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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9일 란드룩을 출발하여  담푸스에서 걸음을 멈추고, 1월10일 안나푸르나를 벗어나 멀리 포카라가 내려다보이는 사랑곳에서 짐을 풀었다.

란드룩에서 보낸 반나절은 참 값졌다. 걸음을 시작한뒤 첫 휴식이었고 전체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한 호흡을 쉬며 남은 여정을 준비하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정되었던 일행과의 작별에 이어 작은 분란뒤에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있은 뒤라 분위기 쇄신차원에서라도 뭔가 마디가 필요하기도 했다. 지누단다에서 란드룩까지 이르는 길은 모디콜라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뉴브릿지마을을 만나 모디콜라를 건너고 다시 계곡을 따라 걸으며 서서히 오르막을 올라 강건너 간드룩이  마주보이는 높이에 이르러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같은 고도의 마을이지만 상행길에 만난 간드룩은 산마을이자 트레커들을 위한 마을같은 느낌이었다면 하행길에 만난 란드룩은 그냥 산록 농촌마을로 다가왔다. 안나푸르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에서 하루를 쉬고 본격적으로 하행길로 접어드는날 우리는뒤돌아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고 등을 돌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찍었다.

란드룩 이후의 길은 편안했다. 완만했지만 그래도 내리막길을 따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걷고 또 걸었다. 하산한다기 보다는 수평의 길을 걷는 느낌은 담푸스까지 이어졌다. 상승하는 삶은 이미 지나갔고 그리고 하강하기엔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제 수평적인 삶마저 끝나간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되는 우리는 우리 삶을 닮은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안나푸르나는 멀어져가고 그만치 고도가 줄었다. 고도가 즐어드는 만치 초록빛은 늘어가고 우리는 네팔리 농부들이 가꾸어 놓은 이쁜 밭두렁길은 걸었다. 늘 논밭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논밭을 가꾸어 놓은 농부의 삶은 고달프다. 농부로 사는 내가 한국에서 그렇듯 네팔의 농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농부는 수도자이고 농사는 수행인지도 모른다. 금전적 보상이 충분이 주어지지 않지만 피땀을 흘려가며 뭍생명의 먹을 거리를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니 세상의 모든 농부가 성자가 아니면 누가 성자일 수 있겠는가. 나는 자격있는 트레커로 네팔리 농부가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밭두렁길을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두달일정의 이번 여정에서 친구들과의 첫 트래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우리는 안나푸르나품을 떠나 포카라로 되돌아간다. 영원히 잊지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일행과의 여정이 하루하루 줄어들자 나의 뇌리에는 지금 이 순간을 지속시킬 묘안이 떠올랐다. 가이드 라마를 통해 얻어들은 정보지만 네팔 산골에 조그마한 학교 하나를 짓는데 3천만원이면 되고, 교사 월급이 1인당 10만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도반들이 작당하고, 뜻을 같이하는 분들을 모아 힘을 합친다면 네팔에 작고 초라할 망정 학교 하나 정도를 운영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교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인연을 엮고 그 학교에서 남은 삶을 살아도 되겠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겨났다. 한 평생을 살면서 일정기간 자신의 삶의 한부분이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는 삶이 될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좋은 인연들과 작당하는 재미까지 있으니 더더욱 기쁜 일일 것이다. 현실화하기에는 더 많이 고려해야할 것들이 있겠지만 일단은 내 마음속에 수많은 꿈들중의 하나로 소중히 모셔두기로 했다.

담푸스는 아늑했다. 골목길 가득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번지고, 옆집 누렁이 짓는 소리에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까지 들릴것 같이 유년의 한때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저녁 무렵 수학여행을 온듯한 수십명의 학생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편하고 조용한 잠자리가 되었을터인데 밤새 학생들의 조잘거림과 동네 가득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밤의 소란은 아침 해와 함께 사라졌지만 어쩌면 산을 나와 도시가 가까워지는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생기였느지도 모르겠다.

잠을설친 새벽일찍 롯지를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전망대를 올랐다. 아직 공사가 덜된 전망대를 오르자 지나온 안나푸르나 산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푸스전망대에서 바라다 보는 안나푸르나는 푼힐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다른 멋을 보였다. 푼힐에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까이 느껴졌던 산과 달리  산에서는 한발짝 멀어졌지만 마을 넘어로 보이는 산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온 롯지는 정적이 흘렀다.  밤새 떠들던  학생들은 잠을 자는지 벌써 길을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롯지를 나왔다. 담푸스를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오르막길이더니 금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한시간여만에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만났다. 

