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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일찍 눈을 뜨고 계속 침낭 속에서 미기적거렸다. 10여명이 다이님 룸에서 같이 잠을 자다보니 먼저 일어나 서성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편함보다 정겨움이 더 컸다. 뿔뿔히 자신의 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트레커랑 가이드와 포터랑, 롯지 식구들 까지 다이님룸에 소복히 모여서 같이 잠자리에 누우니 한 방에 4형제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 났다. 창밖에 새벽 어스름이 비추기 시작하자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일출 장면을 사진에 담겠다고 캠프에서 10여분 거리인 View Point까지 올라갔다.
6시 30분, 일출 장면을 찍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는지 날이 훤하다. 살을 애는 얼음 바람을 맞으며 한국인 트레커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청명한 하늘과 맞닿은 안나푸르나 연봉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산 정상이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낮은 산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산 전체가 드러나는데, 안나푸르나는 아침 어스름 속에 산 전체가 먼저 드러나고, 다시 햇살이 산 정상을 비추기 시작하면  황금빛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안나푸르나는 백설의 설산으로 돌아왔다. 절로 탄성을 지르며 열심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1980년에 태어나 2006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위령탑이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바라다 보며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그는 이곳에 남아 아침 햇살 받으며 깨어나는 안나푸르나를 영원히 지켜볼 것이고, 우리는 오늘 하산하면 남은 삶동안 다시 이곳 안나푸르나를 오기는 힘들 것같았다. 산과 산을 지키는 낯선 한 영혼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남기고,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해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왔다.


하산길도 파샹이 앞장을 서기로 했다. 다른 팀들보다 먼저 롯지를 나섰다. 어제 상행 중에는 눈과 구름속에 숨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던 마차푸차레 정상이 우리의 정면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의 끝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마차푸차레지만 어쩌면 그냥 계속 걸어 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ABC코스에 접어들면서, 아니 포카라에서 부터 너무 자주 봐서 이미 친숙해져 버린 탓일거다. 간드룩에서 다이님룸에서 만난 폴라드인 트레커는 다음 기회에 마차푸차레 정상을 등정해 보고싶다며 파샹에게 등정을 위한 허가 과정이나 최소 인원, 비용 등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 만으로도 좋지만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된다면 나도 일생에 한번쯤은 저런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는 쉰을 넘었고, 평생 높은 산은 한번도 타본 적이 없고, 시간도 비용도 내기 힘든 주제에 꿈도 야무지다며 스스로 핀잔을 주고는 걸음에 속력을 붙였다.



올라올 때, 그렇게 힘든 길이었는데 내려갈 때는 너무 쉽다. 근 3시간을 걸어 올라갔던 MBC에서 ABC가던 길은 1시간만에 주파했다. 어제는 눈속에 길을 서둘러야했지만 오늘은 쾌청한 날씨에 하산길이니 길을 서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파샹은 저만치 앞서가고 나도 모르게 발길이 빨라졌다. 오전 중에 데우랄리를 스쳐 지났고 점심은 히말랴야에서 먹게 되었다. 상행 때의 꼭 2배 속도로 걸은 셈이었다. 히말라야를 출발해 도반과 밤부까지는 거의 쉬지 않고 내려왔다. 밤부가 가까워지자 쾌청했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오고 한방울 두방울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롯지에 도착하니 진눈깨비는 비로 변해있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는 상황에서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하산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밀크커피를 마시며 30분 정도를 쉬다보니 호주 청년트레커 두 커플은 비닐을 뒤집어 쓰고 상행길에 나섰고, 오래전에 한번 왔던 길을 다시 찾아왔다는 일본인 트케커도 비를 맞으며 상행길에 올랐다.


밤부에서 묵기에는 시간도 좀 남았고, 오늘 숙소 예정지로 잡았던 시누아도 머지않아 우리도 마음을 고쳐 먹고 비를 맞으며 하행길에 나섰다. 다행히 길을 나서자 비는 더 가늘어졌고, 시누와가 가까워지면서 아예 그쳐 버렸다. 시누와에서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강력이 권유한 후배다. 그는 다른 일정으로 네팔에 들어왔는데 오늘 쯤 서로 교행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전해 받은 일정표는 잃어버렸고, 여행 시작일과 기간 정도만 기억하는 상태에서 파샹에게 물으니 시누와나 촘롱 정도에서 만나지 않을까 예상을 했다. 그러데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시누와에 들어서니 첫집 헛간에서 바삐 움직이며 조리 중인 사람들이 보였고, 단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길가 쓰레기 장에는 한국어로 '당면'이 선명하게 쓰인 포장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 계절에 단체 손님이라면 당연히 한국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물어보니 혜초여행사라고 했다. 네팔리 사이에서도 '혜초여행사'는 아주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혜초 여행사의 단체손님이라니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시누와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였는데 의외로 Upper Sinuwa는 붐볐다. 2개의 롯지가 영업중이었지만 한 집은 혜초여행사 그룹이 독차지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집으로 여러 무리가 모여들었다. ABC를 같이 걸은 호주청년들, 한국 청년커플, 한국 여선생님, 그리고 상행하는 낯선 한국 청년들이 7~8명이 뒤늦게 들이닥쳤고, 외국인 트레커도 두어명 더 합류했다. 작은 다이닝룸이 곽찼다. 거기다가 나의 손님까지 합류하니 스토브를 켜지 않아도 좋은 만치 사람의 온기가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3000m이하로 내려왔으니 제일먼저 담배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만난 후배 내외와 함께, 그리고 ABC를 같이 오르고 내린 동행 트레커들과도 한잔 나누고 싶었다. 락시 한병과 후배가 가져온 유명한 "한라산소주"를 딱 한잔씩 나누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배는 내일 ABC로 올라가야 될 형편이라 일찍 숙소로 갔다. 그리고 한국인 여선생님과 좀더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를 통해 그분이 직면한 삶의 문제와 관계가 나의 삶의 지향, 나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 보게하는 적지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 덕분에 친환경 농업, 마을 공동체, 진보적 삶과 정치적 실천 등 평생의 화두가 안나푸르나에서 다시 되살아나게된 셈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닌 나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점인 ABC를 딛고, 다시 하생길에 영인 아빠를 만나니 나의 이번 여정은 끝나가는 기분이다. 이제 이삼일이면 포카라에 들어갈 것이고. 이삼일 더 포카라에서 헤메다가, 또 카트만두 거리를 이삼일 더 걸으면 귀국해야한다. 귀국을 생각하기 시작하니 딸이 더 보고 싶어졌다. 전날 밤 아내도 꿈속에서 딸아이를 보았단다. 네팔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고장이 나고, 달리 전화걸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한국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지내고 싶었다. 익숙한 세상이랑 한달쯤 철저히 단절한다고 내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냐는 객기 아닌 객기였다. 그래도 포카라에 가면 근 한달만에 사랑하는 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우리 딸이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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