금설금 마을을 삼키려들자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두런두런 사람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히 저녁을 드시고 이골저골에서 소문을 들으신 주민들이 하나둘 비나리마을학교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비나리상영회] 플랭카드가 펄럭이는 비나리마을학교는 이날만은 어둠을 이기고 빛이 마을의 밤을 지배했다.

사실 “여성영화상영회”를 비나리마을에서 갖기로 약속을 받고 보니 멋진 타이틀에 걸맞는 주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같았다. 밭둑에서 마주친 이웃 아주머니께 영화보러 오시라고 권하면서도 혹시 “먹고 살기도 힘든데 뭔놈의 영화?”라고 타박이나 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앞섰다. 가난한 산골마을이지만 그래도 TV는 없는 집이 없고 그러다보니 드라마다 뭐다 할 것 없이 넘치는 영상 속에 빠져사는 게 현실인데, ‘영화’는 또 무엇이 다른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TV가 유일한 낙이자 문화매체인 산골마을에서 한편의 영화를 튼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정정엽작 제 1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영화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비나리마을학교를 밝히던 불빛이 꺼지고, 왁작지껄 떠들던 사람 소리가 죽어들었다. 대신 마을학교 강단 가득 반짝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빛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웃의 잔기침 소리와 산만한 아이들의 분주함이 잦아들고, 순간 화면가득 스위스 산록의 아름다운 마을이 우리의 시야를 압도했다. [할머니와 란제리]!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만으로도 정감이 넘쳐났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더 큰 공감이 갔다. 그래서 일까? 비나리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산골마을에서 한명의 할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갖는 비슷한 처지에 공감하는 관객들의 맞장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쾌한 할머니들의 반란이 끝나고 크게 한판 웃음과 박수가 쏱아지고 난 다음 여성영화제 관계자의 사회로 간단한 영화감상평을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30년만에 영화를 보셨다는 멀리 만리산에서 달려오신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승리에 속이 다 시원하다는 북곡리 아주머니, 할머니가 속옷장사하시겠다면 ‘쪽 팔릴것 같다’는 중학생 남자아이, 그냥 이렇게 주민이 모여 같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하고 좋다는 도천리 주민, 그리고 도시 못지않게 우리 비나리마을도 문화와 예술이 넘쳐나는 곳으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이웃 아저씨까지 솔직 담백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밤이 깊어 한분두분 집으로 돌아가고, 미련이 남는 사람은 남아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상영회를 다 마무리하고 나니 처음 가졌던 걱정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 확인이 되었다. 산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화에 무슨 관심을 보이겠냐는 생각은 짧은 소견머리가 낳은 편견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장 보수적인 지역 정서에 여성주의 영화가 거부감을 주지나 않을지, 혹시라고 격한 내용들로 주민들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괜한 기우였다. [할머니와 란제리]의 내용이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설령 격한 내용을 담은 다른 영화가 상영된다고 해도 주민들은 벌써 나름의 시야를 가지고 보다 폭넓게 소화해낼 자질을 다 갖추고 있을 것같았다.

이번 상영회를 통해 터득한 한 가지가 또 있다.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영화는 같이 보는 재미에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를 혼자 몰입해서 보는 것도 좋지만 이웃과 더불어 같이 분노하고 같이 기뻐하며 맞장구로 공감을 나누며 보는 영화는 또 다른 맛을 가지고 있었다.

산골마을 비나리에 좋은 영화를 매개로 주민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주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감사드린다.

송성일 비나리마을학교 대표

<201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뉴스레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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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해서 더 좋은 여성영화 봉화에서 만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gogo시네마

10 19일 비나리마을학교에서 열려

 

 

전국 각지를 누비며 다양한 여성영화로 지역관객을 만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역순회상영프로젝트 gogo시네마가 스위스 코미디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를 들고 봉화를 찾아간다.

 

여성가족부가 후원하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청량산비나리마을이 공동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10 19일 금요일 오후 7시 비나리마을학교에서 열린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gogo시네마는 찾아가는 상영회로서, 평소 접하기 어려운 여성영화의 문턱을 낮추고 다양한 부대행사를 통해 성평등 문화 형성에 기여하는 뜻 깊은 행사로 기대된다.

 

할머니들의 유쾌한 반란 <할머니와 란제리>

10대부터 80대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여성영화 선보여

 

<할머니와 란제리>스위스를 배경으로, 남편을 잃고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속옷 가게를 열려는 할머니 마르타와 이에 반대하는 마을 남자들의 갈등을 유쾌하고 통쾌하게 그린 수작이다. 친구들과 함께 벌이는 할머니의 반란이 속시원한 웃음을 던져준다.

영화 상영 후 이혜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참석해 여성의 독립과 노년의 삶에 대해 진솔하고 맛깔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지역순회상영프로젝트 gogo시네마를 통해 성평등문화를 확산하고 지역 여성 연대와 함께 발전하는 영화제로 계속 활동해 나갈 것이다.