걸으러 왔다는 사람이 차 못탄지 몇일이나 되었다고 차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대기하고있던 마이크로버스에 오르자 차는 바글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더 오래 타고 싶은 내 마음을 아랑곳없이 이내 사랑곳 입구에 도착했고, 우리를 내려주고는 제 갈 길을 떠나갔다. 노점에서 밀감과 포도를 사들고 라마가 가리키는 길을 접어드니 우리를 맞는 길은 한창 공사중인 찻길로 흙먼지가 앞을 가렸다. 차라도 한대 지나칠 때면 숨을 쉬기 조차 힘들만치 먼지가 날리는 도로를 따라 사랑곳으로 향했다. 포카라를 떠나 트레킹을 시작한 뒤 최악의 길을 만나 힘든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도시와 산의 중간쯤에 있는 네팔리의 삶속을 걷는 경험은 즐거웠다.

 

Lake View Lodge Sarangkot에 짐을 풀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페와호수와 포카라의 풍경을 만끽하며 네팔여정의 첫 트레킹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할 우리 부부와는 달리 곧 여정을 접고 귀국해야하는 친구들은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았다. 산을 통해 느낀 몸과 다스린 마음은 비로소 도시를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이번 트레킹을 어떻게 느끼고 정리해서 기억의 한켠을 채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트레킹을 통해 모두의 얼굴은 더 밝아지고 목소리의 생기가 더 높아졌다. 옥상에 빨래를 걸어 바람을 맞히니 우리는 롱다가 된 빨래와함께 포카라와 페와호수, 그리고 사랑곳의 전망좋은 롯지를 더욱 풍요롭게하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어둠이 롯지를 삼키니 멀리 포카라의 야경이 선명히 살아났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의 대자연을 떠나 도시가 가까워졌음을  느껴야했다.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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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할 것 없이 새벽 일찍부터 눈이 떴는지 호텔이 분주했다.  호텔서 제공하는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을 때우고 나니 이내 부탁한 택시가 도착했다. 2박을 한 팀들은 벌써 매니저와 룸보이랑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오래 작별인사를 나누고 팁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왜 그리 많을까 늘 의심하고 삶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9명의 팀이지만 짐은 만만하지 않았다. 룸보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9개의 중대형 배낭과 또 그에 못지않은 소형 배낭 그리고 손가방까지 다 모아놓으니 한 트럭분은 되어 보였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빈병 물 채우듯 빈틈없이 짐과 사람을 구겨 넣으니 그래도 숨 쉴 공간은 남았다

네팔 최고의 버스라는 포카라행 자가담바의 출발점인 타멜에서 차로 5분거리가 되지 않는 안나푸르나호텔로 향했다. 타멜 거리를 지나는 가깝지만 혼잡스럽고, 몸은 불편한 시간동안 나는 막 시작한 여정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보단 타멜의 거리와 얽힌 기억의 흔적을 쫒는데 여념이 없었다. 5년 전 들렀던 레스토랑이며 호텔의 위치, 그리고 마트와 서점을 더듬었다. 그를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2천만 네팔인구중에 내가 아는 2~3 명중의 한명이 우연이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까 나의 눈은 열심히 거리를 훑었다.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인지, 나는 이 거리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욕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갈수록 흐릿해 지는 기억의 확실성을 움켜지려는 집착인 것도 같았다.

