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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할 것 없이 새벽 일찍부터 눈이 떴는지 호텔이 분주했다. 호텔서 제공하는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을 때우고 나니 이내 부탁한 택시가 도착했다. 2박을 한 팀들은 벌써 매니저와 룸보이랑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오래 작별인사를 나누고 팁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왜 그리 많을까 늘 의심하고 삶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9명의 팀이지만 짐은 만만하지 않았다. 룸보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9개의 중대형 배낭과 또 그에 못지않은 소형 배낭 그리고 손가방까지 다 모아놓으니 한 트럭분은 되어 보였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빈병 물 채우듯 빈틈없이 짐과 사람을 구겨 넣으니 그래도 숨 쉴 공간은 남았다.
네팔 최고의 버스라는 포카라행 ‘자가담바’의 출발점인 타멜에서 차로 5분거리가 되지 않는 안나푸르나호텔로 향했다. 타멜 거리를 지나는 가깝지만 혼잡스럽고, 몸은 불편한 시간동안 나는 막 시작한 여정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보단 타멜의 거리와 얽힌 기억의 흔적을 쫒는데 여념이 없었다. 5년 전 들렀던 레스토랑이며 호텔의 위치, 그리고 마트와 서점을 더듬었다. 그를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2천만 네팔인구중에 내가 아는 2~3 명중의 한명이 우연이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까 나의 눈은 열심히 거리를 훑었다. 지난 추억에 대한 미련인지, 나는 이 거리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욕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갈수록 흐릿해 지는 기억의 확실성을 움켜지려는 집착인 것도 같았다.
이내 도착한 안나푸르나호텔은 별천지였다. 혼잡하고 지저분한 카트만두의 거리와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채 네팔의 가난과도 무관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한적하고 편안한 정원 그리고 그 속을 거니는 여유로운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도 있을까 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하고 싱그러운 카트만두의 정취에 마양 취했다. 정원을 거닐고 향기로운 아침공기를 들이쉬며 안나푸르나 여정을 같이할 길동무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제일 젊은 L이 제안한 연출 사진이 가장 멋졌다. 서로 맞댄 흐린 얼굴 넘어 무언가 뜨거운 꿈을 공모하는 짜릿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혼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지나 버스는 이내 네팔의 산하를 달렸다. 네팔리의 삶이 스민 산자락 다락밭들과 차장으로 스치는 멀리 눈덮인 봉우리가 우릴 반겼다. 들뜬 눈으로 차창을 스치는 먼 산과 네팔리의 삶이 깃든 마을을 바라봤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지나가는 소마저 나를 반겨주는 듯 정겨웠다. 카드만두 분지를 벗어나기 위한 산자락 길은 여전했지만 포장을 새로 하고 난간을 세워 훨씬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무데나 버스를 멈추고 볼일을 보게 하던 5년전과 달리 그래도 휴게소다운 휴게소가 있고 길가의 쓰레기도 훨씬 줄어들었다. 버스에서, 길가에서, 휴게소에서 마주치는 네팔리마다 특유의 여유 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여행객을 맞았다. 2015년 대지진 이후 인심이 팍팍해지고 거칠어졌다는 소문과는 달리 네팔의 표정은 5년전보다 더 밝게 다가왔다.
내 인생의 화려한 한때를 즐길 마음의 준비도 없이 포카라에 도착했다. 카트만두를 떠나자마자 포카라를 향해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내내 이번 여행의 의미를 물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곱씹었다. 굳이 바란다면 이번 여행이 내 마음의 지병인 화를 다스리는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버스를 내리며 다짐했다. ‘잊자! 쉬자! 놀자! 걷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자.’ ‘여행의 의미를 찾고, 나의 삶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피하자.’ 그냥 먹고 걷고 쉬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고자 다짐하며 나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버스정류장엔 우리의 가이드 라마가 차량과 직원을 대동하고 마중 나와 있었다. 전화와 카톡으로 연락만 주고받다가 처음 마주하고 보니 상상했던 인상보다 훨씬 강직해보였고 보스 기질의 사업가 기풍이었다. 서둘러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리 짐은 라마가 준비한 차로 옮겨졌고 예약했던 호텔이 문제가 있다며 막 새로 들어선 다른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 정식 개업도 안한 것 같은 새 호텔에 짐을 풀고 나자 우리는 새장에서 해방된 새들처럼 포카라 리버사이드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안나푸르나를 걷는 모든 여행자들의 발길이 머물고 오래전 전세계 히피들이 모여들었다는 리버사이드 거리를 내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울릉거렸다. 9명의 일행은 뒷골목의 골목대장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리버사이드 거리를 휩쓸며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다가 해직녁이 다되어서야 페와호수가로 몰려갔다.
페와호수는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고 물가를 거닐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 속에 나도 한 부분이고 싶어 선뜻 흥정을 하고 두 대의 배에 나누어 올랐다. 배는 호수가운데 떠 있는 작은 사원이자 섬인 ‘바라히 힌두사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배에 오르자 모두 물 만난 고기마냥 자유를 얻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을 잊고 노래를 시작했다. 잊혀진 80년대의 색 바랜 민중가요가 페와호수에 번져나갔다. 물살 때문인지 우리 노래의 울림 때문인지 물에 비친 안나푸르나 연봉이 흔들렸다.
도착한 바라히사원은 임신을 원하는 사람이 참배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풍문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일행은 더 이상 자식을 얻을 연배가 하나도 없으니 다들 무슨 소원들을 빌었는지 모르겠다. 안나푸르나 연봉이 비친 페와호수가 석양이 물들 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나는 빌었다. 안전한 산행과 즐거운 동행을, 그리고 우리 딸의 행운과 건강을, 우리부부의 사랑과 건강을, 어머니의 건강과 장수를 그리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소원을 빌다보니 나는 여전히 바라는 게 너무 많고 버리지 못하고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많은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페와호수와 리버사이드 거리가 어둠에 물들자 우리는 민속공연과 모닥불이 있는 부메랑식당으로 몰려갔다. 여정을 같이할 가이드 라마님도 동석해서 일정과 비용을 조율하고, 맛있는 스테이크와 맥주를 정겨운 친구들과 나누니 가는 밤이 아쉬웠다. 포카라의 밤이 깊으니 곧 만나게 될 산들이 그리워졌다. 내일 여정이 우리를 부메랑에 모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미치게하던 봄밤의 기운을 느끼며 리버사이드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산행을 위한 짐을 다시 한번 챙기고 침대에 몸을 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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