 

[작품 상세 소개]

 

<할머니와 란제리>

드라마 | 베티나 오베를리 | 2006 | 상영시간: 89 | 제작국가: 스위스 | 전체 관람가

스위스 작은 시골마을에서 남편을 잃고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속옷 가게를 열려는 80세 할머니 마르타와 마을 남자들의 갈등을 유쾌하게 그린 수작. 시골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맞서 속옷 가게를 준비하고 지키려는 마르타와 친구들의 도전기를 통해 개인의 독립과 자긍심은 나이와 성을 불문하고 지켜져야 하는 것임을 통쾌하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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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청량산권역 비나리마을학교에서 [볼리비아인형극]을 상연합니다.

2010년 비나리미술관에서 성황리에 판을 벌였던 남미연극제에 이어,

올해 다시 청송 나무닭움직임연구소와 컬춰라인이 함께하는

남미인형극을 청량산비나리마을에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남미특유의 인형극을 만나 볼수 있게 하는

귀한 기회인 만치 지역의 어린이와 학부모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흥겨운 남미 인형극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뜻을 같이 하시는 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부로

이번 연극공연이 신나는 마을 잔치가 될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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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북북부문화정보센터(이하 컬처라인)은 2012년 8월 13일, 청송군을 시작으로 볼리비아 인형극단 ‘Parala Mano'와 함께 하는 인형극 여행을 떠난다. 경상북도와 경북 북부권 11개 시·군이 주최하고, 컬처라인이 주관하는 이번 인형극 여행은 경북 북부권의 마을로 들어가 지역의 아이들과 주민들을 만나면서 남미 특유의 색깔이 묻어나는 인형극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유대감을 두텁게 하고 지구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갖게 하고자 기획되었다.

1998년에 설립되어 볼리비아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인형극단 ‘Parala mano'는 인문학적 상상력에 기반 한 감동 깊은 인형극을 직접 창작하고 공연하는 단체로 해외 인형극 축제에도 초청되고, 한국에도 올해 세 번째로 초청되었다.

이번 인형극 여행에서는 관람객 연령층에 따라 주요 레퍼토리 세 작품을 선보인다. 크고 파란눈을 가진 못생긴 거인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 우정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룬 <파란눈>은 초등학생들을 찾아가고, 전쟁과 폭력,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작품 <소박한 이야기들>과 크리스마스에 소외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징글버>라는 작품은 청소년과 성인들이 주 관람객이 되도록 공연이 배치되었다.

약 한 달 동안,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 의 마을을 찾아가 9월 6일, 울진 공연으로 막을 내리는 볼리비아 인형극 여행의 자세한 일정은 컬처라인 홈페이지(
http://www.cultureline.kr)에 공지되어 있다.

■ 문의: 054-843-6231~2 (컬처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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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마을학교] 풍물강좌 첫 수업이 있었다. 이번 강좌는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여러 관련 기관에 풍물반 개설과 강사파견을 요청해온 끝에 봉화 국악협회 도움으로 개설하게 되었다. 봉화국악협회는 문광부의 지역특성화사업을 선정받아 봉화군 관내 2개마을에서 풍물반을 개설하게 되었는데, 비나리마을은 그 두개 마을 중에 하나로 선택되어 풍물강좌를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비나리마을학교]는 [청량산비나리정보화마을]과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청량산비나리권역]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도농교류위 거점이자 마을 주민을 위한 문화 공간이다.  앞으로 [비나리마을학교]를 통해 지역주민과 도시민 유치를 위한 다양한 문화강좌와 인문학 강좌, 치유프로그램 등을 개설하여 운영될 계획인데 정식 오픈에 앞서 먼저 첫 주민문화강좌로 풍물교실을 개설하게 된 것이다.

 

 

 

첫 수업이 열린 이날은 모임 시간으로 잡은 저녁 7시가 너무 일러서인지 처음에는 참가자가 적어 걱정을 했는데 7시 반이 넘자 한부 두분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서른명이 넘는 주민이 참여를 했다. 멀리 명호면 관창리 만리산에서도 몇 분이 오시고, 명호면 소재지와 북곡리에서도 여러 분이 오셨다. 예상치 못한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에 비나리마을학교 첫강좌가 성공리에 진행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날은 먼저 임영훈 한국 국악협회 봉화군 지부장님의 인사 말씀이 계셨고, 앞으로 수업 진행에 대한 논의와 우리 수강생을 대표할 회장님, 그리고 실무 진행을 도울 총무를 뽑았다. 비나리 마을주민 윤길학님이 비나리풍물반 회장님으로 만장일치로 추대되셨다. 그리고 정근영 사무장님이 풍물반 총무를 맡아주시기로 하셨다.