이내 도착한 안나푸르나호텔은 별천지였다혼잡하고 지저분한 카트만두의 거리와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채 네팔의 가난과도 무관한 공간으로 다가왔다싱그러운 나무와 꽃들한적하고 편안한 정원 그리고 그 속을 거니는 여유로운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도 있을까 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하고 싱그러운 카트만두의 정취에 마양 취했다정원을 거닐고 향기로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안나푸르나 여정을 같이할 길동무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그래도 제일 젊은 L이 제안한 연출 사진이 가장 멋졌다서로 맞댄 흐린 얼굴 넘어 무언가 뜨거운 꿈을 공모하는 짜릿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혼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지나 버스는 이내 네팔의 산하를 달렸다네팔리의 삶이 스민 산자락 다락밭들과 차장으로 스치는 멀리 눈덮인 봉우리가 우릴 반겼다들뜬 눈으로 차창을 스치는 먼 산과 네팔리의 삶이 깃든 마을을 바라봤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지나가는 소마저 나를 반겨주는 듯 정겨웠다카드만두 분지를 벗어나기 위한 산자락 길은 여전했지만 포장을 새로 하고 난간을 세워 훨씬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아무데나 버스를 멈추고 볼일을 보게 하던 5년전과 달리 그래도 휴게소다운 휴게소가 있고 길가의 쓰레기도 훨씬 줄어들었다버스에서길가에서휴게소에서 마주치는 네팔리마다 특유의 여유 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여행객을 맞았다. 2015년 대지진 이후 인심이 팍팍해지고 거칠어졌다는 소문과는 달리 네팔의 표정은 5년전보다 더 밝게 다가왔다.

내 인생의 화려한 한때를 즐길 마음의 준비도 없이 포카라에 도착했다카트만두를 떠나자마자 포카라를 향해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내내 이번 여행의 의미를 물었다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곱씹었다굳이 바란다면 이번 여행이 내 마음의 지병인 화를 다스리는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버스를 내리며 다짐했다. ‘잊자쉬자놀자걷자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자.’ ‘여행의 의미를 찾고나의 삶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피하자.’ 그냥 먹고 걷고 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고자 다짐하며 나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버스정류장엔 우리의 가이드 라마가 차량과 직원을 대동하고 마중 나와 있었다전화와 카톡으로 연락만 주고받다가 처음 마주하고 보니 상상했던 인상보다 훨씬 강직해보였고 보스 기질의 사업가 기풍이었다서둘러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리 짐은 라마가 준비한 차로 옮겨졌고 예약했던 호텔이 문제가 있다며 막 새로 들어선 다른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정식 개업도 안한 것 같은 새 호텔에 짐을 풀고 나자 우리는 새장에서 해방된 새들처럼 포카라 리버사이드거리로 쏟아져 나갔다안나푸르나를 걷는 모든 여행자들의 발길이 머물고 오래전 전세계 히피들이 모여들었다는 리버사이드 거리를 내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울릉거렸다. 9명의 일행은 뒷골목의 골목대장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리버사이드 거리를 휩쓸며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다가 해직녁이 다되어서야 페와호수가로 몰려갔다.

페와호수는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고 물가를 거닐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그 속에 나도 한 부분이고 싶어 선뜻 흥정을 하고 두 대의 배에 나누어 올랐다배는 호수가운데 떠 있는 작은 사원이자 섬인 바라히 힌두사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배에 오르자 모두 물 만난 고기마냥 자유를 얻었다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을 잊고 노래를 시작했다잊혀진 80년대의 색 바랜 민중가요가 페와호수에 번져나갔다물살 때문인지 우리 노래의 울림 때문인지 물에 비친 안나푸르나 연봉이 흔들렸다. 

도착한 바라히사원은 임신을 원하는 사람이 참배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하지만 우리는일행은 더 이상 자식을 얻을 연배가 하나도 없으니 다들 무슨 소원들을 빌었는지 모르겠다안나푸르나 연봉이 비친 페와호수가 석양이 물들 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나는 빌었다안전한 산행과 즐거운 동행을그리고 우리 딸의 행운과 건강을, 우리부부의 사랑과 건강을, 어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그리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소원을 빌다보니 나는 여전히 바라는 게 너무 많고 버리지 못하고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많은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페와호수와 리버사이드 거리가 어둠에 물들자 우리는 민속공연과 모닥불이 있는 부메랑식당으로 몰려갔다.  여정을 같이할 가이드 라마님도 동석해서 일정과 비용을 조율하고, 맛있는 스테이크와 맥주를 정겨운 친구들과 나누니 가는 밤이 아쉬웠다.  포카라의 밤이 깊으니 곧 만나게 될 산들이 그리워졌다. 내일 여정이 우리를 부메랑에 모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미치게하던 봄밤의 기운을 느끼며  리버사이드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산행을 위한 짐을 다시 한번 챙기고 침대에 몸을 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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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은 없었지만 베시사하르 최고급이라는 호텔 투쿠체서 온수로 샤워를 하고 숙면을 취한뒤  예약한 아침을 먹기 위해 다이닝 룸으로 내려왔다. 전날 마이크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8시 출발을 위해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버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배낭까지 다 챙겨 내려왔는데 호텔 종업원들은 그제사 움직이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예약해 둔 시간을 넘기고도 전혀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시간은 촉박해지고 예약했던 메뉴를 취소하고 간단한 누들수프로 급히 아침 허기를 떼우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 도로에서 이내 도착한 마이크로 버스 지붕에 배낭을 싣었다. 마낭에서부터 계속 마주쳤던 호주 청년 커플도 같은 호텔에서 묵고 똑같이 아침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짐을 싣었다. 