 

 

 

강좌에 참가한 주민들은 난생 처음 잡아 보는 장구를 들고 모두들 들떤 얼굴로 강의에 몰두 하셨다. 정적이 지배하는 마을에 일주일에 한번씩이나마 풍물 소리가 번져나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첨 잡는 장구로 휘몰이 장단을 신나게 두르리는 회원님들 모습이 너무아름다웠다. 그동안 마을의 아름다운 문화와 전통이 사라져가고 대보름 등의 마을행사에도 풍물소리가 사그라들어 안타까왔는데 이번 교육 덕분에 다시 마을에 풍물소리가 나고 신명이 넘쳐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앞으로 마을 사업이 잘되어 풍물강좌를 시작으로 다양한 주민을 위한 강좌가 개설되고, 더 다양한 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이렇게 마을과 마을을 넘어, 세대와 세대를 넘어 서로 모여 얼굴을 맞대고 웃고 떠들고 즐기며 소통하는 속에서 우리 자신과 마을의 미래를 공유하고 우리 지역의 인심이 더 깊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된다. 교육과정에 남녀노소 주민 누구라도 참가하여 더불어 정도 나누고 마을의 살림도 같이 걱정하며 마을의 아름다운 미래를 같이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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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초등학교 2011 운영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명호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쉰명을 넘지 않는 봉화군 명호면 소제지의 조그마한 시골학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학부모들은 운영위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잘 몰랐는데다가, 학교의 편의대로 편안한 사람을 지목하여 임명을 하고 형식적인 회의를 진행해 온 듯합니다. 그러던 것이 한 학보무가 우연한 기회에 학교측에서 특정인을 지목하여 운영위원으로 임명하려한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에 몇 학부모가 문제를 제기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요구한 끝에 이번 운영위원회가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4일, 학부모 위원2인과 교직원 위원 2인, 그리고 학부모 위원의 추천을 받은 지역주민 1인 등 5명으로 구성된 명호초등학교 운영위원회가 2011년 첫 회의를 가졌습니다. 저는 지역주민 몫으로 학부모들의 추천으로 운영위원으로 참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운영위원회를 참석하고 나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아 마음이 편치 않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실  첫 회의다 보니 간단한 상견례도 가지고 앞으로 학교 운영위원회를 어떤 마음으로 참여할 것인지, 또는 학교 운영위원회를 통해 지역사회와 학교의 건강한 관계의 형성이나 교류 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감을 잡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은 그동안 학교운영위원회를 형식적으로 구성해서 거의 음성적으로 운영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향후 운영위원회의 정상화를 촉구하고싶었고, 운영위원회가 학교측에서 제시하는 문서나 받고 대충 읽다가 박수나치고 커피나 한잔하고 헤어지는 식으로 운영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은 긴장을 가지고 밀도있는 운영을 하고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첫 운영위원회 이틀전에 전화상으로 회의 통보를 받고 회의 직전에 회의 안건에 대한 자료를 건네받은 입장에서는 회의에 임하는 학교측의 성실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회의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저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먼저 바쁜 일상을 이유로 운영위원으로 참여를 해 달라는 이웃 학무모들의 요청을 스스로 수락하고도 '초등학교 운영위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운영 되어야 하는지, 학교운영위원회의 권한과 의무는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교육일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개진할 수 있는 것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채로 회의에 참석하는 불성실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학교는 마을 공동체의 주요한 한 축으로 주민들의 삶과 긴밀히 결합되어 주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결집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주민의 꿈을 그리고, 마을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게 하는 정신적 활력의 생산공장이었습니다. 주민이 쌀을 모아 터를 사고 벽돌을 찍어 학교를 지었고, 선생님은 학생들의 선생님일 뿐아니라 마을 지식인의 산표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역할모델이 되었고, 지역 주민의 기대와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진전되고 또 그만치 마을이 붕괴되면서 마을공동체에서 가지던 학교의 위상은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지역 학교의 선생님이 어떤 분이 계시고 어떤분이 오고 가셨는지 마을 주민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학교는 그동안 지역사회내에서 가졌던 모든 역할을 다 버리고 오직 경쟁교육, 입시교육의 하위 기지로서의 역할만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학력평가 전국 몇 위, 도내 몇 위라는 잣대로 평가되는 시골학교는 대부분 그 자신의 독자적 가치와 무관하게 형편없는 하류 학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시골학교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 문제를 푸는 장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산골학교의 특별한 가치를 빛나게하는 교육을 실현하고, 지역공동체와 통합된 학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미미한 기여라도 하는 운영위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2011년 명호초등학교 첫운영위원회를 가진뒤 또 하나의 큰 숙제를 떠맡은 기분입니다. 다행스럽게 산골마을의 학교는 학부모와 선생님이 함께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움 학교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작기 때문에, 그리고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산골학교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다른 생명,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사는 삶의 가치는 익히고, 마을 공동체와 하나된 학교를 만드는 일을 제일 먼저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명호초등학교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운영위원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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