 
출발시간을 넘긴 마이크로버스는 승객에게 타라는 말도 없었고 다른 승객들로부터도 짐만 받아 지붕에 싣었다 . 짐을 싣던 버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갑자기 출발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파샹에게 물어봐도 자기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다. 호주 커플은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는 호주 커플을 쳐다보며 서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상황파악이 되질 않았다. 막 깨어나는 베시사하르 거리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차가 떠난지 30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파샹을 앞세워 버스매표소로 가 물어보니 별거아닐거다, 차 기름 넣으러 간것 아니냐는 확실하지 않은 답변을 전해줬다.


더이상 자세한 상황 파악을 포기하고 버스가 떠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반경내에서 그냥 베시사하르 거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9시 30분이 넘어 우리 배낭을 싣은 마이크로 버스가 원래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사도 조수도 아무런 해명이 없고 1시간 30분을 기다린 네팔리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정이다. 출발시간이 어떻고 승객에게 사전 설명을 해야되는것 아니냐는 식의 논쟁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카라에 오늘 가기만 하면 되는것 아니냐는 승객들의 느긋함이 부러웠다. 나역시 출발 시간을 아무 설명없이 1시간이상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원망보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버스가 돌아와준게 어디냐는 안도감이 더 컸다.

버스는 이내 출발했지만 시가지를 벗어나기까지 조수는 계속 문짝에 메달려 '포카라'를 외쳤다. 몇명의 승객이 더 탔지만 남은 좌석이 한두개 남은 상태에서 시가지를 벗어났다. 한 5분이나 달렸을까 핸드폰을 받고 통화하던 기사는 갑자기 좁은 길을 억지로 유턴을 해 다시 베시사하르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선 버스는 한참을 달려 주택가 골목까지 들어가 중년부인 한분을 태웠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사적으로 아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승객을 더 실으러 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기사 역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버스를 예정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게 출발시키거나, 버스의 노선을 벗어나 기사 마음대로 차를 운행해도 되는, 이 모든 것이 용납되는 네팔의 교통문화가 황당하고도 재미있었다.



베시사하르에서 포카라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슬픈 아름다움이 넘쳤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 논들, 흙먼지 날리는 길가의 낡은 주택들, 떼국물 떨어지는 아이들의 차림... 소읍을 지날 때마다 조수는 '포카라'를 외쳤고 나중에는 차 지붕까지 승객들이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포카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네팔 농촌의 풍경을 카메라가 아니라 내 눈을 통해 마음속에다 수천 컷이나 퍼 담았다. 그리고 나는 70년대 초반 철없던 소년으로 돌아가 한껏 뛰어 놀던 진해 장복산언저리의  닭소리, 개소리, 차소리, 아이들 소리를 듣고, 밥냄새, 똥냄새, 사람냄새 그리고 삶에서 묻어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속에서 애틋히 지켜나왔을 사람의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졸고 있었다.


버스는 베시사하르를 떠난 지 3시간만에 포카라에 접어 들었다. 포카라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따라 한무리의 시위대가 지나갔다. 또 얼마를 달리니 각가지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행진하고 있었는데 구릉족의 민족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활력이 넘치는 도시다운 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포카라 표지판을 본지 한참을 지나서야 시내 한 복판에 버스는 섰고, 승객들 대부분은 종점이 어딘질 몰라 내리기를 망설였다. 파샹 역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에 와 본적이 없는 표정이다. 조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파샹과 버스를 내리고 지붕위의 배낭을 받아내렸다. 순간 우리는 일군의 사람들로 포위되었다. 택시기사며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들이 제각각 뭐라고 외치면서 명함을 건네고 우리 배낭을 잡아 당겼다. 상황파악이 안되는 중에 파샹은 우리보다 더 당황스런 표정이다. 이들을 완전히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올라탄 택시는 우리 일행과 자칭 호텔 메니저라는 사람을 싣고 포카라의 최종 목적지 레이크사이드로 향했다. 뒤돌아보니 버스를 내렸던 거리가 Prithri Chowk였다.
카트만두보다는 그래도 잘 정비되고 쓰레기도 덜한 포카라 시내를 가로질러 트레커들의 본거지인 레이크 사이들를 향해 택시는 달렸다. 쏘롱아를 넘어 서너번 정도 포카라에 왔던 적이 있다는 파샹은 서울에 올라온 촌 아이처럼 들떤 표정이었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도시 풍경에 빠져들었다.


택시는 이내 레이크 사이드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스텝들이 대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호텔메니저라며 우리와 같이 동행한 사람은 사실 이 호텔의 스텝이 아니라 그냥 거리의 삐끼였다. 그들 끼리 한참을 수근거린 뒤에야 온수 샤워가 가능한 룸의 숙박료가 1층은 8불, 2층은 10불, 3층은 15불이라며, 2층은 레이크만 보이고 3층은 안나푸르나와 레이크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호텔 마당에서 배낭을 지키고 있고, 아내만 룸을 보러 올려보냈다. 이왕이면 조망이 좋은 방을 얻을 생각이었지만 황당하게도 2,3층 방은 모두 예약이 끝나버렸다고 했다. 사실 이미 레이크 사이드에 도착했으니 널린게 호텔이라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우리를 안내한 '삐끼'는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연신 'My mistake. I'm Sorry!'를 외치며 이 호텔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른 호텔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폭설로 안나푸르나 라운드 코스가 막히면서 많은 트레커들이 포카라로 몰려와 비수기임에도 호텔이 거의 만원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Touch Nepal Hotel에 방을 얻었다. 숙박비 1,000루피에 핫샤워가 가능하고, 학국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산촌다람쥐'가 바로 붙어 있었다. 스텝이 이끄는 데로 호텔 뒷편으로 이어진 흐름한 식당으로 따라가니 한국음식 냄새가 확 느껴졌다. 산촌다람쥐 주인장을 소개받고 다시 호텔 룸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호텔은 단체 어린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호텔 복도를 몰려다니고, 잘 보인다던 페와 호수는 아예 보이질 않았고, 안나푸르나 연봉은 산정상만 조그만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산촌다람쥐에서 늦은 점심으로 돼지제육볶음을 먹고 말로만 들어오던 레이크사이드 거리를 돌아 페와 호수가를 걸었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를 찾는 외국인 들이 꼭 거쳐가야만하는 네팔 최고의 현대 도시이자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었고 호텔 방이 동이날만치 많은 트레커들이 몰려왔다고 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안나푸르나 산속에 오래 머물다 내려온 사람들에게 포카라는 분명 파라다이스같은 도시로 다가갔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현대문명이 그렇게 반가울 만치 오래 산속에 있지도 않았고, 포카라를 즐길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쇼핑말고는 또 무엇을 할지 망설이다가 날이 저물고, 점심때 먹은 돼지고기 제육볶음에 반한 파샹이 다시 원하는 'Korean Food'을 찾아 산촌다람쥐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올라간 룸에는 잘 나온다던 온수가 어느 수도꼭지에서도 나오질 않았고 전기는 사위가 어두워진뒤 한참만에야 들어왔다. 사설전기에 연결된 희미한 보조등 하나에 의지해 룸에 머물렀지만 레이크 사이드 거리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날이 저물면서 시작한 비는 어느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바뀌고 바람마져 거칠게 호텔 창을 두드리니 호텔 룸이 영락없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레이크사이드 거리는 불빛 하나없이 완전히 문을 닫았고 우리가 머무는 호텔은 로비나 다이닝 룸이 휴식을 취할 만한 시설이 못되었다. 비가 때리는 창 넘어 번쩍이는 번개빛에 드러나는 도시의 윤곽 넘어 눈속에 묻혀있을 안나푸르나를 걱정했다. '눈때문에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포기 했는데, 이러다간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코스 마저 포기해야되는거 아닌가?' 걱정을 안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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